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심리/심리학

억스 2021. 10. 19. 16:30

[출처] https://blog.naver.com/nickykim156423/222537344814

 

“오징어 게임” 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욕망과 본성

사람은 평생 돈, 명예, 권력, 사랑, 행복을 좇으며 욕망에 매달리지만, 욕망은 절대로 충족되지 않습니다. ...

blog.naver.com



사람은 평생 돈, 명예, 권력, 사랑, 행복을 좇으며 욕망에 매달리지만, 욕망은 절대로 충족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더 큰 욕망이 우리를 유혹하며, 죽을 때까지 이런 과정이 반복됩니다.

과연 사람들에게 있어 욕망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행복을 위해 우리는 욕망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이와 관련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오랜기간 전문가들과

철학자들은 “인간의 욕망, 나르시시즘, 사랑, 자아, 무의식” 등 개별적인 인간의 심리가 사회적인 현상과 결부돼 어떻게 집단 심리나 사회병리적 현상을 유발하는지를

연구해 왔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어려움이나 마음의 앙금들은 결국 우리의

욕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힘든 일이 계속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과연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생겨나고 또 어떻게 작용하고 있을까요?

Netflix "오징어 게임" 공간, 그림, 책에 숨겨진 욕망의 비밀squid game review

문의및제안 josubintv@naver.com#프로이트 #자캉 #에셔

youtu.be

 

 

인간의 욕망을 다룬 작품 중 하나로 최근 화제작

“오징어게임”을 들 수 있습니다.

456억의 상금이라는 휘황찬란한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오징어 게임” 속 일그러진 군상들의 면면은 때로는 극악무도하고 때로는 더없이 인간적이기도 합니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내내 불편한 진실 앞에서 때로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때로는 측은지심의 심정이 들기도 하지만, 극중 설정은 어느새 몰입을 가져다줍니다.

이 드라마가 설계한 게임의 법칙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우리 사회를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오징어게임 6화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른 참가자들이 약자들을 버릴때 유일하게 자신과 같은 팀이 되어줬던 주인공 기훈.

그나마 이타적이고 가장 순수함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던 그가 할아버지를 속이고 결국 우승하지만, 사실상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던 할아버지의

생각이 옳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항상 얻을 수는 없지만, 실제로 원하는 것과 성취하는 것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를 자주 괴롭히는 바로 그 욕망은 자신을 살아있게 합니다.

항상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지만, 욕망과 만족 사이에는 때로는 무한한 거리가 있으며 또한, 우리의 마음은

좋든 나쁘든 현실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힘은 제한되어 있고 그만큼 기대도

깨지기 쉽습니다.

학계 처음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시도한 심리학자 “에이브러엄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의 욕망을 <생물학적 욕구(Physiological) 그 위로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

그 다음은 사회적 욕구(social), 자긍심에 대한 욕구(Esteem) 그리고 마지막 가장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Self-Actualisation)> 이 다섯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최상의 욕구인 자아 실현을 바로 하려면 나머지 4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발전할 수 있다고 매슬로우는 말하고 있는데, 나이가 들어도 타인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고 싶은 욕망은 기초적인 4단계를 올바르게 발전시키지

못한 미성숙한 인간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양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으로 고통 받는다며, 욕망 그 자체를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했던 반면, 원효스님은 고통의 근원인 끝없는 인간의

욕망을 정화하면 상락아정에 이를 수 있다고 봤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에서 절반을 배우고 인도에서 전부를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인도철학과 불교를 높이 평가했던 인물입니다.

특히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삶이 고통이라는 인식 등에서 불교와 유사한데, 이는 인간을 이성보다 욕망의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을 욕망의 존재라고 봤습니다. 쇼펜하우어 이전의 서양철학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보았기에 인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를 “이성”

으로 여겼습니다.

쇼펜하우어와 원효스님 모두, 인간이 충족되지 않는

욕망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 해결 방식은

사뭇 다릅니다.

쇼펜하우어는 욕망 그 자체를 악하다고 여겨 고행을

강조했지만, 원효스님은 욕망을 정화하면 깨달음에

이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원효스님은 누구나 불성이 있고 청정하기에, 자기보존의 욕망을 넘어 항상 편안한 상태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추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경우,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이 자기

보존 욕망과 종족보존 욕망이라고 했지만, 원효스님은

사실 그런 욕망보다도 인간에게는 훨씬 더 근본적인

욕망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실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기 보존이나 종족

보존이 아니라 상락아정의 상태를 누구나가 희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며 고독도 능력이라고 말했던 “쇼펜하우어”(Schopenhauer) 이야기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선천적으로 공포심과 의심이 많았고, 자...

m.blog.naver.com


 


몇몇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 사회를 가치관이 병든 “정신병적인 사회”로 규정하면서 사회적인 갈등과 폭력, 우울증, 자살 등 사회병리적인 현상을 치유할 방법을 자아성찰과 사회 병리적 구조의 개조에서 찾고 있습니다.

