07洪益參考資料

이름없는 풀뿌리 2015. 8. 7. 14:31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49 : 종이,화약,나침반,바지,포크의 역사]

 

 

1. 종이의 역사

 

종이는 AD 105년 중국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 발명하였다. 그 이전에는 사람이 무엇을 기록하는 재료로서 돌·금속·찰흙 외에 동물의 가죽이나 뼈, 나무껍질·나무·대나무 등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위하여 쓰인 재료들 중에서 오늘날 종이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였다. 고대 이집트 사람은 나일강변에 야생하는 파피루스라는 갈대와 비슷한 식물을 저며서 서로 이어 기록하는 재료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파피루스는 지금도 나일강변에 많이 야생하는데, 키가 2~3m 이상이며 굵기는 둘레가 10cm 정도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이 줄기를 얇게 저며서 가로·세로로 맞추어 놓고 끈기가 있는 액체를 발라서 강하게 압착시킨 후, 잘 건조시켜 기록하는 재료로 사용하였다. 이 방법이 고안된 것은 BC 2500년경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파피루스는 기록하는 재료로서 당시 다른 어떤 것보다 편리하였으므로 중국의 제지술이 유럽에 전하여진 8세기경까지 지중해 연안에서 소아시아에 걸쳐 널리 보급되었다. 현재 영어 paper를 비롯하여 유럽 나라들의 ‘종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파피루스에 연유한다. 이 때문에 파피루스를 종이의 기원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엄밀한 의미의 종이라고 규정짓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의 파피루스는 식물을 활용하여 기록하는 재료를 제조하는 기술로는 매우 우수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뛰어난 기술을 발명하고도, 더 나아가 종이를 초조(抄造)하는 방법까지 발전시키지 못하였던 것은, 당시에 풍부한 노예의 노동력이 있었으므로 기록하는 재료를 다량으로 손쉽고 값싸게 구할 수 있어 기술개발이 필요하지 않았던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간(簡)과 독(牘)을 많이 사용하였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붓이 발명되면서부터 비단이 함께 사용되었다. 또 BC 10년경 전한(前漢)에서는 여자들이 풀솜의 찌꺼기를 늘려서 만든 것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전한에서 사용하였던 간은 대나무, 독은 나무의 조각을 잘 다듬어서 표면에 나무즙으로 필요한 것을 기록하여, 그 조각들을 가죽이나 마끈으로 연결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서적·공문서·편지 등을 만들거나 읽을 때의 번잡성이 어떠했는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1) 발명
세계에서 처음으로 종이를 발명한 사람은 중국인이다. AD 105년 후한의 채륜이 나무껍질·마·넝마·헌 어망 등을 원료로 하여 종이를 초조하는 방법을 발명하여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당시 궁중의 용도(用度) 관계 장관과 수공업 분야의 주임직을 겸하고 있었다. 채륜이 발명한 제지술은 나무껍질(꾸지나무의 섬유라고 분석되었다)·마설(헌 어망이라고 분석되었다)·넝마(비단·마의 직물류로 분석되었다) 등을 돌 절구통에 짓이겨 물을 이용하여 종이를 초조하는 원리였는데, 이것은 현대의 초지법(抄紙法)과 같다. 당시는 역사적으로 한(漢)나라가 재건된 후 5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통일왕조로서 기초가 다져진 때였으므로, 정치적·문화적 필요에 따라 기록을 위한 재료가 많이 쓰이고 있었다. 궁중에서 채륜의 업무가 바로 수공품을 원활히 조달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비능률적인 재래방법에 대하여 연구를 거듭하였으며, 그 결과 제지술을 발명하였다.

그러나 중국에는 그 이전부터 풀솜 찌꺼기를 이용하여 기록하는 재료를 제조하는 기술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채륜은 기술의 발명자라기보다는 완성자 또는 개량자라고 할 수 있다(근래에 채륜 이전의 종이라고 볼 수 있는 재료가 발굴되어, 그를 제지술의 발명자라는 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어떻든 그의 설계와 지도에 의하여 만들어낸 종이는 당시 황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기에 충분했다. 원료는 거의 폐물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값이 싸고, 많은 양을 일시에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사용하거나 휴대하는 데에 기존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종이를 ‘채후지(蔡侯紙)’라고 불러서 채륜의 공을 찬양하였으며, 그때까지 대신 사용되던 비단과 구별하기 시작하였다.

2) 중국
채륜의 제지술은 빠른 속도로 중국에 전파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술개량이 점차 이루어졌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재료의 종류도 다양해짐과 동시에 생산량의 증가와 지질의 향상을 가져왔다. 따라서, 3세기 말에서 4세기에 걸쳐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기록의 재료로 사용되던 것들 중에 비단 등 특수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당시의 종이는 아직 유치하였기 때문에 질이 변하거나 벌레가 생겨 기록에 사용할 재료로서 충분한 질적 수준을 갖지 못한 것이었다. 6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는데, 종이의 제조시에 원료에 나무진[樹液]을 첨가하면 색이 나타나지만 벌레가 해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 색은 나무진의 종류에 따라서 달리 나타나므로 이때부터 여러 가지 색종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당(唐)나라 때인 7세기경에 들어서면서부터 개량된 물감을 사용한 본격적인 색종이의 생산이 시작되였으며, 금박을 뿌린 것까지 나타났다.

8∼9세기에 걸쳐 당나라 시인들은 종이에 시나 글을 써서 여러 장을 합쳐 책을 만들었다. 이러한 문화의 발전은 종이의 용도를 더욱 넓혔고, 종이의 생산을 자극하였다. 당나라 시인들이 만든 책은 7세기 말경까지만 해도 같은 크기의 종이를 연결시켜 두루마리로 만드는 식이 고작이었다. 그 내용도 처음에는 시인들 자신이 쓰다가 뒤에는 서사(書寫)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맡아서 썼지만 한꺼번에 많은 양의 기록을 해낼 수는 없었다. 여기서 인쇄술이 발명되었다. 인쇄술의 발명은 초지법과 함께 중국인이 세계에서 최초로 해낸 것이었다. 7세기 말경부터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반대로 새겨 먹을 칠해서 종이 위에 찍어내는 방법이 고안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목판인쇄술이다. 이 기초적인 방법은 점점 발달되어 당나라 후기(9세기)에는 이것을 이용하여 시집·역서(曆書)·자전(字典)·종교서 등이 출판되었다. 이에 따라 종이의 수요는 크게 증대되었으며, 수리조건(水利條件)이 좋은 곳에는 제지수공업이 발달하였고, 이와 함께 목판인쇄도 번성하였다.

10세기 후반의 5대 10국(五代十國) 무렵에는 인쇄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많은 종류의 서적이 발간되었으며, 제지술도 먹이 번지지 않게 하는 가공 기술까지 터득하였다. 송(宋)나라 때(10~13세기)에는 인쇄술과 제지술이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허난성[河南省]의 카이펑[開封], 저장성[浙江省]의 항저우[杭州] , 쓰촨성[四川省]의 메이산현[眉山懸], 푸젠성[福建省]의 젠닝[建寧] 등은 목판인쇄의 중심지였으며, 역시 제지수공업이 발달된 지역이었다. 그 중에 제지수공업이 제일 발달한 곳은 젠닝이었다. 역사서나 의학서가 많이 발간되었으며, 대도시에는 서점까지 설치되어 서적의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렵 번성했던 목판인쇄는 직접 쓰는 것보다는 빠르지만 판목(版木)을 한 장씩 새기는 시간과 수공이 많이 들고, 한번 사용한 판은 내용이 다른 책의 인쇄에는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해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이 발명되었다. 송나라 경력연간(慶曆年間:1041~48)에 필승(畢昇)이 찰흙을 아교로 굳혀 글자 한 자씩을 따로따로 새겨 놓은 다음 철판 위에 글의 순서대로 배열해 놓고 먹을 칠해서 종이를 대고 찍어내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이 진흙에 새긴 글자들은 한 자씩 따로 분리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내용의 글을 인쇄하기 위하여서는 몇 번이고 인쇄가 끝난 글자들을 모아 철판 위에 다시 배열하면 되므로 다시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방법은 원(元)나라 때(13~14세기)에 와서 왕정(王楨)에 의하여 진흙 대신 목재를 쓰는 기술로 발달하였다. 왕정은 또 자유롭게 회전하는 둥근 모양의 식자반을 만들어 문선을 손쉽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인쇄술은 거듭 발전하여 왔지만 1340년 목판에 의한 색인쇄술이 개발되고 나서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또한 제지술도 송대에 이르러 고급 종이에 인물이나 꽃 모양을 인쇄한 비실용적인 납전(蠟箋)이 당시의 일부 상류계급에서 귀하게 다루어졌을 뿐, 괄목할 만한 발전이 없이 정체하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인에 의하여 발명·개발·완성된 제지술은 8세기에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져 발달을 거듭하였다.

3) 유럽
채륜이 완성한 최초의 초지법이 유럽에 전래된 것은 8세기 중엽이었다. 이때 중국의 당나라는 종이의 생산술과 이용법을 전국에 보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방으로 종이의 수출까지 하고 있었다. 이 당나라와 나란히 사라센 제국이 서방에 있었으며, 이 거대한 두 나라 사이에 한 작은 나라가 있었다. 당나라 현종(玄宗)은 이 나라를 정복하기 위하여 751년에 정벌군을 일으켰으며, 사라센 제국 역시 군대를 일으켜 맞서 싸우게 되었다. 결전은 투르키스탄 지방의 탈라스강 근처에서 벌어졌는데, 이 싸움에서 당나라군은 크게 패퇴하였다. 이 싸움을 ‘탈라스강 전투’라고 하는데 유럽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사라센의 기록에 의하면, 많은 포로 중에 제지기술공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아라비아인들에게 제지술을 전파하였다.

처음으로 제지공장이 세워진 곳은 757년 지금의 우즈베크공화국의 사마르칸트였다. 당시의 아라비아 지방에서는 기록의 재료로서 주로 양피(羊皮)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이집트의 파피루스나 중국에서 수입된 종이가 조금씩 함께 사용되고 있었다. 제지공장의 건설로 인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던 귀하고 값비싼 종이가 아라비아에서 직접 생산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마르칸트에서 최초로 종이가 생산되자 ‘사마르칸트 종이’라고 불렀으며, 양피나 파피루스를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사마르칸트에서 제조된 종이의 원료로는 아마를 많이 사용하였고, 다른 초목의 섬유도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보조적으로 넝마 등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95년에는 페르시아의 바그다드에 제지공장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사마르칸트 종이가 명성을 얻게 되자, 이에 대항하여 페르시아의 왕이 중국에서 직접 제지공을 초청하여 세운 것이다. 그 뒤에 다마스쿠스에도 제지공장이 세워졌다.

900년에는 이집트에, 11세기에는 아프리카의 북부와 지중해 연안에까지 제지술이 전해졌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초지법에 의한 종이의 제조가 이루어진 것은 에스파냐에서였다. 1150년 당시 에스파냐를 점령하고 있던 무어인(人)이 하디바·트레드·바렌샤 지방에 최초의 제지공장을 만들었다. 따라서, 유럽에 제지술을 전파한 것은 무어인이라고 할 수 있다. 1189년에는 프랑스의 에로에 에스파냐의 도움으로 제지공장이 세워졌는데, 이 공장은 그 무렵의 공장으로는 규모와 생산량이 다른 공장에 비하여 거대한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 제지공장을 근간으로 하여, 그 후 중세 최대의 제지공업국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에스파냐의 제지공업은 그곳에 제지술을 전파한 무어인의 세력이 물러남과 함께 쇠퇴하였다. 프랑스가 에스파냐의 도움을 받아 제지공업이 융성한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더욱이 프랑스가 에로에 세운 제지공장의 한 근로자는 기계에 의한 초지법을 발명하여, 근대 제지공업의 서장(序章)을 열 수 있게까지 되었다. 이탈리아에 최초의 제지공장이 생긴 것은 1276년이라고 하는데, 이 공장의 제품은 품질이 매우 훌륭하였으며 이미 종이에 문양을 넣는 기술까지 개발되었다. 1293년에 이 공장에서 문양을 넣어 제조한 종이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독일에는 1336년 뉘른베르크에 처음으로 제지공장이 세워졌고, 영국에는 1498년에 제지공장이 세워졌으며, 미국에는 1690년에 네덜란드인에 의하여 제지공장이 설립되었다. 네덜란드의 제지공업이 시작된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1750년에 제지공정의 대개혁을 가져왔던 네덜란드식 제지기가 출현함으로써 질이 좋은 종이의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에 영국의 J.와트만이 더욱 발전시켜, 1770년에는 고급 도화용지인 ‘와트만지(Whatman paper)’ 제조에 성공하였다. 중국에서 발명되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전해진 제지술은 15세기경에 이르러서 기술적으로 크게 개량되어 완정부분까지 훌륭하게 처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수초법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규모도 커져서, 중국에서 전파가 시작된 당시와는 전혀 형태를 달리하고 있었다.

15세기 이후 유럽의 제지공업이 급속도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활자인쇄의 발명과 그것의 보급에 힘입은 것이었다. 유럽에서 활자인쇄가 발명된 것은 1445년경이라고 한다. 이 기술은 급속히 유럽 전역에 퍼져 1500년에는 각국에 생긴 인쇄소가 200개소 이상에 이르고 많은 서적이 출판되었다. 당시의 인쇄소는 출판사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자연히 종이의 수요도 함께 증가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출판물은 종교서적이 중심이었으며 가격 또한 고가여서, 귀족·수도사 계급 외에는 수요의 범위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15세기 말경부터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이 출판되고, 점차로 그 종류가 증가됨에 따라 종교정치에 대한 비판에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 또 16세기의 독일에서는 출판물에 의한 프로테스탄트사상의 전파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종이의 용도가 단지 서적출판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기록을 위한 재료로서 매우 광범위하였다. 그런데 인쇄술은 발명된 초기에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으나 곧 정체되고 말았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사상에 놀란 왕조와 가톨릭교회가 인쇄·출판에 강력한 압박을 가하였고, 인쇄업자들이 카르텔을 결성함으로써 스스로의 발전을 저해하였던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출판된 서적이 고전과 종교서적뿐이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널리 읽히지 못했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1798년 석판인쇄술이 발명되어 그림과 빛깔을 곁들인 인쇄술이 개발된 후에야 비로소 일반 대중에게 인쇄물이 보급될 수 있었으며, 이에 자극을 받아 기술의 진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813년에는 증기기관에 의한 최초의 동력인쇄기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산업혁명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에 따라서 인쇄술도 오랜 세월의 정체에서 깨어나 기계화를 추진할 수 있는 토대가 이룩되었다. 인쇄술이 발명되었을 때에는 1시간에 20장 정도의 인쇄가 고작이었는데, 동력인쇄기는 1시간에 1,000장 이상의 인쇄능력을 가졌다. 이 무렵에는 이미 기계에 의한 초조법도 발명되어 있었으나, 증대하는 신문·잡지·서적 등의 발행부수에 비하여 종이의 생산은 질적·양적으로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인쇄술의 발전에 따른 종이의 수요에 대비하기 위하여 제지술도 발전하였는데, 특히 1871년에 윤전기가 발명되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4) 기계제지법과 펄프의 발명
1798년 프랑스의 에로 제지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L.로베르는 종이를 초조하는 기계를 발명하였다. 그 무렵의 프랑스는 혁명이 진행중이어서 국내에서는 발명한 기계의 제작이 불가능하여 로베르는 공장주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영국인 푸어드리니어 형제와 B.동킨의 협력을 받아 획기적인 대발명을 완수할 수 있었으며, 또 실용화하였다. 로베르의 초지기는 현대의 초지기와 비교할 때 규모나 운전속도만이 떨어질 뿐이었다. 그는 근대 제지술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큰 업적을 남겼으나 풍족한 생활은 할 수 없었으며, 말년에는 프랑스의 한 시골학교에서 쓸쓸하게 일생을 마쳤다. 로베르의 발명에 따른 초지기는 장망식(長網式)이라고 하며, 주로 인쇄용지의 제조에 사용되었다. 그 뒤 기계의 개량을 위한 많은 노력이 경주되었으며, 영국의 디킨슨이 환망식(丸網式) 초지기를 발명하여 두꺼운 종이를 기계로 초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을 완성하고 실용화하기 위하여 1809년부터 20년이나 소모하였지만, 이로써 기계제지법은 한층 발전한 것이다.

그 무렵의 유럽사회는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 자본주의의 확립기였으며, 중산계급이 대두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신문·서적·잡지 등을 발간하는 데뿐만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종이의 수요가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와 나란히 제지술과 인쇄술도 기계화되어 날로 발전하고 있었으나 종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원료의 조달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때까지 원료로 사용되던 마·목면·넝마 등의 공급에는 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원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 결과 1840년에 목재섬유를 종이의 원료로 사용하는 방법이 발명되었다. 독일인 F.G.켈러는 동력으로 나무를 부수어 대량으로 섬유를 제조하는 기계를 발명하였다. 이 발명으로 제지공업이 근대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이 열렸다. 이 쇄목펄프 제조법은 1852년에 영국의 H.바제스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실용단계에 들어간 것은 1860년 독일인 H.펠터가 켈러의 방법을 발전시킨 후부터이다.

쇄목펄프법에 의한 본격적인 생산은 다시 그것보다 늦어져 1865년에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 공장이 건설되고부터였다. 미국에서 쇄목펄프 공장이 건설된 것은 1870년이었다. 쇄목펄프법의 발명보다 늦은 1851년에 영국의 Ch.와트와 바제스는 공동노력으로 소다펄프법을 발명하고 이것을 공업화하였다. 이 소다법은 화학펄프 가운데 가장 먼저 발명되어 공업화되었으며, 목재섬유로 고급 지류를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아황산(이산화황)법에 의한 목재펄프 제조법은 미국의 B.C.딜만이 1867년에 발명하였다. 이 방법에 따른 최초의 공장이 1874년 스웨덴의 C.D.에크만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그 뒤 1884년에 황산법에 따른 크라프트 펄프가 노르웨이의 C.F.달에 의하여 발명되었으며, 1907년에는 최초의 크라프트펄프 공장이 캐나다에 건설되었다. 이 크라프트펄프법은 1909년 미국에서 기업화되었다.

5) 한국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제지술이 도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600년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1,000년 정도 앞선 낙랑(樂浪)의 옛 분묘에서 발굴된 옻칠을 한 관 속에서 닥종이를 물로 뭉친 것 같은 물질이 발견됨으로써 중국에서 제지술을 도입하기 이전부터 한국 특유의 제지술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625년경에 일본에 제지술을 전파한 것만은 확실하다. 삼국시대에 제지업이 크게 번성하였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에 대한 근거는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고분은 구조상의 결함으로 인하여 섬유질의 보존이 불가능했으며, 따라서 종이와 흡사한 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에서 신라시대에 제조된 범한다라니경(梵漢陀羅尼經) 한 장이 현존하는데, 이것이 한국에서 생산된 종이로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지소(紙所)라는 관영 제지공장이 있어서, 중국에 공물하는 종이를 생산하였으며, 1420년(세종 2)에는 서울 장의사동(壯義寺洞:지금의 세검정 부근)에 관영으로 조지소(造紙所:나중에 造紙署로 개칭)를 설치하고, 표전지(表箋紙)·자문지(咨文紙) 등의 문서용지를 비롯해서, 저화(楮貨)라는 돈을 만들기 위한 화폐용지 그 밖에 고정지(藁精紙)·왜지(倭紙)·유목지(柳木紙)·의이지(薏苡紙)·유엽지(榴葉紙) 등을 제조하여 국내에서 썼으며, 특수한 것은 공물 또는 수출용으로 사용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종이 발명 이전의 인류는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사물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왔다. 그 중 현재에 남겨져 있는 종이 발명 이전에 사용되었던 기록의 수단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돌판(石板), 점토판(粘土板), 동물뼈, 나무조각(木簡), 대나무조각(竹簡)
▷다라수(多羅樹)잎 : 스리랑카의 졸려과 활엽수인 다라수 잎에 문자기록
▷사직물(薩織物), 사면지(薩綿紙) : 누에고치에서 추출한 분비물로 만든 천(비단)이나, 실
찌꺼기로 만든 종이
▷파피루스(Papirus) : B.C 3000년경 부터 이집트 나일강변에 자생하는 수초속 골풀의 일종
인 파피루스의 수조직을 얇게 잘라 접합시켜 만든 것으로 현재의 방법과는 무관하다.
▷양피(羊皮, Parchment, Pergamena) : B.C600경 사용 , 이후Fabriano의 Rag+아교로 된 종
이로 대체*숫양피(Vellum), 송아지 피지(Valum)
▷다파(Tapa) : 인피질의 나무껍질을 둗ㅡ리고 씻어서 판상으로 만든 것.

