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현

KIMGYUNGHYUN . COM

아버지 김종근 요셉 (1930.3.20 ~ 2016.11.29)

댓글 0

인생공부

2016. 12. 4.

 

아버지 김종근 요셉 (1930.3.20 ~ 2016.11.29)

 

이북의 할머니가 주신 금가락지 하나 손가락에 끼고 홀로 영화 국제시장의 바로 그 배타고 내려와 부산 국제시장에서 시계팔아 돈벌며 5년 늦은 만학도로 고등학교를 다닌 아버지. 교과서 살돈을 아끼려 새벽시간 잠대신 빌린 친구 교과서를 노트에 옮겨적으며 공부해 최고 학부에 입학한 아버지. 대학교 졸업후 약한 몸을 이유로 회사에서 퇴사 당하자 스스로 회사를 세워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린 건축사로 신문에 이름을 올린 아버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도 술 담배 안하고 여자를 멀리하며 가족과의 저녁식사 시간까지 꼭 지켰던 아버지. 해외여행은 항상 어머니를 동반하며 모든 대륙, 대부분의 나라를 보여주신 애처가 아버지. 자신이 설계한 병원에서 자신의 장례를 치른 아버지. 깔끔한 성격에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고마운 분들에게 절대로 조의금을 받지 않을것을 유언으로 남기신 아버지. 스스로 장례비용과 자신이 묻힐 묘소뿐만이 아닌 자식 손자들의 사후 누울 공원묘지까지 준비해 자식들에 선물한 자식바보 아버지. 고맙습니다. 또한 많이 죄송합니다. 어린시절부터 닮고 싶었지만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그 울타리가 너무 편하고 단단해 응석도 아닌 불효를 많이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에게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 꼭 지킬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저에게 남은 시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주님.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며 은혜를 갚으라 하셨나이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 김종근 요셉을 생각하며 기도하오니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랐던 아버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또한 저희는 아버지를 생각하여 언제나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아들 김경현 알렉시오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Oh Danny boy (Irish Traditional)
 
Oh Danny boy, the pipes, the pipes are calling
From glen to glen, and down the mountain side
The summer's gone, and all the flowers dying
'Tis you, 'tis you must go and I must bide
But come he back when summer's in the meadow
Or when the valley's hushed and white with snow
'Tis I'll be here in sunshine or in shadow
Oh Danny boy, oh Danny boy, I love you so
But when he come, and all the roses falling
And I am dead, as dead I well may be
Go out and find the place where I am lying
And kneel and say an "Ave" there for me
And I will hear, the soft you tread above me
And then my grave will warmer, sweeter be
For you shall bend and tell me that you love me
And I shall sleep in peace until you come to me
 
아, 목동아, 피리소리 들리네
골짜기로, 그리고 저 산마루를 따라 들려오네
여름은 가고, 꽃은 모두 시들어가니
그대는 떠나가야 하고 나는 머물러야 하는구나
하지만 그대, 강변 풀밭에 여름이 찾아오거나
저 골짜기가 고요히 흰 눈에 덮일 때에는 돌아와요
햇빛이 비추어도, 그림자가 드리워도 나는 여기 머물테니
아, 목동아, 아, 목동아, 내 사랑아
행여 그대 돌아올 때, 고운 꽃은 떨어저서 죽고
나 또한 죽어 땅에 묻히면
나 자는 곳을 돌아 보아 주며
무릎 꿇고 나에게 "안녕"이라 말해주어요
난 그대 나지막히 발 디디는 소릴 들을 테죠
그러면 내가 묻힌 무덤은 따뜻하고, 편안해질테니
그대가 고개 숙여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나는 그대 내 곁에 올 때까지 평화로이 쉴 거에요.
 
 

 

 
메기의 추억 (박인수)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소리 들린다
메기야 내 희미한 옛 생각 
동산수풀은 없어지고 
장미화만 피어 만발하였다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메기 내사랑하는 메기야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소리 들린다
메기야 내 희미한 옛 생각 
지금 우리는 늙어지고 
메기 머리는 백발이 다 되었네
옛날의 노래를 부르자 
메기 내사랑하는 메기야.
 
 
 
 
 
행복의 나라로 (아들 김경현 노래, 손자 김승진 기타)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 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접어드는 초저녁 누워 
공상에 들어 생각에 도취했소 
벽의 작은 창가로 흘러드는 
산뜻한 노는 아이들 소리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고개 숙인 그대여 
눈을 떠 보세 귀도 또 기울이세 
아침에 일어나면 
다신 찾을 수 없이 
밤과 낮 구별없이 
고개 들고서 오세 
손에 손을 잡고서 
청춘과 유혹의 뒷장 넘기며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르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1. 아버지 임종일 장소 : 2016.11.29.화요일 밤10시47분. 서울시 동작구 신대방동 한강성심병원.

2. 장례식 3일장 : 원래는 29일 포함 3일이지만 늦은밤 임종하셔서 11월 30일, 12월 1일, 2일을 장례식 3일장 기준일로 협의후 결정.

3. 장례식장 :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 성모병원 장례식장 6호실.

4. 입관 : 2016.12.1.목요일 오후1시

5. 발인 :  2016.12.2.금요일 오전 7시

6. 장례미사 : 2016.12.2.금요일 대림동성당 오전 8시~8시40분

7. 장지 :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 C6 지구 5열 74호

8. 묘지배치 :  6기 (좌)지인, 김경환, 부, 모, 김경현, 이미라 (우)

9. 하관 : 2016.12.2.금요일 오전 10시.

