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심리/철학

억스 2021. 9. 7. 10:48

[출처] https://blog.naver.com/nickykim156423/222452719748

 

니체가 열광한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가 말하는 “행복”이란?

진정한 행복은 돈과 권력에 있지 않고, 인간 내면의 진정한 자아를 회복할 때 이루어진다. 스스로를 자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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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은 돈과 권력에 있지 않고,

인간 내면의 진정한 자아를 회복할 때 이루어진다.

스스로를 자유로운 행위자로 여기는 우리의 일상

감각이 대부분 잘못된 사실에 기초한 망상이며,

내면적 성찰을 통해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우리는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를 아무런 짓이나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하는 자유로운 방탕한 행위자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이해와 통찰을 제공해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바로 볼 수 있게 함으로써,

허황되고 전도된 의식 세계로부터 해방되게 한다.

- 스피노자(1632~1677, 네덜란드) 행복론 中。


167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판 데르 스픽”이라는 한남성이 자신의 집에 하숙했던 친구의 책상을 조심스레 포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방금 전 그는 시신도 없는 텅 빈 관으로 친구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친구의 시신은 교회에

안치되어 있던 중 도난당했는데, “신을 모독한 불경스러운 자”라는 꼬리표가 시신 역시 편치 못하게 한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몇 주 전, 포장재에는 어떤 것도 적지 말고

세관에 내용물을 신고하지도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자신이 죽으면 책상을 암스테르담의 한 출판사에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조심성 많은 친구의 도움 덕에 책상은 무사히 출판사에 도착했고, 얼마 후 <에티카>라는 한 권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은 곧 금서로 지정돼 압수되었습니다. 비록 익명으로 출간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글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바로 “베네딕투스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1677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허름한 하숙방에서 끝났습니다.

“압도적인 지성”이란 말은 스피노자와 같은 인물을 두고서나 쓸 수 있습니다. 인류는 운 좋게도 그처럼 빛나는

지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사상은 물론

시신마저도 능욕 받았으나, 그의 철학은 진리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우리 모두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추구하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 것일까요?

실제로 행복을 원하면서도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고통과 불행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있어 왔으며 인간을 불행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여러가지 차원의 노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와 불교 사상은 자유와 행복, 해탈이라는 구원의 측면에서 볼 때, 유사한 구조 속에서 논의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붓다는 동일한 문제의식으로부터 그들의 사유가 출발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구원”입니다.

스피노자는 일상적인 가치와 삶에 대한 불만족을 일찍이 간파하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길을 찾아 철학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부, 명예, 쾌락을 최고의 선이라고 평가하곤 하지만, 쾌락 다음에는 깊은 슬픔이 따르고 명예와

부의 추구는 우리의 정신을 혼란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언제 부를 잃을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명 예를 얻기 위해 대중의 비위에 맞추려고 애쓰지만

대중은 쉽사리 마음을 바꿉니다.

이것은 참된 선도, 최고의 선도 아닌데 우리는 부와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온 힘을 쏟으며 살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와 붓다, 양자에 있어 철학은 단순히 지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활동이 아니라 삶을 위한 활동입니다.

이들의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자유의 윤리학이요, 불교 철학은 본질적으로 해탈론인데

그들이 볼 때 인간은 쾌락과 부, 명예 같은 것에 매달려

잘못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생로병사에 얽매여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유를 획득하고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은 괴로움이라고 스피노자와 불교는 말합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절망과 좌절, 고통과 불행 속에서 신음하며 끝없는 마음의 동요를 겪고 저급한 행복에 취해 살아가고 있으며, 불교철학에서는 인간이 처한 실상은 길 잃은 나그네가 넓은 광야를 헤매는 모습으로 종종 비유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존과 삶 자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실제로 고(苦)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나 나쁜 것,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이지, 선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마음의 병과 불행은 우리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생긴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애써 자유와 행복을 욕망하거나 추구하지 않고, 어떤 대상에 대해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야말로 아무 관심도 없고 영향도 받지 않는다 면, 그것들은 우리를 구속하지도 불행으로 이끌지도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울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하려는 욕망이 전혀 없다면 속박의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고 어떤 것에 대해 관심도 없고 사랑하는 마음도 전혀 없다면, 그것으로 인해 괴롭거나 기쁠 일도

전혀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행복 혹은 불행은 오직 우리들이 애착을

갖는 대상에만 의거합니다.

스피노자는 고통과 슬픔, 부자유와 불행에 빠져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을 “예속상태”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 존재는 자유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속상태의 삶을 살아갑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예속은 “정서(affectus)”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서는 인간이 외부 사물과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신체의 변용에 따른 관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데 외부 환경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극을 받을 때 산출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식의 자극에 의해 자신의 활동 능력은 증대되거나 감소되는 결과가 발생하고 이에 대응하여 다양한 정서가 따라 나옵니다.

대다수의 인간은 인생과 사물의 진상을 잘 모르고 무명 속에 빠져 살아 가기 때문에 “집착, 자기의 선호, 편견, 이기심, 혼동”에 의해 지배됩니다.

그리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고, 안정되지 않은 것을 안정된 것이라 말하며,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마치 죽음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와 같이 무지하고 어리석기에 욕망과 탐욕을 추구하며 갈애의 지배로부터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고 끊임없는

고통을 겪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일종의 충만감을

느끼는 반면 나를 무시하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려는 사람을 만났을 때 위축됩니다.

스피노자는 전자처럼 충만한 느낌이 가득찰때 우리가

기쁨의 상태에 있고, 후자처럼 위축된 느낌이 들 때,

슬픔의 상태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타인과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와의 만남을 지속하려고 할 것인데, 이는 그와 만났을 때

발생하는 기쁨과 유쾌함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기쁨의 만남이 아닌 슬픔의 만남을 영위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타인과의 관계, 그로부터 발생하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합니다.

또, 삶의 현장에서 기쁨과 유쾌함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되는데,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역설했던 <기쁨의 윤리학> 입니다.

우리를 육체적, 정서적으로 뒤흔드는 진정한 마주침이 발생하면, 두 가지 감정이 발생하는데, 하나는 기쁨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의 감정입니다.

마주침과 두 가지 감정에 대한 논의가 어렵지 않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난해하다고 고개를 흔드는 스피노자의 사유를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마주침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을 토대로 흥미진진한 윤리학을 피력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나는 아래에서 기쁨을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정으로 이해하지만,

슬픔은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정으로 이해한다.

더 나아가서 나는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감정을 쾌감이나 유쾌함이라고 하지만,

슬픔의 감정은 고통이나 우울함이라고 한다.

- 에티카(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정신이 큰 변화를 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타자와 마주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이 더 완전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덜 완전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기쁨의 감정이 삶에서 쾌감과 유쾌함으로 드러난다면, 슬픔의 감정은 고통이나 우울함으로 드러난다고 덧붙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구름이 걷히는 것

같은 경쾌함을 느끼고,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이 한 줌도 안 되게 쪼그라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를 통해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생각하려고 하고, 그럴 때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행복에 젖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에게 슬픔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그 사람을 자신의 곁에서 사라지게 하는 상황을 생각하게 되는지를 이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기쁨의 만남이 아닌

슬픔의 만남을 영위하고 있다는 데 있는 것 아닐까요?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공적 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은 우울하고 슬픈 감정 상태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족을 위해서 그들은

그런 우울한 상태를 불가피하게 감내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 상황을 보았다면 스피노자는 어떤 느낌이

들까요, 아마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쁨과 행복을 추구해야 할 인간이 이런 자명한 본능과는 대립되는 슬픔과 불행을 선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가족이나 연애와 같은 사적인 관계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나마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마저도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과연

기쁨과 행복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더 큰 완전성, 기쁨, 그리고 쾌활함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업무가 끝난 뒤 오락거리를 찾아서 밤거리를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우리에게 오락산업은 인간의 슬픔과 불행에 붙여지는 일회용 반창고였던 셈입니다.

술집에서, 카페에서, 영화관에서, 음악회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슬픔과 우울함으로 만들어진 종기를 핥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은 제대로 된 처방전일까요?

인스턴트로 제공된 기쁨, 값싸게 구입한 쾌활이 과연

우리 삶에 진정한 행복을 부여할 리 만무합니다.

그렇다면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삶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현장에서 기쁨과 유쾌함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해선 안 될 것입니다.

분명 잃어버린 행복과 기쁨을 되찾는 것은 손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초인적 노력이 수반돼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는 “기쁨의 윤리학”을 피력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스피노자는 “철학자들의 철학자”라고 불립니다.

현대에 와서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서양철학자들이

스피노자를 칭송하는데 주저함이 없음을 알게 되는데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는 진정한 스타입니다.

 

"모든 철학자에겐 두 명의 철학자가 있다.

자기 자신과 스피노자다."

- 앙리 베르그송

 

스피노자는 고독과 신비, 지조의 철학자입니다.

철학자들은 확고불변한 진리를 찾기 위해, 무지와 의혹에 대항해 도끼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지만, 스피노자는 그런 식으로 쟁취하는 진리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권총으로 간단히 도그마를 처치한 후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는 열등감 제조기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지만, 비단 스피노자 뿐만이 아니라 철학자로 역사에 기록된 이들은 하나같이 천재 중의 천재인데도 이런 면이 있습니다.

 

“너 자신과 너의 삶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비난과 저주를 받은 사람은 없었으며,

그토록 초연했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제왕이자 철학의 지존이며, 굴복을모르는 정신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단언컨대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주의자입니다.

스피노자는 1632년 11월 24일,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출간되기 5년 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친할머니는 마녀재판을 받아

화형당했는데, 그의 인생을 알려면 먼저 스피노자 가문의 이력부터 살펴야 합니다.

스피노자 가문의 고향은 스페인입니다.

영어로는 “sephardic jew”라고 하는 스페인계 유대인 집안으로, 당연히 스페인의 유대교 커뮤니티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대가 시작되자 보수적인 스페인은 마녀사냥

으로 유명해졌고, 이로인해 스피노자 집안은 1492년에 추방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베리에 반도에서 딱히 피신할 곳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나마 문화와 언어가 비슷한 포르투갈에

갔습니다. 이 때가 스피노자가 태어나기 140년 전이었습니다.

