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민단편팬픽

오직성민SJ 2008. 8. 11. 22:24

 

 

 

#5.  ロ?マンカボチャ (로망카보챠)

 

 

 

"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졸업이다. 다들 알고 있지 ? 일단 이번학기 기말고사도 모두 수고 했고.. 마지막

  남은 일은 졸업 전시회다. 우리 과 에서 해마다 졸업 시즌에 발표회 갖는다는 건 다 들 알고 있지 ? "

 


늘씬한 젊은 여 선생이 허리춤에 팔을 올리고는 이번에 열릴 졸업 전시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지금 규현의 귀엔 아무 것 도 들리지 않았다. 애초부터 디자인 과 에는 들어 오고 싶은 생각 도

없었고, 그림에 취미도, 재능도 소질도 아무것도 없었던 터라 졸업 전시회 따위에 작품을 낼 수 있는

상황 도 아니었다. 그저 3년 동안 어떻게 잘 참고 다녔는지 그게 신기하고 대견 스러울 뿐 이었다.

 


날마다 과제의 압박 속에서 대충 대충 끄적여 내 던 것이 전부였던 규현 에게 졸업 전시회는 그저

귀찮은 일의 발생 이었다. 게다가 이번 전시회는 2명이 짝을 지어 한 조를 이루어 진행 한다는데, 그 말을

듣자 바로 든 생각은 누군지 몰라도 자신과 짝이 된 사람은 정말 크게 힘들 지도 모르겠다는 아주 작은

걱정 ?

 

곧 그 걱정도 쓰잘데기 없는 생각의 한 조각으로 변하여 창 밖으로 멀리 내 던져 버렸다. 여전히 귀엔

아이팟 이어폰을 꽂은 채 그저 고개만 까닥이는 규현을 내버려 둔 채로 제비뽑기는 시작 되고 있었다.

 

 

줄의 가장 끝 자리에 앉아있던 규현이 제일 마지막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숫자가 써 있는 종이를

멍 하니 바라보며 누가 13번 종이를 들고 있을까,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제외한 서른명 남짓

되는 아이들 중에 분명 누군가는 있겠지. 서로 짝을 확인하며 잘됐다며 부둥켜 안는 여자애들과 자신과

비슷한 실력에 지지리 복도 없는 남자애들 둘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의 종이를 바라 보고 있는 모습과.


그저 난 관심 없어, 귀찮아 따위의 생각만이 규현의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그러던 도중, 규현의 시야에 들어오는 남자아이 하나가 멈칫하며 규현을 부른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이어폰을 빼고 응 ? 하고 되물으니, 몇번이니 하고 묻는 목소리가 이젠 잘

들린다.

 


" 13번. "

 

규현의 대답에 약간 놀란듯 한 남자아이가 아, 하며 한숨인지 탄성인지를 내뱉는다.

그러는 넌 몇 번인데 ?

 

" .. 13번. 우리 짝이네.. "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녀석은 곧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민다. 잘 해 보자며 악수를 청하는

이 녀석의 이름이 어렴풋이 떠오르려다 만다. 분명 2학년때도 같은 반 이었던 것 같은데.

얼굴은 자주 봐서 아는데 이름은 잘 모르겠다. 규현 자신이 그 정도로 남들에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점도 한 몫 하지만 이 녀석은 웬만해선 다른 반 아이들은 잘 모르는 녀석이다 .

 

과 특성상 3년 정도 같이 다니면 웬만해선 다들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고 있다. 반이 세 개 뿐이라 학년이

바뀌어 반이 달라져도 학급 구성원들이 큰 변화 없이 다들 같이 올라가는 편 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은 구석에 쳐 박혀 나타나지 않았던 건지, 어떻게 된게 도통 이름이 떠 오르지 않을 정도로 존재

감이 불확실 하다.

 

미간을 잔뜩 치푸리며 이름이 뭐였더라 .. 한참 고민했다. 기억 날 듯 말 듯 해서 짜증 나는 것 도 있었

지만, 너 이름이 뭐니 하고 물어봐 이제와서 영구 박을 터트리면서 까지 이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 이성민 이야. 잘 해보자. "

" .. 어? 응.그래.. "

 


무슨 처음 만난 사이들 처럼 통성명을 하는 덕분에 주춤 한 규현이 어 그래. 하며 손을 놓는다.

다시 이어폰을 꽂은 규현은 곧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녀석의 등판을 멍 하니 바라 보기만 했다.

그래. 저 아이가 그 아이였다. 이성민.

 


급우들 사이에선 그닥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 이다. 가끔 여자애들이 그림 그리는 저 녀석을 둘러 싸며

잘 그린다, 신기하다, 이것도 그려줘, 라며 부탁하거나 재잘대곤 하지만, 남자들 사이에 잘 끼지 못하는

성격 탓에 어디서든 겉돌기만 했다. 섬세하고 얌전한 성격으로 곧잘 꼼꼼함을 보여주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려 왔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통통하고 작은 손은 꽤나 곱다.

