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신앙

2011. 3. 8. 18:02

 

J.M. 스피어, 문석호 역, 기독교철학개론,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스피어/ 도예베르트와 그의 학파에 관한 탁월한 입문서를 제공.

이 기독교 철학의 접근법은, 기독교에 부합되는 철학을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

소위 “칼빈주의 철학”운동- 40여년 전 화란에서 기원된-은

곧 세계 많은 나라에서 계승자를 지닌 철학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신념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운동 속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장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이 기독교 철학과 과학의 발전을 자극할 수 있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모든 존엄과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한다.

 

 

 

제 1 장

기독교 철학 서론

 

1

예비적 질문

 

철학이란 무엇인가?

1) 철학활동의 결과/ 칸트의 철학 등.

2) 철학적 활동 자체/ 우리의 시간적 삶에 결합되어 있는 인간활동으로서 철학하는 행위

 

철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학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사유(in thought)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특수한 과학(협의의 자연과학적 개념이 아닌, 모든 과학을 포괄하는 최광의의 과학)적 사유에 종사하는 것.

 

과학은 무엇인가?

구별적이고, 분석적이고, 대립적(antithetical)인 조직적(체계적) 사유이다.

1) 단순경험은 총체적인 삶 또는 충만한 삶에 밀접하게 결합된다.

2) 과학은 우리 자신과 탐구의 객체 간에 어떤 거리를 유지한다.

 

철학은 과학이다. 철학은 체계적, 분석적, 대립적이다.

과학의 각 분야는 실재의 특수한 국면을 탐구한다. 법학, 사회학, 역사학, 자연과학 ---.

 

철학은 자신의 과학적 인식활동을 어떤 단일한 국면에 집중시키지 않는다.

피조세계의 모든 실재에 관심을 갖는다. 국면을 분리적으로 보지 않는다.

 

철학자의 영역은 전체우주이다. 지상적 실재만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에 관해서도 신적계시에 의존하여.

철학은 성격상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전체성의 관점을 획득하는데 진력한다.

그러나 특수과학들은 단지 실재의 단일한 국면에만 관심을 갖는다.

 

실재의 어떤 단일한 국면도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국면은 그 자체를 초월하여 다른 국면들, 곧 창조주의 뜻에 따라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다른 국면들을 지시한다. 세계의 통일 성 속에 있는 어느 것도 저절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과학이 철학적 기초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은 모든 다른 과학들의 필수적 지반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모든 과학은 어떤 철학적 전제들 위에 수립된다. 결국 철학은 전체 우주에 관계된다.

이론적 사유의 한 부분으로서 철학은 단순한 일상적 사고를 더 풍성하게 하고, 더 깊이 있게 한다.

 

지금 과학자들은 마땅히 물어야 할 궁극적 질문들을 묻지 않는다.

일부 자연과학자들은 자연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의 기원, 의미 또는 목적에 관해서 관심이 없다.

 

그러나 철학자는 시간적 실재의 전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과학적으로) 사유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간적 실재의 다양한 국면들과 전체우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원을 지향한다.

 

철학은 방향적이어야 하고, 피조물의 궁극적 목적이자 근원인 하나님을 지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철학은 기독교 철학이다. “만물은 그분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왔다.”

 

철학은 시간적 우주 전체가 그 근원과의 직접적 관계 속에서 조명되는 방식으로

시간적 우주 전체에 연루되는 과학적 사유이다.

 

 

2

철학과 종교

 

철학자는 자신의 “신적 소명”을 충분히 자각하고 작업해야 하며,

철학은 하나님이 그의 언약 안에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업무에 속하는 것이다.

 

철학은 하나님이 수여하신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의 한 부분으로서 절대로 폐기될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의 삶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쳐져야 한다.”(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6문)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을 세우시고 의무를 수행하도록 인간을 부르셨다.

첫 언약의 머리인 아담 안에서 인류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파기하였고,

그리하여 언약의 약속을 상실하고,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유지하시고,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의 약속을 다시 얻게 하셨다.

자신의 순종을 통해 그리스도는 언약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시고,

그의 교회를 타락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원리상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온 심령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인간을 재창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인간은 언약을 지켜야 하고,

언약은 인간의 모든 삶을 포함한다. 단지 영혼만 구속받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전체 자아가 언약에 속한다.

 

성경적인 철학자는 삶을 자연과 은총의 두 영역으로 구분하는

토마스주의(로마 카톨릭)의 견해를 인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전 삶과 궁극적으로 전체 세계를 새롭게 하고, 구속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전 삶으로 언약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

종교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종교는 사람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들이 종교 생활의 한 부분이고, 성격상 종교적이다.

 

종교와 예배는 구분된다.

종교는 우리의 전 삶을 포괄하지만, 예배는 단지 종교의 자그마한 한 부분이다.

우리는 예배라는 좁은 영역 밖의 것들에 대해서도 신적 소명을 갖는다.