 

스피노자 가문은 한동안 포르투갈에서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종교혁명이 일어나고 유럽이 종교전쟁에 휩싸이면서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신교(개신교)와 구교(카톨릭)는 서로를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믿었고, 관대함과 포용은 점점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갔습니다.

카톨릭을 사수한 이베리아반도는 요즘 식으로는 “극우주의”에 빠졌습니다. 마녀사냥의 열풍이 불었으며 포르투갈은 국내 유대인들에게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으니 온 유대인 가문이 카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속으로는 은밀하게 유대교를 믿었다고 추정됩니다. 이렇게 개종을 택한 유대인들을 스페인어로

“꼼베르쏘(전향자)”라고 했지만, 실제로 이들은 “마라노”라고 불렸습니다.

마라노는 돼지를 일컫는 말인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에서 똥과 진흙에 뒹구는 상태의 돼지”를 뜻합니다. 즉 “나는 네가 속으로는 유태교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런 취급을 받고서라도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생존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 입장에서는 이

“마라노”를 해코지할 근거가 없었음에도 스피노자의

할머니는 마녀로 결국 고발당했습니다.

 

 

 

스피노자 집안에 시집 온 유대인 여성은 대체 어떤 죄목으로 고발당했을까요?

사실 여기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재산이 많아도 언제 다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 적대적인 사회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갖는

가장 빠른 방법은 현금을 쟁여놓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여성들은 남편의 벌이가 충분해도 소소한 부업을 많이 했습니다.

 

유럽에서 여성의 부업 중 대표적인 것이 민간요법입니다. 약초를 팔거나 배합해서 복용시키고, 때로는 우리나라의 시골에서 벌침 놓듯 사혈(묵은 피를 빼는 것)

서비스를 합니다.

인간이 처한 상황은 거기서 거기고,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해결책을 내기 마련인데, 이런 측면에서 한국과 유럽의 민간요법, 탕약문화는 꽤 비슷했습니다.

유럽엔 탕약 문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엔 역시 마녀사냥의 영향이 컸습니다.

민간요법으로 먹고 사는 독신 여성의 씨를 말려버림으로써 다양한 기술들이 실전되어 버렸는데, 현재 남아있는 테크닉은 한 줌 정도로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스피노자의 할아버지 “이삭”은 아내가 화형대에서

산 채로 불타는 모습을 뜬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남은 자식들이라도 살려야겠다는 마음에 그는 엄마 잃은 자식들을 끌어안고 프랑스로 향했습니다.

이삭이 프랑스로 간 이유는 그 유명한 앙리 4세의 낭트 칙령 이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낭트 칙령”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유럽 최초의 법령이었지만, 카톨릭과 개신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였을 뿐, 유대교는 해당 사항이 없었습니다.

 

스피노자 가족은 1615년에 가까스로 삶의 기반을 마련한 프랑스에서 추방명령을 받았고, 이제 남은 곳은 네덜란드 뿐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종교적 자유에 가장 개방적인 국가였습니다. 특히나 상공업의 발달을 위해 유대인 이민을 환영했는데

유대인은 유럽과 중동 어디에나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을 포섭하면 국제적인 유대 무역 네트워크의 허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요덴뷔르트”라는

유대인 자치 거주구역을 허가해주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유대인을 모조리 받아들일 기세였습니다.

스피노자 가족은 일단 발길이 닿는 대로 로테르담에

당도했습니다. 이삭은 거기서 가족이 굶어죽지 않을

기반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이후 포르투갈에서 프랑스를 거쳐 네덜란드에 이민을

오기까지 어디서는 무엇을 구매하고 어디에는 무엇을

팔면 좋을지 그는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이삭은 로테르담에서 자식들을 위해 미친듯이 일했습니다. 그리고 1627년, 마침내 생명의 기운이 다해 로테르담에서 처절했던 삶을 마감했습니다.

내쫓기고 빼앗기는 삶을 살다 간 그는 공동묘지 바깥의 공터에 묻혔는데, 당시에는 여전히 유대인이 묻힐 수

있는 묘지는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망한 이삭의 시신에 포경수술을 했습니다.

“마라노” 취급을 받으며 유대교를 버렸다고 거짓말해야 하는 삶을 살았던 그는 포르투갈에서 감히 포경수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죽어서라도 진정한 유대인으로 묻히라는 뜻에서 시신에 포경수술을 했지만, 거꾸로 이 일은 네덜란드의 품에 안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얼마나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사업체를 물려받은 큰아들 미겔은 이를 악물고 일했습니다. 미겔 가족은 마침내 국제 무역도시 암스테르담에 입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스피노자는 할아버지가 사망한 뒤 5년 후 암스테르담

유대인 거주지, 이제는 부유해진 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미겔은 아이의 이름을 “바뤼흐”로 지었는데, 히브리어로 “복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식으로는 복돌이/만복이 정도 되는 이름)

미겔은 집안의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는데, 이는 스피노자의 세대만큼은 편안히 복을

누리길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겔은 훗날 둘째 아들 바뤼흐가 유대인 커뮤니티를

뒤집어 놓고 그걸로도 모자라 전 유럽에 맞서 홀로 사상의 전쟁을 치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인간은 어디까지 고독을 감수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바뤼흐 스피노자를 통해 그 한계를 어림잡을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개방성은 유명합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개방적인 민족은 없습니다.

개방도 폐쇄도 관념이 되기 전까지는 실용적 이유에서 시작되는데, 네덜란드는 국제 무역 허브가 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개방을 택했습니다.

지금은 민족적 습관이자 어느 정도는 관념이 되었지만 이때는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도망 온 유대인들에게 꿈의 땅이었지만, 이때의 네덜란드에 있어 개방은

민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을 사랑하지도, 종교적 자유를 지금처럼 당연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유대인의 상업 네트워크가 필요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미묘한 기류를 과연 유대인들이 몰랐을까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에서만큼은 쫓겨나지 않기 위해 암묵적인 태도를 합의했습니다.

그들은 “지나고그”(유대인 자치 거주지) 바깥에서는

네덜란드 사회에 토를 달지 않고 유순하게 굴었지만

자치권을 허락받은 내부에서는 급격히 우경화되었습니다. “콤베르소”였던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유대교를 버린 “전향자”들이었지만 유대인의 기준에서는 “변절자”였습니다.

한 번 변절한 사람들은 과거를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극렬해지기 마련입니다. 나치에 순응했던 프랑스인들은 독립 후 적폐 청산 목록에서 빠지자마자 나치 잔당은

모두 때려죽여야 한다며 악을 썼는데,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역사상 어떤 유대인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유대교 외의 가치를 배척했고, 유대인 자치 거주지 “지나고그”

바깥에서 유순했던 만큼이나 내부에서는 극우주의가

당연시 되었습니다.

 

1632년 출생해 암스테르담 지나고그의 일원이 된

스피노자는 이런 분위기를 순순히 체화하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두뇌를 타고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재능이 곧 저주가 되는 가장 좋은 예가 스피노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노숙생활을 하다가 번듯한 집을 얻게

되었을 때, 이것만은 반드시 구비하고 싶었을 가구나

가전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세탁기나 냉장고 정도는 반드시 집안에 두고 싶어하는 것처럼, 암스테르담 지나고그도 그렇게 원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들을 일으켜 세워줄 무리의 지도자이자 지나고그를 제2의 예루살렘으로 부흥시켜 줄 율법학자 겸 장로, 즉 “랍비”였습니다.

 

이들은 랍비가 되어줄 뛰어난 아이를 물색했는데, 바로

그 주인공이 “스피노자”였습니다.

놀랍게도 스피노자는 다섯 살 때 이미 랍비로 낙점되었습니다. 이 때는 데카르트가 <방법 서설>을 출간해 편지풍파를 일으킨 해였지만, 방법적 회의의 태풍은 암스테르담 지나고그엔 불어오지 않았습니다.

스피노자는 머리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의 미래를 미리 이야기하자면 히브리어는 당대 최고의 교본을 썼을 정도였고, 모국어는 네덜란드어였만 글은

라틴어로 썼습니다. 그 외에도 스피노자는 스페인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아버지 미겔은 성공한 무역업자였지만 스피노자는 이미 한 가정이 아니라 지나고그의 미래였습니다.

돈 있는 유대인 상인들이 십시일반으로 스피노자에게

수학, 광학, 물리학, 종교학, 어학 등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는 다섯 살 때부터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공동의 자산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호기심을 참지 못했고, 참지 않으며 성장

했습니다. 네덜란드라는 특유의 환경 속에서 가톨릭

교도는 물론 다양한 교파의 개신교도들과 교류했으며

심지어 소수파인 퀘이커 교도와도 알고 지냈습니다.

물론 스피노자 자신은 최고의 랍비를 목표로 한 철저한 유대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유대교 교육의 “하늘천 따지”는 구약성서로 그저 달달 외우기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구약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로 “인격신”에

대한 스피노자의 의문이었습니다.

신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신이 왜 하나의 인간에 해당하는,

그것도 화 잘내는 남성으로서의

인격이어야 하는지?

그는 모든 학문 분야의 신동이었는데, 수학적으로 접근했을 때 신은 “인격”이 아니라 “수학적 질서”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인간과 인간의 삶이

있을 수 없다 치자.

세상 모든 게 꼭 지금 이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면

그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러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있어야 하고

<이유의 이유의 이유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의 원인이 있어야 하고

그 모든 원인의 최종적인 근원이 신이라 치자.

그런데 신이 왜 인간의 형상과 성격을 지닌

캐릭터여야 한단 말인가?

물론 구약 말씀에 야훼가 자신의 모습으로

아담을 빚었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과연 신이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신존재 증명을 할 것인가?

