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이야기(건강 등)

kbd112 2021. 4. 2. 09:24

이천보와 이문원

 

조선 영조 때 십 여 년을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장래에 일어날 일들을 일일이 예측하고 

잘 대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어진 정치를 하여 세상에 악동대신(堊洞大臣)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진 이천보가 이조판서 때의 일이다.

 

기다리던 아들을 얻지 못해 할 수 없이 양자를 들일 양으로 

가평 고향(상면 연하리, 이천보의 생가가 가평군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음)의 

사촌형 국보 댁을 찾았다. 

이런 산골에 이조판서가 행차하였으니 

고을에서 군수가 나온다, 소를 잡는다, 돼지를 잡는다, 하여 떠들썩하니 

개울 건너 글방에 간 일곱살 난 

이 집 둘째 아들 이문원의 머리에 글이 들어올 리 없다. 

읽던 책을 내 팽게 치고 집으로 달려왔다.

 

오랜만에 사람들이 가득 차 왁자지껄한 사랑방을 힐금 쳐다보고는 

안채로 들어가니 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여종들이 찬으로 고기를 굽는다. 

나물을 삶는다, 도토리묵을 쑨다, 야단법석이다. 

 

이문원은 다짜고짜 구워 놓은 고기를 덥석 집으려 하며

 

"어머니, 나 고기 한 점 먹을래요.“ 한다. 

 

기겁을 한 어머니는

"어! 이녀석아! 서울서 오신 판서아저씨 드릴 반찬이야. 

그러지 말고 나가 놀다가 점심때 오너라.“

하고는 둘째아들을 밀쳐버린다.

 

"쳇, 서울 아저씨만 입인가요? 나도 입이 있는데 그만두셔요. 

쇠불알이나 하나 떼어 구워 먹어야지.“

하고 중얼거리며 식칼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데, 

일에 바쁜 어머니와 부엌 사람들은 눈여겨보지 않았다. 

 

사랑 마당 외양간에서 이문원이 막 칼을 쇠불알에 대려 할 때 

그 쪽 방향으로 앉은 이천보가 열린 뒷문으로 내다보다가

"형님, 어떤 녀석이 칼을 들고 쇠불알을 떼려 하오.“ 한다. 

 

이국보가 돌아서 내다보니 작은 아들이다.

"이놈, 게 무슨 짓이냐? 어서 칼을 놓고 

이리 들어와 서울 아저씨께 인사나 드려라.“

이문원이 코를 훌쩍거리며 사랑으로 들어와 

서울 아저씨 쪽으로 꾸벅 한번 절하고 뒤돌아 나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서울 아저씨도 예사 사람과 똑 같네.“

하고 어디론가 가버린다. 

 

이문원이 하는 양을 보고만 있던 이천보가 말하였다.

"형님! 이번에 남들에게는 성묘하러 간다고 했지만 

실은 형님 아들 중에서 하나를 양자로 데려가려고 상의하러 왔습니다. 

더 말할 것 없이 쇠불알 떼려던 방금 그 녀석을 주십시오.“

 

이국보는 그 말을 듣고 이미 생각하고 있던 일이라 

크게 놀라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여 승낙하고 잠시 안으로 들어가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자 부인은 펄쩍 뛰며

"양자를 보내려면 차라리 다른 애를 보내야지 장난꾸러기를 어디다 보내려구요. 

친어미 애비도 못 견딜 지경인데 남의 속을 얼마나 태우게 하려고요. 

나가서 다시 의논해 보셔요.“ 한다. 

 

이국보가 사랑으로 나와 부인 말대로 상의를 해 보았지만 

이천보은 한사코 다른 애는 싫고 

쇠불알 떼려던 그놈을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국보는 둘째 아들을 불러 이 사실과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 

이천보가 준비해온 옷과 신발을 내주며 내일 갈 때 갈아입도록 하라 하였다. 

이문원은 아버지 말을 듣고 또 새 옷과 신발을 보고도 

좋아하거나 섭섭해하거나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거저 덤덤한 표정으로 나가 친구들과 장난에 열중한다.

 

이천보를 따라 서울로 온 이문원은 

당장 글방을 차리고 선생을 들여 천자문(千字文)부터 글공부를 시작했다. 

글공부가 어떤지 궁금한 이천보는 

한 달쯤 된 어느 날 선생을 불러 넌지시 물어보았다. 

선생은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손을 비비며 말하였다.

