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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면 비산리 이국헌,엄찬선정비(蘇伊面 碑山里 李國憲,嚴纘善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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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

2021. 8. 3.

 

미타사 오르는길 우측으로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 숙종시절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과 엄찬의 공적비입니다.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지명 또한 비선거리라는 명칭이 생겼습니다.

 

 

소이면 비산리 비석거리에 있는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과 엄찬의 선정비입니다. 두 비석이 나란히 서있습니다. 비석의 크기나 모양등으로 보아 한사람의 솜씨인 듯 합니다. 이국헌이 충주목사로 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후임으로 충주 목사로 온 사람이 엄찬입니다. 엄찬은 1693년(숙종 19) 충주목사겸충주진관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같은 해 전임 충주목사 이국헌(李國憲)이 갑자기 죽음을 당하자, 이국헌의 아들이 소장(訴狀)을 올려서 의심스러운 여섯 사람을 가두었다.

그런데 이국헌의 후임으로 온 충주목사 엄찬까지도 꾸짖고 욕보이자, 엄찬이 이국헌의 아들을 곤장으로 때리다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엄찬은 충주목사에서 체임되고, 이 일로 경연(經筵)에서 논의가 있었는데 이현일(李玄逸)이 엄찬의 치적을 두둔하여 주었으므로 그대로 유임되었다. 엄찬은 1702년(숙종 28) 청주목사를 역임하였다.엄찬은 청주목사를 지내다 사간원에 의해 탄핵을 받습니다.

1702년 1월 18일 사간원(司諫院)에서 탄핵하기를 "청주 목사(淸州 牧使) 엄찬(嚴纘)은 바야흐로 국상(國喪)인 국휼(國恤) 초(初)를 당하였는데도 편안하게 관아의 객사(客舍)에서 잠을 자고 곡을 할 자리에 몸소 가지 못하고 그 쪽을 향하여 애곡(哀哭)하는 망곡(望哭)할 때에 많이 빠졌으며, 그 고을 안에는 도살(屠殺)을 전처럼 낭자하게 하고, 도내(道內)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본주(本州)에 이르러서 빽빽하게 많이 모여 술과 음악을 함께 벌이고 있으니 청컨대 관원의 명부인 사판(仕板)에서 삭제하소서."하니 숙종이 그대로 따랐다. 

 

충주목사 이국헌의 비석입니다.

 

이국헌은 조선 중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문숙(文叔),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이여연(李汝淵)이다. 이국헌은 1660년(현종 1) 증광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81년(숙종 7) 금산군수로 재직하며 선치(善治)하여 포상을 받았으며, 1691년(숙종 17) 충주목사로 있으면서 주치(州治)에서 6~7리 떨어져 있는 의창(義倉)인 양진창(揚津倉)을 호조의 승낙을 받아 주치와 금천(金遷)으로 옮겼다. 1693년(현종 19) 목사 윤가적(尹嘉績)과 함께 충주의 아전들에 의해 갑작스럽게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국헌의 아들이 소장(訴狀)을 올려서 혐의자 여섯 사람을 가두고 서울로 압송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원사락 아랫담 뒷산에 있다. 상석과 망주석 1조가 있으며 2004년에 세운 묘비가 있다.

 

 

이국헌의 후임으로 충주목사를 지낸 엄찬의 선정비입니다.

 

 

아들을 죽인 엄찬의 공적비와 나란히 어깨를 한 이국헌의 공적비 이국헌은 이 사실을 알까? 이 비석을 세운 사람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비석을 세우지는 않았을 텐데... 세월은 흘러 비석거리라는 명칭마저 사라지고 사람들 왕래 드문 풀섶에서 세월을 깁고 있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