 

위의 두 질문은 접근법이 완전히 다릅니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어른들의 가르침은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왜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렇게 결론에 과정을 맞추는 방식은 소년 스피노자의 눈에는 매우 기이하게 여겨졌고, 결국 그건 신존재증명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인간과 우주가 어떤 존재이고 왜 그런지 사유를 전개하다가, 그 사유의 끝에서 신이 있겠다는 결론이 나오면

있는 것이요,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 없는 거 아닌가”라는

식의 해석은 스피노자에게 더욱 큰 의문만 가져다 줄

뿐이었습니다.

 

추론이 먼저고 결론이 나중이어야 하지 않은가?”

이런 태도를 소년 스피노자는 유일신이 지배하는 유럽 대륙에서, 그것도 가장 보수적인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가졌던 것입니다.

청소년에게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이것이 취미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스피노자는 청소년기에 빛에 심취했습니다.

순수하고 결백한 질서같으면서도 신비한, 물질인듯 아닌듯 자연을 비추는 그것, 그것을 모으고 퍼트리고 가두며 수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렌즈”였습니다.

 

렌즈는 갈릴레이 이후로 천체관찰의 도구로 주목받은

망원경의 핵심 부품으로,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 정도에 해당하는 첨단 산업 제품입니다.

원래 유럽과 아랍의 유대인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무일푼으로 외지에 추방당해도 먹고 살 수 있도록 확고한 직업기술 하나를 연마하면서 성장하는 게 불문율이었습니다. 보통 서민층 유대인은 기능공이 되었고 상류층은 거칠게 나누면 둘 중 하나였습니다.

스피노자는 렌즈를 깎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로 유리세공을 배웠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버지 미겔도 스피노자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렌즈라면 최고급 과학제품이었으니 다른 걸

시킬 명분도 못 됐습니다.

 

스피노자에게 렌즈란 무엇이었을까?

굳이 비유를 하자면, 일종의 피규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렌즈는 잘 깎으면 정확하게 빛의 움직임을 반영하고,

어떻게 깎느냐에 따라 빛의 범위와 성격을 변화시킵니다. 스피노자는 “렌즈 오타쿠”였습니다.

게다가 렌즈는 수학적인데, 렌즈의 각도와 빛의 밀도는 정확히 비례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빛은 일종의 장난감이었습니다.

렌즈 깎는 도구 세트는 현대로 치면 90년대 부잣집 아이들만이 갖고 있었던 386컴퓨터로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정밀기계는 지금도 상당한 재산입니다.

유리제품은 대롱을 통해 입으로 부는 방식으로 이탈리아 유리장인들이 만드는데, 렌즈의 초기 형태도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을 아버지 미겔이 아들을 위해

따로 직수입품 목록에 추가시켜주었고 아들 스피노자는

하루 종일 이것을 깎으며 놀았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 인생 최초의 부침이 발생했습니다.

스피노자가 17세였을 때. 형이 폐병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훗날 스피노자 역시 규폐증에 의한 결핵으로 사망

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좋아하는 공부, 철학, 외국어, 렌즈 세공을 하다가 형이 사망한 후 갑자기 가문의 장남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미겔은 사업을 이어 받게 하기 위해 스피노자를 강제로 붙잡아 경영 수업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애초에 랍비가 되기로 한 인물로

일찌감치 꼽혔기에 암스테르담 지나고그의 원로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스피노자를 랍비로 키우기 위해 노력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을 사업가로 성장시키기를

원했고, 공동체는 공동체대로 스피노자를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그는 경영수업과 랍비수업이라는 양극단으로 일상이 쪼개져 버렸습니다.

 

여기에도 스피노자 “개인”은 없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가업을 물려받을 필요가 없는 둘째 아들이란 위치는 무척 쾌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이 사망한 뒤 유대교 커뮤니티 차기 수석 랍비 자리에다 아버지의 사업체까지 떠맏게 되었으니, 그의

내적 갈등도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사망하게 되면서 상황은 또다시

예측불허의 상태로 돌아섰습니다.

아버지 미겔 역시 큰아들처럼 폐질환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스피노자가 21살 때였습니다.

이제 졸지에 가업을 이어받게 된 스피노자에게 예상치 못한 공격이 들어왔는데 바로 여동생이었습니다.

 

“지나고그”는 보수적인 종교공동체였고, 자치구역이었지만, 그럼에도 네덜란드의 경제법에서조차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여동생은 유대인이지만 동시에 개방적인 네덜란드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유산상속에서 딸만 배제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녀의 오빠 스피노자가 인류역사상 손꼽히는

천재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법정에서 여동생 측에 언변으로 압승을 거뒀는데, 오빠와 상의도 없이 소송으로 덤비기에 받아 준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소송에서 이기고 나자 모든 게 우스워졌습니다.

 

“함께 자란 혈육의 몫을 빼앗아 좋을게 뭐가 있으며, 또

재산은 있어봐야 어쩔 것인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에게 어차피 재산은 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자본금과 경영이 분리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역상에게 신용은 곧 그의 자산과도 같아서 상인 가문 출신에게 재산 상속은 가업 승계와 동의어입니다. 즉, 자산보유량과 경영은 함께 굴러가는 바퀴라는 것입니다.

결국 스피노자는 재산권을 포기하고 여동생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여동생에게 불의의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재산만을 원했던 그녀는 모든 경영 책임을 스피노자에게 떠맡긴 채 자본금을 모두 차지해버렸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결과였습니다.

 

자금 없이 경영권만 떠안은 스피노자.

남동생을 이끌고 고군분투했지만 적자는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났고, 설상가상으로 조용히 진리를 탐구하는 삶을 꿈꿨던 스피노자에게 2차 공격이 들어왔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는 기어이 스피노자를 랍비로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지나고그의 원로들은 끊임없이 스피노자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침마다 유대교 기도 낭송으로 이웃 유대인들을 깨우는 일이었는데, 한 마디로 스피노자는 인간 수탉의 역할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경영 적자는 쌓여가고 아침마다 자기 생각엔 틀렸다고 판단되는 구약을 낭송하던 스피노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될 필요를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는 애초에 경영을 싫어했고 돈놀이는 더욱 혐오했습니다. 성공한 상인의 후계자답지 않게, 스피노자는 정직한 노동을 좋아하는 성품이었던 것입니다.

법정에서 스피노자의 마법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일단 파산신고로 신용불량 등록을 한 뒤에

아버지가 물려준 경영권을 “아버지가 남긴 빚”이라는

프레임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뒤이어 그는 “자식이 빚마저 인수인계할 수 없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관철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했다가 여동생을 제외한 온 가족이 무일푼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 몫의 유산은 지켜내기로 결심했습니다.

“편모 고아에게 아버지는 없는 존재, 그러나 살아계신 어머니는 현실의 존재”라는 기가 막힌 논리로 스피노자는 자신의 계획을 하나씩 실행해 나갔습니다.

빚은 돈이며 돈은 화폐입니다.

화폐는 기본적으로 “이 화폐로 얼마의 현물을 바꿀 수

있다”는 현물성을 근거로 하는데, 그는 법정분쟁에 존재

(어머니)와 비존재(아버지)의 철학적 개념을 끌어온 것입니다.

 

채권자 측 변호인단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질 수가 없는 소송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독보적인 말솜씨로 그들을 유린하며 빚에서는 해방되고 유산은 지켜내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습니다.

그렇다면 빚은 안 갚아도 되는 것이었을까요?

유대인이었던 스피노자는 유대인 금융업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불로소득을 혐오했기에 죄책감도

없었습니다.

스피노자에게는 이미 렌즈세공기술이 있었기에 일한

만큼 렌즈를 얻고, 렌즈의 품질만큼 값을 받으며 생활비를 벌어들이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난리통을 통과하며 그는 실연을 겪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이 때 “클라라”라는 소녀와 연애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피노자는 부드럽고 지적인 미남에 부유한 상인의 후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껏 지킨 재산권을 여동생에게 주고 빚쟁이가 되더니, 치열한 법정소송을 거쳐 겨우 렌즈세공사로 먹고 살 미래를 남겨놓았습니다.

당시에는 한 번의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던 때였기에

두 사람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렌즈세공은 고급노동이었지만 어쨌거나 노동이었기에

클라라는 노동의 삶을 선택한 스피노자와 헤어지고 이후그녀는 경영권을 물려줄 사업체가 있는 집안의 대학생에게 시집갔습니다.

 

클라라를 속물이라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스피노자는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소박한 삶을 살고 싶은 자신의 욕망과 자본가의

아내로 살고 싶은 클라라의 욕망을 선악과 귀천으로

구분짓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욕망은 범죄가 아닌한

불가침의 영역으로, 누구나 자신의 욕망에 해명할 의무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클라라와 헤어진 후 스피노자는 조금씩 고독해져 갔습니다. 그래사 그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성찰>을 읽기 시작했는데, 철학적 상상력의 스케일을 맛본 그는 진정한 해방을 맞기 위한 일전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유대 공동체와의 결별이 남아있었습니다.

 

나의 뜻대로 철학적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나.

 

스피노자는 “나 자신”을 쟁취하지 않으면 그의 인생은 실패라고 확신했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한 것처럼, 스피노자는 “스피노자의 생각으로 존재하는 스피노자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생각에 구약은 거짓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구약에 명시된 십일조를 거부하면서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을 포함, 네덜란드 주요 도시에 포진한 유대인 사회에 평지풍파를 일으켰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대 랍비들이 스피노자를 논파하고 회개시키기 위해 총출동했지만, 스피노자와의 논쟁에서 모조리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유대교는 모세, 기독교는 예수, 이슬람은 무함마드의

종교로, 다시 말해 그들이 모시는 신은 바로 그 분 하나입니다. 스피노자는 유일신의 성격부터 파고들어갔습니다. 이쯤 되자 카톨릭과 유대교의 대연정이 일어났습니다. 카톨릭 신부들까지 스피노자와의 논쟁에 참전했지만 도미노처럼 무너졌습니다.

말로 안 되면 이제 남은 것은 협박과 보복 뿐이었습니다.

스피노자 역시 자유는 공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가해질 집단적 폭력을 침착하게 기다렸습니다.

인간은 선천적인 무리동물입니다.