10. 삼우제 : 2016.12.4.일요일 오전 11시.

11. 49재 : 2017.1.16.월요일.

 

 

 

"노력의 결정으로 암흑의 정복에!"

 

 

 

 

 

 

 

 

 

 

 

 

 

 

 

 

 

 

 

 

 

 

 

 

 

 

 

 

 

 

 

 

 

 

 

 

 

 

 

 

 

 

 

 

 

 

 

 

 

 

 

 

 

 

 

 

 

 

 

 

 

 

 

 

 

 

 

 

 

 

 

 

 

 

 

 

 

 

 

 

 

 

 

 

 

 

 

 

 

 

 

 

 

 

 

 

 

 

 

 

 

 

 

 

 

 

 

 

 

 

 

 

 

 

 

 

 

 

 

 

 

 

 

 

 

 

 

 

 

 

 

 

 

 

 

 

 

 

 

 

 

 

 

 

 

 

 

 

 

 

 

 

 

 

 

 

 

 

 

 

 

 

 

 

 

 

 

 

 

 

 

 

 

 

 

 

 

 

 

 

 

 

 

 

 

 

 

 

 

 

 

 

 

 

 

 

 

 

 

 

 

 

 

 

 

 

 

 

 

 

 

 

 

 

 

 

 

 

 

 

 

 

 

 

 

 

 

 

 

 

 

 

 

 

 

 

 

 

 

 

 

 

 

 

 

 

 

 

 

 

 

 

 

 

 

 

 

 

 

 

 

 

 

 

 

 

 

 

 

 

 

 

 

 

 

 

 

 

 

 

 

 

 

 

 

 

 

 

 

 

 

 

 

 

 

 

 

 

 

 

 

 

 

 

 

 

 

 

 

 

 

 

 

 

 

 

 

 

 

 

 

 

 

 

 

 

 

 

 

 

 

 

 

 

 

 

 

 

 

 

 

 

 

 

 

 

 

 

 

 

 

 

 

 

 

 

 

 

 

 

 

 

 

 

 

 

 

 

 

 

 

 

 

 

 

 

 

 

 

 

 

 

 

 

 

 

 

 

 

 

 

 

 
 
 

 
 

 

 

 

 

 

 

 

 

 

 

 

 

 

 

 

 

 

 

 

 

 

 

 

 

 

 

 

 

 

 

 

 

 

 

 

 

아버지의 이북 고향집 (함경남도 리원군 안시리)

 

 

 

 

 

 

 

 

 

 

 
나의 越南記 (1950. 12. 7~1950. 12. 25)  김종근 
 
나의 越南記 
 
목차 머리말 4 12월 7일 5 12월 8일 6 12월 9일 7 12월 10일 8 12월 11일 9 12월 12일 10 12월 13일 11 12월 14일 12 12월 15일 13 12월 16일 14 12월 17일 15 12월 18일 16 12월 19일 17 12월 20일 18 12월 21일 19 12월 22일 20 12월 23일, 24일 21 12월 25일 22 12월 26일 24 同行者 名單 25 
 
머리말 自由와 生存을 위하여 情든 故鄕山川을 떠난지도 55年 긴 歲月이 흘렀다. 해를 거듭할수록 온갖 逆境을 克服하며 살아온 지난 追憶들이 走馬燈같이 스쳐가며, 首丘初心의 애달픈 心情은 날로 더해만 간다. 金剛山길이 열렸다하고, 妙香山길도 열린다하나, 나에게는 故鄕山川 가는 길이 더 절실하건만, 그 길은 아직도 굳게 닫혀만 있다. 새로 맞는 2006年은 굳게 닫힌 故鄕길이 활짝 열리는 希望의 해가 되기를 빌어본다.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靑雲의 꿈을 키우던 故鄕집을 떠나, 自由의 땅을 찾아 돌던 苦難의 旅程(1950. 12. 7일~1950. 12. 25일)을 回想하며 이 글을 적는다. 
 