하지만 녀석의 등 뒤에는 호모, 게이 라고 하는 꼬리표가 늘 동행 했다. 규현 역시 확실하게 단정 짓지는

않았지만 하는 행동이나 생김새로 봐서는 썩 어울리지 않는건 아니다 라고 혼자 생각 해 왔었다.

 


1, 2학년땐 줄곧 놀림도 받고 괴롭힘도 당하고 하다 3학년에 올라와서는 다들 대가리가 컸다고 놀리는게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젠 성민이 뭘 어찌 해도 다들 내버려 두는 편 이다. 그래서 성민도 요샌

팔짜가 폈던지, 전처럼 필사적으로 숨어 다니지는 않아서 규현에게도 종종 존재감을 확인 시키곤

했었다.


그래. 이성민 이구나.

 

그 이성민은 혼자 제 책상에 얼굴을 묻고 무엇인가 열심히 그리고 있다. 수능도 끝나고 정규 수업 과정도

모두 마친 상태라 학업일수를 채우기 위해 등교하는 기간 이어서 수업 시간 내내 졸업발표회를 준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 해 주었다.

 

각자 실습실에 가거나 교실에 남아 아이디어 스케치도 하고 시끄럽게 떠들기도 했다.

개 중에는 화장실에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태우기도 하고, 몇몇은 가방 싸들고 일찌감치 집에 돌아

가기도 했다. 규현은 그런 모습을 멍 하니 바라보며 그저 이어폰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한 여학생이 성민 에게 다가가 친구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바꾸어 달라고 요구 했다.

다들 제 자리에 앉지 않고 각자 끼리끼리 모여 그룹을 형성하고 있어 딱히 옮길 자리도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자신에게 한 부탁이니 거리낌 없이 벌떡 일어난 성민은 자리를 비켜주고도 한참 그 대로 서서

옮길 자리를 찾고 있었다.


정말이지 딱히 옮길 자리가 없었던 건지 한숨을 쉰 성민이 실습실 에라도 가야 겠다는 듯 걸음을 뗐다.

그 모습을 별 말 없이 바라보던 규현이 나즈막히 성민을 부른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공기를 가로질러 성민의 귓가로 향한다. 규현의 부름에 규현이 앉아있는 쪽을

바라보던 성민이 할말이 있냐는 표정을 짓는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규현이 눈짓을 한다. 규현의 눈빛이 닿는 곳은 바로 규현의 옆자리다.

빈 걸상이 청승맞게 놓여있는 그 자리로 성민이 성큼성큼 걸어 온다. 방금 전에 책가방 싸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 규현의 짝궁이 비워두고 간 자리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의자에 앉은 성민이 들고 있던 크로키북을 책상위에 올려 두고 다시 무언가에 몰두

하기 시작한다. 아마 이번 졸업 전시회에 낼 작품을 구상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뭐 하려는거야 ? "


한쪽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바람에 약간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그 바람에 놀란 성민이 엉? 하며 토끼눈

을 뜨곤 규현을 바라본다. 괜히 머쓱해진 규현이 조금 톤을 낮춰 이게 뭐야 .. 하고 묻는다. 그러자 잠시

머뭇대던 성민이 패키지 디자인을 하고 있다며 대답 한다.


이번 작품 전시회 주제는 패키지 디자인 인 것 같았다.


기존에 존재하는 상품의 패키지를 디자인 하거나 아니면 상품 자체를 직접 제작하여 패키지를 디자인

해도 상관 없다고 한다. 패키지 디자인은 그 포장 재질과 용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최상의 품질로 최고의

효과를 내어야 하는 꽤나 경제적인 작업 이었다. 소비자가 보았을때 미 적으로도 탁월 해야 하고 그 사용

감도 우수 해야 했기 때문에 까다로운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패키지 디자인 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오 .. 라는 탄성이 나온 규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성민이 이리저리 끄적여 놓은 러프 스케치를 관찰 하던 규현이 뭘 만드는 거냐며 묻는다.

 

 

 

 " 도넛츠 패키지야. 컨셉은 동화나라 .. 버전은 세 가지 정도야. "


한참 그리던 것을 펼쳐보이며 하나 하나 손가락으로 짚어 준다. 이건 뭐고 저건 뭐야. 색깔은 무슨색인데

종이 재질은 어떻게 할거고 수채화로 해서 어떻게 하고 도안은 이거야 하며 설명 하는데 전부 다 알아

들을 순 없었지만 무언가 대단한 것 이 되어 가고 있는 것 임에는 분명 했다.

 

" 근데 왜 도너츠야 ? "

" ... 내가 좋아해서. "

" .. 엉? "

" 마음에 ... 안들어 ? "

" 어? 아, 아냐. 어차피 난 이런거 잘 못하니까 너가 알아서 해. "

 


생각 해 보니 둘이서 같이 제작 해야 하는건데 너무 혼자 했다 싶었다. 규현이 어떤 대답을 할지 잔뜩

긴장했던 성민이 알아서 하라는 말에 활짝 웃어 보인다. 저 녀석 저렇게도 웃을 수 있었나 ? 성민의

웃음에 괜히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로 답한 규현이 멋쩍은듯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 근데 정말 .. 다 내 마음대로 해도 .. 돼? "

 


물론이지. 아이디어는 물론이고 재료수집, 제작, 발표까지 전부 다 너 혼자 해야 할걸 ? 괜시리 민망한

규현이 어, 응.. 하며 대충 얼버무린다. 혹시라도 자신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건 아닐 까 싶어 잠시 확인

사살에 들어 간다.