공동체는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것으로, 인간은 배제당하고 살 수 없습니다. 원시 부족에서도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도 추방은 사형 바로 아래 단계의 형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스피노자는 유대인이었습니다.

17세기 유럽에서 유대인이 유대 사회에서 추방된다면 그에게는 사회라는 것이 삭제됩니다.

절대적 고독이 스피노자를 엄습했습니다.

공동체가 온전한 나 자신이어야 하는

“개인”을 위협하면 어떡해야 하는가?

유대 사회는 먼저 스피노자를 회유했지만, 스피노자는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협박을 하게

되는데, 그 정도로 그들은 스피노자를 잃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한 번 잃으면 유대교의 교리를 짓밟을

인간이었던 그들은 다음으로 그에게 뇌물을 줄 계획을

세웠습니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철학을 입다물고 살기만 하면 평생 두둑한 연금을 받을 권리를 제안받았지만, 그는 이마저도 거절했습니다.

다음 순서는 암살이었습니다. 열렬한 유대교 신자였던 젊은이가 원로들에 이끌려,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스피노자를 습격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스피노자는 날씬했습니다.

암살자의 비수는 그의 옷을 뚫고 들어가, 몸을 피해 다시 옷을 뚫고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스피노자는 암살자를 증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기해했으며, 조금은 불쌍하게 여겼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이렇게 어리석을 수도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그의 열렬한 신앙대로 야훼가 실재한다면 어차피 스피노자는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깊을수록 속세에서의 보복은 의미가 없어지는데, 그 깊은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신앙과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스피노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칼에 훼손된 옷을 평생 보관해 걸어두었습니다. 그는 가끔식 그 옷을 보며 “세상에는 이성이

없어 뵐 정도로 어리석은 인간도 있음”을 상기했습니다.이후로 그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암살마저 실패하자, 마침내 스피노자는 종교재판에 끌려갔습니다.

유대인 커뮤니티가 보장받은 자치권은 네덜란드의 법령을 크게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좌불안석인 것은 유대 사회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피의자 스피노자는 당당하고 침착하게 요구했습니다.

 

"인간사에 개입하는 인격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하라.

이 법정이 나를 독실한 유대교인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정이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라.

 

스피노자에게 논파당하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법정은 급기야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인격신(야훼)의 존재를 의심한 게 사실인가?”

 

이는 “그대가 악마인 게 사실인가?”라는 일종의 동문서답이었고, 법정은 몰아넣기식 우기기 외에는 별다른

전략을 찾지 못했습니다.

 

"야훼를 부정하는가?"라는 질문에 유죄판결을 받지

않으려면 그렇지 않다고 하면 됩니다.

집단인가 개인인가, 개인은 자기 자신이기 위해 어떤

것까지 감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스피노자는

"나는 야훼를 부정한다."라고 답하며 직선으로 돌을

던졌습니다.

이로써 재판은 유죄판결로 마무리 됐습니다.

이후 스피노자는 유대 교회로 끌려가 교회 문간에 배를 깔고 엎드림 당했습니다. 유대 커뮤니티 구성원 모두가 그를 발로 밟고 실내로 입장했는데, 이 중에는 그의 혈육도 있었습니다.

모두 입장한 후 마지막에 남은 스피노자가 실내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가운데에 놓여진 촛불을 보게 했습니다. 그들은 커다란 대야에 도축한 짐승의 피를 담아놓고 그 위에 검은 색 양초를 띄웠습니다. 하나가 아니라 참석자 수만큼 띄우는데 회당 안은 빛을 차단시켰기 때문에 촛불로만 밝혀진 상태였습니다.

 

촛불이 상징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영혼이었습니다.

다 함께 저주의 제문을 외고, 참석자들은 차례로 하나씩 자기 몫으로 할당된 촛불을 껐고, 마지막 촛불이 꺼지면서 완전한 암흑이 오는데, 이는 스피노자의 영혼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무속으로 치면 “영살(구천을 떠돌며 민폐를 끼치는 영혼이 끝내 저승에 가지 못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혼을 없애는데, 무당들도 금기시한다)”에 해당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스피노자의 제명과 추방이 완료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심한 저주를 받은 철학자는 역사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스피노자에게는 가벼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7세기 유대교의 파문 의식이 모두 이처럼 비인간적

이었을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스피노자의 경우가 특별히 심했을 뿐입니다.

유대교 사회는 스피노자를 상대로 한 논쟁에서 전패

당했습니다. 논파당했다는 것은 곧 어느 정도는 설득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그들은 스피노자의 논리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집단적으로 탈출하기

위해, 또한 스스로의 신앙을 집단에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광기를 뒤집어썼습니다.

모두가 공범이 되는 데 성공하면 피해자만이 주범이

되고, 폭력의 수위가 높을수록 안락해집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반응은 심드렁한 편에 속했습니다.

등허리가 밟히느라 척추도 아프고 빈정도 꽤 상한 모양이지만 이 모든 고초를 간단하게 정리했습니다.

 

이제 자유다 !

 

스피노자는 자신을 저주하고 추방한 이웃들에 적개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실로 놀라운 정신력과 차분함의 소유자였던 스피노자는 인간을 어디까지나 이해와 존중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나는 인간들의 행위에 웃거나 울지 않으며,

또한 증오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스피노자 이후의 철학자들은 그의 고귀한 정신적 태도를 흠모함과 동시에 강력한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조차 느끼지 않은 철학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논리는 고군분투하면 조직해 낼 수 있지만 그의 우아한 성정은 원한다고 훔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때가 스피노자의 나이 24살, 1656년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불과 20대 초반에 자기 사상의 얼개가 형성되었음을 느꼈습니다.

스피노자의 파문은 집단이 아닌 개인이 탄생한 순간이며, 우리가 누리는 근대 개인주의는 “개인 스피노자”와 함께 태동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유대인들에게 버림받은 유대인, 철저한 외톨이가 되어 칩거할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4년 후 1660년 라인 강변의 조그만 마을 레인스뷔르흐에 장기 체류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곳에서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하고 발표할 생각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서양 철학의 도그마와 종교의 모순을 차분히, 그러나 냉혈하게 포위섬멸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철학은 “야성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동시에 고상하다는 의견도 많았는데, 스피노자는 공포에 질리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았습니다.

철학자들은 시대를 초월해 서로 경쟁심을 느끼지만

스피노자의 지성 앞에서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스피노자를 흠모하거나, 외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원색적으로 비난했습니다.

게오르크 헤겔의 경우는 알아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면 철학자가 아니다.

모든 철학자에게는 두 명의 철학자가 있다.

자기 자신과 스피노자다.

- 앙리 베르그송

스피노자는 친구를 사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친구를 찾은 게 아니라 애쓰지

않아도 그에게는 친구가 생겼습니다.

파문 당한 후 라인 강변의 작은 마을에 정착하기까지의

지난 4년간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추적하기가 어렵습니다. 라틴어 수업의 조교 노릇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추정될 뿐입니다.

그 무렵 스피노자는 히브리어 이름 “바뤼흐”를 버리고 같은 뜻의 라틴어 “베네틱투스”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철학적 소신을 지키기 위해 파문과 추방을 감수한 유대인 청년이 있다는 소식은 네덜란드의 젊은 인텔리들에게 강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대체 누구인가?

얼마나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길래?

 

 

명색이 공부 좀 한다는 젊은이들은 입소문을 공유하며 스피노자를 찾아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세 좋게 토론을 신청한 이들도 있었고 순수한 호기심으로 질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는데, 모두 스피노자의 천재성과 혁명성에 탄복했습니다.

그들은 엷은 미소를 잃지 않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미남자를 깊이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빌헬름 바이셰델은 그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철학의 뒤안길>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독에 젖어드는 성향이 있던

스피노자는 더욱 깊이 고독 속으로 젖어들었다.

그는 흡사 그의 서재에 매장되어 있는 듯했다.

그에게는 몇 안 되는 친구가 있을 뿐이었으며

편지 왕래도 매우 드물었다.

 

빌레름 바이셰델의 해석이 일반적이라면, 반면 스피노자가 고독한 은둔자라는 평가는 전혀 사실과 다르며, 다양한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유주의 성향의 공화정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중심적 인물이었다고도 하는데, 과연 진실은 어느 쪽

이었을까요?

 

사실 둘 다 맞는 말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는 까닭은 스피노자는 고양이였고 그의 팬들은 개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고독 속에서도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먼저 편지를 보내오는 것도, 의견을 묻는 것도, 찾아오는 것도 지인들이었습니다.

스피노자가 먼저 연통이라도 넣어줄까 수개월 기다려봐야, 먼저 기별을 넣는 건 이쪽이었습니다.

 

지인들은 스피노자가 자리를 잡고 렌즈세공으로 먹고

살기 시작한 때부터 가끔씩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그를 찾아왔는데, 여럿이 찾아올 때는 스피노자에게 직접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스피노자는 친구들의 요청에 철학적 견해를 편지 써

주곤 했고, 친구들은 그의 편지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직접 가르쳐주십사 그를 방문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 공화정 지지자 그룹의 중심 인물이었다는

설명도 이래서 가능했습니다.

소박한 성격의 스피노자는 낮에는 렌즈를 깎았고 밤에는 철학을 했는데, 다만 정치 담론에 대해 물어보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답장을 써 주었을 뿐입니다.

공화파 엘리트들이 이 답장에 달려들어 해답을 갈구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스피노자가 화제의 인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피노자야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렌즈깎이에 몰두했을 따름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스피노자의 철학적, 정치적 견해를 떠들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무신론자로 소문난 스피노자의 친구임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스피노자와 그의 지지자 겸 친구들은 자기들만의 비공식 네트워크를 통해 교류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첫번째 책을 내기도 전에 그는 이미 물밑에서 컬트적인 팬덤을 거느렸습니다.

