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林湖 2013. 1. 10. 15:18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산과 달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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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백설(白雪)이 분분(紛紛)…. 종일 그림 그리다. 점화(點畵)가 성공할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

 1965년 1월 2일, 52세의 수화(樹話) 김환기는 뉴욕의 작업실에서 이렇게 적었다.

한국 모더니즘의 선구자 김환기는 만년에 낯선 땅에서 수만 개의 점으로 이뤄진 추상화 양식을 완성

한다. 이 메모는 바로 그 새로운 조형 세계로의 도달을 기록한 자신만만한 새해 인사다.

 100년 전인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이중섭·박수근만큼이나 중요한 우리

미술가다. 한국 미술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근대에서 현대로 옮겨가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일찌감치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 미술을 접했고, 최초의 근대 미술 유파인 신사실파를 결성했다.

시대를 앞선 모던 보이였지만 옛것을 좋아했고, 서양화가였지만 선비같이 살았다.

홍익대 미대 초대 학장을 지내고,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회화 부문 명예상(1963)을

수상하는 등 국내 기반이 탄탄했음에도 파리로, 뉴욕으로 떠돌았다. 11년간의 뉴욕 생활을 기록한

일기는 오로지 화폭을 세상으로, 우주로 삼아 고군분투한 노화가의 집념이 느껴져 숨가쁘다.

1970년의 새해에는 이렇게 적으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나는 술을 마셔야 천재가 된다.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江山)….”

 왼쪽의 그림 ‘산월(山月)’은 그가 1956년부터 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그린

작품이다. 푸른 밤하늘과 검은 산, 그 산을 가릴 듯 꽉 찬 달로 화면은 조촐하고 청신하다.

산 앞의 네모들은 밤새 헤맬 나그네를 위해 밝혀둔 민가의 불빛인 양 따뜻하다.

파랑은 여름의 색이지만 수화의 청회색은 어쩐지 겨울에 어울린다.

맑은 듯 가라앉은 색이 서설(瑞雪)에 달 비치는 느낌이랄까.

이 꿈꾸는 듯한 파랑은 그가 생전에 애지중지했던 달항아리와도 닮았다.

빛을 품은 듯 내뿜는 달항아리의 푸른 기운 말이다.

그림은 13일까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의 소장품 특별전 ‘한국 근대미술: 꿈과 시’

나와 있다.

눈도 달빛도 어디나 똑같이 내린다. 수화의 그림으로 연하장을 대신한다. 갈라진 마음, 분노, 상처,

박탈감을 감싸 안듯 새해 첫날 눈이 내렸다. 모쪼록 포근하고 풍요로운 2013년이었으면 한다.


중앙일보/2013.1.03



수화 樹話 김환기 金煥基

1913.2.27 - 1974.7.25

1913 - 1974

그림은 세상을 꿰뚫어 보려는 화가의 시선(視線)이다.

그 시선이 남다르게 신선하다면 성공한 예술가로 평가받고도 남는다.

바로 김환기 화백이 그런 화가 아닌가 싶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들을 흔히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민족적인 것의 내면보다는 외형에 안이하게 집착하면서

그것을 가장 민족적인 것, 나아가서는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잘못 이해하며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미 있는 민족적인 것이나 세계적인 것에 오히려 집착하지 말고

거기서 보다 더 자유롭게 떠나서 자신의 것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김환기는 그처럼 자유롭게 떠나서 새로운 도전을 해냈다는 의미에서

가장 민족적이며 가장 세계적인 두드러진 일을 한 현대의 화가였던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팝업] 총총히 박힌 별 … ‘우주’ … 김환기 작품 선호도 1위

 

전시장을 찾은 일반 관람객 1000명으로부터 314표를 얻은 김환기의 ‘우주’(1971).

[갤러리현대]

1971년 수화(樹話) 김환기(1913∼74)는

뉴욕에서 가로·세로 254㎝의 대형 정사각 캔버스에 파란 점을 찍고 또 찍었다.

