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청북도 내고장구석구석살펴보기

장안면 구인리 이용화, 이용기 진휼불망비(長安面 求人里 李用華,李用琪賑恤不忘碑

댓글 0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

2021. 6. 8.

구인리 마을입구에 있는 진휼비와 세거비입니다.

 

 

구인리는 장안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은서원리, 서는장재리, 남은황곡리에 접하고 있다. 옛날‘귀신다리(鬼神橋)’또는‘지렁이들’ 이라고 불렸던 곳이 바로 구인리이다. 본래 보은군 사각면의 지역으로 서낭나무와 다리가 있어 귀신다리라 하였는데, 보은현원님의 처가가 이 곳에 있어서 원님이 항상 찾아와 ‘귀인다리’ 또는 구인(求仁)이라고 바꿔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함에 따라 대목, 방아다리, 쇄실을 병합하여 구인리라 하고 탄부면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 외속리면, 그리고 현재는 장안면에 속해있다

 

자연석에 한글로 구인리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구인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이면서도 장안농공단지에 13개 업체가 입주해 있어 근로자들이 다수거주하고있다. 구인리는 흔히 ‘방아다리(또는방아실)’라고도 불리는데 방아다리는 도로 옆의 구인리 서북쪽에있는 마을을 지칭하는 것으로 뒷산능선이 마치 방아다리처럼  생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작은 도랑에 디딜방아를 걸쳐놓고 다녔기 때문에 방아다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있다.  대목이는 평각으로 넘어가는 도로부근의 마을로 옛날부터 이 곳에 큰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쇄실’은 예안이씨의 재실이 있는 곳으로 재실이 변해 쇄실이 된것으로 추측되며,소나무가 울창해 송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구인이 라는 지명을 얻게 된것은 조선조 숙종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이 마을의 이성만(李成晩),은만(殷晩)형제의 효성과 우애가  조정에 까지 퍼져,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이여가 마을에 들렸다가,마을 이름으로 귀신다리가 아름답지 못하다하고, “효제(孝悌)는 바로 어진 것이 그 근본이다.”라고  말하며 마을이름을 ‘구인교(求仁橋)’라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한다.그 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구인리가 되었다.  이 곳에 처음으로 터를 잡아 마을이 생긴 것은 지금으로 부터 4백년을 거슬러  올라간 1589년의 일이다.조선세종때의 과학자이며 무신이었던 불곡(佛谷)이천의 후손인 이성만,이은만형제가 이 곳에 정착하면서 부터이다.이 때 부터 구인리는  예안이씨(禮安李氏)의 집성촌이 되었다.예안이씨종중 재실인 영창재(永昌齋)는  1693년건립 된것으로 1917년 소실되었던 것을1922년에중건하였다.  예안이씨의 혼이 살아 숨쉬는 구인리는 지금도 그 후손들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훈훈한 인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서로를 아끼며 위해주는 마음은 어느곳 보다도 넉넉한 곳으로 노인을 공경하고, 자애로서 자손을 가르치며, 출향인들의 깊은  애향심도 만만치 않은 마을이다.  구인리 이장을 맡고 있는 이우직씨는 방울토마토 농사를 짓고있는데 농협에서 선정하는 새농민상 본상을 충북에서첫번째로 수상했으며, 2013년에 철탑산업  훈장을 수상한 충북의 대표농업인 이다.보은지역의 방울토마토 품질을 높여해마다 일본에 수출하고 있어 지역의 효자 농산물역할을 톡톡히 하는데 일등공신으로  인정받고있다

 

마을입구에는 예안이씨세거지비(禮安李氏世居之碑 )라고 각인된 비석이 있습니다.

 

전참봉이용화유학이용기진휼불망비(前參奉李用華幼學李用琪賑恤不忘碑)’입니다.

 

이용화 이용기 불망비는 장안면 구인리 구인리 마을입구에 위치한다. 앞면에‘전참봉이용화유학이용기진휼불망비(前參奉李用華幼學李用琪賑恤不忘碑)’라고 쓰여있다. 먼저 세운 비는 98×32×10cm 의 크기이다. 구비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새로운 비는 전체높이 145cm,비면103×36×14cm크기로 1991년에  다시 세웠다.

 

이용화는 1868(고종 5)~1935 │ 근대의 독지가로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중협(重協), 호 는 백운(柏雲)이다. 이명홍(李命弘)의 아우 이명징(李命徵)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는 이서인(李書仁), 아버지는 이주열(李周烈),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다. 부인은 충주 박씨로 박규묵(朴奎默)의 딸이다. 젊어서 학문에 정진하여 시문을 잘 지었고 글씨에 능하였다. 천성이 재물보다는 의를 중히 여기며 시혜와 가난을 구제하는 일을 즐겁게 여기며 살았다. 1901년 대흉년을 맞아 동생 이용기(李用琪)와 더불어 다량의 양곡을 희사해 많은 빈민을 구제 하여 인근의 칭송을 받았다. 그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1940년 장안면 구인리에 송덕비를 건립하였다. 젊어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글씨에도 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