 

스피노자처럼 자기애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고초를 당하고 미움받으면 어쩔 수

없이 유치해지고, 누구나 이럴 때만은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되어 자신을 이렇게나 괴롭히는 세상에 대해

억하심정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진리를 추구한 죄로 저주받는 이가 다름아닌 나 자신일지라도 그들은 그저 인간일 뿐 악마나 짐승이 아닙니다. 스피노자는 분노를 정당화하는 결론을 내린다면 인간과 우주를 음미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감정의 먹잇감이 되는 사람은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해보려는 참을성이 없음은 대중의 인간적 흠결일 뿐입니다. 흠결이 있기에 더 나아질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슬퍼하지 마라. 분노를 키우지도 마라.

대신 이해하라.

이해하려는 노력은 미덕의 처음이자 전부다.

 

스피노자는 아무리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세상은 살 만한 곳임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자신을 저주하는 이들의 지성이 그만 못하다는 이유로 낮잡아 보지도 않았으며, 그도 다른 이들도 다

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심리에 대해 그는 꽤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자존심이란 인간이 자신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데서 피어나는 쾌락이다.

 

지식과 지성은 다릅니다.

지성은 앎에 더해 태도까지를 포함하는데, 이런 면에서 철학자 스피노자의 지성은 압도적이었습니다.

개인의 인격과 욕망, 그리고 한계까지도 그 자체로 존중의 대상이 되게끔 하려는 집단적 행위,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치였습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전적인 존중을 토대로 삼지 않은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통치이며 지배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버려도 되는 물건이 아니라 서로를 끝없이 붙잡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사회에 받은 탄압에 아랑곳하지 않고 희망의 정치학을 펼쳤고, 스피노자에게 사회란 인간이 인간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증오는 주고받음 속에 자라난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키운다)

다른 한편으로 증오는 사랑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다. 사랑에 의해 완전히 소멸된 증오는 사랑으로 수렴된다. 그러하기에 사랑이 보다 위대하며, 증오의 충동이

사랑보다 우월했던 적은 없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개인주의와 사회공동체주의는 한

몸이었습니다.

개인의 사상과 자유는 그 자체로 무한히 존중받아야

하며, 그런 사회는 각 개인이 권력을 공평히 나눠 가진

사회여야만 합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공화정을 지지했으며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공화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스피노자는 국가의 미래는 공화국임을 예견했습니다.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되는 <윤리학>은 근대시민윤리이자 민주주의 법철학의 근간이었습니다.

 

윤리학에 있어 스피노자보다

뛰어난 철학자는 없다.

- 버트란트 러셀

 

이는 천재성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기 위해 가족과 공동체의 기대를 배신하고 인격살해를 감수한 사람만이 닿을 수 있는 지점인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위대한 개인주의자만이 선량한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왜냐하면 이기적인 인간이어야 타인의 이기심도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인스뷔르흐에 정착한 스피노자는 먼저 철학적 메모의 모음인 <소고(小考)>를 정리한 후, 1661년 <지성개선론> 집필을 시작했지만, 이 책은 끝까지 미완결로 남았습니다. 영화 용어로 말하자면 <지성개선론>은 필생의 대작인 <윤리학>의 플롯에 해당하기에 사상을 완성하기 전에 결론을 미리 내릴 수는 없습니다.

정작 시나리오인 <윤리학>을 완성하고 나니 제작 과정인 플롯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완성될 수가 없는 책이었던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자연스럽게 다음 해인 1662년 서른 살의

나이로 <윤리학>에 도전했고, 반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1부를 완성했습니다. 원래 3부 구성으로 구상한 책이었으니 1/3을 뚝딱 해치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완성하는 데는 결국 15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15년 동안 책 하나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어서스피노자는 은둔 생활을 잠시 포기하고 1663년에 잠시 가정교사 생활을 하게 됩니다.

<윤리학> 집필 완성을 위한 단계였습니다.

우선 자신을 철학의 세계로 이끌었던 데카르트를 자신의 분석으로 명료하게 정리해야 했습니다.

가정교사를 부를 만한 집안에는 장서가 많어서 수업료를 기꺼이 지불할 만하다면 없는 책도 금방 조달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정교사 생활은 자료를 빨리 얻기 위해 그에게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데카르트 해설서인 <기하학적 방식에 근거한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를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스피노자의 친구들, 즉 컬트적 팬덤의 돈과 인맥으로 출판되었는데, 이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사상적 제자였고 그를 지지하는 친구들 역시 데카르트 신봉자였습니다. 이 책은 스피노자가 생전에 유일하게 본명을

숨기지 않고 출간한 작업물이기도 했습니다.

 

데카르트를 졸업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넘어서고

자신의 철학을 완성해나가는 여정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뎠습니다.

1차 목표지점은 1670년 출간되는 <신학 정치 논고>

였는데, 사실 이 책이 발표되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데카르트보다 불편한 지식인이 출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스피노자는 1663년 포르부르흐로 이주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이곳에서 공화파 정치인들과 교류했고,

충격적 문제작 <신학 정치 논고>를 출간한 것도 이곳에서였습니다. <신학 정치 논고>는 익명으로 출판되었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은 이 책의 출간에서부터 세상에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 정치 논고>는 철학사상 최악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신학 정치 논고>를 비난하는 일은 사회적 유행이 되었고, 자신의 정의와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모두가 한목소리로 뛰어들었습니다.

지식인은 물론 유행에 민감한 일반인도 자신이 상식인이라는 증거를 대기 위해 <신학 정치 논고>에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그만큼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천인공노할 만큼 정밀하게 쓰였습니다.

그저 그런 논리로 꾸며낸 책이었다면 분노를 불러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신학 정치 논고>는 출판물이 귀하던 당시에 5년간 5쇄를 찍었고, 전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양지에서 “악마의 하수인”으로 불리는 동안 익명의

저자, 즉 스피노자는 음지에서 컬트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남몰래 책의 내용에 동의하는 사람부터, 사상 전개 방식과 유려한 문체에 반한 사람들까지, 그들은 금세

스피노자를 열렬히 흠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저술을 일컬어 “라틴어 문학의 마지막 걸작”

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라틴어로 저작을 발표했는데 이 어려운 언어를 고대 로마시대의 문인처럼 자유자재로

다뤘습니다. 본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그의 생각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스피노자의 필력은 독자들에게 경탄의 대상이었고, 스피노자 이후 그보다 라틴어 문장을 잘

쓰는 인물은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사상이란 무엇일까요?

스피노자의 불만은 이랬습니다.

 

왜 데카르트 같은 위대한 천재도

굳이 신존재 증명을 하려고 하는가?

 

사유를 전개해 나가다가 신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 그냥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이 무신론으로 수렴되는 게

아니냐는 공포에 떨며 살았지만, 사실은 신이 없다고

논증되면 그저 없을 뿐입니다.

스피노자는 신성으로 가득찬 철학자라는 평을 듣게

되는데,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 중 하나도 “신에 취한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스피노자는 신에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은 인격신, 유일자가 아니라 “범신론의 신”

이었습니다.

 

 

“범신론”이란 “모든 사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정신이라고 하는데, 신이라는 용어를 선택했을 뿐이기 때문에 “정신”이라고 해도 되고 조선 유학의 “이기론”에서 이(理)라고 해도 됩니다.

“어디에나 깃들어 있는 법칙”,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이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선험적인 절대적 이성, 즉 로고스가 있다고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인간의 영혼은 절대

로고스인 신과 물질 사이에 존재하지만, 반면 스피노자는 우주의 정신은 물질을 적시듯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정신은 예를 들자면 수학적 원리 같은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신이란 철학적, 언어적으로만 존재한다”

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을 포함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 근거,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물리법칙으로 “초끈이론의 초끈”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돌에도 벌레에도, 어떤 자연 현상에도 그 안에는 기하학적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를 구성하는 원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꼭 기하학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원리가 있다면 그것이 스피노자의 신인 것입니다.

 

우주는 신성으로 가득하고

어디에나 신성이 흐른다면 우주는 곧 신이 아닌가?

우주의 일부인 인간도, 개도, 돌도

신의 일부가 아닌가? 그렇다.

이러한 개념을 “신” 즉 “자연”-

“데우스 시베 나투라”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자연은 고정된 불변의 질서를 보존하고

있고, 예외란 있을 수 없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공간적 개념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에 따른 인과율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곧잘 스피노자를 체념과 염세의 철학자로 오해하게 되는데,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사먹는다면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게 될 만한 환경과 경험이 있어야 하고, 내가 태어나야 하고,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이 태어나야 하고, 유인원이 있어야 하고 척추동물이 있어야 하고...

요즘의 이해로는 빅뱅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시 역산하면 빅뱅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나는 필연적

으로 지금 다른 것도 아니고 이 아이스크림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스피노자는 자유

의지를 착시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시니컬하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던져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돌은

“나는 지금 자유의지로 비행하고 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은 우주를 구성하는 교차된 두 선, 즉 X축과 Y축이라는 사실만 상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인데,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

 

“신” 즉 “자연”이라는 말은 “신 즉 시공간 전체”라는

말과 같습니다.

시간도 우주의 구성요소입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체념적이지 않습니다.

현대의 천체물리학자는 일반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공간을 일러스트로 그리곤 하며 미래는 정해져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당 물리학자가 현실의 차원에서 무기력하고 수동적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스피노자 존재론의 핵심은 “능산자”와 “소산자”입니다.

 

•능산자 : 능산적 즉 생산하는 자연

라틴어로 "나투라 나투란스 Natura Naturans"

 

•소산자 : 소산적 즉 산출되는 자연

라틴어로 "나투라 나투라타 Natura Naturata"

 

그는 “생산하는 자연과 생산의 결과로써의 자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는 창조주이자 그 자체로 결과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은 우주의 일부로서 능산자인

동시에 소산자”라고 보았습니다.

이 개념이 혁명적인 이유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물과

기름 같은 구분을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인격신은 물론, 창조주로서의 신도 사라지게 됩니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무신론입니다.