신자의 모든 삶이 종교적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이 일하는 것보다 더 경건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과학에 종사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기도하고 일하도록 요청하신다.

인간은 과학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임무이다.

철학은 종교 곧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속한다.

그러나 철학은 성전이나 사원은 아니다. 그것은 예배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비기독교철학자들은 종종 철학을 예배로 대치하고,

철학의 성전에서 주권적 이성으로 세운 우상 앞에 절한다.

 

철학은 예배가 아니고 종교의 한 부분,

곧 주님을 섬기고 다른 신들을 대항하여 싸우라고 부르시는 지상적 소명의 한 부분이다.

철학 안에는 흑암의 나라에 대항하는 거짓 신들과의 갈등,

곧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늘과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과학사상들과의 투쟁이 존재한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철학은 언약의 풍성한 축복들을 보증받을 수 있다.

과학의 영역에서 언약을 지키는 사람들은 성령의 조명과 지시에 의해 도움을 받게 된다.

 

 

3

철학과 평범한 그리스도인

 

잘못된 관념들- 철학은 지식적이고 대중들보다 우위에 있는 영역이다.

과학이 자충족적이라고 선언한 사람들 사이에서 19세기에 일어난 과학의 우상화의 결과이다.

 

“다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기독교적 철학과 과학에 실제로 관계를 가진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부속된 모든 것과

주님이 섬김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에 관계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고 새롭게 되는 모든 것에 관계된다.

 

그리스도는 과학의 영역에서도 주권자이시다.

기독교 과학은 그 성취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고 확장시키도록 하나님이 부여하신 임무이다.

과학 업무는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일부 과학자들의 독점적 작업이 아니다.

 

결국 모든 교회, 모든 하나님의 백성- 원리적으로 새로운 인간- 은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고,

그분의 위대함을 높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신자가 실제로 과학적 활동과 철학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작업의 분할이 존재하지만

어떤 신자도 하나님의 존엄과 관계되는 일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과 그분의 영광을 위한 모든 것에 괸심을 두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에 종사하라는 부르심을 받지는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기독교 과학의 발전에 진정한 관심을 갖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기독교 과학과 철학은 모든 신자들의 생애 동안에 열매를 맺는다.

그들은 더 나은 위치를 갖기 위해 기독교 과학의 결과들을 파악하여야 한다.

기독교 과학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의 풍요성과 그 지혜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기독교 과학과 철학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피조적 실재의 한 국면을 신격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력하는,

“세상”에 속해 있는 모든 운동들을 대항하고, 대적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비기독교적 또는 반기독교적 체계 속에서 유래하는

오류의 세력에 대한 통찰력을 구비하였을 때,

그들은 거짓 영들에게 그렇게 쉽게 미혹되지 않고,

모든 기독교적 활동을 올바른 노선 속에서 행할 것이다.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걸을 것이다.

 

 

4

철학과 성경

 

기독교 철학은 성경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기독교 철학은 성경적 철학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진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기까지는 존 칼빈의 힘이 컸다.

칼빈은 삶의 어떤 영역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그러기에 이 진리는 철학에도 적용된다고 분명히 가르쳤다.

 

개혁주의 철학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인식과 함께 출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신적 소통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

그렇다고 성경 본문을 인용하는 것이,

어떤 견해에 대한 성경적 지지를 입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은 철학 교과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다른 과학문제의 교과서도 아니라는 사실이 단호하게 확립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이다.

성경은 언약의 하나님이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인류에게 말씀하신 계시이다.

과학은 인간 활동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유오하고, 오류에 종속된다.

 

철학과 과학은 단순히 성경 이상의 것을 주목해야 한다.

철학 체계는 성경 만으로 수립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과학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우주에 관한 우리의 검토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정확하게 수행될 수 있다.

“당신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나이다.”

 

그 기본적 개념들에 있어서 기독교 철학은 성경을 고려해야 한다.

볼렌호벤은 그의 <칼빈주의와 철학의 개혁>에서

기독교 철학에 중요한 성경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 주권이 첫 번째의 최고원리이다.

두 번째의 원리는

진정한 종교는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 관계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세 번째 원리는

타락으로 인간의 마음이 부패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악된 인간에게

그의 은혜의 계시를 자유롭게 주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오직 죽음으로부터 구속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필연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과학이 아니고,

모든 과학을 초월하여 서 있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과학의 최고규범이다.

 

성경은 우리의 과학적 사유를 마땅히 이끌어야 하는 신적 안내자이다.

그러나 그 안내자는 과학적 활동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요청하며, 그것을 성립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한 활동들을

과학적으로 검토할 책임으로부터 우리를 면제시키지 않는다.

 

기독교 철학의 결과들은 성경 안에 머무르는 것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지적 투쟁과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과학과 철학을 사용하도록 요청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따라 인도함을 받는 철학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기독교 철학은 삽과 검을 사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 속에 있는 그분의 지혜를 과학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더욱 나은 명료성을 성취하기 위하여 삽을 사용한다.

