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슈주팬픽

오직성민SJ 2008. 8. 11. 23:30

거의 은성이라는..ㅜㅜ

 

 

 

 

 

 

 

 

 


D-61

 

 


-

 

 

 


"그러니까. 뇌 종양ㅡ이라는, 그런 말씀이십니까?"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화면을 들여다보자 내 뇌라는 사진 한구석에 호두만한 크기의 혹이 나있다.
그러니까, 저 놈이 그 동안의 내 고통과 두통과 구토의 원인이었고, 또 나를 2달 안에 서서히
죽여간다는 말이지?

 

 

"예."
"오진일 확률은?"
"죄송합니다."
"후. 그럼 내가 죽는다는거네?"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수술을 하시면-"
"-기간이 연장됩니다. 이거죠? 하지만 난 내 삶에 미련 없어요, 어차피 죽는거라면.
아플때 먹게 약이나 좀 주시죠."

 

 

내 말에 의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미련 없다니까 웃긴가? 하지만 맞잖아.
어차피 죽을거라면 구차하게 매달릴 생각은 없다.
어쨌든 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쓸데 없이 자존심만 세우는 놈이라고 욕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 인생, 나의 삶.
타인에게 잘 보여서 내가 얻을게 뭐냐.
게다가 이제 곧 죽을 마당에.

 

 

 

처방전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봉투 가득 챙겨준 알약통을 들고 병원을 나왔다.
얼마 와본적도 없는 병원인데 엿 한번 제대로 먹이네. 다신 오나봐라.
조금 걷다가 숨이 가쁘고 가슴이 먹먹해져 근처 벤치에 툭 그냥 주저앉아버렸다.

 

 

 

그냥 가슴 한 구석이 멍멍했다. 제기랄.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다.
죽어도 폼나게 죽지 뇌종양이 뭐냐, 뇌종양이.
하하.
하여튼, 이혁재, 이놈의 삶이 한번이라도 평범한적이 있었나.

 

 


그 때, 허벅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고 뭐고 지금은 사양이다. 나두 하루쯤은 감상에 빠져보자.
아, 씨발, 왜 자꾸 울려대!!!!!!!!!!!!!!
신경질을 내며 거칠게 폰을 꺼내들었지만, 이내 내 손놀림은 부드럽게 바뀌었다.

 

 

"어."
"혁재야? 어디야! 같이 점심먹기로 해놓구!"
"아. 그랬었나."
"그랬었나라니! 나 지금 너네 집 앞이란말이야!"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나의 애인, 지소영.
지독하게 이기적으로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게 만들어준 너무나도 따뜻한, 햇살같은
사람.
아. 그러고보니, 내가 죽는다는건 이 여자와도 헤어져야한다는거구나.

 

 

 

씨발.
새삼 소영의 생각에 짜증이 치밀어올라 발 밑으로 채이는 돌을 발로 굴렸다. 엿같다.
젠장. 착하게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에게 피해주는 짓은 안하고 살았는데.

 

 

 

"뭐하러 집 앞까지 갔어."
"니가 안나오니까 그랬지! 어딘데?"
"기다려. 20분 내로 갈테니까."

 

 

전화를 끊고 차로 가 문을 열고 약봉지를 던져넣었다.
탁탁 소리가 나며 약병 몇통이 바닥을 구른다.
하얀 약병이 거슬렸다.

 

 

하아. 그래. 기왕 헤어질바에야 그냥 빨리 끝내는게 낫겠지.
질질끌면서 그녀의 상처를 깊게 하는 것 보다야 처음으로 착한 일 한 번 한답시고
내가 조금 더 아파버리자.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한결 편해졌다.
그녀와 헤어진뒤엔..뭘 한다. 막막하다.
어느새 병원에서 나온지 30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존나 엿같네. 평소엔 쳐다도 안보던 시곈데. 느끼지도 못했던 시간이었는데,
내가 그 짧은 시간동안 훌쩍 늙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아팠다.

 

 


-

 

 


"타."
"와아~ 19분 38초!"
"뭐?"
"진짜 20분 안에 왔네!"
"설마 시간 세고 있던거냐?"
"응! 히히. 아, 춥다!"

 

 

 

냉큼 차에 올라탄 소영은 그 추위속에서 20분 동안이나 날 기다린건지 코가 새빨개져
내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귀엽다. 사랑스러워.

 

 

 

"어디 들어가있지 그랬어."
"그러다가 너 온거 못보면 어떻게 해?"
"전화 하면 되지."
"아니. 시간 아깝잖아."

 

 

뜨끔.
그녀로서는 아무 의미없이 나온 '시간'이라는 말이었겠지만 괜히 속이 따끔거려왔다. 욱씬욱씬.
들킨것만 같아서.

 

 

 

"......응."
"혁재야. 나 사실 오늘 너한테 소개 시켜주고 싶은 사람 있었어."
"응?"
"에이씨. 짱 오래 기다렸겠네! 다름이 아니구 내 친척동생! 근데...너 어디갔었어?"
"왜. 바람폈을까봐?
하긴. 내 마스크가 좀."

 

 

"이씨! 장난치지 말구~"
"니 생각하다 왔다."
"으웩- 닭살!"

 


"....친척동생 기다린다매."
"아, 맞다!!! 삐졌겠어, 성민이!!!!!"
"이름이 성민이야?"
"응. 이쁘지? 이성민."
"어디야?"

 

 


"그 때 우리가 자주 갔었던 돈까스 집!"
"꼭 지같은데만 고른다."
"뭐가!! 너두 맛있게 먹으면서."

 

 


등신. 나 돼지고기 싫어해.
집에선 입도 안대. 니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삼겹살도 니 앞에서는 맛있는 척 꾸역꾸역
먹지만, 먹고나서 그날 집에서는 하루종일 소화제만 쳐먹는다고.

 


정말 헤어져야 하나. 내가 이정도로 널 사랑하는데 정말?
난 더 바뀌고 싶은데 시간이 허락을 안해.
난 그 60일동안 모든걸 다 정리하고 죽음을 기다려야 해.
하지만 그런 나약한 나를 너에게 보이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나로 당당하게 너를 떠날게.

 

 

내 낯선 모습에 놀라고 아파하는 널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사실 조금 이기적인 마음도 있어.
영화처럼, 너의 손을 잡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인 채 병원에서 조용히 죽어가고 싶다고.
하지만...나는......남을 네가 너무 아프다.

 

 

 

"예예. 공주님, 바로 모시겠습니다."

 

 


겨울 햇살은 눈부시도록 시리다. 아름답지만 잔혹한, 그런 아픈 날의 사랑.

 

 

 

-

 

 

 


"이씨!!! 누나!!!!!!!!!!!!!"

 

 

주차를 해놓고 올라가자마자 왠 귀여운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퉁- 하고 튀어나왔다.
내심 놀랐다.
너무나도.................그녀를 닮은 얼굴에.
말투로 보아서는 성격까지.

 

 


"어떻게 해. 성민아. 그냥 가지-"
"오랫만에 만나는데다가 누나 남친까지 온다 그랬잖아! 그리구 먼저 갔으면
삐졌을거면서!
어? 이 형이 누나 애인? 인상 졸라 험악하다! 첫인상 -10점!
반가워요, 형. 난 이성민! 나이는 스물 하나구요, 음. 경희대 실용음악과 다니구 있어요!"

 

 

 

녀석의 현란한 자기소개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쩜 저렇게 성격까지 빼다 박을수가 있지?
같이 있다보면 산만해지는 것 까지.
원래 친척사이면 다 닮는건가.

 


변변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친척이 없어서 나는 잘 모르겠다.
쨌든 존나 신기하네.

 

 

"혁재야! 너두 인사해!"
"..아. 난 이혁재고. 니네 누나랑 동갑."
"푸훗. 진짜 개그맨이랑 이름 똑같네요?!"

 

 

성민이라는 녀석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눈을 데룩데룩 굴리다가 자기가
미리 앉아있던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다.

 

 


"누나, 코트 내가 걸어줄게! 형두 벗을래요?"

 

 

.......사교성이 좋은건가, 이 집 가족들은?

 

 


"아니, 됐어."

 

 

 

 

"벗어. 더워보여."
"벗어요! 답답해보여요!"

 

 

 


"....동시에 말하지마, 진짜. 헷갈린다."

 

 

 

내 대답에 짠 듯이 대답하는 두 인간이 왠지 귀여웠다. 꼭 닮은 얼굴로 꼭 닮은 말투로 말하니까...진짜, 나중엔
누가 진짜 내 애인인지 헷갈리는거 아니야?
내 대답에 둘은 시선을 마주치고 해맑게 헤헤- 웃는다.
웃음 소리까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이내 알바생이 다가와서 물었다.

 

 

 

"형이 쏘는거죠? 오예~ 나 엄청 많이 기다렸으니까 엄청 많이 먹어야지!
형, 큰일났다! 나 진짜 많이 먹어요!
먼저, 음. 카레 치즈롤이랑, 메밀소바랑, 튀김모듬!!!!!"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한 손에는 포크를, 한 손에는 나이프를 들고 어린애마냥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하는 녀석이 귀여여워보였다.
.......만약, 나에게 시간이 더 있엇더라면...너랑도 친해지고 싶었을거다, 꼬마.

 

 

"돼지."
"나 살 안쪄요!!! 형, 말투도 맘에 안들어!! 욕하는건 나빠요!!!! -15점!!!!"
"......그 점수로 대체 뭘 하는데?"
"내 맘에 들면 울 누나랑 결혼 시켜야죠!"
"..뭐? 나 참. 결혼을 니가 하냐. 소영이가 하지."

 

 

"사랑에 콩깍지 씐 사람이 제정신이게? 객관적인 제 3자의 집장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려줘야죠! 그니깐,
앞으로 우리 누나 눈에서 눈물나게 하면 -100000000000000000만점!!!! 국~~물도 없어요!!!"

 


.........어쩌냐. 곧 울릴 것 같은데.

 

 

 

"그래. 쪼그만 녀석아. 지소영. 넌?"
"난 등심 돈까스! 혁재, 넌 우동이지?"
"어. 들었죠? 말한거 주세요."

 

 

내 말에 무심히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알바생이 당황했는지 네? 한다.
그러자 메뉴판을 차례로 짚어가며 조근조근 설명하는 소영.
아름답다. 작고 희고 갸름한 얼굴. 동그란 눈. 오뚝한 코. 작고 붉은 입술. 웨이브진 갈색 머릿카락.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닐 사람.

 

 

 


내가 소영을 바라보는 표정을 보던 성민이 히히- 바보같아- 라며 웃는다.
아오. 닮은 얼굴만 아니면 몇대 때리는건데.

 

 

 


그 때. 순간 지끈-하고 머리가 울렸다. 안돼, 씨발.
청승떨지 말자. 이혁재, 참아.
테이블 밑에서 부들거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꾹 누르고 있자니 곧 신물이 올라올 것만 같다.
고개를 숙이고 깊히 심호흡을 하자 그제서야 통증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메슥거리는 기분에 물 컵에 물을 가득 따라 벌컥벌컥 마시자 소영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그나저나, 최시원, 김희철, 김영운, 이동해.
너네한테도 말해야하나.
오랫만에......어머니도 찾아뵈어야겠지.
...아버지에게도 말씀드려야하려나.

 

 

갑자기 할 일이 많아진 기분이다. 시간은 없는데 할 일은 산더미다.
하고 싶은 일이 갑자기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 놓는다. 소영이완 아직 자보지도 못했다.
프랑스어도 배우고 싶고, 경영수업도 갑자기 마저 듣고 싶다.
김영운이랑 밤 새서 술도 꺾어보고 싶었는데. 이동해랑은 같이 클럽에서 여자 누가 더 많이
꼬시나 내기 해야되는데. 그러고보니까 세계일주도 하고 싶었어. 그리고 아들 둘에 딸 셋을 낳은 아버지가
되보고도 싶었는데.

 

 


아, 존나...내가 원래 이렇게나 세상에 미련이 많은 놈이었나.

 

 

 

 

-

 

 

 

 

"그럼 이제 연인타임-
싸가지형, 우리 또 봐요!"

 

 

 


늦은 점심을 먹고 영화관에 갖다오자 어느덧 7시가 다된시간.
겨울이라 그런지 온통 어둑어둑거린다.
성민은 자기 밴드 동아리 모임이 있다며 후다닥 뛰어가버리고..
소영이 내 팔에 팔짱을 껴 넣었다.

 

 

 

"아~ 좋다~"
"좋긴 뭐가."
"하여튼, 지두 좋음서!"

 


내 볼을 살며시 꼬집는 그녀.

 

 


".....지소영."
"응?"
".....소영아."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내려다보자 목이 메이는 기분이다.
그래. 내일 말하자, 내일.
하루쯤이야...하루 쯤 지난다고 사랑이 더 깊어질리 없으니까.

 

 


"왜?"
"......"
"우리 혁재 봐봐. 뭐가 이렇게 걱정이지?"

 

 

그러더니 발꿈치를 들고 내 입술에 입을 맞춘다. 오렌지향이 톡- 쏘듯 코를 스친다.
심장이 뛰었다. 사랑해, 지소영. 나 좀 살려줘.
문득 목 놓아 울고 싶어 졌다.

 

 


-

 

 

 

"소영아."
"어?"
"..아무리 모진 말을 하더라도. 내가."
"응?"
"오늘 일만 기억해. 뭐가 뭔지 모를 땐, 그냥 오늘만 기억해줘."

 

 


"......어?"
"사랑해. 내가 죽는 날까지. 내가 입으로 무슨 말을 하든 다 거짓이야.
너만 사랑해. 내가 죽는 날까지."
".....너 오늘 디게 이상하다."
"...알아."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쓰게 웃었다.
그리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
이불속에서 우린 이미 맨 몸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몸을 섞은 우리. 나에게 평생 추억으로 간직될 사랑의,
순수한 사랑의 마지막 시간.

 

 

 


갑자기 소영을 울리지 말라던 성민이란 녀석의 밝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D-60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머리를 강타하는 고통에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는 소영이 천사처럼 자고 있었다.
미안해. 지켜주지도 못할거면서 널 가져서.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하루사이에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아마 매일...조금씩 더 커져서...결국엔 나를 어둠속에 가둬버리겠지.
그때, 후둑- 하며 코피가 쏟아졌다.
젠장. 가지가지 하는군.
소영이 볼까 싶어 화장실문을 잠그고 물로 세면대를 씻고 휴지로 흐르는 피를 닦아내었다.
씨발, 존나 많이도 나온다.

 

 

 

허탈함에 웃음이 비져나올때쯤 피가 멎었다.
그래....이제..내가 할 일은 하나만 남은거다.

 

 


".....일어났어?"

 

 

밖으로 나가자 소영의 수줍은 물음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안고싶어.

 

 

"보면 몰라?"
"피이. 난 아침에 너 보면 어떻게 인사해야하나 무지 고민 많이 했는데 넌 겨우 그거야?"

 

 

......조금만 더 모질어지자, 이혁재.
...........니가 조금만 더 아프자.

 

 


"...지소영. 너 지금 뭔가 착각하는거 아니야?"
".......응?"
"한 번 잤다고 뭘 그렇게 챙겨?"
"...응...?"

 

 


"요샌 처녀막 수술도 있다더라? 너 어제 처음 아닌 거 같던데?"
"...하. 이혁재? 너 지금..무슨소릴...."

 

 


씨발....그런 표정 짓지 마.
나 지금...못견디겠다고.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온다.

 

 

 

"그리고 처음이었다고 쳐도. 솔직히, 지소영. 순수한 사랑으로 너같이 이쁜애 본느 사람 없어."
"..왜 그래, 너 갑자기......"
"이정도면 좀 알아들어라. 지겹다. 순진한 척.
말그대로, 난 공주님 처녀한번 따 먹어 보고 싶어서 접근한거였어. 니만 병신같이 몸과 마음 다 준거지."
".....뭐?"

 

 


어느새 미소는 사라지고 하얗게 질려 흔들리는 눈으로 날 보는 지소영.
어제 말했잖아, 다 거짓말이라구. 내가 사랑하는건 너라구.

 

 


"앞으론 왠만하면 연락하지 말고. 임신하면 말해. 위자료 줄테니까.
아, 나도 혹시 내 돈 보고 접근한거 아니야?"
"어........떻게......."
"그러니까 니가 잘못걸려서 좇됐다- 이말이잖어.
그런 불쌍한 표정 짓지마. 역겨워.
니가 아무리 그래도 동정심 안들어. 그럼 잘가라. 체크 아웃은 내가 할게."

 

 

 


침대에 앉은채로 굳어있는 그녀를 버려둔 채 밖으로 나와 주저앉았다.
머리보다 심장의 통증이 더 크다.
터져버릴 것만 같아.
......오랫만에......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

 

 

 

 

"엄마. 아들 왔어."
"..........."
"보고 싶었어. 늦었지? 급하게 오느라 사온게 이거 밖에 없다."

 

 


잔디밭에 대충 사온 참이슬 두어병과 사과, 배 따위를 올려놓으며 엄마의 무덤을
쓰다듬었다. 엄마, 불효자 혁재 왔어요.
이제서야 왔어.

 

 

 

"잘 지냈지, 엄마?"
"........."
"엄마, 나 보고 싶지."
"........"
"나도 엄마 보고 싶어. 조금만 기다려. 엄마. 60일만 기다려. 내가 슝-갈게."
"......."
"엄마. 나 엄마 앞에서 음주 좀 해도 되지?"

 

 


탁- 하고 소주병이 뜯기며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치고 올라왔다.
시큰한 냄새가 역겹다.

 

 


"이제 막 사랑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있죠. 엄마가 나 여자 사귄다구
질투하나부다. 그치? 에이. 그래도 엄마 밉다. 나는 엄마가 넘버 원인데. 나 조금만 더 웃게 해주지."
"......."

 

 


대답 없는 무덤에 대고 말하는 모습이 미친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엄마, 이것도 봐줘.
솔직히 엄마 아들이 이렇게 센치해지는거 흔한 일 아니잖아.
그냥 아들 술주정 한 번 받아주는 셈 쳐.

 

 

 


"엄마, 나 다신 여기 안 와. 죽을 때까지.
왜냐면...그 담엔 계속 엄마 옆에 누워있을테니까."
"......."
"아빠한테 갈 생각이야. 얼굴도 뵙고 인사도 드려야지.
못하게 되니까 막 갑자기 후계자 자리가 엄청 탐나는거 있지?
경영 수업 받고 싶더라. 그게 싫어서 뛰쳐나온건데."

 


갑자기 눈에 눈물이 맺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거의 다 비워진 참이슬병이 서글펐다.
조금 고여있는 소주가 마치 '시한부'인 내 인생을 그대로 빼다 박아논 것만 같아서.
병째로 남은 소주를 훌훌 입속으로 털어내자 떫은, 그러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가슴을 메운다.

 

 

 

"엄마. 내가 어렸을때부터 워낙 호두를 안먹었었잖아. 오늘을 예감한거였을까?
내 손가락 두 마디도 안되는게 날 죽인다더라? 웃기지.
총 맞아 죽는것도 아니고 교통사고로 죽는 것도 아니고 지소영 눈만한게 날 죽인대. 웃기지? 나두 웃겨, 엄마.
만약, 엄마. 내 친구들이라던 그 꼴통들..
말하면 뭐라그럴까? 나 왠지 존나 맞을거같아. 그치.
힘만 무식하게 쎄서 맞으면 존나 아픈데."

 

 

소주 한병을 더 뜯었다.
취할래. 아니, 이미 취해있는건 아닐까?
이 모든건 전부 환상.
다시 내일 일어나서 난 병원으로 가는거야.
그리곤 이상 없다는 통보를 받고 너랑 돈까스를 먹으러 가서 니가 소개해주는
친척동생을 만나고 영화를 보고 난 소화제를 먹고 잠드는거야.

 

 


그치? 이게 정상이지? 씨발.
근데 왜 더 정신이 멀쩡해져오는건지.
심장이 아프다. 존나 아파.

 

 


"엄마.......나 갈게....................
아버지 꼭 보러갈게..그동안 나랑 아빠보면서 답답했지?
..엄마, 그럼 안녕히계세요.
두달뒤엔..엄마가 바랬던 대로 엄마 곁에만 있을거야."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으로 큰 절을 올렸다.
괜히 온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더 술이 고파졌다.

 

 

 

-

 

 

 

"왠일이냐, 니가 먼저 술을 다 먹자그러고?"
"해외여행 가고 싶다."
"지소영이랑 가. 왜 내 붙잡고 청승이야? 안그래도 희철이랑 존나
분위기 잡고 있었는데."
"......나 지소영이랑 깨졌어."
"내가 그럴 줄 알았..............뭐?!?!?!?!?!?!?!?!"

 

 

 

 

 


"깨졌다고."
"미친. 그렇게 개까칠하게 굴더니. 어쩐지. 내가 차일 줄 알았어."
"내가 찼어."
"그래, 내가 그럴줄 알았다니................뭐라고?!?!?!?!?"

 

 

 


눈알 튀어나오겠다, 개새끼야.

 

 

 

"찼다고."
"미, 미친놈!! 소영이면 너한테 얼마나 과분한 줄,"
"알아."
"근데 왜!!!!!"
"........."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왠지 최시원, 니가 알면 다른애들 아는거 시간문제고.
그럼 나 병자취급 할거잖어.
내 자존심 알지? 씨발, 그 자존심이란 새끼가 나보다 아이큐 딸리는 놈들한텐 동정받고 싶지 않대.
나중에 욕해라. 지금 말고 내가 들을 수 없을 때.

 

 

 

"그냥....질렸어."
"....미친."
"........"
"솔직히 불어."
"뭐를."

 

 


"내가 몰라도 너를 모를까. 넌 니꺼 하난 못, 아니 안 놓잖아."
".......몰라, 질렸어."

 

 

 


오늘따라 취하지도 않는다.

 

 

 

 


그 때.
벌컥 큰 소리로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온다.

 

 

 


"씨발, 이혁재!!!!!! 여�는거 다 알아!!!! 개새끼, 당장 나와!!!!!!!!!!"

 

 


.........어라. 꼬맹이네.

 

 

 

"시끄럽다, 애기야. 나 여�어. 나 귀 안먹었거든? 어떻게 알고 온거야? 네비게이션?
요새 네비는 사람도 찾아주나.."
"이, 이 미친놈!!!!! 내가, 우리 누나 울리지 말라고 부탁한게 어제였어!!! 왜, 왜 장난감 취급하고.."

 

 

 

말도 참 이쁘게 한다.
넌 지소영 정의의 사도. 나는 악당.
야. 근데 너 진짜 조명에서 봐서 그런지 더 지소영 닮아보인다.
괜찮네, 너랑 나 어차피 아무 사이도 아니고, 난 원래 이기적이고 싸가지 없는 놈이니까..
니가 지소영대신 두달만 내 옆에 있어줄래?

 

 

그리 긴 시간 아니고 그만큼 나도 행복할 권리 있잖아.
뭐, 어차피 죽을거. 게이가 되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 옛 애인을 닮았다는데......

 

 

 

"....너도...이쁘다?"
"지, 지랄 마!!!!!
사과하고 우리 누나한테 돌아가!!!!!"
"아니. 난 그쪽이 더 마음에 들어."
"무슨 개소.........으읍!!!"

 

 

 


.......미안해.......두달만.
미칠게.........욕심이 심한거지만..난 웃으며 가고 싶어.
질질짜는건 싫다구.
니가 아주 잠시만 지소영의 가면이 되어줘.

 

 

 

 


그제서야 취기가 올라왔다.
깊은 밤, 클럽에서의 키스는 알코올 맛이었다.

 

 


D-59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눈을 뜨자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일어났어?"
".......이동..해? 내가 왜 여기에........"

 


내 앞에 서있는건 이동해였다.
눈을 뜨자 머그컵을 들고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가 누워있는 침대 곁에
앉았다.

 


"시원이가, 여기 데려다놓고 갔어. 12시 넘어서."
"........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꼬맹이와 키스한 이후로의 기억이 없다.
나 참. 그나저나 최시원, 데려다주려면 우리 집에 데려다놀 것이지 왜 번거롭게
여기로 데려와?

 

 

 

 


"너 꽤나 정신 없었다는데 그렇게 취할때까지 술은 왜 마신거야."
"......."
"소영씨랑 깨졌다면서."
".....최시원이 그런 것도 말했냐."