스피노자를 반박하는 사람들은, 특히 코플스톤처럼

기독교 신앙을 가진 철학자들은 이 부분을 걸고 넘어

집니다. 그들은 “신이 있다는데 사실은 무신론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믿을 수 없다!”며 가슴을 쓸어내

립니다. 사실은 그게 바로 스피노자가 이해시키려고

했던 내용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실체(존재를 의심할 수 없는 본질적 존재)란, 스스로의 힘만으로 실체임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간단히 말해 거울을 보고 내가 나인 사실을 인지할 수만 있으면 실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신과 같은 절대성을 지니고

있을까요?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스피노자는 인간이 타인의 자유와 신념에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이교도에게 신성모독이라며

손가락질하는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신성모독자였는데,

실체를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아니고, 신의

“최애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간은 그냥 인간으로 태어난 동물이며, 우주 안에서 모든 사물과 생명은 다른 의미를 같지 않고, 우리는

능산이자 소산, 우리의 원인이자 결과하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인간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다른 생물과 사물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인간에 대해 놀랍도록 심드렁하고 차가운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에티카>에 이르러 윤리학의 최종보스로

진화했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능산자와 소산자 개념은 <에티카>에

등장하고, <신학 정치 논고>는 제목 그대로 신학 논고와 정치 논고를 단행본으로 엮은 책입니다.

이야기의 전개 순서상 그는 존재론을 먼저 풀었습니다.

 

 

스피노자는 1670년 헤이그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말이 거처지 하숙집이나 여관방에 불과했고, 그나마

좋은 방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팬덤은 스피노자를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렌즈를 깎으며 빈궁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당시 렌즈는 고가품이었고 렌즈 세공은 고급 노동이었습니다. 더욱이 스피노자의 렌즈는 최상품이었기에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도 그의 고객이 될

정도였습니다.

(참고로 하위헌스는 토성의 고리와 위성 타이탄을

발견한 인물)

 

하위헌스는 당시 기술로 가능한 최고배율의 망원경에

들어갈 정밀렌즈를 스피노자에게 의뢰했습니다.

그런데도 스피노자는 돈이 부족했는데, 수입의 대부분을 렌즈마냥 고가품인 책을 구입하는 데 썼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팬들은 “"제발 연구와 저술에만 집중하라."고

말하며 스피노자를 돕고 싶어 했습니다.

스피노자는 번번이 거절했지만, 지인들은 그에게 돈을

계속 주었습니다.

때문에, 스피노자의 거처에는 예고 없이 거액이 도달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꼭 필요한 데만 돈을 쓰고 나머지는 그대로 돌려보냈습니다.

 

스피노자가 팬들의 조공을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쓴 게 있다면 파이프 담배였습니다.

돈을 돌려보내기 전에 질 좋은 담배를 조금 사서 맛봤는데 이것이 유일한 취미였습니다. 이렇게 고급 담배가

생기면 스피노자는 1층으로 내려와 여관 주인과 담배를 나눠 피우며 담소를 즐기곤 했습니다.

가끔씩 하는 흡연이지만 결과적으로 건강에는 좋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렌즈 세공을 하면서 깎여 날린 유리 가루가 그의 폐에 쌓이고 있었습니다.

서른 중반을 넘긴 스피노자는 점점 창백하고 수척해져만

갔습니다.

 

스피노자에게는 무슨 취미가 있었을까요?

그는 렌즈로 방 안에 집을 지은 거미를 관찰하기도 했고, 모기와 파리를 잡아 친절히 거미줄에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정 지루하면 어린아이처럼 거미끼리 싸움을 붙이기도 했는데, 이쯤 되면 혼자 놀기의 달인이라고 할 만 했습니다.

스피노자에 열광한 이들 중에는 “시몬 드 브리스”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스피노자도 나름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지만, 시몬 드 브리스는 암스테르담의 재벌로 부유함의 단위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시몬 드 브리스는 스피노자에게 존경을 바치는 뜻으로 1000달러라는 거금을 후원하려고 했지만, 스피노자는 거절했습니다.

통이 큰 재벌이었던 시몬 브리스는 아예 자신의 유산

상속인으로 스피노자를 지명했습니다. 희대의 천재가

풍족한 환경에서 하인들의 수발을 받아가며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를 원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예의를 갖춰 완곡히 거절했습니다.

 

자연은 지극히 작은 것에 만족합니다.

 

스피노자는 생명이 유지되고 활동하는 데 있어 낭비를 혐오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상공업이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로 흘러가는 현상에 불편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시몬 드 브리스는 친절한 신사였지만 구조적 착취의 수혜자였고, 착취의 결과를 향유하는 것도 착취이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시몬 드 브리스는 정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 정말로

최소한의 금액만 연금 형식으로 후원하겠다고 했습니다. 1년에 500플로린이라는, 그의 막대한 재산에 비하면

그야말로 티끌 같은 액수를 제안했지만, 스피노자는

이조차도 너무 많다며 곤란해했습니다.

옥신각신 끝에 스피노자가 300플로린을 받는 데 동의

하고 나서야 시몬 드 브리스는 비로소 물러났습니다.

 

스피노자는 금욕주의자였을까요?

그는 실제로 스토아 학파에 친화적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은 스피노자의 자발적 가난이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라고 설명하지만, 사실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는 귀족적, 즉 당장 누릴 수 있는데 절제하는 정신 수련에

가깝습니다. 그가 했던 렌즈 세공은 중노동으로, 중노동과 금욕은 종류가 다른 활동입니다.

스피노자는 금욕보다는 일상의 즐거움이 소중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의 조건 중 하나를 말해보고자 한다.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를 재충전하고 기운 나게

하기 위한 중용의 묘를 안다.

중용이란 좋은 음식과 술을 음미하는 것이다.

푸르른 초목을 즐길 줄 알고 사는 곳을 꾸밀 줄 알며

음악, 운동, 무대 예술과 같은 것들을 즐기는 일이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이들을 해치지 않고서도

향유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노동하지 않고 누리는 꿀물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의 그늘은 혐오했습니다. 스피노자에게는 렌즈 세공 기술과

팔다리가 있었고, 체력이 있는 한 그걸로 먹고사는 일이 그에게는 타당했다고 여겼습니다.

 

스피노자의 렌즈 세공 작업은 낮 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태양의 직사광에 비춰야 렌즈의 정밀도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밤에는 새벽 3시까지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따라사 체력 고갈 외에도 안구 피로와

두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사색을 시작해 모두 잠든 시간에 사상을 전개하는 스피노자의 모습은 그가 악마와 결탁했다는 심증의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스피노자는 반박 불가능한 기하학적, 연역적 방식으로 철학을 저술했는데, 바로 “형이상학”입니다.

어떤 이들은 “형이상학은 로고스의 정수가 아닌가?

신이 보증하고 인간에게 허락해 준 이성의 보물을 신을 모욕하는 데 사용하는 일이 가능한가?”라고 묻는데,

가능합니다. 한때 천사였고 신에 근접한 능력을 가진

지옥의 주인에게 영혼을 팔았다면 말입니다.

그의 이름은 “루시퍼”,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의 부하 스피노자를 지지하는 인물 중에는 “얀 데

비트”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네덜란드의 대정치가로, 인류가 공화국을 꾸려온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위대한 공화파 정치인이었습니다.

얀 데 비트는 십수 년간 공화국 네덜란드를 이끌어온

실권자였습니다.

스피노자와 얀 데 비트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남몰래

존경하며 교류했습니다.

얀 데 비트가 악마의 하수인이 펼친 철학에 공감한다면 정치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을 기세였고, 거꾸로 스피노자가 얀 데 비트 지지를 밝히면 그것도 얀 데 비트에게 악재였습니다. 말 그대로 두 사람은 정치와 사상의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던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얀 데 비트가 이끄는 공화국 정치를 인류의 미래를 닦는 초석으로 보았습니다.

 

이 번영의 나라에는 귀족이 없으며,

어떠한 계급과 종교를 갖고 있어도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

 

네덜란드 왕실의 뿌리는 존경받을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네덜란드의 국부이자 독립 항쟁의 영웅 “오라녜 공 빌럼”에서부터 시작된 오라녜 가에 대한 시민들의 충성심은 이해할 만할 뿐 아니라 온당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민이 주인인 공화주의를 좌절시킬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게 스피노자의 믿음이었습니다.

 

유럽은 상속 전쟁에 수년간 휘말려 있었습니다.

얀 데 비트는 평화주의와 외교로 공화국을 지켜내고자 했지만,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상속 전쟁에서

자신의 편을 들지 않은 네덜란드를 응징하리라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던 1672년, 루이 14세의 군대는 네덜란드를 전면 침공했고, 네덜란드는 높은 경제력과 협상력으로 유럽의 물밑 외교에서 힘을 발휘했습니다.

네덜란드는 강대국들의 힘이 균형을 이루어 네덜란드가 완충지대로 남길 바랬지만, 스페인 제국의 탄압을 경험한 네덜란드에 또 다른 대제국의 출현은 악재였습니다. 프랑스의 태양을 넘어 유럽의 태양이 되고자 했던 루이 14에게 네덜란드는 첫 번째 해치울 눈엣가시이자 먹잇감이었습니다.

전란이 나라를 휩쓸자 네덜란드 시민들은 평화주의 노선을 고집했던 얀 데 비트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평화의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시민들은 왕당파의 선동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옛날 스페인에 맞서 떨치고 일어나 백성을 이끌고

독립을 쟁취한 영웅, 바로 오라녜 공 빌럼이었습니다.

국력과 민심을 하나로 모아 외적의 침입을 막아줄 군주의 혈통이 있건만, 누구 때문에 나라가 전란에 시달리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얀 데 비트” 탓이었습니다.

공화국의 자유를 누리던 시민들은 폭도로 돌변해 얀 데 비트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그리고 얀 데 비트 형제, 얀과 코르넬리우스가 끌려 나와 폭도들에게 맞아죽었습니다. 형제의 시신은 배가 갈려 내장이 적출됐고 성기가 잘린 채 알몸으로 거꾸로 매달렸습니다. 사람들은 형제의 시신을 조각조각 잘라내

뜯어먹고 기념품으로 사고팔았는데, 광기 그 자체였습니다.

스스로 주인인 자유로운 시민이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혀 봉건 군주를 부르짖고, 동료 시민을 참살한 사건에 스피노자는 경악했습니다.