 

 

 

인쇄술 발달사 

 

제지술의 발명과 전파

종이는 중국 후한의 채륜이 서기 105년에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34년 중국의 누란 유적에서 기원전에 사용되던 종이가 발굴됨으로써 종이의 기원이 훨씬 오래전임을 알게 해주었다. 당시의 종이는 오늘날과 같은 나무펄프가 아니라 삼 섬유로 만든 마지였으며 글을 쓰는 용도가 아닌 귀중품의 포장재로 쓰였다. 채륜의 종이는 기존의 종이보다 얇고 대량 제조가 가능했지만 종이가 다른 서사재료를 대체한 것은 3~4세기가 되어서였다. 당시의 서사재료로 대나무가 많이 쓰였는데 무겁고 부피도 커서 불편했다. 종이의 실용화는 서적의 유통량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중국의 종이가 서양으로 전파된 것은 이슬람제국에 의해서였다. 당시 중국의 당제국과 이슬람제국은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탈라스강에서 충돌했는데 (서기 751년) 이전투에서 당이 패배하였고 이때 이슬람군에 잡혀간 중국인 포로들중에 있던 제지기술자에 의해 이슬람제국에 종이가 전파되었고 유럽은 이슬람제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통해서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중국의 인쇄술

중국의 인쇄술은 조판인쇄에서 활판인쇄로 발전하였다. 조판인쇄는 당시대의 중기에 발명되어 주로 불경, 유가경전, 역법등의 서적인쇄에 사용되었으나 조판의 글자들이 고정되어있어 효율적이지 못했다. 북송시대에 필승이란 사람이 활자판 인쇄를 발명하였는데 초기의 활자판 인쇄는 점토로 만들어 구운 형태였다. 자판을 분해할 수 있어 글자의 배열과 조합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특성으로 서적의 출판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 원대에 오면 왕정이란 사람이 나무활자를 개발하였고 명,청시대에 이르러 주석, 구리, 납등을 재료로 하는 금속활자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인쇄술은 주변국가들과 아랍, 유럽에 전파되었다.

 

한국의 인쇄술

다라니경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인쇄술을 사용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목판인쇄로 속장경, 초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였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를 발명하였다. 이 금속활자로 간행된 직지심체요절(1377년)은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해 지금까지도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조에 이천이 조선초기에 사용하던 계미자를 개량한 갑인자라는 우수한 금속활자를 개발하였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구텐베르크(1400~1468)는 마인쯔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436년에 인쇄업을 시작하여 여러 실험을 거쳐 1440년에는 목활자를 1450년경에는 금속활자를 발명하였고 금은 세공사인 J. 푸스트와 함께 마인쯔에 인쇄공장을 세웠다. 초기에는 면죄부 등을 인쇄하였고 나중에는 <36행 성서>, <42행 성서>를 인쇄했다. 한 번 파산을 한 후 후메리의 원조로 인쇄공장을 재건한 구텐베르크는 1460년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한다. 나사우의 왕 아돌프의 약탈로 공장이 파괴되었지만 그 후로 인쇄술이 남독일을 거쳐 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구텐베르크는 분리가능한 형태의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이것은 글자를 구리틀위에 놓고 각인하여 주형을 만들어 활자들을 주조해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고대 이래로 사용되던 포도주 압착기에서 착안하여 나사에 의한 가압기구형식인 인쇄기계를 개발하였다. 그리고 램프 그을음과 아마씨 기름을 혼합한 인쇄용 잉크도 만들었고 인쇄재료로 경제적인 종이를 사용했다.
 

인쇄술 발명이 유럽에 끼친 영향

인쇄술의 발명으로 도서의 대량생산과 유통이 가능해졌다. 그로인해 누구나 손쉽게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정보의 원활한 유통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대량으로 출판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을 통해 각종 정보를 접하게 됨으로써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정신이 싹트기 시작했다.(다양한 사고체계 형성). 인쇄술로 인해 지도와 탐험 기록이 보완되고 보존됨으로써 지리상의 발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접하기 어려웠던 각종 지식정보들을 수집하여 이용하고 이를 보전할 수 있게 되어 당시의 과학의 진보에도 영향을 주었다.

 

구텐베르크 발명이후 유럽의 인쇄술 발전과정 약사

1476년 영국의 칵스턴이 웨스트 민스터에 인쇄기 설치.
1477년 영국 최초의 서적이 출판.
1499년 유럽의 약 250여개의 도시에 인쇄소 설립, 운영.
1518년 로마체가 고딕체를 대체.
1572년 존 데이가 로마체를 영국에 소개.
1584년 켐브리지대학 인쇄업(출판) 착수.
1587년 옥스퍼드대학 인쇄업(출판) 착수.

 

인쇄기술의 진보

초기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나사에 의한 가압기구로 구성되어 있었고 목제였다. 19세기초에 영국의 귀족인 스탠호프는 나사 막대를 대체할 레버장치가 있는 철제 인쇄기를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약한 힘으로 강한 회전력을 얻을 수 있고 인쇄의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1884년에 개발된 라이노타이프는 미국의 메르겐탈러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1줄분이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활판을 주조해 식자하는 기계였다. 먼저 원고를 타이프라이터로 치면 기계속에 있는 활자의 주형이 나와 배열되고 1줄분의 주형이 모이면 이것을 주조를 담당하는 장치로 보내 그곳에서 주형에 합금이 부어져 1줄분의 활자가 주조된다. 주형이 끝나면 주형은 원위치로 돌아간다. 주조능력은 매시간 15,000~18,000자를 주식할 수 있으며 텔레타이프세터에 의한 무인주식도 가능하다. 라이노타이프는 신문, 잡지의 조판에 많이 사용되었고 현재는 전산식자로 인해 쇠퇴하고 있다.

그 후로 현재까지 사용되는 인쇄기의 대부분은 윤전식 인쇄기로 이것은 판통과 압통이 전부 실린더로 되어 있으며 판통에 인쇄판을 환형으로 감아붙이고 판통과 압통사이로 낱장종이나 두루마리종이를 통과시켜 균일한 압력으로 인쇄하는 방식이다. 신문윤전기, 서적윤전기, 오프셋윤전기 등의 종류가 있다. 그리고 현대에는 각분야에서 컴퓨터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인쇄기술에도 컴퓨터의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인쇄술의 의미,
인쇄술의 발명으로 도서의 대량생산과 유통이 가능해졌다. 그로인해 누구나 손쉽게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정보의 원활한 유통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대량으로 출판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을 통해 각종 정보를 접하게 됨으로써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정신이 싹트기 시작했다.(다양한 사고체계 형성). 인쇄술로 인해 지도와 탐험 기록이 보완되고 보존됨으로써 지리상의 발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접하기 어려웠던 각종 지식정보들을 수집하여 이용하고 이를 보전할 수 있게 되어 당시의 과학의 진보에도 영향을 주었다.

인쇄술의 발달
중국의 인쇄술은 조판인쇄에서 활판인쇄로 발전하였다. 조판인쇄는 당시대의 중기에 발명되어 주로 불경, 유가경전, 역법등의 서적인쇄에 사용되었으나 조판의 글자들이 고정되어있어 효율적이지 못했다. 북송시대에 필승이란 사람이 활자판 인쇄를 발명하였는데 초기의 활자판 인쇄는 점토로 만들어 구운 형태였다. 자판을 분해할 수 있어 글자의 배열과 조합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특성으로 서적의 출판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 원대에 오면 왕정이란 사람이 나무활자를 개발하였고 명,청시대에 이르러 주석, 구리, 납등을 재료로 하는 금속활자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인쇄술은 주변국가들과 아랍, 유럽에 전파되었다.

한국의 인쇄술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인쇄술을 사용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목판인쇄로 속장경, 초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였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를 발명하였다. 이 금속활자로 간행된 직지심체요절(1377년)은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해 지금까지도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조에 이천이 조선초기에 사용하던 계미자를 개량한 갑인자라는 우수한 금속활자를 개발하였다. 인쇄술의 기원(세계사) ....인쇄술의 기원은 중국의 한나라시대로 부터 기원한다 또한 한족(漢族)은 지남철과 화약을 발명 세계문명을 한단계 끌어 올렸다. 세계최초로 중국(북송) 에 필승이라는 평민발명가에 의해 활자 인쇄술이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다. 이발명 이전에는 인쇄를 하기위해서는 원판에 글자를 일일이 세겨야 하였으며 이관련 내용으로의 한계를 보이게 하였다. 이를 불편하게 생각한 중국(북송시대) 필승이라는 사람이 활자를 발명 중국내 인쇄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되었다. 이웃국가로 전해졌고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거쳐 세계속으로 퍼져나갔다. 사실 우리나라는 세계 인쇄문화의 원조이라고 합니다.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 ‘다라니경’과 금속활자 인쇄본 서적 ‘직지심체요절’(1377년)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지요. 늦어도 13세기에 시작된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조선시대인 15세기 전반 ‘경자자’와 ‘갑인자’(1434년)의 완성으로 절정에 달했다. 유교 경전과 역사서 등 수많은 서적들을 인쇄한 갑인자만 해도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보다 20년 정도 앞선 것이었다고 하네요.

 

인쇄(印刷, printing)
보통 문자나 그림을 기계적·화학적 방법으로 종이, 천, 기타 물체의 표면에 복제하는 일. 인쇄란 판 위에 잉크를 묻혀 압력을 가해 복제하는 일을 의미했으나, 최근에는 이러한 본래의 개념에서 벗어나 잉크와 압력을 사용하지 않고 인쇄하는 방법도 포함한다. 인쇄술은 정보의 저장과 전달에 크게 이바지해왔으며, 대발견시대의 산물인 동시에 근대사회를 여는 데 앞장서왔다. 초기의 인쇄술은 한국 등의 동북아시아에서 먼저 개척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알파벳이 중국의 한자보다 활자화하는 데 용이해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이 인쇄술 분야에서 동북아시아를 앞서게 되었다. 인쇄술은 지식의 성장속도와 축적도를 가속화시켜 19세기 산업혁명과 20세기 과학기술혁명으로 절정을 이루었으며 사상전파를 촉진시켜 사회의 질적 향상을 도모했다. 지난 5세기 동안 정보매체로서 부동의 위치를 지켜오던 인쇄가 텔레비전, 필름, 자기 테이프 등의 등장으로 그 영역을 일부 잠식당하고 있지만, 직물·벽지·포장지 등의 형태로 무한한 효용을 가질 뿐만 아니라 정보해독에 기계장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고유의 특징으로 인해 앞으로 계속 발전할 것이다.

인쇄술의 기원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 때부터 그림을 통해 의사전달을 시도해 왔다. 또한 사람의 얼굴을 뼈에 새겨 나타낸 것은 6만 6,000년 전의 일이다. 그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가 뼈나 돌에 의미있는 무늬를 새겨 뜻을 나타내려고 했던 일은 구석기 유적에서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사람 얼굴을 흙으로 빚어 만들고, 토기에 생산과 관련된 내용의 무늬를 새겼다. 청동기시대에는 생동감있는 바위그림을 새겼는데, 그 중에는 숫자 개념이 내포된 것도 있다. 바위그림은 여러 사람이 대대로 이어가며 볼 수 있게 바위 벽면에 그렸으며, 사람들은 그 주위에 모여 종교의식을 갖고 조상의 뜻을 이어받는 전통을 지켜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곳에는 종교적인 글이나 주술들을 쉽게 찾아볼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서로 나누어 가지려는 데에서 인쇄술의 필요성이 나타났다. 기름종이에 그린 부처상의 선을 따라 바늘로 구멍을 뚫고, 그 기름종이를 다른 흰 종이 위에 올려놓고 먹으로 밀어내면 그림이 인쇄되어 나타난다. 또 글자를 새겨 도장을 만들고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으면 인쇄와 같은 효과를 냈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쇄술이 발명되었다. 2세기말 이미 중국에는 종이, 먹물, 표면에 양각으로 글을 새긴 판 등 인쇄에 필요한 3가지 요소가 개발되었다. 6세기부터 목판을 사용했는데, 이 방법은 종이에 글을 쓰고 이를 뒤집어 나무에 붙인 뒤 종이의 먹물이 없는 부분을 파내는 것이다. 이를 인쇄하기 위해서는 목판에 먹물을 칠한 뒤 종이를 덮어 솔로 문지른다. 가장 오래된 출판물들은 이 방법에 의해 제작되었다.

활자의 발명(11세기)
최초의 활자는 1041~48년경 중국의 필승(畢昇)이 점토와 아교를 섞은 뒤 구워 만든 것으로 보이며, 1313년 왕정(王禎)이 목활자 6만 자를 새겨 기술사에 관한 책을 출판했으나, 그후 기술혁신은 계속되지 못했다.

종이의 유럽 전파(12세기)
종이는 105년 중국 후한(後漢)의 채윤(蔡倫)이 발명했으며, 중앙 아시아를 경유해 아라비아의 국가들에게 알려진 뒤 아라비아와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751년 사마르칸트 근처에서 발생했던 탈라스 전투에서 중국인 포로들에 의해 제지술이 아라비아에 전해졌고, 8~13세기 제지공장이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에 세워졌다. 13세기 중반 원정에서 돌아온 십자군과 동방상인들이 제지술을 유럽에 재전파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인쇄술 면에서는 아랍인들이 종교적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아 유럽으로는 전파되지 못했다.


 

 

2. 화약의 역사

 

화약류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어 중국·인도에서는 일찍부터 사용되었으며, 그 제조법이 동서양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275년 J.아프리카누스질산칼륨과 황의 혼합물에 관한 기재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667년에는 칼리니코스가 그리스의 불(황·로진·생석회·석유의 혼합합물)을 발명하였으며, 이것을 발전시켜서 1313년에 슈바르츠흑색화약을 발명하였는데, 그 후 화약은 흑색화약이 유일한 것이 되었다. 1786년에는 C.L.베르톨레가 흑색화약에 염소산칼륨을 사용하는 방법을 발명하였는데(베르톨레 화약), 이것이 최초의 폭굉물질의 발견이었다. 그 후 화학이 발달함에 따라 뇌홍(1800)·니트로셀룰로오스(1838)·강면화약(1845) 등의 화약류가 발명되었다. 1847년에는 A.소브레로니트로글리세린을 발견하였으나 취급하기가 위험했기 때문에 실용화되지는 못하였다. 1866년에 A.노벨은 이것을 규조토에 흡수시켜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다이너마이트라고 명명하였다. 1878년에는 니트로글리세린을 니트로셀룰로오스로 젤라틴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현재의 다이너마이트의 기초이다.

그 후 흑색화약은 오랫동안 지켜오던 화약의 왕좌를 다이너마이트에 넘겨주었다. 또 이 무렵 노벨 등에 의해서 B화약(84), 발리스타이트(1888), 코다이트(1889) 등 일련의 무연화약이 제조되어 총포용 발사약으로 사용되었으며, 이것들이 그 후의 발사약의 기초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트리니트로톨루엔(1904)·피크르산·트리메틸렌트리니트라민이 작약으로서 전쟁에 등장하였다. 근래에는 로켓 추진제용의 고성능인 특수화약 등 많은 새로운 화약이 제조되고 있다. 이상에서 말한 것 외에 화약류를 사용한 제품으로서는 연화(발광제 제품(조명탄·색광제 제품)·발연통()·성냥 등이 있으며, 화약류 및 이들 여러 제품을 제조하는 공업을 화약공업이라고 한다. 화약공업은 유기합성공업의 한 부문이며, 원료면에서는 특히 방향족화합물을 많이 사용하는 등의 이유에서 염료공업·의약품공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원료·중간물질 등의 상호교환도 이루어지며, 또 질산을 필요로 하므로 암모니아 합성공업과도 관련이 있다. 화약류의 제조 및 양도·운반·보관·저장·소비·폐기 등 취급 전반에 관해서는 1981년에 제정된 총포·도검·화약류 단속법에 의해서 엄격히 규정되어 있으며, 화약류를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은 유자격자에 한하고 있다.

 

 

1) 중국의화약

 

- 불로장생약과 화약

인류 최초의 화약은 황, 초석, 목탄 등을 배합한 흑색 화약과 매우 비슷한 조성물이었다. 화약의 발상지나 발명 과정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론이 있지만 대체로 중국의 연단술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고 있다. 원래 연단술은 서구의 연금술과는 별개로 중국의 도교 사상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안의 하나로 발전했다. 연단술에서는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을 불로장생의 약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특정한 방법을 사용하면 이들 귀금속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실제로 도교의 원조인 노자(BC 350년경)를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과 방사(方士·신선술을 연마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고 전해온다.

 

東西古今(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래 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은 한결같다. 천하를 손에 넣은 秦始皇(진시황)은 영화를 천년 만년 누리고 싶었다. 그래서 徐福(서복)의 건의로 童男童女(동남동녀) 3000명을 동해의 三神山(蓬萊山, 方丈山, 瀛洲山)에 보내 不老草(불로초)를 구하게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환갑도 못 넘긴 50세의 나이로 夭折(요절)하고 말았다. 그 뒤 西漢(서한)의 漢武帝(한무제)도 晩年(만년)에 神仙術(신선술)에 미혹되어 국고를 탕진했지만 그런대로 장수(70세)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비록 전설이기는 하지만 아무 것도 먹지 않은 彭祖(팽조)는 700세나 살았다니 인간의 수명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나라는 어떤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이 藏唐京(장당경)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山神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진시황과 한무제 두 제왕의 죽음으로 중국 사람들은 불로초에 대한 허망한 꿈은 버리게 되었다. 대신 國庫(국고)를 탕진할 필요 없이 매우 경제적으로, 그것도 아주 간편하게 不老長生(불로장생)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丹藥(단약)의 제조인 것이다. 중국 東漢(동한)말에 출현한 道敎(도교)는 煉丹術(연단술)에 불을 지폈다. 부적과 약물을 통한 災厄(재액) 방지와 만병통치를 구호로 내걸면서 연단술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이후 도가의 養生術(양생술)에는 아예 불로장생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지게 되었으며 晉(진)의 葛洪(갈홍)같은 이는 服藥(복약) 僻穀(벽곡) 導引(도인)과 같은 실천 방법까지 제시하게 된다.

丹藥(단약)의 재료는 놀랍게도 水銀(수은), 유황, 납, 丹砂(단사), 砒霜(비상), 초석, 운모 및 약초가 사용되었는데 그 면면을 보면 의아함을 넘어 섬뜻한 느낌마저 받게 된다. 실제로 1965년 南京 象山(상산)에서 수백 개의 단약이 발견된 적이 있다. 단약이 극성했던 동진시대의 王氏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었는데 성분 조사 결과 역시 수은이 60.9%나 되는 것으로 판명됐다. 그렇다면 단약도 기실은 夭折藥(요절약)이 아닌가. 실제로 역대 수많은 천자들이 단약을 잘못 먹고 不歸(불귀)의 客(객)이 되었다. 당나라의 경우 太宗을 비롯 무려 6명의 천자가 단약을 먹고 죽었다. 연단술이 해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산물로 화약이 발명된 것이다. 그 뒤 중국의 연단술은 아랍을 거쳐 12세기에는 유럽에 전파되어 근대 화학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초기의 연단술에 관해서는 한-위시대의 위백양(魏伯陽)이 BC 220년경에 저술한 세계 최고의 연단술서 <주역 삼동계>에서 엿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비금속에 유황이나 수은 등을 작용시키고 '金木水火土'의 오행과 '靑赤黃白黑'의 오색을 결합시키면 금과 같은 귀금속이 함유된 단약이 제조되는데 이를 복용하면 선인이 돼 불로장생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어서 한무제 시대에 준남왕(准南王)이었던 유안이 방사들에게 저술시킨 연단서인 <준남자>에는 황백술에 관한 기사가 있다. 황백술은 단약을 만들기 위한 금과 은의 제조 기술로서 여기서 황은 금을 의미하며 백은 은을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소(消·초석), 류(流·황) 및 탄(炭)을 섞어 만든 니물(泥物)에서 금이 생성되었으며 납(鉛)을 은으로 변화시켰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이 기록을 과학적인 측면에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3 종의 물질(초석, 황 및 목탄)이 흑색 화약의 성분과 같다는 점에서 화약의 기원을 연상할 수 있다. 그후에도 도교 사상에 입각한 연단술은 서양의 연금술과 맥을 같이 하면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경험적 사실들을 발견하였다.

