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민중편팬픽

오직성민SJ 2008. 8. 11. 23:00

소설보다가 정말 많이 울었던 팬픽중하나..너무 슬프고 재밌어요..

 

 

 

 

소년에서 남자로. 선선한 가을바람처럼 마른 낙엽 냄새 물씬 풍기며 돌아온 조규현(Jo Kyu Hyun). 이 가을 쓸쓸한 여심(女心)을 촉촉이 적셔줄 그와의 특별한 데이트. 나른한 오후 티타임의 홍차처럼 따뜻하고 향기로운 이 남자의 모든 것이 알고 싶다. (취재-이나영 기자, 사진-김준수 기자)

 


몇 달 사이에 더 성숙해지신 것 같아요. 남자다워졌다고  해야 하나? 분위기도 1집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 같군요.
- 아무래도 타이틀곡에 맞춰 컨셉을 짜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이제 스물넷인걸요(웃음)


그러고 보니 규현씨 처음 데뷔 했을 때 열아홉 이었죠? 벌써 5년차 가수네요.
- 네. 고등학생 때 공개 오디션을 통해 그룹 prince 뒤늦게 합류하면서 데뷔하게 되었어요. prince 정규2집 컴백 무대가 제 첫 무대였죠.


다른 멤버들 근황은 어때요?
- 다들 각자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 하고 있어요. 강인이형은 라디오 DJ로 활약 하고 있고, 동해형이랑 은혁이형 같은 경우는 공동으로 댄스 스쿨을 운영하고 있구요. 성민이형은 배우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에요.


그럼 서로 만날 시간이 없겠네요.
-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저도 음반 작업으로 한 동안 바빴으니까요. 그래도 한 번씩 멤버들끼리 뭉칠 때가 있어요.


규현씨가 막내니까 형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겠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 막내 같지 않은 막내라고 맨날 구박하는걸요(웃음) 농담이구요 정말 다들 친동생처럼 잘 챙겨주세요. 특히 강인이형…보기에는 되게 무뚝뚝하고 그럴 것 같은데 은근히 정이 많으세요. 그래서 방송국에서 만나면 이것저것 조언도 많이 해주고 격려도 해주고 그래요.


이제 앨범 얘기를 좀 해볼까요? 타이틀 곡 어떤 곡인가요?
- 요즘 같은 계절에 딱 어울리는 감미로운 발라드 곡이에요. 1집 때와 마찬가지로 작곡가 김종운씨가 앨범 전체 프로듀싱을 맡아주셨는데요, 이 곡에서는 특별히 피쳐링까지 해주셨어요.


규현씨가 직접 작사에 참여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 부끄럽지만 사실이에요. 정말 얼떨결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끄적인 걸 종운이형이 보고 마음에 든다고 그대로 가사로 채택해버렸죠.


제목이 '한 사람만을'인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랫동안 숨겨왔던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이에요.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뭐 대충 그런 뜻이에요.


조금 짓궂은 질문이 될 수도 있는데, 혹시 본인의 경험담인가요? 규현씨는 인터뷰에서 단 한 번도 첫사랑 얘기를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거든요.
- (난처하다는 듯이 웃음) 첫사랑 얘기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 한 거예요. 아직 진행 중이거든요.


지금 그 말씀 상당히 큰 파장이 예상되는 데요? 저희는 편집 없이 가는 거 아시죠?
- 아하하하, 괜찮아요. 상대방은 전혀 모르고 있는 걸요.


짝사랑이라는 건가요? 이거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요. 규현씨 같은 분을 애태우는 행운의 여성분 말이에요. 고백하실 계획은 없으세요?
-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둔 건 있어요. 콘서트장 같은 곳에서 공개적으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그 분을 위한 노래를 부른다든가…


정말 많은 여성분들이 꿈꾸는 이벤트네요. 만약 하게 된다면 그 때 저도 꼭 초대해주기에요?
- 이 기자님이 어떻게 기사를 쓰실지 두렵긴 하지만(웃음) 여기 사진 기자님과 같이 초대할게요.

 


“어라, 규현이네? 이거 뮤직로드 아냐? 여기 웬만한 가수는 거들떠도 안 보잖아.”
“사진도 무슨 화보집 같다. 역시 푸쉬가 대단한데? 정수형 수완 좋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성민의 읽고 있는 잡지를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며 동해와 은혁이 한 마디씩 했다. 스케줄 전에 머리 손질을 위해 들린 미용실에 왜 이 녀석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머리를 하러 온 게 아님은 분명했다. 이른 시간이라 미용실 안은 꽤 한산함에도 불구하고 악동 같은 두 사람이 파닥거리며 돌아다니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신인 때부터 드나들던 곳이라서 그런지 누구 하나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하긴 예전부터 누나들의 귀염을 독차지 하던 녀석들이니까. 성민은 무심하게 규현의 인터뷰 기사를 넘기며 대꾸했다.

 

“규현이가 잘 하니까 그런 거지 꼭 매니저 수완이 좋다고 인터뷰가 성사되는 건 아니잖아.”
“오올, 성민이형 지금 규현이 편드는 거야? 역시 규민은 아직 죽지 않았어!”

 

‘은해도 아직 죽지 않았어! 은해 크로스!’ 지네들끼리 낄낄거리며 커플 놀이에 빠진 두 사람의 모습이 이제는 다들 너무나 익숙한 듯 별 다른 반응 없이 각자 할 일에 열중했다. 스물다섯이나 되는 녀석들이 잘하는 짓이다. 성민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쯧 찼다. 규민이니 은해니 하는 것은 prince 시절 팬들이 붙여준 커플이름이었다. 아이돌 그룹이면 으레 관례처럼 겪어야 하는 일을 멤버들은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늘상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며 장난을 일삼는 동해와 은혁이 팀 내에서 공식 커플로 통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바늘 가는데 실가는 격으로 함께 다니고 있으니 이제는 두 사람 중 하나가 없으면 보는 사람이 어색할 정도라고나 할까. 그에 비해 성민은 1집 때까지 고정적으로 엮이는 멤버가 없었다. 유례없이 팬들이 팀의 리더인 강인과 당시 prince의 매니저였던 정수를 엮어주는 바람에 성민 혼자 남게 되었던 것이다. 돌이켜봐도 강인과 정수는 조금 유별났던 것 같다. 매니저가 가수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가수가 매니저를 챙기는 격이었으니. 어쨌든 2집을 기점으로 규현이 새로운 멤버로 영입됨과 동시에 성민과 붙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성민은 가을빛 니트를 입고 연한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는 사진 속의 규현과 눈을 맞추었다. 서로가 바쁘다 보니 이런 식으로 밖에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얼마 전에 통화하면서 ‘요즘 형 얼굴 너무 비싼 거 알지? 내가 형을 브라운관에서나 볼 수 있다니.’ 하고 투덜거리던 녀석이 떠올랐다. 이제 스물넷이네 어쩌네 하지만 성민에게는 여전히 열아홉 막둥이 조규현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이렇게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역시 팀으로 함께 활동할 때와는 심리적 거리감부터가 달라지는 걸까. 성민은 천천히 손가락으로 규현의 실루엣을 따라 그렸다. 전문 포토그래퍼가 찍는 다더니 확실히 퀄리티가 남다르다. 모델이 워낙 출중한 탓도 있겠지만. 머리…많이 길었네. 손끝에 느껴지는 것은 그리운 온기가 아니라 맨들맨들한 종이의 감촉뿐.

 

“그나저나 이 녀석 섭섭하게 강인이형 얘기만 하고…”

 

나도 열심히 안부 문자 보내고 전화 통화도 자주 하고 그러는데. 인터뷰에 자기 이름이 쏙 빠진 게 불만인지 성민은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그렇지만 더욱 서운한 건 자기도 모르는 규현의 첫사랑 이야기가 잡지 인터뷰에 실린 사실이다. 비밀이 없는 막역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규현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규현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이 대체 누굴까. 성민은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한 사람씩 떠올려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튼 조규현 여우야, 여우. 형 몰래 좋아하는 사람도 만들고. 다음에 만나면 알려달라고 졸라야지. 성민이 필살의 애교 콤보 3단을 쓰면 못이긴 척 살짝 귀띔 해줄 것이다. 규현은 예전부터 유달리 성민에게 약했으니까. 언젠가 라디오 프로에서 그런 말 한 적이 있다. 강인이형은 정말 큰 형 같고, 동해형이랑 은혁이형은 동갑내기 친구 같고, 성민이형은 막 챙겨줘야 할 동생 같다고. 그 당시에는 막내가 기어오르려 한다면서 동해, 은혁과 함께 난리를 쳤지만-형으로 인정받은 강인은 규현의 편을 들었다-그렇게 기분 나쁘지만은 않은 것도 같다. 어쩔 때는 은근히 챙겨주려고 애쓰는 규현이 귀여워 보이기도 하니까.

 

“형, 아침 사왔어. 어? 너네들이 왜 여기 있는 거야?”

 

막 미용실로 들어선 시원이 동해와 은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진정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은 시원에게 달려들었다. ‘자기~ 우리가 자기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으아, 저리가! 훠이!’ ‘아잉, 이러면 섭하지. 약속했잖아. 다음번에 꼭 하겠다고.’ 동해와 은혁에게 한쪽씩 팔을 붙잡힌 시원이 성민에게 간절하게 구원을 원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성민은 잡지책으로 얼굴을 슬쩍 가렸다. 미안하다, 시원아. 걔네들은 나도 어쩔 수 없거든. 그러니까 내기 같은 거 하지 말래도. 현재 성민의 매니저인 시원은 동해, 은혁과 고등학교 시절부터 죽고 못 사는 친구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악당 같은 두 친구에게 매번 당하는 하느님의 착하고 어린양이라고나 할까. 매니저로 썩히기에는 아까운 외모 덕에 몇 번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카메라 공포증과 무대 공포증이 있어서 절대 앞에 나서는 일은 못한다고 거절했다며 선하게 웃던 모양새를 성민은 선명하게 기억했다.

 

“자, 빨리 하고 끝내자구.”
“아, 나 진짜 못해. 그냥 딴 거 하면 안 돼?”
“안 돼. 사나이가 한 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 하라니까?”
갑자기 세 사람이 성민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자꾸 도망가려는 시원을 두 사람이 단단히 결박한 채다. 뭐야, 이번에는 나하고 관련 있는 거야? 별 시답잖은 내기를 하면서 매번 강도가 세어지는 벌칙을 옆에서 지켜봐온 터라 성민은 왠지 불안해졌다.
“너네 이번에는 또 무슨 음모를 꾸민 거야?”
“음모라니. 이건 정당한 벌칙 수행이야.”
“그럼그럼. 형 그냥 재미로 하는 거니까 기분 나쁘게는 받아들이지 마.”

 

동해가 어서 하라는 듯 옆구리를 쿡 찌르자 시원은 머뭇머뭇 거리다가 결국 눈물을 머금고 성민 앞으로 다가왔다. 이게 지금 무슨 시츄에이션이냐고 묻기도 전에 뭔가 간지러운 감촉이 성민의 볼에 촉하고 와 닿았다가 떨어졌다. 상황 파악이 안 돼 어안이 벙벙한 성민에게 시원은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으아아~ 형 정말정말 죄송해요!!”

 

뭐라고 하기도 전에 구석으로 도망 가버리는 시원을 보고 동해와 은혁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이제야 대충 전후 상황을 짐작한 성민은 한숨을 푹 쉬며 따뜻한 기운이 묻은 볼을 손등으로 쓱 문질렀다. 성민에 대한 충성심이 넘쳐나는 시원을 골탕 먹이기 위해 두 콤비가 벌인 일이 분명했다. 시원이 걱정하는 것만큼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아무 느낌 없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면 문제일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도…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성민은 흠칫하고 말았다. 나는 지금 누구이길 바란 것일까?

 

“와, 여기 다 모여 있었네?”

 

누군가가 들어서면서 미용실 공기가 갑자기 화사해졌다. ‘혀엉~!’ 동해와 은혁은 전 매니저에게 강아지처럼 달려가 안겼다. ‘정수 엄마’라는 별명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걸 겪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잘 웃고 사근사근하고 다정한 그를 매니저로 만난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래서 그가 솔로로 데뷔하는 규현을 맡게 되었다고 했을 때 성민은 안심했다. 동생들처럼 격하게 반기지는 못하고 그저 조용히 보고만 있던 성민은 정수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이와 눈이 마주쳤다. 진짜 조규현이다. 무기질로 된 사진이 아니라.

 

“오랜만.”

 

달콤하면서도 울림이 깊어진 목소리다. 성민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잡지에서와 같이 브라운 계열의 니트에 그레이진을 피트해서 입은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캡 모자 아래 자리하고 있는 두 눈이 예전과 같이 아이처럼 검게 빛나고 있지 않았다면 성민은 그를 너무나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깊어가는 계절처럼 조규현도 어느새 어른으로 자라나 있었다.

 

“어, 안녕.”

 

제가 듣기에도 어색한 티가 역력한 목소리에 성민은 예쁜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언제부터인가 규현을 직접 마주 할 때마다 알게 모르게 손끝에 힘이 갔다. 따지고 보면 멤버들 중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가장 많이 공유한 건 규현인데도 불구하고-그도 그럴 것이 쉬는 날이면 동해와 은혁은 냉큼 둘이 먼저 나가버리기 일쑤고, 강인도 슬그머니 사라지고 나면 숙소에 남는 건 언제나 규현과 성민 둘 뿐이었으니-성민은 은근히 규현 앞에서 긴장하는 자신을 느꼈다. ‘발전적인 해체’라는 명목아래 그룹이 와해되고 나서 한 번도 다른 멤버들과 만나는 걸 거북하게 생각하지 않은 성민이었다. 동해와 은혁은 여전히 곁에서 투닥거리고 있고, 라디오를 틀면 변함없이 개구진 소년 같은 강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다가, 정수 또한 가까이 있으니 그룹 활동 시절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런데 유독 규현에게만 적응이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성민으로서는 도통 알 길이 없었다. 통화를 할 때나 문자를 주고받을 때는 크게 느끼지 못하는 벽이 어느 새 훌쩍 자라버린 규현의 주위에 얇게 처진 기분이다.

 

“이거 나 나온 거네.”
“어? 어, 어...”

 

멍하게 있는 사이 불쑥 거리가 가까워진 바람에 당황한 성민은 대답을 더듬거렸다. 옅은 숨소리가 성민의 귀밑머리를 간지럽힌다. 뒤에서 무심하게 자신의 무릎 위에 펼쳐진 잡지를 내려다보는 규현 시선에 성민은 괜히 사진을 몰래 훔쳐보다가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성민과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치자 규현이 짓궂게 씩 웃는다.

 

“반했어?”
“어?”
“나 너무 잘 나와서 반했냐구.”

