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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면 사동리 박지계신도비(南二面 寺洞里 朴知誡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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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청주시/서원구(西原區)

2021. 4. 8.

 

선생의 휘(諱)는 지계(知誡)이고 자(字)는 인지(仁之)이며 호는 잠야(潛冶)이다. 박씨(朴氏)는 모두 신라(新羅)의 후손인데, 선생의 선조(先祖)는 함양(咸陽) 사람이다. 먼 윗대 선조 증(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사(樞密院事) 박신청(朴信淸)이란 분은 고려(高麗) 때 저명하였고 우리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 박습(朴習)이란 분은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모함을 받아 죽었는데, 이분이 선생의 6대조이다. 증조 박중검(朴仲儉)은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추증받았다. 할아버지 소요당(逍遙堂) 박세무(朴世茂)는 문과 출신으로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벼슬을 추증받았으며 학문과 지조로 명종조(明宗朝)의 명신(名臣)이 되었고 괴산(槐山) 화암 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술한 ≪동몽선습(童蒙先習)≫ 1책이 지금도 세상에 성행하고 있다. 아버지 박응립(朴應立)은 수안 군수(遂安郡守)를 지냈는데, 학문과 덕행을 이어받아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추천을 받아 일찍이 대각(臺閣)의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다.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이숙(李琡)의 딸이다.

선생이 만력(萬曆)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 9월 3일에 태어났는데, 태어나자 숙성하여 풍채가 빼어났다. 참판(參判)
신담(申湛)이 사람을 알아보는 식감(識鑑)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한번 선생을 보자마자 정대한 군자(君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칼에 손가락을 다치자 선생이 놀라 울부짖다가 몰래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아픈 것을 시험해 보고 나서 어머니에게 말하지 말라고 주위 사람을 단속하였는데, 그때 선생의 나이 5세였다. 7, 8세에 이르러 수안공(遂安公)이 안고 말하기를, “네가 글을 읽는다면 아마도 너보다 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제 위에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공자(孔子)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어려서부터 이미 이처럼 뜻이 고상하였다. 9세에 마마를 앓다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혼미해졌으나 신(神)에게 기도하는 것을 보고 눈을 부릅뜨고 꾸짖어 보냈다. 10세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성인(成人)처럼 슬퍼하다가 야위었는데, 갑자기 스스로 각성하여 말하기를, “선친(先親)이 항상 나로 하여금 독서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어찌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졸곡(卒哭)이 지난 뒤로 날마다 과정을 정하여 독서하되, 배운 양의 다과를 적어서 부지런히 하였는지 게으르게 하였는지 살펴보았는가 하면 비록 스승이 일이 있어 겨를이 없을 때에도 반드시 외울 것을 요청한 다음에 배우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나태해질까 염려되어서이다.”라고 하였다. 10세에서 15세에 이르기까지 6년 사이에 과정을 폐지한 날이 겨우 4일 밖에 안 되었는데, 그또한 공복(功服)이 있는 친척이 죽었기 때문이었으니, 꾸준히 근면하여 조금도 간단이 없는 바가 보통보다 훨씬 뛰어났다. 선생이 처음 배울 때 스승이 당시(唐詩)를 아울러 가르치려고 하자 선생이 배우기 싫어하며 말하기를, “뭐하러 이것을 배운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논어(論語)≫를 읽은 뒤로 더욱더 큰 뜻을 분발하여 한결같이 자신을 위하는 학문에 전념한 나머지 날마다 반드시 날이 밝기 전에 세면을 하고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와 저녁이 되도록 꿇어앉아 글을 읽었고 가끔 팔짱을 끼고 단정히 서서 게으름을 막기도 하였다. 대체로 선생은 겨우 동자의 나이에 엄연(儼然)히 대유(大儒)의 기상을 갖추었으므로 본보기로 삼은 사람들이 많았고 또한 머리를 숙이고 수업을 요청한 사람도 있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제천(堤川)으로 피난갔는데, 비록 난리 속에서도 힘을 다 쏟아 맛있는 반찬을 장만하여 세끼의 식사를 맛있게 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그리고 여가가 있을 경우에는 손수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베껴 써 놓고 읽었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괴산(槐山)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어머니가 여러 해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선생이 주야로 부축하고 간호하며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간혹 앉아서 잠을 자도 목침(木枕)으로 이마를 괴고 잤으므로 눈썹이 모두 빠져버렸다. 어머니 병환이 위독하자 허벅지를 베어 피를 받아 드리자 며칠간 연명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여전히 병란(兵亂)이 진정되지 않아 장례에 소요되는 물품 중 빠진 것이 많았는데, 제천 사람들이 선생의 효성에 감동하여 앞다투어 힘을 출연하여 석회(石灰)를 구어 무덤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상복(喪服)을 입을 때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라 나물과 장을 먹지 않아 갑자기 나무처럼 야위어 눈에 사물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향리의 사람들이 더욱더 감탄하였고 비록 무지한 사람도 입을 모아 말하기를, “저 효자는 매우 어질다.”고 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에