2005. 12 12월 7일 날씨는 快晴하고 溫和했다. 아침에 松端驛前에 아버지 심부름을 다녀왔다. 어머니는 내가 도착하기만을 苦待하고 계셨다. 미리 마련해둔 피난 보따리를 짊어지고, 3개월 후에 다시 만날 期約을 하면서 집을 나섰다. 南大川다리 중간지점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群仙에서 出航하는 外家 姜文秀형과 동행시키려했는데, 그는 이미 출발하였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遮湖에서 떠나기로 하고 출발한 김규환(金奎煥)조카내외를 뒤따라가라고 하셨다. 南大川 南端에서 아버지와 作別하고 빠른 걸음으로 南松亭을 지나고, 문고개를 넘어 遮湖와 浦項의 갈림길에서 조카 金哲駿과 南松面유지들이 仙盆에서 出航준비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발걸음을 돌려 仙盆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몹시 虛氣지고 갈증이 심해 발걸음이 무거웠다. 수일 전에 내린 눈을 뭉쳐서 먹으며, 산을 넘어 仙盆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다. 그들에게 同行을 청하니 모두 쾌히 贊同하여 주었다. 虛氣진 배를 채우고 나니 긴장이 풀리고 피곤이 엄습하여 어느덧 깊은 잠에 빠졌다. 12월 8일 날씨가 흐려졌다. 밤에는 비바람 불다. 아침 6時 正刻에 出航豫定이라 모두 일찍 일어나 출항준비에 부산했다. 一行은 선창에 도열하여 呼名하는 順序에 따라 乘船했다. 船員 3명을 포함해서 모두 27명이다. 乘船者는 단장 염학경을 비롯하여 김철준, 강희근, 강제홍, 강승종, 강응국, 염만국, 염현필, 이계일, 이영세, 이종세, 마성남, 김종창, 김종일, 김종호, 김종휘, 김종근, 주홍규, 주철선, 조춘형 그리고, 4명 未詳등 이었다. 전송 나온 家族들과 3個月後에 다시 만나자는 期約을 하며 作別을 했다. 전송객들의 모습은 점점 멀어져 가고, 어느덧 陸地마저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우리가 탄 배는 海邊에 있던 明太잡이 漁船이라 이곳저곳에서 바닷물이 스며들어 手作業으로 퍼내야만 했다. 처음 겪는 배멀미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苦痛이었다. 먹은 음식을 다 吐하고 나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배는 東쪽을 向하여 계속 달리고 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부터 비가내리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는가 싶더니 暴風雨로 変했다. 船員들이 급히 돛을 내리는데 半쯤내려온 돛은 더 움직이지 않았고, 배는 이내 方向을 잃고 말았다. 茫茫大海에서 一葉片舟에 몸을 싣고, 生死의 갈림길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한없는 無力感에 빠졌다. 그런 무력감속에서도 밀려드는 바닷물은 死力을 다해 퍼내야만 했다. 12월 9일 구름이 걷히고 맑아졌다. 새벽 2~3時 경 되어서부터 비가 멎고 바람도 잦더니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구름사이로 별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船員들은 별자리를 찾아 航路를 陸地로 돌려 前進을 계속했다. 어느덧 구름이 다 걷히고 새벽이 밝았다.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는 일제히 歡聲을 올렸다. 선원들은 金剛山 앞바다 같다고도 하고 元山 앞바다라고도 했다. 한참 뒤에 한 선원이 西湖 앞바다라고도 했는데, 결국 우리가 도착한 곳은 洪原 마량도 앞바다였다. 그동안 육지에는 어떤 變化들이 있었을까? 조심스럽게 動情을 살펴보고 一行은 六檯 에 上陸하였다. 무거운 공포와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보니 그 氣分은 말할 수 없이 가볍기만 했다. 배를 다시 出航시킬려면 3~4日의 修理期間이 所要된다고 했다. 가지고 온 쌀이며 부식들은 海水에 젖어 먹을 수 없었다. 머물 곳을 찾던 우리一行은 主人이 어제 南으로 떠났다는 한 집에 旅裝을 풀고, 배 修理가 끝날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저녁에 國道가 지나는 영무에 가서 狀況을 살펴보니, 南으로 가는 避難行列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다가올 앞날의 일들을 걱정하며 하루를 보냈다. 12월 10일 날씨 맑음 行路가 始作부터 이렇게 꼬이고 있으니 앞날이 걱정된다. 船員들은 배 修理에 분주하다. 國道에는 오늘도 南으로 가는 피난민 行列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지루한 하루가 지나갔다. 12월 11일 날씨 맑음 갈 길은 멀고먼데 이렇게 발이 묶이고 있으니 앞날이 걱정되기만 한다. 몹시 무료한 하루가 지나다. 12월 12일 날씨 맑음 무료한 시간의 계속이다. 국도에는 오늘도 避難行列이 남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12월 13일 날씨 맑음 타고 왔던 배의 修理가 끝나 來日은 目的地인 주문진을 향하여 출발 예정이란다. 그래도 국도의 狀況을 파악하기 위하여 다녀왔다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靈武거리에는 곳곳에 ‘國軍 평양재탈환’이란 宣傳구호가 나붙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一行은 歡聲을 올렸으며 故鄕에 다시가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밤늦게까지 환담을 하다가 들뜬 마음으로 잠을 청하였다. 12월 14일 날씨 맑음 豫定한대로 目的地를 向해 出發하자는 意見과, 오늘 하루 情勢를 소상히 살펴본 다음에 行動方向을 定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를 더 머물기로 했다. 마음속으로는 故鄕에 다시 가게 되기를 希望하면서 지낸 하루였다. 12월 15일 快晴한 날씨다. 一行은 들뜬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다. 그런데, 갑자기 영무 뒷산 국도에서 기관총 사격 총성이 요란하더니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우리는 틀림없이 전투가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일행 전원은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乘船하여 南으로 前進하였다. 