 

이건 또 무슨 예상치 못한 질문인가- 하고 성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 손질을 위해 앞머리에 집게 핀을 꽂은 채 놀란 얼굴로 자기를 바라보는 성민의 모습이 우스운지 규현은 낮게 키득거렸다. 여전히 성민 쪽으로 허리를 굽히고 있는 그에게서는 세련된 향수 냄새가 났다. 예전에는 선물 받은 향수도 잘 안 쓰더니…쿨하면서도 달달한 베르사체 블루진의 향은 규현의 이미지와 잘 맞아 떨어졌지만 성민에게는 낯설게 다가왔다. 문득 인터뷰 기사 한 토막이 떠올랐다. 그래, 너도 누군가를 ‘사랑’ 할 수 있구나. 왜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지? 너도 이제 어른이라는 걸. 그것은 규현에게서 풍기는 낯선 향기보다 더 성민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조규현 많이 컸다? 그런 느끼한 대사도 던질 줄 알고.”
“엑, 느끼했어?”

 

그제야 조금 표정이 풀어진 성민이 피식 웃으며 잡지를 들어 규현의 이마를 꽁 쳤다. ‘가서 더 배우고 와.’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며 들러붙는 규현을 떼어 놓느라 성민은 꽤 애를 먹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건 스킨십을 좋아하는 건 변함이 없다. 누구라도 오해하기 쉬운 버릇이라 고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성민도 자포자기한 상태로 웬만한 스킨십은 다 받아주게 되었다. 타인과 옷깃이 스치기만 해도 기분 나빠할 정도로 결벽증 비슷한 증세가 있던 예전의 자신을 비추어 봤을 때 대단한 변화였다. 이제는 누가 끌어안든 볼에 뽀뽀를 하든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으니. 그렇게 된 데에는 아마도 규현의 공이 가장 크지 싶었다.

 

“조규현. 넌 성민이 말고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지?”
“어? 형들도 있었어?”

 

여전히 성민을 놓아주지 않은 채 은혁의 태클을 익숙하게 받아넘긴 규현은 시원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표정이 굳었다.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챈 시원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일단 예의상 꾸벅 인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시원은 규현이 은근히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느낌을 예전부터 받았다. 성민이 아끼는 동생이니만큼 불편한 관계가 돼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시원은 먼저 살갑게 말을 건넸다. ‘규현씨도 식사 전이면 같이 먹어요’ 그러나 규현은 시원이 성민의 아침식사로 사온 도시락을 한 번 흘끗 보고는 대꾸 없이 저쪽에서 동해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정수에게 쌩하니 가버렸다. 민망해 하는 시원에게 성민이 대신 살짝 웃어주었다.

 

“규현이 저 녀석 저혈압이라 아침에 좀 예민하거든. 네가 이해해.”

 

‘제가 형에게 도시락 같은 거 먹이는 게 마음에 안 드나 봐요.’ 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삼키며 시원이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대충 짐작이 가긴 가는데 확신이 서진 않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 일을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챙기면서 자기 일에는 도통 무관심한 성민이기에 규현의 이상한 점을 눈치 채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시원은 정수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헤어스타일리스트에게 머리를 맡기고 아예 눈을 감아버린 규현과 다시 잡지 읽기에 열중하기 시작한 성민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가 주변 사람들만 피곤해지는 건 아닌가 몰라.

 

 

 

 


세팅된 머리 때문에 기대지도 못하고 불편한 자세로 졸고 있는 규현의 모습에 정수는 괜히 아침스케줄을 잡았나 하고 후회할 정도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유난히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규현이라 예전에는 멤버 넷이 단체로 달라붙어야 겨우 일어나곤 했다. 그러고 보니 다섯 명을 한꺼번에 챙길 때는 혼이 쏙 빠져나가는 것처럼 정신없이 바빴는데 이제는 한 사람분만 맡으면 되니까, 더욱이 자기 관리가 철저한 규현이는 특별히 신경 쓸게 없어서 훨씬 챙기기 편한 게 좋긴 하지만 무언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건 감출 수 없었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해도 시끌벅적한 벤 안이 문득 그리워지는 정수였다. 그 때는 웃을 일도 참 많았는데…

 

“형.”
“응? 자는 거 아니었어?”
“불륨 좀 키워봐.”

 

마침 라디오에서 예전 Prince 시절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던 차라 잠시 감상에 젖어있던 정수는 불쑥 끼어든 규현의 목소리에 혹시 자는 규현을 깨울까봐 작게 해놓았던 카스테레오의 볼륨을 높였다. 타이밍 좋게 성민의 파트가 증폭된 스피커를 거쳐 차 안에 짜랑하게 울렸다.

 

“이 때 성민이 진짜 귀여웠는데. 그치?”

 

날 안아줘요 깊은 맘으로 가슴 가득히 나를 사랑해주세요. 손가락까지 까닥거리며 따라 흥얼거리던 정수가 물었지만 팔짱을 끼고 시트에 몸을 묻은 채 가만히 듣고 있던 규현은 그저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많이 피곤한가, 하고 고개를 갸웃한 정수는 규현의 2집 타이틀곡으로 지정해둔 벨소리가 울리자 혹시 방송국에서 오는 전화 일까봐 얼른 핸즈프리로 받았다.

 

“어. 인이구나.”

 

그 말에 규현이 전화를 받는 정수를 힐끔 쳐다봤다. 강인이형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징그럽게 애칭이야.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은혁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동해와 은혁의 사이가 남다른 것처럼, 데뷔 전부터 호형호제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정수와 강인의 사이도 각별나기로 유명했다. 강인을 거리에서 캐스팅 한 사람이 바로 정수였기 때문에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규현은 알고 있었다. 다정하게 웃는 정수 앞에서 듬직한 동생처럼 굴면서 속이 썩어 문드러졌을 한 사람의 심정을.

 

“규현아, 너 바꿔 달라는데?”

 

규현은 느릿한 동작으로 정수로부터 핸즈프리를 넘겨받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기운이 펄펄 넘치는 목소리에 규현이 한쪽 귀를 막는 시늉을 하자 정수가 작게 웃는다.

 

- 어디 스케줄이야.
“라디오.”
- 우리 프로에도 한 번 나와야지. 형이 맘껏 귀여워해줄   게.
“글쎄. 그건 매니저님하고 상의해봐.”
- 미용실에서 애들하고 만났다며?
“…어.”

 

조금 전 일이 생각나 또 다시 기분이 가라앉는 규현이었다. 정수가 차를 주차시키는 동안 기다리던 규현은 미용실 유리창을 통해 봐 버렸다. 시원이 성민의 볼에 입을 맞추는 장면을. 낄낄거리며 좋아하던 은혁과 동해를 봐서는 장난인 게 분명한데도 울컥 치고 올라오는 불쾌감은 어쩔 수 없었다. 매니저라는 직업의 특성상 성민과 거의 24시간 붙어있을 시원이 규현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물론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삐뚤어진 사춘기 소년 같은 심보가 발동한 탓인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성민의 옆에 항상 자신이 있었는데…방도 같이 쓰고, 벤에서도 나란히 앉고, 심지어 무대에서도 바로 옆자리였다. 조규현, 너 정말 유치한 거 알지? 스스로 질책도 해보았지만 자기 입으로 노래 부르지 않았던가. 어쩔 수가 없는 거라고.

 

“이상해, 형. 보면 좋긴 한데…아파.”
- 으이그, 소설을 써라 아주.
“형도 그랬다며.”
- 그건 옛날 일이고. 지금은 통달했지.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이 궁금한지 운전을 하면서도 정수가 자꾸 이쪽을 쳐다본다. 참 묘한 일이었다. 당사자를 옆에 두고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 정수의 시선을 의식한 규현은 ‘다음에 만나면 술이나 사줘.’ 하고 가볍게 통화를 끝냈다. 끊고 보니 강인이 전화를 한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그런데 형한테 전화 왜 한 거래?”
“그냥 안부 전화지 뭐.”

 

하긴. 느닷없이 전화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는 사이지. 규현은 그만큼 자연스러운 두 사람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만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을 강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그것은 싸구려 동정심이 아니라 서글픈 동질감의 발로(發露)였다. 잠시 생각하는듯하던 정수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참 신기해.”
“뭐가?”
“너네 둘 말이야. 가만히 보면 너 성민이보다 인이랑 더 친해 보여.”

 

당연하지. 그에게는 아무것도 숨길게 없으니까. 비밀 공유. 그것이 바로 강인과 규현을 가까워지게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나 잘래.’ 대답을 피하려는 듯 규현은 시트에 더 깊숙이 몸을 묻으며 정수의 코트를 목 끝까지 끌어 덮었다. 간질간질 목을 괴롭히던 기침이 터져 나오면서 마른 몸이 들썩거렸다.

 

“감기 오래 가면 큰일인데…”

 

황급히 열어둔 창문을 올리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정수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면서 규현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Prince 시절부터 그랬지만 성민에게는 사진 촬영이 제일 힘든 작업 중 하나였다. 음성, 몸짓 등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 할 수 있는 영상과는 다르게, 한 순간에 표정만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해야하는 사진은 이제 막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성민이 넘어야할 산이자 풀어야할 숙제였다. 찰칵, 찰칵,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셔터음에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에 힘을 주다보니 슬슬 피로감이 물려왔다. 하지만 이번 의류 광고 모델은 ‘배우 이성민’의 이름을 걸고서는 처음 하는 일이라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조금만 쉬었다 갈까요?”

 

게다가 촬영을 담당한 사진작가가 이쪽에서는 평판이 자자한 사람이라 부담이 더 했다. 휴식시간이 선포되자 사진을 정리하고 있는 작가에게 다가간 성민은 머뭇머뭇 그에게 말을 건넸다. 특별히 까탈스러워보이는 인상은 아님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델과는 절대 작업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그가 다행히 자신과의 촬영은 선뜻 승낙했다고 해서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때요?”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자신의 말에 바싹 긴장한 표시가 역력한 성민을 보고 유천은 티 나지 않게 웃었다.

 

“처음에는 걱정 많이 했어요. 과연 내가 원하는 컨셉대로 나올까…‘전직 아이돌 스타인 신인 배우’는 썩 마음에 드는 타이틀이 아니었거든요.”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유천의 진중한 눈길에서 사진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묻어나는 것 같아 성민은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는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을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된다. 성민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다른 멤버들처럼 'Prince'라는 이름을 빛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처음 배우가 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 이름이 성민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성민에게 있어 Prince는 버려야할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자 평생 간직하고 싶은 추억과 인연의 집합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성민씨가 나온 영화를 봤어요. 주인공은 아니지만 참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여서 같이 작업하면 좋겠구나 싶었어요. 덕분에 아, 내가 너무 편견에 사로잡혀있었구나 하는 걸 반성도 했죠. 예술가라는 직업이 남들이 보지 않으려 하는 걸 직시해야 하는데도 말이에요.”

 

유천의 매력적인 미소에 한 동안 넋을 놓고 있던 성민은 뒤늦게 허둥지둥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열심히 한다는 게 인정을 받았다는 기쁨에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 부끄러워서 손으로 가리려고 하자 유천이 잠시만요- 하더니 옆에 있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집어 들고는 팡! 하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성민씨처럼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피사체는 작업하면서 즐거워요. 무한한 가능성이 엿보이거든요. 성민씨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너무 자신 없어 하지 마요.”

 

유천이 내민 폴라로이드 사진에는 수줍게 웃는 성민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런 종류의 칭찬은 또 처음이라 성민은 얼떨떨했다. 받은 사진을 신기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성민에게 유천이 반 장난으로 말했다. ‘여자친구에게 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 깜짝 놀란 성민이 손 사레까지 치며 부정했다.

 

“진짜 없어요?”
“제가 작가님한테 뭐 하러 거짓말하겠어요.”
“흐음…”

 

성민이 여자 모델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며 턱을 쓸던 유천은 그제야 뭔가 감이 잡힌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성민씨가 지금 2% 부족하다고 느낀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네?”
“성민씨 사랑 한 번도 안 해봤죠?”

 

유천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한 성민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유천이 친절하게 덧붙였다. 호기심으로 사귀는 것말고 진짜 사랑 말이에요. 스물 여섯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수한 이미지를 간직한 성민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지닌 달콤함과 애틋함만 첨가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것 같다는 게 유천의 예상이었다.

 

“이따가 촬영할 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거라고 상상해 봐요.”

 

유천이 한 쪽 눈을 찡긋하며 조언해주자 성민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문득 단편적인 기억하나가 떠올랐다. ‘형은 좋아하는 사람 없어?’ 질문한 사람이 누군지조차 가물가물하지만 그 때도 지금처럼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던 것 같다.

 

“형, 문자 왔어.”

 

시원이 다가와 내민 휴대폰을 받아든 성민은 요즘 유행하는 화사한 핫핑크색 휴대폰의 폴더를 열고 문자를 확인했다. 일을 할 때는 집중을 위해 대개 시원에게 휴대폰을 맡기는 성민이었다. ‘언제 끝나? 나 오늘 엠카 1위 후보야^__^’ 규현으로부터 온 문자에 성민은 피식 웃으며 답장을 해주었다. ‘너 이 자식 자랑하려고 문자했지? 오늘 아마 늦게 끝날 것 같은데...’ 리허설을 마치고 쉬는 중인 건지 1분도 되지 않아 새 문자가 왔다. ‘우엥~ 그럼 방송 못 보는 거야? 나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ㅠ_ㅠ’ 문자로 따지만 영락없는 막내 티가 팍팍 난다. 귀찮다는 이유로 이모티콘 하나도 찍지 않는 강인과, ㅋ에서 시작해 ㅋ으로 끝나는 은혁, 응, 아니 등의 단답식으로 일관하는 동해와 비교했을 때 훨씬 아기자기했다. 늦게 끝난다는 말에 금세 강아지처럼 풀이 죽었을 규현의 모습이 상상이 가는 바람에 성민은 답장을 하면서 내내 웃음을 머금었다.

 

‘나 사실 리허설 하면서 삑사리 두 번 났어;; 그래서 넘 우울해ㅠㅠ’
‘괜찮아. 본방 때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우리 규현이 홧팅! v*^^*v'

 

여기까지 문자를 보내고 조금 기다리자 이번에는 전화가 울렸다. 액정에는 처음 폰을 샀을 때 규현이 멋대로 찍고 설정해놓은 셀카가 떴다. 잘생기긴 참 잘생겼다. 팬들이 붙여준 ‘조훈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다른 멤버들과 많이 놀리기도 했지만 가끔은 성민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온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통화 연결음으로 자기 노래 설정 안 해 놨다고 삐지려나. 얼마 전 강인이 라디오에서 규현이 노래로 통화 연결음 설정해놨다고 자랑하던 게 생각났다. 언제나 막내 챙기는 데는 강인이 한 발 빠르다. 가끔은 주변 사람들은 끼어들 수 없는 두 사람만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 같아 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섭섭한? 문득 자신이 그런 걸 느낄 자격이 있는 지 의구심이 들었다.

 

- 형 지금 전화 받을 수 있어?
“응. 쉬는 시간이야.”

