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앵봉(鶯峰) 2020. 11. 19. 04:17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 추모비(文獻公 一蠹 鄭汝昌 先生 追慕碑)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경남 함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육을(六乙)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성리학자,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일찍이 이천(利川)의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으로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다.

그해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죄목은 난언죄(亂言罪) 즉 말을 함부로 했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1504년 (연산군 10) 만 55세로 별세하였다.

제자들이 가서 함경도 종성에서 고향 함양까지 시신을 3개월 동안 운구하여 모셨다.

사후(死後)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가

1517년(중종 12)에 복권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정몽주(鄭夢周),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어서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 

 

 

 

한국의 서원 - 유네스코 세계유산(남계서원)

 

한국의 서원은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9곳을 세계유산에 등재하였다.

 

소수서원,(경북 영주) 남계서원(경남 함양),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필암서원(전남 장성), 도동서원(대구 달성),

병산서원(경북 안동),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지역전파에 이바지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며,

그 구성 유산의 진정성과 완전성, 보존관리 계획 등에서 충분한 요건을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풍영루(風咏樓)

 

풍영루는 유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손님이 오면 학문을 토론하고

정담을 나누기도 한 누각으로, 창건 당시 준도문(遵道門) 이라고 하는 출입 삼문이었으나

후에 다락집을 올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논어의 내용 중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쏘이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라는

증점(曾點)의 뜻을 바로 여기서 느낄 수 있다하여 풍영루라 이름 지었다.

"기수(沂水)와 무(舞雩)"는 춘추시대의 전설 속에 나오는 곳이다.

출입은 사당의 내삼문과 함께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가는 형태로 기문은

정여창 선생의 후손인 조선 말기 문장가 오담(梧潭) 정환필(鄭煥弼)이 지었다.

 

 

풍영루(風咏樓)

 

풍영루는 바람(風)을 쐬며 책을 읽는(咏) 다락(樓)이란 뜻으로

학문을 닦아서 풍속을 교화하는 학교를 말한다.

공자와 제자인 염유, 자로, 공서화, 증점이

자신을 알아주는 왕이 있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공자의 물음에

증점이 봄날에 새옷을 입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다가 돌아오겠다는 뜻을 담았다.

 

 

묘정비(廟庭碑)

 

남계서원에 일두 정여창, 동계 정온, 개암 강익 선생 세분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음에도

이를 찬양하는 송덕비가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남계서원 건립 200여 년이 지난 1779년에 묘정비를 세우면서 글을 새겼다.

비문은 조선 후기 정조 때 문관 김종후(金鍾厚)가 지었다.

 

 

 

강당(講堂)

 

강당은 경(敬)과 논(論)을 연구하고 학습하는 곳으로 명성당이라고 하며,

중용의 참된것을 밝히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니,

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된다."라는 뜻이다.

강학영역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로 1559년에 완성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 각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오른쪽 방은 거경(居敬)이라 하며 "경(敬)에 거(居)해서 이(理)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이고

동쪽 방은 집의(集義)라고 하여 "호연지기는 도(道)와 짝이 되는

의(義)를 축척해야 생기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동재(東齋)

 

동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동쪽에 있어 '동재'라고 한다.

동재는 '양정재(養正齋)'라고도 하는데, 이는 '역경(易經)'에 나오는 교육을 함으로써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인의 공덕이다.'라는 구설에서 따온 말이다.

동재는 서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애련헌(愛蓮軒)'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정여창 선생은 송나라 때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영향을 받아

매화와 연꽃을 사랑하여 누 이름을 애련헌과 영매헌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서재(西齋)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서쪽에 있어 서재라고 한다.

서재는 "보인재(輔仁齋)라고도 하는데, 이는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글로서 벗을 사귀고 벗으로서 인을 돕는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서재는 동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영매헌(咏梅軒)"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영매헌과 애련헌(愛蓮軒)은 "연못을 파고 못 옆에 둑을 쌓아서

연을 구경하고 매화를 읊조릴 만하다"라는 뜻이다.

 

 

경판고(經板庫)

 

경판고는 '장판각'이라고도 하며, 서원에서 보유하는 책이나 판각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유생들을 교육한 '어종오경(御定五經)' 등의 서적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건물을 지면에 붙이지 않고 4면을 모두 터 놓아 공기의 유통이 자유롭게 하여 판각을 보관하기 쉽도록 하였다.

외부 벽체는 나무로 구성한 판벽으로 되어 있고 내부 역시 가운데 판벽이 있다.

 

 

사당(祠堂)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주벽은 조선 5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셨고,

서쪽은 1675년(숙종 1)에 동계 정온 선생을,

동쪽은 1689년(숙종 15)에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개암 강익 선생을 모셨다.

강익 선생은 정온 선생의 외삼촌이다.

 

 

전사청(典祀廳)

 

향사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전사청은 제향영역 내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제향 영역 밖 독립된 영역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전사청이 건립되지 않은 사당은 고직사에서 제향을 준비하거나 외부에서 준비하기도 한다.

 

 

 

남계서원(濫溪書院)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교육기관이자 선현들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남계서원은 조선 초기 성리학자이며, 동방 5현으로 불리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1552년 개암 강익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건립하였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1566년에 명종 임금에게서 하사 받은 사액서원이다.

출입문인 풍영루와 강당, 동재, 서재, 경판고(장판각), 사당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급한 경사지에 사당을 제일 높은 곳에 두고 출입문까지 일직선상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전학후묘의 배치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는 서원은 대부분 이러한 배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1597년) 때 소실 되었으나 1612년 현재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헐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 하나다.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8-11 (원평리 586-1)

남계서원 관광안내소 055-962-9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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