서진의 정사원(鄭思遠·264-322년)이 저술한 연단서인<진원묘도요약(眞元妙道要略)>에는 복화초석법(伏火硝石法)이 소개돼 있다. 즉 "황과 웅황(雄 黃·황과 비소가 함유된 광석)을 초석이 들어 있는 용기 중에서 밀폐해 가열했더니 불꽃이 발생하여 손에 화상을 입었다."는 내용이 있다. 또 "초석, 황, 웅황 및 꿀의 혼합물에 화기를 가까이 하면 격렬하게 연소하기 때문에 화상이나 화재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다시 말하면 초석의 산소 공급 작용에 의해 황과 같은 가연제가 밀폐 용기에서도 연소하는 현상을 관찰한 것이다.


- 중국 의약서속의 화약
서기 200년경에 장중경과 화타는 의약서 <신농본초경>에서 총 365종의 약물을 불로경신제 (不老輕身劑)인 상약, 질병의 치료제로 사용하는 중약, 해열제한제의 효과가 있는 하약 등으로 분류해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 화약과 관계가 깊은 약물들이 언급돼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 상약: 단묘(丹砂·황화수은), 소석(芒硝·망초), 박초(소성한 초석), 인삼, 감초, 밀랍 중약: 웅황(비소광석), 석유황(황), 수은, 석고, 갈근, 당귀, 작약,

. 하약: 철분, 연단, 석회, 부자(附子), 대황(大黃)

이어서 양(梁)나라의 도홍경(陶弘景·456-536)은 당시까지 매우 다양하던 본초설을 총정리하면서 신농본초경에 주석을 단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라는 의서를 편집했다. <신농본초경집주>는 최초로 체계화된 본초학 전문서로 730종의 약물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도 화약의 재료로 사용된 약물들이 소개돼 있다.
단사:
장기 복용하면 신명에 통하고 영년불로한다.
수은: 장기 복용하면 신선이 되며 불사한다.
박초: 장기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신선이 된다.
소석: 장기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불로 장수한다.
웅황: 장기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신선이 된다.
웅황(황과 비소가 함유된 광석): 장기 복용하면 경신과 불로 장수한다.

도홍경은 또 <신농본초경집주>에서 소석을 가열할 때에 발생하는 화염의 색에 의하여 소석의 진부를 감정하는 염색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진짜 소석은 강하게 가열하는 경우에 자청색의 연기를 발생하면서 재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당시에 이미 화약제조에 쓰이는 물질들에 관한 연구가 상당히 깊이 있게 진행됐지만 초석의 산화 작용에 대해서는 6세기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중국의 흑색 화약
송의 이방등(李坊等)이 편집한 고대 중국의 설화집인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후한의 순제 (順帝·125-144) 때에 있었던 설화가 실려 있다. 단약을 만드는 어떤 방사의 집에 두자춘이 방문했으나 마침 방사가 볼일이 있어서 외출 중이었다. 그래서 두자춘이 단약로의 옆에서 졸고 있었는데 로에서 큰 불이 일어나 화염이 지붕까지 미치면서 집이 불타버렸다고 했다. 이런 설화만으로 당시의 방사가 단약의 제조에 초석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부의 학자들은 이 때의 발화를 초석의 산화 작용에 의한 자연발화 또는 폭발로 해석하고 있다. 그 후 당의 초기인 618년에 손사막(孫思邈)이 저술한 <복화유황법>에는 초석 등의 3미혼합물을 가열한 실험 내용이 수록돼 있다. 즉 잘게 빻은 같은 양의 초석과 황을 은제 용기에 담고 여기에 쥐엄나무 열매를 넣은 다음 가열하면서 저어주면 자연 발화해 연소한다. 불이 꺼질 무렵에 목탄을 가하고 다시 가열해 3/1 정도로 줄면 그친다고 했다.

그리고 당말인 헌종 3년(808)에 기술된 청허자(淸虛子)의 <연홍신진지보집성(鉛汞申辰至寶集 成)>이라는 책에는 같은 양의 초석과 황의 혼합물에 바곳(부자)을 가한 다음에 가열했더니 발화하면서 연소했다는 복화반법(伏火礬法)이 소개돼 있다. 이것은 손사막의 실험과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쥐엄나무 열매나 바곳, 꿀은 모두가 탄소질이며 가열하면 탄화되어 목탄으로 변하는 물질이다.
따라서 초석, 황, 탄소질(목탄)의 혼합물은 가열할 때 발화되며, 황이나 목 탄이 초석의 산소공급 작용에 의하여 연소하는 현상을 관찰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여러 가지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화약의 발명에 필요한 여건은 성숙돼 있 었던 셈이다. 화약의 효시인 흑색화약의 세가지 성분인 초석, 황, 목탄이 배합된 혼합물의 강력한 연소 작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화약학적 의미의 폭발현상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는데 이는 당시의 실험들이 거의 언제나 초석과 황을 같은 양으로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만약 당시의 실험에서 이 세 물질의 배합비율이 현재 폭파용에 사용하는 흑색화약(표준비율: 초석75-황10-목탄15)과 유사했다면 폭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초석이 귀했고 폭발에 관한 이론이 없었으므로 초석의 배합비를 높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미 중국에서는 2-7세기 경에 흑색화약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초석, 황, 목탄의 혼합물을 실험하고 있었으며 이의 연소 성능도 확인했다. 그리고 흑색화약이 언제 누구에 의해 발명되었다거나 어떤 경우에 폭발 현상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이미 화약이 실용화되었다는 자료들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흑색화약은 장기간의 실험과정에서 무작위적으로 발명되었으며 필요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이 가설은 여러 학자들이 공감하고 있지만 발명 시기에 관해서는 약간의 이론이 따른다.

예를 들어 일본의 남방평조(南坊平造)는 태평광기와 몇가지 가상에 의거해 흑색화약이 125-144년 사이에 발명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는 <태평광기>에 소개된 설화에서 연단을 제조하던 방사가 초석과 황, 목탄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사실상의 흑색화약이 출현했다고 보았다.
반면 중국의 조철한은 흑색화약이 동진시대(264-322)에 정사원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마가승은 흑색화약이 당대(618-907)에 이르러 출현한 착화성이 있는 약의 형태로 발명되었다고 가정했다. 이런 여러 학설들을 종합해 보면 흑색화약의 원형은 당나라 초기인 7세기 경에 발명되었으며 이 때부터 서서히 화약으로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초기의 화약은 연소성능에 의존하는 수준이었으나 점차 폭발성을 갖는 조성이 개발되고 이의 사용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즉 조성에서는 초석의 배합량을 늘림으로써 화약의 성능이 향상되었고 용도에서는 폭죽이나 군사적 목적에 응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당나라 말기인 9세기 전후에 이르러서는 흑색화약을 사용한 화약무기와 연화가 여러 사료에서 발견되고 있다. 
 

 

 

2) 유럽의 화약

 

- 로저 베이컨과 희랍의 불

흑색화약이 고대 중국의 연단술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중국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은 확실한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유럽 일각에서는 르네상스 초기에 영국의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14-1294년)이 최초로 흑색화약을 발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로저 베이컨은 중세 프란체스코(Francesco) 교회에 소속된 수도승으로 구역 교회에서 빈민구제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철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대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과학자였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명문으로 알려진 옥스퍼드대학과 파리대학을 졸업했고, 철학을 비롯한 수학, 천문학, 화학, 물리학,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당시의 유럽을 오랫동안 풍미하던 연금술이라는 사술(詐術)에 과감히 도전해 현대과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선구자였다. 그는 신비사상에만 젖어 있는 연금술을 사변적인 철학과 실용적인 화학으로 양분하면서 실험과학의 의의를 강조했다. 그는 과학이 진정한 학문으로 성립하려면 허구에서 탈피해 사실 자체를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이컨은 이같은 인식에 기초해 전설로만 전해 오던 고대의 소이제나 '희랍의 불(Greek Fire)'을 과학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용으로만 사용했던 발화제의 조성이나 용법은 어디에서나 비밀이었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여러 가지 물질을 직접 배합하고 연소하면서 실험을 통해 조성을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실험실은 항상 연기와 불꽃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오랜 실험 끝에 베이컨은 발화제의 비밀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희랍의 불을 비롯한 고대의 소이제나 발화제는 가연성의 피치나 타르와 같은 물질에 생석회를 배합한 혼합물이었다.

그는 또 연구 과정에서 목탄(C)과 황(S)의 혼합물에 초석(KNO3)을 가미하면 연소성이 좋으며 이들의 배합 비율에 따라서는 폭발적으로 연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베이컨이 초석을 어떻게 구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길이 없지만 당시의 유럽에서는 초석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나 동양권에서 화약의 실용화 초기에 초석 채취술이 화약 제조에 버금가는 비밀에 속하였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로저 베이컨은 전설로만 전해지던 희랍의 불을 재현하는 초석, 황, 목탄의 세가지 성분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종래의 발화제나 희랍의 불보다 연소성능이 뛰어난 화약을 만들어냈다. 베이컨이 만들었다는 화약에 흑색화약(Balck Powder)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목탄 가루가 배합되어 있어서 혼합물의 색이 검었기 때문이다.

그가 흑색화약을 발명할 당시에는 교리와 상치되는 과학적 내용을 발표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을 뿐 아니라 이를 위반했을 때는 종교재판에 회부됐다. 이 때문에 그는 실험 내용을 아무나 읽을 수 없도록 철자의 순서를 바꾼 수수께기식 라틴어로 표기했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베이컨 자신이 발명한 흑색화약의 비밀과 초석의 정제법을 1249년에 저술한 <Operikus Artis et Magiao>에 수수께끼 식으로 기록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 중국화약의 유럽 전파설
베이컨의 흑색화약의 발명과 관련된 초기의 자료에는 전설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확인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베이컨 이후에는 장기간에 걸쳐서 흑색화약에 관한 유럽의 자료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4세기 초에 신비의 인물로 알려진 독일의 슈발츠 (Berthold Schwarz)가 베이컨의 기록을 판독함으로써 흑색화약의 역사가 다시 시작됐다.

일설에 따르면 로저 베이컨은 스스로 발명한 흑색화약의 화약적 이용 가능성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쟁이나 살인과 같은 죄악의 수단으로 오용되는 사태를 몹시 걱정해 나중에라도 정의로운 목적에만 사용하는 훌륭한 과학자가 나타났을 때 이를 해독하도록 하기 위하여 제조법만은 글자 수수께끼로 나타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베이컨을 숭상하는 중세적 신화에 속하겠지만 화약의 사용과 관련해 한번쯤은 음미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영국 서남부 섬머세트샤이어(Summersetshire)주 일체스터(Ilchester chester)의 성메리(St. Mary) 교회의 벽면에는 그곳에서 태어난 베이컨을 기념하는 조촐한 현판이 있다. 이 현판은 베이컨이 세계 최초로 흑색화약의 조성을 발명했다며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흑색화약이 로저 베이컨에 의해서 사상 최초로 발명되었다는 주장에는 너무나 전설적인 요소가 많다. 더욱이 중국에서는 그가 흑색화약을 처음 제조했던 시기보다 수백년 앞서 이미 전쟁용으로 흑색화약을 사용한 사실이 입증됐다. 그리고 중국에서 발명한 화약이 아랍 등을 경유해 유럽에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베이컨이 화약을 발명했다는 시기 이전에 아랍 등지에서는 화용병기를 실제로 사용한 기록도 거의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다. 또 베이컨의 화약 발명 시기와 거의 같은 시대에 쓰여진 몽고군의 서정시에서도 본격적인 화약병기를 유럽에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베이컨은 화약 기술에 관해 상당한 예비 지식을 갖고 자신만의 독특한 실험을 통해 흑색화약을 재개발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베이컨이 아랍의 연금술사로부터 흑색화약의 제조법을 직접 배웠거나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있는 에스코리알(Escorial) 수도원의 도서 소장품에서 발견한 기록을 통해 흑색화약의 제조법을 터득했다는 설도 있다. 이런 주장은 베이컨의 경력으로 미루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 탈라스 전투

 

1. 고선지 장군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고구려가 망한 뒤에 당나라는 망국 고구려인들의 저항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하여 삼국사기에서는 '보장왕을 비롯한 20만명', 자치통감에서는 '3만8천여가구'로 언급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중국의 오지로 강제이주를 시키게 된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高舍鷄)는 이 3만8천여 가구 중에 하나였을 터인데, 당나라의 하서군(河西軍)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우고 장군이 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기록에서 장군의 출생연월은 정확하게 알 수 없어 의문처리된 것으로 보이고, 고선지 장군은 20세 때에 아버지를 따라 안서(安西)에 가서 아버지의 음보(蔭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었으나, 중국인 출신의 안서 절도사(安西節度使)였던 전인완(田仁琬)이나 개가운(蓋嘉運)에게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이민족 출신인 부몽영찰(夫蒙靈樽)이 부임하였을 때, 그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740년경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에 승진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에 올랐다고 한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중원의 침략을 방어하고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통제를 위하여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匈奴), 돌궐(突厥), 토번(吐蕃)족들과 끊임 없는 전투를 벌여오고 있었다. 당대에는, 2대 태종(太宗, 재위 626~649) 시대에는 내분으로 인하여 약해진 서돌궐을 제압하여 서역을 통제할 수 있었는데, 이 당 태종은 중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황제 자리에 오른 것 뿐만 아니라, 북방이 유목민들 또한 복속시키고 그들에게 천가한(天可汗)의 존호를 받은, 이민족을 제대로 제압한 몇 안되는 중국 황제중의 하나였다. 사족을 달자면, 이야기를 볼 때마다 개인적으로 고구려는 이 호걸의 압박을 물리친 진짜 대단하면서도 운 없던 나라라고 생각이 되더라는.

이후 능력없는 황제들과 야심에 찬 2명의 황후들로 인한 혼란시대를 지나, 개원의 치로 유명한 8대 현종(玄宗, 재위 713~756)의 명을 받고 고선지가 서역 정벌에 나섰을 때에는 서역의 정세는 크게 달라져 있었는데, 아라비아반도에서 알라에 대한 믿음 아래에 불같이 일어난 사라센 제국이 파미르 고원을 향해 크게 세력을 내뻗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서돌궐이 중간에 끼어 있어 직접 부딪칠 때가 없었으나, 이제는 파미르 고원을 무대로 당나라와 세력을 판가름하게 된 것이었다. 고선지 장군은 사라센 제국과 맞서기 전에 우선 토번족과 사라센 제국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 토번족은 당나라의 서쪽 진출에 늘 위협을 주던 티벳 고원의 억센 종족이었는데, 이들은 한 때 천산북로(天山北路)로 진출하려다 실패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산을 넘어 아무르 강의 상류 등지로 나아가 사라센 제국과 손을 잡고 당나라의 세력을 꺾으려 하였고, 당의 동맹국이었던 소발률(小勃律)국에는 공주를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고, 이리하여 소발률국을 비롯한 20여개국이 당의 세력권에서 이탈한 상황이었다.

 

2. 파미르 고원을 넘은 소발률 정벌전
현종 6년인 서기 747년 3월, 고선지 장군은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가 되어 당나라의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라 안서도호부를 떠난 지 40여일 만에 카시가르에 이르렀고, 이곳을 떠나 파미르 고원을 바라보며 행군한 지 20여일 만에는 터어키의 카시쿠르간에 이르렀으며, 다시 20일 후에는 파미르 고원의 가장 높은 곳을 지나고, 파미르 강을 건너 오늘날의 타지키스탄 지역인 오식닉국(五識匿國)에 이르렀을 때에는 또 20여 일이 지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고선지 장군은 군을 셋으로 나누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목표로 진군하였다.

서기 747년 7월, 연운보 앞의 파륵 강에 집결한 고선지군은 강가에 제단을 마련하여 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에 기병 몇 사람을 뽑아 먼저 강을 건너게 하여 전군을 고무한 후 야간에 전군 도하를 시도하였다. 구당서에 의하면, 군사들이 무사히 강을 다 건너자, 고선지 장군은 통쾌한 표정을 지으며 감군인 변영성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아군의 절반정도가 도하하였을 때 적에게 기습을 당했더라면 우리는 패했을 터이나, 이제 모든 군이 도하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적의 운명을 내 손에 쥐어 준 것이다." 당의 군사들은 1만의 토번 주둔군을 여지없이 쳐부수기 시작하였고, 기습을 당한 토번 부대는 한나절쯤 되어 무너져 버렸으며,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 연운보 전투에서 5천의 적군을 죽이고, 1천명을 사로잡았으며, 1천필의 말과 또한 상당한 무기와 군량을 노획하였다고 한다.

전투 후 고선지 장군은 3천의 군사를 두어 후방을 지키게 하고 7천을 이끌고 전진을 시작하여,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중국 신강지역 사이의 통로가 되는, 와칸 계곡의 해발 3천798미터의 바로길 고개를 넘고, 그에 이어 해발 4천575미터인 다르코트 산을 향해 나아갔다. 다르코트 산은 구당서에 탄구령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진(東晉)의 구법승(求法僧) 법현(法顯)은 그의 여행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한다.

이 눈산에는 독기를 뿜는 독룡이 있다.
만약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 비위를 건드리면 만에 하나도 살아남기 어렵다.

고선지 장군의 이 행군로는, 1906년 5월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 경이 가장 현대적인 장비를 갖춘 7,8명의 대원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와 길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낸 일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구당서에 의하면, 연운보에서 3일을 행군하여 다르코트 산 정상에 이르자, 군사들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타나자 사기가 떨어지며 이렇게들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도대체 절도사 나으리께서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시는 건가?" 그 때 소발률 복장을 한 기병 20명이 불쑥 나타나 고선지 장군 앞으로 다가와, "소신들은 소발률국의 군사들입니다. 위대하신 장군님의 부하로 있고 싶어 찾아왔으니 부디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꿇어 엎드린 채 간곡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는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고선지 장군의 계략으로, 측근병사들에게 소발률 병사들의 복장을 입힌 다음에, 거짓으로 항복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하튼, 이로 인해 사기가 오른 병사들은 험한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였고, 소발률국의 수도인 아노월(阿弩越)로 진격해내려갔다.

아노월을 목표로 하여 야신 계곡을 따라 절벽 길을 내려간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고선지 장군은 아노월 성의 뒤를 갑작스레 치기 위해, 1천여 명의 별동대를 길기트 강을 따라 먼저 보냈다. 드디어 적진에서 혼란이 일기 시작하였고, 이 틈을 타 고선지 장군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아노월 성의 앞쪽을 들이쳤다. 그러자 성 안에서 난리가 일어났는데, 성을 끝까지 지키려는 장수 6명이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포박되어버린 것이었다. 성 안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밖으로 도주하려 하다가 피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고선지 장군의 말에 따라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질서를 찾았고, 포박된 6명의 장수를 스스로 참수시켰다. 당나라 군의 침입을 들은 토번 지원군이 소발률국을 돕기 위하여 급히 진군하였으나, 길기트 강과 인더스 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등나무다리를 간발의 차이로 끊어 지원군의 전진을 막았다.

증원군의 기대가 사라진 소발률국의 왕과 대소신료들은 고선지 앞에 나와 항복하였고, 이 때까 당나라 현종 6년인 서기 747년 7월이었다. 신당서에 의하면 이 때의 원정으로 불름(동로마), 대식(大食, 아라비아) 등 서역72개국이 당나라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고선지 장군은 그 공으로 홍려경어사중승(鴻 卿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이 원정에 대해 스타인 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현대의 어떠한 참모본부도 따를 수 없는 것이며, 나폴레옹의 알프스 돌파보다 더 성공적인 것이다."

