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미술

억스 2012. 1. 9. 11:06

▲ Spiritoso 08 순수한 초록, oil on canvas, 116.5x132cm, 2011     © 아트데일리

국내외에서 야외 공공미술 작품으로 화제를 모은 중견작가 김정향씨가 3년만에 국내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9월20일부터 10월30일까지 서울 한남동 갤러리 비케이에서 개최하는 ‘스피리토소(spiritoso)’전이다.

작가는 대학 졸업 후 뉴욕으로 건너가 30여 년간 뉴욕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점과 선 그리고 원으로 그린 자연의 기운차고 활발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의 작품은 기하학적 형상과 우연적인 효과의 반복을 통한 자연색의 표현이 추상적인 형태로 어우러진다. 무수한 색점들이 중첩되고 반복되며 불꽃놀이와 같은 형상을 이미지화하여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경이로운 자연을 연출해 낸다.

작가는 최근 국내에서 대규모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의 프로젝트는 경남 사천 LIG연수원 진입터널에 설치된 길이 47m 대형 모자이크 작품과, 그 입구에는 독일에서 특수유리에 그림을 그려 구운 뒤 발광다이오드(LED) 판 조명을 장착해 설치되어 있다.
 
또 LIG 부산사옥에는 부산바다를 형상화한 높이 7m 너비 9m의 타일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뉴욕 브루클린의 크레센트 역에도 작가의 화제작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윈드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이 작품은 뉴욕지하철본부 공모를 거쳐 지난 2006년 2월 설치되었다.
(문의 02-790-7079)
/아트데일리
 

▲ Stirring 살랑거림, oil on canvas, 152x213cm, 2011     © 아트데일리


<평론>
살아있는 자연과 신비한 숲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피직스와 나투라로 구분했다. 인간의 오감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감각세계를 피직스라 했고, 그 감각세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을 나투라라 했다. 동양의 전통적인 어법을 따르자면 각각 음과 양의 구분에 해당하겠다. 여기서 감각세계 곧 양의 원인에 해당하는 음 자체는 형태도 색채도 소리도 없지만, 양은 음이 감각의 표층 위로 밀어 올려준 운동성의 계기와 작용으로 인해 비로소 형태도 색채도 소리도 덧입을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양은 음이 없이 있을 수가 없고, 음 역시 양이 아니고서는 표상되지 못한다. 각각 표층과 이면으로 나타난 자연의 레이어라고나 할까. 그 표층은 얼핏 그 형태나 의미가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의 운동성의 계기에 의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다.

결국 자연을 형상화하는 일이란 표층을 통해서 이면을 암시하는 일이며, 감각을 매개로 감각 저편의 어떤 세계(원형적 세계 혹은 세계의 원형?)를 상기시키는 일이며,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사실(사실은 그렇게 보일 뿐인)을 통해서 변화하는 사태를 떠올려주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듯 이면을 암시하고 감각 저편을 상기시키고 변화를 떠올려주는 것은 지극히 섬세한 감각에나 겨우 붙잡힐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이면, 더욱이 그 감각적 층위와 긴밀하게 직조돼 있어서 사실은 구분할 수조차 없는 자연의 이면이란 무엇이며, 또한 그 이면은 어떻게 감각의 옷을 덧입고 표상될 수가 있는가(여하한 경우에도 감각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표상될 수가 없을 것이므로). 흔히 알려진 바로는 기와 에너지, 생명과 호흡(아니마), 운동성의 계기와 관계 개념 정도가 자연의 이면을 읽게 해주는 코드 개념에 해당하며, 결국 이를 캐치하기 위해선 단순한 재현의 수준을 넘어서는 감지와 감득(몸으로 읽는)의 차원이 요청된다.
▲ An Azure 푸른 남빛, oil on canvas, 152x213cm, 2010-2011     © 아트데일리

