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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면 관기리 고봉정사(馬老面 官基里 孤峯精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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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

2016. 12. 7.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서당입니다.충북시도기념물 제 51호로 지정시기는 1984년 12월31일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불. 충청북도 기념물 제51호. 2단으로 쌓은 석축을 기단으로 하고 그 위에 정방형에 가까운 모양의 덤벙주춧돌을 놓고 민흘림으로 된 둥근 기둥을 앞면에 4개, 옆면에 3개씩 세워서 지었다.

공포()는 익공식(), 처마는 겹처마이다. 평면의 구성은 오른쪽에 온돌방, 왼쪽에 우물마루, 방과 마루 사이에 기둥을 둔 형식이다. 기둥 사이에 분합문()을 두어 두 공간을 연결하고 있다.



건물 바깥쪽은 온돌방에 쌍여닫이문을 달고, 마루에는 앞쪽에 분합문을, 옆면과 뒷면에 각각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조선 중종 때 최수성()·김정()·구수복() 등이 함께 창건하고 강학()을 행하였으며, 구일봉()이 지금 자리로 옮겼다.

1981년 충청북도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정사를 해체하여 보수하고, 고봉사()·관리사()·창고·삼문 등 담장을 새로 지었다. 구씨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송시열()이 쓴 고봉정사의 현판이 있었으나,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최규하()가 쓴 휘호이다.

고봉정사 [孤峯精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봉정사 안에 자리하고 있는 능성구씨의 보갑입니다.

2001년 3월 30일 충청북도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능성구씨낙주가승(綾城具氏洛州家乘)의 판각을 영구히 보관하기 위하여 1640년(인조 18)에 병암(屛菴) 구수복(具壽福)의 현손인 낙주(洛州) 구봉서(具鳳瑞)가 만들었으며, 유사시에는 지하에 매몰할 수 있도록 제작한 희귀한 화강암제 석함이다. 고봉정사(孤峰精舍:충북기념물 51)의 경내에 보관되어 있다.

유사시 땅에 묻을 수 있도록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아래위를 분리할 수 있다. 크기는 가로 80cm, 세로 56cm, 높이 84cm이고 표면에 '능성구씨보갑(綾城具氏譜匣)'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족보에 대한 관념을 짐작할 수 있으며, 판목 및 서적 보존법 등에 관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능성구씨 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지정번호는 충북민속자료 제11호이다.지정연도는 2001년 3월 30일이다 소장은 능성구씨종중에서 관리하며 시대는 조선시대이며 위치는 충북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 458-1 시대는 조선시대이며 크기는 80×56×84㎝이다.



조선 중기 김정이 학문을 연마하고 즐기던 곳에 최수성이 고봉정을 세웠다. 이름은 김정이 삼파연류봉을 고봉이라고 하고 올라가 즐긴데서 비롯되었으며,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이후에는 구수복이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 뒤 정자가 낡자 구수복의 5세손인 이천이 봉우리 아래로 옮겨 지으면서 지금의 건물로 세웠다 한다.

김정(1486∼1520)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중종 2년(1507)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정랑, 이조정랑 등을 거쳐 이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사림의 대표적 인물로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를 위해 미신타파, 향약의 실시 등을 추진하였다.

최수성(1487∼1521)은 조선 전기 선비화가로 김굉필에게 배웠으며 신진 사림파 학자로 조광조, 김정 등과 교유하였다.

구수복(1491∼1545)은 중종 5년(1510)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1519년 기묘사화 후 파직되었으며 김정 등과 도의로써 사귀었다. 경학에 몰두하여 많은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문화재청]




능성구씨는 전라남도 화순군 능성()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입니다.시조는 고려 때 벽상삼한삼중대광검교상장군()을 지낸 구존유()이다.구존유가 중국 송()나라의 한림학사()를 지낸 주잠()의 사위로, 주잠이 1224년(고려 고종11)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고려로 망명할 때 동행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중국 사료에는 구존유가 고려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구씨가 1224년 이전부터 한국의 호남 지방에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구존유와 주잠 사이에는 300년의 시간 차이가 있어 이를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구존유의 아들 구민첨()은 평장사()를 지내는 등 후손들이 고려 조정에 계속 출사하여 가문의 명성을 높였다.

6세손에 해당하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 사이에 판사파()·시랑중파()·좌정승파()·판안동파()·도원수파()·낭장파()·감무파()·참판파()·문천군사파() 등의 9파로 갈렸다. 그중 도원수파·판안동파·좌정승파 등 3파가 조선시대에 가장 현달하였으며, 오늘날 구씨 전체 인구의 약 80%(도원수파만 40%)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세조 때 치관()이 영의정을 지낸 것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상신() 2명, 공신 9명, 부마() 3명을 배출하였다.

《능성구씨사료집》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총 5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진사 144명, 문과 55명, 무과 363명으로 무과 출신이 65%를 차지한다. 이를 파별로 보면 도원수파 359명, 판안동파 72명, 좌정승파 42명으로 역시 이들 3파가 전체의 84%를 차지한다. 무과 출신 가운데 영조 때까지 종2품의 장신급()이 9명이나 배출되었는데, 이는 그때까지의 장신 총수의 12분의 1에 해당한다. 그중에는 병사(使)·수사(使)를 지낸 구사직(), 훈련대장 등을 지낸 구굉(), 어영대장 구인후(), 총융사(使) 구인기(), 어영대장 구문치(), 총융사 구감(), 훈련대장 구성임(), 훈련대장 구선복()이 있으며, 구굉 구인후 구인기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에 녹훈되었다.

이밖에 공신으로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구현휘()·구수영(), 성종 때 좌리공신()에 오른 구치관()·구문신() 등이 있다. 또 고려 말에 좌시중()을 지내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 태조가 좌정승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은 좌정승파의 분파조 구홍(), 중종의 부마가 된 구사언(), 인조의 외조부이며 이조판서·좌찬성·숭록공신(祿)에 오른 구사맹(), 시문에 뛰어나고 관찰사 참판 대사헌을 지낸 구봉령() 등도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능성구씨[綾城具氏]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