욕망이 반영된 것으로 사회병리 현상을 들 수 있는데,

해결책을 위해 전문가들은 욕망의 중요성, 욕망 때문에 겪는 고통, 폭력과 같은 타자와의 갈등, 이념 대립 같은 집단 심리, 이런 사회심리현상을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연구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며,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사는데 욕망이 억압되면 고통을 겪고 다양한 병리적 증상을 표출합니다.

이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이 중요한데, 예컨대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타고난 폭력성향이 있다고 하거나 사회 부조리의 희생물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면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물질만능주의나

경쟁적 풍토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바라봐야 합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욕구를 모두 표출하며 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억압하거나 변형시켜야 할 부분이 반드시 생겨나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내면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잘 조절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거나 폭력적 형태로 감정을 표출

하게 됩니다.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욕망, 나르시시즘,

무의식을 잘 이해하고 조절하며, 사회 환경이나 사랑과 미움 같은 타인과의 감정적인 교류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욕망은 한 마디로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욕망하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연을 정복하며 문명을 꽃피우면서 삶을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욕망은 인간에게 발전과 풍요를 가져다 주었지만,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는 삶은 중요합니다.

욕구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과 같은 생물학적이고

본능적으로 필요한 것에 대한 바람, 즉 이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생성됩니다.

하지만 욕망은 욕구와 달리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과 평가를 받는 것이 욕망에서는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애인으로 삼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남자의 심리를 분석해보면, 그 남자는 그 여자 자체를 좋아할 수도 있지만 사실 자신이 예쁜 여자와 함께 한다는 것을 남이 인정해주길 바라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욕망은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자기 욕망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해도 행복감이 오래 지속하지 않는 것은 성공에

대한 욕망이 자기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또다시 새로운 욕망이 생기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영원한 불만의 상태로 남게 됩니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서 시작되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타인을 많이 의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나의 직업이나 재력이 어떻게 판단될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타자의 욕망에 너무 매달리다 보니 우리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부여하는 욕망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기소외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욕망은 실현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집니다.

하지만 욕망의 억압이나 잘못된 욕망이 문제입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것을 “증상”으로 설명하는데, 내부의 갈등은 억압하고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부에 갈등이 있으면 신경증이나 불안증 등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욕망의 사회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자기자신을 잘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만의 것을 찾기보다 사회가 부여한 기준을

좇아가는 경향이 큰데, 예를 들어 요리에 소질이 있으면 요리사가 되면 되지만 그러지 못하고 대학을 가서 법학이나 경영학 등 전혀 다른 공부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다니는 것입니다.

 

 

결국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기에 공부해야 합니다.

정체성을 찾고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알기 위해서는

자기성찰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공자는 논어에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롭다"(子曰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고 말했습니다.

배우면서 계속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인데,

오늘날 생각한다는 것은 성찰과 소통을 뜻한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은 제대로 된 배움과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나의 지식이 잘못돼 있다면 독(毒)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성찰과 소통의 방법을 배우는 곳이 바로 대학이어야 하는데, 오늘날 대학은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을 육성하기 위해 “스펙”을 쌓는 곳이 돼버려 아쉽습니다.

또 한가지 우려하는 점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문학을 교양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인문학의 주된 목적은 교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자극을 주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욕망을 좇다 보면 정신적으로 궁핍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자기를 실현하려면 욕망이 있어야 하고, 물질적인 것도 필요하며 남들로부터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욕망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나를 돌아보기 전에 무턱대고 사회가 이상화하는 욕망을 좇다 보면 잘못된 욕망을 추구할 수 있고, 소외될 위험이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욕망이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른 채 욕망을 채우려고만 하지만 돈,

권력, 사회적인 성공, 남들의 인정과 사랑으로는 결코

근원적으로 결여된 공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욕망은 결국 자기 존재를 찾고자 하는 몸부림인데 그것을 모른 채 자꾸 다른 것으로 채우면 아무리 쌓아도 만족할 수 없을 뿐더러 정신적으로 황폐해집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절망하고 우울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개인에게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있듯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들은 지금 우리 사회를 두고 상당히 정신병적인 사회라고 경고합니다. 정신병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정신병적인 구조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묻지마” 폭행이나 살인이 일어나는 본질적인 이유는 타인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입니다.

임상적으로 보면 정신병이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정신병은 자아 내부에서 분열이 없어서 갈등도 없고

자신의 망상으로 외부 현실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심리 구조입니다.