허성(許筬) 공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맨 먼저 선생을 왕자 사부(王子師傅)로 추천하자, 선조(宣祖)가 하교하기를, “왕자 사부는 마땅히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출신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을 써야 할 것이다. 박지계는 어떠한 사람인가?”라고 하니, 허성 공이 곧바로 ‘선생은 뜻이 독실하고 학문에 힘써 사부에 합당하다’는 뜻으로 대답하자, 이내 임명하였으나 선생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광해군(光海君)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홍문관(弘文館) 관원 최현(崔晛)이 학문과 덕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동궁(東宮)을 보좌할 것을 요청하였을 때 선생이 추천되어 익위사 좌세마(翊衛司左洗馬)에 임명되고 서연(書筵)의 임무를 겸임하게 되었는데, 선생이 사은 숙배(謝恩肅拜)한 다음 사직하였고 그 뒤 곧바로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임명하였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다.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 공이 서울에 있는 선생의 거처로 찾아왔을 때 광해군이 생모(生母)를 높이려고 의논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왕비(王妃)의 호칭으로 올릴 것을 요청하였다. 선생이 그에 대해 권득기 공에게 예가 아니라고 극구 논하니, 권득기 공이 매우 탄복하였다. 뭇 소인배들이 광해군의 악행을 부추긴 바람에 윤리가 붕괴되고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 공도 참혹한 화를 입고 죽었으나 친구들이 모두 두려워서 회피하고 감히 조문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제문(祭文)을 지어 가지고 찾아가서 전(奠)을 드렸다. 이내 가족을 이끌고 호서(湖西)의 신창(新昌)으로 돌아가 문을 닫고 바깥 사람을 접하지 않은 채 오로지 성현(聖賢)의 글에 힘을 쏟아 읽고 나면 사색하곤 하였다. 그리고 가끔 권득기 공 및 포저(浦渚) 조익(趙翼) 공과 같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강론하면서 마지않고 부지런히 하니,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사표로 우러러보며 사모하였다.

천계(天啓)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3월에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여 맨 먼저 선생을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로 임명하고 특별히 소명(召命)을 내렸는데, 그 내용 중에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그대가 노숙한 덕망을 지니고 오랫동안 초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모한 마음을 가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대는 가마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선생이 명을 받고 서울로 들어가자 곧바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임명하였는데, 누차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았고 일찍이 인대(引對)의 기회를 통하여 맨 먼저 사물의 원리를 궁구하는 설을 개진하였다. 주상이 사친(私親)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 앞서 축문(祝文)의 칭위(稱謂)에 대해 의심하니,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정귀(李廷龜) 공, 부제학(副提學) 정경세(鄭經世) 공과 여러 대신(大臣)들은 모두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선조(宣祖)의 친손자로 들어와 할아버지의 계통을 계승하였으니만큼 방손(傍孫)이 후사(後嗣)로 들어온 것과는 다릅니다. 이미 선조(宣祖)를 아버지라고 일컬을 수 없으니만큼 비록 생부(生父)를 아버지라고 일컬어도 아버지가 둘이 되는 혐의가 없으니, 마땅히 아버지로 일컫고 자신은 아들로 일컬어야 합니다. 그리고 별도로 차자(次子)를 후사로 세워 제사를 주관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은 ≪춘추전(春秋傳)≫에 ‘민공(閔公)과 희공(僖公)은 부자(父子)와 같다.’는 말과 정자(程子)와 범진(范鎭)이 한 선제(漢宣帝)가 사황손(史皇孫)을 추존(追尊)할 때 아버지라고 일컬은 것을 비난한 설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제왕(帝王)의 가문은 오직 대통을 계승하는 것을 위주로 하므로 비록 아저씨가 조카의 뒤를 계승하거나 형이 아우의 뒤를 계승하더라도 부자의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주상께서 이미 선조(宣祖)의 뒤를 계승하였으니, 사가(私家)의 어버이를 아버지라고 일컬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마땅히 정자의 설에 따라 백숙부(伯叔父)로 일컫고 자신은 조카라고 일컬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두 가지 설이 각기 근거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또 전적으로 부자간의 떳떳한 법을 위주로 하여 말하기를, “이미 아버지라고 일컬었을 경우에는 상복(喪服)을 3년간 입지 않을 수 없고 제사를 자신이 주관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어 상소를 올려 계운궁(啓運宮, 인조의 생모)을 대내(大內)로 맞아들여 조석의 문안을 거르지 말고 또 존칭(尊稱)의 예에 대해 거듭 유시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조정의 여론이 들고일어나 선생을 비난하였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소환의 명을 내려 독촉하였고 또 특별히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의 벼슬을 새로 설치하여 선생에게 임명하니, 선생이 상소를 올려 사양하면서 ‘예를 논하다가 사람들의 준엄한 질타를 받아 감히 조정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을 대략 개진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 1월에 영월 군수(寧越郡守)에 임명되었으나 병환으로 인해 부임하지 않았다. 