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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가양리 아주신씨효자각(米院面 佳陽里 鵝洲申氏三孝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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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2014. 5. 12.

 

미원면 가양리에 있는 아주신씨의 효자각이다.

지금은 폐교된 초등학교 옆에 자리하고 있다.

미원면 가양리와 미원의 문방리 쪽으로는 아주신씨가 대성인 듯 하다

곳곳에 아주신씨 문중의 재실과 더불어 유허비와 효자비등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아주신씨 삼효각은 아주신씨(鵝洲申氏) 3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1655년(효종 6) 효자 신협(申鋏)의 효자각이 세워지고, 1683년(숙종 9) 효자 신지익(申之益)과 그의 아들 효자 신심 의 효자각이 세워졌다. 1703년(숙종 29) 3인의 효자각을 합설하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752년(영조 28)에 중건하고 1972년에 보수한 것이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살로 막고 안에는 3인의 정문 편액을 걸었다. 또한 1686년(숙종 1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가 쓴 아주신씨선세사실(鵝洲申氏先世事實)과 1703년(숙종 29)에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지은 삼효사실기(三孝事實記), 그리고 1762년(영조 38)에 송가상(宋可相)이 지은 삼효려중수기(三孝閭重修記)가 걸려 있다. 밖에는 ‘삼효려(三孝閭)’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지금은 주위에 철울타리를 두르고 철문을 달았다.

 

 

 

아주신씨는 신익휴는 고려 말에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을 지내고 아주군(鵝洲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들이 아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문헌비고》와 1924년에 발행된 《조선씨족통보》에 고려 때 아주현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신영미(申英美)가 시조로 기록된 것을 근거로 상계(上系)가 평산신씨와 무관하다는 주장도 있으나, 아주신씨 대종회는 이보다 이전인 선조 때 편찬된 《대동운부군옥》에 아주신씨가 평산신씨로부터 분관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 그리고 1666년에 간행된 《호계공유집》에 익휴가 시조로 기록된 사실 등을 들어 익휴를 시조로 삼고 있다. 신영미는 신익휴의 아들이라고 한다.

대표적 인물은 신우(申祐)인데, 그는 고려 충혜왕
때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를 지냈으며, 지극한 효자로서 경상북도 의성(義城)에 정문과 효자비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크게 벼슬을 한 사람은 없으나 학자와 효행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다. 우의 6대손 신원록(申元祿)은 성리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효행이 뛰어나 효자정문이 세워졌고, 그의 손자 3형제 중 신적도(申適道)는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찰방(察訪)을 지냈는데, 역시 학문과 효행이 뛰어났다. 신달도(申達道)는 삼사(三司)를 역임하고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신열도(申悅道)는 직언(直言)으로 유명하고 병자호란
때 역시 척화를 주장했으며, 장령을 거쳐 능주(綾州)목사를 지냈다. 또 우의 9대손 신지제(申之悌)는 임진왜란 때 예안(禮安)현감으로 용인(龍仁)싸움에 참전하여 선무(宣武)·호종(扈從)의 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의 아들 신홍망(申弘望)은 대간·수령·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신지익은 어머님이 중병으로 고생하자 밤낮으로 쾌유를 하늘에 기원하였다.

단지주혈을 하여 어머님의 입에 피를 흘려 넣는 등 어머님의 병환을 완쾌시키기 위하여 효성이 지극 하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기절하였다가 가까스로 소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효자 신심은 신지익의 아들로서 어려서 부터 부모의 효를 본받아 예의가 바르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병자호란을 당하여서는 피난중에 청나라 군사에게 발각되여 청나라 군사가 부모를 해치려 하자 가로막고 살려주기를 빌었다.

청나라 군사도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풀어주었다. 이런 그의 효행심이 널리 알려지자 숙종임금께서 정려를 명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였다.

 

 

효자 신협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극진한 효성으로 주위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 입속에 피를 흘려넣음으로 어머니를 소생시켰다

또한 어머니가 한 겨울에 고사리가 먹고 싶다고 하자 눈 덮힌 산속을 고사리를 찾아 헤매다 바위틈에서 고사리를 발견하여 어머니를 공양하였다.

신협은 또한 어머니가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여 꿩을 잡으려고 산속을 헤매던 바 매가 꿩을 잡아 신협앞에 떨어트려 줌으로서 어머니를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 모든것이 신협의 효성에 감동한 하늘의 복이였다.

 

 

‘가경자’는 가양리의 중심 마을이다.이 마을은 정조 때에 ‘가양리(佳陽里)’로 조성되어 그대로 사용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는 ‘가경리(佳景里)’로, 그 후 다시 ‘가경자(佳景子)’로 바뀌었다.
‘가양리’․‘가양골’․‘가양동’은 흔한 지명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들이 ‘갱이’․‘갱골’과 함께 사용된다. ‘갱이’․‘갱골’에서 ‘갱’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강(江)’의 변화형으로, 대개는 강과 인접한 지명에 사용된다. 다른 하나는 ‘가양(可陽)’이는 ‘개양(開陽)’의 변화형으로, ‘볕이 잘 든다’와 관련된다. 본 예는 ‘가양(佳陽)’으로표기되나, 후자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가양리’는 ‘볕이 잘 드는 마을’로 풀이된다.
‘가경골’․‘가경동’은 전국에서 그 예가 더러 발견된다. 그리고 이들에는 산수가 아름답다는 유래담이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가경리’나, 변화형 ‘가경자’는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로 해석된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가경자’가 ‘가정자’와 함께 사용되어,‘떡갈나무 정자’를 뜻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