그것은 피조적 실재에 관한 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삽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종 넘치는 힘으로 공격하는 세상의 영- 과학의 도구들로 중무장한 -을

그 자신의 무기로 퇴치하기 위하여 검을 사용한다.

그것은 세상의 영이 사로잡고 있는 허위들을 폭로하기 위하여 검을 휘두른다.

 

조직신학은 단지 신학이라는 특수과학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결코 기독교 철학을 대신할 수 없다.

조직신학의 임무는 교회의 교의를 과학적으로 상술하는 것이고,

교회의 고백들과 신조들에 관해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적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조직신학은 철학의 임무를 대신할 수 없고,

피조적 우주에 관한 탐구에 종사할 수 없다.

조직신학과 철학의 탐구영역은 확실하게 구분된다.

철학은 신학이 아니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전적으로 성경적인 입장만을 추구하는 기독교 철학은

교회의 신앙고백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것들의 과학적 탐사에도 무관심할 수 없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이방철학으로부터가 아니라

기독교 철학으로부터 전제들을 취하는 한에서만 오직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

 

 

5

철학과 단순경험

 

단순경험이라는 말은 대체로 우리가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하고, 식물이나 동물들 같은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물들을 관찰하는

구체적인 실재에 속하는 경험을 가리킨다.

단순경험속에서 우리는 구체적 실재에 관한 순박한 견해를 갖는다.

 

우리는 단순경험 속에서 실재의 풍요성과 다양성을 경험한다.

모든 것이 거대한 전체 속에 연결된 관계성과 통일성을 경험한다.

아무 것도 저절로 존재하지 않는다.

피조물은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전체이다.

 

기독교 철학은 단순경험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비기독교 철학은 일반적으로 철학과 단순경험이 모순된다고 본다.

칸트는 단순경험이 철학적 통찰력에 대한 경험을 박탈하기 때문에

철학자는 단순경험의 구체적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철학자에게 철학과 단순경험 사이의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는 후자를 보완한다.

기독교 철학자는 대중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철학은 단순경험과 협력하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구체적 실재에 관해 그 주의를 집중한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은 실재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고 진리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단순경험은 현상과 허구의 세계에 거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피조적 우주에 관한 과학적 관점이 일상적 경험의 단순한 관점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사실상 철학은 단순경험에 기초되기 때문에 단순경험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철학자와 다른 사람들간의 유일한 차이는

철학자는 자신이 그 근원과의 관계 속에서 피조물을 반성함으로써

철학적으로 세계를 검토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알고 있다는 것 뿐이다.

 

단순 경험과 과학적 분석 간의 차이는,

전자는 자체를 실재의 범주 안에 구체적으로 위치시키지만,

후자는 실재의 특징적 양상을 추상하고,

특수한 양상이 과학적 분석으로 드러나는 대립적 관계 속에서 그것을 조명한다는 것이다.

 

 

6

철학의 출발점과 방향

 

철학은 전체 우주에 관한 과학적 반성이다.

다양성과 통일성 속에서 우주에 관한 전체적 안목을 얻을 수 있는

고정점(fixed point)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철학은 중립적 근거로부터 유래하는가?

그것은 자충족적인 과학적 사유에서 기원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는 우리 실존의 종교적 심층으로부터 발원하는가?

 

도예베르트가 아르키메데스 지점(Archimedean point)이라고 부르는 철학의 출발점

우리의 종교적 심층으로부터 유래한다.

아르키메데스, “나에게 고정된 막대기만 있으면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

우리의 출발점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활력적으로 종사하는 지점이 철학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아르키메데스 지점은 우주 안에 있는 다양성을 넘어서야 하고

우리가 충분히 성찰할 있도록 그것을 초월해야 한다.

 

러한 아르키메데스 지점은

오직 인간의 마음(heart) 또는 영혼(soul) 속에서만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마음은 집중점(concentration point) 곧 우리의 전인간 실존의 종교적 근원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리의 모든 행위, 사상, 감정 그리고 욕구가 발원한다.

마음 속에서 우리는 가장 심원하고 궁극적인 질문들에 답하고,

마음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결정된다.

 

거듭남 곧 성령에 의해 마음이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고,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길로부터 돌이킨다.

인간의 마음 또는 영혼은 감정이나 믿음 같은

우리의 생명적 기능들 가운데 하나와 동일시 될 수 없다.

그것은 그 어떤 생명적 기능보다도 심원하고, 시간적인 것을 초월한다.

 

마음은 인간이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지점이다.

마음에 대한 과학적 개념적 정의를 제공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까닭은 마음은 우리의 전실존의 중심으로서

우리 사유의 최심층의 (피조적)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신앙을 통해서 그분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중심에 관해 계시하신 것을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마음은 모든 삶의 중심이다.”- 그로사이데

“마음은 우리 실존의 최심층적 전지배적 중심이다.”- 그레이다누스

“마음이 우리의 사유, 의지 그리고 행동을 지배한다.- ”

 

인간의 마음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에게 적대적이다.

