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나의 이야기

ililsin7 2015. 4. 1. 06:55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1] 소년 구자관과 청계천 [上]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945년 광복부터

2015년 현재까지 우리들은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고,

역사의 회오리 속을 헤쳐 나오기도 했습니다.

격동의 세월 70년을 지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군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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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끝나고 6년이 지난 1959년 2월이었다.

구자관은 청계천을 걷고 있다.

작년 이맘때 자관은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두세 달씩 차이 나는

외사촌 네 명도 같은 날 졸업했다.

 

졸업식엔 참석했지만

자관은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입에 풀칠하기 힘든 살림 탓에

자관은

월사금을 밥 먹듯 빼먹고 결석도 밥 먹듯 했다.

 

며칠 뒤 외사촌들은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사촌들 입학식 날

자관은 꺼먼 군복을 입고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청계천으로 갔다.

'밥 먹듯?' 자관은 어른들 표현이 불쾌했다.

'밥이라도 먹었으면 좋겠다.'

해가 바뀌었다.

아이스케키 통이 구두 통으로,

다시 메밀묵 통으로 바뀌었다.

군복은 구멍이 나고 색이 바랬다.

태어나고

일 년 하루 만에 맞은

해방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전쟁에 대한 기억도 어렴풋했다.

 

열다섯 살 소년의

뇌세포에 각인된 기억은 가난뿐이었다.

교복 입은

외사촌들 뒷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자관은

메밀묵 통을 윗도리 속으로 감췄다.

작년에도 그러했듯

봄이 오면 묵 통은 구두 통으로 바뀔 것이다.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까지 무질서하게 난립해 있던 무허가 판자촌. 1962년 모습. /조선일보DB

1962년 모습. /조선일보DB


해거름 속을 걷던 발걸음이 동대문 앞 오간수교에 닿았다.

다리 아래에는

기름 영롱한 잿빛 액체가 흘렀다.

판잣집에서 흘러나온 똥물과

빨래하다 남은 양잿물, 음식 찌꺼기,

기름 낀

염색 공장 검은 폐수가 뒤섞여 만든 광채였다.

고개를 들면

빨랫줄에 걸린 염색한 군복들이 하늘을 가렸다.

 

박제된 듯,

세상은 딱딱한 잿빛이었다.

공장 앞에는 드럼통들이 놓여 있었다.

어떤 통에서는 시커먼 물이 끓고 있었고,

어떤 통에서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아이들은 천변(川邊) 좁은 공터에서 놀았다.

판잣집 사이 골목은 뛰어놀기에는 비좁았다.

장마철에 똥물이 넘친다고

장구를 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1960년 1월 동대문 주변 청계천 모습. 멀리 동신교회가 보이고 오간수교에는 전차가 다닌다. 다리 아래는 잿빛 물이 흘렀다. /조선일보DB
1960년 1월 동대문 주변 청계천 모습.

멀리 동신교회가 보이고 오간수교에는 전차가 다닌다.

다리 아래는 잿빛 물이 흘렀다. /조선일보DB


빡빡 민 머리에 털옷 입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옆구리 터진 글러브를 끼고 권투를 했다.

동무들이 에워싼 링,

도망갈 구석 없는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은 서로 두들겨댔다.

 

맨주먹일 때만큼 아팠지만

때리는 즐거움에 고통은 잊혔다.

주먹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잿빛 세상에는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와, 황홀하다!”

맞은 아이가 자존심을 누르며 던진 말에

동무들은 눈두덩을 주먹으로 눌러

어둠 속에 어룽거리는 황홀경을 즐겼다.

 

‘니네나 나나, 삼류(三流)다.’

맞으며 웃어대는 아이들을 외면하고서

자관은

삐져나온 메밀묵 통을 소매 밑으로 밀어 넣으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전쟁이 터졌다.

미아리고개로 인민군 탱크가 지나갔고

인민군보다 더 많은 피란민이 내려왔다.

천둥벌거숭이로 38선을 넘은 삼팔따라지들은

청계천과 중랑천,

정릉천변과 남산 기슭에 상자집을 지었다.

 

사는 꼬락서니가 개미집 같아서

사람들은 개미마을이라고 불렀다.

변소도 함께 썼고

판자와 골판지 벽 너머로 방귀 소리도 들렸다.

 

남산 기슭의

일본 육군 관사를 점령했다가 쫓겨난 사람들은

미군 사격장에 움막을 지었다.

목숨을 건 산기슭의 정착지는 해방촌이라고 했다.

 

농부였던

자관의 아버지는 전쟁 와중에 양계장을 했다.

닭 전염병이 돈 지 사흘 만에 몽땅 죽었다.

1·4 후퇴 때 도망갔다가 와보니

남양주 금곡 집은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아버지는

남은 재산을 다 팔아 고무 공장을 차렸다.

망했다.

