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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승면 선곡리 금화서원(三升面 仙谷里 金華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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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

2021. 6. 19.

 

1814년(순조 14) 최덕진(崔德鎭)이 선조인 삼지 최운과 최흥림의 사묘를 건립하고 지방 유림 강재문외 105인의 찬동을 받아 감사에게 전의하여 승인을 받아 그 이듬 해인 서기 1815년에 창건하였다. 처음은 화순최씨 문중서원으로 건립되었으나, 최흥림의 스승 성운과 함께 교유한 조식 성제원(成悌元) 세 분을 추향하여 다섯 분을 모시고 후학을 모아 강학하였다. 사액을 받지 못한 미사액 서원의 하나다. 1871년 (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17년 지방유림의 주선으로 복설하였다. 사우의 동남쪽 계곡 가에 있는 계당(溪堂)은 최흥림의 호를 따라 명명한 건물로 그가 을사사화 이후 은거하여 성리학의 연마에 정진하던 곳이다. 금화서원 창건 후에는 강당으로 쓰였다. 1764년(영조 40) 중수하였고, 1980년 대홍수로 크게 유실되어 중수하였다. 서원 앞에 있던 4현신도비(四賢神道碑)도 이때 다시 건립하였다.현재는 사우의 기능만 유지하고 있는데, 1994년 이후 매년 음력 9월 초정일(初 丁日)에 제향을 올린다.

 

 

 

최흥림(崔興林)은 1506(중종 1)~1581(선조 14) │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현좌(賢佐), 호는 계당(溪堂)이다. 해주목사를 지낸 최영유(崔永濡)의 8세손으로, 증조부는 최한정(崔漢禎), 할아버지는 전라도관찰사 최중청(崔重淸), 아버지는 장사랑 (將仕郞) 최해(崔垓)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군수 홍여주(洪汝舟)의 딸이다. 부인은 평강 채씨(平康蔡氏) 사복시 주부 채치정(蔡致禎)의 딸이다. 그는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벼슬에 나가지 않고 육촌 조카인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밤낮으로 학문을 닦았다. 1545년 을사사화에 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장단에서 보은의 금적산에 은거하였다. 이때 계당(溪堂)을 지어 종곡에 은거하던 대곡 성운, 보은현감으로 부임한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지리산에서 찾아온 남명(南冥) 조식(曺植) 등과 서로 뜻을 함께하고 밤새도록 학문을 토론하곤 하였다. 저서로는 『계당집(溪堂集)』이 있고 1758년 금화사(金華祠, 금화서원)에 제향 되었다. 묘소는 수한면 광촌리에 있다

 

 

금화서원 중건기 입니다.

성제원은 1506(연산 12)~1559(명종 14) │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로 본관은 창령(昌寧), 자는 자경(子敬), 호는 동주(東州)·소선(笑仙)이다. 아버지는 장흥부사(長興 府使)를 지낸 성몽선(成夢宣), 어머니는 평양 조씨(平壤趙氏)로 부사를 지낸 조서 종(趙瑞鍾)의 딸이다. 1553년 보은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대곡 성운과 교유한 인물로 지금의 상현서원(象賢書院)을 창건한 인물이다. 그의 나이 2세 되는 해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나이 14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 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당고(黨錮)의 화16가 다시 세상에 일어났구나.”하고 은 둔의 뜻을 품게 되었다. 17세에 서봉(西峯) 유우(柳藕)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金宏弼)의 학통을 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여 수학하였다. 44 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예절에 맞춰 상을 마친 뒤에는 밭과 집을 홀로된 누이에게 주고 공주 선영 아래로 가서 초막을 짓고 살았다. 1553년(명종 8) 48세에 유일(遺逸)로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로 임명되었 고 이어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55년(명종 10)에는 삼 년산성(三年山城) 안에 고을 출신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충암 김정을 독향(獨享) 하는 지금의 상현서원을 창건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자 보은의 사람들이 그 은덕을 사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또 그 선정을 책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보은현감 재직 시에는 성운을 찾아오는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화담 서경덕 등 과 함께 평상을 마주하고 밤을 새워가며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비롯하여 산경(山經), 지지(地誌), 의학(醫學), 복술(卜術)에 이 르기까지 정통한 인물이었다. 1559년(명종 14)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그의 덕의 를 사모하여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과 창령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하였 다. 보은에서는 오랫동안 생사당에 제향하여 오다가 1681년(숙종 7)에 그가 설립한 상현서원에 배향하였으며 순조 때 창건된 금화서원(金華書院)에 배향되어 지금까 지 유림들에 의하여 제향되고 있다. 제학(提學)에 추증되고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저서로는 『동주일고(東州逸稿)』 3권 1책이 있다

 

 

 