 


" .. 야. "

" 왜? "

 

저런 발랄한 얼굴에 대고 난 그런거 못하니까 너 혼자 해. 라고 말 할 수는 없어서 어떻게 돌려 가면서

말해야 애가 잘 구슬려 넘어갈까 한참을 고민 했지만 성격상 워낙에 좋은 소리는 못하는 편 이어서 그냥

혓바닥 굴러 가는 대로 말 해 버렸다.

 

" 난 그런거 못 하니까. 너가 해. "

" .. 웅? "

" 나, 난.. 못한다고, 아 그러니까 .. 할줄 모르는게 아니라, 그래 못해서 안해. "

 

뭐라는거야. 일단 하지 않겠다는 의사는 확실히 전달 되었을걸로 짐작 했다. 이렇게 까지 말하고 나니

더이상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서 화장실 이라도 한번 다녀 올까 싶어 몸을 일으키는데 제법 삐친

목소리의 성민이 말한다.

 


" 알겠어. 넌 하지 마. "

 


어라, 삐쳤다.

후다닥 연습장을 챙기고는 또 다른 빈 자리로 향한다. 괜히 씁쓸해져서 입맛만 다시는데 저렇게 삐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하고 싶지 않은것은 사실 인지라 어떤 말을 내뱉어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던

나야 안 하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또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 이었으면 괜찮았을텐데, 성민이 저러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아 어떻게 풀어 줘야 할까 덜컥

겁 부터 났다.

 

 

 

" 야, 미안해. "

" 뭐가. 너가 잘못한거 없어. "

" .. 야. 그러지 말고, 같이 재료 사러 가자. 응? 너 와트만지 쓸 거 랬지 ? 흰색 이랬나 ? "

" 아이보리 색이야. 흰색은 너무 하얘서 색깔 먹히면 어색해. 아이보리 써야 돼. "

" 어, 응 그래. "

 

흰색이건 아이보리 색이건 그래봤자 한 끝 차인데 거 되게 깐깐하다. 3년 동안 정말 자신이 이 학교 , 이

과를 다니면서 배우고 얻은것은 무엇인지. 평소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생각 했지만 이제와서 참으로

안타까움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쪽팔린 마음에 뒷목이나 벅벅 긁으며 종종 걸음으로 앞서가는 성민의

뒤를 성큼성큼 따라 간다.

 

 


학교 근처 이 동네에선 제일 큰 화방에 들어 섰다. 규현도 가끔 준비물을 사러 들르곤 했는데 대충

필요한 것들만 찾아 가는 편이라 이렇게 둘러 보게 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제일 크다는 말이 확실한 모양인지 2층까지 연결 되어있는 화방 내부는 굉장히 광활했다. 작달만한

성민이 까만 머리통만 간신히 보이며 이리저리 뒤지고 돌아다니는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어

그저 처음 들어와 서 있던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을 뿐 이었다.

 


" 아저씨이!! 젯소 안보여요 젯소! "


언제 저기까지 갔는지 미로 처럼 구불구불한 구조 속에서 벌써 저 만치 가 있는 성민이 빽빽 소리를

지른다. 계산대 앞에서 졸던 주인이 젯소 그 뒤쪽에 있을텐데.. 라며 머뭇머뭇 일어나자 없어요! 하고

소리 치던 성민이 얼마 안가 아, 여�네- 란다.

 


그래도 없다는 말에 일어나서 찾아 주려던 주인이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내려놓으며 또 눈커풀을 내려

놓자 거기 가만 있기 심심해진 규현이 성민의 뒤를 졸졸 쫓아 다녔다.

 

자그만 품 안에 뭘 그렇게 한 가득 담은건지. 대충 성민의 품 안에 있던 것들을 뺏어 들었다.

이제야 한 시름 편해 진건지 자유로운 두 손을 이용해 또 재료를 찾으러 저만치 사라 진다.

 

 


" 너 물감 몇색 정도 있어 ? "

 

갑자기 물어오는 바람에 잠시 딴 생각에 잠겨있던 규현이 엉? 하며 제법 큰 소리로 대답 했다.

규현의 반응이 웃기다는듯 작게 쿡쿡 웃어댄 성민이 수채화 물감 말야.. 라며 되묻자 잠시 가물가물하는

규현이 글쎄 .. 라고 대답하자 영 시원치 않았는지 눈앞에 있던 물감을 몇개 집어 든다.

 


" 난 거진 다 써서, 너도 없음 사야 겠다. "

 


손가락은 작고 통통해서 손 안에 물감 서너개를 넣으니 벌써 한 손이 꽉 찼다. 물감이 약간 크기도 했지만

남자치곤 손이며 발이며 키며, 죄다 작은 편이라 저것이 열아홉 맞나 싶을 정도 였다.

