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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면 금암리 양신정(東二面 金岩里 養神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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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2016. 12. 8.

 

 

양신정은 1545년(인종1)봄에 옥천인 전팽령이 밀양부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있을때 동이면 금강에 위치한 목담호숫가에 세운 정자입니다.

양신이란 뜻은 명성과 이익을 쫒지않고 물러나 조용히 자신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한다는 뜻입니다.

 

 

 

본인이 독서도하고 글도 가르칠 수 있도록 금강가에 있는 목담호수가에 세운 것으로, 1597년 선조30년 병화로 불타없어진 것을 1620년 광해군12년에 다시 지었으나, 1733년 영조9년에 무너져 없어졌다. 현재의 정자는 1828년 순조28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서 정면3칸, 측면2칸, 팔작목조기와집이다. 양신정은 지대가 높고 주변경관이 수려하며, 인접하여 사서공전식선생의 영정을 모신 목담영당이 위치하여 있다.

 

 

 

양신정이 위치한 금암리 유래는 마을 뒤에 용암사란 절이 있고 큰 바위들이 용같이 뻗었다 하여 용암말 이라 불렸고 옆마을이 목시, 목쇠인데 목쇠는 목금(木金)으로 목금의 금(金)자와 용암의 암(岩)자를 따서 두 마을의 뒷글자를 합쳐서 금암리가 되었다.


금암리에는 충청북도문화재인 1545년 송정 전팽령이 건립한 양신정(養神亭)과 1765년 유림들에 의해 세워진 목담서원이 있다. 목담서원(鶩潭書院)과 목담서원에 모셔진 사서공 전식 선생의 영정, 명종 때 효자를 기리기 위한 효자정과 효자비, 그리고 그 효행을 뒷받침 하는 호천(虎泉) 등이 있다.


임진란 때 중봉 조헌선생을 도운 인봉 전승업선생은 개전초기에 중봉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 의병 100명과 군수품을 모아 보은 차령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금산전투 후 연곤평에서 순절한 의병과 승병 1,000여명의 시신을 모아 오늘의 칠백의총을 만들고 중봉선생 유족을 돌보았다.

 

 옥천 출신의 인봉(仁峰) 전승업은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700 열사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중봉 조헌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전승업의 자는 효선(孝先), 호는 우재(愚齋)인데 만년에는 인봉(仁峰)으로 불렸다. 본관은 옥천이며, 선산 곽씨를 어머니로 하여 1547년(명종 2)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디 과거를 보는데 필요한 글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 공부를 하여 1568년(선조 2) 증광초시에서 장원하고 선조 5년에 또 급제하였으나, 거듭 회시에서 낙방을 하고, “선비가 참됨을 잃는 데는 과거 시험을 자주 보는 것 같은 게 없다” 하고 과거 공부를 집어 치우고 자신의 인격을 닦는 학문에 힘썼다. 이후, 천거에 의해 중학교수 동문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의 병이 더욱 심해져 사양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보은에 와 있던 조중봉은 1584년(선조 17) 옥천 안내에 은둔하고 있었다. 이에 인봉은 조중봉이 있는 곳을 왕래하며 도의를 강론한다. 인봉은 본디부터 산수를 즐겼는데 조중봉과 서로 당시의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왜란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했다. 1592년 4월 임진란이 일어나고 왕이 수도를 떠나자 그는 인봉정사에 있다가 통곡하며 ‘임금이 피난을 갔는데 신하가 집에 있다고 앉아서 바라만 볼 수 있겠는가?’ 하고 큰 아들을 중봉에게 보내 거의(擧義)할 것을 약속했다. 이어 건장한 종 100여명을 모으고 잡곡 등 100여석을 모아 우선 군량미로 충당한 다음 청산?영동에 격서를 보내 군량미를 모았다.


  8월 선생과 중봉은 1,500명의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서문 밖에 진을 쳤다가 적과 싸워 크게 승리했다. 이를 왕에게 알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관군과의 충돌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자 직접 글을 왕께 전하고자 길을 떠났다. 그러나, 조중봉이 금산의 적을 치다가 전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봉사(封事)를 곽현에게 주어 전하도록 하고 곧바로 금계의 싸움터로 돌아와 700 의병과 승군 300의 시신을 거두어 큰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중봉의 시신을 수습하여 옥천으로 돌아와 장례를 지내고 중봉이 나라에 올린 글과 기타 잡저를 모아 조중봉의 유고집을 만들었다. 이후 중봉의 모부인과 아들을 인봉초당에서 함께 지내게 하였고 마음을 다해 도왔다.


  인봉은 평소 병이 있었는데 임난을 격을 후 더우 심해져 날마다 약을 복용하면서도 금계에서 조중봉 등과 함께 죽지 못했음과 왜적을 섬멸하지 못했음을 한으로 여기다 1596년 봄에 정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떴다. 묘소는 동이면 금암리에 있다.

 

 

 

 

전팽령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1504년(연산군10)사마시에 합격했으며 1524년(중종19)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벼슬을 거쳤으며 외직으로 단천군수와 삼척,밀양부사를 지냈다.1550(명종5)에 상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상주에 재임할때에 그가 학행이 있으며 청렴하고 근신하다고 여기어 특별히 통정대부에 승진시켜 포상하였다.

 

 

 

소세양의 [양신정기(양신정기)]에는 전팽령 형제가 나란히 과거에 합격했으며 특히 동생인 전팽령의 절개와 행실이 형제중에 탁월했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군자의 출처가 분명했는데 출사하여서는 청백리로서 선정을 베푸러 총애를 받았으며 물러남에 있어서는 벼슬과 봉록을 뜬구름처럼 여겨 세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하여 편히 생활하였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