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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용방리 우암유허비(伊院面 龍坊里 尤庵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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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2021. 10. 22.

 

조선 중기의 학자로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에서 태 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 庵이다. 고조는 송세량宋世良, 증조는 송구수宋龜壽, 조부는 송응기宋應期이다. 아버지는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 인 선산곽씨이다. 모두 5남 2녀를 두었는데, 송시열은 3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한산이씨로 이덕사李德泗의 딸이다

 

 

아버지 송갑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에서 강원도로 피난하였다가 회덕 종가를 들러 1594년(선조 27) 선산곽씨와 혼인한 후 처가인 구룡촌에 머물렀다.
옥천에서 회덕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 소제蘇堤 등으로 이거하던 26세까지 살았으며, 이후 주로 회덕에서 거주하였다. 이미 8세부터 회덕의 송이창(宋爾昌, 1561~1627) 집을 오가며 그의 아들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2세부 터는 인목대비에게 사은숙배한 죄로 삭적 후 낙향한 아버지 송갑조에게 『격몽요결擊蒙要訣』 을 배우며 주자와 율곡 이이를 흠모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송갑조의 장례를 치른 후에 는 연산의 김장생(金長生, 1548~1631)에게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고, 이후 김집(金集, 1574~1656) 에게 배웠다. 김장생과 김집 부자의 문하에서 김경여(金慶餘, 1596~1653)·송준길·윤문거(1606~1672)·이유태(李惟泰, 1607~1684)·유계(兪棨, 1607~1664)·윤선거(尹宣擧, 1610~1669)·김익희(金益熙, 1610~1656)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27세인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으로 입격하여 당시 시험관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1635년 회덕의 비래동에 서재를 짓고 강학에 힘썼으며, 그 해 11월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가 되어 1년 가까이 대군을 가르쳤다. 이듬해 1636년 병자호란으로 커다란 치욕을 당하자 이후 10년 가까이 관직 에 나아가지 않고 황간 냉천리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효종 즉위 후 벼슬에 나아갔다. 1651년(효종 2)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것이 빌미가 되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1658년(효종 9) 찬선贊善으로 관직에 나아가 이조판서로 승진한 후 효종과 함께 ‘북벌론’을 추진하였으나, 1659년 효종이 급서急逝하자 그 해 12월 다시 낙향하였다.1660년(현종 1) 좌참찬·우찬성에 올랐으나 시비가 생겨 그해 12월 사직하고 낙향한 뒤 5 년간 회덕·공주·청주 등지에 머물렀다. 1666년(현종 7) 청주 화양동에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거처했다. 1672년(현종 13) 영동과 속리산을 유람하고 다시 화양동으로 돌아갔다.
1674년(현종 15)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한 후 삭출되고, 이듬해 정월 덕원德源·장기·거제로 유배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풀려나면서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 장희빈 소생의 원자 책봉을 만류하는 글을 올려 숙종의 노여움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1694년 갑술환국 다음해 문정文正 시호가 내려졌고, 1716년(숙종 42) 병신처분으로 관작이 회복되고, 1744년(영조 20)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가 태어난 이원면 용방리 구룡마을에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는 앞, 옆면 각 1칸의 팔 작지붕 기와집 안에 있으며, 앞면에 ‘우암송선생유허尤庵宋先生遺墟’라 하고 뒷면에 ‘숭정후 삼무술이월일崇禎後三戊戌二月日’이라 하였다.
유허비 근처에 있는 경현당景賢堂은 송시열이 어릴 때 학문을 배우던 곳으로 1697년(숙종 23) 영정을 봉안한 용문영당龍文影堂을 세웠다. 이후 용문영당은 허물어 없어지고, 경현당 만 남게 되었다. 경현당 마루에 ‘경현당’과 ‘용문영당’ 편액을 같이 걸어두고 온돌방에 송시열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
청산면 하서리 서원동에 1701년(숙종 27) 중봉 조헌과 함께 제향하기 위해 세웠던 덕봉서원德峯書院 터가 전한다.
문집으로 1717년(숙종 43)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편집, 간행한 『우암집』 167권이 있고,1787년(정조 11) 이를 보완하여 평양 감영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 102책이 있다. 그 후 9권의 『송서습유宋書拾遺』와 1권의 『속습유』가 추가로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