그것은 새롭게 되거나 여전히 반역적인 삶을 살거나 한다.

마음은 새롭게 구속받은 인간에게 속하거나

아니면 상실되고 타락한 사람들의 세계에 속하거나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철학의 출발점은 신자의 거듭난 마음이다.

그의 마음으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마음- 그의 생명의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전 삶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그의 과학적 작업을 지배해야 한다.

오직 이 방식 속에서만, 과학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시킨다.

 

아르키메데스 지점을 선택하는 것은 종교적 행위로서

처음부터 우리의 철학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지점을 택하는 것이다.

그 출발점 때문에 철학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종교에 근거된다.

 

철학은 신학이나 어떤 다른 특수과학에 기초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권적인 것으로 선포된 이론적 사유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종교에 의존하고, 종교는 인간의 전 삶을 포괄한다.

 

비기독교적 철학의 다양한 체계들 사이의 허다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한결같이 일치하는 하나의 요점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순수 과학적 사유 안에 자기들의 출발점을 둔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각 체계는 보편적 타당성의 의미에서

사상가의 인격과 독립적이고, 그의 마음과는 분리적인 객관성을 주장한다.

 

비기독교 철학은 피조적 국면을 신격화함으로써 출발한다.

우리의 우주에 대한 시각과 그것의 창조주와의 관계에 대한 시각을 왜곡함으로써

비기독교 철학은 충만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이러한 과학적 사유의 절대화는 그 심층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의 행위이다.

그것은 반역적인 종교행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식을 추구하지 않는 마음은

피조적 (이성) 안에서 안식을 추구하고, 결국은 거짓으로 끝맺는다.

 

우주적 다양성을 초월하지 않고, 그 범주 안에 포함되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모든 철학을

우리는 내재철학(immanence-philosophy- "안에 거하는“)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인간 이성은 우주적 다양성 속에 속해 있다.

오직 그의 마음 안에서 인간은 세계의 다양성을 초월한다.

오직 마음 속에서만 철학의 진정한 아르키메데스 지점은 발견된다.

 

철학의 출발점은 인간학적일 뿐 아니라 우주론적이다.

그 출발점은 인간과 우주의 실존이 만물의 영원한 근원에 집중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철학자는 이 출발점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인류의 종교적 공동체일 수 있다.

 

그러나 타락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이후로 화해할 수 없는 근본적 대립이

이 급진적인 종교적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다.

인간의 삶 속에는 종교적 대립이 있다.

 

한편으로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존엄과 영광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반역적 행위는 진리를 어둡게 한다.

이 대립은 철학과 과학 뿐만 아니라 인간의 수고의 모든 다른 영역들 속에도 현존한다.

 

비기독교적인 내재철학은 그 주창자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이 종교적 결정은 본질상 개인적이 아니라 공동적이다.

 

철학의 방향 -

활동하는 사람은 누구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철학은 종교적으로 결정되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두 상태에 대응하는

두 과정 가운데 하나를 따른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새롭게 되어 하나님에게 나아가거나,

아니면 반역으로 전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기독교 철학은 의식적으로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자 새롭게 하는 자인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 방향을 선택한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과학과 철학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찬미하도록 철학을 새롭게 한다.

철학은 만물의 근원을 향해 자신 위에 그리고 자신을 넘어서는 지점을 지적해야 한다.

 

내재철학 역시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출발점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포기한다.

그것은 주권적 인간의 존귀를 추구한다.

 

도예베르트는 이러한 인간 중심적 사상의 태도를

<인간성의 이상(理想)>(the ideal of personality)이라고 부른다.

이 인간성의 이상은 르네상스 철학에 그 증거가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기본적으로 근대철학은 <과학의 이상>을 추종함으로써 인간의 주권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과학의 신격화가 인간의 전락을 야기하고,

인간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무의미한 원자가 될 때까지

인간은 전능적 과학을 통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고,

그리하여 인간은 과학을 가시적인 자연의 영역으로 제한시켰으며(칸트),

도덕적 사유의 영역 안에서 인간의 무제약적 지배를 허용하였다.

 

인본주의 안에는 <과학의 이상>과 <인간성의 이상>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

곧 전자의 측면과 후자의 측면이 서로 더 높이

자기의 손을 들어올리는 것처럼 보이는 갈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기 전에는

안식이 없기 때문에 결코 끝이 있을 수 없다.

 

 

7

철학과 실재의 의미성

의미존재

 

 

 

 

<이론적 사유의 신비판> 제4권에서

도예베르트는 실재의 의미성(meaning-character)을 강조한다.

 

피조된 모든 것은 의미를 소유하거나 의미이다.

다르게 말하면 피조물은 자충족적이 아니다.

아무 것도 저절로 또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다른 사물들과의 연계성(coherence)속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실재의 모든 국면은 그 자체를 넘어서 실재의 다른 국면들을 지시한다.

