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면천읍성(唐津 沔川邑城) -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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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9. 23.

沔川郡趾(면천군지)

 

 

建置 沿革(건치 연혁)

 

百濟(백제) 때는 槥郡(혜군)이라 稱(칭)했다.

新羅 景德王(신라 경덕왕) 때는 槥城郡(혜성군)으로 改稱(개칭)되었다.​

高麗 顯宗王(고려 현종왕) 때 運州(운주)에 屬(속)한 후 監務(감무)를 두었다.

忠烈王(충렬왕) 16년에 縣人(현인) 卜奎(복규)가

元(원)나라 太宗(태종)의 二子(이자, 둘째 아들) 哈丹(합단)의 兵(병)을 막아

功(공)을 세워 王(왕)에게까지 알게 되어 沔州(면주)라 부르게 되었다.

(曚山城 構築, 몽산성 구축)

李朝(이조) 太宗(태종) 13년부터는 沔川郡(면천군)으로 고쳤다.

서기 1914년 郡面 廢合(군면 폐합)으로 唐津郡(당진군)에 編入(편입)되었다.

甲戌年(갑술년) 1994년 5월 竪立(수립)

 

 

 

'면천(沔川)'이란 지명은 '물이 가득 흘러서 바다로 모여 들어간다'는

시경(詩經)에 나타난 글에서 면천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면천읍성 복원정비계획 조감도

 

 

면천읍성 각자성돌(沔川邑城 刻字城石)

 

서치성(西雉城)에서 확인된 각자성돌에는 ‘己未年 沃川始面 長六十尺 四寸

(기미년 옥천시면 장육십척 사촌)’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기미년은 세종 21년(1439년)으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서 확인하는 축성 기록과 일치한다.

옥천(沃川)은 현재 충청북도 옥천으로 해당 구간부터 옥천현이 축성한 구간으로 판단할 수 있다.

 

 

 

면천읍성 각자성돌(沔川邑城 刻字城石)

 

면천읍성의 서벽에는 ‘石城終面(석성종면)’이라고 새겨진 성돌이 확인된다.

석성은 현재 충남 부여군 석성면으로 해당 군현의 축성 흔적으로 추정된다.

 

 

면천읍성의 남문, 원기루(遠寄樓)

 

 

면천 군자정(沔川 君子亭) - 당진시 향토유적

 

군자지(君子池)는 고려 공민왕 때 지군사(知郡事, 군수) 곽충룡(郭翀龍)이 읍성 객사 옆에 만든 연못이며,

군자정은 1800년대 후반에 나온 "면천읍지"에 계해년(癸亥年, 1803)에 신축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문헌의 누정시기에 보면 "군자정기"가 있는데

1803년 당시 면천군수 유한재(兪漢宰)가 피폐해진 군자지를 보수하면서 못 가운데

둥글게 섬을 만들어 그 위에 팔각의 정자를 짓고 못에 연꽃을 심어 고기를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다시 허물어져 주춧돌만 남아 있었는데 면천 복씨 종친회장 복진구가

원래의 주춧돌을 둔 채 규모를 축소하여 육모정을 지었다.

이후 그것도 퇴락하여 1994년 당시 당진군에서 육모정을 헐고 팔모정으로 다시 지었다.

 

 

 

관찰사(觀察使) 및 군수(郡守)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선정비(善政碑), 청덕비(淸德碑)

 

 

당진 면천 은행나무(唐津 沔川 銀杏나무) - 천연기념물

 

수량 : 2주

지정일 : 2016. 9. 6 천연기념물 제551호

소재지 : 충청남도 당진시 동문1길 3

소유자 : 충청남도 교육청

관리자 : 당진시청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옛 면천초등학교 부지 안에 있는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여 년 정도 된 것으로 한 그루는 나무높이가 20m, 둘레는 6.1m에 이르고,

또 한 그루는 나무높이가 19m, 둘레는 6.2m에 이른다.

고려 태조 왕건이 통일할 때 공을 세운 복지겸(卜智謙) 장군과

그의 딸 영랑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복지겸이 노후에 고향인 면천으로 돌아와 원인 모를 병을 얻어 눕게 되었고,

그의 어린 딸 영랑이 날마다 아버지의 병을 고쳐 달라고 아미산(峨眉山) 신령님께 빌었다.

그러다 이상한 힘에 끌려 잠에 취했고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은행나무 두 그루를 구해다가 뜰에 심고, 앞산으로 올라가 진달래 꽃잎을 따와서

안샘물로 술을 담가 그 술을 백일 동안 익혀서 아버지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더니 복지겸 장군의 병이 거짓말처럼 치유됐다는 설화가 있으며,

해마다 마을 주민이 은행나무에 모여 목신제(木神祭)를 올리는 등

역사적, 문화적, 민속적 가치가 있다.

 

 

 

풍악루(豐樂樓) - 면천관아(沔川官衙)의 문루

 

풍악루는 지금은 사라진 면천 관아의 문루(門樓)였던 누각으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원래는 반월루였으나 1852년 당시 면천군수(沔川郡守)였던 이관영(李觀永)이 중수한 후

'풍악루'라 이름 지어 현판을 걸었고 풍악루기를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풍악루라 한 것은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2007년 철거 전의 사진 자료를 토대로 2층 누각 형식의 팔작지붕 건물로 복원하였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당진의병 전투지(唐津義兵 戰鬪地) - 면천성(沔川城)

 

당진의병이 1906년 5월 10일 일본군 수비대 및 관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당진의병의 면천성 공격을 이끈 의병장 최구현은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 4월 당진에서 의병을 일으켜 5월 10일 면천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막혀 물러났다.

최구현은 면천성 전투 후 36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진 소난지도에 들어가

재기를 도모하다가 8월 24일 일본군에 붙잡혀 희생되었다.

당진의병이 전투를 벌인 면천성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439년에 쌓은 성으로

조선시대 읍성 축성 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여민동락(與民同樂) 도시

면천읍성(沔川邑城) -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

 

 

당진 면천읍성(唐津 沔川邑城) -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

 

이 읍성은 1439년(세종 21년) 11월 왜구(倭寇)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평지 읍성으로

조선 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고 쌓았다.

현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는 치성(雉城)과

옹성(甕城)의 길이를 합한 전체 길이는 1,564m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옹성 1개소, 문지(門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벽의 바깥면에 옥천(沃川)ㆍ진잠(鎭岑)ㆍ석성(石城) 등

충청도 관내의 군현(郡縣) 명칭이 새겨진 성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읍성을 쌓는데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성을 쌓은 규정이 가장 잘 반영된 우수한 유적으로

해안지역 읍성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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