 

 


이동해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내 뺨에 와닿았다.
하여튼, 최시원. 너한텐 내가 무슨 말을 못한다.

 


 

"시원이가 말 안했으면? 나한텐 숨겼을거였어?"
"그건 아니지만."
"..왜그래, 이혁재, 너."
"내가 뭐?"
".........도대체 무슨 일인데?"
".............."

 

 

 


나를 차분하게 쳐다보는 동해의 시선이 내심 부담스러웠다.
말했듯이 나는 착한놈이 아니니까.
너의 걱정, 진심으로 받아들일 만큼.

 

 

 


"살...빠진 것 같아. 요즘 피곤한 일 많아?"
"....배고프다."
"아. 그래? 속 풀리라고 그냥 대충 콩나물국 끓였어."
"신경써줘서 고맙다."

 

 

 

 

내 말에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웃는 이동해.
그 얼굴을 바라보는게 왠지 미안해져 침대에서 일어났다.

 

 

 

 

-

 

 

 

"맛있네."
"진짜? 다행이다."
"있잖아, 이동해."
"응?"
"나 두달안에 죽어."
".......어?"

 

 

 

"뇌 종양이라더라."

 

 

 

 


쨍강-
이동해의 손에서 떨어진 숟가락이 식탁의 유리를 두드렸다.
아,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나는 이렇게 태연한데.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이동해의 시선을 외면하며 나는 열심히 콩나물국을 떠먹었다.
아, 존나 맵네.
왠지 코 끝이 찡했다.

 

 

 


왜일까. 왜 너한텐 말하고 싶었을까, 내가.
결국 너를 괴롭히는 것 일텐데도.

 

 

 

 

".....거짓말."
"아우. 이동해. 너 여기다가 뭐 넣었냐. 진짜 매워. 너, 내가 너네집에 늦게와서 복수하냐?
내가 온거 아니다. 최시원이 데려다줬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는데!!!!!!!!!!!!!!!!
거짓말이지? 나 놀리려는거지? 하여튼, 이혁재. 왜 재미없는 거짓말하고 그래.
유머감각은 개미코딱지만큼도 없는게. 근데 이번껀 진짜 아니었다."

 


 

 

눈에 눈물이 고여 애써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녀석에게 문득 동정심이 일었다.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진짠데.

 

 

 


"믿기 싫으면 믿지 마. 근데....막상 죽는다니까 해야할 일이 존나 많은 거 같아."
"....미친놈아.......하.............그럼 병원 가.."
"치료 못해. 연장만 시킬 뿐이지. 그리고 병원 냄새 맡는거 싫고 병원 밥 먹는 것도 싫고,
병원 복도 싫고, 병실도 싫고, 하여튼 병자취급 받는거 존나 질색. 어차피 죽을거 하고 싶은거
잔뜩 하고 죽고 싶어서."
".....진짜......미친놈..........."

 

 

 

 

녀석의 말에 피식 웃어보였다.
그래. 난 진짜 미친놈인지도 몰라.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마. 너만 알아줬으면 해."
".......하......"
"그리고, 나 죽고나서. 힘든 부탁이란거 알지만 니가 소영이 좀 지켜줘라."
".........진짜 뻔뻔하네. 그런 부탁을 왜 나한테 하는데."
".....예쁘게 깨진거 아니니까. 부탁 좀 하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는 내 말 들어준거 뭐 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굉장히 어색해져버렸다. 아, 존나 싫어. 이딴 분위기.

 

 

 

 

".........."
"....내가 소영씨 책임진다고 쳐. 그럼 넌, 나한테 뭘 해줄건데?"
"뭘 바래."
"....너 죽을때까지 나 사랑해줘."

 

 

 

 

문득 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해온다.
심장이 죄어오듯 아파왔다.
결국 상처받을거 너면서. 사랑받지 못한다는거 알면서.
너도 바보야. 왜 내 주위 사람들은 다 병신이냐. 목이 메였다.

 

 

 

이동해의 마음 같은거,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올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이동해의 시선을 피했다.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안될거란거 알잖아."
"......지소영.....내가 확실하게 책임질게. 결혼하라면 결혼도 할 수 있어.
그러니까....어차피 깨진거면 내 곁에 있어줘."

 

 

 

문득 소영과 행복해했을 내 곁에서 멤돌았을 녀석이 생각났다.
너도 아팠니.
내가.......존나 이기적인 놈인데, .....그냥 끝까지 나쁜놈으로 남아도 될까.

 

 

 


"..............그래."

 

 

 

빛은 가고 점점 어둠이 찾아온다.
그림자가 내 몸을 덮어버린다.

 

 

 

 

 

 

-

 

 
 

 

"씨발!!!!!!!!!! 이딴거 안해!!!!!! 안한다고!!! 제기랄!!!!!!!"

 

 

 

 

 

이동해의 집을 나와 집 쪽으로 걷고 있는데,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내 옆을 미친듯이 뛰어 지나갔다.
왠지 호기심이 일어 녀석의 등을 바라보았다.
평소엔 관심도 없었을 것들이 왠지 신경이 쓰인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행복한 표정과 사랑스러운 웃음.
축복받은 연인들과 따뜻한 가족들.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와서 보인다.
빌어먹게도 세상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소년이 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가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씨발. 내가......진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빨간머리의 소년.
나는 잠자코 녀석의 뒤를 밟았다.
녀석이 한 건물로 들어가 계단으로 옥상까지 올라가는 길을, 뒤에서 잠자코.

 

 

 

 

녀석은 잠시 망설이듯 멈칫 하다가 옥상문을 열었다.
그리곤 난간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마치 자살하려는 것 같은데. 신문에서나 뉴스에서 봤을때는
그저 무표정으로 넘겼던 이야기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왠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오는거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올랐다. 니가 어디가 아퍼?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이랑 깨졌어!?
그 연인을 놓고 거래를 했어!??!?! 두달 남은 시한부 인생이야?!?!!?!?!?!?
주먹을 꾹 눌러쥐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에 나를 돌아보는 빨간머리의 소년. 마스크는 꽤나 괜찮았다.
어쭈, 눈썹에 피어싱. 귀걸이. 좀 논다 이거냐?

 

 
 

 

'퍽-'

 

 


말도 없이 먼저 강한 주먹이 나가자 뒤로 나가떨어진 녀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 하고 침을 뱉는다.

 

 

 

 

 

"넌 또 뭐야."
"보아하니 학생인 것 같은데, 말 줄이는거 듣기 편하지 않군."
"씨발, 니가 뭔데 날 때려!!!!!!!!!!"
"그러는 너는 뭔데 여기서 자살하려그러냐?"

 

 

 


자살이라는 말에 녀석이 움찔한다.
미친놈. 아직 시퍼렇게 젊은 놈이. 왠지 녀석이 존나 한심해보였다.

 

 

 


"....건물주인이냐? 씨뎅. 존나 재수없게 됐겠네. 여기서 자살 안할테니까 그냥 가."
"아니거든."
"근데 니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죽든 말든. 경찰이냐?"
"후. 너 몇살이냐?"
"열아홉이다, 왜!!!!!"

 

 

 

 

"내가 너보다 네살은 더 많거든? 건방지다, 너?"
"무슨상관이야? 니가 내 부모라도 돼? 참견말고 꺼지라고!!!!"
"이름이 뭐냐?"
"조규현이다, 어쩔래!!!!!!!!"
"근데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데?"

 

 

 

 

"씨발, 니 말대로 자살할려 그랬다!!!!!!!!!!"

 

 

 

 

당당하게 소리치는 녀석에게 또다시 불끈 분노가 치밀어올라 주먹으로 다시한번 녀석을
강하게 쳤다.
욱-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는 녀석. 하, 미치겠네.

 

 

 


"왜 때리냐고!!!!!!!!!!!"
"도대체 왜 자살을 할려그러는거냐?"
"니, 니가 무슨상관인데!!!!!!!!"

 

 

 

"어린애들은 이래서 싫다니까."
"누가 어린애라는거야!!!!!!!!!!!!"
"철부지. 이런 말 못들어봤어? 죽을 용기로 노력하면 그 일을 이뤄도 백번은 더 이뤘다고."
"현실이랑 말은 틀려."

 

 

 


".......너한텐 시간이 많잖아."
"..뭐?"

 

 

 


왠지 모르겠지만, 이 녀석에게 손을 내밀고 녀석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내가 난생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다른 타인이니까?

 

 

 

 


"어때? 나랑 약속하나 하는건."
"...약속?"
"내가 정확히 50일동안 너를 서포트해줄게. 대신에 너는 미친듯이 노력하는거야.
그 이후에도 너의 꿈을 이루지못한다면 죽든 말든 상관 없다. 그만큼 한심한 놈이라는 거니까."

 

 

 


한심한 놈이라는 말에 발끈했는지 녀석이 반항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내 제안이 맘에 드는듯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거냐?"
"..........씨발. 노래하고 싶은데, 집에서 존나 반대하잖아.
연예인 되려면 연습생으로 들어가야되는데, 뭐 그런건 무조건 반대고 형들 따라서 서울대나 가라니까
배알꼴려서.
...사실 몰래 어찌어찌해서 오디션 합격하긴 했는데. 부모님이 아시고는 그러려면 집 나가라네?"
".......고작 그런거가지고. 하여튼 한심하군."
"이 개같은!!!!!!"
"개가 아니라 이혁재다. 뭐, 니가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
"이거. 내 핸드폰 번호야.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

 

 

 

 

그리곤 뒤 돌아서 옥상을 내려왔다.
내가 죽는 대신 다른 사람을 살렸다. 그리고 그 사람의 꿈을 이룬다.
왠지 멋있는데? 큭큭. 이혁재 진짜 착해졌군.

 

 

 

 


"...야!!!!!!!!!!!"
"......?"
"고, 고마워!!!!!!!!"

 

 

 

 


녀석의 퉁명스러운 인사와 함께 불어온 바람이 내 머릿카락을 흩트려 놓았다.

 

 

 

 

 

-

 

 

 

 

".....욱, 씨발........"

 

 

 

 


고통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골목에 숨어 주저앉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신경 마디마디 하나를 칼로 베어온다.
주머니를 뒤적이자 다행히도 약병이 있었다.
닥치는대로 여섯알정도를 꺼내 물도 없이 미친듯이 씹어 삼켰다.

 

 

 


텁텁하고 쓴 약의 맛이 목을 넘어와 가슴을 메웠다.
씨발.................
이혁재, 지금 니가 남 걱정 할때가 아니었어.

 

 

두 팔이 미친듯이 떨려왔다. 서있기조차 힘든 고통에 이를 악물고 간신히 숨을 내뱉었다.

 


 

 

 

 


-

 

 
 

 


딩동-

 

 


새벽한시가 넘어서 벨이 눌렸다.

 

 

 

 

 

"누구...........어?"

 

 

 

 


이성민이 내 앞에 서있었다. 이를 악 물고.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널 보면, 지소영이 떠오른다니까. 그리고 욕심이 나.

 

 


 

".....누나에게 제발 돌아가줘요..........."

 

 

 

 

 

내가 얼마나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렇게 말하고 나온건데.
문득 어제의 녀석과의 키스가 떠올랐다.

 

 

 

 


"이쁜이. 어제 어땠어?"
".....당신, 정말 속물이야........."
"알고 있어."

 

 

 

 


문득 입술사이를 비짓고 미친듯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죽음을 알았다면 그 전까지...행복해 질 수 있잖아? 바랄 수 있잖아?
그리고 난 오늘 사람 하나 살렸는데. 간만에 착한 일 하나 했으니까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우리 누난 안되는거야?"
"꼬맹아. 나랑 거래 하나 할래?"
"...거............래?"
"딱 두 달만 니가 내 애인 해줘라. 그 다음엔 너희 누나한테 돌아간다고 약속할게."

 

 

 

 

 

 

 

난 존나 나쁜놈이잖아.

 

 
 

뭔가를 깊이 생각하다간, 진짜지? 라고 묻는 녀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미안해. 그냥 나중에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해줘.

 

 

 

 

 

 


D-58

 

 

 

 

 

엄청난 고통에 눈을 떴다. 마치 뇌를 태워버릴 것 만 같은 강렬한 고통.
끔찍한 아픔이었다. 토할 것 처럼 속이 메슥거렸고 지끈거리는 아픔은 나를 잡아삼켜먹을 듯
그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채 속을 온통 할퀴어놓았다.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손으로 옆의 테이블을 미친듯이 더듬어 약병을 쥐었다.
자꾸만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간신히 뚜껑을 열고 병에 있는 약을 떨리는 손으로 내 손바닥 안으로 부었다.
와르륵 쏟아지는 열개가량이나 되는 알을 입으로 마구 쳐넣었다.

 

 

물도 없이 씹어대자 까끌한 느낌과 쓰디쓴 느낌이 입안을 가득메웠지만 맛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고통이었다.
마른 혀를 움직여 약을 꼴깍 삼켰다.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바들바들 떨려왔다.

 

 


-

 

 


한참만에야 고통은 사라졌다.
편안해지자 그제서야 간신히 숨이 흘러나왔다.

 

 

 

 

'딩동-'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소리에 당황했다.
우리집을 찾아올 사람이.............
......................없을텐데.

 

 


밖으로 나가자 조규현이 서있었다.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새벽쯤에 전화가 왔던 것 같다. 나의 집으로 들어와도 되냐고.
그리고 녀석을 서포트해주기로 했던 것도 기억나 나는 허락해주었다.
천천히 문을 열자 짐가방을 싸든 녀석이 보였다.
하. 정말 마스크 한 번 굉장하군.

 

 

 

"들어와."
"..............저기."
"뭐지."
"....고, 고맙다고."
"..그건 니가 성공한 다음에나 말해."

 

 


걸을때마다 머리가 울려왔다.
이대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지마저 의심스러웠다.
녀석에게 안쓰던 방 중 하나를 넘겨주자 짐을 푸르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며 가구들은 미리 마련되어있었고, 다만 내가 쓰지 않는 방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어?"
".......이성민이라는 녀석이나, 지소영이라는 여자. 혹시라도 니가 알게된다면
이 집 안에서 보는 것, 듣는 것들은 절대로 발설하지 마.
그리고, 뭘 보든간에 참견하지 말고 모른척하도록 해. 그 외엔 뭐가 됐든 니 맘대로."
"......알았어."

 

 


어느 덧 짐을 다 정리했는지 거실로 나온 녀석에게 말하자 조금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참, 이녀석 성격도 너무 마음에 든다.

 

 


"아. 근데 나 부탁이 있어."
"뭐?"
"...서포트 해준댔잖아."
"그래서?"
"오천만원만, 빌려줘."
"...........뭐?"
"걱정마! 돈 갖고 튈 생각 없어. 마음 맞던 애들하고 밴드를 결성하기로 했어. 연습실 찾아보고 악기도 새로 구입할거야."
"......노력하고 있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잖아. 내 꿈을 이룰."
"..좋아. 자. 카드."

 

 

 


녀석의 눈에는 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열정이 가득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왠지 이 녀석, 해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 대한 내 미련이 이 녀석에 50일이라는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밀었던 것이지만, 녀석은 노력하고 있었고 방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조금은 부러웠다. 나에게도..........시간이 많았더라면.

 

 

 


녀석은 카드를 쥐고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 때,
다시 한번 딩동- 하고 벨이 울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자 주먹을 꽉 쥐고 서 있는 이성민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물었지만 아무런 말 없이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이성민.
이내 익숙하게 거실로 걸어들어간다.
그 때 쇼파에 앉아있는 규현을 보고는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규현도 성민을 보자 갑자기 깜짝 놀란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오늘부터 어떻게 같이 살게 된 아는 동생이다."
"..하. 이젠 집에 남자까지 끌어들여?"
"아는 동생이라고 했잖아."
"..할 얘기 있어서 왔어요."

 

 


성민이 힐끔 규현의 눈치를 보자 눈치 있게도 연습실을 알아보겠다며 어색하게 말하고는 웃옷을 걸치고 나가버렸다.
조용해진 집 안.
....소영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듣고나면 더 그리워질 것만 같다.
그리고.....내 앞에는 지소영과 얼굴과 성격이 똑 닮은 사람이 서 있으니까ㅡ 대리만족이라도 할 수 밖에.
표면 상으로는 내 연인이니까.

 

 


"..뭐 마실거라도 줄까."
".............필요 없어요."
"조금은 잘 지내주면 안될까. 어차피 두달이잖아."
".....내가 할 말도 그거였어. 두 달동안, 연인으로서, 애인으로서의 본분은 다하겠어요. 표면상으로는 연인이니까."
"그거 고마운데?"
"하지만...당신, 약속 지켜요. 두달만 지나면 누나한테 돌아가는거에요."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가.
그 때, 난 이미 세상에 없을테니까.
그리고 이거 알아둬. 넌 지소영 대신이라는거.

 

 


D-57

 

 

 

 

"친구들과 정식 밴드 결성했어. 오늘부터 연습할거야."
"..연습실은 구했고?"
"응. 작지만....아, 맞다. 여기 카드. 정말 고마워."
"말했지. 그런 얘긴 성공한 다음에나 하라고."

 

 

 

뿌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규현이가 나도 모르게 정말 믿음직스러워보였다.
그래. 넌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이렇게 설레는걸 보면 말이야.
녀석에게 카드를 받으며 살짝 웃어주자 내가 웃는 것은 처음본다며, 멋있다면서 감탄하는 규현이가 정말
친동생처럼 느껴졌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감상적이 됐지.

 

 


"밴드명은, '은성'이야."
"은성?"
"은빛으로 빛나는 별.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귀여운데."

 

 


규현이는 내 말에 조금 놀란 듯 했지만 나는 녀석의 머리를 툭 치며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밥먹자, 짜샤."
"........야. 있잖아."
"..뭐."
"그래도...나보다 형이니까....
...형이라고 불러도 돼?"
"...................혁재형이라고 불러."

 

 

 

녀석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무심하게 대답하자 녀석의 눈이 커진다.
야. 뭘 그러냐, 나도 쑥스럽잖아.

 

 

 


-

 

 

 


"왠일이야. 니가 우릴 다 보자그러고."
"..소영씨랑 깨졌다며."
"최시원 그게 또 떠벌리고 다니는구나."

 

 

정수와 영운은 손을 꼭 잡고 들어섰다. 아름다운 연인.
조금은 질투가 난다. 너희는 행복하구나ㅡ.
그나저나 최시원.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놓고 다니냐.

 

 


".......아니, 뭐. 시원이도 너 걱정되서 그러는거니까."
"나쁜 애 아니라는거 알아."
"그래. 오늘 실컷 마시고 취해보자."

 

 

 

그래. 오늘 해보자. 김영운이랑 밤새 술 꺾어보기.
이 녀석들과 있으면 즐겁다. 친구들이란 이런 존재인걸까.
나는 너네한테 어떤 존재일까. 솔직히 무뚝뚝하고 무심하고 잘 한 것 하나 없는데, 울어줄까 너네.
내 장례식에 와줄거니.

 

 


"그치만 아쉽다, 너. 소영씨랑 잘 어울렸는데."
"왠만하면 소영씨한테 돌아가. 정수말대로, 정말 괜찮은 여자야, 소영씨."
"..........야."
"왜."
"..........웃기지. 내 뇌에 요만한게 났는데............그게 날 죽인대."
"...무슨 소리야. 지금 소주뚜껑들고 뭐하냐. 너 취했어?"
".........뇌종양이래."

 

 

 

쨍강-
내 말에 정수가 들고 있던 맥주병을 툭 하고 놓아버렸다.
병은 깨지지 않았지만 안에 들어있던 맥주가 콸콸거리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아. 술 아깝게 뭐야 박정수. 저것도 다 돈인데.
킬킬거리며 맥주병을 들어올렸다. 아썅. 다 쏟아졌잖아. 씨. 돈 니가내.

 

 

".....무슨..소리야, 너 취했어. 취한거지, 이혁재."
"...내가 이정도갖고 취하겠냐. 두달 남았덴다? 아. 존나 아쉽게. 하고싶은거 진짜 많았는데."
"............너 지금, 너 죽는다는거 니 입으로 말하는거야."
"알아."
"근데....근데 아무렇지도 않아? 어? 두 달이래매!!!!!!!"
"....어차피 기적이란건 없어. 여기서 아무리 발악해봐도 변하는 건 없어."
"........너.."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울어버리고 마는 정수.
영운이의 품에 안겨서 우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그래도 우리 친구 맞구나. 나 위해서 울어주는거구나, 너.
제길. 빌어먹게도 소영이가 내 전부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네도 있었구나.

 

 

 

"..소영씨랑도.....그 것 때문에 깨진거냐."

 

 

 


정수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영운이가 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내쉰다.
술판은 너무 일찍 깨졌다.
........오늘도 김영운, 너랑 술 제대로 못 마셔보겠네.
남은 두달동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남았을까.

 

 

 


-

 

 


잔뜩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오는데 문 앞에는 누군가가 서있었다.
호기심과 함께 작은 기대.

 

 

 

".......혁재야."

 

 


그리고 그 기대는 무참하게 깨져버렸다.
내 앞에 서있는 것은 이동해였다.

 

 

 


"...........왜 여�어."
"..죽을 때 까진 내 옆에 있어주겠다며."
"그게 이 새벽에 우리 집 앞에 서있으라는 소린 아니었던걸로 아는데."
"....너..........너무 무심해."
"알아."
"...........혁재야."
"늦었어, 들어가."
"사랑해."

 

 


싫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확실하게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또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에 나는 이 녀석을 쉽게 보낼 수가 없었다.
이미 소영에게 상처입히면서 스스로도 상처받은 나이기에.

 

 

"......어떻게 해줄까."
"키스해줘."

 

 


녀석의 말에 벽에 녀석을 세게 밀어붙인 뒤 거칠게 키스를 했다.
어딘가 찢어진 것인지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상처받을 걸 알지만 녀석을 단념시켜야만 한다. 이 녀석도 나를 사랑한다면 결국 상처받을 것이다.
빌어먹게도 나는 누군가와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니까.
녀석의 눈물이 뺨으로 느껴졌다.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배로 심장이 아팠다.
여전히 난 환자였고, 여전히 나에게는 아픈 하루였다.

 

 

 


D-56

 

 

 

 

초인종을 누르자 그제서야 심장이 두근거렸다.
굉장히 오랫만이라그런지 실감이 나질 않는다.
몇해전 내 발로 뛰쳐나왔던 집이 다시 내 앞에 있었다.

 

 

 

"누구세요?"
"아주머니, 저 혁잽니다."
".....어머, 세상에! 진짜 도련님이세요?!"

 

 


다정하신 가정부 아주머니의 목소리. 변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가슴 한켠이 따뜻해져왔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자 한 걸음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아주머니가 뛰어나오시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세상에. 어떻게 지내신거에요? 너무 마르셨어요!"
".....그냥....오랫만에 생각도 나고 해서,"
"진짜 혁재가 왔는가!!!!!!!...............................아."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내려 온 것은 아버지셨다.
마지막으로 본게 언제였지.
어렴풋이 기억을 되짚어보지만 상당히 오래 전 일이었던 듯 쉽게 생각나주질 않는다.
사진속, 기억속의 남자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군.
요즘들어 나에게 꽤나 인간적인 감정이 많이 생긴 것 같다.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는 구분할 수 없지만.

 

 


"...오랫만입니다, 아버지."
".......그래.어떻게 지냈니."
"....보시는 바와 같이."
".............혁재....?"

 

 


그 때,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리며 두번째 여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쉽게말해 지금의 아빠의 처이자, 한때는 아버지의 세컨드였던 여자.
정략결혼이었던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가 진심으로 사랑한................여자.

 

 


"..안녕하세요."

 

 


늘상 무시만 해왔던 내가 인사를 하자 그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살짝 웃어보인 뒤 아버지를 따라 거실에 가 소파에 앉았다.

 

 


"..........다시..들어올 생각이 있는게냐?"
"..아직은 없어요. 잘 지내보여서 다행이네요."
"..혁재야, 들어오는게...어떠니."
"괜찮습니다. 전......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겁니다."
"..하고 싶은 말....?"

 

 

 


눈을 살짝 감고 심호흡을 했다.

