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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면 예양리 장재학의열비(燕東面 禮養里 張在學義烈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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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방방곡곡/세종특별자치시

2019. 10. 8.



장재학(張在學)은 결성인으로  이명은  鏡菴, 止山이다.

1862년 7월12일 연기군 동면 예양리 1-9번지에서 출생하여 1919년 1월4일 별세하였다.


예양리는 미호천이 흐르며 비교적 낮은 구릉지대를 이루고, 넓은 경지가 전개되어 농사에 알맞다. 자연마을로는 강촌, 미꾸지, 산속골 등이 있다. 강촌은 미꾸지내 옆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꾸지는 미꾸지내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내의 이름을 따서 미꾸지라 칭하였으며 이곳에서 어진 사람들을 많이 길러 냈다고 한다. 산속골은 양골 북쪽 산 속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에 속해 있다가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으로 편입되었다.

결성장씨의 집성촌이다.



일제의 민적조사와 납세정책에 저항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15년 3월 12일 충남 연기(燕岐) 조치원(鳥致院) 헌병분견소 소속 헌병 야나기사와 도지로[柳澤藤次郞]가 민적정리를 위해 동소에 비치된 민적부(民籍簿)를 가지고 민적조사를 시행하자, 이를 부당하다고 생각한 장재학은 ‘본인은 일본신민(日本臣民)이 아닌데 일본관헌이 조선시대에 등록된 자신의 민적부를 소지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민적부 중에서 본인에 관계된 일부분을 찢어서 소각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15년 5월 5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소위 형법 제258조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6년 4월 출옥 후 일제 식민지지배정책을 전면 부정하면서 지속적으로 일제의 납세정책에도 반대하였다. 일제가 그의 집안 재산을 강제 압류 집행하는 등 갖은 수단을 동원했으나, 그가 굴복하지 않자 1917년 1월 23일 그와 아우 장재규, 장남 장화진을 전남 고흥의 거금도로 유배를 보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휘는 재학(在學)이요

간재(艮齋) 전선생을 추종하더니 선생을 따라 서해를 건너려다가 노모로 인하여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경술년 이변에 통곡하고 서책을 폐하더니 을묘년 정월에 일본이 민적법을 개편하고 저희들 연호를 쓰게 하므로 반항하다가 면사무소로 붙들려 가서 일 헌병이란 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민족의 호적이 비록 너희들에게 짓밟혔으나 너희들의 호적이 아니거늘 개편하라는 것은 무슨 도리인고.

일 헌병이 말하되 일한이 합병했으니 역시 우리 일본국민이다. 그러므로 고쳐서 차별을 없앨 방침이니라.

선생이 울분하며 내가 학문을 닦은 것은 본래 국가민족을 위함이거늘 이제 오랑캐 백성이 될가보냐 하고 호적을 찢어 불태우며 왜놈의 호적은 결코 아니 쓸 것이다. 일 헌병이 조치원 헌병소로 송치하니 무리가 둘러서서 힐난하기를 무슨 까닭에 호적을 찢었는고!

대답하기를 너희가 우리나라를 강탈하므로 우리 민족의 원한이 뼛골에사무치거늘 이제 호적을 고치고 도장을 받는 것은 우리민족의 큰 수치이다.

나는 죽어도 능욕을 받지 않으려한다. 일 헌병이 말하되 이(李)왕이 호의로 물려줬거늘 어찌 강탈이라 하는고 선생이 소리를 높혀 이것은 일본의 배신이요

역신들의 매국행위이다.우리 임금이 어찌 선양할 뜻이 있었으라!

일인이 호적 찢은 법을 들어 조치원으로 압송했다가 공주감옥을 거쳐 서울 구치감에 수금했다.

왜인 판관이 달래기를 비록 죄는 크나 자복하면 용서하리라.선생이 눈을 흘겨보며 나는 본래 한민족이다.

내가 호적을 찢은 것은 대의를 천명함이거늘 무슨 오해가 있겠느냐!저들이 성내여 진범이라 소리치니 선생이 죽기를 작정하고 목을 매었으나 이루지 못했다.선생이 또 공기(사기접시)한개를 들어치니 소리가 요란하고 그중 날카로운 조각을 집어 삼키니 옥중이 진동했고 의사가 기계를 가져다 사기조각을 빼니 피가 상에 가득했다.

옥중에 한사람이 회유해 이르되 당신의 강명함으로 옥을 나가는 날에는 뚜렷한 공을 세울 것인데 어찌 옥사를 자청하는고!