3. 세계 역사의 흐름의 분기점이 되는 탈라스 전투
당나라 현종 9년인 서기 750년, 고선지 장군은 현종의 명에 따라 다시 서역 원정의 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파미르 고원 서쪽 시르강 중류에 있는 석국(石國, 타시켄트)를 정복하러 가는 것이었다. 석국을 비롯한 지역의 9국은 당나라와 사라센 제국사이에서 양면정책을 폈는데, 때마침 사라센 쪽으로 기울어졌고, 이에 당나라에서는 석국을 정벌하기로 하였다.

 

아랍측 사료에 의하면 10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린 고선지 장군은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넘는 원정을 단행, 서기 751년 1월 석국의 성밖에 이르렀고 현지군과 전투에 들어갔다. 승리한 당군은 밀물같이 성 안으로 몰려들어갔고, 살아남은 적군은 항복하였으며, 왕과 공주는 포로로서 장안(長安)으로 압송되었다. 노획한 보물은 모두 100여섬이나 되었고, 황금은 낙타로 대여섯바리나 되었으며, 노획한 말과 무기는 셀 수 없었다. 이에 당 현종은 고선지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라는 벼슬을 내려 그 공로를 기렸다. 허나 당군은 석국을 너무 철저히 약탈하여 폐허로 만든 데에다가, 거기에다가 장안으로 이송된 석국의 왕이 강경파 문신들에 의해 참수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서역 여러나라들은 흥분하였으며,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라센 제국은 이들을 꼬드겨 연맹군을 조직하여 당에 대항할 태세를 취하였다.

현종 10년인 서기 751년, 고선지 장군은 사라센 제국의 연맹군을 치기 위해 7만의 군대를 이끌고 파미르 고원 북쪽에 있는 탈라스로 갔다. 전투가 벌어진 탈라스강은 천산산맥의 지맥인 탈라스 연산(連山)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흘러내리다가 사막으로 사라지는 강으로, 아라비아어로는 탈라즈, 중국 사서(史書)에는 도뢰수(都賴水) 또는 달라사(羅斯)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랍측 사료에 의하면 억울하게 참수당한 석국왕의 아들이 당시 호라산의 총독이었던 아부 무슬림에게 도움을 요처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지하드 이븐 살리히 장군을 사령관으로 한 사라센 군대가 파병되었다고 한다.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 전투는 꽤 관심이 가는 것이,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지 백 수십년 만에 강력하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비잔틴 제국의 부흥의 근거지였던 제국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간단히 점령하고 제국을 패망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아프리카 서쪽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의 커다란 판도를 자랑하는 사라센 제국과, 당시까지의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는 당 제국,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이 두 제국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툰 세기적 싸움이었기에 관심이 갈만한 일이었다는.

서기 751년 7월, 진을 친 지 며칠 후 당군과 사라센 연맹군과의 싸움이 붙었다. 양군은 7월의 무더운 중앙아시아 대륙의 평야에서 5일 밤낮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고 하는데, 결국은 거짓으로 당군에 합류한 돌궐 계열의 카르륵(葛邏祿)군의 배신으로 인하여 배후를 찔린 당군측의 패배로 전투는 끝났다고 하며, 아랍 사서에 의하면 당군의 대부분의 병력이 사살되고, 2만 정도의 포로가 중동 지역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탈라스 전투의 결과 당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은 영원히 파미르 이서의 통제권을 상실하였으며, 부수적인 귀결로, 중동으로 끌려간 중국 포로들에 의하여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파되었다는 야사는 유명한 이야기.

고선지 장군은 귀국 후 사정을 정확히 알기에는 여의치 않으나, 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에 임명하였으며, 755년에는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고 한다. 허나 일선에서는 물러난 상태였으며, 이 때의 고선지 장군의 심정을, 당대의 유명한 시인 두보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고 한다.

만리라 한혈마를 이제 보았네,
번개보다 더 빠른 걸 세상이 아는데,
청사로 갈기 딴채 늙고 있으니,
언제나 서역길을 다시 달릴까

심심하게 묶여있는 고선지 장군의 말을 빗대어 한직으로 물러난 장군의 처지를 읊었다고 하면 될 듯.

4. 고선지 장군의 억울한 마지막
현종 14년인 서기 755년,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 및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의 직위에 있던 안녹산(安祿山)이 범양(范陽, 지금의 북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선지 장군은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에 임명되어 반란군 토벌의 임무를 받게 되었다. 안녹산의 반란군은 낙양(洛陽)을 빼앗고,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장안으로 쳐들어가고 있었는데, 이 때 고선지 장군은 상부 명령대로 섬주(陝洲)를 지키고 한 때 부하였던 절도사 봉상청은 동관(潼關)을 지키고 있었다.

안녹산의 반란군은 장안의 길목인 동관을 점령하려 하였고, 선발군으로 나간 봉상청에게 반란군에 대한 보고를 받고, 고선지 장군은 반란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전략적 요충지였던 동관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명령없이 군대를 이동한 데에 대한 일과, 이동 전에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부창고를 열어 식량과 비단을 부하들에게 나누어준 일을, 부관 변영성(邊令誠)이 현종에게 과장하여 밀고함으로써 그만 어이없이 진중에서 참형을 당하게 되었다. 아마 그가 안록산과 같은 이민족이었더 것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을터.

이리하여 현종 14년인 서기 755년 12월 13일 고선지 장군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을 맞는 고선지 장군의 모습은 구당서에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군사들은 "누명입니다" 라고 외쳤고, 그 소리가 땅을 흔들었으나, 고선지 장군은 함께 참형을 당한 봉상청의 시신을 보면서, "공은 내가 선발했고, 나와 절도사를 교대했다. 지금 함께 죽으니 이도 모두 운명이로다."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3. 나침반의 역사

 

 

1) 나침반 소고

종이, 화약과 더불어 중국 3대 발명품중의 하나인 나침반(羅針盤)은 언제 누가 발명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B.C1,500년경 중국에서 자석이 쇠를 끌어 당기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나 그 지북성(指北性)은 좀 더 뒤에 발견한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 패철(佩鐵)이라는 나침반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풍수지리를 보는 지관들이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의 나침반은 1260년대 마르코폴로가 유럽으로 전했다고 한다. 나침반은 자기(磁氣)를 쇠막대(침)이 지구라는 커다란 자석에서 생기게 되는 자장(자기자오선)을 따라 일정하게 남과 북을 가리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지구의 자북(캐나다 허드스만 북쪽)을 가리키는 자침쪽을 N극, 반대쪽은 S극으로 표시한다.

 

2) 실바 나침반 (Silva Compass)
(1) 유 래
실바(Silva)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실바(숲의 여신)에서 유래한 스웨덴어로 숲을 뜻한다. 이 나침반은 1930년경에 스웨덴의 첼스트롬(Kjellstrom) 3형제가 오리엔티어링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이전의 나침반을 보완하고 여러가지 기능을 추가시킨 것으로 본래는 오리엔티어링용이지만 등산에서도 우수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 실바나침반이 독도의 표준 나침반이 되다시피 했다. 실바나침반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Type 2, 4, 5등이 독도에 가장 편리한 나침반이다.

(2) 나침반의 명칭

 
SILVA Type 2 나침반

① 북방지시 화살표
② 자침
③ 자
④ 확대경
⑤ 축척자
⑥ 진행선
⑦ 기저판
⑧ 다이얼 눈금
⑨ 보조지시선(보조선)
⑩ 나침반집
⑪ 끈
⑫ 눈금테

 


(3) 구조 이해
나침반의 다이얼을 돌려보면 자침은 돌지 않고 다이얼의 눈금과 북방지시화살표가 같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다이얼 눈금밑에 위치한 하얀색의 눈금테는 다이얼과 함께 돌지 않으며, 진행선과 같은 방향으로 일치되어 있다. 여기서 숙지할 것은 다이얼을 임의대로 돌렸을 경우, 눈금테에 의해 읽혀지는 각도는 북방지시화살표와 진행선사이의 각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북방지시화살표와 보조선은 평행이라는 점, 진행선과 진행선 양쪽의 가는선 그리고 자가 있는 나침반 양쪽면은 모두 평행이라는 점도 알고 있어야 한다. 자침은 자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빨간색쪽이 항상 북쪽(나침반이 가리키는 북쪽은 자북이며 캐나다 허드슨만 북쪽을 가리킨다)을 가리키게 되어 있다. 자침이 들어있는 나침반집속에는 특수기름이 들어 있어 자침의 진동을 흡수하기 때문에 자침이 빨리 정지하게 되어 있다. 나침반을 사용할때 가까운 곳에 쇠붙이,전자제품등이 있으면 자침은 엉뚱한 곳을 가리킨다.

 

3) 나침반은 신라에서 유래

그런데 방위를 측정하는 기구인 ‘나침반(羅針盤)’ 을 더러 ‘나침판’ 이라 하나, 이는 표준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침반(針盤)’ 이라고도 하는 이 ‘나침반’ 과, 이의 다른 말인 ‘나경(羅經)’ 에 쓰인 ‘나(羅)’ 는 어떤 뜻으로 쓰인 것일까요.

 

인류 최초의 나침반인 ‘사남(司南)’ 에 관한 첫 기록은 중국 후한(後漢) 때 왕충(王充, A.D 27 - 97) 의 ꡔ논형(論衡)ꡕ인데, 이에는 자석을 숟가락 모양으로 만들어 식반(食盤) 위에 던져 운수를 점친다고 하였습니다. 자석에 관한 최초의 중국 기록은 전한(前漢) 때 유안(劉安, B.C 179 - B.C 122)이 명해 쓴 ꡔ회남자(淮南子)ꡕ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는 ‘자석’ 이란 말이 오늘의 ‘磁石’ 이 아닌 ‘慈石’ 으로 씌어 있는데, 자석이 남북을 가리키는 도구로 쓰이는 경우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로서는 ꡔ삼국사기(三國史記)ꡕ에 신라 문무왕 때(699) 당나라 고종이 승려 법안(法安)을 신라에 보내 자석을 구해 갔다는 기록이 있고, ꡔ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ꡕ 에도 경상도의 특산 가운데 자석을 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석으로 만드는 나침반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중국으로 알고 있는데, ‘나침반’ 의 ‘羅’ 는 ‘신라’ 를 뜻한다는 국내외 학자들의 학설이 있습니다. 곧, 대부분의 특산물은 그 지역명을 따른 것으로 볼 때, ‘나침반’ 은 ‘신라 침반’ 이란 것이지요.


낙랑(樂浪, B.C 108 - A.D 313) 고분에서 발굴된 식점천지반(式點天地盤)의 조각은 바로 2000년 전쯤에 우리 선조들이 중국과 비슷한 방법으로 점을 친 것을 알 수 있고, 중국의 어느 나침반 설명문에 보이는 「방위표(지반, 地盤)는 고대 낙랑 지방에서 출토된 옻 지반을 복원한 것이다」 란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나침반이란 말이 ‘신라 침반’ 에서 온 것이란 것은 더 연구가 있어야겠지만,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게 되는 것 같아 반갑게 생각이 됩니다.

 

4) 나침반의 역사

 

1. 자성의 발견
Magnet이란 단어는 자석이 산출되는 소아시아의 도시인 Magnesia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전설에 따르면 Magnus라는 이름을 가진 크레테의 한 양치기가 철판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자석이 함유된 바위 위에 쉬고 있다가 발을 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나침반이 유럽에 알려지기 수 세기 전에 북구인들이 천연자석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누가 나침반을 발명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 나침을 사용한 민족은 漢族이 처음이었던 같다. Pere Du Halde의 General History of China(1736)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경 중국인들이 “指南(Tschi Nan)이라고 불리는 도구를 이용하여 방향을 찾아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기록이 지남을 바다에서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Alexander von Humbolt는 Cosmos, A Sketch of a Physical description of the Universe(1858)에서 “중국 배들은 4세기 동안 나침반을 사용하여 인도와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항해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내었다. A. Humbolt는 나침반이 인도양과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해안 전역에 걸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난 이후에 동양에서부터 유럽으로 유입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나침반이 유럽으로 유입되는 데는 아라비아인들과 1096년 이래 이집트와 레반트와 접촉했던 십자군들이 어떤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나침반의 초기 형태인 lodestone은 여러 지역에서 이미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노르웨이의 연대기작가인 Ara Frode가 아이슬랜드를 발견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한 대목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유명한 바이킹으로 아이슬랜드를 세 번째로 발견한 사람인 Flocke Vilgerdersen이 868년경에 노르웨이의 Rogaland를 출발하여 Gadersholm(아이슬랜드)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방향잡이로 갈가마귀 3마리를 데리고 갔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갈가마귀들을 성화하기 위해 출항을 준비하고 있던 Smarsund에서 큰 제물을 바쳤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북구에는 leidarstein(lodestone)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슬랜드어에서는 lied는 지역을 뜻하고, 북극성은 leidstjerna인데, 이 낱말을 통해 보면 leiderstein은 지침석(guiding stone)울 뜻하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Ara Frode는 1068년에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위의 두 가지 근거로 볼 때 북구에 항해용 나침반이 소개된 것은 868년에서 1100년 사이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2. 천연 자석(lodestone)
- 중국, 벵갈산 : 최고급 자석,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고, 크고 무거우며 같은 무게의 광석보다 20배나 비싸고, 은과 비슷한 가격으로 팔렸다.
- 아라비아산 : 붉은 빛깔, 대개 편평하고 넓은 편이며 중국산과 품질이 비슷
-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스페인, 덴마크, 독일, 노르웨이, 영국 서부에서도 산출

중세 동안에는 천연자석을 자고 있는 여성의 머리에 올려 놓으면 그 여성이 부정을 고백하게 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또 손에 쥐면 풍을 치료할 수도 있고, 소지자가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믿었다. 또 마늘이나 양파에 문지르면 자성을 잃는다는 속설도 있었다.

3. 나침반
① 11세기 중엽 북송의 沈括(Shen Kua)이 쓴 夢溪筆談에 “물에 띄운 나침이 북쪽을 가리킨다”고 기록되어 있고, 12세기 초 朱或(Chu Yü)은 萍州可談에서 “항해에 이미 나침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② 12세기 말 경에 프랑스 항해자들이 나침반을 사용한 것은 확실하다.

프랑스어로 된 시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La Bible de Guynet de Provins
“결코 움직이지 않는 별이 있다네,
결코 속이지 않는 항해술이 있다네,
그것은 갈색 돌로된 자석(magnet)을 이용하는 것이지,

어둠이 내려 별과 달도 없을 때
불빛으로 이 나침을 비추어 보면
나침이 그 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
항해자들은 이 나침에 기대어
가야할 바른 항로를 찾아내지
나침항법은 결코 속이지 않는다네”

이를 통해 볼 때, 나침반은 늦어도 13세기 초까지는 바다에서 북쪽을 찾는데 이용된 것이 확실한 것 같다. 파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Cirencester의 대수도원장이 된 Alexander Neckham(1157-1217)이라는 영국인은 1187년 De Naturis Rerum이란 책에 “구름이 끼어 더 이상 해를 볼 수 없거나 어두울 때, 또는 어느 방향으로 조선해 가야할 지를 모를 때 항해자들은 자침을 건드린 뒤 멈추는 방향을 보고 북쪽을 알아낸다”고 적고 있다.

③ 물 위에 나침을 띄우고 사용했던 초기 형태의 나침반은 1200년 경에는 피봇 위에 나침을 올려놓는 형태로 발전
④ 방향을 표시한 카드를 나침 위에 부착하여 바람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 이를 나무나 황동 상자 안에 넣은 나침반으로 발전(직경이 4-5 인치=10.16-12.7cm)
⑤ 14세기 동안에는 현재 형태와 비슷한 나침반 등장.
⑥ 16세기 : 카드에는 32점(point, 11°15′)으로 표시, 북향은 fleur de lys(이탈리아어의 북쪽을 뜻하는 Tramontana(포르툴라노 해도에는 T로 표시)란 단어에서 유래, T는 점차 fleur de lys(프랑스 왕실 문장으로 붓꽃 문양)의 형상으로 변모<--Aquintaine 지방의 뱃사람들의 영향인 듯), 동향은 cross=예수의 묘(성묘)가 있는 방향

 

5)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은 진짜 북극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나침반만 사용하는 경우가 옛날에 비해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구의 남북을 가리켜서 방위를 알려주는 나침반은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탐험가나 먼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에게 생명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과거에 콜럼버스나 마젤란에 의한 신대륙 발견, 세계일주 항해 등도 나침반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나침반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 놓는 데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셈이다.  
이처럼 중요한 나침반을 누가 맨 처음 발명했는지 명확한 기록이 없어 최초 발명자를 알 수는 없지만, 나침반이 서양이 아니라 중국에서 발명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침반은 종이, 화약과 함께 중국이 자랑하는 '3대 발명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나침반의 기원과 관련해서 고대 중국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기원전 4세기 경 춘추전국시대의 문헌으로 보이는 '귀곡자(鬼谷子)'에는 "정(鄭)나라의 사람들은 옥(玉)을 가지러 갈 때, 길을 잃지 않도록 지남기(指南器; 남쪽을 가리키는 기구라는 뜻)를 가지고 간다."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서기 90년 경에 낸 논형(論衡)이라는 책에는 “국자를 물위에 띄워 놓으면 남쪽을 가리키면서 멈춰 선다”는 기록이 있고, 4세기경 갈홍(葛洪)이라는 사람이 쓴 포박자(抱朴子)라는 책에는, “철로 된 바늘에 머릿기름을 발라서 가만히 물위에 놓으면, 바늘을 물위에 띄울 수 있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위 책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과학에 관한 저서라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그것이 곧 나침반 발명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나침반 이외에도 중국에서 만들어진 방위를 알려주는 장치로서 지남차(指南車)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나침반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되어 왔다. 고금주(古今注)라는 책에는 중국의 역사시대 이전인 이른바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의 임금인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의 군사와 전쟁을 벌일 적에 치우가 만들어 피운 연막에 고전하다가, 황제가 지남차를 만들어서 항상 남쪽을 가리켜 줌으로써 가까스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전설이 나와 있다. 또한 주나라의 주공(周公)이 기원전 12세기 경에 지남차를 발명했다는 얘기도 있고, 그밖에도 중국의 여러 과학자, 기술자들이 지남차를 만들었거나 개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송사(宋史) 여복지(輿服志) 등에 나온 지남차의 구조를 미루어 보건대, 수레 위에 수직으로 세워 놓은 목제인형이 톱니바퀴 장치에 의하여 늘 남쪽만을 가리키는 것이지, 속에 자석이나 나침반이 장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약 12세기경에 유럽에서는 '아라비아 사람들은 바늘같이 생긴 자석을 밀집에 꽂아 물위에 띄워서 북쪽을 알아낸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졌는데, 따라서 그 무렵에 중국의 나침반이 이술람의 선원들에 의해 서유럽에도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영어로 'Compass'라고 불리는 나침반의 어원은 라틴어의 'Compassus'로서, 이는 '원을 방위로 분할한다.'는 의미이다.
자침과 방위표를 하나로 만들어서 운반이 가능한 나침반은 14경에 이탈리아에서 제작되었는데, 오늘날과 같은 모양의 나침반은 19세기 후반에 ‘켈빈(Kelvin)’경이라고도 불리는 영국의 물리학자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나침반이 지구의 남북을 가리키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한 사람은 16세기 영국의 물리학자인 ‘길버트(William Gilbert 1540∼1603)’이다. 그는 자석에 철 조각을 문질러서 인공적인 자석을 만든 바 있고, 나침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이유는 지구가 자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즉 지구 자체가 일종의 커다란 자석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나침반이 가리키는 쪽으로 간다고 해서 정확하게 북극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나침반이 가리키는 자북(磁北)과, 지구의 자전 축에 따른 실제 북극인 진북(眞北)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현재 자북은 대략 북위 78°, 서경 69°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도 해마다 조금씩 위치가 바뀌고 있다. 11세기에 송(宋)나라의 심괄(沈括)이 쓴 몽계필담(夢溪筆談)에도 자석의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지만, 진북과 자북이 다르다는 사실이 이미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극지방의 탐험이나 더욱 정밀한 방위가 요구되는 경우에는 지구 자기를 이용한 나침반은 적합하지 않다. 이 경우에는 독일 사람인 안쉬츠가 1906년에 자이로의 성질을 응용하여 창안한 전륜 나침반, 즉 ‘자이로컴퍼스(Gyrocompass)’가 매우 유용한데, 대형 선박 등에 이미 널리 장착되어 이용되고 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자이로스코프의 축에 추를 달면, 지구의 자전에 영향을 받아 자이로스코프의 축은 자동적으로 지구의 자전축, 즉 진북 방향을 가리키게 되는데 그 힘이 상당히 강한 편이다. 또한 자기 나침반과는 달리 편차도 없고 철강으로 된 선박의 자체 자력 등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장점이 있다.