 

 


"............두분, 용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이성민과 밖에서 식사를 할 약속을 잡았다.
사실 나에게는 이성민은 소영이의 대용이었지만, 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나는 동안은 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약속때문인지 이성민은 순순히 약속에 응해주었다.
미치도록 그녀가 보고 싶었다. 울면서 지내지는 않을까. 행복할까. 사실 성민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더욱 그녀가
그리워질테고, 또한 내 질문이 성민의 입을 통해 그녀에게 전해질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되면 그녀는 의아해하겠지. 나는 그저 참는 수밖에 없는거다. 성민에게서 그녀의 모습을 찾고 사랑하도록 노력하고.
남은 날동안.

 

 

 

".....아. 그러고보니 실용음악과랬지."
"네."
"밴드부도...한댔나."
"..네."
"그 때 잠깐 봤었지. 우리집의 그 빨간머리. 이름이 조규현인데, 그 녀석도 밴드를 해. 언제 한번 소개시켜주지"
"......고마워요."

 

 

 


".................좀 웃어주는게 어때?"
"....당신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잘도 웃음이 나왔겠네요."
"...........하아,"

 

 

 


내가 이런 니 표정 보려고 지소영 대용 삼은 건 아닌데 말야.
그러니까 노력해봐, 만들어봐. 그녀에게서의 사랑을 너에게로 돌리도록.
적어도 난.......가슴은 쉬고 싶다.
머리만 아파도 되는거잖아.

 

 


그 때, 다시 경미한 통증이 싸하게 온 몸을 파고들었다.
일전의 아침처럼 구토를 할 것 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눈 앞이 새까맣게 타버린 것만 같은 그런 아픔이었다.
손을 바들바들 떨며 테이블로 손을 가져가자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는 이성민이었지만, 이내 내 행동은
연기처럼 보였는지 차갑게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래. 그게 낫잖아. 지금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젠장. 지소영이 낌새 못채게.............너 조용히 해.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니니까.

 

 

 


D-55

 

 

 

 

"뭐야, 대낮에. 진짜 센스없다, 김영운. 박정수니까 너랑 있어주는거지."
".....병원 가봐라."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간. 김영운이 술집으로 나를 불렀다.
사실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장 두려운건 나였다. 누가 죽음앞에서 태연할 수 있겠는가.
빌어먹게도 나는 아직 미련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가지고 싶은건 왠만해서 다 가질 수 있었던 나였기에
그 어떤 돈으로도, 구걸로도 얻을 수 없는게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것이 삶의 전부라는 것은 더욱 큰 공포로 다가왔다.

 

 


"......가서 뭐."
"입원하고 치료받고."
".....싫어. 안에 갖혀서 맛없는 밥 먹고 맨날 치료받고. 그런거, 그런 빌어먹을 삶. 우습잖아. 그건 사는게 아니잖아.
그런 식으로 역겹게 목숨 유지해가느니ㅡ 차라리 죽는게 나."
"......하여튼 고집하고는.
다 니 걱정되서 하는 소린거 모르겠냐."
"..알아. 아니까 말하는거야. 나 병원 보내려는 생각 접어. 가끔 아픈 것만 빼고 나 똑같아. 밥도 먹고, 놀기도 해. 그러니까.....환자 취급 하지 마."
"........니 자존심, 진짜 위태로운거다."
"...어찌됐든."

 

 


그래도 내심 김영운에게 고마워졌다.
그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져왔고 몇일전 등록해놨던 조규현의 이름이 선명하게 떴다.

 

 

 

"여보세요?"
"형, 집이야?"
"아니."
"바빠?"
"별로. 왜."
"지금 연습실인데, 보러 와."
".....뭐?"
"그냥, 형 보여줄게. 내 밴드. 우리 밴드. 형이 성공시켜줄 사람들. 도와준 사람들."
"....어딘데?"

 

 

 


-

 

 

 

연습실은 10평정도의 꽤 넓은 크기의 방이었다.
같이 따라온 김영운도 놀란 듯 안을 둘러보았다.
규현이가 마이크를 쥔 채 인사를 했고 녀석의 친구로 보이는 아이들이 나에게 차례로 인사를 했다.
어쩐지 영웅취급 받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나저나 니가 사람 돕는거 흔한 일 아니잖아."
"그래. 죽을 때 되니까 자선 사업 한번 해봤다."

 

 


영운의 말에 농담조로 툭 던지기가 무섭게 얼굴을 삭 굳힌다. 알았어, 개놈아. 농담 안하면 될거아냐.

 

 


"흠흠, 그럼 우리 공연 보여줄게."

 

 


규현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하자 드럼을 치는 녀석이 탁탁탁탁- 박자를 넣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연주되는 일렉기타와 전자 피아노.
익숙한 선율이 흐르고 녀석은 하동균의 <그녀를 사랑해줘요>를 불렀다.
선곡센스하곤 참. 지금 꼭 그 노래를 불러야겠냐.

 

 

"잠깐 기다려줄래- 지금 데리러갈게-
왜 자꾸 울기만 하니- 말해 말해 어디에 있니-"

 

 

 


녀석의 음색은 꽤나 고왔다.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녀석은 좋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뭐랄까, 노래 하나로 사람의 시선과 마음을 확 빼앗아버린 듯한 느낌.
그 노래의 가사 하나하나가 심장에 와 닿게 만드는 듯한 느낌.

 

 


"너는 모르지- 너만 모르지-
너를 사랑하는 내 맘을..
걸음이 느린 내가 먼저 가지 못해서 내 자릴 뺏긴 아픈 사랑을."

 

 


청중을 한꺼번에 압도해버린다.
김영운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녀석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밴드의 반주도 훌륭했다. 멋있었다. 녀석은 멋있었다. 꿈을 찾고 꿈을 이뤄가는 녀석의 모습은 멋있었다.
오히려 고마워야하는 것은 나였다. 이런 열정을 나는 왜 좀더 빨리 발견하지 못했을까. 나의 열정은 뭐였을까.
단지 소영이라는 단순한 대답 대신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고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얼핏 생각이 난다. 어렸을 때. 난 유독 춤추는 걸 좋아했었더랬지.
엄마가 돌아가신 뒤 관두기는 했지만ㅡ.
꾸준히 했더라면............어떻게 됐을까.

 

 

 

"...굉장한걸."

 

 

 


짝짝- 하는 박수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상념에서 벗어났다.
나도 김영운의 손에 맞춰 박수를 쳐주었다.

 

 

"정말이야, 조규현. 너 이렇게 멋진 녀석인줄 몰랐다."
"고마워. 감사합니다."
"...은성밴드랬나?"
"네. 제가 보컬 조규현이구요, 전자피아노 한지혜, 일렉 신동희, 드럼 정수환, 베이스 최유빈이에요.
"안녕하세요!"
"...내가 연예계에 아는 사람 있는데, 혹시 관심 있니?"

 

 

 

영운의 질문에 규현이 씩씩하게 대답했고 영운은 말을 꺼냈다.
아. 김기범 얘기하는거로군. 내가 왜 더 일찍 그 생각을 못했을까.
어쨌든 그의 말에 규현은 굉장히 반갑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고 영운은 다음주에 그를 소개시켜주겠다는
말과 함께 연습 열심히 하라는 인사를 하고는 나와 함께 연습실을 나왔다.

 

 

 

 

 

D-54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한 뒤 거울을 보자마자 지끈거리는 아픔이 뇌를 파고들었다.
휘청거리다말고 거울을 탁 짚자 거울 속의 나는 무수한 까만 크고 작은 점들로 덮여있었다.
눈 앞의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구토증이 밀려왔다.
잠시 변기위에 살짝 앉아있는데 밖에서 초인종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에요."
"..어, 혁재형 지금 샤워하는데.....들어오세요."

 

 

 

이성민의 목소리였다.
조규현이 문을 열어준 듯 싶었다.
분위기를 봐서는........조규현이 이성민한테 관심이 있는 듯 싶었는데.
머리도 어지럽고 해서 둘이 하는 얘기를 들어볼 심산으로 계속 앉아있었다.

 

 

 

".....저번에 봤었던.."
"조규현,이에요."
"..아. 그 밴드 한다는.....?"
"네."
"난 이성민이야. 실용 음악과 다니구."
"아아.."

 

 

조금은 쑥스러워하는 듯한 조규현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러는거지?

 

 

"그런데 너는 어쩌다가...."
".....혁재형 애인...맞죠?"
"....그런..셈이지, 일단은....?"
"................아."

 

 

"그런데 너는 어쩌다가 여기 있는거야?"
"..혁재형이.....저 도와주고 있거든요. 좋은 분이에요."
".......그 사람이?"
"네."

 

 

 

이성민. 그래도 명색이 애인인데 그렇게 놀랐다는 듯 말할 필욘 없잖아. 쪽팔리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그냥 속이 뜨겁다. 이유를 알 수 없게.
아마 지소영 때문이겠지. 이성민이 소영이를 너무 닮아서, 내가 착각하게 되버리는 거겠지.
장난이자 자기위안으로 시작한 이 관계가 진심으로 번해버렸을리는 없잖아. 아직 특별하게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말야.

 

 

 

"그렇구나.
......난 사실 그 사람 잘 몰라. 어디에서 뭘 하는 사람인지, 성격은 어떤지, 뭘 좋아하는지.
사실 알고 싶어해서도 안되는거지만."
"...무슨.....일 있어요?"
"글쎄.....잘 모르겠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아직 확신할 수가 없어.
우리 누나 정말 좋아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그렇게 변한 거 보면 무슨 사정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누나?"
"아아. 저 사람. 우리 누나랑 사겼었거든."
"...에?"
"그리고 지금은 나랑 사귀고."

 

 

 

잔뜩 찌푸리곤 호기심속에서 허우적거릴 조규현의 표정이 생각나 문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나저나 이성민. 그런거 다 말해버리면 어떡하냐.

 

 

 


"......그나저나 이 사람, 샤워하다 죽은거아니야?"
"어? 물소리 그쳤는데. 형! 뭐해요? 안 나올거야?"
"........어? 아, 어- 옷입고 있어. 나가."
"성민이형 왔어!"
"아, ....그래. 나가."

 

 

 

이미 말라버린 머리를 젖은 수건으로 털며 밖으로 나가자 소파에 앉아있는 규현이와 이성민의 모습이 보였다.
또 다시 속이 따끔. 뭐지, 이 이상한 기분은.

 

 


"....나 왔어요."

 

 


생긋- 웃으며 말한다.
늘 그렇듯 퉁명스러울 줄 알았는데...........뭐지, 너. 왜 그러는거냐, 나한테?
갑자기 왜 태도가 변했는데.
..............

 

 

"...아, 응."

 

 

 

근데, 웃는 모습, 녀석의 웃는 모습. 예쁘다고 느꼈다면 내가 잘못된걸까.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싶어서 왔어요."
"..점심?"
"네. 규현이도 같이 가요. 식구 있는 줄은 몰랐었어. 그리고......사실 그쪽이 다른 사람 도와줄줄도 몰랐어요."
"...점심 뭐 먹으려고."
"삼겹살 먹어요."
"와! 형, 나도 삼겹살 좋아해요! 혁재형, 삼겹살!"

 

 

 

.............오늘도 소화제를 가져가야하나.
어떻게 지소영이랑 똑같은 것만 좋아하니. 자꾸 그녀가 그리워지게. 그녀를 잊지 못하게.
그리고 네가 친숙해지게.

 

 


-

 

 

 


"....으욱........"
"...뭐야, 고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돼지고기...못먹어."
"뭐라구요.....? 누나는 형 돼지고기 잘 먹는다고, 좋아한다고 그랬었는데...
....설마 억지로 먹어준건 아니죠? 설마 형이? 바보아니에요?!"

 

 

 

결국 얹히고 말았다.
속이 거북한 것을 계속 참았는데 두통까지 겹쳐져서 토기가 더해졌다.
차를 세우고 길변에 실례를 하고 있는데 이성민이 왠일로 등을 두드려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연기하는거냐? 정말 애인인 척 해주려고? 황송하구만.
조규현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기 싫은건지 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녀석의 걱정은 나에게도 조금은 어색하다.

 

 

 

".......몰라, 시끄러워..."
"그냥 확 토해버려요. 잠깐 기다려봐요. 규현아! 편의점 가서 물 좀 사와!"
"..네? 아, 네!"

 

 

 

조규현이 저렇게 허둥거리는 것도 처음본다.
풉..설마......이성민한테 첫눈에 반한건가?
하긴. 마스크만큼은 정말 귀여우니까.
근데 왜 내가 기분이 이렇게 나쁜거지.
..............그래. 지소영을 닮아서 그래. 지소영을. 솔직히 우리 사이에 특별한 썸씽도 없었잖아?

 

 


내 등을 통통 두드려주는 녀석의 손길이 왠지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

 

 

 


"예, 아버지. 그렇게 해주세요."
"관심도 없던 놈이 왠일이냐?"
"그래서 싫으세요?"
"....................고맙다."
"........."

 

 


아버지의 말에 속이 울컥했다.
오늘따라 울컥할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그러고보면 진작에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해보지도 않았었구나, 난.
아버지의 재혼을........아버지의 변심한 마음을 원망하기만했지, 아버지의 사랑을, 정략결혼으로 맺어졌던, 그런 사랑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구나.

 

 


"말 나온김에....들어오는 건 어떠니."
"......그건..생각해본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럼...후계자 수업은.."
"아버지, 천천히 해요."
"..아, 그러자꾸나. 너무 기뻐서말이다. 시간은 많은데 내가 왜 이렇게 조급하게 구는지 모르겠구나."

 

 


시간이 많다는 말은, 너무나도 아프다.
나에게 잊고 있던 날짜를, 시간을 다시 각인시키니까.

 

 

 

"..그럼 끊을게요, 아버지."

 

 


죽기전에 좋은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규현녀석이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보고, 뭔가 뿌듯해졌다고 해야하나ㅡ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의 돈이었지만, 나는 내 이름으로 고아원과 양로원에 거액을 기부했고, 고등학교 장학금으로도 고액을 내놓았다.
아버지는 그게 내가 회사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보셨는지 잔뜩 들뜨셔서 통화내내 웃음기 섞이신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셨다.
이제야 조금씩 진짜 가족같다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

 

 

 

"그게 무슨 소리야, 이혁재!!!!!!!!!!!!!!!!!!"
"쉿, 나가자. 안에 손님 있어. 행패부리지 말고."

 

 

 

늦은 밤. 초인종이 울려 밖으로 나가자 별안간 내 뺨을 거세게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최시원이 보였다.
순간 휘청거리는데 큰 소란에 안에서 노래를 연습하던 규현이가 튀어나와 놀란 표정으로 나와 시원을 번갈아보았다.
야, 미친놈아. 남의 집에서 너 무슨 행패야.
후우.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규현이에게 눈 짓을 한 뒤 시원이를 데리고 일층으로 왔다.

 

 

 

".....씨발....너 무슨 소리야."
"뭐가."
"니 입으로 말해봐, 새꺄!!!!!!!!!! 무슨 소리냐고!!!!!!!!!!!!"
"뭐를."
".........너....................................죽어?"
".................."

 

 

 


아. 이제 최시원까지 알아버렸네.
더 이상 말할 사람이 없군.
참. 나도 인생 어지간하게 살았구나.

 

 

나도모르게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
최시원은 내 웃음에 더욱 더 할 말을 잃어버린 듯 했다.

 

 

 


"..............미친놈."
".....시원아."
"지랄. 너 개새끼, 내 이름 부르지 마."
"......뇌종양이래."
"니 병명따위 내가 알 필요 없잖아!!!!!!!! 꺼져, 미친놈아. 넌 내 친구도 뭣도 아니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
"왜 나한테는 말 안했어!!!!!!! 씨발, 너!!!!!!!!!!!!"

 

 


화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최시원은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아. 그래..................너도 내 친구였구나.
다행이다, 그래도...........
..............나 죽어도...............................
........기억해줄 사람이, 있으니까.

 

 

 


D-53

 

 

 

 

 

죽는다는걸 자각하는건 꽤나 무서운 일이다.
이대로 누워 잠들었다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고통스럽다.
그리고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을 본다는 것도 썩 행복하지 않은 일이다.
나는................진심으로 잠드는 순간이 무섭다.

 

 

 


눈을 떴을 때 고통이 없다는게 너무나 반갑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병은 평범한 내 일상을 앗아가버렸다.
평범하게 웃지도, 누군가를 만나지도, 먹지도, 일어나지도, 잠들지도 못한다.

 

 

 


"일찍 일어났네."
"형도 일찍 일어났네."
"뭐하냐. 이 새벽에."
"학교 가야되잖아. 병결했었거든."
"병결? 아픈데 없었잖아."
"구라깐거지. 이제 학교도 나가야지, 수업 듣고...대학도 가야되니까."

 

 

 

 

문득 조규현이 아직 학생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피식 웃어주곤 고개를 끄덕이자 토스터기로 굽던 빵을 꺼내서 대충 사과쨈을 바르더니
입에 물곤 휑하니 튀어나가버린다.

 

 

 


"나 오늘 밴드 연습하고나서, 열한시쯤에 들어올게!"

 

 

 


녀석이 나가자 집은 조용해졌다.
원래 늘 조용하던 집이었는데 녀석이 하루이틀 들어와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허전해져 버렸다.
집에 혼자 있는게 무섭다. 이 두려운 침묵이 나를 잡아먹어버릴까봐.
나는 이제 혼자서는 내 집마저 무서워하는 나약한 인간이 되버리고 말았다.

 

 

 


그 때, 이성민이 떠올랐다.
어느새 내 손은 이성민의 단축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얼마간의 신호음이 가고 약간은 부스스한 녀석의 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웅...뭐에요..."
"자?"
"..오늘...강의.......오후시간대라서. 아....맞다,근데......속은 괜찮아요........?"

 

 

 

 

 


그냥 지소영 대신해서 잘해주는거면 안챙겨줘도 되는데.
근데, 있잖아. 조금 이상한건, 나 너의 그 걱정이 싫지가 않아.
가식이라는거, 그냥 겉치레뿐이라는거 아는데 싫지가 않아.
진짜 이혁재 병신 다 되지 않았냐? 한 번 아팠다고 어떻게 사람이 이딴식으로 성격이 변할 수가 있지?

 

 

 


"어..내가 깨운거냐?"
"아뇨......일어나야했어요....................으으..나 안졸려요오.."
"아..그래. 혹시 시간 되면.....이따가 저녁이나 같이 할래?"
"저녁이요...? 으움..그럼 7시까지 우리 학교 앞으로 올래요?"
"그래. 그럼 그때 보자."
"아. 근데.......형."
"어?"
"........내 생각만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나....친해지고 싶어요, 형이랑."

 

 

 

 

문득 수화기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대고 수줍은 듯 말하며 눈웃음을 치고 있을 녀석의 얼굴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괜히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핸드폰을 닫는 손이 흥분으로 가볍게 떨렸다.
왜...왜 녀석의 웃는 얼굴이 생각난거지?
소영을 안은지 얼마나 됐다고. 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

 

 

 

 

"소영인......잘 지낸대?"
"왜 나한테 물어봐? 직접 찾아가봐."
"...장난하냐."
"나한테만 알라그래놓고 애들한테 얘기 다 했더라."
"........."

 

 

 

 

아침 10시쯤, 이동해가 찾아왔다.
딱히 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미국 드라마의 최고봉이라는 프리즌 브레이크 원작을
읽고 있었다.
참, 많이 태평하구나, 이혁재. 이제 50일 남짓 남은 시간을, 프리즌 브레이크 따위나 보면서 흘리다니.

 

 

 


이동해는 침대에 앉아서 책장을 넘기는 내 차분한 모습에 화가난 듯 했다. 난폭한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 내가 잡고 있는 책을 집어던져버렸다. 늘 부드럽고 유한 모습만 보여줬던 이동해였기에
이런 모습은 조금 생소했다. 인상을 찌푸려보지만 표정으로 보아서는 이동해가 더 화가난 것 같았다.
왜?

 

 

 


"왜 죄없는 책은 집어던지고 그래."
"갈 때까지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너 약속했어."
"이동해."
"집착이라고 해도 상관 없고, 날 사랑 못한다고 해도 미워 안해."
"동해야."
"키스해줘."

 

 

 


내가 앉아 있던 침대에 그대로 올라와 내 무릎에 올라타는 이동해였다.
녀석의 무게가 느껴졌지만 무겁지는 않다. 난감함에 한숨을 내쉬는데 내 양 뺨을 잡고 자신에게로
나의 시선을 맞추게 만든다.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그대로 눈을 감고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힌다.
이래봤자 상처받을건 너잖아. 나 절대로.....지소영 못잊는다는거 너 알잖아. 아니. 가끔 이성민과 있으면
소영이를 잊게되기는 하지만.....어차피 이성민은 지소영이랑 닮았으니까 지소영이나 다름없는거잖아.

 

 

 


결국 녀석의 마음을 돌리게 하려던 것을 체념하고 말았다. 어차피 난 죽는다.
그걸 알면서도 내게 매달려온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니어도 상관없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한다는 것 나에게는 너무나도 우스운 행동이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기에, 미련도 감흥도 없었다.
녀석의 양 뺨을 감싸쥐고 부드럽게 혀를 밀어넣자 으응-하며 콧소리를 내며 매달려오는 이동해다.
따뜻하기는 하지만, 느낌이 다르다. 문득 몇일전 클럽에서의 이성민과의 키스가 떠올랐다.
짧은데다가 알콜냄새가 났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키스는 처음인 듯, 혀를 어디에 둘 지 몰라 망설이며 이리저리
피해가는 자극이 알콜보다 더 짜릿했다.
아. 내가 왜 그 녀석의 생각을 하는거지. 그아이는 그녀의 대용일뿐인데.

 

 

 

 


숨이 가빠옴을 느껴 천천히 입을 떼자 긴 실로 녀석과 나의 입술이 이어져있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녀석의 눈만 마주보고 있자 곧 천천히 시선을 피한다.

 

 

 

 

 

"......억지부려서 미안해."
"알면 됐다."
"....점심 같이 먹을까?"
"그러던가."
"뭐 먹고 싶어? 내가 만들게."

 

 

 

그러자는 내 말에 곧바로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앞치마를 그러매는 녀석은 꽤나 예뻤다.
왜 하필이면 나한테 매달리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격도 이지랄에다 이젠 언제죽을지도
모르는 나에게 왜 이렇게 잘 해주는걸까. 사랑일까? 정말로?
뭐가 됐든 간에 참으로 복잡한 감정이 아닐 수 없다.

 

 


".............김밥."
"김밥? 뭐야. 오랫만에 내가 만드는건데. 다른거 없어?"
"김밥 먹고 싶어."

 

 

 


녀석은 잠시동안 동정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지만 곧 재료를 사오겠다며
집을 빠져나갔다.

 

 

 

 

-

 

 

 


이성민의 대학교 근처에 차를 세워두었다.
얼마안가 핸드폰이 울렸고 녀석의 번호가 떴다.

 

 


"여보세요."
"형, 나에요! 어디있어요?"
"아. 입구에서 쭉 내려와. 내 차 알지? 검은색 에쿠즈."
"보인다! 나 갈게요!"

 

 

 

녀석의 목소리가 밝게 울렸다. 보인다는 말에 차에서 내리자 친구들과 함께 웃으며 길을 걸어내려오는
이성민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나를 향해 저런 웃음을 지어주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녀석의 웃음은
굉장히 예뻤다. 역시 지소영과는........조금은 다른 얼굴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닮았다는 생각만 했는데
아니었다. 녀석의 얼굴에는 녀석만의 매력이 있었다. 지소영과는 다른 얼굴이다.

 

 

 

"나 오늘은 아는 형이랑 갈거니까 너네 먼저 가! 바이바이!"

 

 

 

치사하다며 웅웅거리는 친구들에게 활기차게 손을 흔들어주는 성민이를 보자 아이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녀석을 위해 차 문을 열어주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도도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탄다.

 

 

 


"형. 이제보니까 되게 잘생겼네요."
"이제 알았냐."
"쳇. 근데 그 말투 좀 고쳐요. 뭐야, 무뚝뚝하게."
"내 말투가 뭐가?"
"아뇨오.....막 내심 성격은 착한거같은데, 말투때문에 싸가지없어 보이잖아요!"
"나참. 살다살다 성격 착하다는 말 처음 들어본다, 너한테."
"어? 나 그럼 형한테 처음이네요? 와아. 기분이 이상한데."

 

 

 

 


...................너한테 처음?
......그러게. 나도 기분이 이상하다.

 

 

 

 


D-52.