점은 면포에 번지며 수묵화같은 느낌을 냈다.

점 찍히지 않은 부분은 흰색으로 남아 선을 만들었다.

점은 저 우주에 총총히 박힌 별이요,

점과 점 사이의 여백이 만든 동심원은 공전하는 행성 같았다.

관객을 무한공간으로 빨아들일 듯 압도하는 이 작품의 제목은 ‘우주05-Ⅳ-71’.

현재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여는 ‘한국미술의 거장-김환기’전에서 볼 수 있다.



 이 화랑이 전시장에 온 일반 관람객 1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대표작을 묻자 ‘우주’를 1위로 꼽았다.

‘무제12-Ⅴ-70#172’ (1970)

‘사슴’(1958)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피난열차’(1951)가 뒤를 이었다.

백자·동물이 나오는 초기작보다 말년의 대형 점화(點畵)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전문가 100인을 대상으로 한 똑같은 설문에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우주’가 1·2위로 꼽혔다.

 내년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열린 이 대규모 회고전을 하루 평균 630명이 찾고 있다.

개관 19일째인 27일까지 1만 2000여 명이 다녀갔다.

전시는 2월 26일까지. 성인 5000원. 02-2287-3500.

권근영 기자/중앙일보 2012.01.30


녹샘점

달과 배 1959

달밤의 화실 1957

무제 1960


산 1955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 1956

영원의 노래 1957


정원


피난 열차 1951

항아리와 날으는 새 1958

항아리와 매화가지



김환기

(1913~
1974)

여름방학 맞아 '김환기 그림전' 열려...

"鄕岸 鄕岸 향안 향안 향△ㅏㄴ 향안 햐ㅇ안 향안…. 그리운 향안, 부디 몸조심해요."

1964년 1월29일 화가 김환기(1913~1974)는 뉴욕 작업실에 홀로 앉아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키가 190㎝에 가까웠던 그는 155㎝인 아내 앞에서 항상 어린애가 됐다.

결혼한 지 만 20년이 되고도 색색의 볼펜으로 편지지 가득 아내의 이름을 적었다.


김환기의 50~60년대 작품과 유품을 모은

《해와 달과 별들의 얘기3―김환기 자연을 노래하다 전》이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열린다.

유화 20여점, 드로잉 80여점, 편지그림 30여점, 유품과 기록사진 등이

'둥근 달과 백자 항아리', '산과 달의 울림', '자연을 담은 글씨그림',

'밤새워 속닥속닥 편지그림' 등의 주제로 전시된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을 위해

'탁본 뜨기', '문패 만들기' 등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달콤한 애처가'의 면모가 물씬 묻어나는 편지그림이다.

그는 편지를 쓸 때 그림을 함께 그렸다.

자기 작품 중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는지 봐달라고도 했다.

"빨리 와서 그림을 봐 줘요. 내 그림에 감동이 됐다가도, 가다가는 회의가 생기고 그래요."



그는 편지에 일상의 소소한 재미와 아내에 대한 사랑을 듬뿍 담았다.

"빨리 와서 본인을 갈구어주시오"로 시작해 "밖은 꽤 추운데 방 안은 짤₂(짤짤) 끌어요"

"오늘은 하두 심₂(심심)해서 이런 것(감과 앵두) 사다 먹었지"로 이어지는 편지도 있다.

곱슬머리에 듬성듬성 수염 난 자화상을 그려 놓고

"이 수염 난 친구 누군 줄 아나? 아주 好男(호남)이시지?" 하고 장난하기도 했다.

단발머리에 안경 쓴 아내의 얼굴도 종종 그려 넣었다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1916~2004) 여사는

원래 소설가 이상(1910~1937)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소설가가 폐결핵으로 요절한 뒤 1944년에 화가와 재혼했다.

지인들은 그녀가 도도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래도 그녀는 김환기를 위해 가게 점원으로 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1974년 남편이 타계하자 사재를 털어

1992년 서울 부암동에 그를 기리는 미술관을 지었다.


