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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면 금암리 전엽효자문(東二面 金岩里 全燁孝子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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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2021. 10. 19.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에 있는 전엽의 효자문입니다. 전엽의 효자문 건너편으로는 호랑이가 파 주었다는 호천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엽(全燁, 1505 연산군 11~1583 선조 16)은 호는 쌍암雙岩, 본관은 옥천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상주목사 등을 지낸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 1480~1560)이다.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하며, 부친상을 당한 뒤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하였다. 시묘기간 중에 흰 제비가 깃들었으며, 묘 근처에 우물이 없어 고생을 하였는데 하루 는 호랑이가 나타나 앞발로 바위 밑을 한참 후벼 파니 샘이 솟아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므로 3년간 무사히 시묘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60세 되던 해에 모친상을 당해서도 마찬 가지로 3년간 시묘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1566년(명종 21)에 정려되었다. 『명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전엽효자각 옆으로 정려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옥천 거주 생원生員 전엽全燁은 천성이 순근純謹하여 사람을 성심으로 대접하고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그의 아비인 목사牧使 전팽령全彭齡이 치사致仕한 뒤로 빈궁하여 끼니도 잇기어 려워지자 전엽이 힘을 다해 봉양하여 맛있는 음식을 적극 마련하였고 그 음식이 남으면 반드시 아비가 주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주고자 하였다. 혼정신성(昏定晨省,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린다는 뜻으로, 자식이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서 살핌을 이르는 말)하여 슬하를 떠나지않고 항상 옆에서 모시는 것을 임무로 삼았으며, 사환仕宦에는 뜻이 없었다. 기유년에 아비의명령을 어기기 어려워 향시鄕試에 장원壯元하였으나 관직을 얻는 것에 급급하지 아니하여 회시 會試에 응시하지 않았으니, 이는 혼정신성을 빠뜨릴까 염려해서인 것이다. 평소 오가는 빈객이 그 아비를 방문하면 몸소 반찬을 마련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고, 병을 간호할 적에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옷에는 띠를 풀지 않았다. 대고大故를 당하여서는 치상治喪 절차를 일체 『가례家禮』를 따랐고, 복服을 마친 뒤에도 출고반면(出告反面, 밖에
나갔다 오거나 들어올 때 부모님께 반드시 알려야 함을 이르는 말로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의 준말)을 일체 평소와
같이 하였다. 계모繼母를 섬기는데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고, 족친 중에 빈궁하여 오갈 데 없는 이를 가엾게 여기어 구제해 주곤 하였다. 한 5촌질 되는 사람의 부처夫妻를 10년 가까이 데리고 있었는가 하면 전토田土까지 넉넉히 주어 생계를 개척하게 하였고, 또 조카 두 사람이 몹시 빈궁하자 전토를 주어 경작하게 하였으므로 향당鄕黨이 그 효우를 일컫고 여리가 그 행의에 탄복하였다.

 

 

 

 

 

이후 1568년(선조 원년) 태릉참봉, 1569년 이산현감, 1572년 공조좌 랑, 1573년 포천현감 등에 제수되 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효자문 은 동이면 금암리金岩里에 세워졌 으며, ‘효자조산대부행이산현감전엽지려孝子朝散大夫行尼山縣監全燁之閭’라는 편액이 있다. 현재 문중에서 전엽 효자문 관리하고 있다.

 

 

 

전엽효자각 뒤로 옥천전씨들의 선대무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엽효자문 길건너편으로 호천유래기와 함께 호천이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