한참 지나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나더니 우리의 前方에 여러 개의 砲彈을 投下하고 사라졌다. 배에 太極旗를 달고 다시 前進하는데, 또 다시 나타나 砲彈을 投下하며 前進을 저지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回航하여 徒步로 南行을 시작하였다. 영무에 당도하니 국도에는 如前히 피난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듣자니, 아침에 있은 기관총 사격은 군이 후퇴하면서 고장 난 차량을 소각 처리한 것이라고 한다. 홍원읍을 지나서부터는 가던 길을 멈추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退潮에 군 통제선이 구축되어 더 이상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어느 寒村에 들러 一泊을 간청하니 快히 應하여 주었다. 12월 16일 맑은 날씨다. 退潮 통제선에 발이 묶여 수많은 피난행렬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통제선이 해제되어 피난행렬은 밀물과도 같이 빠르게 빠져 나갔다. 麻田에도 군 통제선이 구축되어 있다고 한다. 저녁 늦게 서야 麻田에 도착하니 피난행렬이 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저곳 잠잘 곳을 찾아다니다 어느 집 부엌 바닥에 볏짚을 깔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12월 17일 바람이 세차고 맑은 날씨다. 피곤에 지쳐서 깊은 잠에 빠졌는데 주위가 부산하여 눈을 떴다. 한밤중에 人民軍이 麻田 뒷산에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일행은 출발을 재촉했다. 군사통제선이 해제되고 피난행렬은 국도를 꽉 메우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앞사람의 허리띠에 끈을 걸어 손목에 감고 걷기로 했다. 麻田 고개를 넘고 興南에 가까워졌을 때, 南으로 가는 배에 피난민을 乘船시켜 준다는 所聞을 듣게 되었다. 바다의 전함에서 적진을 향하여 발사하는 포탄의 轟音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섬광은 戰場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一大壯觀이다. 이른 새벽에 內湖에 도착하여 어느 빈 집에 들어갔다. 깨끗하고 따뜻한 집이었으며 부엌에는 먹을 음식도 있고 가마솥에는 삶아 놓은 닭도 한 마리 있었다. 우리는 모여 앉아 순식간에 주린 배를 채우고 잠을 청하였다. 얼마 지나서 배를 타러 나갔던 집주인이 돌아와서 우리는 난처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흥남부두에서 乘船을 위해 東奔西走한 하루였다. 12월 18일 바날씨 맑음 흥남 부두에서 終日토록 乘船 待期했다. 바람이 몹시 찼다. 12월 19일 날씨 맑음 부두에 郡別 로 도열하여 終日 乘船 待期. 12월 20일 바람 찬 맑은 날씨다 아침 일찍부터 부두에 도열하고 있는데, 군수물자 수송 작업을 하루 하면 우선하여 乘船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獨身者로 構成된 우리는 全員 수송 작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작업현장에 도착하니 어제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미 乘船을 마치고 出發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배를 탄다는 희망 속에 탄환상자며 박격포탄 등을 LST함에 옮기는 작업을 밤늦게까지 열심히 했다. 12월 21일 맑은 날씨다 세찬 바람도 마다않고 밤을 새워 作業은 계속 되었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승선하라는 소식은 없고 작업은 계속되었다. 오늘은 LST에 휘발유 드럼을 굴려다가 옮기는 作業인데, 조금만 느리게 움직여도 뒷 조가 밀고나와 어쩔 수 없이 빨리 움직여야 하는 苦된 作業이었다. 그때 나와 짝이 되어 함께 많은 苦生을 한 故 姜應國君의 모습이 떠오른다. 앞에서도 言及하였지만 數많은 전함에서 發射하는 砲彈의 轟音과 불빛 밑에서의 夜間作業 광경은 一生을 두고 잊을 수 없다. 그런 와중에서도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피해 野積된 군수품상자 사이에서 새우잠을 자야만 했던 그날이 回想된다. 12월 22일 오늘도 맑은 날씨다. 새우잠을 자고 있는 나를 美軍兵士가 깨운다. 오늘도 作業은 계속 된다고 한다. 어제와 같이 휘발유 드럼을 굴려 LST에 옮기는 일이다. 美軍兵士들은 빨리 움직이라고 독촉이 대단하다. 기진맥진한 狀態에서의 勞動이란 괴롭기 그지없다. 苦되고 지루한 하루가 다지나 5時경에 作業을 중지하고 乘船하라는 喜消息이 들려왔다. 짐 보따리를 챙기러 원 위치에 가보니 찾을 길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빈 몸으로 乘船하였다. 배는 꽤나 큰 수송선이었다. 맨 처음에 우리가 乘船하여 선실 밑바닥에 자리 잡았다. 계속하여 밀려드는 피난민들! 어느새 선실은 滿員이 되었다. 家族을 同伴하여 乘船한 사람들이 나누어 준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나니 어느덧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12월 23일, 24일 맑은 날씨다. 잠에서 깨어나니 船室은 아수라장이다. 혼탁한 空氣속에서 어린애의 울음소리, 환자의 신음소리, 마실 물을 찾는 아우성 소리. 마치 이곳이 지옥인가 싶다. 화물선 밑바닥에 갇힌 몸이라 배는 언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천장에 뚫려 있는 화물 투입구를 통해 하늘을 보니, 아직 밤인 듯 했다. 날이 밝고 甲板위에 美軍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물을 달라는 아우성 소리에 그들은 오렌지를 던져주기도 하고 물통을 밧줄에 매달아 내려보내준다. 먼저 받으려고 몸부림치다 물은 상당량 쏟아지고 만다. 몇 차례 이러고 나니 船室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고여 앉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甲板에 通하는 은밀한 通路를 發見하여 모두 甲板에 올라 갈 수 있었다. 甲板위는 興南 부두에 못지않은 세찬 바람이 불고 있다. 