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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월동 임형업효자각(丹月洞 林亨業孝子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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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향기/충주시

2016. 4. 29.



임형업은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계영(繼榮).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임황(林篁)이고, 형으로는 병마절도사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과 임승업(林承業)이 있다. 조선중기 충주출신의 효자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형인 임승업이 맹산 수령으로서 출전한 뒤 형 대신 노모를 봉양하다가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여 밤낮으로 슬프게 통곡하였다. 이때 청나라 군사가 마을에 침입하여 주민이 모두 도망갔으나 홀로 남아 관을 안고 통곡하자 청군도 그 효성에 감동하여 ‘효인불가해(孝人不可害)’라고 써서 대문에 붙이고 돌아갔다. 그리고 뒤에 쳐들어온 청군들도 침범하지 아니하였다.

이후 관을 선영 밑에 예장하고 3년 동안 시묘한 후 집에 돌아와서도 늙도록 사당에 가서 날마다 참배했다. 그리고 임오년(壬午年) 전 가족이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갔을 때 “어찌 더러운 청나라에 무릎을 굽힐 것이냐, 내 배를 갈라도 너희들에게 굴복할 줄 아느냐”고 호령하여 잡아간 청인들도 감히 해하지 못했다 한다.




숙종 때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1784년(정조 8)에 충효 정려문이 세워졌으며 1843년(헌종 9)에 중건했다. 충효 정려문은 충주시 단월동에 있다.




평택임씨는 임팔급을 시조로 하고 임황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평택임씨는 임팔급(林八及)을 시조로 한다. 임팔급은 당나라 문종 때 한림학사를 지내고 8학사 중 한 명으로 신라로 와서 귀화하여 팽성(현 경기도 평택시)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문헌 상 정확한 계보가 파악이 안 되는 상황에서 후손들에 의해 고려 말 세자전객령겸연희궁부사를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중시조 겸 일세조로 하고 평택을 본관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평택임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9명, 공신 1명, 대제학 1명, 청백리 4명을 배출했다. 충주에 입향한 평택임씨는 인조 때 명장 임경업(林慶業)을 비롯해 광주중군을 지낸 임승업(林承業), 사헌부지평을 지낸 임형업(林亨業), 희천군수를 지낸 임준업(林俊業), 정주목사를 지낸 임재수(林栽洙), 구성부사를 지낸 임필영(林必榮), 호군을 지낸 임백현(林百鉉) 등을 배출했다.



임경업의 아버지 임황(林篁)[1557~1632]이 1500년대 말이나 1600년대 초 충주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세거하게 되었다. 임황의 증조할아버지 임규(林珪)와 할아버지 임정수(林挺樹)의 묘가 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 원주에서 충주로 입향한 것으로 보인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충주시에 거주하는 평택임씨는 2000년을 기준으로 947가구 2,792명으로 조사되었다. 2008년 현재에는 충주시 살미면 세성리와 설운리에 40여 호, 단월동과 풍동에 50여 호 등이 살고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단월동에 사적 제189호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2호 어제 달천 충렬사비, 임형업 효자각, 삼초대가 있다. 충주시 풍동 산 45-1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67호 충주 임경업 묘소, 임황 묘소가 있다. 또한 충주시 살미면 세성리 150번지에는 임경업 사우, 임경업 쌍성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9호 「임경업 초상」이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