 

이제 대충 만족 했다는 표정의 성민이 계산을 하자며 계산대로 향했다. 재료 값은 더치페이야- 라고 못

박는 바람에 그냥 내가 다 내줄게. 라고 말 한 규현이 뒷 주머니 에서 지갑을 뒤진다.

그런 규현을 보며 정말? 하며 호들갑을 떨던 성민이 얼마냐고 물어 보는데 지금쯤 이면 벌써 꺼냈어야

할 지갑이 나타나질 않았다.

 


" 2만 3천 백원 이래. 돈 안내 ? "

" 어? 응, 잠깐만. "

 

지갑은 늘쌍 뒷 주머니에 넣어 두고 다녔다. 당황한 규현이 오른쪽 왼쪽 다시 한번 뒤져도 엉덩이는

달랑 두짝일 뿐. 그러니 뒷 주머니도 두어번 뒤져서 안나오면 애초부터 거기에 지갑따윈 존재 하지

않는 거다.

 

 

 

 

 

 

 

 

 

 

 

 


규현은 지금 이 쪽팔리고 어이없는 상황을 어떻게 극복 해야 할지가 문제 였다.

머뭇거리는 규현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던 성민이 자신의 교복 마이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문구상품권 몇장과 현금 얼마를 보태 값을 치룬다.

 


계산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오늘따라 바람은 왜이리 시리기만 한 건지 잔뜩 어색해진 규현은 그저

성민이 들고 있던 비닐봉투를 말없이 뺏어 들었다.

 

 

" 왜에~ 다 낸다고 하시더니. 돈 다 어디갔게 ? "

" ...지갑을 .. 두고 온 것 뿐이야. "

 

머쓱해진 규현이 화 라도 내고 싶은 심정 이었지만 어디다가 승질을 낼까 싶어 그냥 잠자코 있자 그 꼴을

못 봐주겠다는 듯 계속 베베 꼬며 놀려 먹기 정신 없다. 이 녀석이 이런 성격 이었나 ?

머쓱의 절정을 달리고 있던 규현이 불현듯 시끄러울 정도로 말이 많아진 성민을 멍 하니 바라봤다.

그런 규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한참을 깔깔 웃어대던 성민이 갑작스럽게 웃음을 그친다.

 


" 뭘보니, 뚫어지겠다. "

 

 

규현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호모, 게이 라는 소문이 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녀석은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막상 둘 만 있으니 재잘재잘 쉴새없이 지저귀는게 꼭 딱따구리 같기도 하고

종달새 같기도 하고. 누가 그래, 이 녀석 얌전하고 조용한 놈 이라고.

 

규현 자신도 말이 워낙에 없는 편이라 둘 중 하나라도 무언가 말을 해야 살 수 있을것 같았기에 성민의

재잘거림은 곧 배경음악처럼 듣기 좋게 깔렸다.

 

말 수 적은 규현은 줄곧 성민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닥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버스에 올라타

성민의 집으로 향하면서도 자기가 키우는 애완견 이야기나, 학교에 오면서 봤던 고양이 시체 이야기

라던지, 어렸을때 아빠가 커다란 잉어를 잡아서 손에 쥐어줬는데 그 느낌이 징그러웠다던지.

 

대체적으로 쓰잘데기 없어서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될 법한 이야기여서 규현은 그래 응.

하며 단순한 맞장구만 칠 뿐 이었다.

 


성민의 의미없는 지저귐이 그쳤다. 내릴 곳에 도착 했나 보다. 익숙하게 벨을 누르는 손놀림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거칠게 멈추는 버스 안에서 조심조심 내리는 성민의 등판을 바라본다.

 

참 작다.

 

 

성민의 집은 평범한 아파트 였다. 규현 자신도 등교길에 버스 안에서 스쳐 지나가며 보던 아파트다.

17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비밀 번호를 누르면서 다른쪽 손으로 열심히 가린다.

안 봐, 관심 없어. 얼굴에 대문짝 만하게 적어 두기라도 했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는 규현을 자꾸만

힐끔대던 성민이 경쾌한 알림음 과 함께 문을 활짝 열어 제낀다.

 

 

" 성민이네 집에 자알~ 오셨습니당! "


풋, 하고 웃음이 나오려는걸 가까스로 참은 규현이 네, 반갑습니다 하며 맞장구를 쳐 준다.

규현의 맞장구에 괜히 신이 난 성민이 과일 깎아줄게, 손 씻구 와- 라며 부엌으로 쪼르르 사라진다.

 


넓은 거실이 괜시리 휑 하니 느껴진 규현이 리모컨을 만지작 대다 TV를 켠다. 아직 뭐 할 만한 시간도

아니고, 연속극 같은건 재미도 없고. 그냥 어색하니까 켜 놓은거다.

 

얼마 후 아기자기 하게도 사과를 깎아 담은 성민이 총총 걸음으로 가져다 준다. 성민이 건내는 사과를

입에 받아 물으며 잘깎네 하며 작은 소리로 말한다. 규현의 작은 한 마디를 놓치지 않은 성민이 울엄마

보다 과일 더 잘깎아서 과일 깎는건 꼭 자기한테 시킨다며 헤실헤실 댄다.