"참 큰일입니다. 장난과 다른 일에는 그처럼 분명한 아이가 

글공부에는 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지금까지 천지현황(天地玄黃)을 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 너무 쉽게 다룬 탓이 아니요? 좀 더 다잡아 보오."

하고는 혼잣말로 말하였다.

'정승은 몰라도 판서는 틀림없는 놈인데’

 

그러고 몇 달 후에 다시 글방 선생에게 물어보니 

그때까지도 천지현황 넉자를 깨우치지 못했다고 하면서 

선생도 그만두겠다고 한다. 

 

이천보가 기가 차서 이문원을 불러 확인을 해 보니 

과연 넉자도 모르는 게 분명하다. 

이문원을 내보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인을 불러 무엇인가 일러 준 다음 이문원을 불러 말하였다.

"내가 너를 아들로 삼아 훌륭하게 되기를 바랬더니 

네가 공부에는 마음이 없고 장난만 하니 어쩔 수 없구나. 

너의 집에 도로 보낼 터이니 그리 알아라."

 

양부의 말을 듣자 이문원은 아무 말도 없이 

하직 절을 하고 하인 두 사람을 따라나선다. 

한참 걷다가 다리가 아픈지 뒤로 처지자 

한 하인이 이문원을 등에 업고 가다가 

심근솔(植松里) 밖 정자나무 아래서 쉬면서

"도련님도 참 딱하기도 하오. 

재상 댁 도련님이 되었으니 글만 잘 읽으면 과거도 볼 수 있고, 

벼슬도 할 수 있는 데 이를 마다하고 다시 가평으로 가서 나무꾼이 되려하오?“ 한다. 

 

이에 이문원이

"야, 시골 살면 과거도 못보고, 벼슬도 못한다더냐? 

그 댁 책 광을 보니 한 만권(萬卷)은 되겠더라. 

섣불리 아는 체 했다가는 

그 많은 책을 다 배우라 할 테니 그걸 언제 다 배운단 말이냐? 

처음부터 읽지 말아야 아예 배우라 하지 않을 것 아니냐. 자 보아라“

하면서 꼬챙이를 들고 땅에다가 천자문을 쓰기 시작하는데 

조금도 막힘 없이 한참 줄줄 써내려가더니 

'天地玄黃三年讀(천지현황삼년독) 

焉哉乎也何時讀(언재호야하시독)'이라 쓰는 게 아닌가. 

해석하면 '천지현황 넉자를 삼 년이나 읽어도 깨우치지 못하니 

언재호야는 어느 세월에 읽을까?'하는 뜻이다. 

여기어 焉,哉,乎,也는 천자문의 맨 마지막 네 글자이니 

문원은 이미 천자문을 다 깨우치고, 이를 다 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자, 그만 쉬고 가자“ 고 하면서 재촉한다. 

하인이 다른 하인을 시켜서 몰래 이 일을 대감께 알렸고, 

선생과 청직이가 급히 달려와 이문원을 도루 데리고 서울집으로 갔다.

 

이문원이 이천보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글공부보다는 장난에 열중하였고, 

이천보도 큰 걱정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천보가 입궐하면서 

이문원에게 좁쌀 한 말(斗)을 가져다 주면서 

퇴청할 때까지 몇 알인지 세어 놓으라고 하였다. 

이문원은 천연스럽게 ‘예’ 하고 대답하였다.

 

이천보가 입궐하자 

문원은 좁쌀을 세어 놓겠다고 대답한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길로 밖에 나가 하루종일 장난만 하고 놀다가 

이천보가 퇴청할 때쯤 돼서야 약방 저울을 빌려 들고 

헐레벌떡 집으로 와서 좁쌀 부대에서 좁쌀 한 돈중을 달아 그 수를 센다. 

그리고 다시 큰 저울을 갖다가 좁쌀부대를 달고, 

좁쌀을 쏟은 다음 부대만 단다. 

저울과 좁쌀 부대를 한쪽으로 밀쳐놓고는 

꿇어 엎드려 무언가 끙끙거리며 열심히 계산을 하더니 

‘다 됐다’며 툴툴 털고 자리를 정리하라고 한다. 

 

이천보가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이문원을 보며

"좁쌀을 다 세었느냐? 그래 몇 알이더냐?“ 하고 물으니, 

이문원이 종이에 적어 놓았던 것을 보며 거침없이 대답한다. 