정신병적인 사회는 자기중심성이 너무 커지고 나를 중심으로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심리가 일상화된 사회를

말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누구나 범죄를 쉽게 저지르고, 사회병리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 대한 가치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효율, 성과, 생산력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이 다치거나 죽거나 소외되는 문제는 심각

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도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살률이 높고 범죄가 증가하고 우울증 같은 병리 현상도 증가하기에 당연히 행복지수와 만족도도 낮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장을 위해 달리기 전에 먼저 경제 성장이 왜 필요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인간에 대한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정신병적인 한국 사회는 당장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1980~1990년대 오로지 성장 위주로 달려오며

성찰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많은 사회적 부조리와 병폐는 성장주의가 낳은 폐단이자 후유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문제들이 불거지는 것은 우리가 돌아볼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나라가 경제 규모나 부의 측면에서는 선진국을 따라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많이 지체돼 있다는 것입니다.

덩치는 커졌는데 정신이나 내면은 성장하지 않은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이제는 자기 물음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회불안장애의 6가지 신호 [심리, 정신건강]

사회불안장애는 불안장애에 속하며 사회적 상황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이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수줍음과 사회불안장애가 어떤 특징들이 다른 지 알고 계시나요? 사회불안장애를 단순한 수줍음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본 영상에서는 사회불안장애의 6가지 특징에 대해 다뤄보려고 합...

youtu.be

우리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내면이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는 남들이 어떻게 볼까 상상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인데, 남을 너무 의식하다 보면 마치 남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으로 내 모습이

과잉되게 부풀어지면서 여기에 온통 집착하게 됩니다.

이것을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고 합니다.

물론 나르시시즘이 있으니까 자신에 대한 애착도 생기고 자기실현의 욕망도 생기는데, 이것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이 가운데 “연기성 성격장애”라는 것이 있는데, 자기를 영화나 연극의 주인공처럼 생각하면서 오로지 남들이

어떻게 볼까만 마음을 쓰는 사람을 말합니다.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고 때로는 관심을 끌기 위해 자기감정이나 욕망을 숨기면서까지 과잉

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릿이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요즘 아이돌이 되고 싶어 하는 청소년이 많습니다.

그들이 연예인이 되는 것에 소질이 있으면 모르지만

대부분은 연예인에 대한 동경 의식이 부풀려진 자아를 만들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즉, 잘못된 나르시시즘이 만들어내는 병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는 욕망을 상품화하고 대량 유포하는 매스미디어의 영향이 상당합니다.

하지만 욕망이나 나르시시즘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

없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지 않게 자신의 욕망이나 나르시시즘을 적절히 조절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 사회에서는 철학, 예술, 체육을 통해 시민들을

교육했습니다.

현대인들도 그릇된 욕망이나 과잉된 나르시시즘이

사회를 지배하지 않도록 이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 “라캉

(Lacan)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실은 우리 자신의 자아"라고 했는데, 사랑 자체가 나르시시즘은 아니지만 그 중심에는 나르시시즘이 내재해 있습니다.

이는 사랑할 때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투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만들려고 하거나, 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식을 키우려고 한다거나, 혹은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의 생각이나

기호, 행동이 서로 같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그것

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차이를 극복하고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사랑의 본질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과 타자의 발견이 사랑의 진정한 기능입니다.

사랑할수록 나르시시즘으로 빠지라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의 존재를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차이를 극복하려는 순간 폭력이나 억압이 되기 쉽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타자를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요즘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자아실현을 통한 행복을 실현하고 싶은 이들이

많은데, 사실 자아실현은 자기계발과는 전혀 다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동일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자아실현을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고 계발해 사회적

으로 성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자아실현은 자기를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시민교육을 할 때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 자기 배려를 강조했습니다.

몸매를 가꾸거나 건강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영혼, 즉

내면을 돌보고 가꾸는 것 말입니다.

자신을 비판적으로 보고,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도 하고, 타인과 소통하면서 점검을 하라는 말인데, 결국

나 혼자만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사회적인 배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배려와 소통을 통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공동체적인 관계가 무너지고, 각자도생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공동체적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개인이나 가족의 불행을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입니다.

남이 아픈 것을 보고 나도 아플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가능한데, 이런 사회를 위한 출발점은 우리 스스로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지금 모습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질문을 던지지 않고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이어트, 몸짱, 얼짱, S라인, V라인, M라인, 성형,

자연미인, 식스팩, 메트로섹슈얼, 지방흡입수술, 선풍기 아줌마, 거식증, 외모지상주의, 취업성형” 등 이것들은 “외모”란 말을 생각했을 때 즉각적으로 연상되는 단어들입니디. 외모에 대한 관심과 관리가 우리 삶의 한복판을 점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어 이 말들이 사람들의 뇌와 감각에 서서히 각인되어 왔습니다.