최근에 휴대 전화를 이용한 위치 추적이 가능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오늘날에는 GPS 위성과 첨단 컴퓨터 등을 동원하여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내고, 갈 길마저 자동으로 제시해 주는 ‘항법시스템(Navigation System)’ 등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으므로, 전통적인 자기 나침반은 갈수록 쓰이지 않게 될 것이지만, 나침반이 인류 문명의 발전에 미친 영향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글 : 최성우-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4. 바지의 역사

 

1. “바지” 용어의 유래
바지는 아랫도리에 입는 옷의 한 가지로서 고(袴), 곤(褌)등으로 문헌에 표현되고 있다.
우리말로는 현재 ‘바지’, ‘고이’의 두 형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재의 ‘바지’라는 명칭은 조선조에 들어와 정인지가 ‘파지(把持)’라고 기록한 것이 최초이며, 영조(英祖) 때의 국혼정례(國婚定例), 상방정례(尙房定例)에도 모두 ‘파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말의 의대발기(衣襨發記)에는 바지라는 기록이 처음 보이며, 왕과 왕비의 바지는 특별히 ‘봉디’라 하였다. 이처럼 袴를 이 호칭으로 대신하게 된 것은 그 이전의 일일 것이며, 어쩌면 저고리라는 명칭에 대응하여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2. 바지의 기원과 발생
1)기원에 대한 가설
①요의(腰衣-허리에 두르는 원시적인 의복, Loin-cloth)가 아래로 연장되어 바지가 되었다는 가설(그림자료). 일본, 고대 멕시코, 고대 이집트, 남태평양, 필리핀 등 다양한 지역
②경의(脛衣-다리를 감싸는 형식의 의복, Leggings)가 위로 연장되어 바지가 되었다는 가설(그림자료). 대만, 동남아시아, 몽골 등 다양한 지역
※참고 - 우리 나라의 경의 : 조선 세종 이후 문헌. 바지 위에 덧입는 통형. 행전
③요의와 경의가 함께 영향을 주어 현재의 바지 형태를 이루었다는 가설

2)바지의 발생
활동성이 강조된 북방의 기마 민족에서 유래. 양쪽으로 갈라져 말을 타기에 편안한 바지는 그들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사진자료)대표적인 기마 민족이 스키타이족인데 이란어를 쓰는 유목민족으로 기원전 8세기경에 흑해 북쪽으로 이주해 온 종족이다. 발달한 청동기․철기문화를 이룩하고 있으면서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대부분 장악하였던 강력한 민족으로 당시에 높은 문화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그리스나 페르시아 왕조와 동등하게 교역하기도 하였다. 페르시아인은 스키타이족의 바지를 착용하고 이란고원으로 남하하여 원주민 메디아족을 누르고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게르만인(사진자료)은 이 바지를 착용하고 로마에 침투하여 로마를 멸망시켰다. 중국은 주대(周代)에 속옷으로 겨울에 바지를 착용하였고(현재와 같은 형식의 바지는 아님), 호복(胡服)의 도입(진(秦) 무령왕 19년 B.C. 307)으로 인해 바지를 겉옷으로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당대에 호풍(胡風)이 유행하면서 여성도 남장을 하고 기마시에 바지를 착용하였다.

3. 바지의 역사
1)원삼국시대
①부여 - 흰색을 숭상하여 흰 포목으로 소매통이 큰 도포와 바지를 만들어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
②마한, 진한, 변한, 고구려, 읍루, 예맥 등은 부여국과 비슷하다는 기록이거나 언급없음

2)삼국시대
①고구려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살펴보았을 때 모양(구조상 조형이 아닌 전체적인 실루엣)은 지금의 한복바지와 거의 같고 남녀의 차이도 거의 없다. 다만 가랑이 폭의 차이가 인물에 따라 심하다. 시대에 따라서는 전기에는 세고(細袴)를 입으나 중기에 와서는 계급에 따라 貴人은 관고(寬袴)를, 시자급(侍者級)은 細袴를 입고 있다. 궁고(窮袴)는 밑이 막힌, 고구려 고분벽화에 많이 보이는 형태로 엉덩이 뒷부분이 뾰족하게 표현된다.(사진자료) 형태상 바지 부리의 모양은 선을 두르고 밑을 오므리지 않은 좁은 부리와, 선을 두르지 않고 밑을 오므린 넓은 부리로 구분된다. 좁은 바지 부리는 신분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민첩성과 활동성, 실용성이 필요한 하층계급은 세고를 많이 입었다. 바지의 길이는 일반적으로 발목까지의 길이이고 활동성을 요구하는 일을 할 때는 발목과 무릎 사이 길이의 바지도 착용하였다. 여성이 고를 착용하였는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는데 이는 벽화 등에서 살펴보면 상을 덧입어 고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된다. 여성도 남성과 다름없이 고를 입고 그 위에 의례적으로 상을 걸쳤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구분은 엄격한 것은 아니고 여성들도 평상시에는 고만 입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②백제
백제의 바지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지만 남아 있는 몇몇의 자료를 통해볼 때 관고가 많았다고 생각된다. 이는 기후적인 요인으로 생각된다. 즉, 백제는 고구려보다 남쪽에 있기 때문에 통이 좁은 세고보다는 통이 넓은 관고(사진자료)를 추구한 것으로 보이고, 신분이 낮고 옷감이 부족해서 바지통이 좁더라도(세고라도) 바지부리를 졸라매지 않고 입은 것으로 생각된다.
③신라
신라인들은 바지를 ‘가반’, ‘갈고’라고 불렀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3)남북국시대
①통일신라
삼국시대의 신라와 비교하여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우(사진자료) 등을 통해 살펴보면 통이 넓은 관고(寬袴)와 좁은 세고(細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자가 바지를 입는 풍속이 여전하였고 의례용으로 바지 위에 치마를 입었으리라 추측된다.
②발해
요나라 시대 요령성 벽화에 보이는 발해인의 복장은 착수포의 상의와 폭이 좁은 모피 바지를 입고 있어 호복과 동일한 계통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고분벽화 그림에 나타나는 복식과 흡사하여 신빙성을 더한다.

4)고려시대
『고려도경』에 ‘궁고’, ‘관고’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5)조선시대
여성의 바지는 말군, 바지(단고, 겹고), 속바지(단속곳, 고쟁이 등)로 구분 (사진자료)
남성의 바지는 사폭을 대고 있는 형태가 임란이후 유물에서 발견된다. 단고(홑바지), 겹고 혹은 합고(겹바지)로 구분(사진자료)

4. 바지의 종류
1)생업에 의한 구분
①유목민족 - 착고
②농경민족 - 관고
2)계급에 의한 구분
①지배계급 - 광고, 장고
②피지배계급 - 착고, 단고
3)여밈 위치에 의한 구분
①전개형 - 서양식 바지, 조끼허리가 달린 여자바지
②후개형 - 여자바지의 일부, 풍차바지, 중국의 개당고
③측개형 - 여자바지의 대부분
④양측개형 - 일본의 바지류와 우리나라의 여자바지도 이러한 형식이 존재한다.
⑤전폐형 - 개구부 없이 허리통을 넉넉하게 하여 착용한 후 띠를 매는 형태. 남자바지
4)당(襠)의 유무에 의한 구분
①당고 - 밑부분에 무가 달린 형태.
②무당고 - 아주 넓은 관고형이나 서양복 바지의 형태
③사폭고 - 당이 없는 대신 마루폭, 큰사폭, 작은사폭, 허리말기 등으로 구성. 대부분 관고형. 남자 바지

※용어정리
고 : 지금의 폭넓은 서양바지 같은 형태. 대구고(大口袴), 태구고(太口袴).
곤 : 고의 일종으로 길이가 짧고 밑이 트인, 속옷과 같은 형태의 의복이라 짐작한다. 바지로 보는 의견과 길이가 짧은 잠방이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세고 : 바지통이 좁은 형태. 가죽으로 만든 것은 기마에 편리한 호복으로 구분
궁고(사진자료) : 바지통이 넓지 않고 기마시에 밑이 벌어지지 않게 당(襠-무)을 부착
바지 뒷부분이 삐죽하게 나온 형태(고구려 고분벽화)
관고(사진자료) : 大口袴. 외관이 직선적이고 여유 있는 형태

겹고 : 겹바지
단고 : 홑바지. 무릎까지 드러나는 잠방이와 같은 남자의 여름용 짧은 바지.(사진자료)
고의(袴衣) : 남자의 여름용 홑바지. 모시․생모시․삼베․옥양목으로 만든다. 남성의 속옷용 홑바지를 칭하기도 한다.

풍차바지 : 2, 3세 어린 사내아이가 입던 뒤가 터진 바지. 대소변을 못 가리는 어린아이에게 입히기 편하도록 바짓가랑이 터진 자리에 풍차를 대어 겹치게 하였다. 겨울에는 솜을 두거나 누벼 방한용으로 착용하기도 하였다.
개구멍바지 : 용변을 보기에 편리하도록 밑을 터서 만든 바지. 대여섯 살 된 사내아이가 입는다.

속바지 : 속속곳과 단속곳 사이에 입는 속바지. 여성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겉옷과 속옷으로 두루 착용되던 바지가 후대(조선시대 추정)에 오면서 속옷으로 정착되었다. 이 바지는 밑이 트여 있고 허리끈을 달아매도록 되어 있다. 여름바지는 위를 홑으로 하고 아랫도리만 겹으로 하여 모양을 내기도 하였다. 겨울용 바지는 명주에 솜을 넣거나 누벼 따뜻하게 지어 입었다.
고쟁이 : 여자 속옷의 하나. 속바지와 형태와 용도가 같고 특히 홑일 때 고쟁이라 칭한다.
살창고쟁이 : 경상도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며 허리의 주름부분을 제거하여 구멍이 나 있는 형상(사진자료). 더운 날씨에 통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 삼베로 만든 것이 많다.

속속곳 : 속바지 안에 입는 속옷의 하나. 단속곳과 같은 형태이나 안에 입기 때문에 크기가 조금 작다. 바지부리가 넓고 밑이 막혀있다.
단속곳 : 여자들이 치마 속에 입는 가랑이가 넓은 속옷. 겨울에는 명주(삼팔), 여름에는 모시․생명주․항라․사 등으로 하고 봄가을에는 옥양목․항라․명주로 만들어 주로 흰색․옥색․소색(素色-생사의 본색)을 사용한다.

말군 : 조선시대 양반층의 부녀가 입던 통넓은 바지. 세종 3년(1421) 6월에 말군을 입지 않고 말을 탄 양갓집 부녀가 기생으로 오해받아 망신을 당한 기록으로 보아, 양반층 부녀가 말을 탈 때는 반드시 말군을 입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11년(1429) 2월에 “대소부녀를 수종하는 여종은 말군을 입지 못하게 하자”는 사헌부의 계(啓)를 보면 신분에 따라 착용을 제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말군의 형태는 『악학궤범』(사진자료)에 나오는 악공복의 말군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통넓은 바지로 뒤가 갈라지고 어깨에 걸치는 끈이 달려 있다. 조선시대 연향 때 여기(女妓)나 연화대무를 추는 동녀(童女)가 입었다.

 

대체로 고온다습한 해양성 기후를 가진 나라, 정착하여 농사를 주로 하는 민족일수록 남자들이 비활동적인 치마를 입었다. 영국 땅에 상륙한 케사르가 원주민들이 줄무늬 바지를 입은 것을 보고 '바지는 노예나 야만인들이 입는 천한 옷'이라 경멸하고, 튜닉(가운 같은 겉옷)과 토가(헐렁한 겉옷)를 고집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도 평생 남녀공용인 휴마티온 한 벌로 살았다 한다. 지금의 미얀마를 봐도 웃옷은 양복을 입어도 아래옷은 론지라는 치마입기를 억세게 지킨다고 한다. 반면에 한랭건조한 대륙성 기후를 가진 나라, 이동하며 유목생활을 주로 하는 민족은 활동적인 바지를 입었다.

 

몽고인들은 말 안장에 앉아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었는데, 이 승마복이 오늘날 우리들이 입는 바지의 기원이라 한다. 이렇게 시작된 바지는 무수한 변형을 거쳐 청바지에 이르렀다.

 

 

5. 포크의 역사

 

나라마다 민족마다 제각기 독특하고 고유한 음식문화가 있기 마련인데, 세계적으로 수식(手食)문화가 40%, 포크문화 30%, 젓가락문화가 30%을 차지하고 그 중 젓가락은 한·중·일 세 나라가 오랫동안 공유해 왔습니다. 젓가락의 역사는 중국 은대에 청동제 젓가락이 사용되어 3000년도 넘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나타난 것은 벼농사 전래 이후의 일이라고 하니 1800년 전쯤 되었고, 일본은 우리보다 늦어 1400년 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젓가락에 비해 포크의 역사는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3지, 4지 형태의 포크는 14세기경부터 사용되었는데 16세기경 프랑스의 헨리 2세와 결혼한 이탈리아의 카트리나 왕비가 프랑스 궁중에서 포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때부터 귀족사회에서 포크나 나이프 사용이 일반화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후 서양에서 지금과 같이 나이프, 포크, 스푼이 한 세트로 사용된 것은 18세기말부터라고 합니다.

젓가락이 포크와 비교하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전통으로서 면면히 이어져 온 이유는 젓가락이 가지고 있는 과학성과 문화적 우수성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젓가락의 우수성은 포크 문화권인 서양에서 먼저 그 가치를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추세에 있습니다. 유럽과 북미의 상류층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고급 지식인 문화로 정착되어 있으며, 호주에서는 2000년에 젓가락 사용법을 담은 책이 베스트셀러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젓가락의 우수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젓가락질 잘 해야하는 이유?)
우선 젓가락은 막대기 두개의 단순한 모양이지만, 자유롭고 정교한 움직임은 포크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신기에 가까운 기능이 발휘됩니다. 음식물을 알맞게 찢고 모으고 잘라서 들어올리고, 때로는 휘청거리는 묵 따위를 달래며 집는 젓가락의 행위는 서양 식탁의 칼과 쇠스랑 같은 포크의 격한 움직임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젓가락의 정교한 움직임은 어린이 지능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젓가락은 포크 사용의 두 배가 넘는 30여 개의 관절과 50여 개의 근육이 함께 운동함으로써 가능하며 고도의 손가락 운동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손가락은 두뇌의 파견기관으로서 손가락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두뇌의 면적이 30%가 넘는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곧 손 기능을 잘 발달 시키는 것이 효율적인 두뇌발달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두뇌가 가장 왕성하게 발달되는 6세 이전에 젓가락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아동교육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젓가락은 자연스럽게 두뇌를 활발하게 사용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음식을 찔러서 먹는 공격적인 포크에 비해 EQ(감성지수)를 향상시킵니다. 음식을 먹는 일상적인 습관이기에 포크의 폭력적인 움직임과 젓가락의 이성적이고 평화적인 움직임의 차이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젓가락은 작은 물체를 집으려는 움직임을 통해 집중력을 향상시키며, 젓가락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근육조절능력, 눈으로 작은 물체를 보고 손으로 정확히 집어올리는 협응력 등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젓가락질에서 취할 수 있는 두뇌능력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매일 습관처럼 반복하는 식사시간에 이루어 진다는 것을 볼 때 이만한 교육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별도의 교육 프로그램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3세 이상의 어린이가 젓가락을 배우기에는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손가락 5개를 모두 사용해야 하고 젓가락에 힘을 주는 부분이 각기 다른 만큼 젓가락을 쥐는 자세부터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쓰기 편한 대용품으로 포크가 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요즘 상당수 초등학생들도 포크에 익숙해져 젓가락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실정이며, 이로 인해 1995년부터 초등학교 정규과목에 젓가락 사용법을 신설하여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근에 유아를 위한 어린이 전용 젓가락(에디슨젓가락)이 시중에 출시되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젓가락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우수성을 생각한다면 젓가락을 쉽고 정확한 자세로 배울 수 있는 제품이 너무 늦게 나왔다는 느낌입니다. 능숙한 젓가락질이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지는 않겠지만 수 천년 역사의 문화 정체성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의 IQ, EQ, 창의력이 밥상머리에서부터 시작되기에 올바른 젓가락 사용법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젓가락문화의 우수성으로 오랜 역사속에서도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며 현재의 젓가락 파지법이 오랜 역사속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음식을 집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전수 돼온것입니다. (엄지로 한쪽 젓가락을 끼우고 약지로 받치며 다른 한쪽 젓가락을 엄지,검지,중지 세손가락을 모아서 집는 방법)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어린 시절 잘못 배운 젓가락질은 성인이 되어서도 교정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한.중.일 3국의 공통적인 식습관으로는 역시 젓가락 문화를 꼽을 수 있다. 기타 아시아 국가를 포함하면 세계인구의 30%가 젓가락 문화권에 속한다고 한다. 인도인처럼 손가락을 사용하는 인구(40%)에는 못 미치지만 포크를 쓰는 서양인과는 비슷한 숫자다.

젓가락이 처음 등장한 것은 3천여년 전의 중국에서다. 처음에는 제례 행사에 사용됐으나 한(漢)나라 초기인 BC 200년께부터 식사 도구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사기(史記)'에는 군사 장량(張良)이 식사 중 유방(劉邦)의 젓가락을 빌려 정세를 설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반도에서는 신라 때부터 청동 수저가 사용됐다고 한다. 그 전통인지 지금도 금속제 수저를 많이 쓴다. 일본에선 8세기 초 나라(奈良)시대 이후 젓가락 문화가 보급됐다. 우리와는 달리 나무 젓가락이 주종이다. 특이한 것은 17세기 초 등장한 '와리바시(割箸)'다. 가운데가 살짝 붙어 있는 나무젓가락을 식사 전 두 쪽으로 쪼개 사용한 뒤 버리는 일회용이다. 자른다는 뜻의 '와리(割)'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었다. 처음엔 편리해서 썼지만 일본인들의 신경질적인 위생관념과 맞아떨어져 필수품이 됐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전해졌다.

일본에선 허름한 음식점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일본 호텔의 대표격인 호텔 오쿠라의 중국요리점 도카린(桃花林)에서도 와리바시를 쓴다. 도쿄(東京)의 고급 한식당 진로가든도 금속 수저와 함께 와리바시를 내놓는다. 일본의 와리바시 소비량은 하루에 1억개가 넘는다. 연간으로는 3백억개에 육박한다. 한국의 12배쯤이다. 순수한 목재로 치자면 약 30만㎥ 규모다. 제조업체들은 폐목재를 이용하므로 삼림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경단체들은 삼림 훼손은 물론 쓰레기 문제까지 심각해진다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1994년부터 음식점에서 일회용 나무젓가락 사용이 금지됐다. 지금은 장례식.회갑연에서 쓰거나 컵라면이나 도시락에 끼워 나온다. 한때 연간 65억개이던 소비량도 지금은 25억개로 줄었다. 야외에서 식사할 기회가 많은 휴가철이다. 일회용 나무젓가락도 자주 쓰게 된다. 잠시의 편리를 위해 지구의 '허파'를 해치거나 쓰레기를 늘리는 일은 피해야겠다.

 

  

 

세계의 식사 스타일은 동아시아의 젓가락 문화권, 유럽이나 남북아메리카의 나이프,포크 문화권, 그 밖의 지역에서의 수식(손으로 음식을 먹는) 문화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젓가락이 이미 기원전 4세기경 일반화되었다면 유럽인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식사는 손으로 직접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음식이 담긴 커다란 접시나 개인 접시는 있지만 포크나 수푼은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수식하는 습관은 예의와 매너가 갖춰지기 시작하는 18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수식을 하는 도중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었는데 두손을 모두 사용하면 안되고 또 손가락도 엄지, 검지, 중지 세 개만 사용하여야 상류층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볼 수 있는 핑거볼(손씻는 물을 담아두는 넓은 그릇)은 수식하던 시절의 흔적입니다.