문원이 나가자 하인을 불러 문원이 좁쌀을 센 이야기를 듣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지금 같으면 초등학교 2학년만 되어도 구구단을 외우지만 

그 옛날에는 가감승제(加減乘除) 중 승제(乘除)는 

어른이 되어도 잘 하지 못하는 때였으니 

이천보가 문원이 이미 이것을 훤히 깨우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기뻐한 것이다.

 

어느 날 이천보가 퇴청을 하고 보니 

방안에서 밖을 내다보도록 영창문에 붙여 놓은 유리가 없어졌다. 

필시 이문원의 짓이라 생각하고 불러 꾸짖으니 

이문원은 일부러 깨어 없애버렸다면서

"아버지, 이제는 창에 유리를 붙이지 마셔요. 

아까 유리로 밖을 내다보니까 하인 하나가 광에서 몰래 쌀가마니를 지고 나갑디다. 

유리를 그대로 붙여 두면 아버님이 이런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마음이 몹시 불편하실 것 같아서 아예 깨뜨려 버렸습니다“ 한다. 

그러자 이천보가 벌컥 화를 내며

"그래? 그 놈이 어느 놈이냐?“ 물으니, 

이문원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님이 알게 되면 말씀은 아니하신다 하더라도 그를 볼 때마다 

'저 도둑놈!' 하고 생각이 나실 것이니 심히 마음만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이 지각 있는 대답을 듣고 이천보는 화를 풀고 웃으면서 

이문원의 등을 두드리며 ‘과연 내가 잘 봤지’ 하며 기뻐하였다. 

그 뒤로 문원이 공부를 하지 않고 어떤 장난을 쳐도 나무라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이문원이 장난만 좋아하니 집안사람들이 하도 딱해서

"대감! 자제분을 그렇게 놔 둬도 되겠습니까? 보기에 딱합니다.“ 하니 

이천보가 빙그레 웃으면서

"글이란 행실을 닦기 위하여 읽는 것이야. 남곤(南袞) 같은 사람은 

그 문장이 당대에 짝할 사람이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행실이 소인(小人)이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그 글을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네. 

우리 애는 비록 글을 못할 망정 행실만은 바른길로 갈 터이니 걱정 말게나.“

하며 오히려 집안사람들을 타이르는 것이었다.

 

이천보는 십여 년 동안 정승을 지내면서 

어진 재상으로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조 37년에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의 '평양원유사건'에 대하여 

세자사(世子師)로서 책임을 지고 임금에게 세자의 허물을 용서할 것을 

탄원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독약을 먹고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장헌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일이 있었고, 

15년이 지나 영조가 죽고 장헌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뒤를 이어 등극하자 

아버지 장헌세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천보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즉위하자마자 그 아들 이문원을 불러 문과 급제도 시키고, 

벼슬도 내리며 마치 친동생처럼 사랑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덕으로 

이문원은 마음만 먹으면 권세도 부릴 수 있고, 

치부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지만 

한 번도 정조에게 사사로운 청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임금이 불러 무슨 청이 없느냐고 묻자

"지금 벼슬을 주신 것도 과분한데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다만 어려서 서울에 양자로 와 농촌의 인심과 물정을 모르오니 

신에게 자그마한 고을을 맡겨 주신다면 

가서 백성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하면서 지금의 직급보다 훨씬 낮은 고을 수령을 자원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조 임금은 문원의 생각을 가상하게 여기고 

전라도 어느 조그마한 고을의 군수로 내보내면서

"네가 백성을 잘못 다스리면 크게 벌할 것이니 알아서 잘 하도록 하라.“

하면서 떠나보냈다.

 

이렇게 해서 문원이 고을 도착해 보니 

온 고을에는 글 못하는 원님이 온다고 소문이 났고, 

고을 아전들은 이 기회에 사또를 휘어잡을 궁리를 하는데 

사또가 글을 모르는 것을 이용해서 실수를 하도록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송사(訟事)로 올리는 소지(訴紙)에 어려운 한자를 골라 쓰고, 

글씨도 초서로 흘려 써서 바쳤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문원은 속으로 괘씸하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면서 소지를 다 읽는 척하고 난 다음 

제사(題辭: 판결문)를 받아 적으라고 한다. 

형리가 붓을 들고 엎드려 받아 적을 준비가 된 것을 보고 

문원이 큰 소리로 얼토당토않게"'퐁당'이라 적어라.“ 한다. 