 

 

" 규현이 넌 근데 왜 말 안해 ? "

 

한참 사과를 먹고 있는데 이게 값이 좀 나가는건지 꽤나 맛있었다. 정신없이 먹던 규현에게 다짜고짜

왜 말 안하냐며 묻는 성민 이었다.

 

" .. 나? "

" 응. 아까부터 계속 내 이야기만 했어. 니 이야기도 해 봐, 듣고 싶어. "

" .. 무슨.. 말을 . "

" 그냥, 너 좋아하는거라던지 ..취미나, 이런거 .. 많잖아 할 이야기는. "

 


순간 당황한 규현은 포크 끝만 멍청하니 바라보다 어렵사리 입을 뗀다.

 


" 내가 .. 말 수가 적어서.. 미안, 말을 재밌게 할 줄 몰라. "

" 잉? 꼭 말을 재밌게 해야 하나 ? "


그러더니 규현의 손에 들은 포크를 후다닥 뺏어 든다. 포크만 들고 멍청하게 앉아 있지 말고 무슨 말

이던 해 보라는 거다. 사실 규현이 성민의 집에 온 것은 졸업 발표회 과제물 제작 때문 이었는데.

왜 여기 앉아서 억지로 그닥 하고 싶은 맘도 없는 말 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걸까.

 


" 어서, 얼르으으응~ "

 

 

이젠 콧소리까지 달고 앵앵거리는 성민을 보다 못한 규현이 얼른 성민의 입을 가리며 알았으니까 그만

하란다. 잠시 생각하던 규현이 전부터 궁금한게 있었는데 .. 라며 운을 띄우자 반짝이는 눈동자로 규현을

바라보던 성민이 응응 뭔데, 하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 너, 너.. 그.. 호모 라던가 게이 라던가 .. 그런거 라고 그러던데, 아 그러니까 내가 널 그렇게 생각 한다

 는 건 절대 아니고, 그냥 니가 그런 소문이 있어서.. 기분 나빴다면 사과 할게, 그치만 난 기분 나쁘라고

 물어본게 아니라, 그러니까 뭐 내가 나쁜 뜻으로 뭐 그러는건 아니고 .. "

 

호모- 라는 단어에 팍 굳어버린 성민의 얼굴을 보자 마자 당황한 규현이 횡설수설 저도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렇게나 버벅이자 피식 웃음 짓던 성민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

한다.

 

 


" 맞아. 나 그런거. "

 

 

세상에 그렇게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다니. 놀란 규현은 그저 눈 만 똥그랗게 뜬 채 뭐어? 라며 또 다시

버벅이기 시작했다.

 

 

" 애들 말이 진짜 라구. 그리고 그런 소문 나는거 애초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애들이 괴롭혀도 아무말

  못했던 거고. 왜, 더럽게 생각하잖아. 남자끼리 좋아하고 그런거 .. "

" 아, 아냐! 더러운게 아니라 .. 그냥 좀 그렇잖아, 원래가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고 .. "

" 괜찮아, 굳이 변명 안하려고 해도 되고, 좋은 쪽으로 포장 하지 않아도 너보단 내가 더 잘 알아. 그리고

  난 알면서도 호모 또는 게이 이고. 중학교때 같은학교 3학년 선배랑 사귄 적 도 있어. 물론 그 선배는

  노멀 이었지만. "

 


중학교때 ? 그럼 대체 이 녀석은 언제부터 호모 였다는 거야 .. 놀랄 노 자에 입이 다물어 지지 않던 규현

이 애써 정신 차린 척 그래 그래 하며 수습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니기미. 괜히 물어 봤다.

 

 

" 그게 .. 그렇게 궁금 했어 ? "

 


규현의 허벅지 위에 검지와 중지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 두드리듯 장난 치는 성민 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당황의 한계를 넘어서 난감의 절정에 올라선 규현이 그저 뒷목이 뻐근해 짐을 느끼며 땀만 비질

댔다. 대충 아, 응 하며 대답한 규현의 시선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선 오동통한 성민의 손가락 에

고정 되어 있었다.

 

 

 

" 놀래기는, 푸하하 너 되게 귀엽다. "


당황하는 규현의 표정을 다 봤다는 듯 허벅지 위에 올라서 있던 손가락을 치워낸 성민이 유쾌하게 깔깔

웃어 대기 시작했다. 빈 접시를 들고 싱크대로 향하던 성민이 등 너머로 규현에게 말한다.

 


" 너, 그 선배랑 많이 닮았어. "

 

청천 벽력 이라도 떨어진듯 놀란 규현이 제 멋대로 돌아가는 머리를 붙잡고 충격의 한방을 견뎌 낸다.

씨바 .. 왜이러지. 침착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애써 진정 시키려 노력하지만 놀란건 놀란거다.

저 새끼 무섭다. 이제 슬슬 성민이 두려워 지기 시작했다. 난 노멀이다. 난 여자가 좋다. 난 여자를 사랑

한다. 저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리며 염불을 왼다. 이 주문으로 자신이 무사해 지길 바라며.