 

 

 


-

 

 

 

 

"있잖아요, 막 어제 형 보고 우리 밴드 어떤 여자애가 형을 소개시켜달라 그랬는데요,
나 이상하게 화가나는거에요. 그래서 싫다그랬어요. 싫다고 막 화냈어요. 왜 화가 났을까요?"
"글쎄..왜 그랬을까?"
"그래서 분위기 완전 이상해져가지고 연습도 일찍 끝나구, 오늘은 공강이라서 할 것도 없는데
형 집 가도 되요? 규현이도 집에 있으라 그러세요! 내가 맛있는거 해갈게요!"
"..온다구?"
"애인 역할 좀 해보려구요! 왜요, 안돼요?"
"아니. 와. 기다릴게. 언제쯤 오는데?"
"음...한 세시간쯤 걸릴 것 같아요."
"알았어."

 

 

 

전화벨이 울려서 눈을 뜨자 오후 2시였다.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자버린 것 같다. 머리가 쥐가 난 듯
멍멍했지만 성민이의 목소리를 듣자 정신이 확 깨는 듯 했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이러면 안되는데,
내가 지소영을 잊었을리가 없는데. 아마 지소영의 대역이라서 이렇게 느껴지는건가보다. 고장난 내 뇌가
지소영과 이성민을 일치시켰나봐. 그래. 그런가봐.

 

 

 


녀석에게 듣는 애인이라는 말은 가슴이 따끔할정도로 묘한 말이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 참. 어제 밥을 너무 많이 먹고 들어왔나.
아니면 오늘 아침에 너무 많이 자서 그런가.
뇌가 고장나버린 것 같다. 아프면 다 이렇게 되는걸까?

 

 

 

규현이는 나갔는지 집에 없었다.
수업중이려나.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너 지금 수업시간 아니냐?"

 

 

 

 

신호음이 두어번 가자마자 조규현이 전화를 받았고 그 스피드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내 질문에 조규현도 당황한 듯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땡땡이치고 있어."
".....얼씨구."
"근데 왜?"
"너 수업 몇시쯤 끝나냐."
"몰라. 5시 반이었나."
"끝나자마자 집으로 와라."
"아, 왜! 오늘 은성이랑 맹연습하기로 했어! 다음주에 첫공연 있단말이야!"
"진짜?"
"두고봐. 진짜 보란듯이 성공해보일테니까."
"성민이 온다그랬는데. 너도 집에 있으랬어. 세시간쯤 뒤에 온다고."
"........성민이형이?"

 

 

 

자랑스럽게 말하던 녀석의 목소리가 일순 가라앉았다.
역시.....이성민을 좋아하는건가. 문득 이성민을 보던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차피 나한텐, 장난감일 뿐이니......두달이 지난뒤에는 너에게 줄게.
나도 모르게 잔인한 생각을 하며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쩌면 나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못되게도.

 

 


"응. 뭐 만들어온대."
"..배, 밴드연습. 조금 늦게 가도 어차피 연습 많이 할 수 있으니까..가, 갈게!"

 

 

 

조금 더듬는 녀석의 목소리가 성민이에 대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 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그냥....끈적끈적하고..미묘한게,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지, 이런 기분.

 

 

 

 

-

 

 

 

 

"짜잔-"
".............이게 뭐야."
"과일크림빵인가?"
"케�이라구요, 케�!"

 

 

 

 


성민이 가져온 박스안에는........조금 어색한 모양의 케�이 있었다.
직접 만든건지 삐뚤어진 어설픈 빵 모양에 조금 과다하다 싶을 정도로 덕지덕지 발라져있는
생크림과 어설프게 잘라져서 크림을 장식하고 있는 과일의 모습이 굉장히 귀여웠다.
짐짓 알아채지 못한 척 하며 규현이와 시선을 교환한 채 새침을 떼자 얼굴이 발개진 채 울상이
되서 케�이라고 외치는 녀석이 사랑스러웠다.

 

 


"흐응."
"카, 칼 없어요? 맛있을거에요!"

 

 

 

허둥거리며 부엌으로 가서는 과도와 접시를 들고 오는 녀석이었다.
부드러운 빵은 쉽게 스윽 잘려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순간 또 머리가 띵- 하고 울려왔다.
케�이 두개, 세개로까지 겹쳐보이며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간신히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녀석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쫓아오는 것을 느꼈다.

 

 


"..먼저, 먹.....고 있어."

 

 

 

 

강렬한 통증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제대로 되지 않는 발음을 입을 억지로 움직여 간신히 대답한 뒤 부엌으로 들어와 물을 따르고
찬장의 머그컵 뒤에 숨겨둔 약병을 꺼낸 뒤 손바닥에 여덟알정도를 쏟아붓고 입속으로 털어넣었다.
물을 마시자 꼴깍- 하고 약이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썩 좋지 않은 약의 쓴 맛에 미간 사이를 좁힌 채
서랍에서 포도맛 사탕을 꺼내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픔이 가실때까지 부엌에 앉아있기로 했다.
테이블에 앉아 팔을 포개어놓고 머리를 기대어보지만 아픔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여덟알이면 한 번에 먹기에는 꽤나 많은 양인데 벌써 면역이 생겼나보다.
이를 악 물어보지만 누군가가 머리를 도끼로 쪼개기라도 하는 듯이 덜덜 떨리는 팔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5분 정도가 지나자 이성민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여기서 인상쓰고 뭐해요! 빨리 와서 먹어요!
나 형 생각하면서 만든거란말이야!"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말하는 녀석이 귀엽다. 내 생각을 하면서 만들었다.....?
짐짓 굳어버렸다고 생각한 심장이 반응함을 느꼈다.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을 향해 파리한 웃음을 한 번 흘리고 걸음을 옮기려다 순간 비틀거리고
말았다.
깜짝놀란 듯 뛰어와 내 팔을 잡는 녀석.

 

 

 

 

"..왜, 왜그래요?"
".....물마시다가 식탁에 다리 부�혔어."
"뭐야! 그래서 이렇게 폼잡고 앉아있는거였어? 못살아. 일루와요, 부축해줄게."

 

 

 


그리고는 내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거실로 걸음을 옮기는
이성민이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아픔이 싹 가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보다 제법 무거울법한 나를 옮기느라
낑낑거리는 녀석의 옆선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거실로 나와 먹은 이성민이 만들어온 생크림 케�은, 싱겁다고 규현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던
그 케�은, 나에게는 지독하게 단 맛이었다.

 

 

 

 


-

 

 

 

 

 

 

규현은 밴드 연습을 하러 가야한다며 후딱 사라져버렸고, 나는 이성민을 데려다주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 뉴스 봤는데 형..재벌 그룹 아들이라면서요?"
"..뭐 쓸데없이 그런걸 보고 그래."
"나오는데 어떻게해요! 근데 형이 막 좋은 일 되게 많이 했더라. 장학금도 기부하고, 고아들 후원해주고.
진짜 어쩌면 가슴이 따뜻한 사람인지도 몰라요."
"자꾸 간지럽게 그런 얘기 하지 마."
"그냥 쑥스럽다고 그러면 안돼나? 언어 파괴 주범."
"야."
"아! 몰라요! 근데 형 몇일새에 좀 마른거같네. 밥 좀 잘 챙겨먹고 다녀요. 아니다, 내가 챙겨줘야지!"
"뭘 챙겨."
"애인이잖아요!"

 

 

 

 

 

애인이라며 뿌듯하게 웃어보이는 이성민을 보자 또 다시 심장이 덜컹거렸다.
내가 원래 이렇게 줏대가 없는 사람이었나.
이제 인정해야될지도 모르겠다. 녀석에게 조금씩 마음이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빌어먹게도 지소영의 대용으로 이녀석을 택한것이 살아가면서 나에게 가장 큰 잘못이었던건지도
모르겠다.

 

 

 

 


녀석의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내리려는 녀석의 팔을 붙잡고 조심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꼬마.
만약......나 죽으면 어떡할래."
"........뭐? 그런걸 왜 물어요?"
".....그냥."

 

 

 

"존나 좋죠! 형한테서 해방되니까.
누나 눈치 안봐도 되고, 사랑하는 애인이 남자라고 다른 사람 의식 안해도 되고.
형 죽으면, 보란듯이 잘 살아줄거야. 나랑 누나..당신이 망쳐놨으니까 당신에게 남은 삶만큼
세상에서 젤 행복할거에요."

 

 

 


모진말이 아프면서도...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그렇게 해줘. 행복해줘, 제발.
니가 지금 말한대로. 나 기억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나 보란듯이 행복하게 살아줘.

 

 

녀석이 나에게 가진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라는게 오히려 다행스럽다.
적어도 난 남은 시간동안 녀석과 행복할 수 있을테고 녀석은 내가 사라진뒤에는 나를
깨끗히 잊어버릴테니.

 

 

 

"..아니다. 내 허락없이 죽지 마요."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녀석의 말에 작은 기대를 걸어보는 나였다.

 

 

 

 

"......?"
"우리 누난 어쩌고?
그냥 죽어버리면 정말 가만 안둬. 무덤까지 팔거야."

 

 


....그리고 겹쳐지는 쓸쓸함.

 

 


니가 날 보려고 무덤까지 파준다 이거냐...
영광이네....

 

 


"......아."
"오늘 형 어디 이상하다. 아까 다리가 아니라 머리 부�힌거 아니에요?"
"아냐. 들어가라. 잘자."
"응, 안녕! 조심해서 들어가요!"

 

 


녀석의 팔을 놓아주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진다.
그거 알아?
너 나보면서 웃어준거......그렇게 환하고 예쁜 미소지어준거...........
..........오늘이 처음이다.

 

 

 


D-51

 

 

 

 

-

 

 

 


"형, 인간성 드러워서 친구도 없지?"
"뭐?"
"맨날 집에만 있더라. 좀 나가서 놀고 그래라.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살면서 심심하지도 않나."
"....."
"아. 그리고 이거! 우리 은성 첫 공연 하는 장소야. 다음주 화요일이니까 3일 남았네."
"..그래."
"성민이형이랑 같이 와. 알았지?"
"알았어."

 

 


교복을 입고 운동화 앞창으로 땅을 탕탕 두드리던 조규현은 나를 향해 살짝 웃음을 지어보인뒤 집을 뛰어나갔다.
어제 저녁에 전화가 왔다. 장학금을 기부했던 늘푸른고등학교에서 감사인사를 한다나.
오랫만에 정장을 꺼내입자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머리가 약간 지끈거리는 것 같아서 약 세알을 물과 함께
삼켰다. 고작 병 하나로 사람 하나가 이렇게 무너진다는게 우습기도 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네비게이션을 켜자 늘푸른고의 위치를 알려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코가 시큰- 하며 붉은 액체가 코 밖으로 후둑 쏟아졌다. 제기랄.
와이셔츠에 묻지 않게 조심하며 휴지를 꺼내 코피가 떨어진 시트를 마구 문질렀지만 회색의 시트에는 벌써
피가 짙게 스며들어버린 것 같았다.
미친듯이 쏟아지는 코피에 나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껴 휴지를 마구 뽑아 내 코를 틀어막았다.

 

 

 

누가 죽음앞에 태연할 수 있겠는가. 난 태연함을 가장하고, 두려움을 포장한 채 연기를 하고 있었다.
삼류 드라마속의 기적같은 것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멋대로 살아왔던 나였지만, 병 앞에 이미 나의 삶의 주관은 내가 아니었다.
내 삶을 쥐고 있는 것은 운명. 운명이라는 이름의 굴레.

 

 

 

 

-

 

 

 

 

휴지로 얼굴을 다시한번 닦아낸 뒤 차에서 내렸다.
교장과 교감이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조신한 걸음으로 따라오는 한 남자아이.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기부금은 잘 활용해서 좋은 학교로 만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노력해주십시오."
"여기는 저희 학교의 전교회장이자 유망주인 김려욱군이랍니다."
"안녕하세요."
"아, 그래. 안녕."

 

 

 


교장의 안내에 따라 교장실로 왔다.
차를 한 잔 마시고 장학금을 사용할 향후 계획을 듣고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들었다.
그리고 려욱이란 아이에게 나에게 학교를 안내해달라고 지시하는 교장선생님이었다.
솔직히 귀찮았고 이 학교의 구조따위는 알 필요가 없었지만 거절하는것도 예의는 아닐 듯 싶어서
녀석을 따랐다.

 

 

 

 

"공부를 잘한다고?"
"..아, 네."
"어디 생각하고 있니?"
"학교에서는 서울대쓰라고 하시지만.."
"성적이 되면 서울대도 괜찮지 않니?"
"사실은....미술을 하고 싶거든요. 뭐, 이제와서는 너무 늦었지만.........소질있다는 소리도 자주 들어왔고,
역시 공부하는 것보다는 저는 미술이 더 좋으니까.."

 

 

 


문득 녀석의 손으로 눈이 갔다.
정말로 미술을 좋아하는건지 공부를 하느라 깨끗해야 할 녀석의 손이 상처투성이에 엉망이었다.
아. 조규현 같은 녀석 하나 더 있구만.

 

 

 

"미술 학원을 다니는건 어때?"
"3학년이다보니까.......수능 준비도 해야하고...현실에 제약이 너무 많아서요. 집안 형편도 안좋아서..
사실 이 학교도 장학금으로 겨우 다니는걸요. 미술학원은 너무 비싸기도 하구요."

 

 

 

쑥스러운 듯 웃어보이는 녀석.
하아. 또.....이렇게 하는 수 밖에 없나.

 

 

 

 

"그럼....이건 어때.
내가 50일동안 널 서포트해줄게. 미술학원에 보내줄테니까, 그 안에 네가 나에게
성과를 보여주는거야. 서울대를 수시로 합격하든지, 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하든지 그게 뭐가 됐든간에
성공을 해보이는거지."
"..네?"

 

 

 

 

내 말에 녀석의 눈이 열정으로 반짝 빛난다.
조금 씁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누군가의 꿈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하다.

 

 

 

 

-

 

 

 

 

 

"이혁재.....너 살 되게 많이 빠졌다."
"무슨 헛소리야. 나 요새 존나 많이 먹는데."
"......."

 

 

 


김영운과 박정수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자주 가던 술집으로 향했다.
역시나 오늘도 사이 좋게 손을 꽉 맞잡고 있는 둘.

 

 

 


"요즘들어 기분이 더 좋아진 것 같아."
"억지로 좋은 척 하지 마."
"꼴값떨지마. 김영운. 나 진짜 좋아."
"...............후."

 

 

 

"근데 왜 보자고."
"치료 받자, 혁재야. 나랑 영운이가 좋은 병원 알아봤어."

 

 

 


...................또 그 소리.

 

 

 

 

"치료 안 받는댔잖아. 씨발...........그럼 나 너무 불쌍해지잖아.
내가 왜 나까지 동정해야돼, 씨발....."
"혁재야."
"누가 나 동정하는거 싫은데, 내가 날 동정하는건 더 싫어."
".........."
"이제 얼마 안남았어. 그 기간에도 나 보기 싫으면.....그냥 나 잊어도 돼."

 

 

 


어차피 녀석들은 귀찮을터였다.
병들어서 곧 죽을 녀석의 옆에 붙어있는 것. 성격도 좋지 않은 그런 녀석. 잘 해준 것 없는 녀석.
그러나 생기 없는 내 표정을 보는 김영운의 생각은 좀 달랐나보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간을 휴지조각처럼 확 구기더니 버럭 화를 냈다.

 

 

 


"씨발, 미친 새끼!!!!! 그럼 아파 죽겠다는 새끼한테 치료하자는 얘기도 못해?!?!?!?!?!?
그렇게라도 너 오래 붙잡아두고 싶다는 우리 생각은 안해?!?!!? 씨발. 그래, 니 멋대로 해!
넌 왜 우리 떠날 생각만 하는거냐?!?!?! 우리가 그 것밖에 안되는 존재였어!?!?!?!?
너 귀찮아할거라고 생각하는거냐?!?! 이혁재, 니 그런태도 한두번 보는건 아니지만 이번껀 정말
질린다, 나도. 박정수. 일어나, 가자. 이런 새끼 걱정해 줄 가치도 없는 놈이야."
"영운아!"
"일어나라니까, 씨발!!!!!!!!!!!!!!!!!!!!!!!!
그래. 이혁재, 니가 원하는데로 꺼져줄테니까. 죽을때까지 혼자 골골거리든 잘 먹고 잘 살든 니 멋대로 해!
니가 그렇게 귀찮아하는 참견. 안해줄거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와 두 녀석을 향해 집중되었다.
뭔가 말을 해보려고 했지만 입이 차마 열리지 않았다.
순간 울컥한 기분과 함께 눈물이 나려했다.
출입구로 걸음을 옮기는 둘을 보면서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D-50

 

 

 

 


-

 

 

 

 

"데이트해요!"
"...뭐?"
"데이트하자구요! 왜요, 싫어요?"
"아니, 싫은게 아니라 갑작스러워서......"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이성민이 데이트를 하자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적극적으로 변해 적응이 되지 않는 녀석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쑥스럽다며 푸후후 웃곤
손에 쥐어진 영화 티켓 두장을 척- 내밀어보인다.

 

 

 

 

"쨘! 선물받은건데 형이랑 같이 가고 싶어서요!"
"뭐야?"
"극락도 살인사건! 박해일 나오는거래요! 괴물보고나서 박해일짱팬 됐는데."
"뭐 그런걸보냐."
"아, 빨리요! 이거 보구, 점심먹구, 우리 오늘 하루종일 같이 놀아요!"

 

 

 


녀석의 보챔에 옷을 입고 차에 올라탔다.
아프고나서는 부쩍 움직일 일이 많아진 것 같다.
아니면 초조해진 탓에 자꾸만 내가 일을 만드는건지도 몰랐다.

 

 

 

막 앞좌석에 올라타려던 이성민이 멈칫- 한다.
녀석은 앞 좌석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하얀 약병을 꺼내 올렸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약병을 내려다보며 나에게 내민다.

 

 

 


"뭐에요? 약통같은데."
".....비타민제야."
"..킁킁..에엑. 맛없는 냄새. 비타민제는 레몬맛이 제일 좋은데. 이거 말고 레모나먹어요!"
"앞으론 그럴게."

 

 

 


태연하게 넘기자 이성민도 눈치채지 못한듯 레모나를 먹으라며 내 팔을 잡곤 칭얼거렸다.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제서야 만족한 듯 다시 앞을 보고 앉더니 크로스백에서 사탕 두개를 꺼내
하나를 까서 내 입으로 쏙 넣어준다.
부드러운 딸기향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자기는 오렌지맛이라며 아이처럼 헤헤 웃곤 사탕을 까서 입에 넣자 볼이 불룩해졌다.
문득 볼을 손가락으로 눌러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잠자코 운전에만 집중했다.
금세 녀석은 심심해졌는지 라디오를 틀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창밖을 내다보기도 했다.
그 모습이 강아지같아보여 살풋 웃어버리고 말았다.

 

 


"왜 웃어요?"
"강아지같아서."
".....얼씨구?"
"진짜야. 귀엽다."

 

 

 

내 말에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는 이성민이었다.
글쎄. 너 나 싫어하는거 아니었나.
녀석의 태도가 의아해 흘긋거렸지만, 녀석은 내가 힐끔거리는걸 느꼈는지 창밖으로 고개를 향한 채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조금은 이상하다. 정말 싫어한다고 해도 저런 귀여운 연기를 할 수 있는건가.
문득 녀석이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전혀 신빙성이 없는 생각이었다.

 

 

 

 

미쳤지, 미쳤어, 이혁재. 지소영을 이렇게 한 번에 잊어버릴 수 있다니.
머리를 도리도리 저어버리고 한숨을 폭 내쉰 뒤 주차를 했다.

 

 

 


-

 

 

 

 

"그래서 박해일이 범인이라는거에요?"
"그런거 아니야?"
"아아. 나 저거 내용 이해가 안돼!"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싸맨 채 입을 푸우우 내미는 이성민.
그러고보면 이 녀석은 입을 자주 삐죽거린다.
귀여워보이기는 하지만.

 

 

 

녀석과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비록 들어서자마자 신음을 뱉을만큼의 격한 고통에 이를 악 물고 부들부들 떨리는 팔에
자꾸만 샌드위치 속에 든 상추니 참치등을 떨어트리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별 의심 없이
아이같다며 휴지로 테이블을 닦았다.

 

 


억지로 삼켜낸 샌드위치가 금방이라도 올라올 것만 같았다.
격한 구토증에 입을 억지로 틀어막고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먹은 것을 게워내자 조금씩 속이 편해지기 시작했지만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병원에 다시 한 번 더 가봐야겠군.

 

 

 

 

얇은 한숨을 내쉬며 변기를 누르자 토사물들이 물과 함께 쓸어내려갔다.
약의 쓴 맛과 위산의 시큼한 맛이 입가를 멤돌았다.
이런 상태로는 이성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틀고 왈칵 쏟아지는 물로 입을 헹구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왜 이렇게 늦어요?"
"화장실 줄 길어서."
"배 안고파요? 왜 이렇게 깨작깨작 먹어?"
"아냐."

 

 

 

인간은 정말 간사한 동물이다. 아까는 속에서 그렇게 거부반응을 일으키던 샌드위치가
속을 게워내고나자 굉장한 허기로 인해 맛있게 느껴졌다.
허겁지겁 먹는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이성민을 무시하고는 콜라를 들이켰다.

 

 

 

"형 오늘 좀 이상해보여요."
"..내가 뭐가?"
"......좀..조급해보인다그래야..될까."
"..별로.."
".....우리 이거 먹고 뭐하지? 아. 맞다. 인형뽑기 해줘요!"
"..인형뽑기? 나 그런거 못해."
"해줘요, 해줘요오!"
"......알았어."

 

 

 

이 녀석은 정말 아기같다.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

 

 

 


"못한다면서!"
"진짜 처음해봐."
"사기쟁이."
"그래서 싫어?"
"아뇨!"

 

 

 

녀석과 들어온 곳은 시내의 오락실이었다.
몇번 와보지 않은 탓에 약간 어색하기는 했지만, 꽤나 즐거웠다.
300원에 한 번, 500원에 두 번 할 수 있는 인형뽑기 기계 앞에 앉아 이성민에게 인형을 뽑아주는건,
아니, 인형이 하나씩 뽑힐때마다 꺌꺌 웃으며 박수까지 쳐가면서 좋아하는 녀석을 보는게 너무 즐거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친구녀석들이 봤으면 필시 비웃었을테지만, 나의 이런 모습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절망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는 주인 아저씨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이성민의 팔에 가득 안겨지다 못해
하나 얻은 비닐봉지에까지 인형을 와르르 쏟아넣고 오락실을 나오자 시계는 벌써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은 너무 빨리 간다. 특히 이 녀석과 함께하는 시간은.
그리고...나에게는 그런 시간을 붙잡을 어떤 방법도 힘도 없었다.

 

 

 

"이제 뭐할래?"
"노래방가요!"

 

 

 


그리고는 나를 끌고 무작정 노래방으로 왔다.
30분에 10000원을 내자, 이성민은 특유의 애교있는 콧소리로 보너스많이주세요~라면서 아줌마가 지정해준
3번방으로 내 팔을 이끌었다.
노래방도 참 오랫만이네.
아줌마가 내준 새우깡을 먹는데, 녀석이 선곡한 노래는 요즘 뜨고 있는 원더우먼스의 <텔 미>였다.

 

 

 

"니가 날 혹시 안좋아할까봐 혼자 얼마나 애태운지 몰라.
그런데 니가 날 사랑한다니, 어머나. 다시 한 번 말 해봐!"

 

 

 

그럴싸하게 표정과 춤까지 따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녀석은 굉장히 귀여웠다.
아기 목소리에 귀여운 안무가 무척 잘 어울렸다. 뭐랄까...유치원생 재롱잔치를 지켜보는 아버지가 된 기분이랄까?
그 노래가 끝나자마자 지치지도 않는지 선곡책을 마구 뒤적거리더니 서지영의 hey boy 에
터보의 검은 고양이 네로까지, 온갖 듣도 보도 못한 노래를 열창을 하면서 막춤을 추었다.
녀석을 지켜보는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다. 나도모르게 입가에 호선을 그리고 있는데, 녀석이
헥헥거리면서 이마에 묻은 땀을 슥- 닦더니 마이크를 나에게 넘긴다.

 

 

 


"이제 형 차례에요!"
"..뭐? 난 노래 못해!"
"같이 왔잖아! 나만 불렀어요! 이거 불공평한거 알죠?!"