맑은 空氣를 마음껏 호흡하니 살 것만 같다. 姜禧根先生의 英語會話德分에 美軍兵士에게서 물을 얻어 마셨으며 과일도 얻어 가졌다. 모포를 몸에 감고 茫茫大海를 바라보니, 다가올 앞날들에 대한 걱정과 지난날들이 교차한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선실 한 구석에서 새우잠을 청하였다. 12월 25일 따뜻하고 맑은 날씨다 25일의 아침이 밝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바람도 없고 따뜻하고 상쾌한 아침이다. 茫茫大海에서 맞는 아침 光景은 一大壯觀이다. 멀리 보이던 陸地가 차츰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마침내 푸른 綠地가 눈앞에 展開된다. 釜山 南쪽에 있는 巨濟島라 한다. 혹한에 떨며 지내던 興南 부두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놀랍기만 하다. 아침 10時경 배는 그리 크지 않은 港口의 外港에 정박하였다. 저 港口가 巨濟島 長承浦라 한다. 우리는 LST에 分乘하여 港口防波堤에 接岸上陸하였다. 아! 1950년 12월 25일, 나는 千辛萬苦 끝에 越南에 成功한 것이다. 防波堤에 上陸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걷고 있는데 신발 바닥에 구멍이 나 발가락이 땅에 닿는 것이 아닌가? 신발을 벗어보니 밑바닥 고무가 녹아서 망가져 있다. 흥남 부두에서의 휘발유 운반 작업 때문에 이렇게 된 모양이었다. 신발가게에 들러 새 신발을 골라 신고 北에서 가지고 온 100원 짜리 붉은 지폐를 주었다. 상점 주인은 못 쓰는 돈이라면서 받지 않는다. 주인은 나의 몰골을 한참 보다가 그냥 줄 터이니 신고 가라고 한다. 고맙다는 인사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존재였다. 一生을 두고 그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지정된 集合場所인 長承浦 國民學校 교정에서 오후에 간단한 歡迎行事가 있었으며 따뜻한 국물에 주먹밥 한 개씩을 주어 식사를 대신했다. 학교교사에는 어린이와 노인, 병약자들이 차지하고 젊은이들은 外宿하여야 했다. 우리 一行은 타작이 끝난 볏짚가리 속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새기로 했다. 12월 26일 맑은 날씨다. 아침 10時에 長承浦 國民學校교정에 모두는 도열하여 임지를 배정받고 各自 目的地를 向해 출발하였다. 오늘 아침에는 주민들이 가져다 준 국물에 주먹밥 한 개가 아침식사였다. 우리 一行은 높은 山 두 개를 넘어야 하는 巨濟邑 소재지에 配定되었다. 해질 무렵에 目的地인 巨濟邑에 到着했다. 우리가 묵게 될 宿所는 巨濟邑 天主敎會 앞에 位置한 기와공장의 건조장으로 쓰던 헛간이었는데, 볏짚을 깔고 가마니를 펴놓은 軍隊內務班과 같이 中間에 통로가 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獨身者 分隊라는 別稱으로 恨 많은 避難生活을 始作하였다. 同行者 名單 강희근, 강제홍, 강승종, 강응국, 김종창, 김종호, 김종근, 주홍규, 마성남 거제도(巨濟島) 피난생활 (1950. 12. 25. ~ 1951. 8. 30) 거제도(巨濟島) 피난생활 목차 피난민 수용소의 첫날밤 28 주먹밥 신세 30 마성남과의 이별 32 모포의 배포 33 쌀(안남미) 배급 34 피난지에서 맞는 新正 35 이름 모를 熱病 36 매부(朴熙淳)와의 만남 37 DDT살포 38 방위병 신체검사 (강응국, 강승종 합격) 39 노무동원 (포로수용소 정지작업) 40 염색군복, 내복, 목욕 그리고 이발 41 김종창, 종호 木浦에 가다 42 산달섬(山達島) 李柱應 집에 가다 43 釜山에서의 生活 46 김종근(金宗根) 47 피난민 수용소의 첫날밤 수많은 피난민을 싣고 흥남부두를 떠난 거대한 수송선은 12월 25일 아침 10時경 부산 남쪽의 섬 거제도(巨濟島) 장승포(長承浦) 외항에 닻을 내렸다. 장승포항의 海深이 얕아서 피난민을 LST에 坌集하여 방파제에 접안시켜 上陸시켰다. 우리 一行도 무사히 상륙하여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 1950.12.25.일 이날은 천신만고 끝에 우리 一行이 越南에 성공한 날이다. 수많은 피난민들은 지정된 집합장소인 長承浦 초등학교 교정에 도열하여 간단한 환영행사가 있었고 따뜻한 국물에 주먹밥을 배식 받아 저녁식사를 대신하였다. 다음날에 임지를 배정한다 하기에 이곳에서 一泊하여야 하는데 숙소를 얻을 수 없어 우리 一行은 野宿하여야 했다. ※ 一行名單 : 강희근, 강제홍, 강승종, 강응국, 김종창, 김종호, 김종근, 주홍규, 마성남 (9명) 다음날 아침 10시경에 장승포 초등학교 교정에 도열하여 임지를 배정받고 출발하기로 하였다. 오늘 아침에도 주민들이 만들어 가져온 국물에 주먹밥 한 개가 아침식사였다. 우리 一行은 두 개의 높은 산을 넘어야 하는 거제읍(巨濟邑) 소재지에 배정되었다. 해질 무렵에야 目的地인 거제읍에 도착했다. 우리 一行에게 지정된 宿所는 거제읍 天主敎會 옆에 位置한 기와공장의 건조장으로 쓰던 헛간이었는데 바닥에 볏짚을 깔고 가마니를 펴놓은 군대 내무반과 같이 中間에 통로가 되어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독신자분대라는 이름으로 恨 많은 피난生活을 始作하였다. 저녁에는 주먹밥 한 개와 소금이 배식되었다. 수용소에서 첫날밤을 맞아 자려고 하니 덮고 잘 것이 없어 통잠을 자야했다. 내가 집에서부터 끈질기게 어깨에 메고 다니던 모포 한 장이 있어 강희근, 김종근, 주흥규 3명이 함께 덮고 잠을 청했다. 청하는 잠은 오지 않았다. 급전직하(急轉直下)한 나의 처절한 현실과 다가올 앞날의 일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이 더해만 오고 있다. 3개월이면 故鄕에 다시 갈 것 이라고 하면서 떠나온 피난길인데 닥쳐온 현실은 너무나도 열악하고 앞날이 보이지 않으니 누워있는 나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만 흘러내리고 있다. 이것이 나만의 느끼는 슬픈 感情이 아니었나보다. 열에 누워있는 동료 一行들도 어깨를 들먹이며 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피난민 수용소의 첫날밤은 이렇게 어수선하게 맞이했다. 주먹밥 신세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 피난민 수용소 첫날밤을 보낸 우리 一行의 모습에서는 체념과 절망이 역력하였다. 아침밥은 여전히 주먹밥과 소금이 배식되었다. 