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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교동리 관찰사김병시영세불망비 (沃川邑 校洞里 觀察使金炳始 永世不忘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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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2021. 9. 23.

 

관찰사 김공병시영세불망비 (觀察使 金公炳始 永世不忘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김병시는 1870년에 공충도관찰사로 제수되었다. 김병시는 본관은 안동().  자는 성초(), 호는 용암(). 아버지는 판서 김응근()이다.1855년(철종 6) 북원(北苑) 망배례(望拜禮) 때 참반유무시사(參班儒武試射)에서 뽑혀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때부터 훈국금위종사관(訓局禁衛從事官)·선전관(宣傳官)·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언(正言)·병조정랑(兵曹正郎)을 거쳐 1860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오르고 1863년에는 이조 참의가 되었다.

1865년(고종 2) 병조참의, 1869년 예조참판·의금부사(義禁府事), 1870년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 1874년 도승지, 1875년 형조판서·예조판서·우참찬(右參贊), 1876년 도총관·병조판서, 1877년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도통사(都統使), 1878년 총융사(摠戎使)·어영대장(御營大將)·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이조판서, 1879년 규장각제학·호조판서, 1881년 공조판서·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 1882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변리통리내무아문사(辨理統理內務衙門事)·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 등의 문무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잠시 호조판서에서 물러났다가 흥선대원군이 톈진으로 납치된 후 호조판서에 재임명되었고,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일본군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 주둔하며 군란의 사후처리문제로 조선 정부를 괴롭히고 있을 때 지삼군부사로 대관(大官)에 임명되어 종사관 서상우(徐相雨)와 함께 이들과 담판 협상하였다.

또, 청나라의 장군 오장경(吳長慶)에게 조선 정부가 군란의 주도 세력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왕십리와 이태원을 기습 공격하도록 하여 수많은 군인과 가족들이 학살을 당하였는데, 이때 오장경을 찾아가 무고한 양민은 살육하지 말 것을 청원하였다 한다.

임오군란 중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복설 되고, 그해 12월 정부 기구의 개편으로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통리아문(統理衙門)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바뀌면서 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에 임명되었다.

1883년 1월 진주사(陳奏使)로 임명되어 청에 다녀온 후 양향당상(糧餉堂上)·선혜청제조·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조정의 신하들이 개화파와 수구파로 갈려 대립하자 사대당에 가담하여 김옥균(金玉均)일파를 몰아 내는데 일조 했다.

그 후 성립된 심순택(沈舜澤)내각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로 전권 대신이 되어 이탈리아·영국·러시아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통리군국아문의 우의정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고 잇달아 의정부좌의정과 총리내무부사(總理內務府事)에 임명되었다.

1886년 「논시폐수차(論時弊袖箚)」를 올려 정부가 개화 정책을 위해 증대한 국가경상비의 지출을 억제하고, 근검 절약하는 긴축재정으로 운영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당시 정부에서 조운(漕運)의 편리를 위해 추진하였던 윤선(輪船)의 구입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리고 1888년에는 「논전폐계(論錢弊啓)」에서 정부의 화폐 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당오전(當五錢)을 비롯한 악화의 남조를 금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빌미로 조선에 상륙한 청·일 간의 전쟁이 있기 며칠 전인 6월 20일에 영의정에 올랐으나, 다음날 일본군이 조선정부의 폐정을 개혁한다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을 앞장세워 경복궁을 점령하고 24일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수립하게 되어 자리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각이 수립되면서 갑오경장이 진행되고 새로 조직된 군국기무처에서 시강원사(侍講院師)와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의 자리를 맡았다.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김홍집내각이 단발령(斷髮令)을 강제로 실시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때 궁내부특진관으로서 단발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 이뤄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김홍집 내각 실각, 친로내각 수립이라는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는데, 신내각의 총리 대신이 되었다.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 아래 새 관제를 정비한 광무정부의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에 임명되었고, 대원군이 죽은 뒤에는 산릉석의중수도감도제조(山陵石儀重修都監都提調)에 임명되었다.

김병시 [金炳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고종 7년 경오(1870) 윤10월 16일(무인) 맑음

공충 감사 김병시(金炳始)의 상소에 이르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이달 13일의 정사에서 삼가 제수의 교지를 받들고 보니, 신을 공충도 관찰사로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어 깊은 슬픔이 간절하여 어떻게 해야할 줄을 몰랐습니다. 신이 성상을 가까이 모셔온 지 어느덧 여러 해가 지났으나, 보좌하는 방도가 적절치 못하여 아무 쓸모없이 자리나 차지하고 있었음은, 명철하신 성상의 밝으심으로 당연히 꿰뚫고 계실 것입니다. 이름이 화련(華聯)에 끼이고 발자국이 준궤(雋軌)를 밟아, 해와 달처럼 가까이 해 주는 광영에 의탁하여 시절에 따라 기거하는 의식에 참여하였습니다. 은혜와 돌아보심이 눈부시게 빛나 미약한 분수를 넘어서니, 무릇 차견(差遣)이 있을 때마다 두려운 마음에 담장을 따라 걷고 싶었고, 매번 관차(官次)에 나아갈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이 마치 저자에서 매를 맞는 듯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질병까지 오래 낫지 아니하여 항상 문을 나선 때가 적은 까닭에, 위의를 모두 상실하였고 세상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조차 아예 없어졌습니다. 분수에 따라 우졸(愚拙)함을 지키고 도규(刀圭)에 목숨을 부지하면서 집안의 일상적인 사무조차 모두 잊어버리고 지내는 실정이니, 다시 어찌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교화를 선양하는 직책을 논하겠습니까.
송(宋) 나라 신하 유지(劉贄)의 말에, ‘감사(監司) 자리에 그 적임자를 얻으면 상지(上旨)를 유시(諭示)하고 혜택을 궁구할 수 있지만, 진실로 그 적임자가 아니면 백성들이 그 이익을 입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정말 신과 같은 자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전성(全省)의 사세로 말하자면, 일찍이 마음에 생각하고 사려에 넣어본 적이 없으니, 신처럼 어설프고 어리석은 자가 근거도 없이 추측하면서 확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컨대, 누락된 것을 받아내고 그을린 곳에 물을 대어 거의 그 보폭(輔輻)을 폐기(廢棄)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일로 치면, 신이 장차 어디를 바탕으로 하여 유위(猷爲)를 펼치고 위엄과 무게로 호강(豪强)을 탄압하여 능히 순선(旬宣)의 치적을 아뢰고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신의 선부(先父)가 일찍이 이 번방(藩方)에 재임한 지 겨우 1기(紀)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방관으로서 남긴 음택(蔭澤)이 아직 바뀌지 않았고 동향(桐鄕)의 유애비(遺愛碑)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신의 무능한 몸으로 일을 하면 단지 그곳을 병들게 하고 그곳을 그르치게나 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공적으로는 뽑아 발탁해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사적으로는 욕되게 하였다는 기롱을 초래할 것이니, 또 장차 무슨 말로 속죄할 수 있겠으며, 또한 무슨 면목으로 길거리를 다니고 집안 사람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 날을 생각해 보았으나 명을 받을 가망이 없습니다. 이에 마음속의 진심을 글로 엮어 숭고하신 귀를 더럽히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깊은 도량을 내려 주시어 신에게 새로 제수된 방악(方岳)의 명을 어서 깎아 없애고 적합한 사람에게 돌려주소서. 그렇게 하시면, 백성과 나라의 복이 될 뿐만이 아니라, 또한 보잘것없는 저의 분수에도 편안할 것입니다. 신은 더 이상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가서 다스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