그때 주상이 직언(直言)을 구한다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하교에 따라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제사 중에 종묘(宗廟)의 제사가 가장 중요하고 종묘 중에 아버지 사당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 사당의 예가 잘못되었으니, 아마도 하늘에 영원한 국운을 기원하는 도리가 아닐 것으로 여깁니다. ≪의례(儀禮)≫를 살펴보니, ‘남의 후사(後嗣)로 들어간 사람은 친가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기년복(期年服)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자하전(子夏傳)에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기년복을 입는가? 참최(斬衰, 참최복)는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선제(漢宣帝) 때 담당자가 예에 대해 아뢰기를,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은 남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생가의 부모가 강등되고 따라서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소제(昭帝)의 후사가 되었으니, 어버이의 시호를 마땅히 도(悼)로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 한 선제가 도고(悼考)를 황고(皇考)로 추존(追尊)하고 침묘(寢廟)를 세웠습니다. 범진(范鎭)은 말하기를, “평론하는 사람들이 옳게 여기지 않은 것은 소종가(小宗家)가 대종가(大宗家)에 합쳤기 때문이다.” 하였고, 정자는 말하기를,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은 양가의 부모를 부모로 일컫고 생가의 부모를 백숙부모(伯叔父母)로 일컫되 상복을 낮추어 입어 계통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송 영종(宋英宗)이 생가의 복왕(濮王)을 추존하려고 의논할 때 구양수(歐陽修)와 한기(韓琦)가 복왕을 황고로 일컫게 하려고 하니, 사마광(司馬光) 등 제현(諸賢)들이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의례(儀禮)≫의 그 조목을 따른 것입니다. ≪의례(儀禮)≫에 또 말하기를, ‘임금의 아버지, 처, 큰아들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자하전에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기년복을 입는가? 임금에 따라 상복을 낮추어 입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큰아들은 임금이 참최복(斬衰服)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임금의 아버지란 것은 임금이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만약 임금이 되었다면 그 또한 임금이므로 마땅히 참최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임금의 아버지를 위해 기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는 임금이 되지 않았고 아들이 혹시 할아버지에게 나라를 물려받았을 경우에 그 사람이 이른바 임금의 아버지로서 임금은 참최복을 입고 신하는 마땅히 임금에 따라 기년복으로 낮추어 입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정원 대원군(定遠大院君)이 비록 임금은 되지 않았으나 전하께서 이미 왕위에 오르셨으니, 이게 어찌 ≪의례(儀禮)≫의 경문(經文)에 이른바 임금의 아버지가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가 임금이 되지 않았으나 그 이유로 인해 아버지를 백숙부라고 일컬은 적이 없으니, 아버지를 섬기는 예가 어찌 방친(傍親)이 남의 후사로 들어간 뒤에 생가의 부모를 위하는 예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의례(儀禮)≫에 이미 앞에 한 조목을 만들어 방친이 방친의 후사로 들어가 방친에게 나라를 물려받은 예를 밝히었고 또 뒤에 한 조목을 만들어 손자가 할아버지의 후사로 들어가 할아버지에게 나라를 물려받은 예를 밝혔는데, 두 조목의 뜻 차이가 천만리만 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장총(張璁)과 계악(桂萼)이 기년복을 참최복으로 변경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앞에 조목의 죄인입니다. 지금 만약 참최복을 기년복으로 변경한다면 뒤의 조목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이 점에 대해 논한 자들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하가 이른바 임금이 참최복을 입는다고 한 것은 모두 임금이 되지 않은 세자(世子)를 가리킨 것이다. 만약 세자가 아니고 혹시 서자(庶子)일 경우에는 아들이 참최복을 입을 수 없고 따라서 아버지라고 이를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 논설은 정말 이치에 어긋난 말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을 볼 때 물론 장유(長幼)와 적서(嫡庶)의 구분이 있습니다만,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볼 때 장자와 서자의 구분이 있어 그에 따라 상복을 낮출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은 똑같습니다. 어찌 아버지가 세자가 되어야만 아버지로 삼는단 말입니까?

