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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면 대안리 제주목사김수영 비(內北面 大安里 濟州牧使金守榮 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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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

2019. 1. 30.



내북면 대안리 앞 야산에 있는 경주인 제주목사김수영의 신도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통정대부행제주목사경주김공휘수영배숙부인전주이씨지비(通政大夫行濟州牧使慶州金公諱守榮配淑夫人全州李氏之碑)라고 각인되여 있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김수영의 행적이 기술되어있다.



대안리(大安里)는 본래 청산현(靑山縣) 주성면(朱城面) 지역으로 높은 지역 안쪽에 있다하여 대안이라 불렀는데 1906년 보은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엽동(葉洞) 일부와 합쳐 대안리라 하고 내북면에 편입되었다.


대안(大安)[마을] 마을 뒷산에 산제당이 있고 앞에 있는 활인봉(活人峰:424m) 밑에 살면 마을이 편안하다 하여 대안이라 불렀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대안리(大安里)라 기록하였다.

경주김씨 계림군과 후손이 조선 중기에 처음으로 큰골에서 촌락을 이루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이 번창한 뒤 농지가 있는 곳으로 자연 부락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각성(各姓)이 혼재하고 있다.



제주목사는 조선시대 제주목을 맡아 다스린 정3품 외직 문관이다.


제주 목사는 형옥·소송의 처리, 부세의 징수, 군마(軍馬)의 고찰, 왜구의 방비 등 제주 지방에 대한 모든 행정을 집행하였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한 관직이었다.


제주도에 목사를 파견한 것은 고려 1295년(충렬왕 21)부터 간헐적으로 이루어져왔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제주목의 설치는 1397년(태조 6)으로 나타난다.

이 당시 제주목은 제주도 전체를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끊임없는 중앙집권화 시책에 따라 1416년(태종 16)에 제주목 외에 대정현·정의현이 신설되면서, 제주목의 관할 구역은 제주읍성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약 31㎞, 서쪽으로는 약 32㎞, 남쪽으로는 약 27㎞ 이내에 해당하는 지역을 관할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제주 목사가 그 이전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으며, 소관 지역을 관할하면서도 제주도의 전반적인 행정의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다.


제주 목사는 행정적 기능 외에 군사적인 기능 수행이 항상 강조되어, 반드시 군사적인 직책이 겸임되었다. 군사적인 명칭의 변화에 따라 제주 목사는 조선 초기의 경우에는 주로 만호(萬戶)·안무사(按撫使)의 직책을 겸하였다.

또 1466년(세조 12)부터는 병마수군절제사라 하였고, 1638년(인조 16)에는 이를 고쳐 방어사(防禦使)라 했으며, 1642년(인조 20)에는 절제사(節制使), 1713년(숙종 39) 이후에는 다시 방어사란 직책이 겸임되었다. 이들은 명칭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 본질적으로 군직(軍職)의 겸임이라는 데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수령 행정 체계상 제주 목사가 대정현·정의현 지역을 순찰할 때에는 제주목에 관계된 사항은 제주 목사의 부관격인 판관이 대행하였다. 또 목사가 공사(公私)로 시간이 없을 때에는 판관이 대신하여 대정현·정의현의 업무를 감독하기도 하였다.

제주 목사는 소관 제주목 외에 대정 현감·정의 현감을 감독·규찰하였기 때문에 제주도의 책임자나 다름이 없었으며, 이런 까닭에 제주 목사의 동헌을 흔히 감영과 마찬가지로 영청(營廳)이라 불렀다.


홍순만의 『제주 목사에 관한 서설』[1991]에 의하면 조선 시대[1392~1910년 기준] 제주 목사를 역임한 사람은 총 286명에 달한다. 이 수는 미부임자를 제외한 수이며, 평균 재임기간은 대력 1년 10개월 정도이다.

제주 목사 재임 기간 중에 6개월을 넘기지 못한 경우가 28명으로 9.7%, 1년을 넘기지 못한 목사가 65명으로 22%이었다. 재임 중에 사망한 사람이 21명으로 7%, 재임 중에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거나 파직된 경우가 68명으로 23%를 차지하였다.

가장 오래 제주 목사를 역임한 사람은 이경록(李景祿)으로 6년 5개월이나 재임하였다. 그리고 이종윤·조희순·백낙연·서병업 등이 임기를 넘긴 사례이다. 제주 목사 중에 선정을 베푼 목사는 58명으로 20%, 학정을 행한 목사는 14명으로 4.8%, 실정(失政)을 한 목사가 15명으로 5%로 나타난다.


