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청북도 내고장구석구석살펴보기

연천문화원 원나라 기황후 릉터의 석양(漣川文化院 元나라 奇皇后 陵터의 石羊)

댓글 0

전국방방곡곡/연천(漣川)

2019. 2. 17.

 

 

연천문화원 화단에 있는 원나라 기왕후 릉터의 석양입니다.

이 석양은 연천읍 상리 제궁마을에서 2015년 3월 3일에 수습하였다.

석양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많은 행주기씨 종중의 후손들이 많은 수고를 하였다.

기황후에 대하여서는 전문가들 조차 많은 이야기가 서로 대립되는 부분이 많다. 더 많은 합의점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연천문화원은 수차례에 걸쳐 기황후에 관한 학술조사를 많은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열었다.

 

고려 출신으로 중국 원나라 황후까지 오른 기황후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6일 연천문화원은 ‘기황후릉의 종합적 연구 학술회의’를 열어 연천군에 위치한 기황후릉터(奇皇后陵止)의 재평가와 역사 바로잡기에 나섰다.
학술회의에서는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황후릉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준용 연천문화원장은 “그동안 정확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문화재청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전해오고 있다는 전(傳) 기황후릉터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그동안의 역사적 사실과 물증 등을 통해 꼬리표를 떼야 한다”고 말했다.

기황후에 대한 역사가 원나라가 아닌 명나라에서 씌여져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기황후는 고려에서 원나라에 공녀(貢女)로 바친 것이 아니라 혼인동맹을 위한 사돈관계를 맺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허흥식 한국중앙학 연구소 교수는 “고려와 원나라는 종속관계가 아닌 오랜 기간의 혼인동맹을 통한 사돈관계였다”면서 “기황후 역시 공녀가 아닌 혼인동맹을 위해 원나라 황실의 신부 후보로 선출된 것”이라고 밝혔다.


허 교수는 “원사(원나라 역사)는 원나라가 아닌 명나라에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썼기 때문에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 역사로 볼 수 없다”면서 “이 같은 트라우마로 역사학자들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원나라와 기황후를 대해왔다”고 주장했다.<중부일보(http://www.joongboo.com)>

 

 

 

기황후릉을 발견하게 된 계기 또한 후손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석양을 발견하게 된 계기 또한 다음과 같다.후손 기남용씨의 이야기 이다. 

결혼기념일을 사흘 앞둔 2015년 2월 28일, 인천 강화도에서 사업을 하는 기남용(74)은 꿈을 꾸었다. "공장장이 나더러 짐승 한 마리 키우시라고 했다. 그러마 했더니 커다랗고 하얀 짐승을 또 주면서 '병든 놈 하나 더 키우시라'는 것이었다. 꿈이었다." 기남용은 5000원짜리 로또 복권 두 장을 사서 지갑에 넣고는 잊어버렸다. 눈 내린 결혼기념일 아침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서 연천에 있는 조상 할머니 묘 터로 찾아갔다. 경운기가 뚫어놓은 길 따라 덤불까지 갔더니 길섶 눈틈으로 하얀 돌이 나와 있었다. 작대기로 파보니 무덤 앞에 흔히 있는 석양(石羊)이 아닌가. 온전한 석양 한 마리와 부서진 석양 한 마리를 찾았고, 달려온 동생이 한 마리 더 찾았다. 텅빈 구릉 주소는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리 산 145다. 당첨되지 못한 로또 복권을 꺼내며 기남용이 말했다. "지금이야 텅 빈 구릉이지만 이곳은 우리 할머니, 고려 말 원나라로 시집갔던 기황후(奇皇后)가 묻힌 터다."

 

 

 

석양들의 모습은 그간의 세월과 함께 형체를 잘 알아볼수가 없다.

연천문화원에서 기황후에 관한 연구와 학술관련회의도 많치만 석양의 관리등에도 조금 더 신경을 쓰고 많은 사람들의 기황후와 관련된 새로운 테마등을 찾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기황후와 떼어 놓을수 없는 사람이 고려출신 고용보이다

고려 출신 환관들은 자신들이 황제에게 받는 신임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를 사로잡을 수 있는 고려여인을 물색했습니다. 기씨 소녀가 연경에서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눈에 띄었던 것은 이런 점에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소녀 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습니다. 기씨 소녀는 미모뿐만 아니라 양반가 출신으로서 배운 교양이 있었으며 여기에 어린 소녀답지 않은 담력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용보는 기씨 소녀라면 황제 순제(재위 1333~1368)를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궁녀로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지름길은 황제의 주변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용보는 기씨 소녀를 순제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궁녀로 시작된 황제와의 만남은 기씨 소녀의 인생을 다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원사元史》 후비열전에 ‘순제를 모시면서 비(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더욱 순제의 총애를 받았다. 라고 기록된 것처럼 그는 곧 순제를 사로잡았습니다.
여기에는 고려에 대한 순제의 남다른 추억도 작용했습니다. 명종明宗의 장자로서 황태자였던 토곤 테무르[妥懽帖睦爾 : 순제]는 1330년 7월 원 황실내부의 권력다툼에 패해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지금의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1년 5개월가량을 대청도에서 보냈는데,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제국의 후계자에서 고려의 한 작은 섬에 유배되는 처지로 전락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고려에 대한 남다른 추억을 갖게 했습니다.