선생의 논설이 위와 같았다. 선생이 이미 주상에게 고하고 또 여러 벗들과 변론하는 등 마지않고 반복하면서 ‘후세에 성인(聖人)이 나와도 나의 말을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고 선생의 문인
이의길(李義吉)의 상소에도 한결같이 선생의 설을 위주로 하였으나 사계(沙溪) 등 제공(諸公)들과는 상반되었다. 선생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은 것은 정말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예를 논하는 사람들은 본디 논쟁이 끝없다는 이름이 났는가 하면 경전(經傳)을 해석하는 법도 한 가지 설이 있다. 대체로 천고(千古)에도 없는 큰 전례(典禮)를 당하였으니, 비록 갑자기 의논이 원만하게 합치되지는 않았지만 인지(仁智)의 견해가 다르다고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1) 선생이 20세 때 이미 ≪위첩정명변(衛輒正名辨)≫을 저술하였는데, 그 의견이 본래 이러하였는데,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더러 옳지 않다고 지목하였으니, 그 사람은 전혀 선생을 모른다고 이를 만하다.

2월에 서북변의 장수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선생이 처음에는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이 임진년(壬辰年)에 처신한 고사를 인용하여 조정에 나가지 않은 것을 의리로 여겼다가 이윽고 어가(御駕)가 남쪽으로 피란갔다는 말을 듣고 남양(南陽)의 임시 처소에서 공주(公州)로 달려갔다. 이괄이 참살되자 사계(沙溪)와 같이 입시(入侍)하였다가 선생이 백성을 기르고 군사를 다스리는 대책을 극구 개진하고 또 말하기를, “종사(宗社)의 신령함에 힘입어 큰 역적이 평정되었으나 백성들이 부역(賦役)에 시달려 잇따라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토적(土賊)으로 변할까 염려됩니다. 유의하여 돌아보아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니, 사계도 나아가 말하기를, “박지계의 말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이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수라의 반찬을 줄여야 하겠지만 종묘의 제사는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임금의 효도는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근본입니다. 백성들을 전부 살릴 수만 있다면 비록 제물(祭物)을 줄여도 거북스러운 바가 없을 것으로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이 또 마땅히 강론해야 할 서적이 무엇인지 물으니, 선생이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강론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해에 다시 신창(新昌)으로 옮겨가 살았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 계운궁(啓運宮)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다시 수천 마디의 말이나 되는 상소를 초안하여 반드시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는 뜻을 극력 개진하였으나, 선생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전에 올린 상소를 시행하지 않았으므로 억지로 시끄럽게 할 것이 없다’고 여겨 올리지 않았다. 청풍 군수(淸風郡守)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오랑캐가 칩입하여 주상이 강도(江都)로 피란갔을 때 조정의 의논이 강화(講和)로 정해졌다. 선생이 국력(國力)이 떨치지 않은 것을 통탄한 나머지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우리나라는 동쪽 변방의 신하로서 나라를 구해 준 명(明)나라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금 북쪽의 적은 명나라를 탈취하려고 뜻을 두고 있으므로 의리상 마땅히 온 나라의 사람들을 모두 동원하여 압록강(鴨綠江)에서 죽도록 싸워야 할 것입니다. 곧바로 적병의 소굴로 쳐들어가 추악한 오랑캐를 소탕하기란 사세상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적병이 마침 적은 군대로 우리나라로 깊이 들어왔으니, 바로 병서(兵書)에 이른바 적병을 유인하는 술책에 합치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싸워보지도 않은 채 강화를 체결하고 그들을 돌려보낸다면 명나라에 할말이 있겠습니까? 임진년(壬辰年)에 팔도(八道)가 함락되어 선조(宣祖)가 요동(遼東)으로 넘어가려고 하였으나 왜적(倭賊)과 강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명나라가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고 천하의 힘을 다 쏟아 우리나라를 구제해 주었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다시 선조처럼 하신다면 어찌 빛나지 않겠습니까?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도(道)만 밝히지 그에 대한 효과는 따지지 않고, 의리만 바르게 하지 그에 대한 이익은 꾀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목격한 것으로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밝혀 보겠습니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왜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와서 길과 군량을 빌려 주고 같이 명나라를 침범하자고 요청하니, 그때
