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청북도 내고장구석구석살펴보기

동량면대전리연안이씨쌍효각(東良面大田里延安李氏雙孝閣)

댓글 0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2021. 8. 30.

 

 

이시희와 이시걸은 아버지의 중환에 잉어가 약이 된다고 하여 구하려고 했지만, 겨울철이라 못이 얼어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형제가 얼음 위에서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자 잉어가 솟아나왔다. 어느 땐가 약을 구하기 위해 형제가 밤길을 나서자 호랑이가 나타나 지켜 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위독하자 이시희와 이시걸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 병을 낫게 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를 할 때는 3년간이나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병을 얻자 대소변을 맛보며 간호를 했고, 돌아가신 뒤에는 죽을 먹으며 시묘를 하는데, 형제간에 서로 묘소를 지키며 효를 다했다.

 

 

 

1722년(경종 2) 정려되었으며, 1756년(영조32) 형 이시희는 통정대부승정원 우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아우 이시걸은 장사랑에 추증되었다. 쌍효각은 본래 살았던 충주시 살미면 신당리에 1878년(고종 15) 건립되었는데, 이곳이 충주댐으로 인한 수몰 지역이어서 후손들이 1983년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배일마을로 옮겨서 복원했다.

 

 

건물은 모두 단청이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편액과 방형(方形)의 대좌(臺座)에 원두갈석(圓頭碣石)으로 된 쌍효비가 안치되어 있다. 편액에는 ‘유명조선효자 증통정대부 승정원우승지 겸 경연참찬관 이시희장사랑 시걸형제지문 숭정기원후 세차 임인 사월 일명정려후 삼십오년 병자 증직(有名朝鮮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兼經筵參贊官李時熙將士郞時杰兄弟之門崇禎紀元後歲次壬寅四月日命旌閭後三十五年丙子贈職)’라고 되어 있다.

 

 

 

살미면지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여있다.

지금은 수몰되어 사라진 살미면 신당리 247번지 소용목(沼􆩛沐)에 있던 효자정려(孝子旌閭)로 이시희·시걸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것이다. 경종 2년(1722) 이시희(李時熙)와 이시걸(李時杰) 형제의 지극한효성으로 인해 정려가 내려졌다. 또35년 후인 영조32년(1756)에 증직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판문은‘有名朝鮮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兼經筵􆪙贊官􆩷時熙壯仕􆧎時杰兄弟之門崇禎紀元後歲次壬寅四月日命旌閭後三十五年丙子贈職’이라 하여 이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형제의 효행을 기록한 비갈이 비각 안에 있어 자세한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260년 전에 이곳 상로(上로)라는 마을에 조촐한 초가삼간에 노부모를 모시고 두 형제가 살았다. 형의 이름은 이시희(李時熙), 동생의 이름은 이시걸(李時杰)이었으며 관향은 연안(延安)이었다. 이 형제는 효성이 지극해서 효종대왕께서 형에게는 승지(承旨), 동생에게는 장사랑(將仕􆧎郞 벼슬까지 내린 일이있고, 경종대왕 2년(1723)에 왕명에 의해 쌍효각이 건립되었다.
이 형제는 일을 나가도 항상 번갈아 가며 부모 곁을 비우지 않고 지성으로 봉양했으므로 이들의 효행은 항간에 칭송이 자자했다. 어느 겨울날의 이야기다.
모친이 병환으로 눕자 명약이란 약은 모두 구해 써봤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이에 의원에게 물어보니 잉어가 좋다는 말을 듣고‘벽대소’에 가서 얼음을 깨고 애를 썼으나 원래 깊은 물에 잡힐 리가 없었다. 형제가 갖은 방법을 써봤으나 도리가 없어 번갈아 얼음 위에 가서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어느 날 무릎자국의 얼음이 녹아서 구멍이 뚫리고, 그 뚫린 자리로 잉어가 뛰어올라와 약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더 기이한 것은 어느 추운 겨울에 부친께서 병이 나셨는데 백약이 신통치 않고 꼭 산딸기가 약이라고 해서 노력했으나 구할 도리가 없었다. 또다시 험한 산비탈에 가서 모든 것을 금기하고 기도를 올리니 별안간 훈풍과 함께 딸기 송이가 주렁주렁 나타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온다. 이는 모두 형제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탓이라고 명성이 인근에 자자했다.
세월은 흘러 부친은 이미 돌아가시고 늙은 모친을 모시느라 효성을 다하였다.중환으로 실신한 때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위기를 모면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두 형제는 정성을 다해 봉양했으나 원래 노쇠한지라 중태에 빠지고 말았다.
하루는 큰아들이 모친의 병이 낫도록 해달라고 산신께 기도를 올렸다. 별안간 소복을 한 선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네 정성은 가상하나 치병의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즉 연소한 인(人)고기를 삶아 복용하는 길밖엔 없다.’갑작스런꿈을 깨니 꿈이 아닌 산속의 순간이었고 노인은 간 곳이 없다.그 당시 이시희에게는 여섯 살 되는 아들이 월악산 덕주사에 가서 글을 배우느라 통학을 하고 있었다. 이날부터 두 내외는 고심과 초조 속에 뜬눈으로 이삼일을 지냈다. 마침내 결심을 했다. ‘자식은 또 두면 된다. 어머님은 살려야지’하며 산기슭에 솥을 걸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돌아오는 어린 것을 부둥켜안고 솥 앞에 서자 차마 어린 것을 넣을 수가 없어 아들 대신 자기가 솥 속
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뇌성이 요란하더니 눈앞에 먼저의 신선 노인이 서있고 자신이 부둥켜안은 아들은 사람이 아니고 산삼이었다고 한다.
노인은‘내가 네 정성을 시험해 봤노라’며,‘ 장하도다! 하늘이 감동할 효자로 다’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 산삼을 봉양하니 그 모친의 병도 쾌유하고장수했다는 등의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수몰로 후손들에 의해 동량면 대전리 배일마을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