여러 조사들에 의하면, 정상체중자 여대생의 95%가

몸매를 관리할 의향을 나타냈고, 여성뿐 아니라 성인

남성의 21%가 외모 때문에 체중을 조절했다고 하며,

저체중여성 넷 중 한명은 자신이 뚱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참 잘 먹어야 할 청소년들도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시도하여 “생리불순, 골다공증, 성장부진, 위장병, 빈혈”

등의 부작용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부 성인들은 몸매를 비관하여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다이어트 때 여성 2%는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합니다.

“외모가 좋은 사람이 성공한다”는 연구가 심심치 않게 미디어에 보도되고, “외모가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좁은 취업문턱을 넘기 위해 취업준비자들이 성형으로

인상을 개선하려는 “취업성형”이 유행되고 있는데, 어느 조사에 의하면 한국여성의 53%가 성형을 받고 싶어

하고, 성형외과 고객의 1/3이 남성이라고 합니다.

성형수술을 받는 어떤 이들은 선풍기 아줌마처럼 성형 중독에 걸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기도 하고,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 중에는 거식증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거식증환자가 수만 명에 달하고, 그 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상체중의 사람도 체중강박증에 시달리게 되는 외모강박시대, 외모불안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멋지고 개성있게 보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말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외모를 중시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TV등 대중매체의 이미지 중시 현상, 이상적인 몸매를 기준으로 낙인찍으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뷰티산업이 외모불안조장의 주범이라고 비판합니다.

이들은 여성의 외모욕망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욕망임을 지적하며, 여성들에게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그런 외모욕망에서 자유롭기 힘들다고 실토하는데, 미인 이미지와 자아 이미지를 이미 무의식 깊숙이 내재화 한 여성들에게 “그것은 타자의 욕망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고 해도 그 여성들의 욕망은 변하기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정신분석가 라캉의 말처럼,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고, 자아는 원래 타자의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환상, 즉, 타자에 의해 매개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며, 증상은 고통임과 동시에 향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외모문화는 가부장적 젠더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자본주의, 계급, 대중매체, 시각문화, 서구 이미지의 식민화, 유교적 출세주의, 집단획일주의, 인간 주체의

구조, 욕망, 향유 등의 요소가 중층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외모욕망은 종종 한두 가지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생각해 본다면 우선 외모욕망을 갖는 사람, 즉 그 주체는 무엇이며 그 내부의 욕망 메커니즘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에 의하면, 주체는 기표(signifier)의 생산물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 아빠, 의사, 간호사” 등은 “아이가 건강하다, 잘 생겼다” 등등 아이에

대해 기표를 말하고 이렇게 아이는 기표들의 세계인

상징계로 들어갑니다.

엄마와 아이가 울음소리, 제스처, 말 등의 기표로 소통하는 동안, 기표가 본질적으로 몸의 욕구 자체를 직접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기표화되지 않는 비(非)의미가 발생하는데 이것을 “소외”라고 합니다.

소외는 분열을 낳고, 분열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욕망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는 욕망하는 분열된 주체인 것입니다.

분열된 주체가 자신에 대해 통일감을 느끼는 것은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라캉에 따르면, 자아는 보통 생후 6-18개월 거울단계에서부터 생깁니다. 아이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거울에 비친 자기의 이미지도 움직이는 것을 보며 매우 즐거워합니다. 아직 몸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아이도 자기 몸의 움직임과 거울에 비친 이미지의 움직임

사이의 일치를 보며 자신의 통일성을 느끼며 즐거워합니다. 이처럼 아이가 거울에 비친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라캉은 “상상적 동일시”라 불렀습니다.

상상적 동일시와 여기서 느끼는 쾌감이 자아 형성의

기초가 됩니다.

이처럼 자아는 생래적인 실체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소외된 이미지를 자기로 착각함으로써 구성됩니다.

거울은 물질적인 거울일 수도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아이의 이미지를 비추는 거울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

입니다.

타자는 그에게 “잘 생겼다” “너무 먹어 뚱뚱하네” 등의 기표를 발하고, 이 기표의 재현은 그에 대한 담론이 되고, 아이는 이 담론을 내면화, 동일시 함으로써 자아를 구성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발해지는 기표연쇄를 “대타자”(the Other)라 부릅니다. 주체가 대타자와 동일시하는 것을 “상징적 동일시”라 부르는데, 이는 거울 이미지와의

상상적 동일시와 더불어 자아를 구성합니다.

엄마 뿐 아니라 주체에게 기표를 발하는 대중매체, 학교 교육, 광고, 문화이데올로기 등은 모두 대타자이며, 이들은 상징적 동일시의 과정을 통해 자아를 구성합니다.

상징적 동일시는 상상적 동일시가 일어나는 바탕인 매트릭스입니다. 예를 들어, 한 소녀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날씬한 몸매를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다고 합시다. 그 소녀(자아)에게 있어 날씬한 몸매는 바람직한

외모여서 자신의 날씬한 몸매를 보며 만족해하는데,

이것은 “상상적 동일시”입니다.