흥남부두에서부터 잘 먹지 못하여 배고픔이 너무 심하여 견디기 어려웠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홍규에게 앞에 시장이 있다고 하는데 구경 가자고 하여 둘이서 막사를 나섰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우리 피난민 수용소는 볏짚으로 엮어 만든 기와공장 건조장이었으므로 모진 비바람만 막을 정도로 엉성한 상태였다. 바로 북쪽에는 천주교 성당이 있고 서쪽에는 동북쪽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의 끝자락인데 나지막한 언덕이다. 南쪽은 좁은 농경平地가 있고 초가집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고 서쪽에는 섬을 일주하는 도로가 있어 西쪽으로 가면 통영 연육교가 있다고 한다. 길가에는 상가와 초등학교, 경찰파출소 등 행정기관들이 있는 조그마한 읍 소재지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너머는 바다인데 한산섬이 그리 멀지 않다고 한다. 홍규와 나는 간선도로에 연하여 개설된 상가에 나가 구경하기로 하였다. 함경도 말씨의 아주머니가 수제비국을 팔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함경도 말씨를 쓰시는데 어데서 오셨습니까? 하였더니 함경도 이원이라 한다. 우리도 이원에서 왔는데 이원 어디입니까 다시 물었더니 청동이라고 한다. 청동에는 저의 이모가 사시는데 조보현(趙宝現)이 이모부라 하였더니 같은 趙氏집안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 아주머니에게 우리 사정을 이야기 하면서 이북에서 가지고온 돈은 있으나 이곳 현금이 없어 음식을 사먹을 수 없어 배가 너무 고픈데 그 수제비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였더니 홍규와 나에게 한 그릇씩 내어주어 허기진 상태에서 맛있게 먹었으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아침, 저녁으로 주먹밥 1개씩 배식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우리에게는 독신자분대라는 별칭이 주어졌다. 젊은 20대 우리 일행은 주먹밥 한 개씩 먹고 끼니를 때우기엔 너무나 어려워 각자가 알아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행동을 하겠다하고 강승종과 강응국, 김종창과 김종호 형제, 나와 주홍규가 짝이 되어 다니기로 하였다. 다음날 주홍규와 나는 산에 올라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나란히 앉았다. 3개월 후면 고향에 다시 갈 것이라 하고 떠나온 피난길인데 현실에 닥친 환경이 너무나도 암울하여 앞날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둘이서 나누다 갑자기 홍규가 울음을 터뜨려 울어서 한참 부둥켜안고 울고 났다. 한참 후에 우리는 득실거리는 이를 잡기로 하고 마른나무가지를 모아 불을 태워 놓고 옷을 벗어 이와 서개를 훑어 넣으니 그 터지는 소리 장관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 이 잡이를 하고 계곡에 내려가 세수하고 찬물이지만 몸을 씻고 나니 한결 가벼운 상태가 되었다. 홍규와 나는 오늘저녁엔 눈 아래에 보이는 어느 農家에 가서 저녁식사를 구걸하여 먹기로 뜻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둘이는 마른나무가지를 주서모아 한 짐 되게 묶어 놓고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農家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나기를 기다렸다. 마성남과의 이별 어느 날 아침 馬成南이 G-2 요원에 志願하였다고 하며 離別 밝힘으로 모두는 아쉬운 석별을 하였다. 獨身者分隊員은 8명으로 줄어들었다. 낮 時間에는 陽地바른 따뜻한 곳을 찾아 득실거리는 몸의 이를 잡는 것이 일과로 되었다. 모포의 배포 12월 30일로 記憶되는데 한 명당 한 장의 모포가 配付되었다. 나와 洪奎는 내가 갖고 온 모포와 새로 받은 모포를 겹쳐서 사용하니 모진 추위를 면할 수 있었다. 쌀(안남미) 배급 쌀(安南米) 배급이 되었다. 밥을 지어 먹으려니 가마솥이 없고 숟가락, 젓가락 역시 없으니 난감하기만 하다. 저녁에 강승종이 마을에 나가 어느 할머니에게서 주었다 하면서 솥 하나를 가지고와 다행스러웠다. 숟가락은 홍합껍질을 사용하기로 하고 처음 밥을 지어 먹었다, 홍합껍질로 밥을 먹으려니 입술 옆이 비어지고 하여 한동안 고생한 기억이 난다. 피난지에서 맞는 新正 1월 1일 長承浦에서의 새 아침이다. 全員을 옆에 있는 國民學校庭에 集合하자고 한다. 祝辭하는 警察署長이 曰 ‘우리 勇敢한 國軍은 南으로 南으로 後退하고 있다고 하여 長歎! 이름 모를 熱病 姜橲根 선생을 除外한 모두가 姜應國을 始作으로 이름 모를 甚한 熱病을 10餘日씩 앓고 나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교회 옆 언덕 陽地면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內服의 이와 서개를 잡는 것이 日課가 되었다. 매부(朴熙淳)와의 만남 하루는 前日과 變함없이 이와 서개를 잡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종근아! 종근아! 하는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咸興에 살던 朴熙淳 妹兄이 아닌가! 서로 만난 기쁨에 나의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妹兄은 하루라도 빨리 家族에게 가기 위하여 國民防衛兵에 志願하러 가는 길이라 하였다. 아쉬운 이별을 하면서 妹兄은 나에게 집에서 가지고온 누님의 금반지를 건네주면서 ”이것을 팔아 간식을 사먹으며 건강을 추스르라“ 고 하며 주고 갔었다. DDT살포 어느 날 收容幕舍에서 各自에게 DDT 살포가 있었다. 방위병 신체검사 (강응국, 강승종 합격) 몇 일후 우리 收容幕舍에 방망이를 든 젊은이가 세 명 나타나 젊은 靑年들은 모두 초등학교 교정에 나가 신체검사에 응하라고 한다. 병으로 皮骨이 相接한 우리 一行도 이에 應하였는데 姜應國과 姜昇鐘 두 사람은 合格되어 訓練兵으로 가고 나는 신체검사 후 판정관이 병종불합격이라 한 것을 병종합격 이라고 복창하니 이“놈아 병종불합격이다” 하여 다시 복창하였다. 이제 남은 우리의 인원은 6명이 되었다. 노무동원 (포로수용소 정지작업) 하루아침에 勞務者 모집이 있다하여 一行 6명은 派出所 옆에서 待期하고 있는 트럭을 타고 가보니 고현에 새로 造成하는 포로 收容所 텐트 가설을 위한 정지 作業이었다. 종일 작업을 하면 日當이 주어지고 귀가 시에는 군인밥통(반합)에 白米를 담아 各自에게 무상으로 주어 우리는 갑작스럽게 쌀 부자가 되었다. 