 

발랄했던 문자와는 달리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생각보다 많이 가라앉아 있어 성민은 덜컥 걱정이 되었다.

 

“너 목소리 많이 쉬었다. 괜찮은 거야?”
- 몰라. 감기가 빨리 안 떨어져서 짜증나.

 

마지막의 짜증나-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어리광이 듬뿍 묻어났다. 성민은 어쩐지 우월감이랄까,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힘이 들 때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점에서?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목 아프면 말 많이 하지 마.”
- 그럼 나 가만히 있을 테니 형이 계속 이야기해.
“그런 게 어디 있어.”
- 형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 했는걸.

 

감기 탓인지 평소보다 더 허스키해진 목소리에 성민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후드에 달린 끈을 손으로 베베 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돌렸지만 그 여운은 가시지 않았다. 농담처럼 던진 말 한 마디에 즉각적으로 심장이 반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순간 불쑥 불쑥 솟아나는 낯선 감정들은 지난 5년의 시간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성민은 애써 그것들을 꾸욱꾸욱 눌러 담았다. 변화만큼이나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것은 없다.

 

“아, 규현아. 나 그만 끊어야 할 것 같아.”

 

유천이 스텝들에게 다시 시작하겠다는 싸인을 보내는 걸 본 성민은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옆에 있었다면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라도 해줄 텐데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 형…
“응?”
- 아니다. 바쁘면 얼른 끊어.
“그래. 본방 잘하구. 형이 나중에 전화할게.”

 

규현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성민은 어쩔 수 없이 통화를 끝내야 했다. 폰을 시원에게 다시 넘겨주고 카메라 앞에 가 선 성민은 유천의 주문대로 여자 모델과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거라고 상상해 봐요’ 조금 전 유천이 했던 말이 오버랩 되면서 성민의 머릿속에 불투명한 기억의 단편들이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여자 모델에게서 풍기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화장품 냄새가 점점 옅어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다른 향으로 바뀌었다. 베르사체 블루진. 향의 이름을 기억해낸 성민은 순간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말초 신경 끝부터 저릿해져옴을 느꼈다. 성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순간 눈앞의 플래시가 번쩍- 하고 터뜨려졌다.

 

 

 

 


통화 시간이 깜빡거리는 액정을 뚫어져라 보던 규현은 짧은 한숨과 함께 폴더를 닫았다. 성민과 같은 기종에 색깔만 다른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멍하게 앞만 보고 있는 규현에게 정수가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괜찮아? 정수는 안 하던 실수까지 하고 컨디션이 이만저만 나빠 보이는 게 아닌 규현을 내내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힘없이 라도 웃는 걸 봐서는 다행히 아까보다는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다.

 

“형, 있잖아.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면…그건 좋은 현상이지?”

 

인터뷰에서도 예상치 못한 발언으로 깜짝 놀라게 만들더니, 정말 사랑을 하긴 하는 구나. 정수는 진지하게 물어오는 규현이 어쩐지 귀여워 코디가 기겁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선에서 규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서…힘이 났어?”
“아아- 지금 상태로는 실수 안 할 거 같아.”

 

그 사람이 누군지 묻는 대신에 정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된 거지, 뭐. 네가 그만큼 좋아한다면…갑자기 시끌시끌해진 바깥 소리에 정수는 대기실에 틀어놓은 모니터로 시선을 주었다. 한창 생방송이 진행 중인 화면에는 이번에 데뷔하는 신인 그룹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철부지 장난꾸러기들 같지만 일할 때만큼은 확실한 은혁, 동해 콤비가 안무를 담당했다던 그룹이라는 걸 기억해낸 정수는 그래도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동생들이 관련 있는 팀이라고 관심을 보였다. 규현은 현란하게 번쩍거리는 조명 아래 춤을 추고 있는 앳된 얼굴들을 보며 Prince 시절을 떠올렸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그 때. 규현은 정수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형. 자꾸만 욕심이 커져가는 것 있지. 문득 생각이 나면 목소리가 듣고 싶고, 목소리를 들으면 눈으로 보고 싶고, 직접 보게 되면...규현의 얼굴이 괴로움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미처 내뱉지 못하는 말들이 목에 걸린 듯, 목구멍 안쪽이 까슬하게 아파 왔다. 아무래도 이번 감기는 쉽게 나을 것 같지 않았다.

 


Monodrama
Episode 003. Last Concert
Written by. 유리시안

 

 

 

 


‘1위 축하. 기념으로 형이 쏠 테니 날 잡아라.’

 

너무나 강인 다운 문자에 규현은 젖은 머리를 털면서 픽 하고 웃었다. 솔로 데뷔 후 첫 1위에 주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축하를 받았지만 아직 잘 실감이 나지 않는 규현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Prince 멤버가 되고 나서 첫 1위를 했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오늘은 MC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순간 왠지 모르게 눈물이 쿡하고 솟았다. 아무래도 팀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보다 ‘조규현’ 이름 석 자를 걸고 하는 활동이 몇 배는 더 부담이 되다 보니 그간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 했던 게 한꺼번에 터진 모양이었다. 소감을 묻는 MC의 말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고마운 사람의 이름을 주절거린 것 같은데 빼먹지 않고 제대로 말했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도 눈물이 많은 정수는 규현이 앵콜송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부둥켜안고 울먹거렸다. ‘수고했어, 규현아.’ 그 말 한마디에 괜히 코끝이 찡해져 조금 울었던 것도 같다.

 

- 나 진짜 밥 먹다가 밥알 내뿜을 뻔했다니까! 동해가 녹화도 떠놨어. 원래 우리가 맡은 애들 무대 녹화 하려고 했는데 걔네꺼 다 지워졌어. 아, 몰라몰라. 오늘 라이브도 완전 짱! 동해랑 보면서 저 녀석 제대로 물올랐다고 계속 감탄하고...아휴, 야 내가 다 기분 째질 것 같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한껏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한 은혁은 규현이 말할 새도 없이 자기 할 말만 속사포처럼 쏟아내고는 동해를 바꿔주지도 않고 끊어버렸다. 아마 그것 때문에 동해에게 몇 대 쥐어 박혔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일. 5분 뒤쯤 다시 전화를 한 동해가 차분하게 전하는 축하 인사를 받고 나니, 뒤이어 아는 사람들로부터의 축하 문자가 쇄도했다. 그 중에는 간간히 팬들로부터 온 것도 있었고, 려욱, 기범 같은 반가운 친구들의 이름도 끼어 있었다. 한 동안 시끄럽게 울려대던 휴대폰이 잠잠해진 것은 규현이 집에 도착해서 피곤한 몸을 욕조에 담글 때쯤이었다. 부모님은 일 때문에 외국에 있고, 그렇다고 결혼한 누나 집에 폐를 끼칠 수는 없어서 규현은 멤버들과 같이 살던 숙소에서 나온 후 그냥 회사에서 구해준 원룸으로 된 오피스텔로 들어왔다. 집 앞에서 기다리는 극성팬들이 사라져서 좋긴 하지만 가끔은 다섯이서 옹기종기 모여 살던 때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휴대폰을 도로 협탁 위에 올려놓은 규현은 자신이 내내 느끼던 허전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직 성민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화보촬영을 늦게까지 한다고 했으니 못 봤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형, 만약에 내가 오늘 1위하면 말이야...몇 번이고 망설였던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규현은 침대 맡에 놓아둔 작은 액자를 집어 들었다. 예전에 스케줄 차 일본에 갔다가 하루 동안 오프를 얻어서 멤버들과 종일 거리를 쏘다니며 놀았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베이비 핑크 셔츠에 선캡을 쓰고 활짝 웃고 있는 성민과 그 옆에서 어색한 브이를 그리고 있는 자신. 서로의 어깨와 허리에 자연스럽게 감긴 손이 규현을 더 서글프게 만들었다. 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그가 알았어도 우리가 이렇게 가까울 수 있었을까.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만약 오빠가 여자라면, 멤버들 중에 누구와 사귈 것 같아요? 이번에는 막내부터 가죠. 규현씨?’
‘음... 저는 성민씨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예쁘잖아요.’
‘뭐야, 그게!

 

그게 내 진심이라는 걸 알았어도 형은 그렇게 웃어넘길 수 있었을까.

 

삑-삑-삑-삑- 상념에 빠진 규현을 현실로 돌아오게 한 것은 현관 도어락을 해제하는 소리였다.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지라 규현은 현관 쪽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정수형이 잊은 게 있어서 왔나? 그러나 철컥- 하고 열린 문 틈새로 빼꼼 고개를 내민 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 한 순간 규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민이형…”

 

놀라 말문이 막힌 규현을 보고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이라 만족했는지 성민은 헤헤, 하고 해맑게 웃었다. ‘나 들어가두 돼?’ 비밀번호까지 당당하게 눌러놓고 이제 와서 주인의 허락을 받는 것이 우습긴 했지만 성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잘 안 된 규현이 겨우 고개를 끄덕거리자 냉큼 들어온 성민은 현관에서 발목까지 오는 캔버스화의 끈을 풀었다. 일교차가 심한 가을 밤 공기가 제법 차가운지 애기처럼 작은 성민의 손이 발갛게 얼어 있었다.

 

“짜잔, 축하 선물!”

 

거실로 올라오자마자 성민은 뒤에 감추어두었던 손을 규현에게 내밀었다. 그 아래 자그마한 케이크 상자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

 

“미안해. 이 시간까지 문 연 곳도 거의 없구 그래서 큰 걸로는 못…규현아?”

 

성민이 말을 제대로 맺기도 전에 규현이 그를 확 끌어당겨 안아버렸다. 얼떨결에 규현의 어깨에 코를 부딪친 성민은 규현의 품에 안긴 자세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깜빡 거렸다.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규현에게서 나는 플로랄 계열의 바디 코롱 향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쿵- 쿵- 일정한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이 맞닿은 가슴으로 전해져오는 바람에 성민의 몸 전체가 울렸다. 이때까지 장난스럽게 껴안은 적은 많았지만 오늘처럼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고마워, 진짜.”

 

나에게는 형이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큰 선물이야.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온 감동이었다. 하루 종일 조명에 시달렸을 텐데도 입고 있는 하얀 눈색 니트처럼 뽀얗기만한 성민에게서는 아기 냄새가 났다. 머리맡에 나려앉는 규현의 숨결에 자꾸만 손끝이 간질 간질거리는 느낌을 피하려고 성민은 규현의 기다란 등을 쓱쓱 쓸어주며 일부러 밝은 톤으로 꾸며 말했다. ‘잘했어. 너무 자랑스럽다, 우리 막내.’ 어린 동생 취급하는 것이 맘에 안 들었는지 규현이 턱으로 성민의 정수리를 톡 쳤다.

 

“그 호칭 좀 바꾸면 안 돼?”
“한 번 막내는 영원한 막내.”
“됐어. 케이크나 먹자. 나 배고파.”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 자신을 놓아주는 규현은 성민이 알던 그 규현이라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밥 안 먹었어?’ 돌아서서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 드는 규현의 등이 많이 말라있었다. 예전에도 살집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큰 키에 맞게 적당히 통통했었는데 근래에는 마르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감기를 할 때도 혼자 멀쩡하더니 요즘 들어 자주 비실비실 아픈 것 같기도 하고…규현이 대답 대신 씩 웃자 성민은 속상함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이어트 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밥을 안 먹어.”
“요즘 그냥 밥맛이 없네.”
“그러니까 감기도 빨리 안 낫잖아!”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른 성민 때문에 규현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스로도 당황한 성민은 급격히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린 채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건강관리 잘 하라구. 그래야 또 열심히 활동해서 오늘처럼 상도 받고…’ 형으로서 동생을 걱정할 수도 있는 건데 성민은 왠지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처럼 쑥스러워졌다. 규현과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집 안을 휘 둘러보던 성민은 익숙한 사진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어? 저 사진 어디 갔나 했더니 네가 가지고 있었구나?’ 폴짝 침대 위로 뛰어올라 앉은 성민은 조금 전까지 규현이 보고 있던 액자를 집어 들었다. 성민의 어깨를 감싼 채 입 꼬리만 살짝 올려 웃고 있는 규현은 확실히 지금보다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옆에 있는 자신도 마찬가지. 오랜만에 옛날 모습을 보는 게 반갑기만 하던 성민은 그러나 문득 두 번 다시 이 때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들과 함께해서 즐겁고, 조금은 설레기도 했던 그 순간은 영원히 사진 속에 박제된 채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제어할 새도 없이 넘쳐나 가끔 성민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우리들을 둘러싼 주변 상황이 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우리들이 변했기 때문일까.

 

“많이 변했지.”

 

규현의 말에 흠칫 놀란 성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액자를 제 자리에 내려놓았다. ‘응. 너나나나 많이 늙었다.’ 그 말에 규현이 낮게 웃었다.

 

“더 멋있어 지지 않았냐구.”
“너 요즘 자주 자뻑 증세를 보인다? 강인이형한테 배우지 말라니까.”

 

성민이 쓰읍, 하고 혼내는 모션을 취했지만 규현에게는 그런 성민이 무섭기는커녕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성민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미소를 띤 채 케이크를 식탁으로 가지고 가는 규현을 성민이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그리고는 규현을 냉큼 끌어다가 식탁 의자에 앉히고는 규현이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으로 아직 물기가 축축하게 남아있는 규현의 머리를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머리 제대로 안 말리면 감기 덧나. 라이브 가수는 목이 생명인데. 조근조근 성민이 하는 말이 규현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맡에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성민의 손이 멀어질 때까지 숨도 크게 내뱉지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저기, 규현아…”

 

성민은 운을 떼어놓고 한참을 망설였다.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니? 인터뷰 기사를 본 뒤 내내 걸리던 그 말 한마디가 쉽게 튀어나오지 않고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깊숙한 부분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조금 아니다 싶기도 했다. 아니, 사실은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규현에게서 사실을 확인 받기가 싫은 것인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헝클어진 규현의 머리를 쓱쓱 정리해주면서 성민은 아무것도 아냐- 하고 얼버무렸다.

 

“뭔데. 할 말 있으면 해.”

 

주인에게 몸을 맡긴 고양이처럼 나른한 모습으로 케이크 상자의 리본을 푸는 데 집중하면서 규현이 무심하게 말했다. 리본을 잡아당기는 단순한 동작인데도 규현의 가늘고 긴 손가락은 우아한 동선을 만들어 내었다. 규현이 상자에서 꺼낸 것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초콜릿 케이크. 한 번 성민이 사온 치즈케이크를 먹고 규현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기억이 선명해서 시내를 몇 바퀴 돈 끝에 겨우 구해온 것이었다.

 

“아냐, 나중에 얘기해도 되는 거야. 초는 몇 개 꽂을까?”
“생일도 아닌데.”
“그래도. 의미 있는 날 이잖아.”