그런데 소녀가 날씬한 몸매를 바람직한 외모로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그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그의

사랑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 아빠/엄마 혹은 여기서

더 나아가, 소녀가 선망하여 그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는 학교 선생님, 대중매체 등 이 여자의 날씬한 몸매를 바람직한 외모로 직간접으로 제시했기 때문

입니다.

“아빠/엄마”와의 동일시는 “아빠/엄마”라는 대타자와의 동일시, 즉, 상징적 동일시를 말합니다.

소녀가 날씬한 몸매의 자신의 이미지를 보며 만족해하는 것은 아빠/엄마와의 상징적 동일시를 전제로 합니다.

아빠/엄마가 “자아 이상”(ego-ideal)이라면, 자아

이상의 매트릭스를 배경으로 소녀가 자신의 바람직한

이미지라고 믿는 날씬한 몸매는 “이상자아”(ideal-ego)입니다.

이상자아는 주체가 상징적 동일시를 하는 대타자가 제공하는 이미지와 상상적 동일시를 함으로써 형성되고,

이상자아는 자아를 이끌어 가는 바람직한 자아의 모습

으로 주체의 무의식에 깊게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멋지거나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모습

(이상 자아)을 자신에게서 발견할 때 만족감을 느끼는데, 이것이 “자아감”입니다.

그러나 자아는 주체의 참된 본질이 아니라 주변 대타자의 담론과의 동일시, 즉, 허상적 관계에 의해 형성된

구성물입니다.

하지만 자아가 실체가 아니라 허상이라 할지라도, 자아는 주체의 삶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이상적 자아에 못 미치는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할 때, 예를 들면 날씬한 몸매가 이상자아인데 현실의 몸은 뚱뚱할 때, 우리의 자아감은 상처를 받습니다.

다시말해, 이상자아와 현실의 주체 사이의 분열이 심리적 고통을 낳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날씬한 몸매라는 이상자아에 자신을 맞춰 몸을 날씬하게 하거나, 이상자아를 날씬한 몸매가 아니라 뚱뚱한 몸매로 바꾸어,

뚱뚱한 몸매를 보면서 만족감을 얻어야 합니다.

날씬한 몸매의 이상자아를 가졌지만 현실에서는 몸이

뚱뚱한 사람이 지속적인 다이어트를 통해 날씬함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자신의 이상자아를 뚱뚱한 몸매의 이미지로 완전히

바꾸는 것은 자아의 무의식 구성을 급진적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 또한 매우 어렵습니다.

날씬한 몸매를 이상자아로 여기고 그에 따라 몸을 만드는 것은 가부장제의 욕망에 종속된 것이며 타자의 욕망일 뿐이라고 여성주의자들이 지적해도 많은 여성들이

그런 욕망에서 자유롭기 힘든 것입니다.

합리적 비판을 통해 자신의 이상 자아와 현실 자아를

일치시켜 행복을 찾으면 될 텐데, 왜 그것이 그렇게 힘든것일까요?

여기엔 단순히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과 향유의 문제가 깊이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생물학적 욕구와 달리 아이가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형성된 것이기에 대타자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우리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하거나 일류대학이나 일류

기업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갖는 것은 많은 타자들이, 상징계의 대타자의 담론들이, 그것을 욕망하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재현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의 가치는 그 자체로 사용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타자가 그것에 대한 욕망을 갖기 때문이며, 그것의 향유의 가치는 그것을 욕망하지만 향유하지 못하는 타자들 때문에 존재합니다.

가치는 “사용가치”(use value)라기보다는 “향유가치”(jouissance value)입니다.

모두가 S라인 몸매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S라인에

대한 욕망은 강하지 않을 것입니다.

S라인 몸매가 바람직한 것으로 재현되지만 그것을 가지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몸매를 가진 소수의 주체는 향유를 느끼는 것이며, 그 향유가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S라인 몸매를 갖기를 욕망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강한 이상자아를 가진 경우, 여기에는 그럴 듯한 자기 이미지와의 동일시(상상계), 그 이미지를 바람직한 것으로 만드는 매트릭스인 대타자(상징계)와의 동일시, 이상자아와 자신의 동일시에서 오는 향유(실재계)가

중층적으로 작동합니다.