염색군복, 내복, 목욕 그리고 이발 노무 작업을 끝마친 다음 우리는 모임을 가지고 비축된 쌀을 팔아서 남루한 옷과 내의를 새것으로 사입고 이발도 하고 목욕도 하고 나니 새로 태어난 듯하였다. 김종창, 종호 木浦에 가다 몇 일후 김종창, 종호 형제가 목포에 사는 삼촌 집에 찾아 떠나고 나니 우리 일행은 강재홍, 강희근, 주홍규 그리고 나 네 명이 되었다. 산달섬(山達島) 李柱應 집에 가다 어느 날 산달섬(山達島)에 사는 이주응(李柱應) 집을 찾았다. 그는 할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함께 월남하여 섬에 살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인민군이 후퇴할 때 학살당한 참변을 당한 가족이다. 그의 어머니는 나를 극진히 환대하며 저녁밥을 지어주셨는데 밥상을 마주앉고 보니 故鄕의 어머니 生角이 간절하여 한동안 숟가락을 들지 못하였다. 그날 먹은 피조개국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3月하순으로 기억되는데 홍규(洪奎)와 나는 장승포에 와있다는 철준 조카를 찾아 떠났다. 장승포에 가서 피난민 연락사무실을 찾아가 수소문하여 철준 조카를 만났다.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후 첫 만남이다. 흥국과 나의 앞날을 의논 끝에 4월1일부터 능포리에 와서 지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겠다는 고마운 말을 주었다. 4월1일 나와 홍규는 강제홍, 강희근 두분과 이별의 인사를 나누고 거제읍 피난민 수용소 막사를 나섰다. 아침에 떠난 우리는 오후에 장승포 너머에 있는 능포리에 도착하였다. 나와 홍규는 능포리 전진순(全進順) 여사 댁에 동거하게 되었다. 전진순 여사는 이원군 차호읍 전계학(全啓學)씨의 여동생으로 두 남매(농희, 칠성)를 키우고 잇는 분으로 남편과는 사별하고 오빠들 가족과 함께 피난 와서 지내는 처지였다. 두 남매와 셋이서 지내는 단칸방에 나와 홍규가 동거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우리 둘은 매일 산에 가서 땔감을 구해오고 때로는 나무뿌리를 파서 가져와 땔감을 하기도 하였다. 5월초부터는 바닷물이 따뜻해지면 이곳에서는 바닷가에 나가 해삼, 성계, 멍게, 굴 등을 채취하는데 이것을 개발이라 하였다. 홍규와 나는 이렇게 채취한 것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집에 가져오는 일을 많이 하였다. 7월 초순 어느 날 주홍규(洪奎)가 함남 신포 출신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이별을 고하고 떠나니 나도 전여사댁에서 나와야만 했다. 철준(哲駿) 조카의 주선으로 장승포항 西便 언덕 중턱에 자리 잡은 움막집에 거처를 옮기기로 하였다. 그 움집에서는 신종달(철준 조카 매부), 김철(宗郁 형 매부) 두 분이 살고 있는데 金氏 집안 사위 분들이다. 나는 이분들과 同居하면서 식사당번이 되었다. 집을 떠나 오늘까지 同苦同樂하며 함께 지내던 홍규가 제갈 길을 찾아 떠난 후 나는 짝 잃은 기러기 신세가 되고나서 한동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무척 괴로웠다. 辛宗達氏가 피난민 식량 배급 일을 보면서 쌀은 부족함이 없이 가져다주었으며 나는 시장에 가서 생선을 사다 손질하여 굽는 일과 밥 짓는 일로 消日을 하였다. 땔감 주우러 언덕위에 올라가면 여기저기에 동백꽃이 많이 피어 있는데 인기척 있어 가보면 어린 여자아이들(10세 전후)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비오는 어느 날 저녁에 朴熙淳 妹兄이 움막집에 찾아 오셨다. 거제읍 수용소 옆 언덕에서 잠시 만나보고 헤어진 후 소식을 알 수 없어 궁금히 지내던 분이 이렇게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날 내가 지은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좁은 움막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헤어져 있는 家族과 하루빨리 재회하기 위하여 국민방위군에 自進入隊하여 苦된 훈련을 받고 고생하던 중 방위군이 해산되고 귀가 조치되어 지금은 부산에 가서 여동생(朴貞順)의 집에서 起居하고 있으며 거처는 부산역전 4층 건물이라고 하였다. 근자에 국제시장에 시계 점을 개설하였는데 피난민들이 차고 온 中古時計를 구입하기 위하여 이번 거제도 各지역을 돌아보고 있는 차에 나의 거처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떠도는 나에게는 큰 의지의 언덕이요 희망이다. 妹兄을 만난 후 부터는 부산에 가서 그 곁에서 앞날을 계획하고 개척하여야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움막에서의 취사당번일은 번거롭고 짜증스럽기만 하며 뒤 산에 올라가 아름다운 東海의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섬들을 바라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청명한 날이면 日本 대마도(對馬島), 도 그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언덕에 앉아 다가올 앞날의 일들을 생각하노라면 그 해답을 찾을 길 없고 무서운 고독감에 빠져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는 일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별 화 없는 日課를 치루며 時間은 흘러만 갔다. 1951.8.30日 점심때쯤에 山達섬에서 살던 이주응(李柱應)이 나를 찾아왔다. 사연인즉 얼마 전에 산달섬에서 할아버지가 作故하시고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부산에 있는 광안리 미군부대에 노무자로 모집되어 가는 길이라 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도 함께 갈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가능할 것이라 하기에 나는 辛宗達, 김철 두 분에게 간단한 사연을 적어놓고 이주응과 동행하기로 하였다. 선창가에는 주응이 어머니와 누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柱應이 책임자에게 이야기하여 승선을 허락받고 배에 올랐다. 날씨는 청명하였다. 1950.12.25일 이곳에 到着하여 만 8개월 만에 巨濟島 피난 生活을 마치고 뭍으로 배는 떠나가고 있다. 未知의 世界를 向하여... 
 