포크는 식기 중에서 그 역사 가장 짧으며 비잔틴 제국에서 고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둘로 갈라진 소형 포크가 이탈리아 중부에 유입된 것은 11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 특히 그중에서도 종교적이유로 말미암아 널리 사용되지 못하다 15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금씩 인정받게 되었으며 그때도 포크를 사용하는 것은 남성답지 못한 여성적 경향이 강한 행동이라는 인식 때문에 냉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포크는 오랫동안 단지 장식품으로 기능하였으며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에서는 각광받지 못하였으나 18세기 프랑스 혁명이후 포크가 급속도로 재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위를 박탈당한 귀족이 평민과 차별화를 도모하기 위해 수식이 아닌 식사 예절의 일환으로 도입한 사치스러운 행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풍조가 확산되자 포크는 신분이 높은 자들이 사용하는 도구의 상징이 되었고, 수식은 천한 행동이 되었습니다.

 

  

 

이건 저희집에 있는 헨리 페트로스키박사의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원제:The Evolution of Useful Things,)라는 책에 있는 내용을 참조했습니다...(직접 치기때문에 오타가 나도 양해 바랍니다.)

최초로 식문화에 도입된 포크는 두 개의 갈퀴 내지는 갈래를 달고 있었는데 주로 주방에서 고기를 써는데 사용되었다. 고기를 찌른다는 점에서 뾰족한 아리프와 다를 바 없었지만 갈퀴가 두 개라서 고기를 자를 때 고기가 움직이거나 밀려나지않았다. 포크는 빨라야 7세기 무렵에 중동의 왕실에서 처음 식사도구로 사용되었으며, 11세기경 이탈리아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14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포크의 진가를 제대로 몰랐다. 영국에는 17세기에 처음으로 포크가 들장했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 스위스를 여행한 영국인 토머스 코리어트가 쓴 자신의 여행담이 있다. 이당시 영국에선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식탁위에 놓이면 식탁 앞에 둘러 앉은 사람들이 각자 고기덩어리를 한손으로 잡고 그 일부를 베어내야 했다. 코리어트는 이탈리아에서 다른 풍습을 보았다. 그들은 한손에 쥔 포크로 고기를 고정시킨다음 나이프로 먹기좋게 썰어먹는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스타일은 영국에서 유행했다. 그 당시 영국에서 존경받던 학식있는 사람들은 이 포크를 "겉멋만 잔뜩 든 간들거리는 물건" 이라고 했다. 그러나 새로운 유행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것 같다. 외갈퀴 포크는 널리 사용되는 물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모가 없는것도 아니다. 버터집게는 실제로 외갈퀴 포크이다. 달팽이집게다 호두집게도 외갈퀴 포크이다.. 이하생략.

두갈퀴 포크는 주방에서 고기를 썰고 그릇에 담는 데 제격이다. 칼로 고기를 썰 때 고기가 움직이면 안 되는데 포크는 손쉽게 고기를 찔렀다 빼냇다 할수 있었다. 두갈퀴 포크는 고기위에서 이동이 자유로웠고 잘라낸 고기 조각을 커다란 주방용 오븐에서 접시들로 옮기는 대도 요긴했다. 고정시킬 음식이 겉도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포크의 두 갈 퀴 사이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야했으므로 그거리는 얼마간 규격화 되기에 이르렀다. 이하 생략..

세개의 갈퀴가 일보 전진이었다면 네개의갈퀴는 이 보 전진이었다. 18세기 독일에서 발명된 네칼퀴 포크는 빗처럼 빗살이 많아 음식을 찌르고 빼기가 거북하지도 않았다. 이후 네갈퀴 포크는 발전을 거듭해 지금의 모습으로 오게되었다. 그동안 네개의 갈퀴들이 미를 위해서 곡선으로 밖으로 구부러지고, 손잡이가 권총모양으로 되는등의 변화를 시도했지만 그다지 큰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이리하여 지금의 아래쪽이 볼록하게 튀어나오고 정면에서 봤을때 네개의 갈퀴가 가지런히 평행이 되는 포크가 나온것 같습니다. 물론 5개도 있습니다만.. 눈도아프고 허리도 아파서 이만.. 도움이 되셨는진 모르겟지만.. 제가 도리어 질문에서 벗아난 다른 내용을 쓴건 아닌지.. 제가 직접 쳐서 너무 느린것 같습니다.. 앞으론 빠르게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휴우~

 

 

 

 

 

 

동서양 취식(取食)도구 문화에 대한 고찰

- 포크와 나이프, 스푼식문화권(食文化圈)과 저식문화권(箸食文化圈) -

조 경 숙*·이 미 혜**

* 경기대학 외식조리학과 박사과정

** 경기대학 식공간연출학과 석사과정

The Investigation against the Repast Tool Culture of

the Orient and the West

Fork and Knife, Spoon Cultural Area and Chopsticks Cultural Area

Kyong-Sook Cho* and Mee-Hye Lee**

* Gradulate Division of Tourism Science, Kyonggi University

** Kyonggi University

ABSTRACT

The today society comes wind important position we and the economic room gets and our dietary life simple 'it eats,' is not only the act which is primary work, 'it enjoys, ', ' appreciates' with culture dimension to execute, becoming, it followed hereupon and with the aesthetics idea which pursues the quality of change and life of our dietary life there is to a culture and the repast tool which is an essential width enjoyed from meaning as the jar tool and with meaning as the object and it will be able to appreciate it developed it came.

The research which it sees the repast tool of the Orient and the West it is appropriate from dietary life and it uses to respect, with It observes the understanding of the chopsticks and the cutlery. With the repast tool development and evolution or it undergoes the process of change and comparison analyzes becomes the all chopsticks and the cutlery with each other and the understanding for the culture collision and a culture harmony of the heterogeneous element which bisection is objective of research.

Key words : repast tool, chopsticks, cutlery, food culture, fusion, culture harmony.

Ⅰ. 서 론

1. 연구의 목적

일정한 절차 식사를 하는 행위에는 격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문화적인 전통 내지 관습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인간에게는 먹는 본능에도 이같이 전통과 관습의 제약을 받는다. 이처럼 먹는 일에도 따라 다니는 '무엇을 어떻게'로 표현되는 격식이란 생각에서 가장 소박한 문화의 패턴"이라는 개념이 그 기틀을 잡기 시작한다.1)

인간 생활 속의 의·식·주 중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거친 식생활 문화는 인간이 계승해온 문화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민족문화의 유산이며 문화척도의 하나가 된다. 한 민족이 서로 같은 환경과 같은 역사 속에서 자연적 환경자원을 활용하고 사회환경에 대응하면서 이제는 세계화를 통한 상호교류로 각 문화의 장점과 단점이 보완 유지되면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생활 수준의 향상과 복잡한 현대 산업사회에서 이러한 변화는 식생활의 실제적 기능의 보다 다양한 변화를 요구한다. 이것은 실제적 기능과 도구적 의미와, 즐기며 감상할 수 있는 심미적 기능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의 문화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가 풍요로워지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우리의 식생활도 단순히 '먹는다'는 일차작인 행위만이 아닌 '즐긴다', '감상한다'는 문화적 차원으로 이행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식생활의 변화와 생활의 질을 추구하는 미적 취향으로 식문화에 있어 필수품인 식사도구가 단지 도구로서의 의미에서 즐기며 감상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의미로 발전하여 왔다.

식생활은 의식주에 의한 환경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진다. 식사를 하는 방법의 하나인 도구로써 수저와 커트러리(스푼, 포크, 나이프)는 그것들을 발전, 유지시킬 수 있는 식문화를 갖고 있다. 수저로 식사할 수 있는 메뉴와 커트러리로 식사할 수 있는 메뉴 등에 의해 인류는 손으로 식사하는 문화권과 함께 크게 구별되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수저와 커트러리를 식사와 함께 잘 사용하는 여부에 따라 식사매너가 좋은 문화인으로써 분류되어져왔다. 특히 글로벌시대에 이르러 다양한 식문화의 접목에 따라 이 두가지를 잘 사용하여야 하는 식환경을 갖게 되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두 가지의 취식도구를 식생활에서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수저와 커트러리의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취식도구로써 발전과 진화 또는 변화의 과정을 겪어온 수저와 커트러리를 서로 비교 분석하여 양분화 되어 있는 이질적인 요소의 문화적 충돌과 문화적 융화를 위한 이해가 이 연구의 목적이다.

2. 연구의 범위와 방법

동양에서는 숟가락과 젓가락의 사용이, 그리고 서양에서는 포크·나이프 및 스푼의 사용이 각각의 음식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데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의 식생활의 근간을 이루었다.

 



1) 루스 베네딕트 저:김열규 역, 문화의 패턴, 까치, 1980, p.263.

사람들은 음식물을 조리할 뿐만 아니라 조리한 음식을 뜨거운 상태에서 젓가락(箸)이나 숟가락·포크 등을 이용하여 입으로 운반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여러 가지 문명이 발달한 시점에도 세계의 매우 넓은 지역에서 손으로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와 같은 취식도구(取食道具)의 차이는 시대, 지역 그리고 식문화의 발전과 관련이 있다.

현재 세계의 식사법을 삼분화(三分化)하면, 수식(手食), 저식(箸食), 포크와 나이프, 스푼식(食)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렇게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그 지역마다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식사법(食事法)으로 문화권을 구분하면, 아프리카와 중근동(中近東),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수식문화권(手食文化圈), 유럽과 아메리카대륙, 구(舊)소련 연방 등지의 포크와 나이프, 스푼식문화권(食文化圈), 중국과 한반도, 일본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저식문화권(箸食文化圈) 등으로 나눌 수 있다.2)

인구 분류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수식문화권은 40% 수저와 커트러리 문화권은 각각 30%로 인구의 60% 이상이 도구를 사용하여 식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는 포크와 나이프, 스푼식문화권(食文化圈)과 저식문화권(箸 食文化圈)의 취식도구(取食道具)를 비교함으로써 각 시대, 지역 그리고 식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으며, 국내·외 관련 문헌을 정리, 분석하였다.

이론적 배경으로 포크와 나이프, 스푼식문화권을 중심으로 커트러리의 이해와 스푼, 나이프, 포크의 기원과 배경을, 저식문화권을 중심으로 수저의 이해와 중국, 한국, 일본의 취식도구를 고찰, 결론을 도출한다.

<표1> 3대 문화권의 식사법

먹는법

기 능

특 징

지 역

인 구

수식문화권

(手食文化圈)

음식을 섞다

음식을 집다

음식을 나르다

이슬람교권, 힌두교권

동남아시아에서는 엄격함

수식매너가 있음

인류문화의 근원

동남아시아

중근동(中近東)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40%

저식문화권

(箸食文化圈)

음식을 섞다

음식을 집다

음식을 나르다

음식을 자르다

중국문명 중 화식(火食)에서 발생

중국과 한국에서는 수저가 세트

일본은 젓가락만 사용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

30%

포크와 나이프

스푼식문화권

음식을 자르다

음식을 찌르다

국물을 뜨다

음식을 나르다

17세기 프랑스 궁정요리

중에서 확립

빵만은 손으로 먹음

유럽, 구소련,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30%




Ⅱ. 이론적 배경

1. 커트러리의 문화권

1) 커트러리의 이해

커트러리(Cutlery)는 스푼, 포크, 나이프 등 식탁 위에서 음식을 먹기 위해 사용되는 도물류, 금물류를 통틀어 일컫는 말로, 플랫 웨어(Flat Ware)라고도 부른다.

"Flatware"은 미국 용어로 teapots and ewers와 같은 "hollow ware"와 상대적인 것을 의미한다3).

커트러리를 구성하는 것에는 스푼, 포크, 나이프가 있다. 이를 통틀어 커트러리라 부른다. 그 중에서도 은으로 된 제품을 제일 고급으로 치는데, 순은 제품과 도금 제품을 실버 웨어(Silver ware)라고도 한다.

유럽에서는 결혼할 때 신부들이 꼭 챙겨 가는 중요한 혼수품으로, 단순히 나이프, 포크, 스푼이라는 도구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식탁의 수준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커트러리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나 그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 등 유럽에서는 그 집안의 격식을 표현하는 한 부분이 되기도 하다.

커트러리 이름은 손잡이 부분의 문양에 따라 붙이는데, 서양 고가구의 패턴에서 그 문양을 딴 것들에는 퀸 엘리자베스, 그랜드 바로크, 프렌치 리전시, 치펀데일 등의 이름이 붙여진다. 단순하고 현대적인 문양을 대표하는 이스톤, 브리타니, 러시모어, 시티스크레이프 등은 심풀한 테이블에 잘 매치되는 스타일이다4).

오늘날 프랑스 요리가 정평이 나게 된 것도 이‘카트린느’라는 여성의 힘이 밑받침이 되었다. 그때까지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비해 맛없는 식사와 품위 없는 테이블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18세기까지 커트러리의 디자인은 심플하고 남성적이었다면 그 이후로는 여성적인 분위기를 지니면서 19세기에는 장식성이 강한 것이 등장했다5).

 



2) 원융희, 세계의 음식 문화, 자작나무, 1999, p.316.

3) Dunne·Southern Accents, the epicurean collector, Bulfinch, 2002, p.152.

4) 시공사, Table Setting casa living, 2000, p.59.p.64.

5) 木村子み, 食卓その空間と演出, 婦人畵報社, 1988, p.90.

식사 도구가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식기 도구들이 강점을 세기에는 장식성이 강한 갖는 부문에서 그만큼 여러 용도로 쓰이게끔 제품을 만들었음을 뜻한다.

상품 목록에 그림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그림이 없으면 비슷한 제품들을 구별하거나 양식은 달라도 같은 제품들을 골라내기가 거의 불가능해진 19세기 말에 들어와서였다.

1926년에 어떤 세트들은 146가지나 되는 식기류를 거느리고 있었다. 업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당시 상무부 장관이었던 허버트 후버는 앞으로 하나의 식기 세트에 들어가는 품목 수가 최대 55종을 넘지 않게 하자는 안을 내놓기도 했다6).

2) 스푼의 기원과 배경

기원전 2000년대에 크게 번성한 이집트인들은 스푼을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아마 포크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손가락으로 음식을 먹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가능한 한 음식을 뜨겁게 하여 식탁에 내놓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특이한 예에 불과하겠지만, 그들 중 일부는 "식사를 할 때 다른 손님들보다 빨리 시작하여 많이 먹으려는 욕심으로 평소에 열탕(熱湯)에 손을 담가 손가락을 단련시켰다.

고대 그리스의 항아리에는 향연의 정경이 많이 그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 나이프를 사용하는 사람이 그려져 있는 것은 하나뿐이어서 그리스인들은 대개 음식을 손가락으로 먹었음을 알 수 있다7).

로마인들은 귀족, 평민 모두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유럽 사람들도 오랫동안 손을 사용했다. 손으로 먹는 방법에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평민들은 다섯 손가락으로, 지체 있는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점잖게 음식을 집어먹었다8).

식기 도구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 스푼이며 이는 개인용이 아닌 요리를 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기원전 2000년 무렵의 스푼은 조개껍질에서 시작되었는데 손잡이는 짧은 형태였다.

 



6) 헨리 페트로스키 저 ; 이희재 역, 상게서, p.242.

7) 具千書 , 세계의 식생활 문화, 향문사, 1994, p.249.

8) Margaret Visser, the rituals of dinner, Penguin Books, 1991, p.169.

9) 헨리 페트로스키 저 : 이희재 역, 상게서, p.30.

조개나 굴, 홍합의 껍질은 스푼의 기능을 하였으나 접시에서 손가락을 적시지 않고 국물을 뜨기란 쉽지 않아서 손잡이가 자연스럽게 추가되었고, 나무를 재료로 만들었다. 스푼이라는 말 자체가 나무토막을 뜻하는 앵글로색슨 어의 "스폰 (spon)"에서 나왔다고 한다9).

그 후에 나무를 파서 만든 스푼을 사용한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중세 시대에 긴 나무 스푼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와 속담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신랑이 될 남자는 숲에서 나무를 베어 스푼의 형태를 2개 만들고 목걸이 같은 사슬을 연결시키는 일을 해야만 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밤을 보낸 날 아침 이 연결된 스푼으로 첫 아침식사를 하기 위한 것으로 지금도 북구의 산 속 지방에 전해지는 풍습이었다. 사슬로 연결하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으로 도중에 실패하면 단지 나무 부스러기가 되 버릴 뿐이었다. 현재까지 쓰이는 '스푼이 될까, 아니면 나무의 부스러기가 될까'라는 말이 성공할까 실패할까 라는 뜻의 속담이다. 동양에서는 결혼하는 두 사람을 인연의 실에 묶여진 사이라는 표현처럼 그들은 나무의 스푼처럼 연결되었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유럽에서 스푼에 관한 속담이나 전해지는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스푼이 옛날부터 생활의 상징, 즉 먹는 일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스푼을 벽에 건다'라고 하면 죽음을 의미했으며, '스푼을 바꿔 든다'고 하면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것은 뜻한다.

개인용 스푼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중세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이 무렵부터 스푼은 은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가치 있는 물건이 되었다. '그는 은 스푼을 입에 물고서 태어났다'라고 하면 부유한 집안의 태생을 가리키고, '나무 스푼을 갖고서 태어났다'고 하면 가난한 집안의 태생을 가리키게 되었던 것은 은이 사람들의 생활 속에 등장하게 되었던 중세의 일이다.

16세기 영국에서는 은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따라 그 집안의 재산을 측정하는 비유로 사용되기도 했다.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서 영국에서는 아이가 탄생 세례를 받으면 아포슬(사도의 스푼)이라고 불리우는 은 스푼을 선물하는 관습이 시작되었고 '먹는데 곤란함이 없이 행복하게 인생을 살도록’하는 축복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림 속에서 어머니에게 안긴 아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이 그 스푼으로, 디자인은 심플하다10).

스푼 제작에 주물 방식이 도입되면서 스푼의 모양은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정삼각형(자루는 꼭지점에), 타원형, 긴 삼각형(자루는 밑변에), 계란형, 그리고 다시 타원형으로 차례차례 변해 왔지만 기본적으로는 조개 모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시대와 양식에 따라 숟가락의 크기와 장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숟가락 전면 형태는 대부분 원통형, 다각형, 숟가락 쪽으로 서서히 폭이 좁아지는 형태의 막대나, 또는 주걱처럼 넓적한 손잡이가 사용된다. 주걱형 손잡이는 대 끝 쪽으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며 타원형 장식이나 투조장식 등으로 장식된다.

조개와 갑각류 등을 먹는데 사용된 조개의 소형 숟가락의 손잡이는 개폐(開閉) 역



10) 木村子み, 상게서, p.88.

할을 할 수 있도록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뾰족한 형태를 취했다. 양면 숟가락은 드물게 나타나는 형태이다. 접이식 휴대용 숟가락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중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형태이다. 측면 형태 면에서 보면 전면과 손잡이가 수평면상으로 연결된 형태와 접합점이 사선을 이루는 형태가 있다.

일반적으로 장식은 손잡이 부분에 국한되는 것이 규칙이다. 전면 부분이 장식되는 경우에는 선각이나 에나멜 등의 평면 장식이 사용된다. 숟가락의 소재로는 귀금속, 합금, 주석, 뼈, 뿔, 목재 등이 사용되며 전면과 손잡이에 서로 다른 소재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11).

3) 나이프의 기원과 배경

선사시대에 자르는 데 쓰는 모서리가 뾰족한 부싯돌과 찌르는 데 쓰는 끝이 날카로운 꼬챙이와 같은 서로 다른 도구들에서 나이프와 비슷한 도구가 발전되어 나왔다. 고대의 나이프는 청동이나 쇠로 만들어졌고 나무나 조개, 뿔로 된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나이프는 처음에 무기로서 사용되다가 마침내 식탁에 등장했고 14세기 무렵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개인용으로서가 아니라 이처럼 서빙하기 위한 공용의 것이었다. 급사는 폭이 넓은 커다란 클레덴자 (Credenza)라고 불리는 나이프에 고기를 얹어서 군주 앞에 내밀면 군주는 그것을 손으로 먹고서 테이블 클로스로 손을 닦았다. 이 크레덴자라는 것은 이탈리아어로 '믿는다'는 의미가 있어서 결국은 날라온 고기에 독이 없다는 것을 믿고서 먹는다는 것이다. 당시 은은 독이 있으면 색이 변한다고 여겼고, 크레덴자 나이프는 독이 들어있지 않은 요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12).