그리고 이면이란 말은 저장고(현상학적으론 말들이, 의식이, 개념이 소급되는 지향호에 해당할 것)를 상기시킨다. 말들의 저장고, 의식의 저장고, 감각의 저장고, 침묵의 저장고다. 미처 의식화되지 못한 선의식이, 어떤 결정적인 의미로 세팅되거나 고정되지 못한 어눌한 말들의 질료들이, 결정적인 의미로는 붙잡을 수 없는 침묵이, 독백이, 말들의 씨앗이 웅성거리면서 고여 있는 어떤 가능성의 세계(가능태)다. 미처 실현된 적이 없는 가능성의 세계인만큼 현실과는 다른 종류의 비전을 열어 보이는 세계며, 무한히 다른 의미들을 불러들여 기왕의 의미(선입견과 편견으로 굳어진 의미)를 수리하고 교체하고 부풀리고 변태시키는 세계다. 그래서 자연을 어떤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의미로 세팅하고 고정하려는 기획을 무위로 되돌려버리는, 그럼으로써 자연이 아닌(혹은 자연 이전의) 자연 자체에 직면하도록 유도하고 견인하는 잠재적인 세계다.

작가 김정향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시적 공간을 형성하고 싶다고 했다. 바로 이 시적공간이 이처럼 다름 아닌 감각세계 이면에 놓인 원형적 세계며 가능성의 세계며 잠재적인 세계일 것이다. 자연이 비결정적인 형태로 재배치되고 재배열되는, 그리고 그 때마다 다른 종류의 감동으로 와 닿고 다른 종류의 의미를 뜻하는, 그래서 그 다른 종류의 감동과 의미들이 인과도 없고 우열도 없이 자유자재로 혼성되는, 그리고 그렇게 혼성되는 것으로부터 재차 다른 종류의 감동과 의미를 호출하고 파생시키는 우연적이고 필연적이고 유기적인 과정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공간이며 세계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세계를 지극히 쳐다보고 있으면 세계 자체가 열린다고 했다(하이데거에게 존재자와 존재 혹은 존재 자체가 다르듯 세계와 세계 자체도 다르다. 그리고 이 구분은 어느 정도 피직스와 나투라, 자연과 자연성 혹은 자연의 원형의 구분에도 적용된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오염된 의미의 휘장을 찢고 불현듯 출현하는 세계, 결정적인 의미를 수리하기 위해서 출몰한 세계, 일회적으로나 찰나적으로만 자기의 비전을 내보이다가 이내 사라지고 마는 덧없는 세계, 그렇게 순간적인 비전으로만 잠시 감각에 자기를 내어주는 세계다. 아마도 작가가 열어 보이고 싶은 시적공간이란 바로 이 공간이며 세계며 비전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 시적공간이며 세계며 비전을 어떻게 열어 보이는가. 그 단초를 <Abacada> 시리즈에서 확인해볼 수가 있다. 여타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 일련의 그림들은 작가의 다른 그림들이 그곳으로부터 생성되고 파생되고 변주되는 일종의 인큐베이터며 진원지 역할을 한다. 그 요소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 비정형의 얼룩이다.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얼룩은 그 자체로 우연성의 계기를 포용하며,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는다.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벽에 난 얼룩에서 자연풍경을, 세계를, 우주를 보는 것을 넘어 심지어는 성당의 종소리와 같은 청각기호마저 떠올렸듯이 얼룩은 특유의 비결정성과 비정형성으로 인해 모든 결정적이고 정형적인 것들을 암시하고 상기시키고 떠올려준다.

작가의 경우에는 일부 기하학적인 형태로 변태된 경우를 비롯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자연 모티브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혹은 그 모티브를 낳은 원동력이며 생기에 해당한다. 얼룩을 세계가 유래한 카오스의 원형적 이미지로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겠다. 이처럼 다양한 성분과 질감의 얼룩들이 뒷받침됨으로 인해 작가의 그림은 자연의 레이어며 중층화된 결들이 감지되고, 그 결들로 인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 같고, 그러면서도 그림에 등장하는 이질적인 요소와 층위들이 하나의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망으로 직조되는 것 같고, 이 모든 계기들이 어우러져 특유의 생기(활성?)를 띄는 것 같다.