 

 

떨리는 몸을 주체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어떻게든 빠져 나가야 할 텐데. 비록 성민이 자신을 감금 해

두거나 강제로 무엇인가를 행 한 것은 아닌데도 마음속 깊은 곳 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불안감이 지금의

자신을 마음껏 흐트러 놓고 있다. 이 것 또한 매우 불쾌한 일 이다.

 


" 너도 내가 게이라서 더럽다고 생각되면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도 돼. 난 너 억지로 붙잡은 적 없으니까

  그렇게 눈에 띄게 불안해 하지 말고 그냥 나가. 너 그러는거 보는거 나도 그닥 안 좋다. "

 

 

줄곧 쾌활하고 애교섞인 목소리로 주구장창 지저귀던 성민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규현에게 마치 명령

이라도 하는 듯 말을 내뱉는다. 당황한 규현은 자신이 큰 실례가 되었음을 깨닫고 몸을 일으 킨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 가기 위해 일어 난 것은 아니었다.

 


" 아, 미안. 난 그저 .. "

" 왜, 내가 그 선배랑 너랑 닮았다고 하니까 너한테 어떻게 할 줄 알고 겁 먹었니 ? "

 

상대적으로 규현보다 키가 작은 성민이 규현을 올려다 보며 죽일듯 노려보자 당황한 규현은 그저 .. 뒤로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그저 답답 할 뿐 이었다.

 


" 착각 하지마. 넌 그저 닮은 거지, 그 선배가 아니니까 걱정 하지도 말고. 내가 그렇게 쉬워 보였어 ? "

" 아니, 난 .. 난 정말 그런게 아니라 ... ! "

"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아무 남자나 마구 좋아 할 것 같아 ? 니가 여자 좋아하는거랑 같아. 넌

  여자가 좋다고 해서 길거리 아무 여자나 그저 치마만 두르면 다 좋아하니? 나도 똑같아. 남자라고 다

  좋아 하는게 아니라구.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난 너한테 눈꼽만큼도 관심 없으니까 걱정 마. "

 


줄곧 당황하던 규현은 야무진 성민의 한마디에 꽁꽁 얼어 붙었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 솟는것을 느꼈다. 규현은 아무 남자가 아니었으므로 성민의 아무 남자나 마구, 라는 말에 자극 받은

것 이었다.

 

 

" 그래서 넌 내가 아무 남자니 ? "

" 그럼 니가 아무 남자가 아니면 뭐니 ? 너 도끼병이야 ? 내가 널 좋아하게 될거라 착각 했어? "

 

솔직히 성민의 말이 맞는 말 이다.

하지만 뭔지 모를 서운함에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던 규현은 고개를 떨구고 다시 소파에 주저 앉았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허무했다. 무언가를 바랬던 것 만 같은 기분에 그 허탈함에 그저 웃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었던 규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 났다.

 

" .. 가볼게. "

" ... 응. "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성민이 규현을 현관 앞 까지 배웅 해 준다. 버스 정류장 까지 같이 가 줄까

하던걸 남사스럽게 뭐 그러냐며 만류한 규현이 현관문 손잡이를 잡으며 뒤 돌아 본다.

 

그냥 아련했다. 저 아이가 측은했다.

 

" 근데 말야. "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규현이 멈칫 하면서 입을 연다.

규현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딴 생각에 잠겨 있던 성민이 응 ? 하며 되 묻는다. 입술에 침을 한번 스윽

바른 규현이 다시 말을 잇는다.

 

" 난 아무 남자가 아니니까 .. "

 


순간 성민은 뒤통수를 무언가로 세게 얻어 맞은 느낌이 들었다.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세게.

 

 

 

 

 

 

 

 

 

 

 

 


규현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생각했다. 지금 내가 뭐라고 씨부린거지 ? 주머니에 들은 핸드폰을 달각

달각 굴릴 뿐 이었다. 놀란 토끼눈의 성민을 보자니 속이 뒤틀렸다. 씨바 .. 좆됐다.

 

" 그, 그러니까... "

" 조규현 . "

 

조규현. 하고 부르는 성민의 목소리에 적잖게 압도당한 규현이 엉, 하며 옅게 대답 한다.

아무 남자가 아니면 뭔데 ? 의연함을 되찾은 성민이 흥미롭다는 듯 묻자 머리털이 쭈뼛 �는 듯 한 느낌

에 몸을 움찔 했다.

 

 

" 어설프게 꼬시지 마. "

 

 


순간 규현은 어이가 없었다. 제 까짓게 뭐라고 ! 내가 누굴 꼬셔. 속으로 울화가 치미는 것을 간신히 참아

낸 규현이 난 노멀이라 남자한텐 관심 없으니 그런 쪽으로 헛다리 짚으려면 애초에 발 빼셔. 라는 긴

문장을 정리하고 있을 쯔음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가 조규현. 하고 규현을 밀어 내는 성민 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규현은 자꾸 생각 했다. 여유롭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성민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구겨지는 마음을 애써 폈다. 우이씨 짜증나. 길바닥에 돌맹이를 걷어 찼다.

땡- 길가의 우체통에 맞고 힘없이 튕겨지는 돌맹이가 다시 규현의 발 앞으로 돌아왔다.

