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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면 태성리 각연사 둘러보기(七星面 台城里 覺淵寺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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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

2018. 1. 25.







각연사를 찾아 나서는 길은 날씨가 참 맑다.

상강(霜降)이라는 계절의 변화가 이름값을 하는 듯 제법 바람이 찬 느낌이다.

각연사는 [여지도서]에 연풍현 서남쪽 30리 거리에 정자산에 있다고 전하는 데 바로 지금의 장연면 태성리 보배산에 있는 각연사를 말한다.

절터를 두고 동으로는 덕가산(858m) 남으로는 칠보산(778m) 서쪽으로 보배산(709m) 등 700m가 넘는 고봉들로 둘러쌓여 있는데 기록으로 전하는 보개산각연사(寶蓋山覺淵寺)의 보개산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고있다.지금도 보개산과 보배산이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아마도 보개산이었던 것이 언제부터  보배산으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판단되며

현재 사찰측에서 말하는 공식적인 명칭은 보개산 각연사이다.


각연사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옛적 고인돌에 특이하게도 시주석이 있다.

시즈석은 일종의 이정표 역할도 하는데 보개산각연사(寶蓋山覺淵寺)라고 글씨가 음각되어 있으며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 각연사는 창건설화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대(515~539)에 유일대사가 칠성면 쌍곡리에 절을 지으려고 목수를 시켜 나무를 다듬고 있는데 까마귀떼가 날아와서 나무의 대패밥을 물고 날아가길 자주 하므로 괴이여겨 유일대사가 까마귀떼를 따라가보니 깊은 산골에 있는 연못속에 나무조각을 떨어트려 연못을 살펴보니 그 속에 석불이 앉아있어(覺有佛於淵中)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각연사라 했다고 한다.

그래 지금도 그 연못의 실체를 알려주려는 듯 대웅전 밑으로는 샘물이 솟고 있다





그러나 신라 법흥왕 무렵은 이곳이 백제땅이였으므로 설화의 배경이 백제의 무령완이나 성왕이라고 함이 옳을것이다.

또한 설화의 중심이 있는 비로자나불은 그 양식으로 보아 신라하대에 조성된 것이어서 이는 설화로만 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각연사 비로전에는 1901년(광무5년)에 지은 연풍보개산각연사비로전개분불사기(連豊寶蓋山覺淵寺毘盧殿改粉佛事記) 현판이 전하는데 이는 전해오던 비로자나불상을 개분불사하면서  쓴 것으로 보인다,현판중에는 "깊고 넒은 연못속에 연꽃이 피었음을 깨닫다"(覺淵華於深廣之淵也)라고 하여 유일대사의 창건실화와는 다소 디른 모습을 보인다.



한편 각연사 [삼세여래급관음여래개금기](三世如來及觀音如來改金記 1771년)에는 고려 광종대의 고승인 통일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신라시대의 여러 석조물들로 보아 다소 무리가 있다.

현재로는 절의 연혁과 관련해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통일대사탑비인데 각연사 절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 기록들을 종합하여 절의 연혁을 추정해 보면 대략 신라말에 창건되어 고려초 헤종(944~945)때 한차레의 중수를 거쳐 광종때 통일대사가 주석하면서 한차례에 중수를 거쳐 대규모의 불사를 일으켜비로소 대찰(大刹)로서의 격을 갖추게 된다.

이 후 숭유억불정책을 취하던 조선시대에는 중수와 중창은 계속 이어지는데 1648년(인조26)과 1665년(효종6)에는 비로전 법당을 중수하였다.

1678년(숙종4)무렵에는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768년(영조44)에는 대웅전을 이전 중수하고 불화를 조성하는 등의 대규모 중창이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대웅전 상량문에 전한다.이 후 1899년(광무3)에 비로자나불을 개분(개분)하고 비로전을 중수하였으며 1927년에도 한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2칸이며 다포식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인데 1768년(영조44)에 쓰여진 대웅전상량문에 의하면 현재 비로전 자리에 있던 법당이 퇴락하여 현재의 자리에 신축하고 삼세불상과 관음상을 옮겨 새로 도금하고 영산회상도로 여겨지는 불화를 봉안하는 대규모의 불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당시까지 세번의 중창이 있어왔고 신라 경순왕(927~935)때는  왕의 원찰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비로전과 대웅전의 주초석 석축 및 석조귀부와 와편들의 편년과도 대략 시기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현재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한 삼존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1962년 까지만 해도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야사여래불의 삼세불을 모셨다고 한다.이는 현세의 후불탱화가 석가,아미타,약사붕의 삼세불 탱화인 것으로도 지막해 볼수있다.