釜山에서의 生活 광안리(부산) 미군부대 노동 부산 第一, 第四 부두노동 염주동 고개 마루에서의 빈대약 장사 대청동 골목에서의 담재장사 광복동 거리에서 라이타 장사 국제시장에서의 시계장사 H고등학교 4학년 편입, J고등학교에 위탁생으로 서울生活 서울공대 건축공학과 입학 (1954) 김종근(金宗根) 함경남도 이원 출생 1950년 12월 월남 (거제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졸업 범아건축 연구소 창설, 등록 (1966년) 한국건축대전 초대작가 주식회사 범아건축 대표이사 사장 함경남도 이원군 군민회 회장 (제 22, 23대) 서울 남서 ROTARY CLUB 회장, 자문위원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위원 (제 6, 7기) 주식회사 범아건축 회장 재단법인 함경남도 장학회 이사 함경남도 중앙도민회 고문
 
 
☞ 아버지 사후자료 : [1] [2] [3] [4] [5] [6]
 

 

아버지 성묘

 

(1) 2017,4.16. (승진과)

 

 

(2) 2017.9.30.

 

 

(3) 2017.11.27.

 

 

(4) 2018.1.1.

 

 

(5) 2018.3.20.

 

 

(6) 2018.6.10. (승진과)

 

 

(7) 2018.7.3.

 

 

(8) 2018.9.6.

 

 

(9) 2019.1.1.

 

 

(10) 2019.1.27. (승진과)

 

 

(11) 2019.3.20.

 

 

(12) 2019.5.17. (승진과)

 

 

(13) 2019.7.15. (승진과)

 

 

(14) 2019.9.12. (승진과)

 

 

(15) 2019.10.29.

 

 

(16) 2019.12.18.

 

 

(17) 2020.1.2.

 

 

(18) 2020.1.25. (승진과)

 

 

(19) 2020.3.20. (승진과)

 

 

(20) 2020.4.26. (승진과)

 

 

(21) 2020.4.29.

 

 

(22) 2020.5.8.

 

 

(23) 2020.7.16. (승진과)

 

 

(24) 2020.8.30. (승진과)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