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청북도 내고장구석구석살펴보기

동구 신하동 김정묘소(東區 新下洞 金淨墓所)

댓글 0

전국방방곡곡/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2019. 10. 13.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에 위치하고 있는 김정선생의 무덤입니다.

무덤에는 비석 2기와 문인석 2점 그리고 상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김 정(金 淨)은 조선전기 이조정랑, 순창군수,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충(), 호는 충암()·고봉(). 보은 출신. 김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처용()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김효정()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로 판관() 허윤공()의 딸이다.



선생은 조광조선생과 함께 지치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미신타파,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한 향약의 전국적 시행, 현량과 설치 등의 많은 업적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9세 때 서당에서 선생님에게 좌씨전을 배우매 하루 수십 장을 읽어 내려가는데 한번 눈이 간 곳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어서 읽으셨다고 한다. 18세 때 회덕 계족산 법천사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문장으로 참의 송여해의 칭찬을 받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질녀 송씨(쌍청당 송유의 현손 여익의 딸)에게 장가들게 되었다.


선생이 19세 되던 해인 1504년(연산군 10년)에 생원시와 22세 때인 1507년(중종 2년)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정언 수찬 교리등을 역임하다가 부모님의 보양을 위하여 순창군수로 내려와서 봉직하였다. 이때에 담양군수 박상과 함께 폐비 단경황후 신씨를 다시 세우기를 청하는 글을 올린 것으로 인해서 보은의 함림역에 귀양 갔다가 1516년(중종 11년)에 풀려나와 임금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부제학을 내렸으나 임금께 벼슬을 사양하는 글을 올려 사임을 진정하니 조광조가 글을 보내어 벼슬을 받기를 권유도 하고 임금이 불러 간곡히 부탁도 하므로 부득이 벼슬에 나아갔다.


얼마 후에 도승지 이조참판에 승진되었고 다시 형조판서에 올라 조광조 선생과 함께 소격서를 파할 것을 건의도 하고 사전을 바로잡기도 하였으며 소학을 가르쳐서 몽매함을 깨우치는 등 교화를 일으키기에 힘을 다 할 뿐 아니라 현량과를 설치하려 어진 선비들을 많이 뽑아 들이는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1519년(중종 14년)에 화를 당하였는데 당시 영의정 정광필이 힘써서 구원했기 때문에 금산에 귀양가는데 그쳤으나 얼마 안되어서 죄를 무겁게 내려 제주도로 귀양갔으나 집의 김인손 사가 채소권 등이 다시 선생의 조리를 청하여 다음해에 죽임을 당하였다. 죽음에 앞서 선생은 그의 형제들에게 노모를 잘 모실 것을 글로 써서 보내고 36세의 젊은 나이로 일생을 마치었다. 선생은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니 새와 짐승을 잘 그렸으며, 시문에도 비상한 능력이 있었다.


일찍이 선생이 32세가 되던 1517(중종 13년) 청주 남쪽 옛 주안현의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집은 새로이 짓고 살았는데, 이곳이 곧 청주 주안현 탑산리이며,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동구 내탑동에 해당한다.


내탑동에는 그의 묘소 신도비 송부인정려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었으나 대청댐 수몰지구에 들어가게 되어 국비로 선생의 묘소 등 유적이 동구 신하동 묘골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 지역은 대덕군 지역이던 곳이 근래 대전광역시 동구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