 

 

 

머뭇거리던 나는 선곡책을 넘겼다.
팀의 사랑합니다의 번호를 누르자 성민이의 눈이 땡그래진다.
얼마간 반주가 흐르고,

 

 

 

 

"나빠요, 참 그대란 사람.
허락도 없이 왜 내 맘 가져요.
그대 때문에 난 힘겹게 살고만 있는데, 그댄 모르잖아요."

 

 

 

뭐라고 말하려던 녀석의 입이 벙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언어도 내뱉지 않는다.

 

 

 

"알아요, 난 아니란걸.
눈길 줄만큼 보잘 것 없단 것.
다만 가끔씩 그대 그 미소 여기 내게도 나눠줄 순 없나요.
비록 사랑은 아니라도.

 

언젠가 한번쯤은 돌아봐주겠죠.
말없이 뒤에서 기다리면 오늘도 차마 못한 가슴속 한마디.
그대 사랑합니다."

 

 

 


반주가 흐르자 녀석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눈만 굴리고 있다.
어딜 봐. 내 얼굴 봐줘.
내 감정이 그대로 담긴 노래야.
믿기지 않겠지만, 믿을 수 없겠지만....그 짧은 시간동안 너를 마음에 품게 되었다고.

 

 

 

"........흐르는 눈물처럼 소리 없는 그말.
그댈 사랑합니다."

 

 

 

 

한참동안 침묵이 흐르고 녀석이 갑자기 짝짝 손바닥을 마주치며 소리를 낸다.

 

 

 


"형, 노래 진짜 잘 불러요!"

 

 

 


-

 

 

 


"안춥냐?"

 

 

 

저녁까지 먹고 밤 10시 쯤.
산책을 하자는 녀석의 말에 공원으로 왔다.
여름이었지만 저녁에 되자 선선해졌고, 반팔에 와닿는 바람이 차가워 어깨를 움츠리며 묻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문득 가로등아래로 비춰지는 녀석의 입술이 반짝거리는게 보여진다.
애가탄다. 입을 맞출 수 있다면.

 

 


"...형!"
"어?"
"노래 불러줘요!"
"무슨 노래?"
"아까 불렀던거."
"쪽팔려."
"사람들 별로 없잖아요!"

 


내 팔을 앞뒤로 흔드는 이성민. 결국 입을 열고 만다.

 

 


"언젠가 한번쯤은 돌아봐주겠죠. 한 없이 뒤에서 기다리면.
오늘도 차마 못한 가슴속 한마디. 그댈 사랑합니다-"
"으응. 진짜 우리 밴드부에 캐스팅하고 싶다. 얼굴도 잘생겼구."

 

 

 


손가락으로 내 콧잔등을 콕 찌르며 말하는 녀석이 여우같았다.

 

 


"아. 맞다. 내일 규현이 밴드, '은성'. 공연한다는데, 3시에 문화회관 야외무대에서. 첫 공연이라고 너랑 나랑
오라더라."
"에, 진짜요?! 규현이 공연?!"
"응."
"와아. 당연히 보러 가야죠! 꽃 사가야돼나? 장미가 낫겠죠? 몇송이 사가야되나."

 

 

 

문득 들떴다는 듯 녀석의 눈이 반짝 빛난다.
그 것에 또 나도 모르게 질투를 느껴버려 미간을 찌푸리자 인상쓰면 조폭같아요, 그러지마요! 란다.
어이없어서 한숨을 내쉬자 헤헤- 웃으면서 갑자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포게어지는 무게감에 눈만 깜박거리자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나, 있죠....이상해요. 처음엔 되게 미웠거든요, 형이? 근데.
좋아져요. 점점 좋아져요.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데.......형이 좋아져요."
"......나도 이러면 안되는거 아는데, 니가 좋아진다."

 

 

 

그리고는 곧바로 녀석의 입술로 내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타액이 촉촉하게 섞여들어가며 우리의 혀가 얽혔다.
미숙하게, 하지만 끈적하게 얽혀들어오는 녀석의 혀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D-49

 

 

 


-

 

 

 


"....괜찮아?"
"...모르겠어.."

 

 


이를 악 물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직도 밤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어둠에도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영운에게 미친듯이 전화를 걸고나서 아침 10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앞을 더듬어 거실로 나왔다.

 

 

 


얼마안가 회사에서 나와 집으로 온 고마운 김영운 덕분에 옷을 갈아입고 김영운의 차를 탄 뒤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아주 조금씩, 부옇게 시야가 뚫리기 시작했다.
회색빛의 세상. 답답한 마음에 시트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

 

 


"......그러게 진작에 병원에 가자니까."
".....내가 사진기가 된 것 같아. 흑백사진을 보는 기분이야."
"..후우.."

 

 

 

병원에 도착할때쯤 시력은 다시 제 기능을 발휘했다. 부옇게 멀어졌던 것들이 다시 제자리와 제 색깔을 찾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금은 어지러운 기분으로 김영운의 팔을 잡고 병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

 

 

 


"뇌의 기능이 저하되는겁니다. 빠를수도, 느릴수도 있지만 정확한 것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시력의 저하와 더불어 청력저하, 언어장애가 올 수 있고 앞으로는 몸을 움직이시는 것도 불편해지실
겁니다. 소화기능과 이뇨기능도 저하될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 입원치료를 하시는게-"

 

 

 


내 몸은 생각보다 많이 망가져있었다.
뇌가 이렇게 중요한 기관이었구나. 새삼 느껴졌다.
옆에서는 김영운이 굳은 표정으로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뇨. 입원은 안할겁니다."
"이혁재!!!!!!"
"안 해. 말 했잖아, 영운아."
"....씨발. 니 맘대로 해."
"..그럼 되도록 신선한 야채 많이 드실 수 있도록 하시구요, 아프셔도 약을 많이 드시면 저항력이 떨어지니까
5알 이내로 드실 수 있도록 해주세요. 원래 사실은 강제로라도 입원 치료를 해야하지만 그렇게 완강하시니까
저도 뭐라고 말을 드릴 수가 없네요. 하지만 다른 증상이 나타나시면 바로 찾아주셔야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영운은 뭐라고 더 말을 하려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어버렸다.

 

 

-

 

 

 


"오늘 규현이 첫 공연이야."
"...."
"니가 연예계 뚫어준다며. 니가 가봐야지."
".........니 선택이니까 이제 나도 더이상 뭐라고 말 안할게."
"...고맙다."
"......근데."
"...응."
"힘들면 기대. 그래도 니 친구잖아. 너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마."

 

 

 


김영운을 보면서 웃어주자 쓰린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백미러로 힐끔 본 내 얼굴은 그 사이 많이 여위어있었다.
이상하다. 잘 먹고 다녔는데.

 

 

 

-

 

 

 


"은!성! 은!성! 조!규!현!"
"꺄아아악!!!"
"오빠!!!!!!! 여기 봐요!!! 꺄아!!!!!!!"

 

 

 


입구에서 장미꽃송이를 들고 있는 성민이를 만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팬들이 꽤나 많은지 기집애들이 정식가수도 아닌 그 애들이 서있는 무대로 뛰어가며
플랭카드를 흔들고 선물을 올려놓는등 난리도 아니었다.
얼마간 조율이 끝나고, 팬들의 환호성 아래 조규현이 입을 열었다.

 

 


"원래 막 길거리 공연하고 그랬는데, 우리. <은성>이라는 이름으로는 처음 만나죠?"
"네에!!!!!!!"
"그 때부터 눈에 익었던 분들도 많이 계시고 처음 보는 분들도 계시네요! 자, 인사 먼저 할까요!
안녕하세요, 우리는 <은성>입니다!"

 

 

무대위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조규현의 어깨가 든든해보였다.

 

 

 

"그럼 먼저, 이기찬씨의 <세사람>으로 시작할게요."

 

 


조규현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조규현이 이내 우리를 찾았는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하는 밴드. 부드러운 반주가 귓가를 가득 메우고 녀석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성민이가 조규현 노래 듣는건 처음인 거 같은데.

 

 

 

"그 사람 때문에 하루종일 속상하다는 너를 온종일 달래고 또 달래다,
돌아오는 저녁길 깜깜해진 하늘이 슬퍼 아주 잠깐은 울었는지도 몰라.
이제 이만하면 지겨울때도 됐는데, 언제나 그 사람을 보는 너를 바라며 사는 일.
그는 니 앞에 나는 니 뒤에 항상 앞만 보는 우리.
너는 모르지, 너는 모르지. 사랑한단 말도 할 수 없는 날.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니가 모르는 사랑이 있어."

 

 

 


이성민에게만 눈을 맞추고 노래하는 조규현.
녀석의 마음도....꽤나 깊어져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또 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어떤 감각. 질투였다.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이건 질투라고.

 

 

 

조규현의 고운 목소리에 몰입되서 빤히 무대를 쳐다보는 이성민의 턱을 나에게로 돌려 입을 맞추었다.
놀란 듯 녀석은 어깨를 잠시 떨었지만 이내 나의 키스에 응해주었다.
조규현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멈칫- 하며 떨렸지만 이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떤 승리감과도 같은 감각이 뇌를 파고들었다.

 

 

 


D-48

 

 

 


-

 

 


"..................누나.......임신했대요."

 

 

 

이성민의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 했다.

 

 


".....뭐?"
"......임신...테스트...그거 양성반응 나왔대......"
"...........뭐...라고....?"

 

 


한번만에?

 

 

 

머리가 흔들렸다. 이성민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섞여있었다.
이성민은 울면서 뭐라고 더 말을 했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원하든 원치 않든.......지소영을 만나야한다.

 

 

 

-

 

 

 


"왠일이야, 니가 여기까지 오고?"

 

 

 


반갑다는 이동해의 표정을 무시하고 곧바로 녀석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조금 놀란 듯했지만 내 키스에 이동해는 내 입술을 핥짝거리며 익숙한 몸짓으로
내 옷을 이끌고 자신의 방 안으로 뒷걸음질쳤다.
탕- 문이 닫히고 침대로 그대로 눕는 이동해의 앞으로 쓰러졌다.

 

 


"........이동해.."
"그래."
"..난...아닌 줄 알았는데..............
.....내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

 

 

 

이성도 감성도 없었다. 녀석의 옷 단추를 끄르며 나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이동해의 위에서 허리를 놀리며, 녀석의 야한 신음을 들으면서도 마치 내 머리는 마비된 것만 같았다.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멍했다.

 

 

 

 


D-47

 

 

 

 


-

 

 

 

"..............여보세요."

 

 

 

 

힘없고 까칠해진 목소리. 하지만 나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는다.
이상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이성민이니까.

 

 

 


"..지소영."
".......혁....재? 혁재야?!?!!?"
"할 말 있어. 만날 수 있어?"
"응...응, 혁재야.....잘 지냈어......?"
"1시까지...우리 자주 갔었던 커피숍에서 보자."

 

 

 

오랫만에 들은 목소리지만.......그냥 반갑기만 할 뿐이었다.

 

 

 


-

 

 

 

"...혁재야."

 

 

 

보자마자 눈에 눈물이 고인다.
확실히.....이성민과는 닮았지만 전혀 다른 얼굴이다.
처음엔 왜 같다고 느꼈었을까.
이렇게나 다른 두 얼굴을.

 

 


"잘 지냈어?"
".....너는....? 많이....말랐다, 혁재야..."
"..임신 했다며."
".....성민이한테.....들었니?"
"....어."

 

 


"......왜..보자 그런거야....?"
"....애 지워. 그거, 그날 밤에 내가 미쳤던거야."
"..싫어. 낳을거야. 낳아서 키울거야. 우리 둘이 사랑했다는 증거니까."
"...지소영."
"..무슨 일 있을거라고 믿어. 너 이런식으로 대충 끝내고 갈 애 아니잖아."
"........."

 

 


어쩌면 이래서 여자의 직감이 무섭다는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만큼 우리의 사랑이 깊었다는말이었는지도.
아니, 그렇게 깊었더라면 내가 이성민을 사랑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성민과 지소영이 닮았기 때문에 그게 쉬웠던건지도 모르고.

 

 

".....너.....어디 아프지......."
"..........!"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는 지소영이었다.
뭐라고 할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선만 피하자 계속 말을 이어간다.

 

 

 


"너......성민이랑..지금 사귀고 있다는거........알아.
처음에는 성민이, 복수한다고 막 그러다가...어느 순간부터 너 얘기하면 들뜨고
좋아하고 그러더라. 그래서 알았지. 좋아하고 있다는거. 그리고.....그건 비단 성민이 감정뿐만이
아니라는거. 하지만, 너 성민이까지 상처입힐거면 그만 둬. 난 상관 없지만, 성민이는 나보다 더 여리니까."
"...........나 뇌종양이래."

 

 

 


말을 마치고 입가로 커피를 가져가던 소영이의 손에서 컵이 툭 떨어졌다.
입고 있던 흰 원피스에 커피가 엎어져 옷의 색이 점점 짙은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소영이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
"...입원 안하기로 했어. 수술도 안할거고. 그래. 애초엔 그것때문에 너랑 깨진거였어.
그리고....못됐지만 성민이의 얼굴이 너랑 닮아서 만나려고 했었어. 그리고.....지금은 진심으로 그 애가
좋아졌고."
"...........혁재야."
"성민이에게는 비밀로 해줘. 나는......녀석에게 끝까지 나쁜 남자로 남고 싶어. 니가 죽을 때까지.....
나 아팠다는거, 녀석이 모르게 해줘."
"....힘들면 찾아와.......나도 이제 너한테.....연인이 되고 싶은 마음, 그런 기대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누나로서, 친구로서 너 대할테니까......힘들면 언제든 기대."
"...고맙다."
".....그리고..........아기는 낳을거야."
".........."

 

 

 

얘기를 하고나니, 뭔가 그제서야 조금은 풀렸다는 생각이 든다.

 

 

 


-

 

 

 

 

"미술학원.....다니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 수시준비하고 있어요!
형한테 정말 고맙다고 생각해요. 이 은혜 꼭 성공해서 갚을게요!"
"그래. 잘 됐다. 열심히해. 열심히해서 효도해라."

 

 

 

집 앞, 김려욱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도 기대대로 자신의 길을 찾아서 노력하고 있다는 녀석의 전화가 고마워서 웃으며
전화를 끊는데, 또 다른 인영이 나를 반겼다.

 

 


"........왜 자꾸 찾아와, 너."
"....."

 

 

 

훅 끼치는 술냄새. 그리고 곧바로 이동해는 나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알콜냄새가 나는 녀석의 혀가 입속을 파고들었지만 나는 녀석을 밀어내어버렸다.

 

 

 

"......이럴거면 오지 마. 난 니 연인이 될 수 없으니까."

 

 

 

멍하니 서있는 이동해를 지나쳐
집에 들어가려고 문을 열다 고개를 돌리자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조규현이 서있었다.

 

 


-

 

 

 

"왜 이성민 만나면서 저런 사람한테 키스 받는거냐?"
"니가 상관할 일 아니야."
"왜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데?!?!?!?!"
".....너 이성민 좋아하냐?"
"......."
"묻잖아, 내가. 너 이성민 좋아하냐고. 왜 니가 참견인데."
"..씨발......!!!!"

 

 

 

그리고 조규현은 바로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입술사이를 비집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D-46.

 

 

 

-

 

 

 

 


"은성 공연?"
"네. 규현이가 말 안해요? 어제 우리집 와서 표 주고 갔는데."
"..그래?"
"이따 같이 가요. 2시부터 4시까지 공연이래요."
".....그래. 그러자."

 

 


성민이의 전화였다.
아침부터 한바탕 쏟아진 코피와 전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얀 침대 시트가 붉어진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약병은 4통이나 비어 있었고 요즘들어 팔힘이 많이 약해졌음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라 약과 그간 먹었던 음식곽등을 박스에 던져놓고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는 이동해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설마, 어제 안간건가.

 

 


"...이동해."
"....이혁재.....나도 어쩔 수가 없단말이야!!!!!!!
니가 좋은데 어쩌라고!!! 어떡...하라고!!!!!! 소영씨랑 헤어졌을 때 내심 기뻤는데..!!!!
죽을 병 걸렸다면서 사람 심장 저 밑까지 가라앉혀놓고....그래도 옆에 있어주고 싶었는데...왜 난 안돼?!?!?
내가...하, 내가 지소영 그여자보다 뭐가 모자란데??!!?!?!? 어?!?!?!? 니가 그렇게 잘났어? 씨발....씨발......!!!!"
"...진정해...집에 들어가 있어. 쓰레기 버리고 올테니까."
"........너..정말 못됐어..."

 

 

 


나를 노려보며 소리를 지르는 녀석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있었다.
게다가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안쓰러움에 녀석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분리수거를 하며 최시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시원."
"..어, 이혁재, 왠일이야."
"..너 그날. 나 취해있을 때 이동해 집으로 데려갔었지."
".............."
"너..아직도 이동해 좋아하잖아."
"걘 니가 좋다는데 어떡하냐."
".....어차피....나 평생 이동해 옆에 못있어. 알잖아. 그리고 그 남은 시간동안 이동해 옆에 있을 생각도
없어. 니가 이동해 잡어라."
"............"
"걔 지금 우리집에 있어. 나 집 나가있을테니까 니가 잘 해."

 

 

 

마지막으로 종이함에 박스를 던져넣고 주머니에서 자동차키를 꺼냈다.

 

 

 


-

 

 

 


"어라. 왠일....어? 형 그렇게 옷 입은거 처음봐요!"

 

 

 

집에서 곧장 온 터라 스누피가 그려진 줄무늬 반팔 티에 회색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성민 집으로 가 곧장 벨을 누르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문을 열어준다.

 

 

 

"아아. 자고 있었어?"
"아뇨. 친구가 와서요. 현대미술과인데 모더니즘 아튼지 뭔지 해가지고 사상 좀 독특한 녀석 하나 있어요."
"모더니즘....아트? 그런 친구 있다는 얘기 못들었는데."

 

 

 

순간적으로 김려욱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들어오세요. 종운아, 인사해. 내가 말했지? 사귀게 된 형 있다구."
"..아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녀석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남자끼리 이런 얘기 하기가 상당히 쉽지 않은데
이런 얘길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걸 보면 이런걸 초월할 정도로 정말 친한 친구라거나
아니면 무관심하다거나, 혹은 게이정도...?
어쨌든 대충 인사를 했다.

 

 

이름은 김종운이래나.

 

 

 

"..저기 혹시, 제가 아는 학생중에서 미술쪽에 관심이 있는 애가 있는데...몇 번 만나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후원하는 학교 쪽 애라서 신경이 쓰이네요."
"아. 성민이한테 많이 들었어요. 좋은 일 하신다구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좋아서 하는건데요."
"여기, 그 학생 번호니까요..가끔 가서 하는 것도 좀 봐주고 해주세요."

 

 


려욱이의 번호를 알려주자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시키고는 내친김에 바로 만나봐야겠다며
좋은 시간 되라며 나가버리는 종운이었다.

 

 

 

-

 

 

 


첫 공연이 무사하게 끝난 덕분이었던지 두번째 공연은 더욱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팬클럽도 여러개 결성됐는지 플랭카드를 들고 팬클럽의 이름을 외치는 소녀팬들도
적지 않았다.
한 쪽 구석에는 어떤 사람과 종이에 뭔가를 적고 있는 김영운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조규현, 너도 꿈을 이뤄가는구나.....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D-45

 

 

 

 

-

 

 

 

"처음에는 그냥 실용음악 학원에서 만났었어요. 딱 보기에도 반항아 이미지 팍팍 풍겨서 처음엔 무서워서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녀석이 보컬 트레이닝 받는데 목소리 듣고 반했잖아요!"

 

 

 

 

은성애들과의 첫 술자리였다.
나의 후원이 고맙다는 멤버들의 독촉 때문에 조규현이 다리를 논 것이다.
이동해일로 조규현과는 아직 어색했다.
성민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옆에 앉아 웃고 있었고 조규현은 그게 더 화가나는지 잔뜩 심통이 난 표정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진짜?"
"네. 근데 오빠 진짜 멋있다! 난 어때요?"

 

 

 

눈웃음을 치며 나에게로 몸을 기울여오는 지혜라는 아이였다.
성민이는 그 모습에 기분이 나쁜 듯 볼을 부풀리더니 갑자기 내 팔을 훽 낚아챘다.

 

 


"너, 너어! 나이도 어린게 어디서 꼬리야!"
"..네? 이게 무슨 꼬리에요? 작업이지. 나 이 오빠 맘에 든다구요. 당당히 대시하는거에요."

 

 

 

성민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워낙 아기같아서 만만해보였는지 성민이를 깔아보며 비웃음과 함께
말하는 여자아이였다. 조금 기분이 나빠 성민이의 손을 꽉 잡은 채 못생긴여잔 안만나, 라니까 얼굴이
빨개져서는 소주를 잔에 꼴꼴 따라 휙 들이킨다.

 

 

 


"얘들아. 노력한만큼, 내가 밀어주는 만큼 성공하자."
"네!"
"당근이죠!"

 

 

내 말에 아이들이 와글와글해진다. 김영운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자, 곧이어 술잔을
들어올렸고 쨘쨘- 잔을 부�힌 뒤, 원샷을 했다.

 

 


-

 

 

 

 

"........성민이형 좋아하는거, 진심이지?"
"그래."
"........부탁할게."
"...그래."
"...열심히 할게."
"응."

 

 

 

조규현의 눈이 슬퍼졌다.
....나중에 내가 없을 땐..............
....니가 저 여린 아이를 감싸줘.
.....아직은.........양보할 수 없어..........
..안되는걸 알면서도........하루가 지나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내 감정, 더 깊어지니까..............

 

 

 

그럴수록 서로에게 독이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사랑해버렸으니까.
사랑하고 있으니까.

 

 

 

 

D-44

 

 

 

 


-

 

 

 


"형! 고마워요! 종운이형, 되게 착하구 재미있어요!"
"그래...잘 됐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기운이 없었다.
식욕도 없고 뭔가가 자꾸만 올라올 것만 같은 기분에 심호흡만 하고 있었다.
누워서 전화를 받았지만 팔을 들어올릴 힘도 없어서 툭- 하고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져버렸다.
형형- 거리는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내 제어를 벗어나버린 내 팔에 대한 배신감과 충격에
멍해져버렸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는.......................조금씩 나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대답이 없자 뭔가 이상함을 느낌 듯 려욱이의 목소리가 조급해졌고 덜덜 떨리며 움직일 생각조차
않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아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응..?"
"아. 뭐야. 대답 없어서 진짜 놀랐잖아요! 무슨 일 있는거 아니죠?"
"어? 어...어, 아니야."
"그럼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침대에서 내려오려했으나 다리가 후들거리고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내 몸이 벌써부터 나를 배신하고 있었다.
그 때 머리로 치닫는 엄청난 고통. 몸조차 움직여주지 않는 상태에서 이런 격통은 내가 버틸 수 있는 류의
것이 아니었다.

 

 

 


"...아.....아윽......!!!!"

 

 

 

몸을 뒤집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제발...조규현, 아직 집에 있길.............

 

 


"..규....규현......아..........! 조규현...!!!!"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으려는 성대에 힘을 줘서 녀석을 불렀다.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소름끼쳤다.
죽을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시트를 마구 잡고 쥐어 뜯었다.
힘이 쥐어지지 않는 손으로 주먹을 쥐자 손바닥이 패여 피가 흐를 정도로의 엄청난 고통이었다.
이내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발칵 문이 열렸다.

 

 

"..형?!?!"

 

 

 

".....부..부엌......쿨럭..가면...찬장에....분홍머그컵..뒤에.....약병 있어.....약....여덟개랑...물좀....쿨럭..가져다줘..."

 

 

 

 


문득 속에서 메스꺼운 기운이 느껴져왔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쏟아져나왔다.
조규현은 무척 놀란 듯 문 앞에 굳어있었다.
뜨거운 느낌으로 보아 토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입에서 좌르륵 흘러내리는 피의 느낌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움의 신음을 내뱉자 녀석은 재빨리 뛰어나갔다.
의사가 말한 한정량은 다섯개였지만 그 것으로는 이 지독한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
아니, 사실 여덟개도 이 아픔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를 악 물고 녀석이 재빨리 가져다준 약을 삼켰다.