조헌(趙憲)이 이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하고 왜국의 사신을 함거(檻車)에 실어 보낼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정말로 조헌의 말대로 하였다면 명나라가 반드시 미리 송응창(宋應昌)ㆍ이여송(李如松)과 10만의 병력을 보내어 동래(東萊)에 주둔하도록 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반드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환난이 없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도의(道義)로 볼 때 타당한지의 여부부터 논하소서. 그러면 이익을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이롭지 않은 바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로움이 전쟁에 있고 강화에 있지 않은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숭정(崇禎)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에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연달아 임명하고 곧바로 내섬시 정(內贍寺正)으로 승진되어 부임하려던 차에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국상(國喪)이 났고 도중에 또 집의(執義)에 임명하여 불렀는데,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므로 도성에 들어가 사은 숙배(謝恩肅拜)한 다음 곧바로 사양하는 상소를 세 번 올려 면직되었다. 주상이 넉 달간 고기 반찬을 들지 않아 건강이 좋지 않은 지 여러 날이 되었으므로 선생이 상례(喪禮)의 중정(中正)에 대한 도리를 깊이 개진하니, 주상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그때 마침 우리나라 사신이 명나라 호부 상서(戶部尙書) 송헌(宋獻)과 나라의 예에 관해 논하였는데 그의 말이 선생의 말과 합치되었으므로 큰 의논이 결정되었다. 이에 정원 대원군(定遠大院君)을 원종 대왕(元宗大王)으로 추존(追尊)하여 신주를 종묘로 들이게 되었으므로 선생이 주장한 아버지의 사당에 관한 설이 시행되게 되었으나, 흘겨본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선생이 귀향(歸鄕)하기로 뜻을 굳히었다.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공이, 선조조(宣祖朝)에서 우계(牛溪)에게 경연(經筵)의 임무를 겸임하게 했던 고사를 인용하여 그처럼 선생을 대우하고 또 선생으로 하여금 서연(書筵)에 출입하여 동궁(東宮)을 보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선생이 스스로 마음이 편치 않아 휴가를 받아 귀향하였는데, 전후 총애가 매우 융숭하여 나가면 녹봉 이외에 국고에서 곡식을 대주었고 물러나면 지방 장관으로 하여금 세시(歲時)마다 문안을 드리도록 하였다. 선생이 자신을 알아준 주상의 은혜에 감격하여 한번 아는 바를 다 쏟아 보답하려고 하였다. 그때 오랑캐와 관계가 점점 나빠졌다. 선생이 비록 집에 있었으나 걱정을 금하지 못한 나머지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 6월에 다시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그 큰 요점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을 위한 계책은 마땅히 위로는 명나라를 위해 오랑캐를 물리치고 아래로는 조상을 위해 강토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도리를 다하려고 할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부역(賦役)을 가볍게 해주어 백성으로 하여금 근본인 농사에 힘써서 부강한 업적을 이룩해야 되고 부강을 이룩하려고 할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서울의 각 부처와 지방 수령과 간사한 백성 등 세 가지 폐단을 제거해야 되고 세 가지 폐단을 제거하려고 할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과거(科擧)와 전형(銓衡)의 잘못된 점을 변통하여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고 벼슬길을 맑게 해야 되며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고 벼슬길을 맑게 하려고 할 경우에는 그 근본이 임금의 세 가지 달덕(達德)에 있는데, 달덕이 이룩되는 것은 먼저 하나에 집중하는 공부를 해야 됩니다.