 

성민은 앙증맞게 데코레이션이 된 케이크에 가장 긴 초 한 개를 꽂았다. ‘나 보고 10살 하라고?’ ‘1위를 했으니까 한 개야.’ 규현이 식탁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가만히 지켜보는 동안 손수 성냥을 그어 불까지 붙인 성민은 규현의 맞은편에 앉아 작게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1위 축하 합니다~ 1위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우리 막내, 1위 축하합니다~”

 

마주한 규현의 까만 눈동자가 그윽하고 진지한 빛을 띠고 있어서 성민은 ‘사랑하는’에서 잠시 숨을 들이켜야 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걸 감추기 위해 성민은 끝까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마지막 소절에서 시선을 내리깔아야 했다. 훅- 하고 가볍게 촛불을 끈 규현은 땡큐, 하고 짤막하게 한 마디 했다. 성민은 규현의 눈동자가 촛불처럼 불안하게 일렁거리고 있음을 미처 보지 못했다.

 

“아참, 나 보여줄 게 있어.”

 

커팅하기에는 너무 작다며 포크로 쪼갠 케이크 조각을 한 입 먹은 성민이 생각난 듯 매고 있던 크로스백을 뒤적거렸다. 배고프다면서 케이크는 입에도 대지 않고 포크로 장난만 치고 있던 규현은 성민이 내미는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받아들었다.

 

“아까 촬영장에서 사진작가님이 찍어주신 거.”

 

‘대단하지? 순간적으로 찍은 건데도 하나도 안 흔들렸어.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니까.’ 규현이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성민은 유천에 대한 칭찬부터 시작해서 오늘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중간에 성민이 뭐가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자 그제야 규현이 고갯짓을 하며 적당히 맞장구 쳐주었다.

 

“형, 크림 묻었다.”

 

이야기 중간에 규현이 입언저리를 가리키며 알려주자 성민은 ‘여기? 여기?’ 하면서 손등으로 닦아 내었다.

 

“아니. 여…기.”

 

식탁을 가로질러 뻗어온 규현의 손가락이 성민의 입가에 묻은 초코 크림을 닦아내었다. 순간적으로 슬로우 모션을 건 것처럼 모든 동작이 느리게 진행되었다. 긴 손가락 끝에 옮겨 묻은 크림이 쪽, 하는 민망한 소리와 함께 규현의 입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놀란 성민은 습관적으로 손을 올려 입을 가릴 뻔했다. 부끄러운 일이 있을 때 늘 나오는 성민의 버릇이었다. 그러나 정작 규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포크를 집어 들고 뱅글뱅글 돌리면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고?’ 하고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어나갔다.

 

심장이…멈추는 줄 알았어.

 

규현의 손끝은 한겨울처럼 차가웠는데도 그것이 닿은 살갗은 타들어갈 듯이 뜨거웠다. 토끼처럼 눈이 동그랗게 커진 채 멍하게 있는 성민을 본 규현은 포크를 달칵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데려다 줄게.’ 얼떨결에 따라 일어선 성민은 차키를 챙기는 규현을 붙잡아 만류했다.

 

“됐어. 그냥 혼자 가도 돼.”
“시간 많이 늦었어.”
“안되면 시원이 부르면 되니까 넌 그냥…”

 

‘집에서 쉬어.’라고 성민이 마저 말하기도 전에 규현의 표정이 급격히 싸늘해졌다. 그래, 이제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형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규현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주제도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혹 성민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고 해도 규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억지로 웃으며 축하해주거나 아프게 지켜보는 것, 두 가지 뿐일 것이다.

 

“형. 우리 집 비밀번호 어떻게 알았어?”

 

0101. 집 비밀번호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패턴의 4자리 수에 담긴 의미를 성민은 알고 있을까. 갑작스럽게 바뀐 화제에 당황하면서도 성민은 순순히 답해주었다. 너 예전부터 비밀번호하면 다 그거 아니었어?

 

“아, 혹시 기분 나쁘다면 바꿔도 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초조한 듯 입술을 짓이기던 규현은 결국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니다, 형도 많이 피곤할텐데 어서 가봐.”

 

형, 사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난 가끔 차라리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어. 그럼 내가 조금 덜 힘들까봐. 하지만 아직도 내 심장은 미련하게 한 사람만을 향해 뛰고 있어. 그만두고 싶지만 그럼 내가 죽을지도 몰라. 밀어내고 싶은데 더욱 붙잡게 되고, 거부하고 싶은데 더욱 매달리게 돼. 형은 내게 그런 존재야.

 

 

 

 

 

딸랑- 묵직한 바(Bar) 문을 열고 들어선 규현은 고급스러운 오리엔탈 분위기로 인테리어 된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규현을 알아보고 컵을 닦고 있던 바텐더가 까딱 인사를 건넨다. 자주 오다보니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게 된 바텐더였다. 하얀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가 잘 어울리는 그는 이곳을 찾는 여성들의 눈길을 단박에 끌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눈짓으로 가게 안쪽을 가리키자 규현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일행을 찾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어, 여기야.”

 

먼저 와 있던 강인…아니 영운이 규현을 향해 손을 들었다. 으레 아이돌 시절의 유치한 예명은 떼어버리고 싶어 하기 마련인데 영운은 아직 그 이름을 고수하고 있었다. 크게 어색하지도 않고 듬직한 그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처음 팀을 결성할 무렵 정수가 직접 지어준 이름인 까닭이 크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규현이었다.

 

“벌써 한 잔 했네?”
“기다리기 심심해서.”
“미안. 차가 좀 막혔어.”

 

영운의 앞에 놓인 빈 잔에 남은 얼음들이 주홍빛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영운은 괜찮다는 식으로 눈꼬리가 완만한 호를 그리며 접히는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검은 가죽 재킷에 목 폴라를 입은 영운은 나른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바(Bar)의 분위기에 맞게 편안해 보였다. 팀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장난기가 넘치면서도 늘 맏형이자 리더답게 책임감 있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던 그는 치열한 일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 긴장이 풀린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이십 대 중반을 넘긴 남자에게 완숙한 매력을 더할 뿐, 그래서 영운은 규현이 처음으로 인정하고 닮고 싶어하는 ‘어른’ 이었다. 부재(不在)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춘기 소년처럼 방황하는 규현의 혼란한 마음의 갈피를 바로 잡아준 것도, 혼자 짊어지고 가기 버거운 짐을 나눠 들어준 것도 바로 영운이었다.

 

“여기 블랙 러시안(Black Russian) 한 잔 더하고, 이쪽은  마티니(Martini).”

 

규현의 취향을 잘 아는 영운이 주문을 받으러 온 아르바이트생에게 알아서 칵테일 두 잔을 주문했다. 영운과 제일 처음 이 곳에 와서 마신 술이 마티니였고, 그날 독한 알코올의 힘에 기대어 규현은 속마음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다음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행여 혼이라도 날까봐 움츠려 있는 규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영운이 말했었다. 그거 알아? 우리 둘이 닮아있다는 거. 똑같이 바보 짓 하고 있거든.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둘 사이에 묘한 동지 의식이 싹튼 것은.


규현은 답답하게 목을 옥죄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할만 해? 넌지시 묻는 영운에게 규현은 힘없는 웃음으로 답했다. 혼자 활동하는 게 할만하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중의적인 물음이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지금 규현의 심정이 어떤지 잘 아는 영운은 쓰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아차, 하고 거두었다.

 

“너 목감기라며. 정수형이 되게 걱정하더라.”
“그게 좀…잘 안 낫네.”

 

쯧, 하고 작게 혀를 찬 영운은 아쉬운 듯 담배 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다가 포기하고 도로 케이스 안에 넣었다. ‘넌 평소에 건강하다가 꼭 한 번씩 크게 아프더라.’ 과거를 더듬는 듯한 영운의 말에 녹녹한 걱정의 기색이 묻어났다. 활동할 때는 성민이가 골골거려서 신경 쓰이게 만들더니 어째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냐. 주어가 빠져 있기는 하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지 짐작이 간 규현은 냅킨을 접었다 폈다 하며 푸시시 웃었다. 형도 가만히 보면 은근히 팔불출이야. 그 말에 발끈한 영운이 규현의 이마를 툭 밀었다. 사돈 남말하네.

 

“주문하신 칵테일 나왔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 테이블 위에 상반되는 두 종류의 칵테일을 내려놓았다. 이름처럼 고독한 검은빛을 띄고 있는 블랙 러시안과 얄쌍한 리큐르에서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무색투명한 마티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챙- 하고 서로의 잔을 부딪쳤다. 축하한다. 멋없는 축하인사를 안주삼아 규현은 마티니로 입술을 축였다. 목구멍을 싸하게 훑고 지나가는 알코올 기운에 벌써부터 어질어질 취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영운은 말없이 칵테일을 홀짝이며 규현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1위축하라는 명목으로 마련한 자리지만 실상은 털어 놓을 곳 없어 답답한 속내를 달래주고자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영운도 마찬가지인지라, 그래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형은…어때?”
“뭐가.”
“진행형이야 완료형이야.”

 

글라스를 빙글 돌리던 영운은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휘력이 많이 늘었다, 너?

 

“모르겠다, 나도 이제.”

 

어차피 해답을 바라고 시작한 일도 아니잖냐. 빠르게 잔을 비운 규현은 먹먹하게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둘 다 지독한 겁쟁이들이야.

 

“안 그래도 심란한데 너무 자학하지 마.”
“형도 그렇잖아. 진실을 고백했을 때 잃게 되는 것들이 두려운 거잖아.”

 

영운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가 쓸쓸한 빛을 띠며 가라앉았다. 규현은 문제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다. 영운이 지금껏 감정의 찌꺼기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질질 끌어온 이유, 규현이 지금 이렇게 온 몸을 옥죄어오는 괴로움에 발버둥 치는 이유. 그것은 결국 ‘세상의 금기’라는 명목이 아니라 추억에 안주하고 싶은 욕망에 귀인했다.


실로 영운은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정수의 손목을 잡아 채 침대로 끌고 가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의 영운은 정수에게 경배의 키스를 퍼붓고, 금지된 선악과의 달콤한 향기에 취한 아담이 되어 정신없이 정수를 탐했다. 그러나 영운이 이성을 붙잡게끔 하는 것은 스무 해 넘게 살면서 내면화 된 도덕률이 아니라 지금껏 정수의 곁에서 유지해왔던 ‘친한 동생’이라는 지위마저 잃어버릴까하는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영운이 제 감정을 꽁꽁 가둔 채 홀로 아파하다가 홀로 삭히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였다.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아둔 감정은 이제는 앙금덩어리 되어 무덤덤할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살아서 팔딱거리면서 상처 받고, 피를 흘리고, 시간에 기대어 아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영운은 갑자기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테이블에 길게 엎드린 규현의 등이 간간히 터져 나오는 기침에 들썩거리는 것이 안쓰러워, 대신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규현도 마찬가지로 갈등하고, 혼란스러워 하고, 그러다가 결국 혼자 포기하고 혼자 아파했을 것이다. 늘 ‘먼저 반한 사람이 죄’라고 장난처럼 위로하던 영운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지 못했다.

 

“너도 누구처럼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냐?”
“아니……차라리 뛰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티니처럼 투명한 액체가 나무색 테이블위에 짙은 자국을 남겼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희뿌옇게 흐려진 망막에 한 사람의 상(像)이 맺혔다. 그것은 작고, 따뜻하고, 다정하고, 잘 웃고, 예쁜 동화(童話)였다. 가까이 있지만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 여러분은 지금 강인의 키스 더 라디오를 듣고 계시구요, 2부에서는 예고 해드린 데로 엄청난 게스트 분을 만나 실 수 있습니다. 키 크고, 잘 생기고, 노래도 잘하는 이 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아니 이거 대본 누가 썼습니까? 편애하는 티가 팍팍 나잖아. 황 작가 언제는 내 팬이었다며, 어~?

 

캐스팅 제의가 들어온 시나리오를 찬찬히 살피고 있던 성민이 작게 키득거렸다. 영운이 진행하는 라디오는 DJ의 성격처럼 언제나 편안하고 유쾌했다. 운전대 위에 팔을 올린 채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차들의 행렬을 내다보던 시원도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진행하지 않겠다는 영운의 항변에 소리내어 웃었다.

 

“오늘 게스트 규현인가 보다.”
“에? 알고 있었어요?”
“아니, 그냥 느낌에.”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대본을 올린 채 연필로 꼼꼼하게 밑줄까지 긋는 성민은 꽤나 진지해 보였다. 그런 것도 느낌으로 알 수 있나? 고개를 한 번 갸웃한 시원은 더 방해하지 않고 다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흐르는 차 안에는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경쾌한 미디움 템포의 댄스곡이 한 곡 흐르고, 언젠가 Prince 멤버들이 전부 모여 녹음한 로고송이 흐르고, 2부의 시작을 알리는 영운의 멘트가 흘렀다.

 

- Prince의 귀여운 막내에서 멋지게 솔로 가수로 성공한 조규현씨 입니다. 어서 오세요.
- 안녕하세요.

 

익숙한 음색 하나가 불쑥 끼어들자 연필을 쥐고 있던 성민의 손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규현이 1위 하던 날 이후로 한 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다. 새 영화 준비로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단지 그것뿐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 근데 뭐 사실 서로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에 규현씨, 강인씨 이러는 거 상당히 낯간지럽네요.
- 그럼 까짓 거 격식 차리지 말고 편하게 갈까요?
- 그럴까요? 강인이 한 번 가~자.
- 아니, 이 사람이!

 

친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그런지 DJ와 게스트 신분을 떠나 토크 시간 내내 서로에게 장난 치고 태클을 거느라 정신이 없었다. 분위기 있는 발라드 곡을 부르느라 방송에서 늘 무게 잡고 있던 규현도 오늘 만큼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듯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밝은 톤의 목소리에 성민은 어느새 자신의 입 꼬리가 올라가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표정을 고쳤다. 혹시 시원이 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니까.

 

- 이번에는 규현씨가 키스 가족 분들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선물을 풀어볼 시간입니다. 규현씨 어떤 선물을 준비하셨죠?
- 네, 정말 고민 고민 하다가 가을밤에 어울리는 노래 한곡을 준비해왔습니다.
- 오오, 지금 많은 분들이 녹음 준비 한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자, 여러분 볼륨업 하시구요~
- 참,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데요 그 분께 꼭 한 번 불러드리고 싶었거든요. 이 방송 듣고 있을지 모르겠지만...듣고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규현의 멘트에 흠칫한 시원이 자기도 모르게 성민 쪽을 바라보았다. 성민은 여전히 묵묵히 대본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뒤에서 울리는 클랙션 소리에 급히 차를 출발시키느라 시원은 미처 성민이 몇 분째 같은 페이지에서 맴돌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앞에서부터 정체가 서서히 풀리는지 차들이 느릿느릿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막혀있던 감정이 지직거리는 라디오 주파수를 타고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 것처럼.

 

- 늘 바라만 보네요. 하루가 지나가고 또 하루가 지나도 그대 숨소리 그대 웃음소리 아직도 나를 흔들죠.