이상자아와 현실의 자아 간의 불일치로 고통을 겪는

주체가 있다면, 비판담론을 통한 이상자아의 해체는

매우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 친구, 선생님, TV, 그림, 동화책, 광고, 영화, 인터넷” 등등을 통해, “날씬한 몸이

예쁘다”라는 기표를 끊임없이 들었다면, 날씬한 몸매의 이상자아를 형성하고 그것에 대한 강력한 환상을 갖기 쉬운데, 실제의 몸이 뚱뚱하다면, 자아는 상당한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날씬한 몸매의 이상자아가 대중 매체 등의 담론에 의해 상징계의 수준에서만 형성되었다면, 이 담론에 대한

강한 비판은 그런 이상자아를 해체하고 새롭게 바꿀 수도 있지만, 이상자아에 상상계, 실재계의 차원이 모두

작용하는 강력한 환상이 있다면, 사태는 매우 복잡해

집니다. 날씬한 몸매의 이상자아가 초자아로 작용하며, 뚱뚱한 주체를 처벌, 예를 들면, 음식섭취를 거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아와 이상자아와의 관계가 모든 주체에게 동일한 종류와 강도의 관계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주체A와 주체B가 같은 한국사회의 일원이라도, 주체A에겐 날씬한 몸매가 이상자아의 주요 요소이지만 주체B에겐 뛰어난 지성이 이상자아의 핵심을 구성할 수 있습다.

외모문화가 외모획일주의, 외모차별주의로 되지 않으려면, 이러한 이상자아의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또한 주체A와 주체C의 이상자아에 날씬한 몸매가 주요 요소라 하더라도 주체A에겐 날씬한 몸매를 이상자아로 하는 것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모두가 작동하는 강력한 것일 수 있지만, 주체C에겐 실재계의 향유가 약하게 작동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몸매 만들기 중독에 걸릴 가능성이 적은

반면, 전자에게는 매우 큽니다.

특정한 이상자아와 현실자아와의 관계에 이러한 종류와 강도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각 주체의 개인적 삶의 역사의 차이 때문입니다.

 

 

대타자, 자아, 향유의 문제가 외모욕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외모욕망은 다른 욕망들처럼 “대타자의 욕망”

임과 동시에 환유와 은유의 메커니즘을 통해 구성됩니다. 환유는 주체의 마음에서 하나의 기표가 인접관계에 의해 다른 기표로 연상, 대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소녀가 날씬한 몸매에 대한 선망을 갖는데, 그 이유가 어려서 매우 사랑했던 이모의 두드러진

특성이 날씬한 몸매였다면, 날씬한 몸매에 대한 그녀의 현재의 욕망은 그녀의 욕망 대상이 이모에서 이모의 한 특성인 날씬한 몸매로 환유적으로 운동한 결과입니다.

은유는 하나의 기표가 다른 하나의 기표를 대체하는데, 특히, 하나의 기표가 복수의 기표를 대체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성공하길 열망하는 소녀가 아이돌A를 우상시하는데 그의 두드러진 특성은 날씬한 몸매이고, 그녀가 매일 수 시간 씩 보는 TV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날씬하며 뚱뚱한 사람들은 낙오자라고 제시되는 경우, 그녀에게 날씬한 몸매의 기표는 그녀가 열망하는 아이돌A와 성공의 기표 양자를 대체하는 은유가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지금의 외모욕망은 개별 주체들에게 사회의 복수의

상징코드들이 은유적으로 중층작용하여 발생합니다.

대중매체의 담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외모욕망에

많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외에도 우리 문화에서는 전통적인 시각문화인 관상문화, 외모에서도 경쟁과 서열화를 만드는 자본주의 문화, 남녀평등과 성해방으로 인해 얼굴 뿐 아니라 몸의 섹시함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섹시코드, 지금도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지만 눈에 크게 드러나지 않아 문화적 무의식이라 볼 수 있는, 성공을 부추기는 유교적 출세주의, 오똑한 코 등 서구의 미적기준의 식민화, 가족관계나

친구 관계는 물론 학교 등의 집단에서 개인의 독특함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한 집단획일주의 등이 외모욕망에

중층적으로 작용합니다.

외모욕망은 하나의 단순한 현상처럼 보이지만 이는

다층적 담론 코드가 작용하는 은유의 현상입니다.

외모욕망에 다층적인 대타자 담론이 작용하지만, 그것은 개별 주체가 대타자 담론에 의해 형성된 외모 이미지를 이상자아로 내면화/동일시할 때 일어납니다.

여기에 동반되는 향유의 강도 차이에 따라 두 가지 양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체가 담론의 재현을 이상자아로 받아들이지만, 내면화와 동일시에 리비도가 많이 투자되지 않아, 이상자아에 대한 강한 향유가 없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 주체가 몸만들기에 적극 참여하고, 바람직한 자기 몸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의 기쁨을 얻지만,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전신성형수술을 받거나, 성형 중독에 걸리거나, 거식증 같은 섭식장애를 일으킬 만큼 몸만들기에 집착하진 않습니다.

이들은 몸만들기에 열중하기도 하지만, 몸만들기에서

자기보존의 자아욕망을 해치는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나거나, 몸만들기가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동반하여, 이상자아에 자기를 맞추는 데서 오는 기쁨보다 고통이 더

크면, 몸만들기를 멈추게 됩니다.