라고 하였는데, 앞뒤 수만 마디의 말 속에 본말이 다 갖추어져 7년 내지 5년의 규모에 가까웠다. 과거의 잘못된 점에 대해 논하기를,

하늘은 땅보다 우선이고 임금은 신하보다 우선이고 남자는 여자보다 우선이니,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선비가 아래에 있는 것은 여자가 집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가 집안에 있을 적에 반드시 남자가 먼저 청혼의 폐백을 보내야만 시집을 가는 것은 여자의 정도이고 선비가 아래에 있을 적에 반드시 임금이 불러야만 부름에 응하여 나가는 것은 선비의 정도입니다. 과거의 법은 본래 한 무제(漢武帝) 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천자(天子)가 반드시 먼저 조서(詔書)를 하달하여 현명하고 방정하며 직언(直言)하는 인사를 구하라고 하면 주군(州郡)에서 인사를 선발하여 올렸는데, 동중서(董仲舒)와 공손홍(公孫弘)의 부류들은 모두 임금이 구하는 것에 호응하여 나갔지만 임금이 신하보다 우선되는 의리를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주자(朱子)가 건의한 덕행과(德行科)나 조광조(趙光祖)가 건의한 현량과(賢良科)나 이이(李珥)가 건의한 선사법(選士法)은 여전히 임금이 우선이라는 의리가 존재하여 모두 선비가 스스로 진출을 구하는 폐단이 없었는데, 그 법은 선비로 하여금 예의(禮儀)의 습관을 익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과거는 선비가 먼저 관청에다 이름을 기록하고 나아가 스스로 재주를 시험하여 벼슬길을 구하고 있으니, 예의 염치가 없는 바가 여자가 스스로 남자에게 달려가 첩(妾)이 되는 것이나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남자가 폐백을 보내어 청혼하면 처(妻)가 되고 여자가 스스로 달려가면 첩(妾)이 된다.”고 하였으니, 스스로 달려간 여자는 첩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군자(君子)가 집안에 예로 청혼한 처가 없고 스스로 달려온 첩으로 정실(正室)의 처를 삼았다면 가정의 도리가 얼마나 바르지 못하겠습니까? 나라에 예의를 밟아 진출한 사람은 없고 과거를 통해 진출하여 녹봉을 구하는 인사가 조정에 가득할 경우에는 조정의 바르지 못함이 어찌 이것과 다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그 의리가 심오하고 뜻이 정대하였다. 이것 하나를 보면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말을 통해 진의를 아는 사람은 선생이 간직하고 있는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집의(執義)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2월에 주상이 특별히 하교하기를, “박지계는 빈한에 안주하여 도를 지키고 은둔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살았다. 내가 누차 부른 바람에 가끔 마음을 바꿔 먹고 올라왔다가 얼마 안 되어 나를 버리고 떠났으므로 나의 마음이 허탈하여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올해도 해가 저물었으니, 지방 장관으로 하여금 문안 인사를 드리고 음식물을 넉넉히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선생이 경건히 받은 다음 대궐을 향하여 사은(謝恩)하였다.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 7월 13일에 아산(牙山) 임시 처소에서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 온종일 비바람이 휘몰아쳐 나무가 모두 뽑혔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었다. 처음에 서산(瑞山)에다 장례를 치렀다가 9년 뒤 계미년(癸未年, 1643년 인조 21년)에 청주(淸州) 남면(南面) 등등리(登登里) 자향(子向)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경연의 신하가 선생에게 포상의 벼슬을 추증(追贈)할 것을 요청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추증하였고 현종(顯宗)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 아산 오현 서원(五賢書院)에 배향되었다.

선생은 효성을 하늘에서 타고났다. 어머니가 병환 중에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그때 구해 드리지 못하였으므로 수박을 볼 때마다 오열하며 다시금 맛보지 않았다. 난리를 당하여 초상(初喪)부터 장례를 끝마칠 때까지 예절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하여 평생 동안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거실도 매우 누추한데다가 좌석에 짚자리를 하나만 펴놓고 밤에는 반드시 옷을 벗고 바로 그 위에서 자면서 스스로 폄하(貶下)하였다. 일찍이 정자(程子)의 말을 외우면서 말하기를, “차자(次子)가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태만한 마음만 기르기에 알맞다.”고 하면서 할아버지 이하 기일(忌日)과 사시(四時)의 제사 때 반드시 집에다 지방(紙榜)을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기 전부터 목욕 재계(沐浴齋戒)하고 제기(祭器) 및 우물과 절구통을 모두 친히 살피며 세척하였다. 상(喪)을 막 당하였을 때 야위어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의원의 말에 따라 술 몇 잔을 들면서 원기를 부축하였다. 그뒤에 정신이 해이해져 사색에 방해가 된 것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마시지 않았다. 어머니를 여읜 뒤로 다시금 생업(生業)을 물어보지 않고 학문을 닦는 데 뜻을 기울였다. 별좌공(別坐公) 박지겸(朴知謙), 군수공(郡守公) 박지양(朴知讓), 정랑공(正郞公) 박지경(朴知警) 등 여러 형들과 같이 서로 지기(知己)로 삼아 게을리하지 않고 학문을 강론하며 닦았다. 여러 형들도 모두 학문으로 저명하였으나 의리의 심오한 부분이나 경곡(經曲)의 의문점에 있어서는 모두 옷깃을 여미고 선생에게 질문하였다. 그 학문은 효제(孝悌)에 근본을 두고 실천에 힘쓰되, 한결같이 사서(四書)를 위주로 하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독실히 믿어 마치 천지의 신명처럼 여기었다. 몸으로 실천할 때 이미 이것을 준칙(準則)으로 삼았고 임금에게 부지런히 정성껏 말씀드린 바도 이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강론하다가 혹시 의심스러운 점이 있을 경우에는 ‘이는 반드시 주자가 초년에 말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나중에 상고해 보면 과연 그러하였다. 본 조선조(朝鮮朝) 선비 중에 율곡(栗谷)과 우계(牛溪)를 매우 추앙하며 말하기를, “동방에서 두 현인보다 출처(出處)를 정대하게 한 사람은 없다.”고 하는 등 사모하고 본받으면서 두 분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고 두 분을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의논도 선생이 맨 먼저 제기하였다.