형리가 어이가 없어 사또를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황송하오나 저로서는 '퐁당'이란 글자는 처음이옵니다."

 

"그래? 그런 말도 못쓴단 말이지? 그럼 '바스락'이라 써라.“ 하니 

형리가 기가 차서 멍하니 사또를 쳐다본다. 

 

이문원이 화를 내며

"이런 자, 저런 자 다 못쓴다니 네 놈들은 

수 십 년이나 걸려 배웠다는 글자는 대관절 어떤 글자들이란 말이냐? 

이렇게 쉬운 글자도 못 쓰면서 어떻게 아전 노릇을 한단 말이냐?“

하고는 다시 부드러운 말씨로

"내가 쉬운 글자를 하나 더 부를 터이니 이번에는 꼭 써야 한다. 

이번에도 쓰지 못하면 더 제사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자, 준비됐으면 '비빔밥'이라 써라.“ 한다. 

 

그제 서야 형리가 오기가 받쳐서 하는 말이

"지금까지 사또가 부르신 글자는 써 본 적이 없는 글자들이옵니다. 

소인을 죽이시려거든 얼른 죽여주시옵소서.“ 한다. 

 

그러자 문원은 형리가 하는 꼴이 우습다는 듯이 껄껄 웃고는

"너희들이 배웠다는 글이 그래 

우리가 늘상 쓰는 말도 받아 적을 수 없단 말이냐? 

자 들어라. 우물에다 돌을 던져서 나는 소리가 '퐁당' 아니냐. 

그러니 우물정(井)자 가운데에 점(蟁) 하나 찍으면 

바로 퐁당자가 아니겠느냐. 

풀 속에 뱀이 기어가면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나지 않느냐 

그러니 초두(痪) 밑에 뱀사(巳)자를 쓰면 '바스락'이 되지 않느냐. 

또 밥 위에 나물을 얹으면 비빔밥이 되지 않느냐 

그러니 나물 채(菜) 밑에 밥 식(食)자를 쓰면 '비빔밥'이 되지 않느냐. 

글자라는 것이 본시 

말과 같은 사람의 의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 

그런데 우리말도 제대로 쓰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글이 무슨 글이냐. 

네 놈들이 내가 글을 못한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보통 쓰는 글씨는 피하고 쓰이지도 않는 글자를 함부로 흘려 써서 

나를 농락하려 들지만 너희들 간계에 넘어갈 내가 아니니라. 

소행으로 봐서는 단 매에 때려죽일 만 하지만 

오늘 처음이라 특별히 용서할 것이니 이후로 이 따위 얕은꾀는 부리지 말아라. 

그리고 내가 있는 동안 진서(眞書) 소지는 받지 않을 것이니 언문 소지만 올리도록 하라.“

하고 타일렀다. 

 

신임 사또의 놀라운 기지에 기가 질려 

그 후로는 허튼수작을 할 생각을 못 하였다. 

또 이 고을에서는 아전의 행패에 따른 폐단이 없어져 

백성들은 문원의 선치(善治)를 칭송하게 되었고, 

그 치적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정조는 더욱 문원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임기가 끝나자 내직으로 불러들여 홍문관 교리로 영전시켰다.

 

이문원이 홍문관 교리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마침 나라에서 과거를 보이게 되어 

팔도에 경시관(京試官)을 파견해야 하는데 

 

정조가 이문원을 불러

"나라에서 좋은 인재를 뽑으려면 초시(初試:鄕試)부터 공정을 기해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 옥당(玉堂 : 弘文館)에는 

내 마음을 그대로 지켜줄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너만은 내 마음을 알겠지만 

너야 원래 글을 못하니 너를 보낼 수도 없고, 참 딱한 노릇이다.“

하고 한탄하였다. 

 

듣고 있던 이문원이 서슴치 않고,

"전하께서 훌륭한 인재를 뽑으시려는 그 마음을 생각하면 

신이 글을 못하는 것이 더욱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만약 신에게 하명하신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공정하게 훌륭한 인재를 뽑아 전하의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한다. 

 

정조가 웃으면서

"네가 군수로 백성을 다스린 술책을 쓰려는 모양이구나. 좋다. 그리 해 보아라.“

하고 문원을 전라도 경시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글 모르는 경시관이 임명되자 

옥당 관리들은 코웃음을 치며

"이문원이 비록 기지가 있다하나 글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재주로 글 잘 짓는 사람을 고를 것인가!“ 하고 쑤군댔다. 

