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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가면 오석리 충무공이수일 묘소(金加面 梧石里 忠武公李守一 墓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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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향기/충주시

2012. 4. 13.

 

제천을 다녀오면서 산척을 지나 목행리에서 오석리쪽으로 차를 달렸다.

좌측으로 펼쳐지는 탄금호수(조정지댐)의 경치를 즐기며 차를 몰기에는 참 좋은 코스이다.

몇번이고 가본곳이지만 오석리에 자리한 이수일장군의 묘소를 찾아보았다

 

입구에 있는 신도비를 지나면 사당인 충훈사가 나타난다

충훈사 앞마당에 차를 주차하고 바로 곁에 위치한 묘소를 찾는다

 

 

 

 

 

충훈사 앞마당에 하이얀 목련이 만발이다

충훈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수일장군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여 있으며 잘 관리가 되고있다

이번 바람에 소나무 한그루가 뿌리를 드러내고 누워서 고사를 하였다

고사를 한 소나무가 영 눈에 거스른다.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에 있는 조선 중기 장군 이수일 묘이다.

 

이수일(李守一)[1554~1632]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고, 이어 경상수사로 옮겨 분전하였다. 후에 경상우병사에 이르러 1605년 선무공신의 호를 받고, 이괄의 난에 난군을 무찌르고 진무공신의 호를 받았다. 계림군, 부원군으로 가봉,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충무공 이수일 묘소는 배위(配位) 정경부인 전주이씨와의 합장묘이다. 34㎝ 높이의 호석을 두른 원형분으로, 상석과 동자석 1조, 망주석 1조, 장군석 1조, 장명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묘비가 있다.

 

묘비는 대리석 1매로 이수까지 장식하였다. 비의 앞면에는 ‘정경부인전주이씨부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령경연사행갈성분위출기진무공신보국숭록대부계림부원군겸형조판서오위도총부도총관지훈련원사사도부원수시충무공지묘(貞敬夫人全州李氏附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行竭誠奮威出氣振武功臣輔國崇祿大夫鷄林府院君兼刑曹判書五衛都摠府都摠管知訓練院事四道副元帥諡忠武公之墓)’라 새겼으며, 뒷면에는 ‘숭정기원지후삼십구년병오구월일입김집찬송준길서(崇禎紀元之後三十九年丙午九月日立金集撰宋浚吉書)’라 하여 1666년에 김집이 찬하고 송준길이 써서 묘표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묘역은 1,500㎡ 정도의 넓은 공간에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다.

석물 등이 고루 잘 갖추어진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사대부의 묘제라 할 수 있다. 묘에서 50여 m 전방에 사당이 있으며 그 앞으로 충무공 이수일 신도비가 있어 의의를 더하고 있다.

 

이수일은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이다.

  •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증조할아버지는 주부를 지내고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오(李塢)이고, 할아버지는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생원 이자침(李自琛)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월성부원군 이난(李鸞)이고, 어머니는 참봉을 지낸 우담령(禹聃齡)의 딸 단양우씨이다. 아들은 이정(전 대구부사 )와  효종 때 우의정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을 추진했던 이완(李浣)이다.

  • [활동사항]

1554년(명종 9) 충주에서 태어난 이수일(李守一)은 1583년(선조 16)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북방 지역 근무를 마친 후 1584년 권지훈련원봉사, 1586년 삼수소농보권관, 1590년(선조 23) 선전관을 지냈다. 장기현감으로 부임하여 재직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장기현을 공격하는 왜군과 격전 끝에 후퇴하였으나 왜군을 죽인 공을 인정받아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후 함창(현 상주시 함창읍) 당교(唐橋)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1593년 밀양도호부사로 경상좌도수군첨절제사가 되어 울산에서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하였다. 1593년 회령도호부사 재직 중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이 전라도 쪽으로 진격하자 4도체찰사 이원익의 요청으로 성주목사가 되어 대구의 김응서, 밀양의 이영과 협력하여 왜군에 대항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선조 33) 4월 북병사겸경성도호부사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근거지를 공격하여 성채를 불태우고 야인 115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1601년에도 군사 2,500여 명을 동원하여 야인의 토벌에 나서 사살자 229명, 포로 7명의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는 1명도 없었다.

1603년(선조 36) 8월 경상우병사겸진주목사가 되어 우병영을 창원에서 진주의 촉석산성으로 옮기고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고, 1605년에는 길주목사에 임명되어 길주산성을 축조하였다. 1607년(선조 40) 6월 수원부사, 1608년 북병사겸경성도호부사, 1611년(광해군 3) 지중추부사·지훈련포도대장·원유제조, 1612년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겸영변대도호부사, 1614년 충장위장를 거치고 1615년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어 말 1필과 삼아녹피 1피를 하사받았다. 1616년 9월 역적 이춘기 등을 체포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오르고 1617년 다시 북병사겸경성도호부사에 임명되었고 1618년 숭록대부에 올랐다.

1624년 평안병사겸삼도부원수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공신 2등에 올랐으며, 1624년 평안도병마절도사겸영변대도호부사, 1633년 삼도통제사겸경상우수사를 거쳐 1628년 형조판서겸금화제조주사대장에 임명되었다. 1631년(인조 9) 77세의 고령으로 남한산성수어사에 임명되어 남한산성 수축의 감독을 맡았다. 1632년 노령으로 관직을 사직한지 한 달 만에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묘소]

충무공 이수일 묘는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 202-1번지에 있고, 충청북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다.

  • [상훈과 추모]

시호 충무(忠武)이다. 1645년(인조 23) 좌의정겸영경연사에 추증되고, 1686년(숙종 12)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05호인 충무공 이수일 신도비가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 202-1번지에 있고, 진주시·성주군·통영시·수원시·경성군 등에 이수일을 기리는 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