 

피조물은 자체 안에 어떤 안식 지점을 포함하지 않고,

자체를 넘어서 있는 창조주를 지시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사회적 관계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 속에 그리고 그들 서로 간의 관계 속에 두신다.

그 결과 피조물에게 의미가 부여된다.

 

하나님은 의미의 부여자이시지만 하나님 자신이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분 자신이 자충족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모든 의미를 초월해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스스로 존재하신다.

하나님만이 지존자이시다.

의미가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그 운명,

곧 그 최종적 목적이나 목표를 발견한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실재의 의미성은, 실재는 상대적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자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만물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그들은 창조주에게 관계되고, 의존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한다.

 

실재의 각 국면

(수, 공간, 운동, 에너지, 생명, 감정, 사고, 역사, 언어, 사회, 경제, 미, 법, 사랑 그리고 신앙)은

의미의 국면(aspect of meaning)이다.

감정도, 사고도, 그리고 다른 어떤 국면도 그 자체로 분리 되지는 않는다.

만일 이러한 분리가 시도된다면, 실재의 통일성은 깨어지고,

단순한 추상만 남게 되며, 그럼으로써 의미의 부여자요, 만물의 근원이자 목적이신 하나님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활동에 대한 찬양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우주의 모든 국면은 다른 국면들을 지시한다.

그리고 모든 양상들은 깨어질 수 없는 통일성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함께 피조되었고, 유지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주의 모든 국면과 모든 부분은 의미이다.

 

전체로서의 우주는 자체를 넘어서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이 관계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의미(fulness of meaning)나

전체적 의미(totality of meaning)를 지시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세계를 의미-왜곡적인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신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만물은 새롭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피조물의 의미성은 다시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성경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설명한 앞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기초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것이다.

 

계시록 5장/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37-38을 계속 같이 읽음.

그가 하나님의 오른 손에서 책을 취했을 때

장로들은 기쁨의 찬양을 불렀고, 천사들에 의해 둘러싸였으며,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지금 죄는 의미를 크게 혼란시키는 자로서 세상 속에 들어왔다.

창조주로부터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멀리하는 쪽으로 그의 삶의 방향을 돌이켜 버린다. /

일반 은총은 제한적으로 영향을 미치고는 있지만,

마음을 새롭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지 않으면

그는 흑암 속에서 멸망할 것이고, 실존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그의 영원한 법 속에 죄도 포함시켰다./

철학은 항상 실재의 의미성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활동속에 있는 의미의 통일성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철학은 다른 국면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실재의 각 국면을 조명해야 한다.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의식하고 있는 철학은

만물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질문들,

다시 말해 피조물의 기원과 그것의 전체성 및 충만성에 관한 질문들에 답한다.

이 질문들은 오로지 근본적으로 기독교 철학에 의해서만 진실로 답변될 수 있다.

 

기독교철학은/ 주님이 그의 모든 사역의 의미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신적 계시의 권위에 종속시킨다. /

 

철학은 자체 너머를 지시한다.

기본이념 곧 철학의 종교적 선험(apriori)을 지시한다.

도예베르트와 블렌호벤은 그것을 우주법-이념(Cosmonomic-idea)-

(주권을 어떤 피조물에게도 귀속시키지 못하도록 절단하는 말)이라고 부른다.

주권적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우주법 질서(cosmic law order) 속에 두신다.

그것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들 사이의 연계성 및 실재의 관계들이 결정된다.

 

도예베르트와 블렌호벤은 모든 철학은 어떤 우주법-이념에 근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철학은 실재의 의미의 근원과 충만성에 관한 전(前)과학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철학은 종교적 선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비기독교 철학 곧 내재 철학은 피조적 우주의 한 부분이나 국면을

결정적으로 절대화하고 신격화한다.

그것은 단지 과학적 사유 자체 안에서 우주의 의미의 근원과 충만성을 추구한다.

따라서 과학적 사유가 모든 시간적 의미 위로 높여지고 신처럼 군림한다.

 

과학적 사유의 신격화는 다양한 형식을 취한다. /

심리주의는 심리적 사유의 신격화를, 논리주의는 논리적 사유의 신격화를,

역사주의는 역사적 사유의 신격화를 동일한 방식으로 낳는다. /

 

그것들은 모두 오류적이고, 우리들로 하여금 다음 성경내용을 상기시킨다.

“보라. 그것들은 주님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어떤 지혜를 가질 수 있겠느냐?”

 

진리-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에 도달하기 위해

철학은 제1계명 곧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명령을 범하지 않도록 제한되어야 한다.

철학은 거짓된 신들을 앞세워서는 안된다.

 

 

8

철학의 대립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걸어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을 분리하는 구분선이 과학의 영역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세상은 신자들의 진영(하나님의 도성)과 불신자들의 진영(지상의 도성)으로 구분된다.

과학은 서로 대적하는 이 두 진영에 관해 중립적이 아니다.