자유에 대한 스피노자의 다음 두 문장에는 이때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국가의 진정한 목적은 개인의 자유에 있다."

"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다."

 

주체적 개인이 절뚝거릴 때 폭력과 야만이 창궐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기록된 역사에서 이때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는 “극단의 야만인들”이라는 대자보를 써 데 비트

형제를 죽인 폭도들이 있는 곳으로 뛰쳐나가려고 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스스로를 위해서는 한 번도 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을 파문한 유대 교회의 야만성에

대해 일언반구도 한 적 없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얀 데 비트의 죽음 앞에서는 평온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폭도들이 피의 축제를 벌이는 살해 현장에서 그들을 공개 비난할 생각이었지만, 스피노자

역시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층에 있던 여관 주인은 스피노자의 손에 들린 대자보를 읽고 대경실색했는데, 이 글이 사실이라면 바로 오늘이 스피노자 선생의 제삿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에게 다행한 일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그가 묵는 여관의 주인은 스피노자를 존경했고, 그보다 힘이 셌습니다. 허약해진 삼십 대 후반의 스피노자는

문밖에 나서기도 전에 손쉽게 제압당했습니다.

허무하게 진압된 후 이성을 되찾은 스피노자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프랑스군은 거침없이 진격했습니다.

1672년 여름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의 정중앙에 위치한 도시 위트레흐트까지 점령했고, 프랑스군이 확보한 전선은 네덜란드 경제의 심장 암스테르담을 지척에서 위협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의 필사적인 저항과 동맹군의 합류, 물과

진흙의 방해로 프랑스군은 발이 묶였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시간을 벌기 위해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운하의 물길을 터뜨려 프랑스군의 진격을 방해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영국에 네덜란드의 중심 자치주인 홀란트 주의 주요 도시를 내주겠노라 약속했습니다.

반면 프랑스의 목표는 돈이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16개 자치주를 차지한 후 한 주당 백만 굴덴씩 총 1600만 굴덴을 토해내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앙숙인 영국을 위한 도시 공방전에 미적지근했습니다. 도시 대신 많은 지역, 넓은 면적을 차지하려고 하다 보니 네덜란드 저항군은 도시를 수비 거점으로

삼아 길게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전선은 고착됐습니다. 프랑스가 점령지를 하나씩 내주다가 전쟁은 1678년부터 시작된 평화협정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사건이 터진 1673년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위험에 빠진 네덜란드를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바로 독일 팔츠의 선제후 루드비히의 초청이 그것이었습니다.

 

루드비히 선제후는 유럽을 대표하는 명문 중 한 곳인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스피노자를 정교수로 앉히고자

했습니다. 편지는 선제후의 고문이자 하이델베르크

교수인 요한 루드비히 파브리티우스가 썼습니다.

기독교 신장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만 않는다는 조항이 붙어 있었는데, 이 정도면 직업인으로서 누구든 들어줄 만한 요청이었지만, 스피노자에게 완전한 자유가 아닌 것은 굴복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진격이 교착 상태에 빠진 1673년 봄, 침공군 총사령관 콩데 공작은 네덜란드 정부에 “스피노자와 만나고 싶다."는 난데없는 요청을 했습니다.

전 유럽의 증오를 받는 사람을 찾다니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네덜란드 고위층은 어둠 속에 숨은 고독한 악마를 수면 위로 끌어내야 했습니다.

콩데의 요구대로 스피노자가 출동해 강화회담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네덜드로서는 구원이었고, 회담을 하며 잡아먹는 시간도 침략을 당한 네덜란드에게는 생명수

였습니다.

 

네덜란드의 엘리트 고위층은 제발 콩데를 만나달라며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소문대로 스피노자가 사탄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라면, 루시퍼에게 빌린 솜씨로 콩데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게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라고

덧붙였습니다.

스피노자는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가 사랑하는 공화국을 지킬 수 있다면 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게 어딨냐는 마음으로 콩데를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악의 교과서 <신학 정치 논고>의 저자와 프랑스군 사령관의 회동은 비상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또 한 번 기이한 일이 일어났는데, 스피노자가 콩데 공작의 막사를 방문하자,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이 사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루이 14세의 부름을 받고 프랑스로 귀국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신 루이 14세의 초청이 스피노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로 이주하라는 제안이었습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절대 군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연예인이기도 했습니다.

셀러브리티로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도 성공하는 군주의 조건이라고 믿었던 그는 스피노자의 보호자 겸 후원자가 된다면 그보다 더 뜨거운 관심을 받을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루이 14세는 그에게 프랑스에서 부유하고 영예로운

생활과 학문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 다음에 나올 책을 루이 14세에게 헌정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중증 힙스터 루이 14세는 유럽의

독자들이 <신학 정치 논고>처럼 핫한 책의 첫 장에서

“루이 14세 폐하께 바침”이라는 구절을 가장 먼저 읽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콩데의 요청은 루이 14세의 제안을 전달하기 위한 절차였습니다.

콩데와 스피노자가 전쟁에 대해서 따로 할 이야기가

없으니 고민 없이 귀국시켰던 것입니다.

헌정 정도야 누구한테도 해 줄 수 있는 사소한 조건이었기에 스피노자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유럽 제일의 군주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돌려보냈습니다.

 

누군가에게 책을 헌정해야 한다면,

나는 내 책을 오직 진리 그 차제에만 헌정하겠소.

 

이 통렬한 거절은 우아한 돌려까기이기도 했습니다.

루이 14세 하면 떠오르는 개념이 왕권신수설로, 군주의 권력은 신이 점지했다는 논리입니다.

스피노자는 거절의 한 문장 속에서 왕권의 신성함은

물론 그것의 존립 근거인 유일신의 의지까지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오자 실망한 시민들은 분노를 불태웠습니다.

과연 스피노자는 악마의 하수인이었습니다.

프랑스 측의 첩자라는 소문이 퍼졌고 순식간에 기정사실화되었습니다. 급기야 전쟁에 지쳐있던 그들은 얀 데

비트 형제를 린치해 죽인 폭도로 변해 스피노자의 숙소로 몰려들었습니다.

얀 데 비트 형제가 죽은 것도 그들이 오라녜 공 빌럼 3세 암살을 모의 중이라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목숨을 구걸하지도, 결백을 외치지도 않았다습니다. 평소처럼 고요한 모습으로 그저 폭도들을 내려다볼 뿐이었습니다. 죽음 앞에 초연한 스피노자의 모습에 폭도들은 마법처럼 김이 빠졌는데, 이는 마치 스피노자의 침착함에 모두가 전염된 듯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터벅터벅 왔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스피노자도 곤궁한 중노동과 야간 집필의 일상으로 되돌아갔습니다.

1674년, 그는 보다 수척해진 모습으로 필생의 대작

<에티카>를 완성했습니다.

이 해는 네덜란드의 '몸통'인 홀란트 주가 <신학 정치

논고>를 금서로 규정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스피노자는 개인이라는 존재의 조건을 극한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극한의 공간에서 개인을 기다리는

동굴의 주인은 고독이다.

“생각의 자유”의 대가로 스피노자는 증오와 오해의 대상이 되는 삶을 받아들였고, “결국 자유란 무엇을 얻고

잃을지를 알고 선택하는 거래”라고 믿었습니다.

스피노자는 고독에 몸부림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독을 담담하게 품고 자신의 일부로 녹여냈습니다. 개인은 결국 “나란 존재는 철저히 혼자”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오해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믿음직한 대화 상대는 거울 속의 나 자신뿐이라는 막막한 현실이 개인의 종착역입니다. 이때는 역설적이게도 개인이 자신의 존재와 삶을 순순히 긍정하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스피노자의 삶은 “고독한 개인의 탄생”입니다.

네덜란드가 아무리 종교의 자유에 관대한들, 그 종교들이란 천주교, 개신교, 유대교였고, 이들이 모시는 유일신은 하나, “여호와”였습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자유와 관용을 넘어 세계관을 뒤집었습니다. <정치 신학 논고> 이후 이 책을 반박하기 위한

비판서 출간이 수년간 유행이었는데, 어떤 책도 성공하지 못하자 아예 금서로 묶어두고 출전금지 시킨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지지자들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에티카>를 사후에 출판하기로 했습니다.

<에티카>는 그를 죽일 게 분명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가 인류의 자산이 되고 불멸의 지위를 얻으리라 확신했습니다. 이는 오만이 아닌 그저 자신의 지성으로 예측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남아있는 짧은 삶을 두고 죽음을 재촉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 <에티카> 출간은 서서히 죽어가던 스피노자보다

건강한 친구들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에티카> 완성 2년 후, 1676년 겨울이 되자 유리 미세

먼지가 쌓인 스피노자의 폐는 그를 죽음의 문턱으로

끌어당겼습니다.

곧 스피노자가 위험하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그의 친구이자 지지자인 외과의사 “로데 빅마이어”가

천재를 살리기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출동했습니다.

마이어의 집중관리로 스피노자의 몸 상태는 조금 호전된 듯했습니다.

1677년 2월 21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여관집 주인 부부는 마이어가 시키는 대로 스피노자를 위해 닭고기 수프를 끓였고, 부부는 스피노자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오후 4시에 부부가 집에 돌아왔을 때 스피노자는 평온히 누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마이어는 부부에게 말했습니다.

“스피노자는 3시경에 사망했다”라고..

셔츠 일곱 장, 바지 두 벌, 모자 두 개, 속옷, 구두 두 켤레, 손수건 다섯 장, 이것이 스피노자의 의복 전부였습니다. 그 외에 침대와 이불, 방석, 여행 가방, 의자, 렌즈

세공 기계와 렌즈 몇 개, 작은 초상화, 은 버클 두 개,

체스 도구, 은 인장이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집필했던 책상이 있었는데, 책은 160여 권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한 줌의 유산이었습니다.

유족들은 장례 비용도 충당 못할 유산의 상속을 포기했습니다.