김환기는 달항아리 마니아였다.

작업실 한쪽 벽을 항아리로 꽉 채웠고, 사진을 찍을 때도 항아리 곁에 앉았다.

그는 항아리를 닮은 '곡선'으로 자연을 그렸다.

서양의 붓과 물감으로 한국의 정신과 풍류를 표현했다.

그는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오는 길에,

"세계미술의 중심지는 뉴욕"이라며 뉴욕에 눌러앉아 그곳에서 타계했다.


 



달밤의 섬 1959

수화 김환기- 그림으로 시를 쓰다

2007-09-29

   


김환기 作 <새 두마리> 캔버스에 유채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화가인 이들에겐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 등 역사와 함께한 질곡의 세월을 몸소 겪으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불굴의 작가들이라는 점,

두 번째는

세 작가 모두 작품의 주된 주제가 강한 민족성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세 번째는

동시대 각자 다른 삶을 살면서도

서로 간 좋은 친구로서 우정을 잃지 않았던 사이라는 점이다.

비록 나이로 따지자면 1913년생인 김환기가 1914년생인 박수근보다 한 살 위이고

1916년생이었던 이중섭보다는 세 살이나 많아 김환기가 가장 큰 형뻘이지만

허물없는 마음으로 서로의 안위를 묻곤 할 만큼 이들에겐 거리감이 없었다.

하지만 성격은 많이 달랐다.

이중섭은 평소엔 유순하다가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불같은 성미를 지녔으며

박수근은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 깊은 사색을 엿보게 하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 중 수화 김환기는 낙천적이고 신사적인 멋쟁이 화가로 기억되곤 했다.




그와 친했던 한 화가는 김환기에 대해 얼마 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참 낙천적이었고 술을 좋아했지. 어쩌다 그림 한 점 팔리면 술상을 마련해 놓고선

나와 친구들을 불러 진중한 대화하기를 좋아했어.

피란시절 내 집 다락방과 건축가 김중업씨가 제 1호로 지은 집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모이곤 했는데 그와 우리는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껄껄거리며

밤하늘의 별을 보곤 세상사 덧없음을 논하곤 했어.

낭만적이고 멋쟁이였지만 그림에 대한 고뇌는 컸던 양반이야.”

서로 같거나 다른 세 사람.

이들이 바로 우리나라 근대화단을 이끌고 서양미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장본인들이다.

이 중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초창기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1930년대에 활동하기 시작해 50년대의 파리 체류기간이나 타계하기 전까지의 10여 년 간

뉴욕활동기간을 통해 지명도를 높인 국제적인 화가였다.

그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했으며

부단한 자기혁신을 통해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남긴 인물이다.

더불어 그는 이중섭이나 박수근과는 달리

대상을 서양의 추상적 조형언어로 해석한 신사실 계열의 작품에서부터

우리의 자연과 복잡다단한 인간사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만년의 점화(點畵)에 이르기까지 동양적 서정을 천착한 작가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한다 하더라도 내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 이기에는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력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 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파리라는 국제경기장에 나서니 우리 하늘이 역력히 보였고

우리의 노래가 강력하게 들려왔다.

우리들은 우리의 것을 들고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 것이 아닌 그것은 틀림없이 모방이 아니면 복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그의 그림은 정말 그랬다.

그의 그림 속엔 자연과 전통이 공존했으며 반문명적 회귀의 염원을 담은 그 그림들은

한국인이 꿈꾸는 이상향을 닮아 있다.

그것은 곧 아름답지 못한 현실, 암흑의 시대를 지나온 그의 예술적 대안인 셈이었다.

조각가 문신이 프랑스에서 고국 강산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그는 이국의 땅 미국에서 우리나라 산천과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그에겐 예술이 곧 자연이었으며 조국 대한민국이었다.

수화 김환기는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중섭처럼 김환기도 33년 일본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따뜻한 인정이 많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평판이 좋았다.