선비 기질이 농후한지라

손대는 사업마다 신기할 정도로 망했다.

 

없는 살림을 더 쪼갤 수 없어

자관이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곱 남매는 외갓집, 고모 집으로 흩어져 살았다.

 

전쟁이 끝나고

자관네는 미아리에 집을 지었다.

산기슭에 기생하는 똑같은 상자집이었다.

 

청계천변 개미마을은 생명체였다.

자고 일어나면 집이 지어져 있고,

해가 지기 전에

몇 채씩 철거되거나 불이 나서 사라졌다.

탈피와 변태를 반복하는 동물 같았다.

 

어느새

광화문 우체국에서 동대문 사이에

갈 곳 없는 사람이 6만 명이나 모여들었다.

국수 장수, 찐빵 장수,

뱀탕 장수에 넝마주이와 거지까지 함께 살았다.

 

  
	1973년 12월 6일 청계천변에 밀집되어 있던 판자촌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 주변의 무허가 판자집들이 전소되었다. /조선일보DB

1973년 12월 6일 청계천변에 밀집되어 있던

판자촌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

주변의 무허가 판자집들이 전소되었다.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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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겨울 동대문 판자촌에 큰불이 났다.

집 2000채가 홀랑 타버렸다.

집터와 개천은 시멘트로 덮였다.

그 터에 삼팔따라지들은

신식 건물을 짓고 시장을 만들었다.

4년 뒤 완공된 시장 이름은 평화시장이다.

 

사람들은 재봉틀 하나로

옷 가게를 차리고 군복을 물들여 팔았다.

1층은 헌책방들이 들어왔다.

 

돈이 없어 입주할 수 없던

광장시장 서울 토박이들이 안 부러운 별천지였다.

얼어붙은 건천(乾川) 주변은

나무로 얽은 2층, 3층집 숲이 장관을 이뤘다.

1층 지붕은 2층 마당이었고,

2층 지붕은 3층 마당이었다.

둑 윗집과 아랫집은 쓰레기 투기를 두고

걸핏하면 아귀다툼을 벌였다.

자관은

그 숲 향기를 원 없이 맡았다.

홍수에 숲이 떠내려갔을 때

아이 얼굴에도 눈물 사태가 났다.

누가 이 난리에

내 아이스케키를 사 줄 것이며,

누가

구두를 닦겠다고 신발을 내밀 것인가.

바람이 앞섶을 파고들었다.

겨울은 홍수보다 무서웠다.

신설동 이청교 아래

겨울 모래는 쇠보다 강했다.

 

나이 마흔에 여섯 식구를 거느린

고물 장수 김동철이 한탄했다.

"식량도 없지, 땔감도 없지,

그런데

모래까지 얼어붙었으니

탄피며 쇠붙이랑 사금파리는

어떻게 파내서 돈으로 바꿀꼬!"

부부 고물 장수는

모래를 파헤치던 갈고리를 집어던졌다.

멀리

평양 출신 젊은 장로

이봉수가 만든 동신교회가 보였다.

 

다리 위는 만물상이었다.

미군 부대 깡통도 팔았고 구호품도 팔았다.

책 좌판도 보였다.

자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가 책을 읽고 있었다.

 

자관은

아이를 외면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린 메밀묵 장수는

오간수교를 건너 다시 천변 둑을 걸었다.

자관은

메밀묵 통을 메고 학당으로 갔다.

 

천변에는

한 교통경찰관이 세운 천막 학교가 있었다.

자관은

서울대생에게서 영어를 배우고 산수를 배웠다.

자관은 중학교 과정을 천막에서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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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관련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세상은 장남을 위해 존재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큰형을

고등학교 졸업시키고 대학까지 보냈다.

길거리에서 대학생 형을 만나

인사하면 형은 못 본 척했다.

 

가끔 술에 취해 귀가한 형은

"네가 창피하고 불쌍해서 못 본 척했다"고

울먹이며 동생을 때렸다.

잿빛 겨울이 또 한 번 세상을 할퀴고 갔다.

1960년

어느 날 밤 행상에서

돌아온 어머니에게 자관이 말했다.

"어머니, 나 학교 가고 싶어요."

어머니가 한탄했다.

"… 외갓집 동갑내기들은 다 고등학생인데

내 아들은 구두 통을 메고 있구나."

자관은

창신동에 있는 강문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야간반은 졸업장이 없어도

월사금만 있으면 입학할 수 있었다.

강문고는

훗날 용문고등학교로 바뀌었다.

자관은 낮에는

돈암동에 있는 걸레 공장에 다녔다.

출근 시각은 아침 여섯 시였다.

미아리에서 걸어서 출근하려면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야 했다.

"어머니, 나 쪼금만 더…."

"일어나라. 공장 가야지."


 


	가난한 판자촌 가족의 단칸방에서의 생활과 식사장면. /조선일보DB

가난한 판자촌 가족의 단칸방에서의

생활과 식사장면. /조선일보DB

 
승강이 끝에 일어나면

눈가를 훔치는 어머니의 환상이 보이곤 했다.

