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락 · 경혈 · 인체구조

ililsin7 2012. 1. 5. 16:06

1960년대 “세계과학사에 금자탑을 이루어놓았다”고 칭송받던 과학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봉한, 당시 경락연구원장이였다.

 

김봉한은 세계 최초로 경락의 실체를 밝혔다고 하여

김일성으로부터 축하문을 받기도 했고,

‘인민 상 계관인’ 칭호도 받았다.

 

‘봉한학설’이라는 이름까지 허용했을 만큼

북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김봉한,

하지만 그의 존재는 1967년 갑산파의 숙청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93년, 상원세멘트 공장병원 의사 류부렬은

술잔을 입술에 대다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처음 본 청년을 집에까지 끌고 온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간염치료를 위해 평양시내에서 왔다는 청년의 입에서 친구의 이름이 나오자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이 밀려왔기 때문인 것도 같고,

오늘 따라 말동무가 몹시 그립던 차에 충동적으로 벌어진 일인 것도 같았습니다.

 

잠시 갸웃거리던 류부렬은

이미 얼근하게 올라온 술기운으로 복잡한 생각을 털어버렸습니다.

‘친구 소개로 온 사람이면 내 친구나 같다’는 허세도 생겨

청년을 벗 삼아 심심한 밤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류부렬의 얼굴은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류부렬 : 야, 너 내가 누구인줄 알아?
청년 : 의사 선생님 아닙니까?
류부렬 : 이놈아, 누가 그걸 물어보자고 하는 거야. 내가 무엇을 한 사람인 줄 아느냐고?
청년 : 오늘 처음 봤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류부렬 : 그건 그렇지. 그럼, 너 김봉한이라고 들어봤어?
청년 : 들어봤습니다.
류부렬 : 어, 나이도 어린 놈이 어떻게 김봉한이를 알지?
청년 : 경락인지 뭔지 연구해서 유명했던 사람 아닙니까?
류부렬 : 야, 이놈 신통하네. 김봉한이를 다 알고. 내가 평양의학대학 경락연구실에서 김봉한이랑 같이 일했던 사람이야.
청년 : 정말이에요?
류부렬 : 이놈이 속고만 살았나. 정말이구 말구. 그때 김봉한이 경락연구실 실장이였고 내가 부실장이였지.
청년 : 김봉한이는 갑산파 숙청할 때 사라졌는데 부실장까지 한 선생님이 어떻게 살아 있습니까?
류부렬 : 그게 다 사연이 있지.......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3차 당 대회에서 ‘동의학을 과학화하는데 대한’ 문제가 제기 되었다.

당 대회의 결정을 토대로

‘동의학의 우수한 점들을 과학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리론적으로 체계화하는데 대한’ 지시가

평양의학대학에 떨어졌습니다.

 

당시 평양의대 생물학 부교수로 근무하고 있던 김봉한은

당의 방침에 따라 ‘동의학의 과학화 사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김봉한 연구팀은 동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61년 8월

김봉한은 ‘경락 실태에 관한 연구’라는 론문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 논문은 ‘경락의 실체를 세계 최초로 밝혔다’고 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김봉한의 첫 번째 논문은 1961년 4차 당 대회 이후부터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당 간부들은 김봉한의 논문에 대해

‘당 과학정책의 정당성의 또 하나의 실증으로 된다’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김일성도

“현대 생물학과 의학 발전에 탁월한 기여를 했다”는 축하문을 보내 김봉한팀을 격려했습니다.

 

1962년판 조선중앙연감을 보면

북한이 김봉한의 공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해설 :

과학 연구 사업에서 주체를 확립한 데 대한 당 정책과 김일성 동지의 교시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특히 동의학의 우수한 점들을 계승 발전시키는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하였다. (중략)

이 연구 성과는 우리나라에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의학 이론에

확고한 과학적 근거와 물질적 근거를 부여하였으며 현대 생물학과 의학 발전에 탁월한 기여가 된다.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오자 북한은 김봉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논문부터는 전자현미경이나 분광분석기 등

선진국의 과학자들도 접근이 쉽지 않았던 첨단 장비들을 제공받아 진행되었습니다.

 

1963년 11월에 두 번째 논문 <경락계통에 대하여>가 발표되자 북한의 선전은 더욱 요란해졌습니다.

‘조선중앙통신’, ‘로동신문’, ‘조선의학’ 등 각종 보도기관에서

‘봉한학설’이 다윈의 진화론이나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이론에 맞먹는 업적이라는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또한 김봉한의 논문은 노벨상 수상을 목표로

영어, 로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에 배포되었습니다.

 

조선중앙연감에 기록된 김봉한의 업적도 1962년보다 더욱 도수가 높은 내용이 실렸습니다.

특히 김일성 이외의 개인사진을 크게 실은 적이 없던 조선중앙연감은

1964년 판에 김봉한의 사진을 크게 싣고 그 공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해설 :

“이 업적은… 생물학과 의학 부문 앞에 제기된 당면한 근본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서 광명한 전망을 열어주며

또한 인간의 건강과 장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새로운 서광을 비춰준다.

이 위대한 발견은 현대 생물학과 의학 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혁명적 사변이며 세계과학사에 금자탑을 이루어놓았다.…

이제부터 세상 사람들이 현대 생물학과 의학을 논함에 있어서

우리나라를 말하지 않고는 논할 수 없게 된 이 사실을 두고 어찌 흥분하고 감격하지 않겠는가!”

북한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1964년 2월 17일

내각 산하에 김봉한의 개인 연구실이나 다름없는 경락연구원을 조직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김봉한은 자신의 연구업적만으로

동의학연구소보다 더 급수가 높은 경락연구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광은 채 3년을 가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습니다.

1967년 갑산파에 대한 숙청사업이 시작되면서

북한에서 그토록 찬사를 보냈던 김봉한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출처 : 한국전통물리치료학회
글쓴이 : 박정(대전/공부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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