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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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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의 창가에서/내 마음의 울림

2021. 3. 31.

 

 

언제부터인가?

인근 동네에서 나는 지경리 이발사 지씨 딸로 불리웠다.

 

참으로 없이 살던 그 시절 아버지는 어린나이에 이발소에서 이발기술을 배우셨다. 그리고 대처로  이 곳 저 곳 이발소를 전전하시다가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신  후 이 곳 지경리에 터를 잡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당신의 소원이셨던 이발소를 차리셨다. 남의 집을 얻어서 차린 이발소지만 아버지는 날아갈 듯 좋으셨다고 술 한잔 불콰하신 날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하셨다. 작은 이발소에는 의자가 두개 있었다.

그리고 한쪽구석으로는 손님들의 머리를 감겨주던 하얀타일이 붙은 세면대가 있었다.

 

가끔씩 집앞에 국민학교가 끝나고 아버지 일하시는 이발소라도 들리면 하얀가운을 입으시고 손님들의 머리를 만져주시던 아버지가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손놀림이 참 바쁘게도 움직였고 찰칵거리는 이발가위소리가 참 듣기가 좋았다.

 

 

지금은 세월속으로 스러진 그 시절의 이발소 모습입니다.

 

설이나 추석인 명절 밑으로는 인근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로 발디딜틈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이발을 하려면 교통편을 이용하여 시내까지 나가야 했는데 마을에 이발소가 생겼으니 인근 동네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북적북적 했다.아버지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돕던 사촌오빠를 데려다가 이발소에서 허드렛일도 하며 이발기술을 배워보라 하셨다. 그 시절은 무슨 이발학원 등이 있어서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도제형식으로 기술을 가진 사람 밑에서 일을 배워야 했다. 많은 아이들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남자아이들은 이발소,목공소,철공소,정비공장등으로 여자아이들은 미싱일이나 공장 또는 애보기 등으로 들어가 일을 배우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후 사촌오빠도 아버지 어깨너머로  어느정도 이발기술을 익혀 밀려드는 인원중에서 아버지는 사촌오빠는 아이들을 골라 머리를 깍게 하고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의 이발을 주로 하셨다. 나름 호황(?)을 누리던 이발소 때문에 나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미싱일을 배운다고 도시로 나가는 친구들과는 달리 중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언니들과 함께 괴산으로 나와 학업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언니들과 동생들까지 고등교육을 받게 해준 부모님이 참 고맙다. 

 

 

손님들의 머리를 감겨주던 세면대의 모습입니다.

 

 

괴산에서 학교를 다니다 휴일이면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만들어 주신 김치며 여러 밑반찬등을 가져가곤 했다.

언제던가?

추석전으로 한참이나 이발소가 바쁜 날. 손이 모자란다고 아버지는 나를 이발소로 부르셨다. 그리고 손님들의 머리를 감겨주는 일을 맡기셨다. 어린 마음에 왜 그일이 그리 하기 싫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지만 그 때는 아마 어린마음에 많이 부끄러움과 더불어 창피함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은 모두 하늘나라로 가시고

당시의 부모님 나이보다 더 세월을 입은 지금 가끔씩 부모님의 산소를 찾고 추억에 젖어 형제들과 그 시절의 이발소앞을 지날때면 하얀가운을 입으시고 이발가위를 찰칵거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허물어진 이발소 자리.

어린소녀가 창피함도 무릅쓰고 손님들의 머리를 감기는 모습이

하얀타일 붙은 세면대 위로 어른거리는 듯 하다.

 

지나간 추억은 행복이며 눈물이고

그리고 그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