훗날 성장한 아들이 물었다.

"어머니, 그때 우셨어요?"

어머니가 대답했다.

"… 내가,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게,

그 새벽에 너를 깨우는 게 힘이 들었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내가 굉장히 아팠다.

그런데

공장 안 가면 네가 학교를 못 가니까…."

"니미, 네까짓 게 공부?"

출근 첫날 공장 주임은

교복 입은 자관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열 사람 가운데

여덟은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중학교가

의무교육으로 바뀐 게 1985년이다.

 

사장과 주임은 매일 아침

그 한(恨)을 자관의 뺨에 풀어댔다.

뺨에 남은 출근 도장 자국을 문지르며

먼지 내뿜는 야자수 섬유를 집어 들면

옆 작업대에서 걸레 자루를 만들던 두세 살 위

예쁜 누나들이 아이를 달래주곤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저게 커서 뭐가 되려고."

오후 네 시,

퇴근하는 자관의 뒤통수에

주임은 조소와 질투를 던져댔다.

공장에서 학교까지 버스를 탔다.

돈이 아까웠지만 버스를 타면

정확하게 다섯 시 10분 전에 닿았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걸었다.

 

집에서 공장,

학교에서 집까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한 달에 500원을 모았다.

책 한 권 값이었다.

 

그 돈으로

자관은 단테의 신곡(神曲)을 읽었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었다.

 

3년 동안

매일 새벽 한 시에 집에 돌아와서 밥 먹고

토끼잠 자고 세 시간 반 뒤 출근하고 나니

자관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

1963년 자관은 생애 첫 졸업장을 받았다.

그해 여름,

어김없이 공군기 한 대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서울 상공에 나타났다.

DDT 연막 소독을 대신하는 말라티온 살포기였다.

맹독성인 말라티온은

DDT보다 지독하고 광범위하게

모기와 파리를 죽였다.

 

귀청을 찢는 굉음에 귀를 막고서

개미마을 사람들은 천변 탈출을 꿈꾸며

서둘러 장독 뚜껑을 덮었다.

 

8월, 9월 두 달 동안

사람들은 스물네 번이나

용이 되어 승천(昇天)하는 꿈을 꿨다.

한 달 뒤

박정희 후보가 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는 있어도

모두가 용이 되지는 못한다.

탈출은 쉽지 않았다.

 

졸업장을 받으면

뭐든 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자관에게

세상은 무서웠다.

 

3년 전에는 4·19 혁명이,

2년 전에는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청계천 곳곳에

공구리(콘크리트) 기둥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천(川)이 사라지고 있었다.

격변이었다.

"졸업장도 소용없네요.

군대나 가렵니다."

졸업장을 처박아두고

여전히 공장에 다니던 자관은

졸업한 지 2년 만에 군대를 택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의

그 강원도 원통 11사단에서

죽지 않을 만큼 고생하는 동안

부산시장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입경(入京)했다.

 

김현옥의 별명은 '불도저'였다.

개미마을에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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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메밀묵통 멘 열다섯 살의 나… '판자숲의 三流 개미'였다
소년 구자관과 청계천 〈下〉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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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자관 대표 사진

(2015년의 구자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떡하다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때는 다 마찬가지였겠지요?

 

사람들이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뭘 하겠다' '좋겠다'고 하는데

나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악몽이었으니까요.

늘 한탄만 하던 저에게

초창기

우리 회사 직원 한 분이 가르침을 줬습니다.

'뜨는 해는 잡을 수 있어도

지는 해는 잡지 못한다'고요.

 

그게 오늘

이 나라를 만든 힘이라고 생각해요.

해가 지기 전에

성실하게,

열심히,

부지런히 살았기에

우리 모두가 악몽에서 깨어나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걸레 공장 주임한테

욕먹기 싫어서 학교를 그만뒀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고요.

 

사는 데 급급하다 보니

변변한 사진도 없습니다.

그 힘든 때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합니다.

세상 뜨신 아버지와

돌아간 큰형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존경합니다."

스스로 '삼류'라 자학하며

청계천변을 하릴없이 맴돌던 소년은

지금 연 매출 5000억원이 넘는

청소 용역 회사 삼구아이앤씨의

대표 구자관(71)이다.

 

두 번 자살 미수를 겪고

악몽의 터널을 살아낸 끝에 이룬 꿈이다.

 

구자관은

2004년 용인대 경찰행정학과 04학번으로 입학해

학점 3.56으로 졸업했다.

예순네 살이었다.

 

2011년에는

서강대 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학위를 땄다.

예순일곱이었다.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메밀묵통 멘 열다섯 살의 나… '판자숲의 三流 개미'였다

 

출처 : 무진장 - 행운의 집
글쓴이 : 유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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