선생이 괴산(槐山)에서 살 때였다. 전유형(全有亨)이란 사람이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에게 의문난 점을 물어보았는데, 서사원 공은 바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수제자로서 일찍이 정자와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전유형의 질문에 대답하였으나 조금 착오된 바가 있었다.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그렇지 않다는 점을 분변하여 논하니, 서사원 공이 깜짝 놀라 감복하며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그러한 견식이 있을 줄 예상하지도 않았다.” 하고 이내 선생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또 선생보다 나이가 많은 자기의 아들로 하여금 어른을 대하는 예로 선생을 섬기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50년 동안 글을 읽었으나 우매함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공은 어찌하여 그처럼 일찍 견식이 통달하였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그뒤에 선생의 편지를 보고 또한 매우 감탄하며 ‘선생의 소견이 퇴계(退溪)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말하였다. 이때부터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의 선비들이 감히 선생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박자(朴子)라고 불렀다. 선생이 예학(禮學)에 매우 힘을 썼는데도 여전히 ‘예를 전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의문난 조문과 변칙적인 예절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서사원 공을 통하여 한강에게 물어본 뒤에 실행하였다. 관혼상제(冠婚喪祭) 등 네 가지 예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르면서 매양 말하기를, “≪가례(家禮)≫가 완벽한 글이 아니라고 말한 사람의 마음씀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일찍이 포저(浦渚) 조공(趙公, 조익(趙翼))과 같이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에 대한 공부와 효과의 의의를 논하면서 조공이 주자의 주석을 바꾸기 좋아한 것을 규계하였고 또 문인 이의길(李義吉) 방숙(方叔)과 같이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저술하여 되풀이해서 강론해 온오한 뜻을 천명하였다. 대체로 선생은 학문의 힘이 충분히 축적되고 행실도 흠뻑 부합되었으므로 기풍을 듣고 덕행을 보는 사람들이 진실로 감복하고 심취(心醉)한 사람들이 많았다.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만년에 선생을 만나보고 존경심이 우러나와 한마디 말로 스승의 자리에 앉을 만하다고 허여하였다. 인조(仁祖)가 일찍이 선생에 대해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에게 물어보자, 대답하기를, “그의 학문은 효도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의 문인들이 보고 감화된 바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해(李澥)와 원두표(元斗杓)는 본래 얽매이지 않은 호방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는데, 한번 박지계를 보고 기개를 꺾고 행실을 돈독히 하였으며 상복(喪服)을 입을 때 한결같이 예법(禮法)을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박지계는 도덕(道德)이 있는 사람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주상께서 반드시 존경과 예우를 극진히 하면 조정으로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온 세상이 선생을 추앙하고 감복한 사실을 또한 알 수 있다. 선생의 문인 중에 저명한 사람이 많았는데, 예를 들자면 이 방숙(李方叔, 이의길) 및 사업(司業) 조극선(趙克善), 정랑(正郞) 김극형(金克亨), 좌윤(左尹) 권시(權諰), 부윤(府尹) 원두추(元斗樞)는 그중에서 더욱더 저명하였다. 선생의 저술한 ≪사서근사록의의(四書近思錄疑義)≫와 ≪주역건곤괘설(周易乾坤卦說)≫ 및 문집 몇 권이 집에 간직되어 있는데, 모두 심오하고 정밀하여 성인(聖人)의 종지(宗旨)를 얻은 바가 많았다.