 

그것은 단 한 사람을 향한 노래임이 분명했다. 지금 라디오를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느낄 수 있을 만큼 규현은 또박또박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또 눈물이 흐르죠 아픈 내 맘 모른 채 그댄 웃고 있네요
바보 같은 난 철없는 못난 내게
한 번쯤 그대 돌아봐 줄 수 없는지.
알고 있죠 내 바램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의미 없단 걸
나였으면 그대 사랑하는 사람
나였으면 수없이 많은 날을 나 기도해왔죠
푸르른 나무처럼 말없이 빛난 별처럼
또 바라만 보고 있는 나를 그댄 알고 있나요.

 

 

그 절절한 고백이 라디오 부스를 넘어 한강 대교를 달리고 있는 차 안까지 와 닿는 것 같아 시원은 소름이 쫙 돋았다. 신경질적으로 연필 꽁지를 물어뜯던 성민은 규현의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손을 뻗어 라디오를 꺼 버렸다. 적막이 흐르는 공기만큼이나 성민은 충분히 어색해 보였다. 그게 집중이 잘 안 돼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설프게 늘어놓은 성민은 다시 대본에 콕 시선을 고정했다. 그 동글한 옆선이 파리하게 질린 걸 감지한 시원은 차마 묻고 싶었던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형…설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니죠. 그건 너무 가혹한 거잖아요.

 

 

 

 

 

성민은 시원에게 부탁해 대본 리딩이 끝날 때까지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엉뚱한 생각만 계속 들 것 같아서였다. 자기 때문에 괜한 고생한 시원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혼란스러운 마음이 정리 되었다. 반듯한 미소와 함께 내일 아침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골목을 빠져나가는 시원의 차를 배웅하고 돌아선 성민은 담벼락에 기대 서있는 긴 실루엣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우뚝 섰다.

 

“…규현아.”

 

씨익 웃는 얼굴이 며칠 사이에 더 가칠하게 말라있었다.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는 얇은 무대의상을 입고 달달 떨고 있는 모습에 성민은 사정없이 제 입술을 짓이겼다. 너 왜 이렇게 병신 같아. 속상한 마음은 꾹 담아 두고 성민은 겉옷부터 벗어 규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주인의 온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하얀 패딩 점퍼는 코끝이 시릴 정도로 알싸한 밤공기를 차단시키기에 충분했다. 점점 짧아지는 가을을 아쉬워하듯 성민의 집 담벼락에 얼기설기 자리 잡고 있는 담쟁이넝쿨 잎은 예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것도 낙엽이 되어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버릴 것이다. 손으로는 다정하게 옷깃을 여며주면서 말은 괜히 퉁명스럽게 나갔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정수형은?”
“오랜만에 둘이서 회포 풀라고 먼저 빠져나왔지. 오늘 강인이형 라디오에 나갔었거든.”
“알고 있어.”
“들었어?”

 

코를 비비며 쑥스럽게 웃는 모습에 성민은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은 안 돼. 성민의 머리에서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형 그 노래 기억나?”

 

자꾸만 시선을 피하려는 성민을 붙잡아 눈을 맞춘 규현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운을 뗐다. 아니- 하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은 규현이 처음 Prince에 합류한 날이었고, 성민에게 새로운 룸메이트가 생긴 날이었다.

 

‘우와, CD 되게 많다. 이거 다 네가 산거야?’
‘산 것도 있고, 선물 받은 것도 있고…’
‘아, 너 밴드부였다고 했지?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았겠다.’
‘아니에요.’

 

짐 정리 하던 걸 도와주던 성민은 오랜만에 들어보는 존댓말이 귀엽게 느껴졌다. 동생이라고 있는 두 녀석이 틈만 나면 기어오르다 못해 성민을 가지고 놀 정도였으니 고분고분한 막내가 들어왔다는 사실에 새삼 감격스러웠다. 새로운 멤버가 들어온다는 말에 기대했던 만큼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행히 규현은 붙임성이 좋았고 적당히 예의도 발랐다.

 

‘어?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인데.’

 

규현이 가지고 온 CD들을 뒤적거리다가 성민은 반갑게 외쳤다. 들어 봐도 돼? 소심하게 묻는 성민에게 규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 자신의 CDP를 꺼내들고 온 성민은 규현의 CD를 꽂고 한참을 음악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중간 중간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면서. 그 때 성민은 규현이 짐 정리 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귓가에 나지막이 울리는 애절한 발라드와 어울리지 않게 햇살 좋은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형 나는…”
“규현아.”

 

성민은 규현의 다음 말이 두려웠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렇게 부정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여 왔던 시간들이 무너져 내릴까봐. 그래서 서둘러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또다시 유예시켜버렸다.

 

“나 새 영화 찍어. 이번에는 주연이다?”
“아…축하해, 형.”

 

규현의 음성에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기색이 들어 있었다. 서로가 잘 되면 기뻐하고, 힘들 땐 달려가 어깨를 쓸어주며 위로해주고, 때로는 함께 공유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웃음 짓기도 하고. 이거면 된 거라고 그 이상을 바래서는 안 되는 거라고 성민은 그렇게 애써 선을 그었다.

 

“크랭크인 들어가면 곧바로 강원도 로케라 자주 못 볼지도 모르겠다.”

 

규현의 먹색 눈동자가 순간 흔들거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전화는 자주 해도 되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해 땅만 내려다보며 운동화 끝을 툭툭 차면서 성민은 대답을 피했다. 촬영하는 곳이 전화도 터지지 않는 아주아주 깊은 산골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너의 목소리에 또다시 흔들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알았어. 형 일하는데 방해 안 할게.”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채 차갑게 빛을 발하는 규현의 실루엣이 하늘에 뜬 가느다란 그믐달처럼 쓸쓸해보였다. ‘추운데 몸조심하고.’ ‘너나 잘해, 임마.’ 장난스럽게 주고받던 말들이 잦아들 무렵 규현이 주머니에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저번에 우리 집에 두고 갔던 거.

 

“갈게.”

 

붙잡을 새도 없이 돌아선 규현은 자기 꺼보다 치수가 작은 점퍼를 불편하게 꼭 껴입은 채였다. 그래도 성민은 굳이 옷을 돌려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마저 없으면 터벅터벅 걸어가는 규현의 뒷모습이 너무나 추워 보일까봐. 그럼 또 마음한 구석이 시려 올까봐. 사그락사그락- 바람에 담쟁이 잎들이 몸을 부대끼며 우는 소리를 냈다. 규현이 손에 쥐어준 사진을 뒤집어본 성민은 끝내 성마른 눈물 한 방울을 떨구어 냈다. 웃고 있는 성민의 사진 밑에 규현의 단정한 필체로 적힌 글자 끝이 둥글게 번져나갔다.

 

‘You're my sunshine.'

 

 

 


Monodrama
Episode 003. Last Concert
Written by. 유리시안

 

 

 

 

 

 


“컷- 오케이!”

 

만족스러운 듯한 감독의 오케이 싸인에 성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시원이 건네는 담요로 몸을 둘렀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대사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번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신예 감독의 까다로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작년 퀴어 영화라는 다소 파격적인 데뷔작으로 세간의 관심을 끈 김희철 감독은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두 번째 영화의 주인공으로 두 신인 남녀 배우를 캐스팅했다. 한쪽은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벗고 성실한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한 성민, 그리고 한쪽은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에서 어린 나이답지 않은 당당한 연기를 선보여 주목 받은 윤한비였다. 제작 발표회 때부터 세 사람이 만나 어떤 조합을 이룰지 궁금해 하는 언론과 영화 관계자들이 몰려 그 열기가 사뭇 대단했었다. 그 때문에 더욱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에 압박을 느끼는 두 신인 배우에게 희철이 충고했다. 여러분이 집중해야 할 것은 카메라 밖의 세계가 아니라 안의 세계입니다- 라고. 그 때 성민은 이번 촬영이 힘은 들겠지만 자신이 성장하는데 큰 발판이 될 거라고 어렴풋이 예감했다.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한 희철이긴 했지만 투철한 프로 정신은 정말 높이 살만했다.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띄는 빨간 터틀넥을 코밑까지 끌어올린 채 카메라 감독과 진지하게 의견을 주고받고 있는 희철을 넌지시 바라보던 성민에게 누군가가 불쑥 커피 잔을 내밀었다.

 

“커피 싫어하시는 거 아니죠?”

 

돌아보니 역시 두꺼운 겨울옷을 이중 삼중으로 덮은 한비였다. 짧은 스커트를 입고도 꿋꿋하게 연기하던 그녀였지만 토끼 모양의 귀마개까지 한 걸보니 아직 어리긴 어리구나 싶었다. 여자배우는 특히 더 괴롭힌다고 소문난 희철에게 시달리느라 자신보다 더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선배라고 대접해주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한 성민이었다.

 

“보온병 한 가득 채워왔으니까 더 드시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아, 고마워.”

 

  저쪽에서는 퉁실퉁실 사람 좋게 생긴 그녀의 매니저가 스텝들에게 커피를 한 잔씩 돌리고 있었다. 신인의 자세 잘 되어 있네. 성민이 농담처럼 한 말에 한비가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첫 미팅이 있던 날, 만나자마자 대뜸 ‘저 오빠 팬이에요.’ 하던 그녀는 싱그러운 스무 살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성민은 자신의 스무 살은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스무 살이면 그토록 염원하던 가수의 꿈을 이룬 역사적인 때인데. 우습게도 모든 기억의 출발은 스물 한 살의 봄으로 맞추어져 있었다. Prince가 다섯 명이던 순간부터.

 

“오빠?”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던 성민은 얼어 있는 손끝을 녹이는 아련한 온기에 그만 왈칵 눈물을 쏟아내었다. 당황한 한비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남 앞에서 함부로 울지 않는 성격인 성민도 당황해 손등으로 눈가를 마구 비볐다. ‘미안. 모래가 눈에 들어 갔나봐.’ 그런 성민에게 내밀어진 건 고운 색감의 손수건. ‘그렇게 닦으면 덧나요.’ 입 꼬리를 살짝 끌어당겨 웃는 그녀는 누군가와 웃는 모습이 많이 닮아 있었다.

 

“답답할 때는 바다에 대고 마음껏 소리치면 조금 후련해져요. 보실래요?”

 

성민이 말릴 새도 없이 한비는 두 손을 확성기처럼 만들어서 소리를 질렀다. 촬영장에 흩어져있던 시선들이 한꺼번에 모이자 그녀는 쑥스럽게 혀를 낼름 내밀었다. 성민은 습한 눈가가 무색하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다 보니 한참 어린 후배에게 위로받은 셈이 되었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윤한비씨 단독 컷 준비해주세요. 아까는 다 죽어가더니 지금 보니까 힘이 남아도는 것 같네요.”

 

냉랭하게 날아든 희철의 말에 잔뜩 울상이 된 한비는 그래도 성민을 향해 씩씩하게 브이를 그려보이고는 메이크업을 고치러 종종 걸음으로 달려갔다. 성민이 들고 있는 손수건에서는 달짝지근한 여자 향수 향이 풍겼다. 한없이 밝고 풋풋한 모습 그 자체로 충분히 예쁜 그녀에게 어른스러운 향수 향은 어울리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아홉의 조규현에게 향수보다는 깨끗한 비누 향이 섞인 체향이 더 잘 어울렸던 것처럼.


성민은 의식적으로 주머니에 넣어 둔 폰을 만지작거렸다. 촬영 내내 폰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은혁과 동해에게서 번갈아 날아오는 안부 문자 외에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건 자신이지만 은근히 기다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떨어져 있으면 정리가 될 줄 알았는데 장황하게 펼쳐진 동해 바다도 성민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형 나는…’

 

그 날 규현이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성민은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입 안 전체에 퍼지는 커피 향이 유달리 쓰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가겠습니다.”

 

규현은 짜증스럽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결국 보다 못한 종운이 휴식 시간을 선포했다. 규현은 길게 한숨을 쉬며 헤드셋을 벗었다. 빵빵하게 돌아가는 난방 탓에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가볍게 생각했던 후속곡 재녹음이 이렇게 진척이 되지 않을 줄 종운도 예상을 못했는지 조금 당황해 하면서도 부스를 나오는 축 처진 규현의 어깨를 추켜 세워주며 격려해주었다.

 

“환절기라 다른 애들도 다들 감기로 고생하고 그래.”

 

콜록, 하고 마른기침을 하는 규현을 위해 뜨끈한 유자차를 한 잔 내오게 한 종운은 탁자 위에 그대로 철푸덕 엎어지는 규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많이 아프냐?’ 규현은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를 억지로 가다듬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픈 곳은 비단 목뿐만이 아니었다. 도무지 떨어진 생각을 안 하는 감기처럼, 머리부터 심장까지 잠식한 열병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겨울 시즌에 맞춘 조금 발랄한 느낌의 후속곡을 위해 텐션을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 규현에게는 꽤나 힘든 과제였다.

 

“너 계속 안 좋으면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병원 싫어하는 거 알잖아.”
“니가 애기냐.”

 

종운의 타박에 규현이 베시시 웃었다. ‘웃지 마, 정들어.’ 아프지 않게 등허리를 철썩 때려주기는 했지만 그 모습이 어쩐지 짠해 보여 마음이 쓰이는 종운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종운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조금이라도 부르기 쉽게 음정을 고쳐주는 일뿐이다. 노래. 그것은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규현이 유일하게 제 감정을 솔직하게 쏟아내는 수단이었다. 그것마저 없다면 규현은 감정의 과잉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노래 없는 조규현? 그것은 지금의 종운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 때 녹음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면서 잔뜩 미안한 정수의 얼굴이 나타났다.

 

“갑자기 속초 쪽에 공연 스케줄이 잡혔어.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해.”

 

 

 

 

 

속초 앞바다가 한 눈에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은 호텔방에 도착하자마자 성민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하루 종일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 촬영에 지친 몸이 여기저기 삐그덕 소리를 내며 아우성쳤다. 씻고 자라는 시원의 말에도 귀찮아-를 연발하던 성민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스프링 튀듯이 침대에서 발딱 일어났다. 짐을 정리하던 시원이 놀라 돌아보자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성민은 후다닥 베란다로 나갔다. 자신이 며칠 내내 전화기를 부여잡고 놓지 않은 걸 시원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에서 전화를 받으면 자신이 누구의 전화를 기다렸는지 시원이 단박에 눈치 챌 것 같아서였다.

 

“…여보세요.”

 

베란다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훅 끼쳐오는 한기에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밖에서 전화를 한 건지 주변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서도 성민의 청각은 용케 색색거리는 낮은 숨소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규현아.”
- ……
“잘 지냈어?”

 

고작 며칠뿐이었는데 몇 년은 못 본 사이 같은 말투에 성민은 실소를 터뜨렸다. 수화기 너머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전기적인 신호로나마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 하나만으로 그 간의 초조함이 싹 가셨다. 이성민. 넌 지독한 이기주의자야. 그건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

 

- 데이트 신청해도 돼?
“어?”