 

 

 


한참동안의 경련 후에 고통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뭐야."
"...감기야."
"..감기가 찬장뒤에 약병을 숨겨놔? 당연히 아프리란걸 알았던 것처럼?"
"........이렇게 아픈건..처음이네."
"뭔데. 까봐, 씨발."
"이성민한테 말하지 마."
"피까지 토하고 경련을 일으켜놓고 말하지 말라고? 씨발. 갈데까지 간 고삐리 잡아두고
꿈 이루라는 말부터가 수상했어. 빨리 뱉어."
"........말하지 마. 이성민한테. 약속해."
"......알았어."

 

 

 

 

녀석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뇌종양이란다. 이제.....40일쯤뒤면.....
.............난 죽는대."
"................뭐?"

 

 

 

거짓말이길 바란다는 눈. 그래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이성민이랑 평생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 죽고 나면 이성민 부탁해. 니가......이성민 좋아하는거 알아.
그녀석........상처받을테니까....니가 잘 감싸 안아라........"
".......하...."
"......비밀로 해. 알았어?"
"..........하.."

 

 

 

녀석은 기가막힌 듯 웃음만 흘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녀석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녀석은 아무런 대답 없이 침대시트를 걷어갔고, 다른 이불을 깔아주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내 힘으로는 서있을 수 없었다.

 

 

 

간신히 다시 침대로 들어가는데, 딩동- 벨이 울렸다.

 

 

 


"....이성민 왔어. 문 연다. 나 그리고....오늘 아무것도 못 봤어."

 

 

 


함구해주겠다는 녀석이 고마웠다.
그나저나....이 꼴은 어떻게 설명한다..
망설이고 있는데 밖에서 조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혁재형 아파서 누워있으니까 죽이든 스프든 좀 끓여줘요."
"..아파? 어디가 아픈데?!"
"감긴가봐요."
"그래? 아. 나 그럼 스프가루 사러 가야겠다. 지금 나가는 길이면 같이 갈래?"
"..네."

 

 


그리고 찾아오는 침묵.
그 침묵이 마치 죽음과도 같아서 나는 다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문득 머리에 열이 치솟는것만 같았다.

 

 

 

-

 

 

 

"일어나봐요! 감기에는 닭고기 수프 좋다그래서 닭고기 수프 끓였는데."
"...으...."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독하던 통증도 자고 일어나니 꽤나 가라앉아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쟁반에 수프 접시를 가지고 와 내 입으로 천천히 흘려넣어주는 녀석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접시를 반쯤 비워내자 또 속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듯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토증이 올라오는 입가를 휴지로 닦아내자 이성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프 접시를 옆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아무 말 없이 이성민의 허리를 껴안자 내 머리를 천천히 쓸어준다.

 

 

 


"..참, 아프니까 적응 안되네, 형."
".......어떤 감각인지.....알아두고 싶어."
"...픽..왜 그래요. 우리가 뭐 평생 못보나. 왜 애처럼 되가요."
"....손가락에.....계속 남겨두고 싶어......잊어버리지 않게."
"..뭐야. 아, 진짜 형 그러니까 닭살 돋아!"
"...우리 사진 찍은거 없다. 찍자."
"뭘 사진을 찍어요. 다 나으면 찍어요."
"..나 더 마르기 전에."
"에? 그러고보니 형 처음 볼때랑 다르게 되게 말랐네. 운동해요?"
".....사진...찍자."

 

 

 

 

나 언제 쓰러질지 모르니까.
그래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잖아. 어느날 갑자기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조용히 말이야. 아무도 모르게.

 

 

 


"나중에 찍어요. 우리 시간 많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시간이 없으면 어떡하니.
하지만 그 말은 내 입에서 언어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는 녀석이 조금은 미웠지만 녀석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좀 자요. 피곤해보인다. 다크서클 되게 짙어요."

 

 


내 눈가를 꾹 누르며 녀석이 말했다.
스륵 눈을 감자 녀석이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쩌면 아픈 뒤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들었던 것 같다.

 

 

 

D-43

 

 

 

 

-

 

 

 

"어머. 혁재야. 어쩐 일이니?"
"아버지 계세요?"
"아니. 회사 가셨지."
"여기, 과일 사왔어요."
"뭘 이런걸 사오고 그러니."

 

 

바구니를 내밀자 새엄마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바구니를 받아든다.
그러다가 이내 수척해진 내 모습에 깜짝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디...안좋은데 있니?"
"다이어트 해요."
"뺄데가 어딨다구. 예전에도 말라서 보기 안쓰럽기만 하더니.....살 좀 찌워야지."
"아버진..언제쯤 오세요?"

 

 

"아마 늦으실 것 같아. 앉으렴. 과일 깎아줄게."
"아뇨.. 아버지 안계시면 가볼게요."
"....아직도 내가 불편하니?"
"....조금요."
"..........그렇구나. 하지만....아버지는 용서해주렴..."
"...노력하고 있어요. 아줌마도 미워하진 않아요. 두 분 행복하시면 된거에요. 저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쓰니? 그래도.....내 아들..인데."
"......."
"아버지 회사 들어갈 생각 정말 없는거니?"
"아직은요."
"..그래. 차차 생각하렴. 너도 힘들테니까....
자꾸 강요해서는 안된다는거 알면서도...말하게 되는구나."
"강요하시는거 아니에요. 저 그럼 정말 가볼게요."
"차라도 한 잔 하지 그러니?"
"아니에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짐짓 아쉬운 표정으로 팔을 잡으려는 아줌마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인 뒤 집을 나섰다.
그래. 서로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어색할 뿐이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에 어색할 뿐.

 

 

 

하지만.............떠날 때는 웃으며 떠나야겠지. 모두 편하게 남을 수 있도록.

 

 

 

 


-

 

 

 


".....그래서."
"말 그대로야. 나.......없을 때 니가 우리 아버지한테 메일 좀 넣어드려."
"정말 기가막힌다, 이혁재. 넌 왜 떠날 생각만 하는거냐?"

 

 

 


내 메일 주소와 비밀번호를 적어 김영운의 손에 쥐어주자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김영운이었다.
난 나름대로 아버질 배려한다는 행동이었는데 김영운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나보다.

 

 

 

 

"..그럼? 내가 부정한다그래서 달라지는거 있어?"
"...하."
"나중에 아버지한테 유학간다고 말씀드릴테니까....뜸하더라도 일년에 한 두번 정도..잘 살고 있다고
좀 해줘."
"살다살다 죽으면서 독한새끼 처음본다. 병원 안들어가는 이유가 고작 이딴거냐? 니 스스로 니 주위를 정리하는거?
씨발. 그런거, 니가 안해도 된단말이다!!!! 개새꺄, 적어도 널 정리하면서 너 추억할 기회라도 줘야되는거 아니냐고!"

 

 

 

 

 

문득 들여다본 김영운의 눈이 빨갛다.
그래, 알아, 너 좋은 새끼야. 그니까.......울지마. 울지 마.
처음 보는 녀석의 모습에 나조차도 눈에서 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야. 너 내가 내일 당장 죽는 사람처럼 말한다? 아직 한달도 넘게 남았어. 나 안아파."
"...이런 말 하려면 나 찾아오지 마. 일하느라 바쁘니까."
"영운아."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해. 주먹 날아가려는거 지금 참고 있어. 너 같은 배려심 없는 새끼. 처음부터 친구 먹는게
아니었어."

 

 

 


눈에 힘을 주고는 나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휙 돌려 멀어지는 영운이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외로웠다. 나는 좋겠니? 나라고 좋겠니? 그럼 어떡하니. 어떡할까, 내가. 어떡하길 바래.
눈물을 참으며 깨물어낸 입술이 부어버리고 말았다.
가슴이...............................아파.

 

 

 

 


-

 

 

 

 


"쨘~ 쿠키에요!"
"넌 무슨 남자애가 이런걸 만드냐?"
"뭐 만들어주고 싶은데 어떡해요, 그럼! 집에서 손수 만든거니까 더 맛있을거에요~."
"...윽. 달다."

 

 


투명한 유리 단지에 가득 들어있는 쵸코색의 쿠키들. 단지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갈색의 코르크 마개와
분홍색의 리본. 마치 전문 베이커리에서 사는 것 같은 정성이 가득 담긴 이성민의 선물이었다.
이 녀석은 왜 자꾸 나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 하는걸까.
나는......정들까봐, 혹여 내가 가고 나면 녀석이 남은 내 흔적을 보고 아파할까 뭐하나 쉽사리 줄 수가 없는데.

 

 

 


하트모양의 쵸코쿠키에는 빨간색, 초록색, 노랑색...다양한 색깔의 작은 젤리가 박혀 있었다.
녀석의 기대에 찬 맑은 눈망울을 보며 한 입 베어물자 달콤한 쵸코향과, 단내가 풍겨왔다.
……느끼하기는 하지만, 녀석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까.....훨씬 더 맛있는 것 같아.

 

 

 

"어, 진짜 달아요?!?!"
"응. 완전 달아. 앞으론 요리하지 마."
"...으에, 안되는데!!!!! 나 그럼 앞으로 요리학원 다녀야지!"
"야, 하지 말라니까?"
"싫어요!!! 형한테 맛있는거 많이많이 만들어줘야지!!!! 형 요새 더 마르고 있단말이에요!! 보기 안쓰러울 정도라니까?"

 

 

 

 


입술을 뾰루퉁 내밀고 말하는 녀석이 너무나도 예뻐보여 순간 녀석의 턱을 끌어당겨 그대로 입을 맞추고 말았다.
고개를 반짝 들고 놀란 듯 숨을 흡- 멈췄던 녀석은 이내 귀여운 분홍빛 혓바닥으로 내 입가를 핥짝거렸고,
그리고 녀석의 혀가 내 입속으로 쑥- 하고 들어왔다.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녀석의 혀를 물고 빨고 서로 밀어넣고 당기고 한참동안 장난을 하다가 서로 숨이차서 떨어져버렸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이성민이 나와 눈을 마주치곤 쑥스러운 듯 웃으며 이런다.

 

 

 

 

"........쿠키, 맛있다."

 

 

 

 

-

 

 

 

 

부엌의 찬장에 녀석이 가져온 쿠키잘(jar)을 집어넣었다. 기집애같이 분홍색 리본 쓰긴.
후우.....저건 아마, 아까워서.........다시는 손도 대지 못할 것 같다.
왠지 녀석이 나중에....만약 나중에 발견하게 되면 오해라도 할 것만 같아 분홍 리본을 푸르고
네임팬으로 '아까워서 못 먹겠다. 맛있었어.'라고 썼다.
그리고 다시 묶어보려했지만 뭐 도대체 리본은 어떻게 매는건지 아까의 이성민이 가져온 그대로의
모양새가 나질 않는다.
몇번이나 묶었다 풀러서인지 리본이 잔뜩 구겨져버렸고 그대로 놔둘걸, 하는 후회와 함께 리본을 그냥
코르크마개 위에 올려두었다.

 

 

 


D-42

 

 

 

 


-

 

 

 


"형. 나 형 친구들 만나고 싶어요!"
"내 친구들? 만나서 뭐해."
"내가 모르는 형을 알고 싶으니까."
"둘이 서서히 알아가면 되는거잖아-"
"원래 애인이면 서로 소개받고 그러는거에요! 나도 종운이 소개시켜줬잖아!"
"야, 그건 내가 막무가내로 너네집에 가서,"
"어쨌든!!!!!!!"
"하여튼 고집하곤."

 

 

 

혹시나 내가 떠났을 때....녀석에게 자꾸만 날 회상하게 될 무언가를 줄 것만 같아 나는 녀석에게
너무나도 조심스럽다.
결국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이자 볼을 부풀린 채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짜증을 내던 녀석의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진짜요?!"
"그럼 진짜지 가짜냐."
"와아! 나 오늘부터 이혁재 짱팬할래!"
"팬이면 팬이지 짱팬은 또 뭐냐?"
"치. 맨날 시비걸구."

 

 

 


기분이 좋아서 헤헤거리던 녀석은 내가 말 꼬투릴 잡자 또 금세 시무룩해져서는 다시금 입술을 내민다.
복어다, 복어. 문득 녀석의 부풀어오른 볼을 콕 찍어보고 싶어 검지 손가락을 들어올리려는데
녀석의 눈이 반짝 빛나며 갑자기 투니버스로 채널을 돌린다.
막 시작한 '짱구'에 완전 몰입한 채 TV에 빠질 것처럼 들여다보는 이성민.
야, 너 뭐야. 나 좋다매. 근데 너 왜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저거 봐?
문득 만화속 주인공에게까지 질투를 느낄만큼 유치해져있는 나를 느끼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한심하네, 이혁재?

 

 

 


"야. 너 대학생 맞아?"
"왜요오! 귀엽잖아, 짱구!"
"저게 뭐가? 유치원생이 저러는거 징그럽기만 하구만."
"아이의 순수함이라니까요? 볼살 빵빵해서 얼마나 이뻐요? 형두 토실토실하게 살찌워야지!"
"야. 나 봐봐."
"왜요? 나 저거 봐야돼요!"
"아, 나 보라고!"

 

 


완전 몰입하고 있는 이성민의 시선을 어떻게든 나에게 돌려놓으려고 쿠션을 발로 차기도 하고
녀석의 눈가에 손바닥을 휘휘 휘둘러보기도 했지만 녀석은 개구장이 같은 표정으로 tv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야. 내가 저 신짱구보다 못하다 이거야?

 

 

 

 

"어디가요?"

 

 


괜히 심통이 나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걸어가려는데 갑자기 이성민이 덥썩 허리를 잡아온다.
하는 짓은 완전 천상 여우라니까.

 

 

 

"놔, 짱구가 좋다며! 저기 니가 좋아하는 짱구가 코끼리 춤 추네!"
"삐졌구나!"
"삐지긴 뭘!"
"와아. 얼굴 빨개졌다! 형두 인간이었네요!"

 

 

 

기분좋게 실실 웃더니 갑자기 내 볼에 �- 하고 입을 맞추는 이성민.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귀엽다며 마구 웃음을 터트렸다.

 

 

 


"어쭈, 건방지다?"
"메롱."
"너 진짜 혼날래?"
"혼내봐요! 혼내봐요!"
"까불지!"

 

 

 

녀석을 확 소파위로 밀어버리고 위에 올라타자 녀석도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진다.
숨막히는 정적 가운데 TV속에서 흘러나오는 짱구일당의 목소리.
리모콘으로 TV를 끈 뒤 녀석의 입술로 내 입술을 천천히 가져다대었다.
그러자 스륵- 눈을 감아내리는 녀석.

 

 

 


숨소리가 정말 가까워져서, 서로의 얼굴의 온도까지 느껴질만큼의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형, 미안! 나 두고간게 있........"

 

 

 

 

그 때, 타이밍 좋게 벌컥- 하고 열리는 문.
우리 둘의 시선은 문으로 향했고 문에는 멍해진 표정의 조규현이 서있었다.
성민이도 나도 규현이도 너무나도 놀라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져있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다시 몸을 돌려 뛰쳐나가는 조규현.
성민이가 깜짝 놀랐는지 나를 확 밀어냈다. 그리고 현관으로 뛰쳐나가보지만 이미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
"....어떻게 해. 규현이 놀랐겠다."
"...그러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다보는 성민이의 모습을 보자, 훗날 성민이를 규현이에게
양보하겠다는 마음이, 의지가 약해짐을 느꼈다.
.....씨발....왜 이렇게 불공평해....내가 뭘 얼마나 개같이 살았길래..........!!!
....................지소영은..놓아주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게 옳다고 느꼈으니까.
하지만 이성민은..그게 옳다고 느끼면서도 아주 잠시라도, 아주 조금 만이라도 더 녀석을 내 곁에 잡아두고 싶어진다.
그러니까.......결국....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건..........이성민이라는 거겠지.

 

 

 

 


-

 

 

 


"죽 맛있지?"
"....이동해."
"야채죽이야. 몸에 되게 좋아. 당근도 넣구 버섯도 넣었어. 아. 그리고 이거 원래 말하면 안되는건데
니가 싫어하는 돼지고기랑 양파도 넣었다? 아플 땐 이렇게 먹어야 건강에 도움이 된대."
"..최시원은."
"빨리 먹어. 더 줄까? 아니면 간장쳐줄까?"

 

 

 

어색하게 이성민을 보낸 뒤 머리가 아파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고소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고
이동해가 와있었다.
도무지 속을 알아차릴 수 없는 표정. 최시원과는.............잘 된걸까.
저렇게 피하는걸로 봐서는 별로 잘 된 것 같지는 않지만.

 

 

 

"이동해. 이러지 마."
"야. 나 이거 두시간동안 만들었단말야. 너 고기 못먹을 줄 알고 작게 자르느라 손두 베었어. 이거 봐봐."

 

 

 

못들은 척 애써 웃음을 지으며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녀석이 너무나도 안쓰러워보여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하자 들뜬 녀석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는다.

 

 

 


"최시원은 안돼. 최시원은 아니라구...!!! 널 좋아하는 날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어야겠어?!?!?!!?!?"
"지금 니가 이렇게 매달리는게 더 비참한거 몰라?!?!?!"
"..하....너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거니?! 넌 다른 사람 생각은 안해주지! 늘 그래, 늘!!!!! 그냥 웃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돼?!?!?! 어차피 너 이제 죽잖아!!!!! 그때까지만이라고!! 내 얼굴 보고 살아달라고!!!!! 많은거 안바래, 난 그냥-"
"....사랑하는 사람 생겼어."
".............뭐...?"
"사랑하는 사람. 생겼다구."
"...사랑.....? 너 지금 사랑이라그랬어?"
"그래, 사랑. 사랑하는 사람."
"아아아악!!!!!!!!!! 개새끼!!!!!!!!!! 니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에서 마구 눈물을 쏟아내는 이동해. 그러더니 잡고 있던 그릇을 나에게로 던진다.
가슴팍에 맞은 죽그릇에서 죽이 쏟아져 내 옷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륵....
코에 퍼지는 진하면서도 고소한 향과 함께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격한 흉통.
그리고 뜨거운 죽이 닿으면서 화상을 입었는지 물집이 잡힌건지 쓰려왔다.
그러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멍하니 이동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예쁜 얼굴은 잔뜩 찡그려진채 눈물만을 쏟고 있었다.

 

 

 


"........................하...하악......하악...........!!!!!"

 

 

 

 

 

그 때 갑자기 머리에서 느껴지는 격한 고통.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고통이었다.
누군가가 머리를 도끼로 쪼개고 안에 염산을 부어넣는 것만 같은, 온 몸에 전기가 오르는 듯 하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아찔한 감각.
고개를 팍 숙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자 이동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연기하지마, 이혁재!! 이런다고 누가 널 불쌍하게 여길 줄 알아?!?! 난 너 절대 포기 못해!!!!"
"..하.....하윽............하악.............!!!!!!"

 

 

 


손에 잡히는 침대시트를 닥치는대로 양 손에 구겨쥐고 숨을 들이키려했지만 머리에서의 격한 고통은
나에게 어떤 행동도 허락하지 않았다.

 

 

 


"..혀, 혁재.....야....? 여, 연기하지...말라니까.........!"
"...우웩..........하...아..."

 

 

 

갑자기 입에서 쏟아지는 피.
..씨발, 또 토혈이야.....아, 나 이러다가 몸에 피 부족해지면 어떡하지.
입에서 흰 시트로 쏟아져내린 검붉은 덩어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정신을 놓아버렸다.

 

 

 

 

 


D-38

 

 

 

 

 

 

-

 

 

 

 


엄마. 세상에서 젤 예쁜 우리 엄마가 보인다.
저 아이는.......그래. 6살때의 나구나.
엄마와 같이 퍼즐맞추기를 하던 날. 그래, 아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지막 두개의 퍼즐이 남았고....퍼즐 방향이 헷갈려 엄마에게 짜증을 내던 중이었지.
그리고 벌컥 문이 열리고............아빠의 애인이라는 여자가 들어왔다. 맞아.
미안한 표정으로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엄마는 화를 냈었고...나는 마구 울음을 터트렸었구나.
그러다가.......엄마는 앓아누워버렸고...아빠는 엄마를 찾아오지 않았어.

 

 

 

 

"..혁재야, 이제 엄마랑 함께 가자."

 

 

 

흐릿한 엄마다. 강 건너편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엄마.
손을 조금만 더 내밀면 닿을 것만 같은 기분. 조금만 더......조금만 더........
애써 손을 뻗어보지만,

 

 

 

"안돼!!!!!!!!!"

 

 


누군가가 내 허리를 낚아챈다.
.....누굴까? 호기심에 고개를 돌리고....
머릿카락에 가려진 얼굴을.......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올리면.................

 

 

 

 


"..하...하악....!!!!!"
"이혁재!!!!!!!!!!!!!!!"

 

 

 


귓가를 윙윙 울리는 커다란 고함.
멍한 표정으로 주윌 둘러보자 눈이 빨개진채 눈물을 좌르륵 흘리고 있는건 박정수와 이동해, 덩달아 멍한 표정의
최시원과 인상을 마구 쓰고 있는 김영운, 조규현이 보였다.

 

 

 


"......몇..일이야....?"
"........너 3일동안..내리 잤어."

 

 

 

코를 톡 쏘는 알코올 냄새.
..병원이다.
손에는 링겔이 꽂혀있고 입고 있는 것은 환자복.
그나저나 미쳤군.
하루를 쪼개서 살아도 모자랄 판에, 어차피 죽으면 평생 잠잘거면서.............3일이나 쓸데 없이 버렸단말야?

 

 

 


"...하아......."
"미안......미안해, 혁재야............"

 

 

 

내 손을 잡고 울음을 터트리는 이동해.
녀석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기에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녀석의 마구 떨리는 어깨를 최시원이 조심스럽게 감싸안았고 이동해는 그제서야 천천히 진정이 되기 시작하는지,
눈물범벅이 된 눈을 스윽스윽 닦기 시작했다.

 

 

 

 

".....성민이는...?"
"모르게 해달라고 부탁했잖아. 말 안했어. 회사일로 잠깐 출장갔다그랬어."
"....고맙다."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규현이가 무표정으로 대답해준다.
녀석에게 새심 고마움을 느끼며 살짝 웃자, 시선을 피한다.
그래...맞아, 그날.......그렇게 어색했었구나.

 

 

"..이혁재......제발 입원해......"
"자꾸 이런 얘기 하는거 입 아프지 않아? 아. 오랫만에 일어나서 그런지 배고프다. 우리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웃으며 자리에서 훌훌 일어나자 김영운이 한참만에 독한새끼,란다.

 

 

 

 

-

 

 

 


"나한테 말도 없이 가는게 어딨어요오!!!! 진짜 치사 빤스!!! 똥 빤스!!! 똥 팬티야!!!!"
"야. 너 짱구 그만 봐. 자꾸 그거보니까 니 언어선택이 점점 유아틱해진다? 똥팬티라는 말은 도대체 누구뇌에서 나오는거냐?"
"아, 나 농담할 기분 아니라구요!!!!! 진짜 똥빤쓰!!!!!!!!"

 

 

 


나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이성민은 벙쪄있는 친구들을 싸그리 무시한채 나에게 마구 쏘아대기 바빴다.
침울한 분위기였지만 이성민덕분에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져 안심했다.

 

 

 

"공주님, 그래서 사과하겠다고 비싼 초밥 먹으러 왔잖아요."
"초, 초밥가지구 내가 용서해줄 줄 알구!!!!!!!!"
"내 친구들이야. 건아개발 이사 김영운, 메이크업 아티스트 박정수, 소설가 최시원, 헤어 스타일리스트 이동해.
규현이는 알지?"
"와앗...안녕하세요! 저는 혁재형 애인 이성민이라구 해요오오.."

 

 

 

그제서야 내 친구들을 발견한건지 조금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이성민이었다.
이동해의 표정은 썩 밝지를 못했지만 나머지는 웃으면서 성민이를 맞아주었다.
인사를 대충 한 이성민은 종운이와 려욱이를 부르겠다며 말리기도 전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

 

 

 

 

 

"와사비는 왜 덜어?"
"매운거 먹으면 코가 찡해서 못먹겠어요."

 

 

 

새우초밥을 집어들더니 새우를 들어내고 와사비를 떼어내는 녀석에게 묻자 힛- 하고 웃으며
말하더니 초밥을 간장에 찍고는 입에 쏙 집어넣는다.
기름에 묻어 반들거리는 입술.....난 어째 초밥보다 니 입술이 더 먹고 싶다?

 

 


"성민이, 완전 아기같다. 귀여워."
"뭘요오! 정수형두 디게 이뻐요! 천사같아!"