 

한편 글을 몰라 언문 소지만 받던 이문원이 

경시관으로 전라도에 내려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라도 각 고을 수령들은 '옳거니 이 기회에 한몫잡아야지' 

하면서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원래 초시는 조정에서 경시관을 파견하면 문과에 급제하여 

그 지방에서 수령을 지내고 있는 사람 중에서 경시관 밑에 부시관(副試官), 

삼시관(三試官)을 뽑아 세 사람이 주관하여 시험을 치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라도처럼 부유한 지방에서 부시관이나 삼시관이 되어 

잘만 하면 한 몫 톡톡히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문원이 전주에 도착하여 감사를 만나보고 곧 시령(試令)을 내리게 한 다음 

공론에 의해서 영암군수가 부시관, 옥과현감이 삼시관으로 뽑히고, 

시험장은 나주로 결정하였다. 

 

나주에 도착한 이문원은 부시관과 삼시관이 도착하자 

'임금께서 나 같은 글도 모르는 사람을 경시관으로 임명할 때는 

가서 호강 좀 하고 오라는 뜻이 아니겠느냐' 면서 

시험에 관한 일체를 이들에게 일임하고 

자기는 덕분에 술이나 싫건 마시고 호강 좀 하고 가겠다는 것이다. 

두 시관은 겉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속으로는 '참 다행이다'고 생각하며 그리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일(試日)이 됐지만 경시관은 아예 시장(試場)에 나타나지도 않고 

기생집에서 술만 마시고, 부시관과 삼시관이 주관하여 과거를 보인 뒤 해어졌다. 

 

시험 다음날 나주 목사가 경시관을 위해 베푸는 연회에 

부·삼시관도 자리를 함께 하여 경시관에게 시험 경과를 보고하고 

그들이 뽑은 글장을 봉하고 

그 위에 '京試官 臣 李文源 謹封(경시관 신 이문원 근봉)'이라 쓰고 

함(緘: 手決, 싸인)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문원은 이것들을 받아 술상 옆에 놓으며

"동관네들 수고 많이 하셨소. 

글 모르는 나 대신 애 써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요. 

자 오늘은 나주 목사께서 이렇게 잘 차렸으니 

술이나 질탕 마시며 풍치 있게 한번 놀아 봅시다.“

하고는 과거에 관한 것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연회가 끝나 해어질 때쯤 하여 

이문원이 두 시관의 소매를 잡으며 말하였다.

"여보 동관네들! 내가 부탁이 하나 있소. 

내 돌아가신 선친의 음덕으로 이렇게 출세하였소만 

내 아들들은 어떻게 해야할 지 난감하오. 

내가 글을 배우지 못한 것이 이렇게 한이 될 줄 몰랐소, 

내려온 김이니 이번에 낙복지(落伏紙: 불합격된 글) 중에서 

쓸만한 것을 가려 가면 아들들 과문(科文) 공부시키는데 참 좋을 것 같소. 

내일 내가 한턱 낼 터이니 와서 글이나 뽑아 주구려.“

 

그 이튿날 두 시관이 이문원이 묵는 객관에 도착해 보니 

아담하게 술상이 차려져 있고, 

그 옆에는 낙복지들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고, 

이문원이 진지하게 글장들을 열심히 뒤적이면서

"여보, 이 글은 어떻소.“

하여 잘 지었다면 한 편으로 제쳐놓아 

쉰 장쯤 되자 고르던 것을 중지하고, 

 

다시 두 사람에게

"이 글들이 어제 뽑은 글과 비교하여 어떻소?“ 하고 묻는다. 

두 시관은 영문도 모르고 얼결에

"모두 훌륭합니다. 오히려 뽑은 글보다 잘된 것도 많습니다.“ 한다. 

그러자 문원이 전날 뽑은 글장 봉투 속에 있던 글장들을 모두 꺼내고, 

지금 고른 글장들을 봉투에 넣고 봉하면서

"과거시험이란 원래 잘 지은 글을 뽑는 것 아니오. 

잘 지은 글을 제쳐두고 잘 못 지은 글을 뽑을 수는 없지 않소?“ 하니, 

두 시관은 어안이 벙벙해 한참동안 말을 못하다가

"기왕 뽑아 놓은 것을 다시 바꾸는 것은 

불공(不恭)스런 일이 아닐까 합니다.“ 한다. 

