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청북도 내고장구석구석살펴보기

17 2022년 05월

17

내고장풍경화둘러보기/느티나무 괴산군 사리면 화산리 도촌마을(沙梨面 禾山里 도촌마을)

본래 괴산군 남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廢合)에 따라 수산리(水山里), 이곡리(梨谷里), 화영리(禾?里)의 각 일부(一部)와 북상면(北上面)의 묘마동(叩馬洞) 일부(一部)를 병합(倂合)하여 화영과 수산(水山)의 이름을 따사 화산리(禾山里)라 하여 사리면에 편입(編入)되었다. (가) 대촌 큰말(大村) :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 도람말 : 지금 회관 남쪽에 있는 마을. (나) 도촌 도촌 안동네 : 전엔 마을 전체를 통털어 도촌이라 했다. 1978년 동네 뒷동산 경사진 쪽에 사는 12가구가 마을입구 홍감사 사당터로 이주한 이후 안에 있다하여 그렇게 부름. 도촌 바깥동네 : 마을입구 홍감사 사당터로 12가구가 이주하여 사는 동네. 오룡가리(五龍洞) : 매봉째부터 다섯줄기가 내려왔다고 하여 붙여진..

17 2022년 05월

17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사리면 화산리 이범하송덕비(沙梨面 禾山里 李範夏頌德碑)

도재 이범하선생 송덕비(陶齋 李範夏先生 頌德碑)사리면 화산리 도촌마을 입구에 있는 도재이범하선생송덕비이다.마을 입구 언덕에 서있으며 비석의 전면에는 도재이범하선생송덕비(陶齋李範夏先生頌德碑)라고 음기되여 있다.비석의 건립시기는 단기 4309년(1976년)이며 건립주체는 도촌과오룡동주민일동이다.비석의 뒷면에는 공의 행적과 주민들을 위해 베푼 내용과 건립시기가 적혀있다. 이범득(李範得: 李範夏) 1906(광무 10)~1980호적에 범득(範得), 항렬에 따른 이름은 범하(範夏), 호는 도재(陶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정종대왕 열 번 째 아들 덕천군(德泉君)의 18대 손이며 생부는 건극(建極)이며 백부 건인(建仁)에게 양자갔다. 지금 괴산군 사리면 화산리 도촌에서 출생하였다. 화산리 신촌 김참봉 문하에서 ..

15 2022년 05월

15

15 2022년 05월

15

13 2022년 05월

13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화창리 인천채씨정려문(米院面 禾倉里 仁川蔡氏旌閭門)

인천채씨 효부각은 광주인 정의창(鄭儀昌)의 부인 인천채씨(仁川蔡氏)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효부각으로 1724년(경종4)에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896년(건양 1)에 중수하고 1983년에 보수한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면을 낮은 벽으로 쌓아 홍살로 막고 안에는 효부문 편액을 걸었다. 효부각안에 걸려있는 정려문에는 정려를 받은 시기가 숭정재기유(崇禎再己酉 )라 표시되여 있다.崇禎再己酉라 함은 1729년(영조5)임으로 표시되여 있는데 효부각을 안내하는 안내판에는 1724년(경종4)로 표시되여 있다.둘중에 하나는 바로 잡아야 할것 같다. 본문에 인용한것은 안내판에 의거한것임을 밝힌다.

12 2022년 05월

12

11 2022년 05월

11

통합청주시/흥덕구(興德區) 신전동 우후사(薪田洞 虞候祠)

청주시 흥덕구 신전동에 있는 경주김씨의 사당인 우후사입니다. 근간에 세워진 사당으로 경주김씨판도판서공파(慶州金氏版圖判書公派)의 사당입니다. 숭례문(崇禮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삼문과 함께 우후사( 虞候祠)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습니다. 옆으로는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 봉안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후사앞에는 경주김씨판도판서공파구세손가항파추모비(慶州金氏版圖判書公派九世孫可恒派追募碑)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김가항은 통훈대부로 전행김제군수를 지낸 김천부의 아들입니다. 보은읍 종곡리 김천부신도비(報恩邑 鍾谷里 金天富神道碑) (daum.net) 보은읍 종곡리 김천부신도비(報恩邑 鍾谷里 金天富神道碑) 보은읍 종곡리 마을초입에 자리한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성운(成運)·김천부(金天富)의 신도비이다 김천부가 을사사화를 계..

09 2022년 05월

09

푸른바다의 창가에서/내 마음의 울림 아버지의 자전거.

밤 늦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니 아버지가 계신 요양병원 관계자의 전화다. 아버지의 상태가 위중하니 올수있느냐는 전화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셔놓고 늘 늦은 밤에 오는 전화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몇 번이고 요양병원에서 전화를 받았지만 그 때마다 아버지는 요행이도 죽음이란 친구를 피해가셨다. 이번에는 또 어떠실까? 아버지는 혼수상태로 겨우 숨만 쉬고 계신 상태였다. 젊은 시절 닥치는 대로 이 일 저일을 하셔도 자식들의 뒷바라지는 항상 모자람의 투성이었다. 위로 둘이나 되는 누이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여들었고 그나마 아들이라는 미명아래 지방에 전문대 까지 나를 공부시키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벌이로도 늘 우리 식구들은 궁핍한 생활속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어머니는 새벽에 자식들의 도시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