 

 

 


어느새 친해져버린 박정수와  이성민이 깔깔 웃음을 터트리는새에 어리버리한 표정의 김려욱과
김종운이 등장했다.
한층 시끄러워져버린 술자리.
그리고 그 시끄러운 틈바구니에서 이성민이 입을 열었다.

 

 

 


"우리이이...바다가요, 바다!"
"바다?"
"네에!!!! 우리 혁재자기야랑, 영운이형이랑 정수형아랑 동해형아랑 시원이형이랑 규현이랑!
종운이 료우기이...!!!! 다 같이 바다가요!!! 다음주에 가요, 다음주!!!!!"
"그래...우리 바다가자. 오랫만에 재밌겠다."

 

 

 

내가 수긍을 하자 눈치를 보던 녀석들도 찬성하기 시작했다.
어쩌면.....내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여행.
미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대로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아, 맞다. 그리고 말 안한거 있는데, 은성 말야. SM이랑 연결 됐다.
빠르면 이번 달, 느리면 다음 달로 해서 정식 데뷔 시킨대."
"..와, 진짜?!"

 

 

 

이어지는 들뜬 소식.
이렇게 붕 뜨고 기분 좋은 이야기들 중에 오직 나의 이야기만이 슬픔을 간직한 것만 같아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래도, 웃자, 이혁재.
.....누가 그러는데, 웃으면 오래 산다더라.

 

 

 

 


D-37

 

 

 

 

-

 

 

 

 

"커플링 맞춰요!"
"...커플링?"
"네! 커플링! 어제 려욱이랑 집에 가면서 봤는데 커플링이래요. 김종운, 그런거 챙기는 성격인지 몰랐는데.
우리도 그런거 있으면 좋잖아요."
"...닭살 돋게 뭐 그런걸 해."
"이이잉..성민이 소원이에요오..."

 

 

 

솔깃했지만 녀석에게는 짐을 지우기 싫어 무심한 척 하자 갑자기 울상을 지으며 내게 몸을 기대온다.
순간 그 귀여운 모습에 뭔가가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존나....덮치고싶잖아!!!!!!!
그리고 나도 모르게 순간 머리가 띵-해지며 주르륵....하고 코피가 쏟아졌다.
요샌 아주 피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네.....

 

 

"으엑..!! 피나요, 피!!! 어떡해!! 출장가서 너무 과로한거 아니야? 다크서클 짙어지구...막 어디 아파보여요!"
"니가 너무 섹시해서 그러잖아."

 

 

 


대충 얼버무린 채 티슈를 뽑아 코를 닦았지만 피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휴지는 점점 더 붉고 진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제기랄.............
그러나 내 말에 얼굴이 발개진 이성민은 발만 동동구르더니 찬 물을 마시라며 물을 뜨러 부엌으로 사라졌다.
위험하다...녀석에게는 전혀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내 병은 조금씩 그리고 선명하게 마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코를 꾹 누르자 그제서야 조금씩 찾아드는 출혈이었다.
화장실에서 코 주위를 깨끗히 씻어내고 수건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이성민이 떠다 준 물을 마시니 어딘지 좀 안정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너 그런거 어디서 배운거냐?"
"뭐를요?"
"성민이 소원이에요오..."
"와아. 형이 더 귀여워요!"
"다른 사람 앞에서 그거 하기만 해봐!"
"왜요? 왜요? 다른 사람들이 나 보고 반할까봐?"
"아니. 너 보고 토할까봐."
"...우씨. 그런게 어딨어요! 질투하는거 맞죠? 말해봐요!"
"시끄럽다? 나가자."
"어딜요?"
"커플링 맞추자며."

 

 

 


..................하나의 추억정도는 괜찮겠지.
너에게........잊혀지는 건 싫으니까.
이기적이게도.................정말 싫으니까.

 

 

 

 

 

 

-

 

 

 

 

"이거 이쁘잖아요!"
"난 쪽팔려서 분홍색 반지 못 껴! 그리고 뭐냐, 이게! 초등학생이나 끼고 다니겠다."
"피이......"
"이걸로 하자."

 

 

 

심플한 디자인의 은색 반지를 가리키자 자신이 고른 반지를 무시했다고 짜증을 부리던 이성민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제보니 은색도 예쁘다며 해맑게 웃는 이성민을 보며 반지를 샀다.
여성용으로 샀는데도 이성민의 손에 쑥 들어가는 반지가 신기했다.
나도 손가락에 반지를 끼자, 나와 자기의 손가락을 대보더니 마음이 따뜻해져요.라며 베시시 웃는다.
.....너도 그러니? 나도 그런데.

 

 

 

 

 


D-36

 

 

 

 

 


-

 

 

 

 

"빨리 나와요!!"

 

 

 

난데없이 의욕에 가득 찬 이성민이었다.
조규현은 데뷔를 앞두고 맹연습중인지라 거의 연습실에서 자느라고 집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있다.
어제 저녁, 걱정이 되서 전화를 해줬더니 걱정말고 이성민이나 잘 챙겨주란다.

 

 

 


몇일전 고아원에 후원한 액수등이 뉴스에 나오면서 이성민이 기왕이면 내가 후원한 고아원으로 봉사를
가자고 했다.
녀석과 함께하면서.......뭐랄까. 마음이 좀 더 따뜻해진 기분이랄까....
안하던 것들도 이렇게 불평 불만 없이 하려는 걸 보면 이혁재도 인간됐군, 싶다.

 

 


"나가, 나가."
"오늘 하루 자고 올거에요!!!!!"
"알았다니까."

 

 

 

칭얼대는 아기들을 돌보러 간다는건 썩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지만 이성민은 저렇게 즐거워한다.
죽기전에 별 경험 다 해보고 가는군.

 

 

 

-

 

 

 


"아이고, 감사합니다..."
"뭘요. 당연한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럼 아이들을 먼저 보시죠. 나이순으로 혜원이, 주연이, 수빈이, 현아, 지영이, 은하, 우정이, 유정이, 서희랍니다."
"안녕, 얘들아!"
"안녕하세요!"

 

 


원장수녀님의 안내에 따라 고아원내부를 둘러보는데 이성민 이녀석 벌써부터 잔뜩 들떠서는 아이들에게 즐겁게 인사를
한다.
올망돌망....예쁘고 귀여운 아이들이 왜 고아가 됐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별로 나와는 상관 없는 생각이므로
곧 지워버렸다.

 

 

 


"그리고 남자애들 보실까요? 어머. 한경아. 여기서 왜 웅크리고 있어. 애들이랑 놀지 않구."
"....애들이 안끼워줘요.."

 

 

 

아이들을 좌르륵 소개하며 장소를 옮기려는데 문득 앞에 앉아있는 열살가량되보이는 아이를 안아올리는
원장수녀님이었다. 예쁘장한 얼굴이지만........................눈이..남색......

 

 

 


"못된 아이들이네. 수녀님이 혼내줄게. 가자."
"..그러지 마세요......저는 그냥 뒤에 가서 뽀삐랑 놀게요."
"한경아!"

 

 

 

 

수녀님의 다정한 말에 몸을 바둥거려서 품에서 떨어지더니 팔을 더듬어 뒷마당으로 향하는 아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저 아이는....?"
"어머니가 중국분이셨어요. 일자리 얻으러 한국에 오셨다가....공장 주인 아저씨한테 강간 당하셔서
한경이를 가지게 되셨는데...그 후로 여기 와서 아이들 돌보시다가..한경이가 3살 되면서 주님의 곁으로
돌아가셨답니다. 아이는 3살 때, 어머니를 잃고 심한 열병을 앓고나서는.....저렇게 되었구요."
".........................."

 

 

 

문득 가슴이 싸해진다.
어머니를 잃는 고통을..........그 고통만은 나도 알고 있기에.

 

 

 

 

-

 

 

 

"엄마! 아빠!"

 

 


나와 성민이의 소매를 꽉 잡고는 엄마아빠를 외치는 서희라는 여자아이였다.
세살배기의 아이가 너무나도 예뻐 품에 끌어안자 성민이가 놀랐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나저나....이성민이랑 같이 엄마아빠 소리 들으니까 기분 진짜 묘한데?

 

 

 


미묘한 표정을 짓자 서희는 아빠 표정 웃기다-며 꺄르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에게 입에 밥을 조금 떠서 먹여주자 복스럽게 잘도 받아먹는다.
이제 막 네개 난 앞니를 꼬물꼬물 움직여 밥을 먹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나도 모르게 볼을 쓰다듬다가 옆에서 풋- 하고 웃는 이성민의 모습에 정색을 하고 팔을 내리느라
혼났다.

 

 

 

 

"흐흠, 나 나갔다올테니까 애기 밥 니가 먹여."
"왜요, 잘 했으면서, 서희아빠♡"
"시,시끄러!"

 

 


얼굴로 열이 오름을 느끼며 뒤로 나가자 캉캉-짖어대는 흰 강아지가 보이고,
그 앞에서 내가 서있는 곳에서 조금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누구.....?"
"한경이?"
"...누구세요?"

 

 


낮선 목소리에 아이의 얼굴이 약간 굳어진다.

 

 

 

"봉사 온 형이야. 아까 목소리 못들었나? 이혁재라고 해."
"...동정하는거면 그냥 가세요."
"동정이라니? 나 거지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녀석의 팔을 잡가 뜰고 등나무 벤치로 왔다.

 

 

 

"너 되게 예쁘게 생겼다."
"..아부하지 마세요."
"나는 아부좀 해야겠다. 부탁할게 있거든."
"....부탁이요?"
"지금 안들어줘도 되고...아주 나중에, 나중에 들어줘."

 

 

 

 

-

 

 

 

 

 

"어디갔다와요?"
"한경이랑 얘기. 애가 야무지더라."
"덕분에 내가 애들 밥 다 먹이구 옷도 갈아입혀줬어요. 땡땡이치고. 형 솔직히 말해요!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했지?"
"못했을거같냐?"
"네!"
"못했어."

 

 

의외로 순순히 수긍하자 재미없다는 듯 녀석이 맥빠진 표정으로 혀를 베에- 내민다.

 

 


"다 끝났으면...나갔다오자."
"이 밤에 어딜요?"
"뒤에..등나무 벤치 있는데, 좋더라."

 

 


내 말에 순순히 내 손을 잡아오는 녀석의 손이 따뜻했다.
등나무벤치로 와서 앉자 위에 달린 호롱불이 은은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뒷뜰을 예쁘게 꾸며주고 있는 온갖 풀들이 눈에 쏙 들어왔다.

 

 

 

"이런덴 또 언제 보고 왔대?"
"아까 한경이랑 여기서 놀았거든."
"노는것만 좋아하구. 근데 둘이 무슨 얘기 했는데요?"
"부탁 하나 했어."
"부탁?"
"비밀이야."
"치, 뭐야! 그런게 어딨어! 알려줘요!"
"싫은데?"
"어어? 이 사람 봐라!? 치사해! 치사해! 알려줘요오오!"

 

 

 

그러더니 갑자기 내 배를 간질거리는 이성민.
간지러움에 뒤로 넘어가버리자 마구 웃으면서 내 위로 올라타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긁는 이성민.

 

 

 

 

"..으하...야! 너...푸하...손 안치..워?!"
"말 할 때까지 안치워요! 에잇, 맛좀봐라!"
"푸,....푸하하하....야, 야!!!!!"
"빨리 말해요?!"
"...아..별 많다."
"말 돌리지말구!!!"
"..하아....."
"...근데 별 진짜 되게 많네요. 시골이라그런가봐."

 

 

 


마구 배를 간질이다가는 지쳤는지 그대로 드러누운 내 팔을 베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성민.
별이 반짝반짝....거리는게 너무 예쁘다. 마치 쏟아질것만 같은 별들을 쳐다보자
이성민은 입을 헤- 벌리고 별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쁘다. 그치."
"네. 우리 나중에 여기 또 와요."
"나중에? 언제?"
"..그냥..아주 아주 나중에."
".....규현이랑 같이 와."
"에? 내가 왜 규현이랑 와요? 나 규현이 안좋아해요!"
".........이리와봐."

 

 

 

 

그리고는 녀석이 팔베게를 한 팔을 도록 말아 녀석을 내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내 품안에 안긴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이성민.
들려...? 내 심장...이렇게나 빨리 뛰고 있는거.
기억해줘, 이성민. 내가 사랑한 사람 너라는거. 사랑할 사람 너라는거.
영원히..잊지 않을거라는거. 기억해줘, 성민아.

 

 

 

"으에. 갑자기 닭살돋게 왜 이래요?"
"......사랑해."
".......나두 사랑해요."
"...우리.....이러고 조금만 누워있자."
"...응.."

 

 

 


D-35

 

 

 


-

 

 

 


"악!!!! 내가 못살아!!!!!!! 자버리면 어떡해요!!!!"
"그러는 너는! 너도 잤잖아!!!!"

 

 

 


시골의 모기는 독하다. 모기에게 온통 물려 울긋불긋해진 몸을 동동 구르며 팔을 마구 긁는 이성민의
표정이 울상이다.
그래도 뭔가 재미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자 뭐가 그렇게 웃겨요, 라면서 자기도 웃는다.

 

 


간밤에 사라진 두 자원봉사자를 찾으러 고아원을 헤집고 다니시던 수녀님들도 우리를 보고 어이가 없으셨는지
작은 웃음들을 흘리셨다.

 

 


"에휴. 못살아. 이래서 애들 키우기는 힘들다니까."

 

 

 

허리에 손을 집고 혀를 쯧쯧차며 말하는 다섯살 채림이의 말이 귀여워 또다시 웃음이 번져나갔다.

 

 

 


-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놀러오세요."
"안녕히 계세요."
"우이이잉...엄마아..가지 마아.....! 아빠아아....!"

 

 


아이들이라 유독 정이 많은지 울먹이며 품에 안겨온다.
아이들에게 인사를 한 뒤 옆에 비스듬히 서있는 한경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 팔목을 조심스럽게 잡아오는 녀석을 향해 부드럽게 웃음을 흘린뒤 잘있어.라고 인사를 했다.
아이는 대답없이 시선을 외면한다.

 

 

 

 

"빨리 가요! 어, 하..한경! 맞지? 한경이두 잘있어!"
".....안녕히가세요."

 

 

 

성민이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한경이.
서글픈 미소를 짓곤 빙글 뒤돌아섰다.
언젠가는......너도 이해하겠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먼 훗날에말야.

 

 

 


-

 

 

 

 


"다들 너무 예뻤어요."
"응..예쁘더라."
"소영이 누나두...그렇게 예쁜 아일 낳겠죠?"
"..그렇겠지."
"좋은 삼촌이 되줄거에요."
"그럴거야."

 

 

 


돌아오는 기차 안. 조잘조잘 거리는 이성민이 귀여웠다.
문득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녀석이 놀랄 것 같아 참았다.
머리가 지끈거려와 차거운 창에 머리를 대자 두통이 가라앉았다.
하지만..녀석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D-34

 

 

 

 

 


-

 

 

 

 

"이건 어때요?"
"뭔 튜브냐. 니가 애야?"
"치이...그래두 바다는 깊잖아요!"
"쓸데없는 걱정."

 

 


분홍색 튜브를 집어든 이성민에게 면박을 주자 심통쟁이-라며 입술을 빼죽거린다.
하여튼, 귀여운척 짱이라니까.
바다에서 사용할 물건들과 음식물을 사러 마트에 들렀다.
과자와 폭죽, 비치볼, 수영복등 이것저것 담다보니 벌써 카트는 꽉 차버렸고
녀석과 나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계산대 맞은 편의 나무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중이었다.

 

 

 

 

"근데요. 형 동해형이랑 사이 안좋아요?"
"...왜?"
"아뇨....동해형이 형 볼때마다...눈이 되게 슬프게 변해요."
"그런건 또 언제보냐. 내 얼굴만 보고 내 얼굴만 담아."

 

 

 


................적어도 내가 사라지기 전까지만은.

 

 

 


"안그런거 같으면서 은근히 느끼하단말야?"
"그래서 싫어?"
"누가 싫대요? 그, 그냥 그렇다구.
아, 맞다. 나 요새 요리학원에서 몸보신용 삼계탕 만드는거 배우는데. 형 좀 해줘야될까봐.
어째 날이 갈수록 골골거려, 이 인간은?"
"내가 뭐를."
"요즘들어....머리카락 빠지는 것처럼..숱도 많이 줄었구....다크서클도 짙구.
너무 무리하는거 아니에요?"
"니가 내 머리숱 빠지는거 어떻게 알어?"
"사랑하면 원래 다 아는거에요."
"어이구."

 

 

 

 

계산을 해야겠다며 붉어진 얼굴로 계산대를 향해 걸어가는 녀석을 보자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나......정말 널 두고 가고싶지가 않아. 하루빨리 정을 떼어버려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
....너를 너무 사랑해....정말 사랑해..
....나 어떡하냐.........
...........어떡하니.

 

 

 

-

 

 

 

 

"소영이는 요새 좀 어때?"
"그냥 잘 지내요. 회사도 그럭저럭 다니고. 아. 근데 형 나한테 누나얘기 물어보면 안되는거잖아요."
"..왜?"
"반칙이야. 둘이 사겼었잖아요! 나한테 물어보는건 아직도 울 누나한테 관심있다는 말로 들린단말야!"
"그런거 아니야."
"아닌거 아는데 질투나요."

 

 

 

...그냥, 녀석의 말이 너무 고맙다.
살짝 웃어버리자 웃지마요, 정들어! 라면서 들고 있는 봉다리를 마구 휘두르며 걸어간다.
녀석의 귀가 붉어져있다.

 

 

 


"이성민!!!!!!!!! 사랑한다!!!!!!!!!!!!!!!!"
"...내, 내가 미쳐!! 뭐하는거에요! 밤 늦어서 다 깨겠다.."
"사랑해, 성민아!!!!!!!!!!!!!!!!!!!!!!!!!!!!!!!!!!!!!!!!!!!"

 

 

 

 


우렁차게 소리치자 이성민의 얼굴이 발개져서는 눈을 데룩데룩 굴린다.
그러더니 조막만한 목소리로,

 

"..나, 나두요...."

 

 


란다.

 

 

 

"뭐라구? 안들려."

 

 


능청스럽게 말하자, 버럭 소리를 친다.

 

 

 


"나, 나두요!!!!!!!!!!!!!!!!!!"

 

 

 


..........이성민. 너 그거 알아? 나 지금 죽을만큼 행복하다.

 

 

 

 


D-33

 

 

 

 

 

 

"와서 그냥 갔다더구나."
"아버지가 안계셔서요."
"..오늘은 왜 왔니? 그냥 아예 집으로 들어오는건.."
"어..다름이 아니라...저 유학가려구요."
"..뭐?"

 

 

 


아버지의 집을 찾았다.
부쩍 말라버린 내 모습에 놀란 듯 뭔가 물어보시려던 아버지는 입을 다무셨다.
어쩌면 당신의 아들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는지도 모르겠다.

 

 

 

 

"유학이요."
"..갑자기 무슨 말이냐? 갑자기 무슨 유학을,"
"새로 뭔가 시작해보는거 나쁘지 않잖아요. 허락 안해주셔도 갈거에요."
"...후..."

 

 

 

 


어릴적부터 한 번 고집부린 일은 끝까지 해내고야 말았던 심통쟁이였던 나였기에 아버지는 한숨만을 내쉴 뿐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의 얘기를 듣고 있던 새엄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꼭..그렇게 해야겠니?"
"예. 애인과 가서....행복하게 살겠습니다."
"......혁재야.."
"...저도..행복해질테니까...이제 두 분도 저한테 미안한 마음 가지지 마시고, 행복하게 사세요."
"..혁재야?"
"저는.....두 분 용서했습니다."
"......"

 

 

 

내 말에 새엄마의 눈에서 가느다란 눈물이 흘러내렸다.
멍한 표정의 아버지를 지나쳐 현관 손잡이를 잡는데 아버지의 쉰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고맙다, 혁재야."

 

 

 

 

 

D-32

 

 

 


-

 

 

 

 

"와아. 진짜 좋다! 나 이런 펜션에서 살아보는게 소원이었어요!"

 

 

 

 

 

해변가에 위치한 하얀 2층의 펜션. 마당에는 정자와 바베큐 그릴도 있고 넓찍한 잔디도 있었다.
다들 어린애마냥 펜션속으로 뛰어든다.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김영운과 나와 조규현은
천천히 그 뒤를 밟았다.

 

 

 


이성민은 2층의 방으로 뛰어올라가더니 가장 큰 창문이 있는 방 문을 활짝 열고서 여기 우리방해요!!!
랜다.
고개를 끄덕이자 또 좋다고 방방거리더니 기어코 사온 분홍색 튜브에 훅훅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뭘 벌써 튜브를 불어? 점심 먹고 놀아."
"점심 먹고 바로 놀거에요!"
"그러다가 몸 상한다."
"치. 잔소리쟁이."

 

 

그러더니 규현이와 종운이와 놀겠다며 방을 휑 빠져나가버렸다.
더블베드에 옷장하나. 티테이블, 의자 두개. 꽤나 심플한 방이다.
짐을 대충 푸른 뒤 머리가 어지러워 침대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

 

 


"치. 같이 놀구 싶었는데 너무 곤히 자서 못깨웠잖아요!"
"깨우지."
"형 요새 피곤해보이는데 내가 어떻게 깨워요!"
"어이구, 황송합니다."
"나빠.."

 

 

 


바베큐 파티.
각자 파라솔을 친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있고 김영운과 박정수가 그릴에 피망과 삼겹살,
오징어, 고등어등을 굽기 시작했다.
햄이니 브로콜리니 이런저런 것들을 끼워 꼬치를 만드는 이동해가 있었고, 최시원은 바베큐 소스를
만들었다.

 

 

 

이성민과 김려욱은 조신하게 왔다갔다하며 밑반찬과 접시, 수젓가락등을 빙 둘러 놓았고 나와 조규현,
김종운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와아! 이거 소스 되게 맛있어요!"
"그래? 고맙다."
"혁재형! 빨랑 먹어봐요! 아니다, 내가 입에 넣어줄게. 아- 아아-"

 

 

 

상추에 삼겹살과 바베큐소스, 피망, 이런 저런 야채들을 잔뜩 올려 내 입에 쏙 넣어주는 이성민을 보는
이동해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후.........제발..가만히 있길 바래야지.
고기를 먹기 시작하자 술이 한두잔씩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내 식사는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저녁은 즐거웠고 맛있었다.
파티를 다 끝낸 뒤, 정수가 안으로 들어가 먹을 아이스크림들을 가져왔고, 조규현이
빈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아넣고 경쾌하게 노래를 불렀다.
다들 박수를 치고 웃으며 즐거워하는새 이동해가 이성민의 손목을 붙잡고 뒤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조심스럽게 슬그머니 일어나 녀석들의 뒤를 따랐다.

 

 

 

 

"...이쁘네."
"네...?"
"이쁘다구. 이혁재랑 잘 어울려."
"아, 감사합니다..."
"근데....니가 혁재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아니?"
"..네?"

 

 

"니가 얼마나 잘 아냐구. 너 혁재한테 고기 싸주더라. 이혁재 돼지고기 못먹어. 알아?"
"....아. 맞다...! 깜박했어요....."
"못 먹는거 억지로 먹어서 고생하게 해놓고 깜박했다그러면 참 세상 편하고 좋겠다? 그치?"
"죄, 죄송해요..앞으로 주의 할게요."
"앞으로....? 앞으로는 없어...!! 앞으로 따윈 없다고, 이혁재한테!!!!!!! 이혁재한테!!!!!!!!!!!!!!!
알아!??!?!?!? 이혁재한테는.........."
"....이동해. 거기까지 해."

 

 

 

마구 소리를 지르던 이동해는 내 목소리에 깜짝놀란듯 훅 숨을 들이켰다.
내가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자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피식 웃고는 나를 그냥 지나쳐버린다.
눈가에 가득 눈물이 고여있는 녀석의 원망스러운 눈을....나는 닦아줄 수 없었다.

 

 

 


".....저게..무슨 말이에요?"
"술꼬장이야."
"....좀..이상하잖아....형한테....왜 앞으로가..없는데......?"
"쟤 나 좋아해서 그래. 신경쓰지마. 꼬장이야, 저거."
".......나 근데.....왜 이렇게 불안하죠....?"
"사랑해, 성민아."