친우인 시인 조병화는

“따뜻함이 가득한 친구였지. 수화는 그림도 잘 줬어. 한번은 내가 애지중지하던

담배파이프를 갖고 농을 한 뒤 미안했던지 사인이 없는 그림을 주더군.

그래서 내가 사인이 없다고 하자 그는 ‘그건 사인 없어도 내 그림 맞아’라며 웃곤 했어.

호탕하고 자신감 있으며 인정이 넘치는 친구였지. 수화는 그런 사람이었어.”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1937년 귀국한 그는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에 출품하며

자신의 그림세계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내다 6.25동란을 맞아 피난길에 오른다.

전란에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천상 그림쟁이는 어쩔 수 없었나보다.

이후 그는 부산과 서울에서 홍익미술대학 교수와 학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을 지냈다.

그러다 1956년 작품세계를 좀 더 넓혀보려는 마음에 도불, 프랑스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63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다.

여름밤 소리, 김환기


1965년 제8회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초대되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1970년 『한국일보』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그 족적을 확실히 갈무리한다.

이 당시 수상작이 바로「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이다.

1970년 미국 뉴욕시절 그린 이 작품은 김환기의 점화시리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제목은 시인 김광섭의 시에서 빌려온 것으로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 그 밤하늘의 오묘한 별들을 바라보며

고향의 친구와 산천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명랑했다. 어느 경우엔 해학적이기까지 했다.

그가 1951년 민족동란 중 그린 작품「피난열차」는

작은 그림이지만 작가의 낙천성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이 작품을 보면 우울한 시대임에도 그다지 우울하지 않다.

50년대 「노점」작품에서 보여지던 둥근 과일의 형태가 고스란히 피난열차를 타고

피난 가는 사람들의 둥근 얼굴로 옮겨온 것 같은 이 작품은 현실적인 사항을 얼마만큼

의미 전환시켜 상반된 의미로서의 명랑성을 취득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바닥 만하게 뚫린 창밖을 통해 지나치는 하늘이나 풀 한 포기를 접하는

그 감탄스러움은 자유와 암흑의 시대를 우회적으로 대변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유미적(唯美的)인 아름다움은

「노란 과일이 있는 정물」과 같은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화사하고 밝으며 온화하고 따뜻한 색채 가득한 이 그림은

형태의 비대칭적 균형에서 오는 여유로운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다.

「피난열차」와 대상은 다르나 유사한 정신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1956년부터 1959까지의 3년간의 파리생활은 김환기에게 중요한 시절이다.

추상적인 화면을 이용한 전체구성이 완숙의 경지에 올라선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1958년 작품 「산」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예다.

화면자체의 공간구성이 점차적으로 전체적인 통일을 지향하면서

정신적인 심화의 단계를 준비해 가고 있다는 것이

이 당시의 특이할만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수화 김환기와 석남 이경성(우)


이후 김환기 작품의 완성형은 70년대 뉴욕시대로 이어진다.

단일 주제의 배열이나 단독적인 요소로서의 등장에서 배어나오는

서술적 서정성이 점차 사라지고

국부적인 요소가 우주적인 전체 속에 동등한 존재적인 하나의 요소로서 위치하게 되는

그의 축소와 거시적인 우주관이 동시에 드러나는

뉴욕시대의 작품세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1973년 작「10만개의 점」과 같은 작품에서

어떻게 추상화된 공간 속에서 고립된 색점과 그것을 둘러싸는 사각형의 형태라는

극히 추상적인 화면 공간의 심화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조병화는 그의 추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제던가 무심코 술집에서 ‘수화는 어째서 그리 목이 길어요?’ 했더니

‘나는 섬사람이지, 섬에서 났단 말이야.

어려서 어찌나 육지가 그리웠는지 큰 배가 부엉~하고 멀리 지나가면 미칠 것만 같았었어.

그럴 때마다 발돋움을 하고 목을 길게 뺏더니 이렇게 목이 길어졌어’하곤

술집이 떠날 것만 같이 웃어댔어.