정부인(貞夫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贈) 영의정(領議政)
이유간(李惟侃)의 딸인데, 선생과 짝하여 어긋난 덕이 없었다. 선생보다 9년 뒤 갑신년(甲申年, 1644년 인조 22년) 3월 13일에 세상을 떠나 왼쪽에 묻히었다. 3남 3녀를 낳았다. 큰아들 박유근(朴由近)은 독실한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는데 특별히 찰방(察訪)의 벼슬을 추증(追贈)하였고, 둘째 아들 박유연(朴由淵)은 학문과 기개가 있어 선친의 법도를 따랐는데 누차 세마(洗馬)ㆍ주부(主簿)ㆍ좌랑(佐郞)으로 불렀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으며 경연(經筵)의 신하가 아뢴 말로 인해 지평(持平)의 벼슬을 추증하였고, 셋째 아들 박유동(朴由東)도 효도와 우애, 청렴 결백으로 추천을 받아 벼슬이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큰딸은 학생(學生) 경종(慶琮)에게, 둘째 딸은 집의(執義) 민광용(閔光炯)에게, 셋째 딸은 학생(學生) 이지진(李之鎭)에게 시집갔다. 찰방은 2남 박술조(朴述祖)ㆍ박희조(朴熙祖)를 낳고, 지평은 1남 박수조(朴壽祖)를 낳았는데 가문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목사는 2남 박우조(朴羽祖)ㆍ박팽조(朴彭祖)를 낳았다. 외손은 경종의 양자 경필원(慶必遠)이고 민현중(閔顯重), 현감(縣監) 민처중(閔處重)이다. 증손 박여성(朴汝聖)ㆍ박여석(朴汝奭)은 박술조의 소생이고 박여상(朴汝相)ㆍ박여수(朴汝修)는 박희조의 소생이고 박여숙(朴汝肅)은 박수조의 소생이고 박여현(朴汝賢)ㆍ박여필(朴汝弼)은 박우조의 소생이고 참봉(參奉) 박여흥(朴汝興)ㆍ박여민(朴汝敏)ㆍ박여익(朴汝翼)은 박팽조의 소생이다. 현손(玄孫)은 박내손(朴來孫)이다. 그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는데, 문학과 덕행으로 저명한 사람이 또한 많으니, 어찌 하늘이 성대한 덕을 지닌 사람의 후손을 도와 번창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선생이 소시(少時)부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한결같이 바른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만큼 그 근본이 물론 탁월하였으나 중년에 멀리 은둔하여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는 의의를 깊이 얻었다. 만년에 밝은 시대를 만나자 맨 먼저 임금의 부름을 받았으므로 장차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고 백성을 요순의 백성처럼 만들어 이 세상을 융성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나라에 변칙적인 예절이 생겨 선비들의 의논이 많이 엇갈려 종적이 불안하게 된 바람에 여러 번 나갔다가 여러 번 물러나느라 배운 바를 펼치지 못하였으니, 이게 어찌 사림(士林)의 유감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조예 경지는 정말 후학(後學)이 말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조 월천(趙月川, 조목(趙穆))은 퇴계를 진심으로 복종하면서도 선생과 나란히 일컫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또 근세 현석(玄石) 박 문순공(朴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은 말하기를, “선생처럼 행실이 순수하고 독실한 바는 옛날에도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며 기타 일시 제현(諸賢)들도 매우 칭송하였는가 하면 문인(門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을 모아 존경하고 친애하면서 ‘유림(儒林)의 사표이다.’라고 하였으니, 정말 덕이 융성하고 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그누가 여기에 끼일 수 있겠는가?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백여 년이 되었으나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공론이 오래 될수록 인멸되지 않았다. 지금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 공이 경연에서 특별히 선생의 덕행과 학문에 대한 실상을 아뢰고 시호를 내릴 것을 요청하니, 주상이 윤허하고 이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더 추증하였다. 선생의 현손 박진규(朴晉揆)ㆍ박내손(朴來孫)ㆍ박명양(朴鳴陽)들이 전후 누차 나 필주(弼周)를 찾아와 시장(諡狀)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돌아보건대, 나처럼 물러나 칩거(蟄居)하는 사람은 시호의 논의에 감히 참여할 수 없으나 다만 이것이 아니면 내가 선생을 사모한 마음을 나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박정양(朴挺陽)의 지극한 성의에 감동한 나머지 참람함을 헤아려보지 않은 채 선생의 문인 민광용(閔光炯)이 저술한 가장(家狀)을 취하여 선생의 유고 등 여러 서적을 참고한 다음 위와 같이 서술하여 태상씨(太常氏)에게 고하는 바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지계 [朴知誡]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