비로소 이문원이 정색을 하며

"나라를 위해서 인재를 뽑는 것이 우리의 직분이 아니오? 

아무리 뽑아 놓은 것일지라도 잘못된 것이라면 

열 번이라도 고쳐야 할 것이 아니겠소? 

잘 지은 글을 뽑지 않고, 잘못 지은 글을 뽑는 것은 

곧 상감을 속이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뿐만아니라 이런 것이 바로 나라를 좀먹는 도적인 것이오.“

하고는 새로 뽑은 글 봉투 위에 함을 두니 

두 시관은 무안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문원이 다음날 떠나 서울로 돌아와 뽑아 온 글을 정조에게 올리니 

정조가 글 봉투를 떼어 보고 나서 우수한 글을 뽑은 것이 

다른 도의 경시관에게 비길 바가 아니라 크게 기뻐하면서

"네가 글도 모르는 터에 무슨 재주로 이런 좋은 글들을 뽑았느냐?“ 묻자, 

이문원이 사실을 하나도 빼지 않고 일일이 아뢰니 

정조는 용상에서 내려와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됐다. 그만하면 과연 명시관(名試官)이다. 

마음이 곧지 못하면 글 잘하는 사람이 무슨 소용이더냐.“

하면서 희색이 만면하였다.

 

이문원이 참판에서 판서까지 이르는 동안 

당대의 재사(才士) 윤행임, 김종수, 정약용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지냈는데 

그들은 모두 문장으로 행세 했지만 

이문원만은 오로지 기지와 말로서 임기응변하면서도 한 번의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어느 해 북경으로 떠나는 사신을 배웅하기 위하여 홍제원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만조의 재상들이 모여 별장(別章: 환송하는 뜻의 시)을 짓느라고 

머리를 기웃거리며 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직 이문원만은 기생을 희롱하며 사신에게 술만 권한다. 

그러자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에는 이미 쌓인 별장이 수백에 이르고 

그것을 차례로 읊으며 누구의 글이 제일이니 

누구의 글이 어떠니 하는 등 시평(詩評)이 한창인데, 

이문원이 쑥 나서며

"대감네들! 가는 이에게 술 한잔도 안 권하고 

해가 저물어가도록 생 이(齒) 앓는 소리들만 하고 있으니 어쩌자는 거요.“ 한다. 

 

이 말에 발끈한 한 재상이

"여름벌레는 감히 얼음을 말할 수 없다(夏蟲不可以語氷)는 말도 있지만 

대감이 글의 참 맛을 모르니 생 이 앓느니, 고린 소리니 하는 거요. 

그러나 시흥이란 그런 것이 아니오. 그러지 말고 나와서 이 시들의 뜻이나 들어보시오.“

 

그러자 반 넘어 취한 이문원이 더 앞으로 나서며

"운(韻)이니 뭐니 하고 따져가며 짓는 썩은 글들의 뜻은 들으나 마나요. 

자, 그럼 나도 별장 한 수 읊을 테니 들어보구려.“ 한다. 

 

그러자 주위에 사람들이 하도 우스웠던지 한 대감이

"아니, 대감이 시를 짓는단 말이오? 이거야말로 금시초문일세. 

자 읊어보시구려 내 받아 쓰리다.“

 

그러나 이문원은 그 말에 대꾸도 않고 글을 읊어 내려간다.

 

홍제원 석양에 술 한잔 권하노니

 

상부사(上副使), 서장관(書狀官)아

 

연경 삼천리(燕京 三千里)에

 

거평안(巨平安), 내평안(來平安) 하오.

 

읊기를 마치자 문원은 좌중을 둘러보며

"이만하면 할 말은 다 했지 

쓸데없는 군소리는 해서 무엇 한단 말이오.“

하고는 술을 한잔 따라 사신에게 권하는 것이었다. 

뜻밖의 이 걸작 시에 좌중은 조용했다. 

또 이 글은 많은 사람에게 감탄을 받았고 

후세까지 전해지는 유명한 시가 되었다.

 

어느날 

정조가 이문원을 정승으로 등용할 생각으로 그 의향을 떠보려고

"옛날에도 재상집에 재상 나고, 

장수 집에 장수 난다(相門出相 將門出將)는 말이 있지 않소?"

하고 물었다. 

 

문원이 아뢰기를

"전하의 뜻은 짐작하오나 선신(先臣:부친)께서 

신에게 그 자리는 나가지 말라는 말씀이 계셨사오니 그리 알아주옵소서.“ 한다. 

