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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스 2009. 5. 4. 13:57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나는가? /   글쓴이: 유해룡 교수(장신대, 실천신학, 영성신학 전공)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이 그 분을 향해서 나아갈 때 그것이 바로 영성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사건이 먼저인가? 혹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먼저인가?라는 논란은 이론적인 차원에서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이론적인 차원에서라면 양쪽 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영성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면 그것은 동시적인 사건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을 수 없다. 우리가 그 분 앞에 먼저 나아가지 않을 때 그 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 아무 의미도 주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께 먼저 나아가야 한다. 예레미야 33:3절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쪽도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할지라도 그 분이 먼저 그 곳에서 기다림이 없었다고 한다면 우리의 나아감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다림이 우리의 나아감 보다 먼저이다. 요한 복음 6:44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계 3:20절에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만남의 사건은 무엇이 먼저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동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영성적인 경험에서 말하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상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의 장소가 있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하나님이 기다리는 곳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나아갈 곳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 영성사에서 이 만남의 장소를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크게 세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중세 영성가의 대표자로 알려진 성 프란시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그 만남의 장소를 무엇보다 자연에 두기를 좋아했다. 두 번째로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이나 루터는 그 만남의 장소를 성서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번째로 종교개혁 당시의 또 다른 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 장소를 어두운 밤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이 세가지 유형에 대해서 잠간 생각해 보자.

 


성 프란시스는 자연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물론 자연 그 자체를 사랑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있었다. 우정과 사랑에 찬 자연의 관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프란시스에게 자연은 자신의 형제요, 자매요, 친구였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자연의 만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있다면, 자연 안에서 역시 형상이라까지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흔적 혹은 그 발자취를 느낄 수는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태양의 노래"를 통하여 자연 사랑의 마음을 하나님 찬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가장 고귀하고 전능하시며 선하신 하나님.

모든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축복이

지극히 높으신 오직 당신 한 분께만 합당하나이다!

또한 어떤 인간도 당신을 논할 가치가 없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 특히 태양형제를 인하여!

그를 통하여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하루의 빛을 주셨으니

그는 커다란 광채와 더불어 눈부시도록 빛나고 아름답도다!

오 가장 높으신 주님, 그는 곧 당신의 상징이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달과 별 자매들을 인하여!

당신께서 지으신 그들은 하늘에서 밝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바람 형제를 인하여!

또한 대기와 구름과 모든 날씨를 인하여!

이들에 의하여 당신께서는 피조물들에게 음식물을 주시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물 자매를 인하여!

그녀는 매우 유용하고 겸손하며, 사랑스럽고 정숙하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불 형제를 인하여!

그를 통하여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빛과 열을 주시나니

그는 매우 아름답고 명랑하며, 힘이 세고 강하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우리의 어머니인 대지를 인하여!

그는 우리를 지배하고 유지해 주며

아름다운 꽃과 잎과 열매를 맺나이다.

 


........................................................

 


나의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과 축복을 돌릴지어다.

또한 거룩한 순종과 겸손으로 그를 섬길지어다!

 


이 태양의 노래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성 프란시스와 그의 제자들은 자연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갔다. 즉 겸손과 사랑과 정의와 정숙과 기쁨과 순종과 찬양을 배웠다. 프란시스는 끊임없이 가난을 강조했다. 자기 자신은 가난 양(Lady Poverty)과 결혼했다고 선언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이들에게도 철저히 가난을 강조했다. 그것은 감상적인 고행주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비울 때만이 자연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부유를 맛볼 수 있으며, 부유하신 그 분과의 풍성한 만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가난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지극했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은 곧 풍요였다. 그렇게 프란시스가 자연에서 경험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각성된 심령의 노래가 곧 "평화의 노래"로 나타난다. 그 자신이 지은 것은 아니지만 성 프란시스의 정화된 심령을 대변하는 노래이다.

 


주여,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여, 위로를 구하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을 구하기 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잊음으로써 찾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써 영생으로 부활하리니.