양쪽 벽면에는 극락해상도와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한편 삼존불 오른쪽으로는 어뜻보아 나한상의 모습을 보이는 소상(塑像.)이 전하는데 달마상이라고도 하고 또는 창건설화에 난타나는 유일대사상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대웅전 은 1979년에 보수를 거쳐 1982년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26호로 지정되었다.



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창건이후 1648년(인조26)과 1655년(효종6)의 중수를 거쳐 1980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고 있는 비로전은 건물의 주초석(柱礎石)이나 신방석(信防石)은 본래의 것으로 사주(사주)에 정연한데 주초와 원좌와 신방석의 사분원 몰딩을 그리고 각형받침 수법등이 신라게통의 양식이며 이러한 유형을 불국사 극락전의 유규에서 볼수가 있다.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1923년 중수할 때 ㄷ대들보 초꼬지에서 넣은것으로 추정되는 쪽지에서 숭정기원후삼무자춘 순치십이년기미 광무사년기해 대정십오년중수(숭정기원후삼무자춘 순치십이년기미 광무사년기해 대정십오년중수)라 한것으로 미루어 지금의 건물은 조선 인조26년(1648년)에 중건되어  효종6년(1655) 광무3년(1899) 그리고 1927년에 보수된것으로 보여지고 최근에는 1975년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 433호인 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있다. 한편 1981년에 비로전 뒷쪽에 석축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잘 다듬은 장대석과 신라말 고려초의 것으로 보이는 와당이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듬해 1982년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25호로 지정되었다.




보물 재 433호로 지정되어있는 비로자나불은 신라 하대 9세기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총높이ㅣ 3.02m 불상높이 1.28m 팔각대좌와 보주형 거신광배를 갖춘 전형적인 화강암 불상이다.

광배의 표면에는 불상의 머리위에 3구 좌우에 각3구씩 9구의 화신불을 조각하였다.

모두 원형의 광배를 지니고 연화대좌위에 앉아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발에 육계가 펑퍼짐하여  머리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얼굴은 삼각형으로 변하였고 이목구비도 평범하여 부처의 온화한 미소와 위엄이 사라졌다.

이러한 인상은 자세에서 더욱 드러나 어깨는 움츠렸으며 가슴은 빈약하고 하체도 평면적읻. 또 납의(衲衣)의 주름도 간략하게 표현되고 다리의 옷주름ㄷ도 적으로 도식화되었다.두가닥 선을 돌린 두광바로위에 삼존화불이 있고 좌우에 3구씩의 화불을 조각하여 도합9불이 연꽃 자리위에서 합장하는 표현을 취하였다. 팔각대좌는 지대석과 상.중.하대석으로 나뉘어져 있ㅆ어 상대는 앙련을 조각하고  중대에는 연꽃을 조각하고 그 주변을 운문으로 장식하였으며 하대는 복련을 조각하고 팔면중 네면은 안상안에 향로를 두면은 안상안에 꽃을 나마지 두면은 안상안에 비천문을 조각하였다.



이 불상은 9세기의 전형적인 비로자나불의 형식을 따랐는데도 얼굴,몸,옷무늬의 처리에서는 10세기의 불상양식을 보여주고있다.

1966년에 보물 제 43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있다.



한편 비로전의 동쪽에서 발견된 귀부(龜趺 221*230센티)와 옥개석(屋蓋石 61-64.5센티)등이 남아 전하는데 특히 용두와 비신이 결실된 채 비좌와 몸체 그리고 지대석이 남아있는 귀부는 크게 표현되여 있는 네발과 발가락이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되어있으며 비좌는 구름모양으로 사방을 두르고 그 위에 작은 안상을 두었는데 이러한 조각양식을 졸합해 볼때 통일대사탑비보다 연대가 앞선 신라양식으로 추정된다.





각연사에서 칠보산 쪽으로의 등산로를 따라 길을 재촉하다보면 아담한 석종형부도 2기를 만날수 있다.