 

교회에 안치된 “악마의 하수인” 스피노자의 시신은 도난당했고, 스피노자의 유골은 지금도 행방불명입니다.

장례는 2월 25일 빈 관으로 치러졌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 여관 주인은 스피노자의 책상을 포장

하다가 이런 글을 발견했습니다.

 

내 책상을 출판사로 보내라.

포장에는 어떤 내용도 적지 말 것이며,

세관에 신고하지도 말라.

스피노자의 책상 속에는 그의 원고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남의 눈에 발견되면 <에티카>는 그의 시신과 같은

운명에 처할 판이었습니다.

결국 암스테르담의 출판사로 보내진 책상은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스피노자의 친구들이 남몰래 어떤 작전을 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에티카> 출간이 여관 주인으로부터 시작해 출판 당일까지 비밀 군사 작전처럼 치러졌음은 확실해 보입니다.

 

얼마 후, <에티카>라는 이름의 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익명으로 출판되었지만 사람들은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저자를 알아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라틴어 문장을 이 정도 수준으로 구사할 사람은 스피노자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에티카>는 충격의 정도만큼이나 빠르게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에티카>가 음지에서 유통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스피노자는 묻습니다.

“선악이 실존하기는 하는가?

선악은 없다.

선악은 상대적이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어쩐지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도덕”은 원래 없으며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 목적이란 것도 없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어머니가 임신해서 태어날 뿐이며 인간의 삶에는 숭고한 선험적인 목적이 없고, 애초에 그런

생명체도, 인간에게 사명이라는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효도, 애국, 헌신, 봉사 따위를 위해 태어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자손을 많이 퍼트리기 위해서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면, 인간은 단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놀랍게도 이게 인간 존재론의 전부입니다.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해주는 요소는 쿠피디타스,

욕구입니다. 욕구란 따지고 보면 스스로를 인지하는

능력으로, 단지 배고파서 먹이를, 발정이 나서 이성의

육체를 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욕망을 가진 스스로를 인지함으로 “나는 어떠한 사람이다”, “나는 어떤 음식을 좋아한다.”, “나의 이상형은 말하자면 이런 사람이다.”와 같은 욕구를 감지합니다. 물론 이는 높은 지능 즉, 이성 덕입니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인 이유는 만물의 영장이어서도 아니고 신이 로고스를 빌려주어서도 아닙니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새가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 나는 능력을 발휘하듯,

인간도 이성을 가지고 태어나 사고합니다.

물론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많은 일을 해냅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은 “따지고 보면 운 좋은 동물”

입니다.

최근 들어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추상의 능력, 언어 능력, 스스로를 인지하는 능력 등은 모두 생물할적 뇌의 작용으로 설명이 가능해졌습니다.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해당 능력들이 발견되는 중인데

똑똑함으로 유명한 까마귀가 한 예입니다.

 

결국은 스피노자가 맞았습니다.

인간은 한 번 살고 죽으며, 최대한 행복을 추구하면 그만이라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윤리라기보다는 윤리가

사라진 폐허 같습니다. 이 토대에서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기가 막힌 결론이 도출됩니다.

“자유로운 시민”은 국가의 목적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이제 스피노자는 현대 국가관의 완성자이자 근대 서양 시민윤리의 근거가 됐습니다.

시간이 흘러 18세기부터는 고급 지식인이라면 스피노자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칭송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스피노자의 후예들이 근대의 법철학과 국가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더라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백성이 아닌 국민의 개념을 바로잡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자, 국민국가의 일원인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 규정할 철학적 토대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이때 스피노자가 소환되어 현대적 시민의 개념이 정립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 국가란 무엇이며, 대체 개인에게 윤리란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스피노자는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조화, 균형, 관용이라고 정리했습니다.

내가 행인을 강도질하는 게 가능한 정글 같은 사회에서는 나 역시 살해당할 수 있습니다. 살인강도가 가능한

사회보다는 법적으로 금지된 사회에 사는 편이 결과적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권리와 책임, 의무의 균형 상태를 추구했습니다. 한 시민이 어떤 옷을 입을지 결정할 자유는 누릴 수 있어도,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을 자유까지는 좀 과할 것입니다. 그는 노출증을 참는 대가로 타인에게 위해를 받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얻습니다.

국가란 모든 개인이 평화롭게 최대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필요할 때만 간섭하는 조정자여야 합니다.

 

프랑스어로 “똘레랑스”라 불리는 관용의 개념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최초로 등장합니다.

 

너의 신체와 삶에 직접적이고 심대한 피해가 없다면

남이 뭘 하든 참아라.

정부의 진정한 목적은 시민의 자유다.

 

에티카는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객관적이고

보편적 근거로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에티카의 결론은 “시민 사회”입니다.

개인들이 되도록 좀 더 자유롭고 보다 덜 불편하기 위해 사회계약을 맺은 상태가 그가 생각하는 국가입니다.

이는 특정 국가가 아닌 시민 사회로, 이기적인 개인들이 적당히 타협한 상태를 말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자유가 억압되어 사람들이 울타리 안에 갇히고

권력의 허락 없이 움직일 수 없는 사회에 이르르면

국가에 대한 충성과 믿음은 파괴될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공전불후의 명언을 일갈합니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교과서는 이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으로 기술하는데, 그가 말한 사회적 동물은 사실 정치적 동물입니다.

그리스 시민 계층에게 사회생활이란 곧 정치활동이었고

현대의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란 표현을 이해하는 방식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태동했습니다.

인간은 일정한 룰이 있는 사회에서 보다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간은 자유롭고 행복해야 하므로, 사회성을 적절히 활용해 국가를 꾸리는 편이 좋습니다.

여기서 국가는 철저한 도구입니다.

 

개인들이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하기만 하면 헐벗고 굶어죽는 사람은 어쩌면 좋을까요?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도 자유입니다.

스피노자는 복지국가를 꿈꾸었지만, <복지론>은 집필을 마치지 못하고 사망해 미완성 유고로 남았습니다.

스피노자는 마르크스의 선조로, 그의 별명 중 하나는

“유물론자들의 모세”였습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권력은 시민이 권력자들에게 임대한 시민의 재산이었습니다.

권력자는 본질적으로 세입자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투명해야 시민 사회가 감시하고 조정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최초로 언론의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우주를 관통하는 보편적 선이 사라진 자리에는 공공선과 공익이 남도, 악 대신 부정과 기회주의가 남습니다.

국가도 사회도 윤리도 모두 거래일 뿐입니다.

개인적 범죄도 공적인 부정부패도 모두 부당 거래의

차원에서 제지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욕망에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습니다.

외려 타인의 욕망을 존중함으로써 자신의 그것도 인정받는 거래가 필요합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으로 보면 충무공도 자기만족을 위해

나라를 지킨 게 아닐까요?

맞습니다.

충무공은 무인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이 지킨 백성에게 존경받으려는 욕구를 위해 구국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다만 그것은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이의

쿠피디타스와 비교할 수 없는 드높은 차원의 쿠피디타스로,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공공선”입니다.

그는 우주적 진리가 아닌 선조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켰는데, 이것이 스피노자의 “유물론”입니다.

 

스피노자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사실 스피노자는 이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명언이라는 것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잘못된 전설입니다.

전설은 1966년 경향신문의 단평란에 사과나무 명언이 스피노자의 것이라는 내용이 실리면서 시작되었는데,

5년 후 1971년 중앙일보의 사설에서 스피노자의 명언이라며 같은 문장을 소개함으로 한국에서만 기정사실화되었습니다.

 

서구에서 이 문장은 종교 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가

남긴 것으로 통합니다.

실제로 마틴 루터가 살았던 장소 두 곳에 이 문구가 기념으로 새겨져 있지만 이것 역시 전설일 뿐입니다.

마틴 루터가 청소년기에 쓴 일기장에 이 멋진 문장을

썼다는 게 전설의 내용이지만, 그런 일기장은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사과나무 격언은 2차대전 시기 나치즘에 항거하던 독일의 목회자들이 “비록 내일 탄압받아 죽을지라도 오늘은 신의 뜻에 따라 살자”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들 역시 별다른 근거는 없었습니다.

그저 무작정 마틴 루터가 남긴 격언으로 알고 있었는데

암담한 현실과 루터에 대한 존경심이 결합해 탄생한

전설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루하루 행복을 추구해야 하건만, 자아실현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하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성공과 실패는 대부분의 경우 개인이 어찌할 수가 없는 문제지만, 스피노자는 이때 인간에게 한 줄기 빛이 되는 것이 바로 “지식과 진리”라고 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꼭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삶도

존중받아야 하는 삶의 형태라고 말했는데, 다만 진리를 추구하면 행복에 도움이 된다는 취지였습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삶은 한 번 뿐이며, 죽으면 영혼이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고 그걸로 끝이라고 보았습니다.

스피노자는 삶 자체를 향유하라고 보았습니다.

지금 즐겁다면 만족하고,

불편하면 다른 걸 하면 된다.

철학을 하는 목적도 어디까지나 삶을 위해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사는 법을 연습하는 것이다.

 

만약 세상이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고, 그 과정이 불공정하다면 우리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정치를 해야 합니다. 길거리에 나서서 투표를 하고 권력에 삿대질을 해야 하는데, 국가란 곧 국민과도 같습니다.

스피노자의 개인은 고독한 개인, 이기적 개인을 거쳐

마침내 윤리적 개인으로 완성됩니다.

윤리적 개인은 시민입니다.

윤리적 개인은 선량하고 숭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추악하면서도 얼마든지 '에티카'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동료 시민에 대한 최소한의 염치가 있으면 됩니다. 즉 근대적 시민 사회란 동정심 대신

존중, 사랑 대신 예의로 이루어지는 사회인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쓴 <에티카>가 윤리학의 최종 보스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만하거나 과시적인 인물이 아니었던 만큼이나

특별히 겸손할 필요도 못 느꼈습니다.

<에티카>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내가 인도한 이 길은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발견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매우 어렵고 보기 드물게 발견되는 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발견할 수 있고

어렵지도 희소하지도 않은 길이라면 누가 일부러

힘을 들여 이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