 

 

 


녀석을 내 품안에 끌어안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어느새 녀석에게나 나에게나 진정제가 되어있었다.
내 말에 녀석이 부드럽게 숨을 몰아쉰다.

 

 

 

"...영원히 사랑해...죽을 때까지 사랑해....죽어서도 사랑해......"
"...죽는다는....말 하지마.....나 기분 이상해요.....그냥....
변하지 않을거라고만 해줘요..언제 어디서 나를 보게 되더라도........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잊어버리지 않을거라고........그만큼 나를 사랑한다고......."
"....사랑할게....변하지 않을거야....언제 어디서 너를 보게 되더라도....
니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잊어버리지 않을거야......그만큼 널 사랑해....."
"............그거면 충분해요."

 

 

 

 


녀석의 손이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D-31

 

 

 

 

 

-

 

 

 

 


".............이성민..나갔어?"
"아까 김종운이랑 김려욱이랑, 조규현이랑."
"....나 저기 까만가방 앞주머니에서.....약 좀 꺼내줘."
"..물은?"
".....먹다가 들어올지 모르잖아. 빨리 줘."

 

 

 

 

쓰디쓴 약을 물도 없이 씹어삼키는 나를 보고 최시원은 독하다며 혀를 찼다.
그 시선을 꿋꿋히 받아내며 까끌해진 혀를 깔딱 삼켜내자 최시원은 한숨을 내쉰다.

 

 

 

 

 

"..동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언젠가는 너의 마음을 알겠지."
"....언제."
"............"
"...너무 힘들어.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사실....니가 죽는다는 얘기 들었을 때.
한편으론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 그런 다음에는 내가 죽일듯이 밉고 무섭더라. 그렇게 친했는데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이런식으로 변할수가 있나. 그렇더라."
".........."
"....인간이란게 정말 간사한 것 같아."
"..그렇지....나도 머리로는..이성민을 자꾸 놓아주어야지, 그래야지 하면서도.....정작 손으로는, 몸으로는 그 녀석을
잡고 있으니까........온 몸으로 녀석을 껴안고 있으니까."
"................."

 

 

 

 


"시원아."
"그래."
"내가 아프게 한만큼....이동해..웃게 해줘. 좋은 녀석이니까...착한 녀석이니까.
나한테는 너무 과분해."
".......응..노력할게."
"아. 기분 열라 이상하네. 역시 우린 진지모드는 안어울려. 그지않냐?"
"그러게. 우리도 바다나 가자."
"응."

 

 


자리에서 일어나려다말고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후아.
심호흡을 해보지만 또다시 저번처럼 시야가 검게 물들어버렸다.
그리고 찾아오는 엄청난 공포심.

 

 

 


"...시, 시원아......"
"..오, 왜그래?!?"
"나, 나 좀 침대에 앉혀줘...잘래........잘거야.."
".........해?"

 

 

 

녀석이 뭐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 촉각마저 마비되었는지 무언가를 따라
침대에 누운것은 알겠지만 무엇을 잡았는지는 감촉도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살아있는 시체처럼...........
.............................눈을 감고..잠들었다.

 

 

 

 

 


D-23

 

 

 

 


-

 

 

 

 


"..성민이랑 종운이, 려욱이.....규현이가 먼저 데리고 올라갔어. 니가 일때문에 급하게 나갔다고 대충 둘러댔어."
"..................그래서........이제 한달도...안남았다구..."

 

 

 

 

 

아주 잠깐동안 잠들었던 것 뿐인데.....다시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젠 웃음도 나오질 않는다.
허탈한 내 표정을 힐끔거리더니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한숨을 내쉬는 김영운.
왜...니가 미안해하니.
그래도.....이성민은......모른다니 다행이다.

 

 

 


"..어..혁재 일어났네?"

 

 

 


정수가 들어오며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일부러 밝게 꾸민 목소리가 티나는데도....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점점 내 몸이 고장나는 것을 느낀다.

 

 


"응.."
"아우. 너땜에 우리 영운이 고생하잖아. 빨리 기운 차려. 알았지?!"

 

 

 

 

나에게 농담조로 웃으며 말하는 정수였다.
나도 어색하게 웃어보인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혁재야....."
".......어...?"
"..........아냐."
".....김영운.....나 그때...부탁한거.......
...꼭 들어줘라....?"
"......알았으니까...걱정 마.......아버님한테 메일..보내드릴게."
"....그리고.......내 집 명의...한경이라는 애한테로 돌려줘.
그리고...또......우리집에......내 서재에 서랍 보면...통장 있거든..그걸로
이성민, 조규현......집사줘."
".............."
"...그리고.....................
............나 잊지 마.........."

 

 

 

 

 

내 말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가버리는 김영운이다.
정수의 눈도 어느새 빨개져있었다.
씨발, 왜 다들 나 보면 울기만 하는거야. 제기랄..........내가 더 불쌍해지잖아..
난 동정받기 싫어서 이러는건데........왜 다들 나 동정하는건데............

 

 

 

 


"....김영운 또 화나게 해버렸다. 미안해."
"................."

 

 

 

 

 

D-17

 

 

 


-

 

 

 

 


"....진짜야?"
"네! 부모님이 바라시는대로 서울대 미생물학과 수시 합격했구요!
또, 그림도 미술관에 전시해준다그랬어요!!!!!! 원래 처음이라서 미술관에
걸려면 로비도 엄청 해야된다는데, 작품이 워낙 잘되서 출구쪽에 2점 걸어준대요!!!
아, 또 그리고....종운이형이랑도 잘되가고 있어요. 다 형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그럼...다 성공한거네, 려욱이는."

 

 

 

 


녀석의 성공했다는 들뜬 말에 나도 모르게 가뿐한 미소가 흘러나온다.
두달전만 해도 꽉 끼던 24인치 청바지가 주먹이 두개 들어갈정도로 헐렁해져있었다.
거울을 보면서 핸드폰을 한쪽 목으로 받친채 웃음과 함께 려욱이와 통화중이었다.

 

 

 

 

"정말....고마워요..."
"다 네가 노력해준덕분이잖아."
"...."
"....이제 전화하지 마."
"..네?"
"이제 너한테는 종운이 있잖아. 나한테는 의지할 필요도 없고 내가 받아주지도 않을거야.
나 이제 곧 폰 해지한다. 알겠지?"
".......네에.."
"...만약..운이 좋다면.....또 보겠지. 잘있어."

 

 


내 인사에 풀이죽은 목소리로 대답하던 김려욱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웃음이 나오냐.."
"너보다 늦게 시작한 김려욱이 먼저 성공했다. 분발해."
"다음주에 데뷔야. 여튼 말도 끝까지 재수없게 한다."
"......성민이한테...........잘해줘..알았냐..
울리지 말고......내가 못한만큼."
"...지가 상처받을거면서.....시작은 왜 했냐."

 

 

 

 

입술을 꾹 깨물고 쉰 목소리로 말하는 조규현이었다.
녀석을 향해 씨익- 웃어보인 뒤 신발을 신었다.
살빠지면...발 사이즈도 줄어드나...신발도 커진 것 같네...
....아, 맞다..양말을 안신었구나......

 

 

 


머리가 아프니까 기억력도 자꾸만 감퇴하는 것 같다.
다시 신발을 훌렁훌렁 벗고 양말을 신고 다시 신발을 신었지만 여전히 신발은 조금 크다.
씁쓸해졌다.
발이 커야 멋진 남자랬는데. 야, 이성민. 니 서방님은 멋진 남자가 아닌가부다.

 

 

 


-

 

 

 

"맨날 지각하고, 일가고. 저번에 바다갔다가두 뭐야아.....치."
"화났어, 그래서?"
"몰라요!!!"
"규현이가 벌써 다음주 데뷔래. 참...시간 정말 빠른거같아. 그치?"
"..어? 근데 형 손에 반지 어디갔어요?!?!"

 

 

 

 

눈이 도끼처럼 변한다. 에휴. 마누라 무서워서 어떡하니.
나는 잠자코 녀석에게 목에 걸린 목걸이에 끼워둔 반지를 보여주었다.
손가락 살이 너무 빠져 반지가 헐렁헐렁해지는 바람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내 목걸이를 보더니 녀석은 피이-랜다.

 

 

 

"또 왜?"
"맨날 자기만 멋있는거 해. 난 사내새끼가 반지낀다구 졸라 욕 먹었는데."
"그럼 너두 이렇게 해."
"메롱. 싫어요! 형이 끼워준 이후로 한번도 안 뺐는데!"
"너 그럼 안 씻은거야? 나중에 반지 뺐는데 거기만 새까마면 어떡하냐?!?!?!?"
"안씻은게 아니라 못씻은거죠!"

 

 

 

이렇게 티격태격거리면서도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걷고 있다.
이제..........2주일 뒤면...조규현에게 내 자리를 양보해야겠지만............
.........이렇게 나에게 끊임없이 세뇌를 시킨다. 녀석을 더 사랑하지 않도록.
그래서 추한 모습으로 떠나지 않도록.

 

 

 

"...성민아."
"왜요?"
"......우리, 여기서 키스해볼까?"
"미쳤어요? 여기 도로 한 복판이야!"
"..뭐 어때?"

 

 

 


무척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는 혼잡한 도로였다.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한 번 뿐일거잖아.
내 시선을 마주하던 성민이 내 엉뚱한 부탁에 의아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띄며
대답한다.

 

 

 

 

"해봐요. 하지만 얼굴 팔릴만큼 만족스럽지 않으면 안놔줄거야!"

 

 

 

 

천천히 녀석에게로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맞닿는 느낌.
말캉한 혀의 부드러움과 서로에게로 넘겨가는 타액.
혀가 엉키고 얽히고..........
서로의 잇몸과..치열을 고르게 훑어나가고..향기를 느끼며 딥키스를 나눈다.

 

 

 

 

 

사람들이 멈춰서서 우리쪽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는게 느껴졌다.
몇분을 그렇게 붙어있었을까. 드디어 이성민쪽이 먼저 숨이 막히는지 쌕쌕거리기 시작했고
얼굴을 떼자마자 이성민의 가녀린 손목을 잡고 마구 뛰었다.

 

 

 

 


"..으하.....하악...흐악...! 으학...!!!!!"
"하아......하아아아....."
"...으하...무식하게...하아..그렇게...으하...........뛰는게..어딨어요?"
"그래서....만족하셨습니까?"
"....아뇨. 다시 해줘요."

 

 

 

 

 

그리고 아무도 없는 텅 빈 골목길, 녀석이 먼저 발꿈치를 들고 나의 입술에 접촉을 시도했다.
가벼운 혀의 두드림과 함께 다시 야하게 열리는 입술과 벅차오르는 숨결.
한참 서로를 느끼며.....그 작은 골목에서 우리는 몇번씩이나 서로의 체온을 혀로 느꼈다.

 

 

 

 

 

-

 

 

 

 

"짜잔!"
"야, 너 미쳤어!"
"원래 이런덴 낙서해도 되는거에요. 봐봐요. 낙서투성이잖아."

 

 

 

 


과연 벽을 보니 기겁할만한 낙서들로 가득이다.

 

 

 

 


"이혁재♡이성민
우리 사랑하고 있어요!"

 

 

 

 


얼굴답게 귀여운 글씨체로 벽에 써나가는 이성민.
나를 보더니 씨익 웃는다.
이렇게 많은 낙서들 가운데.....파묻혀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그래. 우리가 사랑했었다는 흔적은 여기에 남겠지.

 

 

 


씁쓸함에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주문했던 김밥과 떡볶이가 나왔다.
어느새 펜은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떡볶이를 입으로 가져가는 이성민의 얼굴을 보며
착찹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D-9

 

 

 


-

 

 

 


"와아. 오늘 너 진짜 대단했어!!!!!!!!!"
"팬 수 장난 없더라?!?!?!"
"다들 은성 외치는데, 하도 은성은성거려서 나도 세뇌되가지고 내 입이 지멋대로 은성거리고 있더라니까!"

 

 

 

 


규현이의 첫 데뷔가 있던 날이었다.
다들 들뜬채 빙 둘러앉아서 맛있게 밥과 술을 마시고 있었고 나는 멋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팔때문에 가만히 앉아 규현이를 보며 웃어주었다.

 

 

 

나를 보더니 어설프게 마주 웃는 조규현.

 

 

 


팬들의 수는 데뷔 전에 벌써 20만명을 넘어있었다.
데뷔무대는 성공, 아니 그 이상이었다.
유례에 없는 엄청난 팬수와 인기를 확보하며 벌써부터 순항을 예고하고 있는 은성이었다.
그렇게 무르익은 분위기 가운데 갑자기 조규현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플립을 보더니 굳어진 조규현이 딱딱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 멍한 표정을 짓는다.
한참만에 전화를 끊은 녀석이 행복하게 웃는다.

 

 

 

 


"..........엄마아빠가............
......................공연 잘 보셨대..........
........힘내래.....은성화이팅이래............."

 

 

 

 


....................결국 노력이 인정을 받았구나.
뿌듯해짐을 느꼈다. 다들 열심히 해줘서.....고맙다는 기분만 들뿐이었다.
스스로 꿈을 이룬 녀석이 대견했다.
옆에서는 눈에 눈물이 고여 짝짝 박수를 치는 이성민이 있었다.
...........이제..........
........................나도 내가 가야될때가 됐음을 느껴.

 

 

 

 


D-5

 

 

 

 


-

 

 

 

 

".......좋아해요."
"..에에?"
"좋아한다구요."
"나두 우리 규현이 좋아."
"...그런 의미 아니야. 나도 혁재형처럼......당신을 사랑한다구!!!!!!!!"

 

 

 

 


거실에서 규현이와 성민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흘간 밀려오는 엄청난 스케줄에 눈코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녀석에게 어젯밤 부탁을 했다.
이성민에게..고백을 해달라고.
.....나는 내일 김영운 명의로 산 시골의 작은 별장으로 옮겨가기로 했다.
내 명의로 하게 되면 혹여 아버지가 찾아오실까봐 김영운에게 도움을 청했다.
해준 것 없는 나에게.....고마운 아이들이다.

 

 

 


"...규, 규현..아....."
".....사랑해요.......처음 본 순간부터.."
"..하지만........난 혁재형을........"
"...영원할 수 없잖아..."
".......영원할 수 없다니?! 영원이 있다고 믿으면 그게 영원인거야!"
"......다시..생각해봐요."

 

 

 

 

그리곤 규현이는 다시 스케줄을 하러 나가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한참의 정적 후에 내 방문이 빼꼼 열렸다.

 

 

 

"....형....."
"..성민아."
"....사랑해요."
"...나도 너 사랑해."
"......응.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어."
"근데 성민아."
"네..?"
"그러니까 조규현한테 가."
".............네?"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는 이성민.
그런 그의 표정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말을 이어나간다.

 

 


"조규현이....더 너에게 잘해줄거야. 거칠어보여도...착하고 좋은 아이니까."
"....형...갑자기...그게 무슨말인데요.....? 갑자기 왜...."
".....나.....미국으로 유학가."
"...........네?"
"...미국 가."

 

 

 

"..나...나도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형 돈 많잖아.....?"
"...사실.....너 그렇게 귀찮게 구는거.....질렸어..............귀여운 척 하는것도...
...알지, 우리 처음 약속? 두달 뒤면 니네 누나한테 돌아간다는거. 그 것도 다 뻥이었어.
니가 닮았길래 구미 당겼던건데 너는 어떻게 그래도 좋다고 믿고 애교부리고
그러더라. 솔직히 속으론 역겨.....웠지...너랑도 다 장난이었어. 그러니까 조규현한테 가."
"....하..........."

 

 

 

멍해진 녀석을 애써 집 밖으로 밀어내며 나는 문을 세게 닫았다.
잠긴 문을 마구 두드리며 문을 열어보라며, 사랑한다며, 애절하게 소리지르는 이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애써 귀를 막으며 짐을 챙기던 가방을 다시 집어들었다.
뭔가 더 챙길게 없나 싶어 마지막 서랍을 열자 지금까지 먹었던 스무개도 넘는 약병들이 가득 들어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 누웠다.

 

 

 

 

D-3

 

 

 

 

 

-

 

 

 


"꼬마야. 너네 집 가서 놀아라."
"아, 싫어요오!!!!!!! 여기 원래 우리 아지트였단말이야!!!"
"근데 이제 내 집이라니까."
"흥! 꺼져라, 마귀야!!!!!!!! 이 악의 무리!!!!"

 

 

 

나 참.
한 6살정도 되보이는 꼬맹이가 내 앞에서 방방거린다.
안그래도 정신 사납건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아 기둥에 머리를 기대자 아이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내 옆으로 쪼르륵 다가온다.
......빵빵한 볼과....땡그란 눈이.......
..............누굴 닮았다.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어제 핸드폰을 해지해버려 녀석의 목소리를 들을수도 없다.
집 안은...그냥 집만 샀기때문에 텅 비어있다. 가구가 없어서 넓은 집도 삭막하게만 보인다.

 

 

 

 


"꼬마야. 너 이름이 뭐냐?"
"나요? 이! 성! 민! 이요! �오오오오기 해맑은유치원 기린반이에요!"
".................."

 

 

 

 

 

참.......
......운명이라는게 아이러니하지?

 

 

 

 

 

"..왜 이름이 하필 이성민이냐. 신짱구가 더 어울린다."
"어? 아죠씨도 쨩구 봐요? 나도 쨩구 좋아해요! 근데요! 나는 유리가 더 좋아요!
아기곰반 지애닮았거든요. 이건 비밀인데요 내가 지애 좋아해요!"
"....그래?"

 

 

 


잔뜩 들떠 팔을 방방거리며 말하는 녀석이ㅡ
너무나도 예뻐보였다.
아...그 고아원.....나중에 같이 가보기로 했는데.
...맞다. 조규현이랑 같이 가라고 했었었지.
..아코. 또 건망증이야.

 

 

 

 

 

"........있잖아. 내가 아는 사람중에서도 이성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 나랑 이름 똑같다. 이!성!민!"
".....진짜진짜.......예뻤어.....진짜진짜 사랑했는데......."

 

 

 

...........녀석을 생각하자 다시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뇌가 마비된 것 같다.
머리의 고통보다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흉통이...더 크다.

 

 

 

 

 

".......있잖아. 내가 아는 사람중에서도 이성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에? 그 얘기 했잖아요! 왜 또 해요?"
"...아. 그랬었나?"

 

 

 


..아. 망할 건망증.
기왕도와줄거면 의사꿈가지고 있는 애들이나 서포트해줄걸...
뇌종양은 정말 나쁜 병이야.

 

 

 

 

".......그런데 꼬마야. 너 이름이 뭐니?"

 

 

 


.............누구 되게 닮았다.

 

 

 


그러자 아이는 어디론가 쪼르르 뛰어가며 이런다.

 

 

 

 

"엄마!!! 우리 옆집 아저씨 이상해!!!!!!!!"

 

 

 

머리가멍해.

 

 

 

 

 

 

D-2

 

 

 

 

 


-

 

 

 

 


".....너랑 이 집 같이 오니까 되게 어색하다."
"..그러게요. 짐 챙길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규현이 자신이 쓰던 방으로 사라지자 성민은 내부를 쭉 둘러보았다.
이틀정도가 지났을뿐인데 벌써부터 사람냄새는 나지 않는 집안이 왠지 소름끼친다고 느껴졌다.

 

 

 

"....진짜...못됐다니까..."

 

 

 

 

서글픈 혼잣말을 내뱉으며 성민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엌을 빙 둘러보던 성민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찬장으로 다가가 찬장을 열자 안에 보이는 투명한 유리단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 가득 담긴 쿠키.
허무한 마음이 들어서 단지를 잡아 내리는데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단지를 식탁에 올려놓고 보니 단지를 묶었던 분홍색 리본이 떨어져있었다.

 

 

 

 


'아까워서 못먹겠다. 맛있었어.'

 

 

 


순간 눈에서 뭔가가 주륵-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이건 뭐야........이런 같잖은 인사치레따위...
.........근데 왜 난 눈물이 나는건데.....
이렇게 가식적인 친절.....챙겨주는 척...정말 어이없는데...............

 

 

 


그러나 말릴 새도 없이 눈물이 마구마구 흘러내렸다.
결국 어깨를 들썩거리며 그는 리본을 집어들고 단지에 다시 정성스럽게 묶었다.
마치 새 과자처럼 예쁘게 포장된 단지.

 

 

 

...................여기에 다 버리고 갈게.
당신이...날 가지고 놀았던거...........그 더러운 추억.......다 여기 흘리고 갈게.

 

 

 


천천히 자신의 손에서 반지를 빼내고 식탁에 올려두는 성민이었다.

 

 

 

 

"...성민이형, 울어요?"
"어? 울긴. 누가. 가자. 규현아."
"가요."
"....규현아."
"네?"
".....나 너 좋아할 수 있도록...노력할게."
"............고마워요."

 

 

 

 

잘있어. 이혁재.

 

 

 

 


D-DAY

 

 

 


-

 

 

 


외로웠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고요한 정적.
이미 피와 땀으로 젖어버린 축축한 침대에 한 남자가 외롭게 누워있었다.

 

 

 


.........보고싶어.

 

 

 


창밖에는 꼬마 성민이가 자신의 강아지와 뛰놀고 있다.
맑고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싶어.

 

 

 


그 밝은 목소리가, 귀여운 콧소리를........
...나빠진 그의 기억력은 성민의 모습을 모조리 가져가버렸다.
힘을 주어 억지로 팔을 움직여 성민과의 커플링을 꽉 쥐어본다.
늘 따뜻했던 반지가 오늘은 차갑다고도 느껴진다.

 

 

 

 

곧 있으면 영운이 올터였다.
그때까지는 버티고 싶은데 ..... 자꾸만 눈 앞이 흐려진다.

 


.....성민아........
............사랑하는데............
...................사랑..하는데.............
.....................지금쯤......
..넌 규현이랑............행복하겠지...

 

 

 

.......그래.....웃어. 웃어줘...
희미해졌던 성민의 얼굴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오른다.
눈가의 주름 하나하나, 입매와 눈매.....
꺄르륵..신나게 웃는 웃음소리마저도..................

 

 

 

"..사랑해요, 형...."

 

 

 

 

수줍게 웃으며 성민이 손을 내민다. 손에는 예쁜 반지가 끼워져있다.

 

 

 

 

"......늘 형만 사랑하겠다고ㅡ 형의 곁에 있겠다고 약속할게...."

 

 

 

 

 

손을 내밀려고 손을 뻗어본다.
무언가가 맡닿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

 

 

 


까슬해진 그의 목소리가 그리웠던 여인의 이름을 부른다.
여인의 손을 마주잡고 그는 힘겹게 버티던 눈을 편안하게 감았다.
밖에는 갑자기 우중충해진 날씨가 미친듯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

 

 

 

 

 


EPILOGUE★完

 

 

 

 

 


-

 

 

 

 


"으하하! 은혁아! 삼촌해봐, 삼촌!"

 

 

 

 

 

.................보여요? 저기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
은혁이라는 아이는...그때 말했던 전 애인의 아이인가요?

 

 

 


"�....쫀!"

 

 

 

"성민이형. 우리도 애기 하나 낳을까요?"
"이, 이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우리가 앨 어떻게 낳니!"
"밤에 좀 더 분발하고 형이 노력하면...."

 

 

 

 

.......비가 쏟아지네요.
혹시 당신이 울고 있는건가요?
아니라고 해도....난 당신의 눈물이라고 믿고 싶어요.
당신의 눈은 여기, 나에게 있잖아요.
당신이 준 눈이....당신의 부탁대로 이렇게 당신의 남자를 지켜보고 있잖아요.

 

 

 


행복하신가요?

 

 

 

 

 

 


소영의 아들 은혁과, 연인 규현과 함께 즐겁게 걸어가던 성민은 문득 시선을 이끄는 어떤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어디서 봤더라....
낯익은 눈매를 본다. 고개를 갸우뚱해보지만 생각나는 얼굴은 없다. 결국 마주친 시선을 먼저 피해버린 채
또 다시 즐거운 웃음으로 가던 길을 마저 걷기 시작한다.

 

 

 

 

 


한경은 멀어지는, 점점 작아지는 성민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행복하신가요.

 

 

 

 


"...난...이제 곧 죽으니까, 내 눈을 너에게 줄게.
.....아주 가끔씩...........내 눈으로 그 사람이 잘 지내는지 확인해주겠니?"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 없이. 아주 행복하게...............잘 살고 있네요.

 

 

 

 

                     내게 남은 61일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