 

정조도 그의 담백(淡白)하고 염결(廉潔)한 마음을 

더 한층 가상히 여기고 다시 권하지 않았다.

 

어느 해 큰 옥사가 있었는데 

이문원과 절친한 친구 송환억(宋煥億)이 그다지 중하지도 않은 사건이 

역모로 몰려 억울하게 극형에 처하게 되었다. 

 

이문원이 여러 차례 정조에게 관대한 처분을 간청했지만 받아드려 지지 않았다. 

역율(逆律)에 걸리면 아들은 관노(官奴), 딸은 관비(官婢)가 되어야 하는데 

송환억에게는 일곱 살 난 딸이 하나 있었다. 

 

문원은 곧 초헌을 타고 의금부 문 앞에 이르니 

송씨의 식구들이 멍석을 깔고 처량하게 앉아 있었다. 

이문원이 송환억이 갇혀 있는 남간(南間) 창밖에 초헌을 대니 

금부 나장들이 깜짝 놀래며 가까이 대지 못하게 한다. 

 

그러자 문원이 초헌 위에서

"내 일찍이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낸 사람이다. 

죄인과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내일 죽을 사람에게 작별 인사차 온 것이니 썩 물러서라.“

호령을 하고는 옥의 창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여보게 환억이, 나 이문원일세. 정신 차리고 내 말 듣게. 

자네 딸은 오늘부터 내 며느릴세. 

자네에게 면약(面約)을 하고 가니 그 일 만은 마음 놓고 가시게.“

 

정중히 한 마디하고는 돌아서 나가버렸다.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에 의금부 남간 들창 앞에 

초헌을 세운 사람도 이문원 단 한사람이요, 

역적으로 몰린 사람과 정혼한 사람도 이문원이 한 사람 뿐이었다. 

정조도 이 말을 듣고는 차마 그 딸을 노비로 삼을 수가 없어 

이문원의 며느리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였다. 

이 의기(義氣) 있는 이야기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야기들은 '한국 역대 야사 전집'에 실려있는 것인데 

이야기를 좀 더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이문원이 글을 아주 모르는 무식장이처럼 꾸며 놓았지만 실은 그렇지는 않았다.

 

영조 47년에 이미 경과별시(慶科別試) 문과에 급제하였고, 

외직으로는 경상, 함경감사를 지냈으며, 

내직으로는 옥당(홍문관)의 여러 직책과 도승지, 

판의금부사, 성균관대사성, 동지성균관사, 육조판서직을 모두 역임하였다. 

비록 뛰어난 문장은 아니더라도 이들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글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특히 셋째 아들 존수(存秀)는 순조 때 좌의정에까지 오른 명신으로 

종묘 순조실에 배향되었으며 문장에 아주 능하였다.

 

...

 

 

초헌(軺軒)

 

명거(命車)·목마(木馬)·초거(軺車) 등 여러 이름이 있다. 

매우 긴 줏대에 외바퀴가 밑으로 달려 있고, 

앉는 데는 의자와 비슷하게 되었으며, 발을 얹어놓도록 고안되었고, 

위는 꾸미지 않았다.

 

두 개의 긴 채가 달려 있어 

앞뒤에서 사람이 잡아끌고 밀게 되어 있다. 

바퀴는 쇠로 덧입혀 튼튼하게 강도를 주었고, 

줏대 등은 물푸레나무나 참나무 등과 같은 단단한 목재를 이용하였고, 

그 위에 쇠힘줄을 어교나 아교풀로 부착하여 강도와 탄력을 주었다.

 

의자는 사슴가죽으로 등받이와 방석을 만들고, 

맨 앞부분과 의자 바로 뒤쪽에 가로대를 꿰어놓아 

이것을 잡아끌고 미는 장치가 되도록 하였으며, 

맨 뒤쪽에서는 줏대를 잡고 보조를 맞추도록 되어 있다. 

보통 여섯 사람에서 아홉 사람 정도가 한조를 이루어 움직이도록 되어 있다.

 

옛날 초헌을 사용하는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인 

당상관댁은 솟을대문에 문턱이 없이 설계되어, 

초헌을 바로 밀고 드나들도록 되어 있다. 

초헌은 사용자에 따라 궁중용은 주칠을 하였고, 

사대부의 것은 검은 칠을 하였으며, 크기에도 차이가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