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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면 장내리 동학취회지(長安面 帳內里 東學聚會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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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

2021. 6. 15.

 

장안면사무소에서 속리산쪽으로 가다보면 속리초등학교가 나오고, 그 오른쪽 평지의 농토자리가 보은집회가 열렸던 동학취회소 이다. 백이십여년 전,이 곳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수있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며 모여든 민초들로 넘쳐났다. 이런 산간벽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면, “한양의 장안이 장안이냐, 보은장안이 장안이지”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궁벽하던 산골 장안에는 도소가 차려지고  이를 중심으로 수만의 동학교도들이 기거할 초막들이 언덕배기마다 골짜기마다 즐비하게 지어졌다. 끼니 때가 되면 골골이 초막에선 밥 짓는  연기들이 피어올랐다. 동학교도들은 낮이면 취 회에 참석해 새로운 세상을 모색하며 다가올 미래를 꿈꾸고, 저녁이면 호롱을 밝히고 경전을 읽었다. 장안에서는 동학교도들이 이제껏 꿈 꿔 오던 그런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장내리 논둑길을 걸으며 그 날을 생각한다.  동학교도들은 이 곳에 모여 무엇을 한것일까?  나날이 동학의 세력이 커져가는 만큼 박해도심해져만 갔다. 조정에서는 동학을 사교로 단정하고 교도들을 역도비적으로 몰아 붙이며 더욱  탄압을 강화했다. 관리들은 이를 빌미로 교인들을 감옥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하고 목숨을 빼앗는등 패악을 일삼았다. 이처럼 교도들의 처지가 참담한 지경에 빠지자 생존을 위해 교조신원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한다. 동학을 합법적으로 인정받고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해서 였다.

 

 

1892년 12월 6일 보은장내에 동학 총본부인대도소를 설치하고 조정을 상대로한 신원운동을 시작한다. 이로부터 장내는갑오년농민 전쟁이 막을 내릴때 까지 혁명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광화문앞,복합상소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탄압이 여전하자 청산에 머물고 있던 최시형은 1893년3월10일, 교도들에게 ‘장내로 모두  모이라’는 통문을 띄운다.이로써,동학사의  중요한 사건인 보은 취회가 열린다.3월10일 부터 4월  5일까지 계속된 취회에는 최시형의 통문을 받고  각지에서모여든 교도들로 장내리는 인산인해를 이뤘고, 그 수가 2만이라고도 하고 ,3만에 달했다고도 한다.  이들은 옥녀봉 아래대도소를 중심으로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장내를 동학의 구심점이자  성지로 만든다. 하지만 조정에서 파견한 관군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임금에 대한 모반으로  곧 역적 죄였다 .더구나 잘조련되고 무장된 관군에 비하면 동학도들은 땅을 파던 농민들이 대부분이었고, 죽창과 농기구가 무기의 전부였다.

결과가 분명한 싸움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동학지도부는 해산을 결정했고, 동학교도들 부터 해산하기 시작해 4월2일에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들도 물러났다.

 

 

장안리는 한국근현대사의 커다란 물줄기인 동학농민혁명의 전사로 평가받고 있는1893년 보은집회의 역사적 현장이다.당시 장안면 장안리마을은 전국동학교도취회지로“ 서울장안이 장안이냐 보은장안이 장안이다.”라는 말이 나올정도 였다고 한다.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회복하기 위한 교조신원(敎祖身元)운동을 중심으로 한 1893년 광화문복합상소가 실패로 돌아가자, 동학도들은 이 곳 장안면 장안리에 집결하도록 1893년 음력3월10일 통문을 돌렸다. 최시형이 그 다음날인 ‘11일 보은 장안면 장안리에 이르니 도인회자수만인이라.’고 『천도교창간사』 제2편55쪽에 기록하고 있다.  당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보국안민(輔國安民)라고 쓴 깃발과 함께 각 지방 대접주들의 표지인 작은깃발을 세웠는데, 이것이 종교적 자유쟁취를 뛰어넘어  사회적문제로 승화시킨 보은집회의 역사적의미이다.  그러나 장안리가 동학집결지로서 역사적인 장소이었음을 후세에게 알려줄만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장안리에 대한 역사적인 조명을 통해 새로운 역사인식과 아울러 보은군의 자랑거리이고 자존의명예인 장안리를  청소년교육의 장으로 활성화하는 방안을 주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야산아래가 돌학교도들의 취회지입니다.가까이 가면 알림판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