그리고 목탄이 뭉개지면서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질감과 수묵의 번짐 효과와 같은, 비정형의 얼룩이 불러일으키는 비결정적인 어떤 감흥(시적 감흥?)을 붙잡으려는 형식실험의 일면이 엿보인다. 그 일면은 일종의 모자이크 회화로 부를 만한,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착안한 그림에서 또 다른 형식을 얻는다. 흡사 전통적인 오방색에 바탕을 둔 조각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의 이 그림들 위에 작가는 여러 정형 비정형의 자연 모티브들을 심어 놓았다. 이를테면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 같은, 잔잔한 수면에 떠 있는 개구리 알집 같은, 그리고 파동을 그리는 동심원이나 중첩된 원 형상으로 나타난 빛 무리 같은. 이 일련의 비결정적이고 암시적인 모티브들이 다른 그림들에서 또 다른 형태와 질감을, 중첩된 색감과 유기적인 드로잉을 덧입고 상대적으로 더 분방한 형식의 자연 모티브들을 파생시키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자연의 본성을 얼룩(자연의 원형적 이미지)으로 보고, 무엇보다도 색감(푸른 남빛, 순수한 초록)으로 파악한다. 바람도 색깔을 덧입고(연두색 바람), 이슬조차 그 표면에 색채를 반사한다(자줏빛 방울). 밤에 대기는 투명한 깊이 속에 존재를 감싸고(9월의 밤), 숲은 살랑거리고 반짝이며 향기를 발하고(향기로운 숲), 석양은 춤을 춘다(춤추는 석양).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자연의 속살이 열리는 것인데, 그 열림은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자연에 자기를 이입시키고 동화시켜 마침내 그 경계가 허물어진 차원이 열린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그 경우 그대로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개념이 수행되고 실현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물질 곧 자연의 질료를 매개로 작가의 상상력이 자연 속에 이입되고 동화되고 스며들고 합체된 것이다. 이렇게 모네는 빛과 수면과 바람과 공기와 사사로운 감정과 생체리듬이 수련과 어우러져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파악할 수가 있었고, 그 유기적인 덩어리며 전체를 볼 수가 있었다.

모네는 수련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작가 역시 개개의 자연 모티브를 그린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자연 모티브들이 그 경계를 허물고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는 관계를 그린 것이며, 자연의 일부로 흡수된 작가의 분신(상상력)을 그린 것이다. 그럴 때에야 살랑거리는 숲도 춤추는 석양도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숲은, 특히 이처럼 살아있는 숲은 신비의 온상이며 자궁이다. 살아있는 숲이 신비한 것은 여전히 인간의 인식과 개념으로 호명된 적도 호명될 수도 없는 처녀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처녀지에서 신성한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서(신비여행-새벽), 만월의 정기를 온몸으로 호흡하기 위해서(신비여행-만월) 여행을 떠난다. 숲을 그린다는 것, 특히 살아있는 숲을 그린다는 것은 이처럼 신비체험(여행)으로 볼 만한 무엇이 있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spiritoso>라고 부른다. 영적이고 정신적이라는 의미며, 활기 곧 살아있는 기운이라는 뜻이다. 자연의 본성으로서의 기와 에너지, 활기와 활력을 의미하는 이 말은 정물 곧 죽은 자연과는 비교되는 말이다. 그런 만큼 자연에 대한 감각적 닮은꼴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비결정적이고 비정형적인 자연의 활기를, 그 항상적으로 변화하는 운동성을 대상화한 것이다. 그림이 어느 정도 추상화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구상과 추상의 사이, 감각적 자연과 원형적 자연과의 사이를 매개시켜주는 어떤 지점이며 활성을 그린 그림으로 볼 수 있겠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그리고 덩달아 자연이 주는 신비와 숭고의 감정도 상실했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렇듯 상실된 자연을 되돌려주고, 신비와 숭고의 감정을 회복시켜주는 계기로 볼 수가 있겠다.
/글 고충환(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