과학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배경상 종교적이다.

 

과학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발생하고,

모든 인간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위하거나 아니면 반대하는 선택을 한다.

과학은 하나님을 지시하거나, 아니면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거나 한다.

그것은 언약에 대한 순종 속에서 수행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중간지대는 절대로 없다.

 

철학이 성경의 빛을 거부한다면 그것에 문을 여는 다른 과정은 없고,

인간 속에서 그 직접적 빛을 추구하고,

나아가 이 허위의 빛을 가지고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수고하는 것이다.

 

모든 내재철학은 기독교 철학에 의해 거부되어야 한다.

진리를 부정하는 마음은 진리를 성취할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기독교 철학은 근본적으로 모든 종합철학의 타당성을 부정하고,

내재 철학의 기본 동기들을 성경으로부터 유래하는 개념들과 종합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한다.

이러한 종합은 교회의 발전에 해로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역에서의 삶의 발전도 똑같이 저지된다.

 

1세기의 기독교 교회의 변증가들 사이에는

기독교 사상과 비기독교 사상의 종합을 실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

 

블렌호벤은 14세기 이후의 시기를 종합의 쇠퇴기로 부른다./

신적 계시에게 부여되었던 본질적인 자충족성이 철학으로 이전된 시기이다./

 

계시는 은총의 영역으로, 철학은 자연의 영역으로 생각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된 철학 대신에,

철학체계들은 성경의 빛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후기 중세사상이 인본주의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종교개혁의 시기에는 기독교 사상과 비기독교 사상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을 최초로 인식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규범으로 인정하는 사람들과

인간 이성의 자율성의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간에

조화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루터는 자연과 은총 간의 중세적 구분을 철저하게 포기하였다.

칼빈은 모든 종합을 물리친, 최초의 개혁가였다.

그는 철학적 체계를 남겨놓지 않았지만,

과학적 사상을 성경의 규범에 종속시켰기 때문에, 참된 성경철학의 길을 예배하였다.

 

칼빈 이후에 기독교 과학의 진영 안에서 다시 한번 종합에 대한 열망이 불타 올랐다. /

합리론자들과의 제휴.

합리론자들은 이성을 전체 삶의 지배자로 삼음으로써 그것을 신격화하고,

그것에 어떤 제한도 두지 아니하였다.

인간은 주권적 존재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성을 “신앙하였다.”

 

“애굽의 새로운 단지”(Flesh pots of Egypt)- 새로운 종합의 시도?- 의 추구는

교회의 내면적 쇠퇴를 가져왔다.

 

기독교 과학의 개혁이 지난 세기 동안에 화란에서 일어났다.

칼빈으로 돌아가서 그의 정신을 지속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권위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은 아브라함 카이퍼였다.

카이퍼는 과학을 포함한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하였다.

 

카이퍼의 작업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경계를 멈추지 않도록 힘을 준다.

그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종합을 향한 충동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키에르케고르, 칼 바르트, 불트만,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의 철학 운동들.

이들은 기독교와 인본주의 사이의 연합을 시도한다.

 

모든 종합을 거부하고 성경적 철학과 비성경적 철학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우리가

비기독교 사상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어떤 유익이 있는가?

철학적 문제들의 해결을 구하고자 해서는 안되는 지점을 가르쳐 주고,

우리 시대의 영적 운동에 관한 정확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철학의 필연성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기를 소원한다.

 

 

 

제 2 장

우주법적 양상론

또는 법 - 영역론

 

 

9

주요 구분

 

철학/ 종교적 출발점.

기독교 철학/ 거듭난 마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과 우주 사이의 구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 창조주,

우주/ 피조적, 시간적.

 

하나님/ 자충족적.

우주/ 창조주에 의존/ 의미의 성격.

의미/ 모든 피조물의 존재양식, 성격, 본질/ 창조주를 지시

 

창 1:1은 또 하늘과 땅을 구분.

위에 있는 것/ 아래 있는 것

하늘: 하나님 보좌, 그리스도가 만물을 다스리는 곳

땅: 인간 활동의 영역, 인류의 문화적 업무/ 정복, 충만

타락 이후 하나님의 나라/ 흑암의 나라의 갈등

 

하나님/ 창조주/ 주권적 지배자

모든 피조물/ 하나님께 절대 의존

하나님은 피조물을 법칙 아래 두신다.

 

전체 우주는 신적 법에 종속된다.

모든 피조물은 조물주에게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법 위에 계신 분으로 법에 종속되지 않으신다.

법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

하나님은 법 수여자이시다.

 

칼빈 “하나님은 법으로부터 자유롭다.”

- “하나님은 법 밖에 서있다”(윌리암 오캄)와 다르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법을 주장하시고,

피조물은 단지 그 법에 종속된다.

 

과학은 이론적 사유의 법칙에 종속된다.

법은 하나님과 우주 사이를 구분짓는 경계이다.

 

이 경계를 벗어날 때, 우주의 국면(aspect)은 신격화된다.