청백리와 선정을 베푼 제주 목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우선 기건 목사는 해녀들이 전복을 따는 모습이 너무 애처롭게 느껴져 제주 목사로 부임해 있는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약동 목사의 경우 세공(歲貢)을 감면하였고, 한라산신제를 산천단에서 행하게 함으로써 제주도민들이 산신제를 지내면서 동사(凍死)하는 폐단을 시정하였다. 더구나 그는 제주 목사를 그만두면서 제주에서 사용했던 모든 물건을 두고 갔으며, 그가 사용했던 말채찍은 관덕정에 오랫동안 걸려서 청백리의 상징으로 제주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종윤 목사는 일체의 선물 금지, 공물 및 부역 감소 등의 조치를 취하여 도민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에 도민들은 그가 교체된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에 등장(等狀)을 올려 계속 유임되는 것을 허락받기도 하였다.

김수문 목사는 을묘왜변으로 제주를 침입해온 왜구를 막아냈으며, 노정(盧錠) 목사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기근과 전염병에 허덕이는 제주도민들을 위해 기민구제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김정 목사는 삼천 서당을 창건하여 교육·문화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몸소 돌을 나르면서 화북포구 축항 공사에 힘을 기울였다. 또 이원조 목사는 송죽사와 향현사를 건립하였다.

윤시동 목사는 보민고를 설치하여 굶어죽는 제주도민들을 구제하였고, 허명 목사는 수세(水稅)를 폐지하였으며, 윤구동 목사는 공피전과 공피창을 설치하고 환모조(還耗粗)를 비축하여 재해에 대비하였다.



조정에서는 제주 목사를 기용하는 데 있어서 문·무관을 번갈아 임용하거나, 목사가 무관이면 부관격인 판관은 문관으로 임용함으로써 문·무의 조화를 이루어 행정을 담당해가도록 배려하였다.

이는 제주도가 지니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무관 수령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왜구들이 주요 약탈 대상지역인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제주가 위치하고 있어서, 왜구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본래 목사의 품계는 정3품에서도 당하관에 해당하는 통훈대부·어모장군이다. 그러나 제주 목사는 정3품에서도 당상관에 해당하는 통정대부·절충장군으로 주로 임명하였다.

그 이유는 제주 목사가 단지 제주목의 소관 업무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제주도 전체를 총괄하는 기능과 제주 지역에 해당하는 전라도 관찰사 업무의 일부를 넘겨받아 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목사보다 비중을 두고 임명하였던 것이다. 제주 목사 명칭 앞에 ‘행(行)’자가 붙어 행제주 목사(行濟州牧使)라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제주 목사를 비롯한 수령의 임기는 고려 시대의 경우 3년이 원칙이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왕대에 따라 임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즉, 조선 개국 초에는 30개월이었다가, 1423년(세종 5) 7월에 구임법(久任法)이 실시되면서 그 후 수령의 임기는 60개월[1,800일]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당상관 수령 및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지 못하는 지역의 수령 임기는 30개월(900일)이었다. 따라서 제주 목사나 정의현감·대정현감의 임기는 30개월이었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관리 임용에 엄격하게 상피제(相避制)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제주 출신이 제주 목사로 임명될 수 없었다. 제주 목사 재임자 중에 제주 출신이 없는 것은 그러한 연유이며, 제주판관이나 정의 현감·대정 현감의 경우는 예외적인 몇 사례가 있을 뿐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수영의 신도비위로는 경주김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통덕랑을 지낸 김추와 칠곡군수를 지낸 김경성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마당대(場峙)와 차돌배기
조선 중기 대안리 경주김씨 집안에 칠곡군수(柒谷郡守) 경성(景聖)의 아들 중 추(楸)가 있었다. 추는 날 때부터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어 집안에서는 이를 감추고 키웠는데 그는 자라면서 힘이 세고 지혜가 남달랐다고 한다.
일찍이 마을 앞 산위에 넓찍한 터에서 무예를 닦고 주위에 있는 큰 차돌을 가지고 놀았는데 마치 공기돌 다루듯 하니 모두 놀랬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가지고 놀던 차돌(크기 1.5m, 둘레 1.5m)을 산아래 마을을 향하여 던졌는데 그 돌은 5리나 날라가 마을 입구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와같은 소문이 널리 알려져 나라에서는 통덕랑(通德郞)의 벼슬을 주었는데 뒤에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는 것이 탄로되어 불길하다하여 잡아다 처형을 하였으나 뒤에 그 억울함을 호소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추증하였다고 한다. 그가 무예를 닦은 곳이 마당대(場峙)이고 마을 앞에 떨어진 차돌을 사람들이 ‘차돌베기’라 불렀는데 그 돌은 1990년도 초까지 도로변에 있었는데 그 뒤 도로확장시 없어지고 그의 무덤은 지금까지 큰골 입구에 남아있고 묘앞에 이와같은 사실을 기록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