 

뜬금없는 소리에 차가운 바닥을 짚고 있는 맨발을 꼼지락거리던 성민이 놀라 되물었다.

 

-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붙잡고 있는 난간이 품고 있던 냉기가 순식간에 뇌까지 전달되어 사고가 얼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성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난스럽게 나도 보고 싶어, 라고 넘겨버리기에는 규현의 음성이 너무나 진지하고 절절했다.

 

- 나와. 나 지금 호텔 로비야.

 

 

 

 

 

어떻게 된 거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규현이 가지고 온 하얀 패딩 점퍼에 폭 싸인 성민은 그대로 규현에게 이끌려 나왔다. 볼을 스치는 습한 바람에서는 짭조롬한 소금기가 묻어났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터덕터벅 소리 내어 걸으며 저만치 앞서가는 규현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얌전히 주인에게 돌아온 점퍼에는 온통 규현의 향기가 묻어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규현은 피곤한 듯 부은 얼굴을 감추기 위해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을 쓴 규현의 모습은 처음이었지만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깔끔한 검은 수트에 롱코트 차림과 매치되면서 이지적으로 보였다. 자꾸 처지는 성민이 신경 쓰이는지 가던 길을 되짚어 돌아온 규현이 한 손을 쓱 내밀었다. 영문을 모르는 성민이 멀뚱히 보고만 있자 규현이 먼저 성민의 손을 잡아끌었다. 낯간지러운 느낌에 손을 뺄까말까 망설이던 성민은 코를 한 번 훌쩍거리고는 규현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 걸었다. 성민의 손을 꽉 쥐고 있는 커다란 손에는 미적지근한 온기가 남아있어 손난로를 쥐고 있는 것처럼 온 몸에 나른한 기운이 퍼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따스함이 좋아서, 머리를 배반한 성민의 손은 끝내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잊었어요. 내가 왜 이러는지 난 모르죠…”

 

규현은 나지막하게 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래 위에 삐뚤빼뚤 겹쳐 찍히고 있는 네 개의 발자국을 이따금씩 파도가 밀려와 쓸어가곤 했다.

 

이래서는 안 되는걸 난 알아요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죠
나의 서툰 고백이 그대를 더 아프게 할 뿐이라는 걸

 

그 동안 규현이 노래하는 걸 수도 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없는 밤 바닷가에서 별빛을 조명삼아 파도 소리를 반주삼아 듣는 노래는 색다른 감동이었다. 도시의 하늘과는 비교할 수 없이 수많은 별들이 장막처럼 펼쳐진 하늘에 흩뿌려진 오늘 같은 밤이면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빛에 취해서- 라는 그럴싸한 핑계를 댈 수 있으므로.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고 있기에-

 

유난히 동공이 까만 규현의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와 닿았을 때 성민은 피할 겨를도 없이 그 올곧은 시선에 사로잡혔다. 줄곧 자신을 따라다니는 눈빛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찬바람에 하얗게 질린 규현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 되어 있었다. 붙잡고 있는 손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입을 열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규현은 끝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촬영은 할 만해?”

 

다시 일상적인 얘기. 성민은 감싸주던 온기가 사라져 허전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바다 쪽으로 돌아선 규현의 코트 자락이 바람에 어지러이 휘날렸다. ‘그럭저럭. 감독님이 깐깐하시긴 하지만 배울 점이 많아.’ 한 번 따스함을 자각한 손이 추위에 노출 되는 것을 거부해 성민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않고 어깨만 더 움츠렸다. 규현이 습관적으로 성민의 머리 쪽으로 손을 올렸다가 움찔- 하고 다시 거두었다.

 

“개봉하면 공짜로 보여 줄 거지?”
“너만 빼고.”
“뭐야, 치사하게.”

 

넌 자꾸 날 속상하게 만들어서 미우니까. 성민은 규현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입을 삐죽거리다가 갑자기 규현이 확 옆으로 돌아보자 놀라 입을 합 다물었다. ‘진짜 나 초대 안 할 거야?’ 슬금슬금 다가오는 규현에 뒷걸음질 치면서 성민은 오기로 밀어붙였다. ‘다, 당연하지. 넌 돈 내고 봐!’ 순간 규현의 한쪽 입 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가는 걸 캐치하고 도망가려던 성민은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 발 늦고 말았다.

 

“으앗, 하지 마! 하지 마!”

 

규현의 힘에 끌려 바다에 들어간 성민은 울상이 된 채 무릎까지 흠뻑 젖은 청바지를 질질 끌며 걸어 나왔다. ‘조규현 너어~!!’ 복수한답시고 성민이 손으로 바닷물을 떠서 다가오자 규현은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형 안돼에~이거 협찬 이란 말이야!’ 뛰어오면서 반쯤 흘리긴 했지만 그래도 기어이 규현에게 물을 뿌린 성민은 통쾌하게 웃어 젖혔다. 맑게 퍼지는 웃음소리에 물기를 먹고 축 쳐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규현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그러나 그 웃음 끝에 번지는 옅은 소금기를 규현은 애써 감추었다.

 

“형이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시사회에서 날 보게 될 걸.”
“그게 무슨 말이야.”
“형네 영화 OST에 참여하기로 했거든.”
“정말?!”

 

‘아직 확정 된 건 아니지만 정수형이 계약서에 싸인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까.’라는 뒷말은 성민이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미처 하지 못한 규현은 볼을 긁적거렸다. 성민은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근사한 일이였다. 자신이 연기를 담은 영상에 규현의 노래가 덧입혀져 진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시종일관 차분하고 나른한 분위기를 이어가는 영화와 애절함과 담담함이 교차되는 규현의 보이스는 잘 어우러질 여지가 충분하다고 믿었다.

 

“아~ 서울 돌아가기 싫다.”

 

규현이 기지개를 쭉 켜며 정말 가기 싫은 뉘앙스를 팍팍 풍기면서 말했다. 지방 스케줄은 힘들 긴 하지만 답답한 서울에서 벗어난 다는 점 한 가지에서는 좋았다. 성민도 며칠 한적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지내다 보니 나중에 끝나고 서울로 돌아갈 일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내일도 스케줄 있어?”
“라디오 하나에 인터뷰 두 개. 저녁에는 음악방송 녹화.”

 

이왕 온 거 하루만이라도 푹 쉬고 가라고 하고 싶은데 여건상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그렇게 무리하다가 병날라. 성민이 걱정 반 섞어서 농담처럼 건넨 말에 규현이 힘없이 웃었다. ‘지금도 아파.’그 말에 성민이 놀라 어디가 아프냐고 묻자 규현이 제 입술을 죽 내밀며 가리켰다. 여기.


‘이 자식이!’ 낄낄거리는 규현의 옆구리를 아프게 한 대 가격한 성민은 한 편으로는 허옇게 튼 규현의 입술이 마음에 걸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다행히 늘 가지고 다니는 립글로즈의 동그란 촉감이 손끝에 잡혔다.

 

“가만히 있어봐.”

 

성민은 규현의 어깨를 잡아 키를 낮춘 뒤, 입술 선을 따라 립글로즈를 손수 발라 주었다. 규현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는 성민은 무엇보다 진지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번들거리는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한 번 닦아내는 감촉에 규현은 머리끝이 쭈뼛하고 서는 전율을 느꼈다. 달콤하게 풍기는 체리 향에 이성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마비되어버렸다. 툭- 손목이 강한 힘에 결박되는 순간 뚜껑도 덮지 않은 립글로즈가 모래 위로 떨어졌다.

 

“으읍-”

 

규현이 시선을 살짝 내리깔자 성민의 긴 속눈썹이 제가 내뱉는 숨결을 따라 하늘거리고 있었다. 정신이 몽롱하여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현실 세계에 있는 것인지 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저 체리맛 립글로즈의 향과 바람에 섞인 소금 향, 순한 성민의 체향 등이 뒤범벅되어 규현의 후각을 괴롭힐 뿐이었다. 여기서 성민을 놓아주면 가벼운 장난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마냥 착하기만 한 그는 질 나쁜 장난이라고 질책 한 번 하지 않고 웃어넘기겠지. 하지만 규현은 자꾸만 물러서려는 성민을 저지하면서 고집스러운 아이처럼 매달렸다. 뜨거운 혀가 치열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규현에게 붙잡힌 성민의 손목이 바르르 떨렸다.

 

“사과는…하지 않을래.”

 

한참 뒤에 성민을 놓아준 규현은 손등으로 입술을 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무심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뺨이라도 한 대 칠 줄 알았는데 성민은 석고상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아무런 리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자조 섞인 조소를 지으며 뒷걸음질 치던 규현은 이윽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위태로운 뒷모습이 어둠속으로 완전히 잠기고 나서야 다리에 힘이 풀린 성민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꿈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또 스스로가 만족할만한 변명거리를 찾느라 애쓰겠지. 별빛에 취했노라고. 서로의 향기에 취했노라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규현은 내내 죽은 듯이 잤다. 공연을 마치자마자 사라진 규현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옷에 소금기와 모래를 잔뜩 묻히고 돌아왔다. 무리하게 잡힌 지방 스케줄이라 내심 미안해하고 있던 정수는 지친 모습으로 돌아온 규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초에 도착해서 근처에 성민이 속한 영화 촬영 팀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밤새 성민과 함께 있었을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규현은 계속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혹시 둘이 싸우기라도 했나 싶어 걱정되는 마음에 시원에게 전화를 해보았더니 성민은 일출 씬을 찍기 위해 새벽부터 촬영에 들어가서 바쁘다고 했다. 이번 일 뿐만 아니라 요즘 들어 규현이 급격히 다운 된 이유를 알 길이 없는 정수는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깼어?”

 

서울 톨게이트에 들어설 때쯤 부스스 일어난 규현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정수를 불렀다. 형, 나 물 좀. 그러나 머리로 생각하고 있는 단어들이 말로 나가지 않자 규현은 당황했다. 콜록, 하고 기침을 하는 순간 비릿한 내음이 물씬 올라오면서 무언가 기분 나쁘게 끈적한 것이 입술 새로 주륵- 흘렀다.

 

“규현아!!”

 

경악에 찬 정수의 외침이 규현의 머릿속에 쨍 하고 울렸다. 뭘까. 이런 불쾌한 예감.

 

 

 

 

 

 

한비는 하루 종일 멍한 상태인 성민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벌써 몇 번째 대사를 실수하는 바람에 결국 희철이 잠시 촬영을 중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촬영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성민의 곁으로 한비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고등학교 시절, 남몰래 좋아한 가수는 학업과 연기 수업을 병행하면서 지쳐가던 한비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 때는 이렇게 자신의 첫 영화에 상대역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가까이서 본 성민은 정말 꾸밈없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좋아지게 되는 걸지도. 한비가 다가서자 성민은 자신 때문에 촬영이 지연 되는 게 미안한 듯 약하게 웃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의 아기자기한 소년 같은 외모는 변하지 않는 듯 했다.

 

“가끔 그런 날이 있어요. 감정도 잘 안 잡히고 대사도 막 꼬이는.”

 

서툴게나마 위로를 건네는 한비의 긴 생머리가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긴 손가락에서, 성민을 향해 싱긋 웃는 그 얼굴에서 자꾸만 누군가의 모습이 흔적처럼 아련하게 겹쳐 보여 성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규현이 온통 들쑤시고 지나간 자리가 아파왔다. 부르튼 입술도, 헤진 심장도.

 

“널 만난 뒤로 모든 것이 엉망이야. 제멋대로인 심장 박동만큼 불쾌한 건 없거든.”

 

성민이 가만히 읊조린 것이 대사라는 걸 눈치 챈 한비는 갑작스러운 시작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다음 대사를 이어나갔다.

 

“일정하게 뛰는 심장은 곧 죽음을 의미해.”
“알아. 난 언제나 죽음의 가장자리를 맴돌아 왔으니까. 지금도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네가 지금 느끼는 그 감정, 그게 네가 살아있다는 증거야.”

 

한비는 성민이 온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음을 느꼈다. 비스듬히 비껴난 시선의 끝을 허공에 둔 채 성민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대사를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널 향한 이 모든 느낌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너는 왜 나를 그토록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지. 나는 왜 네 말 한 마디, 작은 손짓 하나에 예고 없이 가슴이 뛰는지. 너는 왜 그날 밤 내게 입을 맞추었는지. 나는 왜 너의 입술을 거부하지 못했는지.

 

“모르는 척 하려고 하지 마.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한비의 다음 대사에 성민은 숨 쉬는 것을 잊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날 때의 느낌과도 같았다.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억지로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화원의 열쇠를 감춘 것은 다름 아닌 성민 자신이었다. 자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비밀의 문 앞에서 망설였던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지상 낙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답은…?”

 

성민의 목소리가 환희로 가볍게 떨렸다. 한비는 의아해 하면서도 이 장면의 마지막 대사를 또렷하게 말했다. 사랑. 그것이 모든 의문의 시작이자 해답이야.

 

scene #123. 그, 그녀에 대한 마음을 비로소 정의(正義)하다. 성민이 들고 있던 대본이 바람에 요란하게 펄럭거렸다.

 

 

 

 

 

 

‘규현아, 규현아!’

 

오랜만에 기분 좋게 단잠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가 다급하게 흔들어 깨웠다. 몽롱한 정신으로도 그 손길의 주인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챈 규현은 무겁기 만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흐릿하던 시야에 점점 초점이 잡히면서 잔뜩 들뜬 얼굴의 성민이 들어왔다. 바깥에 나갔다 오기라도 한 건지 성민에게서 폴폴 풍기는 한기에 몸을 절로 부르르 떨렸다. 자꾸만 이불 속으로 파고들려는 규현을 잡아끌면서 성민이 외쳤다.

 

‘밖에 눈 와. 첫 눈이야!!’

 

결국 억지로 침대에서 끌려나온 규현은 성민을 따라 거실에서 한데 엉켜 자고 있는 은혁 동해 콤비를 지나 베란다로 나갔다.  성민의 말 대로 올해의 첫 눈이 탐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밤사이 신천지처럼 하얗게 변한 바깥 풍경에 규현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첫 눈에 감동할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 보다. 옆에서 아이처럼 좋아하는 성민을 보니 아침마다 습관처럼 엄습해오던 두통도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좋다, 그치?’

 

춥지도 않은지 창문까지 열고 소리 없이 날리는 눈송이를 향해 팔을 뻗으며 성민이 규현의 동의를 구했다. 손바닥에 닿는 눈송이의 차가운 감촉에 눈을 찡그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성민은 눈보다 더 깨끗하고 순수해 보였다. 이른 새벽의 고요함에 세상의 더러움과 함께 소리마저 덮어버리는 눈의 효과가 더해져 서로의 숨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리는 이 순간. 왠지 모르게 밀려드는 벅찬 감격에 규현은 눈처럼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응, 너무 예쁘다.’

 

눈보다 형이 더.

 

‘나중에 쟤네 깨워서 눈싸움 할까?’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구.’
‘뭐야, 영감 같이.’
‘제대로 사랑스러운 막내한테 웬 영감.’