다이어트에서 흔히 보는 요요현상은 이들에게 많이 발견됩니다. 또한 이들은 몸 담론이 형성한 이상자아에 대한 리비도 투자가 많지 않아, 외모지상주의 비판 등 반대담론을 많이 접하면, 몸만들기로부터 거리 두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합니다.

외모 담론에 의한 이상자아를 형성하는 다른 양태는

주체가 이상자아에 대한 강한 환상과 그 환상에서 향유를 크게 느낄 때 일어나는데 여기에 다시 두 양태가

있습니다.

첫째는 외모이상과 현실의 자아 사이에 고통이나 증상을 동반하는 불일치가 없고, 외모이상에 따라 자기 몸을

만드는 행위에서 주체가 나르시스적 환상과 기쁨을 향유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는 대타자와 주체가 행복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외모 만들기에 집착하지만 그것이 심각한

고통이나 증상을 동반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이상적 외모의 이상자아는 주체를 지배하는 강력한 주인기표로, 이 주체는 이 주인기표에 깊이 각인되어 그것에 복종하지만 고통스럽습니다.

심각한 부작용의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형에 의존하거나, 성형 중독에 걸리거나, 거식증에 걸리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선풍기 아줌마 한혜경씨가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계속 성형수술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부작용의 위험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운 가수로 대성공한다는 이상자아에 대한 환상과 그 환상의 순간에 느끼는 향유가 위험에 대한 우려나

평소에 느끼던 결핍감, 성형에서 오는 고통을 다 가려줄 만큼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형중독은 그녀의 증상인데, 정신분석에서 잘 알려진 것처럼, 증상은 고통임과 동시에 향유입니다.

재활치료에서 그녀가 성형수술과 더불어 정신치료를

받는 것은 그녀가 이 “환상을 가로질러”, 그것이 주는

향유를 격감시키기 위함입니다.

다른 증상처럼, 향유가 격감되거나 제거되지 않는 한,

그녀의 성형의존이나 외모우상은 반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거식증자의 경우도 이에 해당합니다.

거식증자는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단식투쟁이나 패러디가 아닙니다.

같은 거식증상을 나타내더라도 거식증자들의 심리적

원인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주체(여성이든 남성이든)가 마른 몸의 기표를 이상자아로 받아들임은 물론 마른 몸의 이상자아를 구현하는 것이 초자아의 지상명령이 된 경우입니다.

거식증자가 섭취를 거부하거나 섭취한 음식을 토하면서 자신의 몸을 마르게 하는 것은 한편으로 고통스럽지만, 정신적으로는, 금욕적인 수도사처럼, 초자아의 지고한 윤리적 명령에 따라 이상적인 자아를 만들어간다는

숭고한 실천이기에 도덕적 기쁨을 동반합니다.

거식증자가 자부심이나 수도사적인 정신성을 흔히 보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의 거식은 단순히 강도가 센 다이어트가 아닙니다.

그것은 초자아와 자아의 일치에서 오는 지고한 향유의 증상이기 때문에, 거식의 치료 또한 이러한 향유의 제거 없이는 어렵습니다.

두 번째의 거식증자는 자학증적 도착자일 수 있습니다.

거식증자로서의 도착자에게 있어서 거식으로 몸을 마르게 하는 것은 자기를 대타자에게 봉헌하는 숭고하고

진지한 예식적 행위이며, 거식은 단순히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이 아니라 자학적 쾌락을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거식증을 무조건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타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거식증을 통해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하는 참된 향유를 얻는다면, 거식은 그에게 나름의 훌륭한 삶입니다.

타자에게 무엇이 절대선인지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요?

실재의 향유는 기표화될 수 없고, 주체에 고유한 것이어서, 주체 자신이 증상, 고통의 제거를 스스로 요청하지 않는 한, 타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우리는 그의

향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생로병사의 비밀 -폭식성 섭식 장애와 심리적 요인이 관계있다? 20180711

생로병사의 비밀 -폭식성 섭식 장애와 심리적 요인이 관계있다? 20180711

youtu.be

 

주체가 외모에 어떻게 관심, 무관심을 갖게 되고, 어떤 방식(다이어트, 운동, 성형, 폭식 등)으로 실천하며,

어느 양태(일반적이거나 중독이나 무관심 등)를 보이는가는 그의 개인 역사의 경험에 따라 다릅니다.

외모욕망에 영향을 미치는 다층적인 사회적 상징코드들에 대한 반응도 주체에 따라 다양합니다.

외모욕망이 이상자아와 단순히 상징담론의 수준에서만 연결될 수도 있고 환상과 향유를 동반하는 심층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기에 우리는 외모욕망이

단순하지도 단일하지도 않은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외모에 대해 단일한 기준, 단일한 가치는 없습니다.

