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청북도 내고장구석구석살펴보기

청안면 조천리 장담충신각(淸安面 釣川里 張潭忠臣閣)

댓글 0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2013. 4. 8.

 張潭 忠臣閣은 인동장씨 집성촌에 세운 忠臣門으로 李麟佐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張潭의 정려이다. 1729년(영조 5년) 청안면 청룡리의 논으로 경작되는 들판에 세웠던 것을 조천리로 이건한 것이다.

장담 충신각은 약 40년 전(1969년대 후반)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하나 높은 석주형 주초 위에 짧은 원주를 세운 맞배 목조와가로 전통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높은 석주형 주초 위에 짧은 원주를 세운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석주형 주초나 이익공계통의 공포 등은 정려로서의 격식을 갖추고 잇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내부에는 『奮武原從 一等功臣 忠臣 贈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仁同張公潭之 門』이란 편액과 『移建 重修記』가 있다. 정면에는「忠臣門」·「百世樹風」이란 현판을 달고 보호책을 둘렀다.

張 潭( ? ∼1728)의 호는 樹風亭, 본관은 仁同으로 通禮 張仁溪의 후손이다. 영조 4년 청주에서 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벼슬이 없는 處士로서 의병을 일으켜 난을 진압하다 순절하니 그의 동생 張煥이 나머지 군사로 적을 토벌하여 복수하였다. 후에 이 사실이 奏聞되어 충신으로 정려되고 奮武原從勳一等功에 策錄되었으며, 正祖朝에 表忠을 명하고 左承旨에
贈職되었다.

 

괴산장담충신각은 '괴산 장담 충신각(槐山 張潭 忠臣閣)'은 1729년(영조 5년)에 청안면 청룡리에 세워진 것을 40년 전에 청안면 조천리 산3-1번지로 이전했으며, 높은 석주형 주추 위에 짧은 원주를 세운 정면1칸, 측면 1칸으로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1728년 3월 23일. 장담((張潭·?-1728)이 이끄는 청안현 의병들은 무신란 반군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반란군은 청안현청에 주둔하고 있었고, 무리는 가짜현감 정중익(鄭重益)이 이끌고 있었다. 선두에 서기를 자처했던 장담은 제일 먼저 청안현의 옥(獄)을 공격했다.
 
 
'우리형이 먼저 달려가 옥에 이르러 옥문을 부수고 重益에게 잡혀간 한시익을 급히 구출했으나, 이로 인하여 적과 더불어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 저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었으며, 강약이 매우 달랐다.'-<토역일기 1728년 3월 23일자>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라는 표현에서 보듯 의병과 반군들은 육박전을 하듯 직접 격돌했다. 그러나 전세는 숫자가 적은 의병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의병은 중과부적의 상태에 놓였다.

중과부적은 '적은 사람으로는 많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으로 《맹자》(孟子)의 〈위지〉(魏志) 에 나오는 표현이다. 전국시대 제국을 순방하며 왕도론을 역설하던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국은 결코 대국을 이길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대적하지 못하며,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기 마련이옵니다".

결국 이날 전투에서 의병장 장담은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반군의 칼날에 난자를 당했다. 청안 연암사의 중 묘제(妙察)도 반군의 칼을 맞았으나 토역일기의 문맥으로는 즉사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중 묘찰(妙察)이 먼저 흉적의 칼날에 맞아 피를 흘리며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자, 선봉이 날카로움이 꺽이고 , 적이 앞에서 이기게 되자, 군사들이 뒤에서 흩어졌다. 죽은 형이 홀로 그 선봉을 감당하려니, 기세가 다하고 힘이 소진되자 여러 역적들이 다투아 나와 칼을 휘두르며 난자하였다.'-<〃>

현장에는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도 있었고, 그는 장담이 숨이 떨어지지 않아 '가릉가릉!' 거리는 것을 보고 득의양양했다. 《사기》 〈관안열전〉에 '떳떳하고 당당하면 얻는 것이 더 있다'라는 뜻으로 득의양양 심자득야(得意揚揚 甚自得也)라는 표현이 있고, 득의양양은 여기서 유래했다.

'그때 정중익이 싸우는 현장에 있었는데다, 역도들이 죽은 형을 중익의 앞에 끌고 들어간 즉 실같은 목숨이 오히려 남아 그 숨이 가릉가릉하는 가운데도 중익을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천지간에 너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는데, 너의 목숨이 어찌 오래 가겠느냐"라고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익이 그 무리들을 시켜 또 난자하게 하고 머리골을 깨부수게 하니, 유혈이 넘쳐흘렀는데 즉각 죽었다.'-<〃>


 

 

장담은 조선 후기 의병으로 자는 성징(聖澄), 호는 수풍정(樹風亭), 본관은 인동이다. 통례(通禮)장인계의 후손이다. 1728년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벼슬이 없는 처사로서 의병을 일으켜 난을 진압하다 순절하여 그의 동생 장환이 나머지 군사로 적을 토벌하여 복수하였다.
후에 나라에서 충신으로 정려하고 분무원종훈일등공(奮武原從勳㊀等功)에 책록하였으며, 정조조에 표충을 명하고 좌승지에 증직하였다. 1999년 청안(현 괴산군 청안면)에 거주하던 유림인 장담이 의병을 조직하고, 이인좌에 의해 청안현감으로 부임한 정중익(鄭重益) 반란군을 완전 토벌하기까지의 과정 등을 기록한 『토역일기(討逆日記)』를 발견하였다. 장담이 정중익 반란군에 맞서 아우 환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한 뒤 3월 30일까지의 반란군 토벌과정을 기록한 이 일기에는 당시 청안현 소속 관군의 무력함, 의병들의 의식, 반란군 가담자의 성향과 민심의 향배, 의병모집 과정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서술돼 있다. 일기는 또 반란군에 대한 토벌 작전 계획, 토벌 시기, 1차 토벌작전의 실패와 장담이 피살당할 때의 참상, 2차 토벌계획의 수립과 정중익 및 잔당 살해 등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