 

‘우, 조규현 타락했어.’ 얄미운 듯 눈을 흘기면서도 규현의 주름진 미간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발꿈치를 들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주었다. 언제쯤 괜찮아지려나. 대신 아파 줄 수도 없고. 차가운 성민의 손끝에서 나는 싸한 눈 내음에 규현은 저도 모르게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첫 눈, 첫 사랑, 첫 키스… 이런 말들에 가슴 설레던 스물. 내리는 눈처럼 소복소복 심장에 쌓이는 것이 무엇인지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규현아, 괜찮겠어?’

 

무대에 오르기 직전이라 다들 분주한 가운데 구석에 조용히 기대 서있던 규현의 옷소매를 당기며 성민이 물었다. 정수가 급하게 나가서 사온 약을 먹긴 먹었는데 어째 약 기운이 더 사람을 처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규현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안절부절 못하던 성민이 제 어깨를 톡톡 쳤다. 기대라고?

 

‘메이크업 다 묻을 텐데.’
‘괜찮아. 5분이라도 편하게 있어. 너 지금 머리 엄청 무겁잖아.’

 

아픈 걸 감추려고 평소보다 더 두껍게 한 메이크업 탓에 하얗게 떠서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도 끝까지 무대에 서겠다는 막내의 고집에 형들이 모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특히 잔병치레가 많아 늘 간호 받는 입장이던 성민은 자신이 아프면 주변 사람이 더 힘들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중이었다. 제일 건강하던 녀석이 아파서 낑낑거리는 걸 보니 마음이 쓰여 죽을 것 같았다.


‘그럼 잠시만 빌릴게.’ 그 말과 함께 툭, 하고 규현이 이마를 성민의 어깨 위로 떨구었다. 온 몸에서 나는 후끈한 열기와 괴로운 듯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지자 성민은 입술을 꼬옥 깨물며 땀에 젖은 규현의 뒷목을 쓸어주었다. 그 서늘한 감촉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규현이 맹맹하게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엄마 같다.’

 

생각해보니 규현이 멤버들 가운데 유일하게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외교관인 아버지와 대사관 직원인 어머니는 규현이 어렸을 때부터 한국보다 외국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했다. 누나의 손에서 길러졌다시피 한 규현은 그래서인지 또래보다 조숙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외로움을 잘 타기도 했다. 이제 가족보다 가까운 멤버들이 있으니 많이 의지해줬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연 것 같지 않아 성민은 때때로 안타까웠다.

 

‘규현아 있잖아. 가끔은 지금처럼 형에게 마음 놓고 기대도 좋아.’

 

우린 한 팀이잖아. 성민의 그 말이 규현을 슬프게 했다. 내가 만약 Prince의 규현이 아니라 그냥 조규현이라도? 그 때도 지금처럼 따뜻하게 안아 줄 거야?

 

‘Prince 스탠바이 해주세요.’

 

스텝의 말에 규현이 성민에게 기대고 있던 머리를 일으켜 세웠다. ‘안 무거웠어?’ ‘어깨 내려앉는 줄 알았다.’ ‘설마. 내 머리가 얼마나 작은데.’ 규현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성민은 헤드마이크를 끼며 한 마디 했다.

 

‘그런 농담 하는 거 보니 아픈 거 다 나았나 보구나.’

 

코디에게 간단하게 메이크업 수정을 부탁하던 규현이 반박하는 대신에 그냥 웃어 넘겼다. 성민의 말처럼 무겁게 축축 늘어지던 몸이 거짓말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편하게 받혀주려고 애쓰던 좁은 어깨와 토닥거려주는 작은 손길, 즐겨 쓰는 불가리의 달큰한 향기, 그것만으로 무대에서 쏟아낼 에너지는 충분히 보충되었다.

 

'프린스, 프린스, 가자!'

 

힘찬 파이팅과 함께 터질 듯한 함성 속으로 몸을 던질 준비를 마친 규현은 성민과 눈이 마주치자 안심하라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이 무대가 끝나면 마음껏 어리광을 부려야지. 지금 나는 형에게 있어 아껴줘야 할 소중한 멤버니까. 조금…악용하더라도 용서해줘.

 

 

 

 

 


그냥 예전처럼 ‘소중한 우리 막내’라는 타이틀에 만족할 걸 그랬나봐.
나 너무 지나친 욕심을 부린 걸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커져 가는 마음은 나도 어쩔 수 없었어.

 

 


형, 성민이형…

 

 

 

 

Monodrama
Episode 003. Last Concert
Written by. 유리시안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 것도 못하고
이 더딘 시간을 지켜보죠.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있기에…

 


늦은 시각이라 한산한 카페에는 때마침 규현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구석에 앉아있는 정수를 발견하고 다가가 반갑게 인사하려던 영운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조용히 맞은편에 앉았다.

 

“어, 왔어?”
“무슨 일 이야.”

 

고개를 든 정수의 눈가가 붉은 걸 본 영운이 다짜고짜 무슨 일인지 부터 물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정수와 관련된 일이면 예민해지는 그였기에 덩달아 표정이 굳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직감적으로 안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안 영운은 입술만 지그시 깨물고 있는 정수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아, 울지만 말고 말을 해보라니까!”

 

기어이 정수의 눈동자가 묽게 부풀어 올랐다. 규현 앞에서는 힘들게 참은 눈물이 영운을 보자 안심하고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말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정수의 모습에 영운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영운은 답답함에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앞에 놓인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어떡해. 우리 규현이 어떡해, 인아.”

 

  떨리는 입술로 정수가 겨우 내어놓은 말에 영운은 마신 물을 도로 게워낼 뻔 했다. 뭐? 형 지금 뭐라고 했어?

 

“규현이 아프대…흐윽…후두암이래…”

 

영운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믿고 싶었다. 조규현 그 병신 같은 녀석이 뭐 어떻다고? 정수는 차마 다음 말은 잇지 못하겠는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흐느꼈다. 절정 부분에 다다라 카랑하게 울리는 규현의 목소리가 딴 세계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후두암? 그게 뭐였더라. 어떤 사고도 거부한 영운의 머릿속에 한 단어만이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형, 만약 노래를 못하게 되면 난 아마 질식해서 죽을지도 몰라.’
‘노래가 무슨 산소냐. 질식해서 죽게.’
‘아씨, 난 지금 진지하단 말이야.’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앉아 있던 영운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흐느적거리는 정수를 억지로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가자.”
“인아!”
“규현이 지금 어딨어.”

 

뭐 이런 엿 같은 세상이 다 있냐.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그 녀석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난 것도 못 주면서…

 

“형, 알지. 노래 못하면 걔 죽어.”

 

…제일 소중한 걸 빼앗아 가면 어떡해.

 

 

 

 

 


목이 오래 전부터 아팠을 텐데 왜 병원에…목에서 이물감이…음식을 거의 못 먹었을…종양이 성대 아래쪽부터…당장 수술을…

 

토막토막 잘린 말들이 웅웅거리며 규현을 괴롭혔다. 의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정수가 왜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온기 하나 없이 썰렁하기만 집이 싫을 때도 많았지만 소독약 냄새나는 병원보다는 백 배 나았다. 병원에 관해서는 정말이지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같이 밴드부를 하던 친구가 오토바이 사고로 응급실에 실려와 죽은 후로 규현은 두 번 다시 병원을 찾지 않았다.

 

‘가수 생활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규현씨 같은 경우는 암세포가 다른 기관으로 전이되는 걸 막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참 우스운 말이었다. 살기 위해서 목소리를 포기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가진 전부를 버리라고 하면…나는 어떻게 살아요? 침착하게 설명해주던 젊은 의사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유감입니다만 저희로서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규현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규현을 압박해왔다. 병원에서는 휴대 전화 사용 금지라는 명목 때문에 외부로 연락할 길이 막힌 규현은 견디지 못하고 몰래 병실을 빠져나와 1층 로비에 설치된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다. 규현은 급한 마음에 무슨 말을 할지 준비도 하지 않고 익숙한 여덟 자리 번호부터 덜컥 눌렀다.

 

- 여보세요.
“…………”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울컥, 하고 치받는 느낌에 규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숨죽여 수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혹여 작은 숨소리라도 들릴까 해서.

 

- 여보세요?

 

형, 형, 사실 난 형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그런데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하지 못할 것 같아. 어쩌지?

 

- 전화를 거셨으면 말씀을 하세요.

 

  행여 작은 소리라도 새어 나갈까 규현은 입을 막은 채 울음을 삼켰다. 토해내지 못한 응어리들이 걸리는 바람에 검사를 하느라 여기저기 쑤셔진 목안이 쓰라렸다.

 

지금 말할 거니까 잘 들어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야.

 

“………사랑해.”

 

  뚜--뚜-- 공중에 떨어진 수화기에서는 전화가 끊어졌음을 알리는 기계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바닥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규현은 그제 서야 소리 없이 오열했다.

 

내 인생, 내 전부를 잃어도 좋아. 하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형을 잃는 거였어. 안녕, 내 첫사랑. 이제는 예쁜 추억으로만 간직할게.

 

 

 

 

 


성민은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 감출 수 없었다. 아까 걸려온 전화는 그냥 누군가의 장난이겠거니 하고 넘겼지만 며칠 째 꺼져있는 규현의 휴대폰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쉬는 시간마다 전화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성민이 이상한지 한비가 기다리는 전화라도 있냐고 물어도 성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만 했다. 기다리는 게 아니야. 내가 기다리게 하고 있는 거지. 내가 깨닫기 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너에게 기다림의 고통을 안겨준 건지. 전화로라도 얼른 말해주고 싶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혼자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고.

 

  - 고객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 됩니다…

 

그러나 벌써 몇 십번 째 기계적인 여자의 목소리만 반복해서 들릴 뿐이었다. 성민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폴더를 접었다. 그래,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     *

 

 


‘사랑이 시작할 때’

 

영운은 영화 팸플릿을 성의 없이 대강대강 훑어보고는 그냥 덮어버렸다. 역시 멜로물은 취향에 안 맞다니까. 그렇지만 시사회 초대까지 받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 일단 오긴 왔다. 세게 틀어놓은 난방 시설 탓에 후끈후끈한 실내 공기에 영운은 입고 온 코트를 벗어 들었다. 시즌이 시즌이니만큼 영화관 여기저기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은 게 눈에 띄었다.

 

“형, 여기야 여기!”

 

자기들이 주인공인냥 멋지게 정장을 빼입고 온 은혁과 동해가 영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들을 알아본 몇 몇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잘 지냈어?”
“응. 요즘 애들 후속곡 안무 짜느라 좀 바빠. 형은?”
“나야 늘 똑같지 뭐.”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네. 이렇게 다 모이는 거. 동해의 말에 뭐라고 토를 달려던 은혁이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하려던 말이 무슨 말인지 짐작한 영운도 헛기침으로 대신 할 뿐이었다. 입 밖으로는 내지는 않지만 세 사람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빠진 한 사람의 빈자리가 크다는 것을.

 

“들어가자.”

 

영운은 침울해진 두 동생의 어깨를 다독거려주었다. 네 사람으로 출발한 팀이었지만 이제는 다섯이 아니면 퍼즐 조각이 하나 빠진 것처럼 허전했다. 바깥에는 올해의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믿고 싶다. 너도 어딘가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첫눈을 맞이하고 있을 거라고.

 

 

 


인생의 마지막에서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성민의 나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되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사람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남자와 그의 오랜 친구, 단 두 사람뿐이었다. 언제나처럼 영화감독답지 않은 튀는 차림의 희철과 히로인답게 한껏 멋을 낸 한비 사이에서 성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 그거 알아? 죽을 만큼 따분하고 재미없는 게 죽음이야. 결국 남는 건 권태뿐이라는 거지. 아무 것도 하기가 싫거든.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으니까.

 

사각 프레임 속의 남자는 담담하다 못해 나른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관객들을 향해 대사를 던졌다. 힐을 한 손에 걸친 채 맨발로 젖은 모래를 걷다가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는 여자와 대조적으로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 보이는 남자를 위로하듯이 영화의 메인 테마곡이 흐르기 시작했다.


순간 팔걸이 위에 올려져 있던 성민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가사 없이 가벼운 허밍만으로 이어지는 노래. 슬픔과 연민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피아노 선율 위에 조심스럽게 녹아든 목소리는 너무나 그리운 것이었다.


  조규현은 증발했다. 말 그대로 깨끗하게, 흔적도 없이. 규현의 전화는 여전히 불통이고, 비밀번호가 바뀌지 않은 그의 집에는 싸늘하게 식은 채 시간이 멈춰 있다. 돌연 방송 활동을 중단하고 잠적한 규현에 대해 온갖 추측성 난무한 기사들이 쏟아졌지만 곧 유명 여자 연예인의 스캔들에 묻혀 잠잠해졌다. 정수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기획사에서도 이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었고, 누구보다 가장 당황했을 그의 팬들은 한동안 시끌하게 논쟁을 벌이다가 계절이 거의 한 바퀴를 돌 때쯤 대부분이 잊거나, 떠나거나, 남아서 기다리는 쪽 중 한 가지를 택했다.


성민은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영화에 집중했다. 사계절의 풍경을 다 담아내려는 희철의 욕심에 촬영은 중간 중간 휴식 기간을 포함해 1년 넘게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제일 처음 촬영 했던 그 바닷가에서 주인공이 죽는 씬을 찍은 후, 체력도 정신력도 모두 소진해버린 성민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규현이 어디 있어요?’
‘나도 몰라. 알면 진즉에 찾아가서 속 좀 그만 썩이라고 실컷 패줬지.’

 

푹 눌러쓴 캡 모자 아래 수척한 얼굴을 한 성민 앞에서 영운은 줄담배를 피워댔다. 영운은 규현의 행방에 대해서 정말 모르는 것 같았지만 뭔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정수 형은요?’
‘형도 몰라. 안 그래도 지금 찾으려고 애쓰고 있어.’

 

후우- 답답한 마음을 연기에 실어 길게 내뱉은 영운은 손가락으로 담뱃재를 톡 털며 성민을 불렀다.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연기처럼 진중한 부름이었다.

 

‘성민아.’
‘…………’
‘네가 이해해라. 그 동안 규현이 많이 힘들었어.’

 

그 말끝에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이의 어떤 원망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성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 채 입술만 잘근거릴 뿐이었다.


그 뒤 성민은 정신없이 스케줄에 매달렸다. 인터뷰, 카탈로그 촬영, 영화 홍보, 라디오, TV 출연…빡빡하게 짜여진 일정을 기계처럼 소화해내는 성민을 보며 시원은 혀를 내둘렀다. 마치 일에 미친 사람처럼 성민은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을 일체 가지지 않으려 했다.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요?’

 

종운은 한참을 망설인 끝에 CD를 넘겨주었다. 결국 영화의 주제곡은 규현이 허밍으로 가이드 보컬만 녹음한 가사도, 제목도 없는 곡으로 결정 되었다.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 성민에게 희철이 항복하고 만 것이다. ‘성민씨 덕분에 처음으로 미완성곡도 써보고 좋네요.’ 비꼬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투였지만 희철도 오히려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곡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 왜…이제 와서…자꾸 살고 싶게 만드는 거야!