 


이 아름다운 노래를 통해서 성 프란시스의 내면의 영성이 자연으로 인해서 얼마나 풍성해지고, 또 그 안에서 얼마나 풍요로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와를 맛보았는가를 체험케 해준다.

 


이제 두 번째로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를 생각해 보자. 특히 존 칼빈의 경우에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는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만남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 장소이므로 그 곳이 하나님의 속성과 그 엄위하심과 지혜를 알 수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인간들은 그 자연 속에서 스며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을 느끼고 보기 보다는 오히려 그 자연 자체를 하나의 신으로 왜곡시키는 어리석음과 무지함이 있다고 했다. 그는 철학자 중에서 종교성이 가장 풍요로운 플라톤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그는 만물을 하나님과 혼돈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헬라의 시인 버질의 시를 인용하면서 자연을 보는 인간의 눈이 얼마나 부패하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빨아들인다.

그것은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어날 때

실낱 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

또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 많은 하늘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

 


이 시의 어리석음은 여기에 있다. 우주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와 그 능력에 대해서 초월적인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땅한 경건을 범신론적인 속성으로 바꾸어 마치 인간도 그 한 부분인양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자연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보는 것에 대해서 인색해 할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존 칼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인간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다. 어느정도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 체험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 칼빈의 물음이다. 물론 칼빈에게 있어서 그 대답은 절대 불가한 얘기이다. 성서는 이미 자연 속에서 보여줄 수 있는 그 하나님의 자취를 오해없이 계시하고 있으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확실한 지식을 계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성서만이 하나님과 조우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소이다.

 


세번째로 십자가 성요한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어둔 밤이라고 한다. 성 요한에게 있어서 영성생활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또한 사랑의 사귐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속삭임은 "고요한 밤, 새벽이 떠오르는 때, 소리 없는 음악, 우렁찬 적막"에서 이루어진다. 소리없는 침묵과 적막으로 우리 자신이 인도되어질 때 비로소 진리의 빛, 사랑의 불꽃과 부딪히게 된다. 밤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감각이 잠든 상태를 의미한다. 감각은 언제나 하나님을 제한된 세계속에서 상상하게 하고, 그 불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지라도 감각의 세계에서 구성된 하나님의 이미지란 그 분 자신에게 이르기에는 너무나 큰 간격이 있다. 인간의 감각적인 세계로 그려보고 이해해 보는 하나님이 아무리 최상의 것일지라도 하나님 그 자신과 비교할 때 유사성보다는 비유사성이 더 많다. 모든 피조된 존재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그 존재에 비할 때 無(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 사랑의 사귐에 이르려면 감각의 세계는 닫혀져야 한다. 이것이 어두운 밤이다. 즉 감각이 닫혀진 영혼의 세계이다. 이 어두움의 세계를 성 요한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모르는 것에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가지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가지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

온전하신 그 분을 얻으려 할 때에

아무 것도 얻을 맘이 없어야 하니

모든 것의 무엇을 가지려 하면

주님 안의 네 보배를 지니지 못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각각 다른 세 장소를 서로 상충된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강조점이 다르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코 어느 한 부분을 무시하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세 다른 길을 보면서 보다 조화로운 영성생활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하나님은 온 세계에 충만하게 임하여 계신다. 동방교회에서는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에너지가 충만해 있다고 한다. 그 에너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한 경험이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칼빈의 주장대로 성경이 바로 그러한 눈을 가지도록 인도하고 있고, 성경으로 말미암아 정화된 영혼을 소유하게 된 이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장 풍요로운 장소임에 틀림없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그 정화된 영혼의 과정과 상태를 어두운 밤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감각을 정화할 때 감각의 밤을 맞게되고, 영혼의 기능으로 믿고 있었던 기억, 이해, 의지등이 정화되어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과정 속에서 역시 영혼의 밤을 맞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과 영혼이 성경으로 말미암아 정화되어 있다면 자연은 우리의 영성을 개발시켜 주는 가장 훌륭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