 

허무했다. 에이 씨발. 말도 안되게 흘러 나오는 욕을 주섬주섬 주워 담았다. 괜히 짜증이 난 규현이 멍청

하니 서 있었다. 뭐야 이 되먹지 않은 박탈감 따위 라니 ..

 

 

 

 

규현이 나가고 난 뒤 성민은 줄곧 거실 소파에 앉아 손톱만 잘근잘근 물어 뜯었다. 간단히 튕기려고 한

것이 오히려 규현의 성질을 돋구었던 모양인지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사라지는 규현을 보고 아뿔싸 싶었

지만 이미 사단이 나 버린 뒤 였다. 에라이 세상 말세다. 어울리지 않는 한탄을 내뱉은 성민이 시계를

바라 봤다. 아직 부모님이 돌아 오시려면 멀었다. 튕기지 말걸. 후회해도 떠난 버스는 후진 하지 않는

법 이다.

 

 

그래서 성민은 떠난 버스를 잡기 위해 다음 정거장 까지 미친듯이 내 달렸다.

 

 

 

 

 


" 여보세요. "

 

뜬금없이 울리는 진동에 버스에서 졸던 규현이 퍼뜩 일어나 슬라이드를 올린다. 무의미한 여보세요.

라는 말이 흘렀지만 상대편에선 통 대답이 없다. 누군가 싶어 다시 액정을 확인 해 보니 건조한 세 글자

가 난감하게 떠 있다. 이성민. 아이씨.. 쪽 팔리게.

 

 

" .. 무슨 일이야. 나 뭐 놓고 간 거라도 있니 ? "

 

규현의 말에 응. 하고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 성민이 두고 간 물건이 있으니 어서 돌아 오라며 재촉한다.

아무리 생각 해도 두고 온 것이 없었던 규현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과 가방 속 물건들을 챙긴다.

....혹시 이새끼가 내 지갑 뽀린거야 ?

 

 


분명 자신이 잃어 버린 것 은 지갑 밖에 없었기 때문에 터무니 없는 추측 이지만 여튼 성민의 집으로

회군했다. 좀 전 까진 쪽팔려서 전화 받으면서도 내내 머릿속에 쪽팔려 메들리만 연주 했던 규현이

당당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몇 번 울리지 않았음에도 벌컥 열리는 문 너머로 어두운 표정의 성민이

무덤덤하게 들어와. 라고 짧게 말한다.

 

내가 뭘 놓고 갔어 ? 하고 물어오는 규현의 팔을 거칠게 잡아 이끄는 바람에 신발 벗다 스텝이엉킨

규현이 넘어 질 뻔 한걸 간신히 균형을 잡아 일으 켰는데 넘어 질 뻔 한 것 보다 더 난감한 상황이 벌어

지고 말았다.

 

 

 

 


" 야, 너 씨발!! 머 하는 짓이야 !! "

 

놀란 규현이 성민을 뿌리치자 가벼운 성민이 순식간에 저 쪽으로 넘어진다. 자신도 모르게 힘 조절이

안 되어 너무 세게 밀어 버린 것이 아닌가 내심 미안했던 규현이 이성민 .. 하고 부르자 도끼눈을 뜨고

규현을 노려보던 성민이 소리친다.

 


" 실컷 사람 꼬셔놓고 막상 원하는 페이스로 흘러가 주니까 왜 이제와서 내숭이야?! "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놓고간 내 지갑이나 돌려줘. 하며 속으로 생각하던 규현은 그저 머리 위로

무수한 보노보노 땀방울만 방출 시킬 뿐 이었다. 정말 내가 뭘 어쨌길래 !

 

 

성민의 입술이 거칠게 닿았던 자신의 아랫입술을 훑었다. 어찌나 거세게 박았던지 아직도 후끈후끈한

온기를 느끼며 바닥에 널부러진 성민을 일으켜 주려 하지만 자신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치는 성민의

성난 얼굴을 보며 규현은 그저 한숨을 내 쉴 뿐 이었다. 내가 원한건 이런게 아냐..

 

 


" 이성민. "

" 쪽팔리니까 부르지마. 이따구로 까인적 처음이야.. "

 

 

 

 

성민의 귀여운 투정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규현이 웃자 놀리는 거야 ? 하며 버럭 화를 내는 성민이

규현을 노려보자 그런거 아니라며 변명 하기에 바쁘다.

 


사실 규현은 성민에게 어떤 연애감정을 느낀 것 은 아니다. 그냥 생각없이 튀어나온 말 한마디가 성민을

흔들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규현이 어떤 책임 의식을 가지고 성민을 어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규현 자신이 잘 했다는 건 더더욱 아니지만 어찌됐든 일이 이 지경까지 퍼졌으니 무어라

해명이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규현의 머릿속엔 그 어떤 변명도 떠오르지 않았고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기엔 뭔가 묘하고 그렇다고 성민에게 이상한 마음을 품은것은 절대 아니다.

급속도로 친밀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냥 기분이 좋았다. 작은 아이의 뒷모습은 귀여운 것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 우이씨.. 내가 .. 꼬리친게 되잖아. "

 

 

 

아주 약간은 촉촉한 목소리의 성민이 코를 킁킁 훔치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다. 줄곧 일어 서서 성민의

작은 등을 바라 보던 규현이 그런 성민의 투정에 말 없이 웃어보인다.