 

거친 겨울바람 위로 남자의 절규가 오버랩 되었다. 뒤늦게 깨어난 생의 감각은 남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하얗게 펼쳐진 눈밭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남자의 볼을 따라 눈보다 더 시린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 왜 하필 나였니.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건 아픔밖에 없는데.

 

우리 막내도 많이 아팠겠다. 나도 지금 이렇게 아픈데…

 

- 미안해,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해, 규현아. 그 동안 날 향한 네 마음, 널 향한 내 마음을 애써 외면하려했던 나를 용서해줘.

 

- 그리고……사랑해, 연아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야.

 

넌 지금 어디에 있니? 보고 싶어. 네가 너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고 모두가 일어나 박수를 치는 가운데 성민만이 망연하게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Song by. 조규현’ 짧게 스쳐지나가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Monodrama
Episode 003. Last Concert
Written by. 유리시안

 

 

 

 

이번 영화가 호평을 받고 있는데 소감은?
- 감독님과 스텝여러분 모두 고생하셨는데 좋은 결과가 나와서 기분이 좋아요.


성민씨의 연기에 대해서도 칭찬이 자자하던데.
- 그 점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따름이에요. 아직 정말 많이 부족한걸요. 이번 작품을 만난 것이 제게 큰 행운이었어요. 앞으로 계속 배워나가야죠.


상대역이었던 윤한비씨에 대해 말하자면?
- 아직 어리지만 정말 재능이 많은 친구에요. 어떨 때는 오히려 제가 배워야 할 부분도 보이구요. 또 성격이 밝아서 촬영장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 한몫했죠.


촬영이 1년 가까이 이어졌는데 힘들지 않았나?
- 겨울에서 시작해 겨울로 끝나는 긴 여정을 담아내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거의 지방 로케 촬영이라 육체적으로 힘들기는 했지만 다들 즐겁게 촬영에 임했던 것 같아요. 다만 휴식 기간을 마치고 다시 촬영에 들어갈 때 감정 이입을 새롭게 해야 해서 조금 힘든 었던 것도 없지 않아 있었어요.


촬영 중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 봄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진해에 벚꽃이 굉장히 많이 피어있는 곳에서 찍었거든요. 감독님이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하셔서 마스크에 목도리에 완전 무장을 하고 촬영했던 기억이 나요. 잘 아시겠지만 저희 감독님이 스타일을 좀 중요시하시잖아요(웃음)


배우가 된 걸 후회한 적은 없는지.
- 아직은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재미있고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아요. 가끔 옛날이 그리워질 때가 있긴 하지만요. 그건 정말 가끔이에요.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배우.


같은 멤버였던 조규현씨의 관한 소식을 들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없나.
- 안타깝지만 그건 저도 잘 모르는 부분이에요. 다만 규현이의 결정을 존중할 뿐입니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혹시 현재 여자친구는 있는지. 많은 여성들이 궁금해하는 사항이다.
- 여자친구는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아직 용기가 부족해 마음을 전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꼭 말하고 싶어요. 이제 서로의 뒤만 바라보는 대신 마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에요.


Zoom In 신년 특집 호 인터뷰 기사 中

 

 

 

 

 


똑똑, 노크소리에 창가에 서서 눈 구경을 하던 남자가 돌아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수더분한 인상의 간호사였다. 남자가 눈짓으로 인사를 하자 그녀가 익숙한 듯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1년 전 일이었다.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암 제거 수술을 받은 환자 하나가 비밀리에 이곳으로 이송 된 것은. 그를 데리고 온 담당 의사는 다름 아닌 그녀의 아들이었다.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고 싶대요.’ 그리고 이름도, 직업도 가르쳐 주지 않은 채 덩그러니 환자만 남겨두고 떠났다. 그가 가수였다는 것과, 세상의 눈을 피해 이름 없는 지방의 작은 병원으로 도망치듯 왔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러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충격으로 삐뚤어질 법도 한데, 의외로 그는 병원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어린 나이에 말을 잃은 것이 안쓰러워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이 이것저것 챙겨주기라도 할라치면 얌전하게 웃으며 화답하기도 했다. 쪽지를 써서 간호사 누나들에게 장난을 치기도 했으며, 가끔은 서툴게 배운 수화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그러나 언제나 조그맣게 틀어놓는 라디오에서 익숙한 노래들이 흘러나올 때나 병원에 한 대 뿐인 TV에서 간혹 낯익은 얼굴이 스칠 때면 어김없이 표정이 어두워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보는 이의 마음마저 저리하게 하는 알 수 없는 슬픔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눈이라니까 괜히 설레네. 이 나이에 주책맞게.”

 

옆에 서서 같이 하얗게 물든 바깥세상을 내다보면서 그녀가 하는 말에 규현은 소리 없이 웃었다.

 

“……서울에서 손님이 왔어.”

 

그러나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꺼낸 말에 규현의 표정이 차츰 굳었다.

 

 

 

 

 


성민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무작정 차를 몰았다. 수습을 하느라 진땀 뺄 시원에게는 미안하지만 성민은 한시가 급했다.

 

‘사실은…규현이가 좀 아프다. 수술을 받았어. 목숨을 건진 게 다행이래. 대신…말을 못해. 그러니까, 어…목소리가…’

 

영운은 목을 가다듬느라 몇 번이나 말을 멈추었다. 운전대를 붙잡은 성민의 손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닦아낼 새도 없었다.

 

‘수술 받자마자 말도 없이 사라졌어. 아무래도 충격이 컸겠지. 노래가 전부였던 애니까.’

 

영운은 정수가 어렵게 알아낸 주소가 적힌 종이를 성민에게 건네며 덧붙였다. 이제 네가 그 아이의 전부가 되어 줘.

 

‘너 예뻐서 알려주는 거 아냐. 단지 이제 그 녀석 행복한 모습 보고 싶을 뿐이야.’

 

“흐읍…”

 

앙다문 잇새로 울음이 자꾸 터져 나오려 했다. 누가 그런 거 혼자 감당하래. 나만 바보로 만들고 혼자 그렇게 끌어안고 아파하면 누가 좋아할 줄 알았어? 말도 없이 떠나 버린 널 왜 미워하지도 못하게 하니.

 

 

 

 

 


“조규현.”

 

너무도 그리운 이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규현은 돌아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왜? 어떻게? 그런 물음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성민이 병실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규현의 그 동안 잠들어 있던 모든 감각들이 한꺼번에 깨어나 그를 향해 반응하기 시작했으니까. 다른 생각들은 끼어들 겨를이 없었다.

 

“규현아…”

 

처음부터 눅눅하게 젖어 있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울먹임으로 끝을 맺었다. 규현은 어떤 얼굴로 돌아봐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삭히고, 삭혀 무뎌진 줄로만 알았던 격정어린 감정의 파편들이 뜻하지 않은 재회에 날카롭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대로라면 또 다시 성민에게 상처만 주게 될지도 몰랐다.

 

“……!!”

 

갑자기 뒤에서 와락 끌어안아버리는 성민에 당황한 규현은 밀쳐내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질 것 같은 마른 등이 안타까워 성민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숨을 들이 마시자 푸르스름한 병원 복에 벤 독한 약 냄새보다 그토록 그리고 갈구했던 체향이 강하게 코끝을 찔러댔다. 진짜 우리 규현이 맞구나. 그 동안 그리고 또 그리던 네가 맞구나. 우리 함께한 5년이라는 시간보다 떨어져 있었던 1년이라는 시간이 나에게는 더 더디게 느껴졌어.

 

“미안해.”

 

규현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미약한 들썩거림과 함께. 성민이 흘린 눈물이 스며든 심장이 상처에 소독약을 바른 것처럼 따끔거렸다. 형이 대체 뭐가 미안한데. 규현은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성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달래주고 싶었다. 하지만 과연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성민에게 강제로 키스를 한 그날, 이미 그에게 있어 팀 동료이자 착한 동생이기를 포기했으므로. 난 형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해. 내가 바보 같이 뭐든지 늦게 알아서. 네가 아픈 것도, 또 내가 널…친한 동생 이상으로 좋아한다는 것도.”

 

쿵- 규현은 심장이 끝도 없이 추락하는 줄 알았다. 형, 지금…뭐라고 했어? 하얗게 얼어버린 규현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서렸다. 목각 인형처럼 삐그덕 소리가 날정도로 천천히 돌아선 규현은 눈물범벅이 되어 엉망인 성민과 드디어 마주했다. 오랜만이라는 말조차 무색할 정도로 두 사람에게는 서로가 부재(不在)한 시간들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한 번만 더 말해줘.

 

입은 움직이지만 공기의 진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 모습에 성민은 또 한 번 격하게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충격의 강도가 달랐다. 내가 이만큼 마음이 아픈데 넌 얼마나 괴로웠을까. 성민은 입술 끝이 덜덜 떨리는 걸 피가 날 정도로 즈려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규현 앞에서 목놓아 울어버릴 것 같았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나인데 왜 너만 이렇게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하는 건지. 그게 또 마냥 미안해서 성민은 규현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 동선을 따라 눈물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후두둑 낙하했다.

 

형, 나 좀 봐.

 

규현의 손바닥이 젖은 성민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모르겠다, 규현아. 내가 이제와 무슨 자격으로 널 좋아할 수 있는지. 순간 규현이 제 이마를 성민의 이마 위에 꽁-하고 부닥뜨렸다. 울지 마. 형이 울 때마다 심장이 너덜너덜 해지는 기분이니까. 규현의 입술이 성민의 눈두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동그란 콧망울에도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꽃잎처럼 입술 위에 안착했다. 바깥에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차고 보드라운 느낌에 성민은 저도 모르게 콧잔등을 찡긋했다. 숨결 따라 깊숙이 파고드는 규현의 향기에 성민은 규현의 옷자락을 놓칠 새라 꼬옥 부여잡았다. 첫 번째 키스보다 훨씬 다정하고 웃음이 날만큼 정중한 키스는 규현이 건넬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성민을 달래는 규현의 혀끝에서는 짠 눈물맛과 함께 미안함이 묻어났다. 나의 아픔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같이 아프게 했다는.

 

“…사랑해, 규현아.”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많이 늦었지만 내 고백을 받아줄래? 이제 두 번 다시 널 아프게 하지 않을게. 혼자 두지도 않을게.

 

나도, 사랑해.

 

드디어 온전히 맞닿은 심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성민을 끌어안은 규현은 온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이제, 마주보고 사랑하자. 안타깝기만 한 엇갈린 시간들은 추억 속에 잠재우고 앞으로 행복할일만 생각하자.

 

 

 

 


열아홉, 봄. 수줍게 꽃잎처럼 날아든 첫 사랑은
스물, 여름. 소나기처럼 격정적으로 몰아쳤다가
스물 넷, 가을. 마른 낙엽이 되어 아프게 바스러졌다.
그리고 스물 다섯, 겨울.
눈처럼 한없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 먼 길을 빙 둘러 비로소 내게로 왔다.

 

 

 

 

- 연아야, 물어볼게 있어. 한 가지만.
- 뭔데?
- 날 사랑해서 행복했니?
- …응.
- 그래, 그럼 됐어. 그걸로 된 거야…

 

 

 

 

 


뽀득뽀득- 창문에 부옇게 낀 성에 위에 규현이 삐뚤삐뚤하게 글씨를 썼다. 유리의 차가운 감촉에 손끝이 아려왔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성민, 보고 싶다.’ 그러나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내 손바닥으로 문질러 지워버렸다. 그 틈으로 바깥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올해의 첫눈이 소리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영은 책상 위에 표 두 장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강인의 키스 더 라디오 3주년 기념 공개방송 초대권’ 발신자가 없는 편지 봉투에 들어있었지만 나영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준수씨 얼른 짐 챙겨요.”
“에? 저 방금 촬영 갔다 왔는데…”
“상대방이 약속을 지켰으니 가는 게 예의죠.”

 

나영은 씨익 웃으며 표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게 뭔데요?”
“감동적인 고백 이벤트 초대권이요.”

 

 

 

 


“오늘 이렇게 3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특별한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여러분께는 조금 죄송한 말이지만 이 무대는 어떤 한 사람   만을 위해 마련했어요. 그래도 이해해 주실 거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와야 한다는 영운의 말에 못 이겨 공연장을 찾은 성민은 자신 쪽을 향해 윙크를 날리는 영운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대체 또 뭘 꾸민 거야.


조명이 어두워지더니 무대 중앙 스크린에서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성민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영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성민 자신이었던 것이다.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 개그 프로를 보며 까르륵 웃는 모습, 바지를 둥둥 걷어붙인 채 이불 빨래를 하다가 ‘너도 빨리 와서 밟아!’ 하고 화면에 대고 귀엽게 눈을 흘기는 모습, 대본 연습을 하다가 잘 외워지지 않는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투덜거리는 모습… 16mm 캠코더 영상에는 그렇게 일상적인 성민의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 저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제 마음을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마음을 전하려 합니다.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성민의 눈에 벌써 그렁하게 눈물이 맺혔다. 옆자리의 시원이 코를 훌쩍거리는 성민에게 휴지를 건넸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울면 어떡해요.


무대 위로 한 사람이 걸어 나오자 객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 번에 성민을 찾아내고 작게 웃어주었다.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 서는 거라 약간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공연장에 흐르기 시작한 노래는 성민에게도 익숙한 곡이었다. Prince의 마지막 앨범 타이틀곡. 예쁜 가사와 멜로디 때문에 멤버들 모두 좋아했었다. 비록 Prince라는 이름을 걸고 한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이 되고 말았지만.

 

소중함을 잊고 살았어. 차가운 세상 속에서.
어두운 거리를 헤매도 눈물 흘릴 수 없던 나였는데…

 

그의 노래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모두 숨죽여 지켜보았다. 성민이 그토록 좋아하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허공에서 우아하게 왈츠를 추듯 움직였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언어로.

 

너를 기다려 온 거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꼭 닮은  사랑을 위해.

 

객석에서 누군가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공연장 전체에 일파만파로 퍼져 어느새 하나의 아름다운 합창이 되었다. 그것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에게 내리는 작은 축복이었다.

 

외로웠던 시간만큼 너에게 다 주고 싶은
My endless moment, Pray for you-

 

 

 

 

 


'다음 무대는 아쉬운 고별 무대입니다. 비록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지만 Prince라는 이름은 영원히 팬들 마음속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Prince의 Endless moment.'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마지막 무대에서 영원을 노래한 다는 것은. 하지만 어쩌면 ‘마지막’과 ‘영원’은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로 연결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니까.

 

 

 

 


Monodrama ep.003 Last Concert FIN.

 

 

 


 

 

 

 

 

잘 보고 갑니다 시간 되시면 제 카페도 들려 주세요 cafe.daum.net/ppp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