중세에 이르러 사람들은 수렵용 나이프와 같은 끝이 뾰족한 나이프를 사용하였고, 나이프와 포크가 개별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는 개인이 자기에게 배당된 고기를 자르기는 어려웠고, 따라서 누군가가 이를 잘게 썰어야 했으며, 더구나 육류는 누구나 똑같이 골고루 차례가 돌아가도록 해야 했기 때문에 로마시대나 중세의 사람(유럽)들에게는 고기를 잘라 주는 일이 중요한 기술이었다.

마상(馬上)시합 때에는 승리자가 선물로서 자기가 숭배하는 귀부인의 총애를 받는 것 외에 승리의 보답으로 종종 시합 후 연회석에서 고기 자르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13).

 



11) 이종문화사 편역 , 세계 장식 미술 (4), 이종문화사, 2000, p.403.

12) 木村子み, 상게서, p.89.

13) 具千書, 상게서, p.251.

칼 또한 오랫동안 '개인용' 소지품이었다. 중세에는 주인이 손님을 식사에 초대하는 경우, 칼을 식탁 위에 정식으로 내놓지 않았고, 손님들이 각자 허리띠에 달린 칼집 속에 넣어 지참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법이었다. 마침내 나이프가 스푼과 함께 사용되도록 된 것입니다.

중세의 세속 상류계급은 아주 호화스러운 식사도구와 식탁장식을 화려하게 해서 그들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였다. 식탁에는 금이며 크리스탈이며 산호며 휘록암 등으로 만든 스푼들이 놓여 있다. 사순절에는 흑단 손잡이가 달린 나이프가, 부활절에는 상아 손잡이가 달린 나이프가, 성신강림절에는 상감세공을 한 나이프가 사용되었다14).

중세 나이프 두 개를 휘두르며 하는 식사는 세련의 극치를 달리는 식사법이었다. 나이프 하나로 식탁 한복판의 고기를 고정시키고 또 하나의 나이프로 썰면 손에 기름기를 묻히지 않고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정 나이프가 스테이크를 찌르면 얼마 안 가서 스테이크는 마치 축에 달린 바퀴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처럼 고기를 자르기 위해 고정시킬 때 어려움이 속출하는 탓에 포크가 개발되었다.

루이 13세의 주교 및 총리였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끝이 뾰족한 식탁용 나이프를 모두 폐기 처분하도록 지시한 것은 만찬석에서 나이프의 뾰족한 끝으로 이빨을 쑤시는 모습에 정나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루이 14세는 빈발하는 폭력 사태의 대응책으로 식탁에서건 거리에서건 끝이 뾰족한 나이프의 사용을 불법화시켰다. 그러한 조치와 포크의 대중화된 보급이 맞물리면서 식탁용 나이프는 지금처럼 끝이 뭉툭한 날로 변하였다. 17세기 말에 이르면 날은 아라비아 언월도의 구부러진 칼날을 닮아가는데 뭉툭함 그 자체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포크가 아직 쌍갈퀴 포크라 수저의 기능을 맡기에는 미흡했으므로 나이프 날의 표면적을 넓게 하여 음식을 그 위에 안전하게 얹어 입으로 가져간다는 뜻도 숨어 있었을 것이다15).

형태와 소재 면에서는 숟가락에 적용되는 것이 그대로 나이프와 포크에도 적용된다. 손잡이의 장식도 숟가락의 장식과 맞춰 통일성을 유지한다. 숟가락의 앞 부분을 포크 살과 나이프 날로 대체하기만 하면 된다. 손잡이는 목재, 상아 등이 사용되며 수저와는 달리 음식을 자를 때 더 많은 힘을 받기 때문에 더 튼튼하게 제작해야 하며 날은 음식을 자를 수 있도록 강철로만 제작한다. 도판에 보이는 것처럼, 날의 모양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번 변천을 겪었다16).

 



14) 노버트 엘리아스 : 유희수 역, 매너의 역사, 1995, p.121.

15) 헨리 페트로스키 저 : 이희재 역, 상게서, p.27.

16) 이종문화사 편역, 상게서, p.404.

4) 포크의 기원과 배경

포크17)는 이집트에서 최초의 단순한 쇠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이 포크는 '식탁용'보다는 솥 안에 든 고깃덩어리를 집는 '조리용'으로 사용되었다. '손과 흡사하게 생긴 것이 손가락에 화상을 입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포크는 두 손에 기름을 묻히지 않게 해 준다는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천 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7세기 무렵 중동의 왕실에서 식사 도구로 사용되던 포크는 11세기경 이탈리아에 전해졌으나 14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진가를 몰랐다. 근대적인 형태의 포크는 베네치아의 도메니코 실비오(Domenico Silvio) 총독 부인이 최초로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금으로 만든 두 갈래의 쇠스랑'으로 식사를 하는 것은 처음에는 센세이션한 일로 받아들여졌고 나중에는 스캔들이 되었다. 1363년에서 1380년까지 재위한 프랑스의 샤를 5세가 남긴 재산 목록에는 금과 은으로 된 포크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식사용이라기보다는 과시용에 가까웠다18).

1533년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느 (Caterina de' Medici : Catherine de' Medici)가 프랑스의 알리 2세에 시집가면서 자신의 요리사들과 모든 식탁 도구들을 함께 가져간 것을 계기로 프랑스에도 소개된 바 있지만 대중적으로 확산되기까지는 약 1세기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왕도 뜨거운 요리를 먹을 때에는 손가락 씌우개인 골무(Sack)를 사용했다. 특히 뼈를 발라내지 않은 고기를 먹을 때는 습관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손가락으로 집어 이를 자신의 개인용 빵 접시에 옮겨 놓은 다음에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손가락의 청결 상태는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무엇보다 식사시간에 손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과 옆 사람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그릇을 만지던 손으로 머리나 목을 긁는 행위는 예의상 심각한 결례로 간주되었다.

둥근 주름 동정 시대에 이르러 사치한 옷에 얼룩을 묻히지 않으려고, 베네치아의 포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9).

포크가 대중화되지 못한 데에는 기독교 성직자들의 반감이 큰 역할을 했다. 성직자들은 하느님이 만든 인간의 손가락만이 하느님이 주신 음식을 만질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포크 사용을 비난했다. 종교의 지배력이 상당했던 만큼 사람들은 포크를 사용할 수 없었다. 어떤 목사는 '음식들에 손가락을 대지 않는 것은 신의 섭리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17) 'fork'라는 말은 농부의 건초용 포크를 의미하는 라틴어의 '풀카(furca)'에서 유래 (木村子み, 상게서, p.90.)

18) 박영수, 유행 속에 숨어 있는 역사의 비밀 (고대.중세편), 살림, 1998, p.312.

19) 임영상, 최영수, 노명환, 음식으로 본 서양문화, 대한교과서, 1997, p.34.

또 하나의 이유로 악마가 포크를 갖고 있던 것도 포크 사용을 꺼린 이유다. 오늘날의 포크 끝이 4개인 것이 많은 것도 끝이 3개인 악마의 포크와 같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20). 그렇기 때문에 포크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이 수백 년간 지속되었다. 12세기경 이탈리아 베니스에 사는 어느 귀족 부인은 자신이 디자인한 포크로 식사를 했다가 잘난 척한다는 비난을 들었으며 며칠 뒤 전염병으로 그녀가 죽자, 목사들은 그녀의 죽음이 신의 처벌이라고 설교한 일도 있었다.

포크 사용이 전 유럽으로 퍼지는 데에는 한 사람의 여행담이 촉매역할을 했다. 1608년 영국인 토머스 코리어트는 유럽 곳곳을 여행, 여행담을 [5개월 동안 허겁지겁 주워 삼킨 이색 풍물]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면서 포크 사용을 적극 권장하였다. 하지만 코리어트는 영국 사람들에게 비웃음만 샀다. 코리어트에게는 '퍼시퍼'(furcifer), 즉 '포크잡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는데 이 말에는 '교수형에 처해 마땅한 작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코리어트의 책은 포크 사용의 대중화에는 실패했지만 포크에 대한 강한 주목 효과를 이끌어 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17세기경 이탈리아에서 일부 사람들이 포크를 쓰기 시작했지만 항간의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특히 남자가 포크를 사용하면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사람 또는 여자 같다는 말을 들었다21).

17세기 말부터 사람들은 포크 사용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포크의 형태도 2개에서 3, 4개의 날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당시 식사 예절에 관한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올바른 사용법과는 정반대로, 포크를 마치 이쑤시개처럼 사용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포크에 대한 관심은 그로부터 1백년쯤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18세기초 영국과 독일에서 오늘날과 같은 네갈퀴 포크가 사용되었으며, 18세기 중엽 프랑스에서는 신분 구분을 강조하기 위해 포크 사용이 장려되었다. 그 후로 포크는 사치 세련됨, 지위의 상징이 되었으며 아이로니컬하게도 음식을 손가락으로 만지는 '촌놈' 취급을 받게 되었다. 갈퀴가 다섯 개 달린 포크도 나왔지만 네 개가 가장 무난해 보였다. 네 개의 갈퀴는 입에 넣기 어려울 만큼 옆으로 퍼지지는 않았다. 음식을 찌르고 빼기가 거북하지도 않았다22).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포크·나이프 및 스푼으로 먹는 역사는 그다지 깊지 않다.

중세의 유럽에서는 상류층에서도 큰그릇에 담긴 음식물을 손으로 마구 먹거나, 가장이나 연장자가 도구를 써서 개인에게 나눠주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 木村子み, 상게서, p.90.

21) 박영수, 상게서, p.314.

22) 헨리 페트로스키 저 : 이희재 역, 상게서, p.26.

16세기경부터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상류사회에서 개인용 나이프·포크·스푼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었고, 독일·프랑스·영국·북유럽에서는 17세기 이후에야 도구의 사용이 대중화되었다.

나이프·포크 및 스푼의 세 세트를 식탁에 앉은 모두에게 나누어주어 음식을 먹게 하는 습관은 상류사회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서민의 일상생활에까지 퍼지게 된 데는 각 나라마다 차이를 나타낸다.

이와 같이 나이프·포크 및 스푼을 사용하여 개인별로 분배된 접시의 음식을 먹는 구미지역의 근대의 식사형식은 유럽의 여러 나라가 전 세계에 적극적으로 진출함에 따라 슬라브 세계와 오세아니아 및 남·북아메리카로 확산되었다.

 

<표 2> 커트러리 품명과 용도

Cutlery

 

자료 : 丸山洋子, テ-ブルユ-ディネ-ト, 共立速記印刷株式會社, 2001, p.166.



2. 저식문화권

1) 수저의 이해

동아시아의 중국을 기점으로 한국·일본·베트남 등의 유교문화권(儒敎文化圈)이 수저를 사용하는 수저식 문화권에 속한다. 한국은 수저를 동시에 상에 놓고 국물이 있는 음식과 밥은 숟가락을 써서 먹는다. 중국의 경우 원대(元代)까지는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썼으나, 그 이후에는 밥은 젓가락으로 먹고 숟가락은 수프 전용의 도구가 되었다. 일본은 젓가락만으로 음식을 먹는 전통을 형성하여 국을 먹을 때는 국그릇을 들어 올려 입으로 직접 마신다. 하지만 젓가락도 각 나라의 음식문화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달라졌다.

중국 젓가락은 전국시대(BC 403∼221)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저(箸)"란 글자가 나타난다. 역시 젓가락을 가리키는 협(竿)(젓가락-협)이란 글자도 나타난다. 저(箸)는 죽(竹)자가 들어간 것을 보면 처음에는 대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겠고, 竿은 木(나무목변)이니 나뭇가지를 깎아서 만들기도 하였다는 것이다24).

현대 중국어로 젓가락은 '콰이즈'(睭子)라 하고, 고대 중국어로는 '주'(箸)이다. 저(箸)의 속칭으로 쾌자(快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명나라의 루릉(陸容)이 쓴 [숙원잡기(菽園雜記)]에 나온다. 즉 오중(誤中)에서 住(중국어로 '주')를 잘못 옮겨 箸(중국어로 '주')로 써서 이를 바로 잡으려 箸대신 '콰이어'(快兒)라는 말을 쓴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후에 대나무로 많이 만든다 하여 '쾌자'(睭子)가 되었다. 명나라에 들어와 '콰이즈'라는 신조어의 유행과 보편화는 묘하게 숟가락의 퇴색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다. 이는 창쟝 이남에서 보편적이었던 젓가락이 북방까지 전해져서 명나라 시

<표 3> 한국·일본·중국의 젓가락 비교23)

한 국

일 본

중 국

명 칭

젓가락

하시

콰이즈

재 질

금속

나무

플라스틱·대나무

형 태

납작하고, 위·아래의

굵기에 차이가 적다.

끝이 뾰족하고,길이가

짧으며, 위·아래의

굵기에 차이가 크다.

끝이 뭉뚝하고, 길이가

길고, 위·아래의 굵기에

차이가 없다.

특 징

다양한 반찬을

집기에 적당하다.

생선을 발라먹기에

적당하다.

기름지고 뜨거운 음식

집기에 적당하다.



23) 구난숙 외 3명, 세계속의 음식문화, 교문사, 2001, p.6.

24) 이성우, 韓國食品文化史, 敎文社, 1984, p.276.



기의 중국인들이 대부분의 식사를 젓가락으로 하게 되었음을 반증해 준다25).

한국의 수저란「숟가락의 높임말이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뜻하기도 한다. 숟가락은 밥이나 국물을 떠먹는 식사용 기구이고 젓가락은 음식을 끼워서 집는 기구」라하고 있다26).

우리나라에도 선사시대부터 젓가락이 있었을 것이나 실물로서 처음 출토된 것은 6세기 초 백제 임금인 무령왕릉에서였다. 핀셋 모양으로 굽혀 만든 집게형 젓가락은 신라시대 고찰인 감은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이 핀셋형 젓가락을 젓가락의 원형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고려 때 우리말 사전인<계림유사>에 숟가락은 술, 젓가락은 절(折)로 발음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젓가락을 절로 표기했음은 초기 젓가락을 핀셋 모양으로 꺾어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젓가락의 어원을 '저(箸)'에다 '가락'을 붙인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술가락'이 '숟가락'으로 발음되듯이 '절가락'이 '젓가락'으로 구개음화 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27).

동양인이 식사하는 것을 본 어떤 서양인은 "새가 모이를 쪼아먹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젓가락을 새의 부리와 비슷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일본인은 젓가락을 [하시]라 하는데 이것은 또한 새의 부리 곧 주둥이(구찌바시)의 [바시]가 [하시]로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28).

2) 중국의 취식도구

저식문화도 이슬람이나 힌두교국가의 수식문화처럼 종교의식 안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젓가락의 출현이 가장 먼저 보여지는 곳은 중국이다. 약 3,500년 전의 중국 은대(殷代:BC1700∼BC1200년)의 유적에서 보여지는 청동제의 젓가락과 숟가락은 일상생활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조상과 신에게 음식물을 바치는 종교의식의 예기(禮器)로써 사용된 것이다29).

<예기(禮器)> 곡례편(曲禮篇)에 회식(會食)할 때의 에티켓을 적은 글이 있는데, 밥은 맨손으로 먹되 국 속의 건더기를 건져 먹을 때는 젓가락을 쓴다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대 중국 사람들은 맨손과 젓가락으로 식사를 했던 것이다30).

 



25) 국제한국학회, 상게서, p.290.

26) 박인숙, 은수저 개발에 관한 연구, 숙명여대 석사학위논문, 1992, p.2.

27) 이규태, 한국인의 밥상문화 2., 신원문화사, 2000, p.98.

28) 이성우, 상게서, p.293.

29) 신민배, 젓가락과 일본 식문화의 관련성 연구, 계명대 석사학위논문. 2001, p.6.

30) 이규태, 한국인의 생활구조. 2:한국인의 음식 이야기, 기린원, 1994, p.62.

춘추시대(春秋時代:BC770∼403년)문헌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도 식사를 손으로 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도 손으로 식사를 했고, 젓가락은 일반식사용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에 왕후귀족이 식기로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일반민중이 식기로 사용한 것은 전한시대(前漢時代:BC206∼AD7년)부터이다.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器)>에는 당시 젓가락 사용방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밥은 숟가락으로 반찬은 젓가락으로 먹는다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젓가락의 사용이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 식사시에 젓가락의 사용은 상당히 보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당나라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북방 민족으로부터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는 방식을 배우게 되는데, 이때부터 젓가락과 숟가락의 사용이 하나의 세트가 되어 식사에 사용되었다.

송대(宋代:960∼1279년)에 이르러 몽고의 세력이 강해지자, 한족(漢族)은 강남(江南)지방으로 내려가 찰기가 있는 강남의 쌀을 먹게 되는데 이때부터 젓가락을 주로 사용해 밥을 먹게 된다. 당시 북방과 남방의 식습관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남방 사람들은 식사 때 주로 젓가락을 썼는데 비해 북방 사람들은 비교적 낱알이 작은 조와 수수 등의 잡곡이 주식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젓가락만으로 밥을 먹기는 힘들어서 숟가락을 이용했다31).

당대에서 송대에 걸쳐 식생활 양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당나라 때부터 돗자리를 쓰지 않게 되었고, 송대에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의자와 테이블이 일상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단면이 둥근 젓가락을 자주 쓰고 있었으나 젓가락을 가로로 놓으면 젓가락이 식탁에서 쉽게 굴러 떨어지므로 세로로 놓게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와서 젓가락의 길이가 30cm 전후로 표준화되었다32).

명대(明代:1368∼1661년)에 이르러 한족이 다시 화북지방으로 돌아왔지만 찰기가 없는 그 지방 쌀을 젓가락으로 먹는 관습이 그대로 이어졌고, 화남지방 사람들이 중심세력을 이뤄 오늘날의 젓가락 중심의 식사법이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명나라의 젓가락 손잡이 부분의 모양이 사각의 방형(方形)이며 음식을 집는 끝 부분은 둥근 형태를 보인다. 이는 오늘날 중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젓가락과 모양과 크기에서 매우 유사하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은 명나라 때의 젓가락을 현재의 중국 젓가락 정형으로 인정한다.

 



31) 신민배, 상게서, p.7.

32) 장징 저, 박해순 역, 공자의 식탁, 뿌리와 이파리, 2002, p.178.

명나라때 화북 지역 사람들이 주식으로 멥쌀을 먹게 되면서 젓가락을 사용한 것과 함께 다가온 또 다른 변동 요인은 중국 음식과 식용유의 관계이다. 우리가 중국 음식에 대해 가지는 '맛이 느끼하다'는 인식과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중국 음식의 조리 과정에서 많이 쓰이는 기름 때문이다. 중국 음식의 조리법은 대체로 볶고, 졸이고, 튀기고, 찌고, 굽는법으로 나뉜다. 각각의 조리 과정에서 기름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재료에 든다.

기름을 많이 써서 조리한 뜨거운 음식은 젓가락으로 먹어야 한다. 만약 이것을 숟가락으로 먹었을 경우 기름과 함께 음식을 먹게 되어 맛이 좋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당나라 이후 차 마시는 습속이 완전히 일상에 자리를 잡으면서 점차 국물이 있는 음식을 적게 먹게 되고 이로 인해 자연히 숟가락은 퇴보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중국 북방인은 단지 '훈둔'33)을 먹을 때 중국식 숟가락을 사용한다.

지금 중국사람들에게도 숟가락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먼 옛날 은나라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쓰던 청동기 숟가락이 아니다. 그저 사기(沙器)로 만들어 극히 조잡할 뿐만 아니라 국물을 떠먹을때만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의 이름을 탕쓰라 이르고 있다. 밥은 반드시 젓가락으로 먹고 있으며 젓가락으로 먹어야만 맛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34).