수화는 이렇게 유머가 풍부한 큰 어린이였지.”

그러던 그는 이국땅 미국에서 1974년 뇌일혈로 영명 한다.

향년 61세,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화업은 화려하다.

실로 드물게 보는 멋쟁이이면서 고귀한 지식인,

한국을 사랑한 전통적인 민족의 혈맥을 지닌 수려한 한국인이었던 그는

생전 총 21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지며 왕성한 활동을 펼쳐

후대 큰 업적을 새겨놓았다.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은 사후 국내외에서 열린 각종 초대전 및 회고전과

1992년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개관한 ‘환기미술관’에

고스란히 남아 우리 곁에 맴돌고 있다.

글/홍경한(미술평론가)

김환기 3



10만개의 점 1973


21-III-69-#45(1969) | 127㎝ x 178cm

캔버스 뒷면 상단Ⅲ-69-#45, whanki NEWYORK

양식적인 면에서 김환기 회화세계의 커다란 전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색면 구성과 색점 구성이 모두 나타나는 화면은 낮은 채도의 청록색을 배경으로
적색과 푸른색, 녹색 등의 색띠를 이용하여 리드미컬하게 화면을 분할하고 있다.

화면은 사방에 배치된 타원형의 공간과 색점들, 화면을 대담하게 가르는 색띠,
그 위를 은은히 비추는 도식화된 달로 구성되어 있다, 리듬감 있는 색띠는
산으로 느껴지고 그 위에 두둥실 떠있는 동그라미는 달,

달 주위에 채도를 달리한 공간은 달무리로 보인다.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는 자연의 모습은

해맑은 색면과 그것을 누비는 색띠의 조화된 앙상블로 비쳐진다.

조금씩 톤을 달리한 형태의 둥근 가장자리는 화면에 깊이감을 주고 있다.

이 작품에는 자연의 깊은 정감이 그림 밑바닥에 은은히 스며들어 있다.

한쪽 면이 살짝 치솟아 있는 색띠가 산이고. 동그라미가 달이라고
굳이 인지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에서 받는 느낌은 어느 외딴 자연의 호젓함이요,
무한한 공간 속에서의 적막함이다.

그 위, 아래로 수평으로 나란히 나열된 색점들은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이다.

색유리와도 같은 원색의 투명한 발색과 중간색의 불투명한색 점은 서로 어울려

화면에 미묘한 변화를 주며 화면을 활기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환기의 전면점화 직전시기 작품으로

평소 환기가 즐겨 그리던 모든 소재가 담겨있는 보기드문 대작이다.

달과 매화와 시 1959

영원의 노래 1959

무제 1965

김환기 2

김환기의 '여인과 달과 항아리'.

무제 1971

김환기, 무제, silkscreen, 46.3x58.cm.jpg

무제, silkscreen, 46.3x58.cm



김환기, 화실, silkscreen, 45.2x63.cm.jpg

화실, silkscreen, 45.2x63.cm

김환기/ 다색

다색

달과 나무 1948

평론가 이경성· 故김환기 ‘우정과 예술 전시회’

“보고싶다, 환기야”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우정 그리움으로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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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유화‘사슴’(1958년 작·65×81㎝). 김환기는“방이 썰렁하다”며 이 그림을 이경성에게 선물로 주었다.
한국 미술평론의 대부인 석남(石南) 이경성(88)과 우리

근현대회화의 스타작가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 이들은 피란지 다방에서 문학과 미술을 얘기하고 평생 서로 그림과 글을 주고 받던 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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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米壽)를 맞은 석남이 32년 전 먼저 세상을 등진 수화를 만난다. 서울 환기미술관에서 두 사람을 엮는 전시

‘우정의 가교(架橋)’(7일~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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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여덟 병상고백“환기가 날 이 길로 이끌었지”

석남은 지금 거처하고 있는 서울 평창동 노인간호센터의 복도 한편을 화실로 만들어 놓았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과자상자 뚜껑, 반들반들한 나뭇잎 앞면 등 붓을 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 눈이 어두워 글을 쓸 수가 없으니 답답해서 그림을 그려요.” 노환 때문에 발음이 분명하진 않았다. 벽에는 그가 젊은시절 수화와 함께 찍은 흑백사진 인쇄본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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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은 도쿄 와세다대 법률과를 졸업하고 다시 문학부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해방 후 인천시립박물관장,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을 지냈다.