 

하나님 자신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기독교 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검토한다.

 

피조물은 결코 자신의 피조성을 넘어설 수 없다.

항상 신적 법칙에 종속되고, 이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

신적 법칙은 창조주를 제약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모든 제약들을 초월한다.

- 철학의 제 1차적 중요성.

 

블렌호벤의 분류

일원론자- 하나님과 우주 사이의경계를 부정하는 철학자

이원론자- 긍정하는 철학자.

 

4 일원론

무신론(atheism)-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단지 세계만을 인정

반 우주론(a-cosmism)- 우주의 존재를 부정

범우주론(pancosmism)- 하나님을 세계에 종속시키고, 피조물 속에 둠

범신론(pantheism)- 세계를 하나님 안에 포섭

 

2 이원론

부분적 우주론- 신적 존재의 부분을 우주의 범주 안에 둠(예;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근대주의)

부분적 유신론- 하나님과 우주 사이의 경계선을 우주 속에 그림으로써 하나님 안에 우주의 부분을 둠

 

우주를 천상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전자는 후자보다 높여지고, 신격화된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을 피조물의 한 부분과 공유해야 한다.

- 마리아 숭배설, 화체설, 율법폐기론

 

기독교 철학은 종합을 피해야 하고, 기독교 사상과 비기독교 사상 간의 대립을 강조해야 한다.

기독교 철학은 유신론으로 자신의 관점을 정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유신론이라는 말은 성경에 바탕을 둔 철학적 개념을 지적하기에 부적합하다.

진리는 두 오류들 사이의 중간지점을 취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유신론은 범신론과 이신론의 중간이라고 한다.

 

 

10

우주법 질서

 

기독교 철학자는 주권적 창조주가 그의 전피조물을 법칙 아래 두었다는 계시적 진리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 우주법 질서라는 말은 피조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피조물의 모든 부분은 다양한 법영역들에 속해 있다.

모든 법칙들이 동일한 본질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특수한 종류의 법칙들은, 함께 취해져서, 법영역을 구성한다.

 

법 영역만큼 의미면(국면)(aspect)들이 있다.

각 법 영역에 상응하여 피조물의 특수한 의미면이 존재한다.

피조물 속에서 14가지 법영역들 미치 그 결과로 14가지 의미면들을 구별할 수 있다.

 

법 영역은 지속적인 경험적 실재의 기반구조로서 선험적이다.

법 영역들, 국면들 또는 양상들은 실재 속의 모든 변화하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기반을 형성한다.

그것들은 피조적 실재의 시간적 질서(temporal order) 속에 근거되고 있다.

 

우주법 질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법질서가 아니다.

우주법 질서는 인간의 자의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법질서는 과학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고, 단지 과학에 의해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 법칙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시간 속에서는 불변적이지만 영원하기 때문은 아니다.

 

법칙들은 준수되기 위해 존재하고, 모든 피조물은 그 법칙들에 대해 주체가 되거나 그것들을 통제 아래 있다. 주체(subject)라는 말은 우리의 자아, 인격, 또는 분석적 기능과 동일시 되는 것은 아니다.

(예: 돌은 중력의 물리적 법칙에 대해 주체이다. 동물은 물리적법칙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물질대사와 재생산의 생물학적 법칙과 감정의 심리적 법칙에 대해서도 주체이다. 인간은 물리적, 생물학적, 심리적 법칙에 대해서 주체이면서, 동시에 사유, 언어, 역사의 법칙 등에 대해서도 주체이다.)

 

특수한 사물이 주체로서가 아니라, 객체로서 기능하는 법영역들이 있다.

예: 식물은 심리학적 주체기능을 소유하지 못한다. 우리의 감각적 지각의 객체로서 그것은 객체로서의 심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원리상 모든 피조물은 모든 양상 또는 법영역에서

주체로서, 아니면 부분적으로는 객체로서 또 부분적으로는 주체로서 기능한다.

 

과학은 법영역들을 창출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다양한 의미면들을 부여하셨다.

하나님이 만물을 법영역들 속에 두셨고,

우주를 양상들로 교차시키셨다.

 

철학은 반성적으로 법영역들을 분석, 분리하고, 그것들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시도한다.

결론:

법영역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적 실재의 국면들에 따라 많은 법칙들과

상호관계 있는, 하나님이 배열하신 복합적 법칙들로서

모든 피조물이 순종해야 하는 것들이다.

 

 

11

우주법질서(계속)

 

모든 피조물은, 주체로서, 하나님이 그 존재를 위해 수립하신 법칙들에 종속된다.

 

수들은 사물이 아니고, 단지 사물의 기능에 속한다. 그것들은 주체들로서 한 가지 양상의 법칙에 종속된다. 수들은 산술적 또는 수학적 법칙에 복종한다.

선이나 원과 같은 공간도형들은, 사물이 아니지만, 수적 법칙과 공간적 법칙이라는 두 양상들의 법칙에 대해 주체이다.