그 중 첫번째 것은 선적당(善跡堂)이라는 명문이 있어 선적당부도라 불린다.화강암으로 만들었고 사각형의 대석에 탑신은 단지모양으로 둥글고 돌전체는 길며 몸체위에 연화문을 한 뚜껑형식이고 위는 뾰족하며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부도는 선적당 부도보다는 조금 크기가 더 크며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석종형 부도이다 명문이 없어 부도의 주인은 알수가 없다





조금 더 계곡길을 오르면 칠보산을 오르는 등산로와 함께 이정표가 나타난다. 삼거리에서 좌측 계곡으로 조금만 진입하면 마나는 것이 높이 470센티의 통일대사탑비(統一大師塔碑)이다 탑비에는 게림인인 대사가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니 고려태조가 기뻐하여 왕실에서 초청하여 불법의 진리를 강론하니 그 명망이 전국에 자자하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대사가 입적한 906년(광종11)통일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한림학사 김정언(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여 탑비를 세웠다고 하는 대사의 행적을 개략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김정언은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옥룡사 동진대사 탑비(958)문에도 참여했다.





이 탑비는 사각형의 대석위에 보주를 입에문 투박한 용머리에 거북등을 한 높이 102센치의 귀부위로 측면에는 안상을 위에는 복련을 조각한 네모진 비좌가 있고 그 위에 너비 128센티 두께 25센티 높이 258센티의 비신을 세우고 다시 낮은 3단에 받침을 깍고 주변에 앙련을 조각한 뒤 그 위에 네 용이 트림을한 폭 175센티 두께 75센티 높이 110센티의 용각(龍刻)이수를 얹었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를 모두 갖춘 원형으로 전한다.

다만 그 비문은 마멸이 심하여 오늘날 260자만이 펀독이 기능하나 본래는 1행에 88자씩 46행 약 3500자를 쓴것으로 보이며 다행히 비문에서 통일대사의 제자인 석총훈등이 건립한것은 알수 있으나 건립시기는 알수 없는데 대체로 고려광종 9년(958)에서 11년(960)사이로 추정되고있다.

용조각이 꿈틀대 듯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는 탑비는 1974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었다.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봉암사 전진대사원오탑비(965)와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는 고려초의 웅건하고 직선적인 탑비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시 탑비를 나와 삼거리(?)에서 칠보산 등산로가 아닌 탑비와 등산로의 중간의 산의 능선을 타고 오르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오솔길이 있는 산길을 따라 30여분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산비탈의능선에서 부도를 만나게 된다. 오랫동안 부재들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82년에 괴산군에서 복원하였다. 이 부도는 높이 2,45미터의 팔각원당형(팔각원당형)으로 한개의 돌에 1단의 낮은 괴임을 모각한 지대석과 각변에 안상을 한개씩 조각하고 상단에 갑석형을 돌린 하대기석을 놓고 다시 그 위에 각면에 겹잎의 복련과 연꽃을 조각하였다.





상면에는 2단의 낮은 괴임을 모각한 하대복련석과 중대석 괴임대를 한개의 돌에 새겨 얹었다.

그리고 각변에 우주만 조각된 중대석과 아래에 3단받침과 측면에 홑잎의 앙련을 두르고 위에 감석형을 둘리고 1단의 괴임을 만든 1변의 너비 30샌티 높이 25센티의 상대석을 놓고 다시 각면에 양 우주와 앞 뒷며에 문비를 조각한 탑신석이 있다.

4단 받침위로 부드러운 첨에 곡선의 합각이 뚜렷하고 8각부의 전면에 귀꽃을 장식하였지만 파손되고 상단에 1단의 괴임이 있는 1변의 너비 61센티 높이 48센티의 옥개석을 놓았으며 상륜부로는 높이 10센티의 노반석만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신라 하대의 정형적 팔각원당형의 부도형식을 계승한 웅건하고 단아한 고려초의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는 이 부도는 통일대사의 부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재 충청북도 지방문화재 제 127호로 지정되었다.

부도 앞엔는 연화좌를 중안ㄴ에 조각한 배례ㅔ석형태의 화강석이 있다.사방에 안상을 새기고 위에는 8개의 연꽃모양을 둥글게 새겨 넣은것으로 보아 제레시 꽃이나 제물을 놓ㄴ는 상석으로 보여진다.

통일대사부도를 보아야 각연사를 모두 둘러보았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