 

 

 

기황후에 관한 위키백과의 내용입니다.

당시 고려는 30여년간 원나라의 침략에 맞서 항쟁하다가 항복함으로써 직접적인 합병은 면하였지만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이 된 상태였다.

기황후가 제1황후가 되면서 그녀의 가문과 그녀의 오빠 기철은 고려에서 당대의 대표적인 권문세족으로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기철은 친원파들과 함께 4차 입성책동을 주도해 원이 충혜왕을 퇴위시키도록 하는 등 고려의 국정을 농단하는 한편 전횡을 일삼았고, 이에 보다못한 공민왕은 원의 영향력이 약해진 1356년 기철 일족을 비롯해 친원파를 대대적으로 제거했다.

 

기황후는 원 혜종을 설득하여 공민왕을 폐위시키자고 주장했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했다. 그러나 고려가 이를 따르지 않자 기황후는 덕흥군에게 원나라 군사 1만명을 주어 고려 정벌을 명했고, 이들은 평안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최영·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했다.

한편 기황후가 공녀 폐지를 했느니 입성론을 막았느니 하는 주장들이 존재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먼저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한 친원 세력의 배후이자 중심인물'이라고 말했다. 순제 때 원으로 보내는 공녀가 중단된 사실을 들어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다'면서 '당시 관점에서나 지금 관점에서나 기황후가 고려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다'고 단언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정책실장으로 재직중인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교수는 “고려 때 기황후를 모델로 해 공녀가 더 늘었다”며 “기황후가 당시 권력 기반을 위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원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결과 원나라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고려 공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1343년(충혜왕 복위 4) 역시 원나라에서 이운(李芸)·조익청(曹益淸)·기철(奇轍) 등이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다.  동생이 입성론을 일으키는데도 기황후가 이를 막으려 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이곡이 순제에 상소를 넣어 중지시켰으나 기황후는 오히려 박불화를 시켜서 공녀를 계속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궁극적으로 그녀가 황후로 있던 시기 말기는 원 제국 자체가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여러 어려운 요구를 하기 어렵고 본국 관리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러 요구가 사라진 것이다. 이를 왜곡해서 해석하여 위와 같은 사실를 왜곡하는 주장이 나타난 것이다.

 

 

궁골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아스라한 전설 끄트머리입니다.

원나라 세조(世祖) 홀필렬(忽必烈)[쿠빌라이칸]은 중국에서 황후감을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고 고려의 한 지역에 아름다운 서기(瑞氣)가 어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홀필렬이 이상히 여겨 측근에게 물어보니 귀인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홀필렬이 부하를 데리고 서기가 어린 옥녀봉 아래에 와 보니 서기가 기골이 장대하고 아름다운 기씨 처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홀필렬은 기뻐하며 기씨 집에 찾아가 부모에게 절을 올리고 사위로 삼아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부모는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였으나 기씨가 은근히 바라는 기색이라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기씨 처녀를 황후로 맞이한 홀필렬은 황후의 부모를 위해 기씨가 탄생한 지역에 웅장한 궁궐을 세웠다. 그 궁궐을 세운 곳이 바로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궁골마을이다. 지금은 묵정밭이 되어 버렸지만, 지금도 땅을 파면 부서진 기왓장이 나온다고 한다.

이와는 다른 내용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어느 날 아침 홀필렬이 세수를 하고 있는데, 공중에서 까치가 두어 번 울더니 세숫대야에 단추 한 개를 떨어뜨리고 갔다. 그 단추는 옥으로 만든 것이었고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홀필렬이 세수를 다한 후에 의관을 정제하려다 보니 옥관자(玉貫子)가 보이지 않았다.

한편 기씨가 세수를 할 때 까치가 두어 번 울고 갔는데, 세수를 한 후에 저고리를 입으려고 보니 단추가 없어져 있었다. 또 며칠 후 세수를 하는데 또 까치가 울더니 세숫대야에 옥관자를 떨어뜨렸다. 기씨가 이상히 여겨 옥관자를 비단 헝겊으로 쌌는데, 이상한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홀필렬은 옥관자를 찾으려고 점성가를 불러 알아보았다. 점성가가 하는 말이 동쪽 어느 처녀가 옥관자를 가지고 있는데 황제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며, 동쪽으로 서기가 어린 곳을 찾아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점성가의 말을 들은 홀필렬은 기씨를 찾아갔다. 홀필렬은 기씨의 단추를 자신이 가지고 있고, 자신의 옥관자를 기씨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홀필렬은 그동안 중국 여자와 수차례 결혼을 했으나 첫날밤이 지나면 여자가 어김없이 죽고 말았었다. 그러던 중 육척 장신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행동이 호걸남아와 같은 기씨를 보고서 홀필렬은 기씨가 자신의 천생연분임을 깨닫고 기씨를 배필로 맞이하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