난 너의 그 모든 것을 다 통달 한 듯한 미소가 싫어. 라며 핀잔을 주던 성민이 규현을 등진채로 서서

말한다.

 

 

 

" 요새 내가 욕정에 넘쳐서 실수 했나부다. 미안. "

 

 

 

미안 할 것 까진 없고 .. 뒷목을 긁적이던 규현이 거실 탁자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것들을 바라 본다.

어느정도 완성된 도안과 샘플들,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색연필과 마카, 색지들이다.

 

 

 

" 꽤 많이 진행 됐네. "

" 응. "

 

 

 

규현이 돌아간 뒤에 괜히 허전한 마음을 참지 못한 성민이 그동안 해 두었던 것 들을 꺼내서 다시 작업

을 시작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규현에게 다시 연락 한 것인데 일이 이렇게

틀어져 버렸다. 거기까지 생각한 규현이 그저 웃으며 성민의 어깨에 자신의 양 손을 올린다.

 


규현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고개를 돌린 성민이 약간 눈을 높여 규현을 바라 본다.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남성 에게서 느끼는 카리스마와 애정은 거대했다. 순식간에 연애 감정 속에서 춤을 추며 날아

다니던 성민이 금방 자신의 헤픈 감정을 깨닫고는 고개를 돌려 버린다.


이렇게 올려다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규현을 피해 소파로 쪼르르 도망치는 성민을 잠자코 바라 보던 규현이 그런 성민을 따라 탁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이것저것들 사이에서 도안을 꺼낸 규현이 제작시안을 보며 성민

에게 묻는다.

 

 

" 근데 궁금한게 있어. 이거, 로망 카보챠 .. 가 무슨 뜻이야 ? 일본어로 써 있는것도 있고. "

" .. 낭만단호박. "

" 엥? "

 

 


순간 대 폭소를 터뜨릴 뻔 했지만 그 진지한 모습에 애써 웃음을 참느라 숨이 넘어 갈 뻔 했다.

세상에, 낭만 고양이의 아류작 인가 ? 낭만 단호박이래. 이걸 어쩌면 좋아.

 

 

" 단호박 도넛츠니까.. 단호박 도넛츠는 달잖아. 달콤한건 낭만적인 사랑이야 .. 그러니까 낭만단호박. "

 

제법 조리있게 설명까지 붙이니 그 우스꽝 스러운 이름도 어쩐지 괜찮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음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인 규현이 정신없이 스케치를 하는 성민의 맞은 편에 앉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성민의 손끝으로 시선을 고정 시킨다. 작고 통통한 손가락에 쥐어져 있는 마카펜이 쉴새 없이 무언가를

그려낸다. 신기했다. 규현 자신은 한 번도 관심 갖지못했던 일 이다.

 

 

 

" 아까 그거 .. 다시 하자. "

 


마카를 쥐고 열심히 내달리던 성민의 손이 우뚝 멈춰 선다.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던 스케치는 완성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올린 성민의 놀란 표정도 그닥 나쁘지 않다고 생각 했다.

 

" 너.. 제정신 이야 ? "


정말 걱정 된다는 듯 한 눈빛의 성민이 규현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다. 뭐야, 하고 피식 웃은 규현이

말짱하니까 하던거 계속 하자. 하며 성민의 팔목을 잡는다. 막상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괜히 주눅이

들어서는 당황한 성민이 뒷목을 벅벅 긁는다.

 


" 야, 그거 어떻게 하는거냐, 난 기집애들 이랑도 한 번 안해봐서 .. "

" 그딴걸 왜물어보고 난리야 가오 안살게 .. "

" 키스 하는데 가오도 필요해 ? 겁나 어렵네. "

" 세상에 쉬운게 어딨냐. "

 

 

 

그래, 세상에 쉬운건 없지.

서로 눈치만 보던 도중 규현이 성민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이렇게 하는거냐 ? 성민의 살포시 내려 앉은

속눈썹을 바라보던 규현이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딱히 성민을 좋아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해야겠다고 생각 했다. 하던 일이기도 하고 ..

언제부턴가 자신이 이렇게 책임감 있는 사람 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지금은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다. 굳이 왜 하고 싶었는지 이유까지 찾으라면 귀찮아서 안 할 거다.


성민도 크게 거부 하지 않고 자신 역시 하고싶었다. 괜찮다. 둘 밖에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도 하고 싶으면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성민에게 아무 감정 없이 이러는 것

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무슨 감정이던지 성민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라고.

 


그냥 순순히 받아 들이기로했다. 아직 어리니까 하고싶은건 하고 해야 하는것도 하고. 그러기로 했다.

젊음은 인간의 인생사 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무기 이다. 어느것도 이에 대적 할 수 없었다.

 

로맨스와 단호박. 단 것은 로망을 뜻한다.

사랑은 달다. 성민의 입술이 달다고 생각했다. 도넛츠 이름을 달콤한 입술로 바꾸면 너무 야하려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