50년대부터 수많은 미술평론서, 작가론, 이론서를 써온 한국 근·현대 미술의 산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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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받은 편지·작품·선물‘사슴’등 공개

“피란 때 부산 금강다방에 문인들, 미술인들, 기자들이 모이곤 했어요. 어느 날 한 신문기자가

삼일절 기념 전람회 평을 누가 좀 써달라고 하니까, 수화가 나보고 쓰라 하는 거야.

그렇게 미술평론을 시작했어요. 그땐 종군화가단이란 게 있어서 일선 스케치 하고 다방에서

전시를 했는데, 수화는 남들 육군 따라다닐 때 혼자 해군 따라다녔어. 똑같은 건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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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60년대에 홍익대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으면서 더 가까워졌다.

“하루는 수화가 내 방이 심심하다며 사슴 그림 하나를 줬어요.

그런데 70년대쯤인가,

돈이 너무 궁해 할 수 없이 영국에 사는 한인 여성한테 몇 십만원에 팔았지요.

한참 뒤 그 사람이 그림 수선하러 현대화랑에 가지고 갔더니, 화랑에서 이 그림 팔라고 하더래.

누가 4억원에 산다고. 그래서 팔고는 나한테 3000만원을 가져왔어요. 고맙다고.”.

.


“먼저 간 친구 야속하지만 나도 곧 따라갈텐데 뭐”

.

그 그림이 수화가 1958년에 그린 유화 ‘사슴’이다.

현소장자가 대여해줘 이번 전시에 나온다. 또 수화의 50년대 드로잉, 뉴욕시대 점화,

석남이 수화에 대해 썼던 수많은 글, 두 사람이 찍은 사진도 같이 걸린다.

미술평론가이면서 그림도 그리는 석남의 대표작들도 있다.

사람을 글자모양으로 그린 ‘문자인(文字人)’ 시리즈 등이다.

석남은

“수화는 50년대 파리에 머물 때에도 마음은 한국에 있어서 산, 달, 구름, 항아리를 그렸다.

그런데 70년대에 뉴욕에 정착해서는 현대문명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마천루를 점과 선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에야 뉴욕에 있는 수화 무덤에 가봤지. 참 수화다운 무덤이었어.

비석 하나, 나무 두 그루 말고는 석물 하나 없고,

무덤 동쪽에서 하늘과 땅이 입맞추고 있었어.

수화다운 시원한 맛이 있는 무덤이었어.

머잖아 나도 수화 옆으로 갈거라 생각하니 수화가 더 보고 싶네.”

글=아규현기자 kyuh@chosun.com
사진=김보배 인턴기자 광운대 미디어영상학과
조선일보/입력 : 2006.04.03

(주 : 석남 石南 이경성 李慶成 1919년 인천출생)

매화와 항아리

항아리



봄의 소리











 

자화상(1957) | 수화 김환기

[그림:자화상_1957.jpg]
종이에 연필 : 아트서울



자화상(연도미상) | 수화 김환기

[그림:자화상.jpg]
출처미상

:

운월(1963) | 수화 김환기

[그림:운월_1963.jpg]
출처미상


오영수 소설집 - 머루(1954) | 수화 김환기

[그림:오영수소설집_머루_1954.jpg]
: 아트서울


소(1981) | 수화 김환기

[그림:소_1981.jpg]
종이에 수묵담채 : 조선일보 싸이버갤러리


그림이 많이 안보여서 많이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