체질적으로 뚱뚱한 편인 사람이 날씬한 몸매를 이상기준으로 삼는 대중 담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다이어트 하느라 고통이나 우울증을 겪는다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불행한 증상입니다.

대타자의 담론에 따른 자아상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자아상을 찾아야 하고, 편안한 외모자아의 발견이 어렵다면 정신분석상담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채, 성형 중독처럼, 몸 가꾸기가 병리화하여 주체 자신도 받아들이는 못하지 자기 파괴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물론 그 길만이 자신의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한다면, 누가 무슨 권리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외모욕망이 증상적, 병리적인 형태로 발전하지 않고,

건강한 외모문화로 꽃피기 위해서는 각 주체가 자기에게 편안한 기쁨을 주는 외모 자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각자가 자유롭게 자기에게 맞는 외모자아를

추구하고, 그러한 다양한 외모가 우리 사회에서 존중되어야합니다.

이제는 무지한 외모차별주의, 맹목적인 따라하기,

막연한 외모불안을 벗어나, 각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외모를 긍정하고 향유하는 외모민주주의의 시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욕망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요

확실히 자본주의 사회는 그 이전의 사회와는 크게 달라서 고대 사회, 봉건 사회와는 달리 결코 욕망을 부정하거나 억누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중의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거의 공기나 물과 같다고 해야 할 상품 광고라는 새로운 문화 형태를 만들어 우리를 어딘가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모든 욕망을 부추기고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돈이 되는 욕망만을 긍정합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대중의 욕망을 식민화해 사람들의

돈을 우려 짜내는데, 그리하여 천박한 욕망의 파도가

우리의 삶을 뒤덮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욕망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욕망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은 한마디로 부정적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욕망”이라는 말이 애초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면서 사용되는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분명 욕망은 천박한 것, 없어져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유교에서는 “욕망을 줄여라”고 하며 욕망의 제어를

가르치고, 불교는 “욕망을 끊어라!”고 하며 욕망의

제거를 가르칩니다.

일찍이 맹자는 마음 기르는 데는 욕망이 적은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말했고, 석가모니 또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털어 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평화와 정신의

자유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욕망을 인위적으로 억압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과연 욕망이 사라질까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으로 물러날 뿐

입니다. 이렇게 무의식으로 추방당한 욕망은 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는 길을 차단당한 채 점차 정신적 상처로

자리잡는데, 이것이 바로 “심리적 콤플렉스”입니다.

이 콤플렉스는 정신이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지 못하고 낮은 단계로 되돌아가는 퇴행(退行)의 일종으로서,

신경증이나 정신분열과 같은 증세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합니다.

이처럼 욕망의 억압은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욕망이라는 동력에 힘입어 행동하기 때문에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무작정 달리는 삶이 고통과 번뇌로 가득 차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단순히 이 욕망을 없애거나 줄이는 방법으로 행복이 보장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근본적인

힘은, 꿈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욕망을 억제할 것이 아니라 욕망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이를 인정하고 발산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욕망을 제어하거나 제거하라는 고전적인 가르침만으로 현대 사회의 모순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우리에게는 “돈! 돈! 돈!”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에 맞서는

“저항하는 욕망”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현대 사상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입장에서 “욕망의 철학”을 전개했습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공생과 협동의 논리를

받아들여 삶의 잣대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현대인의 사회적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이기심

으로, 욕망의 내용이나 욕망 충족의 전형적인 방식은

“오로지 나만 생각하는 배타적인 개인의 이익 추구”

입니다.

그에 따라 물질적인 부만을 배타적으로 욕망하면서

삶 전체를 그 욕망의 충족에 맡긴다면 비록 물질적인

풍요는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인간다운 삶은 말할 것도 없고 건강한 삶의 토대마저 잃어버리고 내면의 황폐함만 남게 됩니다.

그동안 현대인은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경쟁 논리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허위 욕망으로 채워진 왜곡된 욕망의 구조를 변혁하는 일입니다.

탐욕을 끝없이 부추기면서 인간 심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의 불건강한 기초를 단호하게 반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를 새로운 욕망의 체계 위에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남보다 많이 소유함으로써 남보다 앞서고자 하는 욕망의 구조를 청산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더 많이 욕망하기보다 좀더 “다르게” 욕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되찾고 싶다면, 이기심과 경쟁의 논리에 기초한 왜곡된 욕망을 멈추어야 하고,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건강한 삶의 토대를 적극적으로 욕망해야 합니다.

그것은 더 많은 물질적 부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품기보다는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한 상호 협력과 나눔 등을 지향하면서, 자유·관용·정의 등의 초월적 가치를 욕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그러한 욕망이 깊이 뿌리내리기 위한 조건으로서,

우리의 전체적인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