3) 한국의 취식도구

한반도의 경우 약 3.000년∼4.000년 전 쌀의 품종이 이미 찰기가 있는 자포니카 종류의 쌀로 밥을 해먹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젓가락과 숟가락이 모두 남게 되었다. 그 이유는 국물에 건더기가 있는 경우는 젓가락을 사용하지만, 건더기가 없으면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좁쌀로 지은 밥은 젓가락(箸)을 사용하지 않고, 숟가락으로 먹으면 편리하다.

일본의 중국인 민족학자 슈닷세이(周達生)는 한국의 이러한 현상을 두고 숭유 사상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즉 그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의 숟가락으로 밥과 탕·국·찌개를 먹고, 젓가락으로 다른 반찬을 먹는 습관은 고대 중국의 『주례(周禮)』에 나오는 예법과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 시대 사람들은 철저하게 주나라 때의 것을 모범으로 삼아 식사를 했다는 점이 한국의 전통적인 식사법에 반영되어 있다35).

 



33) 물만두 계통으로 국물과 함께 먹는다. (국제한국학회. 상게서, p.290.)

34) 박문기, 숟가락, 정신세계사, 1999, p.42.

35) 국제한국학회, 상게서, p.296.

우리는 '탕' 또는 '국의 민족'이라 해도 괜찮을 만큼 우리 음식이름 뒤에는 탕, 국이 들어가는 음식이 많다. 우선 탕이나 국을 먹기 위해서는 숟가락이 필요하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개인에게 지정된 숟가락은 이미 자취를 감춰 별로 볼 수가 없다. 중국 사람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젓가락을 사용하여 식사를 하고 있다. 간혹 신발모양의 조그만 사기 숟가락 정도를 이용하나 이는 뜨거운 국물을 마실 때만 사용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일본인은 거의 젓가락만 사용하여 식사를 하고 있으며, 큰 그릇에 든 요리들을 각자의 먹을 만큼만 떠가기 위해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쓸 수 있는 큰 숟가락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일본인들은 젓가락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하는 게 보통이다. 밥도 공기째 들어 젓가락으로, 국도 컵 들 듯 국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시고는 건더기는 젓가락으로 먹는 게 일반적이다. 일본인들은 아이들이나 숟가락을 이용해 밥을 먹는다고 생각한다.

같은 한자를 많이 쓰는 일본에도 '음식(飮食)'이란 말은 없다. 음식을 '다베(食)모노(物)'라고 하여 마시는 것이 제외돼 있다. 그렇기에 역시 숟가락이 없다.

또한 일본인들이 비교적 낮은 상에서 식사하면서 자연 그릇을 들고 먹게 되고 이에 따라 젓가락 위주의 식습관이 형성된 것이다.

수저는 기본적인 구조가 총과 봉으로 되어 있다.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는 성인의 은수저 무게는 약 30돈 정도이며 봉의 길이는 약 5.5cm, 총의 길이는 약 14.5cm 정도로 전체 숟가락의 길이는 20cm 정도이며 젓가락의 길이는 약 18.5cm 정도가 평균적 길이로 볼 수 있다.

수저는 원시시대가 지나고 농경생활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숟가락은 고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36).

동방에서도 처음에는 수식(手食)을 하다가 청동기시대에 접어들고 있으면서 숟가락을 사용하게 되었다. B.C. 6∼7세기경의 유적으로 보이는 골제(骨製) 숟가락이 함경북도 나진의 초도(草島)와 만주의 길림성(吉林省)에서 출토되었으며, 황해도 황주(黃州)의 흑교(黑橋)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동제(銅製) 숟가락이 출토되었다. 또한, 523년의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이 동시에 출토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중국형 (中國型)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백제의 숟가락 형태에 있어서는 숟가락의 손잡이가 3개 모두 벌어진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봉의 형태도 은행열매 모양으로 되어 있다37).

통일신라시대의 황해도 평산 유물로 보아 이때부터 중국과는 다르게 독특한 숟가락의 모양이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수저양식은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납작한 봉에 총을 연결하는 부분이 가늘어지고, 봉과 총을 연결하는 부분이 정연하게 각이 지는 형이다.

 



36) 박인숙, 상게서, p.3.

37) 구천서, 상게서, p.38.

고려 시대로 접어들면서 숟가락의 모양은 우아하고 가냘프고 가볍게 변화했다. 봉은 좁고 가늘게 길어져 연꽃잎사귀 모양이 되었고, 총의 모양이 다양하고 아름답다. 총은 가늘고 길게 활 등처럼 굽어서, 그 선의 아름다움은 고려시대의 사기그릇들이 지닌 흐르는 듯한 선의 아름다움과 닮았다. 젓가락은 요즈음 형태와 비슷하며 손잡이 부분은 방형이다.

고려시대부터 젓가락의 출토가 한결 많아진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후 수저문화권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는 많은 장식을 하던 고려 때의 수저와는 달라져서 숟가락의 봉은 넓어지고 둥글어졌으며 총은 곧고 꾸밈새가 없어졌다. 봉과 총의 연결부가 정확하게 구별되지 않으며 측면에서 본 곡선도 거의 휘지 않는다. 또 총 부분이 보다 두껍고 곧아져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합리적이다. 즉 조선 시대의 숟가락은, 숟가락이 지니는 기능을 궁극적으로 추구하여 단순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특기할 것은 봉 바닥을 완전히 투각하여 은, 동 등의 색이 다른 금속을 상감하여 바닥 뒷면에까지 양이 나타나게 하는 상감기법이 나타난 것이다. 재료로는 고려 시대에는 주로 청동을 사용했으나, 조신 시대에는 황동이 사용되고 있다. 젓가락은 사각형이나 집는 부위에 가면서 원형이 되고 마디가 없어지는 단순한 형태가 된다.

근대는 개화사상으로 장인들은 창조한다는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가업을 팽개쳤으며 생산되는 물건도 조악해졌다. 일본의 식민지 치하라는 사회적·정치적 여건으로는 공예문화로서의 수저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38).

4) 일본의 취식도구

일본에서는 한반도를 경유하여, 또는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38) 박인숙, 상게서, p.7-10.

일본에서의 젓가락 사용은 야요이시대 후반부터 고분(古墳)시대에 이르러 사용되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손으로 집어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대나무를 구부려서 핀셋모양인 U자형으로 사용했다. U자형 젓가락의 사용은 현재에도 다이조사이(大장祭) 의 신찬(神饌)에 놓여진다는 데서 그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 지금과 같은 두 자루의 젓가락을 사용한 것은 고분시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조정의 공연(供宴)의식에서 저식(箸食, 젓가락을 사용해서 식사를 하는 것)제도를 채용해 궁중의 제의에 사용했다. 스이코천황(推古天皇) 15년(607년), 조정에서는 오노노이모코(小野妹子)를 중국(隨)에 파견하는데, 이 때 일행은 젓가락과 숟가락을 함께 사용한 식사법으로 성대한 환대를 받고 이듬해 귀국을 했다. 이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 식사를 손으로 해결하고 있었는데, 오노노이모코가 배워온 식사법을 흉내내어 궁중에서 처음으로 정식의 저식법(箸食法)에 의한 환영의 연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에서의 궁중제의에 처음으로 젓가락과 숟가락이 등장하는 내용으로, 헤이안(平安)시대에 까지 궁중의 공식적인 연회에서는 이 목제의 젓가락과 숟가락이 세트를 이루어 사용되었다.

덴무(天武) 4년부터 불교상의 이유에서 뿐만이 아니라 실리(實利)나 가뭄, 기근, 그리고 황태후의 쾌유(快癒)를 기원한 주술적인 의미로 살생금지령이 시행되었다. 육식금지령의 시행으로 인해 사람들은 일본풍토에 맞는 생선과 야채를 소재로 해서 칼로 잘라 젓가락으로 먹기 편한 요리를 발달시켰다. 무사들이 정권을 잡고 귀족이 몰락하는 가마쿠라(鎌倉)시대가 되자, 숟가락은 자취를 감추고 서민들도 젓가락만을 사용해서 식사를 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야요이시대부터 찰기가 있는 자포니카 종류의 쌀을 부식으로 해서 중국의 화북지방이나 한반도와 달리 밥을 먹는데는 젓가락으로 충분했기 때문에 숟가락은 자취를 감추었다39).

한국의 이러한 젓가락 문화는 전통에 비해 중국과 일본은 최근 100여 년 사이에 많은 변화를 거친다. 당나라 이후 상호간의 사회·문화적 차이와 소원(疏遠) 관계로 인해 비슷한 시기에 전파되어 온 한국과 일본의 숟가락과 젓가락은 완전히 다르게 변용되었고, 결국 오늘날 한국인은 여전히 숟가락으로 밥과 국을 먹고, 일본인은 젓가락으로 밥과 국을 먹고 있다. 숟가락과 젓가락의 문화 변용은 지금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외부의 시각에서는 동아시아 세 나라가 젓가락만을 사용하는 듯이 보인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이처럼 외국 문물을 자기나라에 알맞게 변화·동화시키는 것을 '동일성화'라 한다.

중국의 음식문화가 한국에 들어와 동일성화한 것으로 수저의 변천을 들 수 있다.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중국과 같은 수저문화권에서도 숟가락의 비중이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그 이유로 중화요리가 물기가 배제된 건성(乾性) 음식으로 발전한 데 비해 우리나라 음식은 물기가 많은 습성(濕性)음식으로 발전해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중화요리에서 습성 음식은 죽이나 탕 등 전체 음식의 10% 미만인 데 비해, 한국에서는 건성 음식이 10% 미만이다. 국에도 물이 출렁, 김치·물김치와 각종 찌개에도 물이 출렁, 된장·간장에도 물이 출렁, 숟가락 없이 먹을 수 없는 음식투성이인 것이다.

 



39) 신민배, 상게서, p.9-11.

40) 장징 저, 박해순 역, 상게서, p.238-239.

온통 습성 음식이기에 한국의 식기는 예외 없이 물기가 흐르지 않도록 만들어진 입체형이다. 중화요리를 담는 식기의 80%는 물기 있는 음식을 담으며 흘러내리는 평면형 접시라는 것만 보더라도 음식의 건습(乾濕)을 견주어 볼 수가 있다. 곧 숟가락 문화는 그 뿌리인 종주국에서 사라졌거나 사라져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여 유지하고 있는 수용형 음식문화라 할 수 있다40).

Ⅲ. 결 론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디자인과 산업이 협동하여 새로운 문화를 형성시켜 가고 있다. 이러한 산업의 발달로 동·서양의 문화가 활발히 교류되고 있는 최근에는 퓨전(fusion)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등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즉, 퓨전은 상상력이며 새로움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이며 탐구라 할 수 있으며, 퓨전의 뒤섞임은 현 시대의 특성을 반영하는 문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하나만 가지고는 이 시대의 변화와 다양성에 뒤따를 수 없기에 다른 재료와의 혼합에 의해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고픈 절충 문화인 것이다41).

동서양을 크로스 오버하는 시대에 따른 필연적 결과인 수저와 커트러리를 하나의 식탁에서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문화적 동질성을 갖게 되었다.

수저의 문화적 편의성은 커트러리 문화권의 새로운 식탁 매너를 창출하였다고 볼 수 있다. 태초에 하나의 스푼에서 시작된 인류의 시식문화형식은 각각의 수많은 역사의 과정을 겪으면서 이 시대에 이르러 다시 하나로 융화되어감을 알 수 있다.

수저와 커트러리 즉, 동양과 서양의 음식, 동양인과 서양인의 식사법으로 새로운 문화적 결합을 가져올 새로운 시점을 예상 할 수 있다고 본 연구는 그 결과를 추정해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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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구천서(1994) : 세계의 식생활 문화, 향문사.

3. 국제한국학회(1999) : 실크로드와 한국문화, 소나무.

4. 노버트 엘리아스(1995) : 유희수 역, 매너의 역사.

5.루스 베네딕트 저(1980) : 김열규 역, 문화의 패턴, 까치.

6.박문기(1999) : 숟가락 , 정신세계사.

7.박영수(1998) : 유행 속에 숨어 있는 역사의 비밀(고대.중세편), 살림.

8.박인숙(1992) : 은수저 개발에 관한 연구, 숙명여대 석사학위논문.

9.시공사(2000) : Table Setting casa living.

10.신민배(2001) : 젓가락과 일본 식문화의 관련성 연구, 계명대 석사학위논문.

11.원융희(1999) : 세계의 음식 문화, 자작나무.

12.이규태(2000) : 한국인의 밥상문화 2., 신원문화사.

 



41) 이재희, 식기 디자인 개발에 관한 연구, 경희대 석사학위논문, 2001, p.31.

13.이규태(1994) : 한국인의 생활구조. 2, 한국인의 음식 이야기, 기린원.

14.이성우(1984) : 韓國食品文化史, 敎文社.

15.이재희(2001) : 식기 디자인 개발에 관한 연구, 경희대 석사학위논문.

16.이종문화사 편역(2000) : 세계 장식 미술 (4), 이종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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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헨리 페트로스키 저(지호 1995) : 이희재 역,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20.Dunne·Southern Accents(2002) : the epicurean collector, Bulfinch.

21.Margaret Visser(1991) : the rituals of dinner, Penguin Books.

22.木村子み(1998) : 食卓その空間と演出, 婦人畵報社.

23.丸山洋子(2001) : テ-ブルユ-ディネ-ト, 共立速記印刷株式會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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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이덕일 사랑] 페이퍼 로드
2006.12.19 22:43 중국의 어휘사전 ‘사해’(辭海) 최신판은 후한(後漢)의 채륜(蔡倫·?~121)이 서기 105년 종이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중국에서 불교가 전래되면서 제지법도 전파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1963~ 65년 발굴한 평양의 정백동 2호 고분에서 놀라운 유물이 출토됐다. 정백동 2호 고분에선 고상현(高常賢)이라 새겨진 은인(銀印)이 나와 고상현 묘라고 불린다. 여기에서 영시3년(永始三年:서기전 14년)이란 연대가 적힌 양산대와 함께 종잇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372년 고구려에 제지법이 전파됐다는 기존 학설이 틀렸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채륜의 종이 발명보다 120년쯤이나 이른 시기이다. 우리나라에 제지법이 전파된 시기에 대한 학설뿐만 아니라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다는 기존 학설도 수정해야 함을 뜻한다. 계성제지 그룹에서 세운 ‘계성종이역사박물관’의 조형균(曺亨均) 관장은 종이의 전파경로를 페이퍼 로드(Paper Road)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문명의 전달통로인 페이퍼 로드가 실크로드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페이퍼 로드에서 주목해야 할 유물이 서기전 180~142년 무렵 현재의 중국 감숙성(甘肅省) 지역의 무덤에서 출토된 방마탄지(放馬灘紙)이다. 방마탄지엔 지도가 그려져 있어서 최초의 지도로도 유명한데, 채륜의 종이발명보다 250년 이상 앞선다. 그러나 중국학자들은 이 획기적 발견을 무시하고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방마탄지가 출토된 시기의 감숙성 지역은 한족(漢族)들의 땅이 아니라 흉노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중국 한(漢)나라는 흉노에 매년 조공을 바치는 약국(弱國)이었다. 중국의 고대 사서(史書)는 흉노와 고구려를 전통적인 우호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서기전 1세기 무렵 고구려의 고상현 무덤에서 출토된 종잇조각도 흉노와 교류한 증거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 땅에서 선진 문물이 나오면 무조건 ‘중국에서 왔다’는 사대주의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채륜은 종이의 개량자에 불과하다.  2006/12/20 09:17:45  
풀뿌리 [이덕일 사랑] 한민족과 페이퍼 로드
2006.12.21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추고천황(推古天皇)’ 18년(서기 610)조는 ‘고구려왕이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을 보내왔다. 담징은 오경(五經)을 알고 있었다. 또 채색(彩色)과 종이〔紙〕·먹〔墨〕을 만들고 연애(??·수력을 이용한 맷돌)를 만들었다. 연애를 만든 것은 이때가 처음일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에서 종이가 제조됐다는 최초의 문헌기록이다. ‘연애를 만든 것은 이때가 처음일 것’이라고 맷돌만 특별히 부기한 것은 제지술이 그 이전에 이미 전해졌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계성종이박물관’의 조형균(曺亨均) 관장은 이보다 훨씬 전에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제지술을 전했다고 설명한다. 후쿠이현(福井縣) 이마다테(今立) 지방의 지조신(紙造神)인 ‘가와카미 고젠(川上御前) 전설’과 오카후토 신사(岡太神社)에 관한 기록 등에 따르면 서기 500년경 일본의 문명전달 통로였던 쓰루가만(敦賀灣)으로 상륙한 우리 선조들에 의해 이마다테 지방에 제지술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일본 제지기술의 메카가 되는데, ‘쓰루가’는 우리 말 ‘들어가’의 이두식 표현이라 한다. 서방 세계에 제지술이 전파되는 데는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751년 유명한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에 패전하는데, 이때 사마르칸트로 끌려간 2만여 명의 포로 중에 제지기술자가 있었던 것이다. 762년 중국 광주(廣州)로 돌아온 포로 출신 두환(杜環)이 쓴 아랍 기행문 ‘경행기’(經行記)의 일부가 ‘통전’(通典)에 전해지는데, 금은세공사 등 다양한 기술자들이 끌려갔다고 말한다. 아랍의 사학자들도 포로 중에 아마(亞麻)·대마(大麻) 등으로 종이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아랍은 양피지나 파피루스를 사용하는 수준이었다. 제지술은 사마르칸트와 바그다드를 거쳐 13세기경에는 유럽에 전해지면서 르네상스 문명을 꽃피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민족은 일본과 유럽에 제지술을 전한 문명의 전파자, 즉 페이퍼 로드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2006/12/27 08:36:43  
풀뿌리 [분수대] 라면고 [중앙일보 07/1/8]
라면은 한자로 납면(拉麵)이라 쓴다. 중국에서는 오로지 손으로만 뽑는 면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늘린 뒤 칼로 잘라 내는 절면(切麵)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일본에서는 칼로 썰든 기계로 뽑든 상관없이 밀가루 반죽에 소금 성분의 용액인 간수를 섞어 만든 면이면 모두 라면이라 부른다. 여기에 간장.소금.일본된장 등으로 간을 맞추고 닭뼈나 돼지뼈 등을 고아 만든 국물을 보태면 한 그릇의 일본식 라면, 즉 '라멘'이 완성되는 것이다. 반죽에 간수를 섞는 것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본 전래의 면인 우동은 밀가루에 소금과 물을 넣어 반죽을 만들고 간수를 쓰지 않는다. 라면이 일본의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40~50년대다. 일본군의 침략과 함께 중국에 건너가 살던 일본인들이 귀국하면서 중국식 면 요리를 파는 가게들이 늘어났다. 라면이 한동안 '시나(支那) 소바' '주카(中華) 소바' 라 불린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지금은 우동과 소바(메밀국수)를 제치고 일본의 국민음식이 됐다. 해외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남자의 경우는 대체로 라면을 꼽는다. 라면의 중독성은 한국인의 김치에 대한 중독성에 비견된다. 라면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게 되는 계기는 58년의 인스턴트화였다. 닛신 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회장이 한 번 삶은 라면을 기름에 튀겨 수분을 제거하는 원리를 개발해 장기 보존과 간편한 조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71년에는 스티로폼 용기에 담는 컵라면을 개발했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매년 850억 개가 팔릴 정도로 밥.빵에 이은 인류의 식량으로 자리 잡았다. 이 가운데 37억 개는 한국인이 먹어치웠다. 1인당 소비량은 80개로 단연 세계 1위다. 한국에선 일본과 달리 '라면=인스턴트'다. 그래서 가끔 유해론이 제기된다. 하지만 유난스러운 웰빙 붐도 라면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하긴 "라면만 먹고 달렸다"는 육상선수도 고기 먹고 달린 외국 선수를 제치고 거뜬히 금메달을 따지 않았던가. 라면 유해론에 가장 섭섭해할 사람은 안도 회장이다. 지난 5일 쓰러져 96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사나흘에 한 번은 골프장에 나가는 노익장이었다. 점심 메뉴는 항상 라면이었다. 생전의 그는 "라면으로 건강을 지킨다"고 말했지만 진짜 장수 비결은 자신의 일과 발명품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을까. 50년간 매일 라면을 먹어도 질리지 않을 외길 애정. 예영준 도쿄 특파원 2007/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