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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인면 늘곡리 풍림정사 박문호묘지석(懷仁面 訥谷里 楓林精舍 朴文鎬墓地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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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

2021. 7. 19.

 

회인면 늘곡리 풍림정사뒤에 위치하고 있는 박문호의 묘지에 있는 묘지석입니다. 유조선일민호산박선생지묘(有朝鮮逸民壺山朴先生之墓)라고 써있습니다.

 

박문호(朴文鎬) 1846(헌종 12)~1918 │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교육자로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경모(景模), 호는 호산(壺山)·풍산(楓山)이다. 고조는 습열재(習悅 齋) 박성순(朴性淳), 증조는 박경신(朴慶新), 할아버지는 박의영(朴義榮), 아버지는 한담(閒潭) 박기성(朴基成), 부인은 진주 유씨(晋州柳氏) 유원규(柳遠奎)의 딸이다. 회인현(懷仁縣) 읍내면(邑內面) 눌곡리(訥谷里, 지금의 회인면 눌곡리)에서 출생하였다. 7세 때 아버지에게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고 9세에 종증조(從曾祖)인 옥산(玉山) 박명신(朴命新)과 그의 자제 송담(松潭) 박래영(朴來榮)에게 수학하고 10세에 송담의 아들인 삼종숙(三從叔) 하정(荷亭) 박기일(朴基一)에게 수학하다가 이듬해 평생 스승인 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를 만나게 되었다. 15세에 『맹자(孟子)』를 재독(再讀)하는 수준에 도달하여 벌써 그 뜻을 통달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독서를 하게 되었다. 18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 을 읽기를 완료하였으며 제천(堤川)에서 열렸던 감시(監試)를 통하여 과거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20세에 이르러 목천(木川) 증광감시(增廣監試)에 응시하고 여름에 어당 이상수 문하에서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1869년(고종 7) 24세 때 3월에는 계룡산(鷄龍山)을 유람하고 8월에 한성시(漢 城試)에 응시하고자 상경하였다. 이때 스승인 어당은 평소 내성적인 그의 성격을 배려하여 동문인 여신(汝新) 윤명선(尹明善), 구당(柩堂) 윤태경(尹泰經), 향농(香 農) 신정희(申正熙)을 비롯하여 당대의 명사를 소개하여 폭넓게 문유(文遊)를 맺도록 도와주었다. 1870년에는 집 뒤에다가 ‘가학정(稼學亭)’을 짓고 수양하였고, 1871년(고종 8) 26세 때 어당의 추천으로 상경하여 위당(威堂) 신헌(申櫶)의 집에서 강학하였으며 독서하였다. 이후 1874년 29세에 증광한성시(增廣漢城試)를 비롯해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82년(고종 19) 37세에는 별시(別試) 초시(初試)에 응시하여 참방(參榜)에 올랐으나 회시(會試)에서 낙방하였고, 4월에 정시와 증광금영감시(增廣錦營監試)에 응시하였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여 이 때 그는 과거의 뜻을 접고 후학양성을 위한 서당훈육을 결심한다. 그는 과거를 접고 가학정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여소학(女小學)』을 저술하였다. 『여소학』의 내용은 부녀자의 도리와 덕행에 관한 글들을 여러 고전에서 모아 언해 한 책이다. 1884년(고종 21) 2월에는 「편람보유(便覽補遺)」와 문중을 위해 「가칙 (家則)」을 지었다. 이후 강학과 저술 활동을 이어가며 「화수기구록(花修耆舊錄)」, 「남명사정강(南 明史正綱)」을 교정하고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이재(履齋) 조장하(趙章夏) 등과 학문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특히 간재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인물성동이 (人物性同異)를 둘러싼 시대적 논쟁을 통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의 위상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1889년(고종 26)에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풍림정사(楓林精舍)를 건립하였다. 그동안 강학하던 가학정이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비좁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림정사는 그가 50세가 되던 1895년(고종 32)에 문을 닫게 된다. 이후 풍림정사에 있던 학생들을 모두 내보내 풍림정사에 홀로 기거하며 독서와 저술에 전 념하였다. 1899년(광무 3) 『고시류고(古詩類考)』와 『경주동이고(經註同異考)』를 편성(編 成)하고 염암(念菴) 윤병수(尹秉綏), 오한응(吳翰應) 등과 함께 스승 어당 이상수 의 문집(文集)을 발간하였다. 1902년(광무 6)에는 『맹자집주상설(孟子集註詳說)』, 『대학장구상설(大學章句詳說)』, 『중용장구상설(中庸章句詳說)』을 완성하였고, 이듬해 『시집전상설(詩集傳詳設)』과 『주역본의상설(周易本義詳說)』을 완성하였다. 1904년(광무 8) 『상서집전상설(尙書集傳詳說)』을 완성하였다. 1906년 호산은 회갑을 맞이하여 그가 강학하던 풍림정사 뒤편에 후성영당(後 聖影堂)을 창건하고 주자(朱子), 율곡(栗谷), 우암(尤庵), 남당(南唐)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910년(융희 4) 스승 이상수가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이라고 시호(諡號)를 받자 이듬해 추양정사(秋陽精舍)를 창건하였다.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그는 풍림정사의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도 거절하고 저술로 시간을 보내며 1914년 『칠서언해차의(七書諺解箚疑)』, 1915년 『효경자훈(孝經 字訓)』, 1917년 『고금인가희유록(古今人家希有錄)』을 편성(編成)하였다. 1918년 정월 스스로 묘표문을 짓고, 3월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21년 가을 제자들에 의하여 그가 창건한 후성영당(後聖影堂)에 추향(追享)되었 으며, 1926년에 추양정사(秋陽精舍)에 배향(配享)되고 문의(文毅)라고 사시(私諡) 되었다. 저서로 『호산집(壺山集)』 78권 42책이 있고 묘소는 풍림정사 뒤 언덕에 있 다. 풍림정사는 1978년 12월 1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