성 운은1497(연산군 3)~1579(선조 12) │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大谷),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할아버지는 현령을 지낸 성충 달(成忠達), 아버지는 선공감(繕工監) 부정(副正)을 지낸 성세준(成世俊), 어머니 는 비안 박씨(比安朴氏)로 사간 박효원(朴孝元)의 딸이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백악 산 자락에서 은거하던 성수침(成守琛)은 그의 사촌 형이고, 기호학파의 원류가 된 성혼(成渾)은 그의 당질(堂姪)이다. 평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권유로 1531년(중종 26)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응시하여 모두 합격하여 성균관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 자 집으로 돌아왔고, 이후 1542년(중종 37)에 조정 대신들의 추천으로 사직서(社 稷署) 참봉 등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그의 형 성우 (成遇)가 을사사화로 화를 입은 이후에는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처향(妻鄕)인 보 은 종곡(鍾谷)에 은거하였다. 보은 종곡은 경주 김씨의 세거지로 성운의 부인은 김 벽(金碧)의 딸이었다. 성운은 후사가 없어 처형(妻兄)인 김천부(金天富)의 다섯째 아들 김가기(金可幾)를 어려서부터 키우고 가르쳤으며 장성하자 을사사화에 죽은 형 성우(成遇)의 딸과 결혼시켜 자신의 후사(後嗣)를 부탁하였다. 1553년(명종 8)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어 어쩔 수 없이 며칠 동안 근무 하다가 물러난 이후 일생의 대부분을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학문 활동을 했고, 조식 (曺植), 이지함(李之菡), 성제원(成悌元), 서경덕(徐敬德) 등과 깊은 교분을 쌓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들이 성운이 은거했던 보은의 속리산에 모여 회동을 하였음 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성운이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거문고와 책으로 스 스로 즐겼다. 조식이 일찍이 찾아왔는데 성제원이 마침 자리에 있었다. 조식과 공은 비록 초면이었으나 친함이 옛 친구와 같았고 서경덕, 이지함이 또한 동행해 와서 함 께 수일을 즐겼다.”라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유했던 인물 중 성운과 가장 친밀했던 벗은 조식으로, 이들은 젊은 시절 서울에서 인근에 함께 살았으며, 백악산 에 은거했던 종형 성수침으로 인하여 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성운의 문집인 『대곡집』과 조식의 문집인 『남명집』에는 이들이 주고받은 시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두 사람이 교환한 편지가 다수 발견된다. 성운은 스스로는 어느 당색(黨色)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그의 학풍과 처세는 북 인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는 조식이나 서경덕과 유사한 점이 많았으며, 보은의 속 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그와 학문적 인연을 맺은 중요 인물로 최흥림(崔興霖)·임제(林悌)·김덕민(金德民) 등이 있다. 최흥림은 을사사화 이후 보은에 들 어와 처사에 입지를 지킨 인물로 스스로가 대곡의 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두 아들 인 최지원(崔知遠)과 최명원(崔明遠)을 대곡의 문하에 들어가게 하였다. 또한 그의 학풍과 처세는 임제(林悌)에게 영향을 주었다. 임제는 일찍이 속리산에 들어가 대 곡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호방하고 쾌활한 시풍(詩風)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성운의 학문을 계승한 임제는 그의 외손자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학풍 형성에 영향을 주어 허목의 도가적 학풍 형성에 일조하였다. 성운의 학풍은 성리학자로서의 마음의 수양과 실천을 중시하고 있으나, 은일적 (隱逸的)·노장적(老莊的)인 경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귀와 마 음이 어두워져서 짚과 나무로 엮어 만든 허수아비와 같으므로 호를 ‘허부(虛父)’로 삼는다고 한 후에 허수아비를 통해 세태를 풍자한 <허부찬(虛父贊)>이나 <취향기 (醉鄕記)>에 노장적 경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성운은 속리산에 은거하는 처사의 삶으로 일관했지만 현실정치에 완전히 인연 을 끊은 현실 은둔자는 아니었다. 1553년에 가뭄이 크게 들자 그 대책을 제시한 글 인 <대한부(大旱賦)>와 인사 비리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인 <답우(答友)> 등의 단문에는 그의 정치관, 사회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성운은 당대 및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온화하고 엄정하게 처사의 입지를 지킨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남 칭찬하지 않기로 유명한 조식도 “건숙은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아서 내가 따르지 못한다.”라고 극찬하였으며, 실록에서는 “온아하 고 간묵(簡默)하며 초연히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겸양하는 마음으로 스스 로를 지켰다.”라고 평가하였다. 성운이 세상을 떠난 뒤 선조는 제문을 내려 애도하였으며, 뒤에 승정원 좌승지 에 추증되었다. 1910년에는 정이품의 품계를 주고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으로 추증하는 동시에 문각(文恪)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현재 성운은 보은 상현서원(象賢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보은 금화 서원(金華書院)에 제향 되어 있으며, 저서로는 『대곡집(大谷集)』 3권 1책이 전해지 고 있다. 그의 묘소와 묘갈은 보은읍 성족리에 있으며,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70호 로 지정되었다

 

 

1980년에 세워진 사현신도비입니다.

 

조식은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명종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대부분을 거절하였으며 아울러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조식(曺植)의 자(字)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유일(遺逸)로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명의 문도를 길러냈으며, 대체로 북인 정파를 형성하였다. 사후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가 북인 집권 후 1613년(광해군 7년)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금화사(金華祠)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이용희의 존현공적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