돌과 같은 물리적 사물은 주체로서 운동의 법칙에 종속된다.

식물은 주체로서 생명적 영역의 법칙에 통제된다.

동물은 감정의 심리적 법칙에 의해 규제된다.

인간은 주체로서 사유, 역사, 언어, 사회, 경제, 미학의 법칙들과 아울러 법적, 윤리적 그리고 신앙적 법칙과 같은 양상들의 법칙에 종속된다.

 

모든 피조물은, 그것이 객체가 아닌 한, 주체로서 기능하는 최상층의 법영역과의 관계속에서 분류된다.

돌은 물리적 사물이고, 식물은 생명적 사물이고,, 동물은 심리적 사물이다.

숫자와 공간도형은 단지 우리의 사유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간의 사상의 논리적 구성물이나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수적 및 공간적 국면을 지닌 존재로 지으셨다.

 

모든 법영역의 법칙면(law-side)과 주체면(subject-side)간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법칙면과 주체면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상관적 통일성 속에 있다.

전자는 후자를 향해 진행한다.

법칙들은 그것들을 복종시키는 주체들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고,

또 법칙들이 없이는 주체들도 그것들의 존재와 기능을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법칙 아래 있는 것은 결코 하나님처럼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피조물로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경우에도 죄, 심판, 또는 벌이 주어지는 그분의 법에 여전히 종속되어 있다.

 

법칙과 주체 사이의 상관성 곧 상호관련성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법칙은 결코 주체가 아니고, 주체는 절대로 법칙보다 높아질 수 없다.

-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전 삶을 지배하려고 하며, 자신이 자신의 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적 법질서를 반대하고, 그의 사유 안에서 주체를 법칙면 위에 위치시킨다.

이때 그는 다른 신을 둠으로써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기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양상들의 연쇄관계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더 복잡한 것과 덜 복잡한 것을 정확하게 결정하는 논리적 분석을 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첫 번째 양상은 수적 양상이다.

수적 영역이 가장 단순하기 때문에 첫 번째 영역이다.

그것들은 사물들에 관한 한 특수한 국면으로서 수적인 것에만 관련된다.

수적인 국면은 숫자들로 표현된다.

수를 제외하고 생각하면서, 어떤 사물의 공간성, 운동 또는 다른 국면들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번째 양상은 공간적 양상이다.

수적 양상보다 좀더 복잡하다.

그것은 수적 국면을 전제로 한다.

공간은 다수성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은 수많은 수의 점들이다. 공간은 수 많은 부분들을 전제한다.

 

세 번째 양상은 그 이전의 양상들을 전제한다.

 

돌과 같은 물리적 사물은 운동, 열, 중력 따위의 법칙들에 종속될 분 아니라

공간을 차지하고, 숫자로 세어진다.

 

그 이후의 영역들도 같다.

언어적 영역은 사회적 영역에 선행한다.

대화난 신호로서의 언어가 없이 즉 상징들 없이 사회적 상호관계는 불가능하다.

사회적 양상은 언어적 양상을 전제하고, 이러한 우주적 질서는 거역될 수 없다.

 

심미적 법영역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양상 다음에 와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양상 국면들의 도표

도예베르트와 볼렌호벤은 이 체계가 고정된 틀로 생각되지 않기를 원했다.

미래에 다른 양상들이 필수적으로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도예베르트, “이 철학은 그 출발점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기반위에 세워진다. 모든 시대의 사상가들은 비록 그들이 그것들을 법영역들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국면들을 구별하였다.“

 

가장 윗 부분의 굵은 수평선은 하나님과 우주 사이의 경계를 표상한다.

경계선 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고, 그 아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법에 종속되어 있는 우주이다.

이것은 공간적 분할이 아니라, 법칙의 분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 위에 계시면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가지고 동시에 그의 피조물 속에 거하시지만, 법수여자로서 하나님은 오직 그의 법 위에 계시지 결코 그 아래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도식 안에 수평적 칸들은 우주질서 안에 있는 구체적 실재를 관통하는 법영역들을 표상한다.

인간은 수직선 A에의해 수직적으로 그려진다.

작은 수직선 부분들은 동물-B, 식물-C, 물리적 사물-D에 대한 도식적 표상이다.

최하층의 법영역이 가장 단순하고, 최상층의 법영역이 가장 복잡하다.

후자는 그 이전의 모든 영역들을 전제로 한다.

 

법-영역도식

 

A

 

하나님과 우주 사이의 경계

 

 

신앙적 영역(신앙)

윤리적 영역(사랑)

법적 영역(판단)

심미적 영역(조화)

사회적 영역(사회적 교제)

언어적 영역(상징 의미)

역사적 영역(문화적 발전)

분석적 영역(사고)

심리적 영역(감정) B

생명적 영역(생명) C

물리적 영역(에너지) D

운동적 영역(운동)

공간적 영역(공간)

수적 영역(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