선생이 말하되 을사당년에 여러분이 순국했으나 합병은 되었고 호적을개편할 때에 또한 죽지 아니하지 못하겠느냐

내가 이토록 항쟁하는 것은 대한민족이 죽기보다 저희백성이 되고자 아니함을 밝힘이니라.

왜로의 판결이 5개월 사역을 경정하니 선생이 성내며 오랑캐가 내 국모를 죽이고 황제를 욕하고 나라를 빼앗았으니 우리민족의 원수라.

내 힘이 약해 너희를 치지 못하지만 사역은 하지 못하겠다고 머리를 벽에 부딪쳐 유혈이 낭자하고 인사불성이다.

왜로가 차에 실어 다른 곳으로 옮겨 미음을 권하되 먹지 아니하고 1년 만에 풀려나니 피골이 상연했다.

또 세금을 내지 아니하니 왜로들이 위협하거늘 선생이 꾸짖기를 한민족의 토지를 갖고 오랑캐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불충불의한 짓이니라.

왜로가 재산과 가산을 차압해 수탈하니 빈궁이 심하되 항상 태연했다.군수 아모가 와서 이르기를 천운을 무시하고 공연히 고집하면 당신도 이름없이 죽고 자손은 어찌하려하오.

선생이 소리를 가다듬어 2천만 민족이 치욕을 당하는 판에 한집에 이해를 어찌 의논하랴.

병진년 겨울에 일헌병들이 몰려와 상부의 명령이라 하며 장 모형제가 보안방해죄로 형은 전라도 고흥군 거금도에 안치하고

아우는 완도군 소안도에 안치 압송한다.하거늘 아들 화진을 불러 경계하되 바른일하다.화를 만나는 것은 군자의 영화니라.

너는 부디 조심하고 봉제접빈을 소홀히 하지 말라.

형제가 동행해서 목포경찰서 유치장에서 쉬고 아우 재규를 경계하되 시종을 같이하여 더욱 굳건한 마음을 가지라.

순천옥을 지나 거금도에 들어가니 섬가운데 송광암이 조용하다.북으로 석대가 있으니 이름이 망경이다.


매양 올라가 눈물을 뿌리며 시를 읊었으니

*****

좋은날 기다리며 망대에 올라보니.

짖푸른 바다에 회포풀길 없어라.

찬란한 수레는 어딘 듯 사라졌다.

흰머리 일편담심 쓸곳이 없구려.

충성이 변하랴 구름깊어도

파산에 젓대소리 처량도하다.

양위분 춘추가 한창이시니

빌건대 백천년 무량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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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중에 부호 선영홍이 두아들로 시중을 들게하고 학문을 닦는데 왜로가 알고 금하거늘 스승을 찾는이가 있으면 간재선생에게 천거했다.

또 연기에서 왜로의 서신이 빈번하되 한번도 받지 않으니 왜로가 우편법으로 얽어 순천감옥으로 세차례나 옮겼으니 그 백여리 도보로 폭염폭풍에 천신만고하되 안색이 변치않고 심한 형벌이 가해질수록 사기가 준엄하니 왜로들이 장 모의구습은 갈수록 더해간다 하며 1년을더 섬에 안치했다.

오는 학자를 엄금할수록 더욱 사모해서 가만히 와 문학하고 서로 말하되 선생의 불행은 섬중에 행복이라.

타이르고 타일러 교화하니 풍속이 일변해서 예법을 볼수 있었다. 3년후 집으로 돌아오니 기미년 만세 부르던때라

왜로가 힐란하기를 또한 만세를 부르겠는가!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민족의 떨쳐 일어섬은 하늘의 뜻이다.만일 일본이 천의를 배반하면 후회가 막급할 것이다.

광무황제 연상에 너무 애통해서 기필코 상경해 왜로의 시군(弑君)한 죄를 성토하려 하더니 마침내 병으로 상에누워 나날이 침중하되 약을 받지 않고

아들 화진을 불러 타이르되 침석에 죽는 것은 내뜻이 아니려니 이제는 할 수 없다.

네 아비는 박덕하니 족히 취할바 없거니와 오직 간옹(艮翁)은 당세 명현이라 가히 나가 가르침을 받으라.

곧으면 영화가 되고 굽으면 욕이 될지니 너는 힘쓰라.

임종에 부녀를 물리고 조용히 운명하니 때는 기미년(1919) 정월 사일이었다.[결성장씨홈피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