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교조 2011. 2. 7. 15:30

[2008년 대학자율화 문제와 관련하여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이다. 지난 2010년 교과부 앞에서 6개월 간의 농성투쟁, 사회통합위원회의  대학 시간강사 지원 대책 발표, 한국비정규교수노조와 이주호 교과부장관의 면담 등 대학 시간강사에게 교원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고등교육법 법률 개정안을 모든 정당의 교과위원들이 하나씩 발의 했지만 여전히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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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가 없으면 생성도 없다. 이 말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파괴가 긍정될 수도 있는가? 생성은 반드시 파괴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가? 파괴는 나쁘고 생성은 좋은가? 이런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단순한 생각이 어느새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언젠가, 아마 10년도 더 전에, 잘 알고 지내던 전교조 선생님들과 저녁을 겸해 담소를 나누던 중, "학교가 무너져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나왔다. 좀 썰렁하던 상황에 내가 아마 이런 말을 덧붙임으로써 완전히 분위기를 망치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공교육이 죽어야 학교가 산다."

 

물론 내가 공교육을 무너뜨리고 사교육을 육성해야 한다는 의미로 했던 말은 결코 아니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이 말은 사실, "교육개혁은 사회개혁이다"는 말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고 세월이 좀 흘러 나는 생계를 핑계로 한쪽 발을 사교육 시장에 담그고 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우연이었을까, 그 때 험악한 분위기에서 상황을 부드럽게 정리해준 선생님을 만났을 때 이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허허 이거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이시는구만" 하고 껄껄 웃었다. 나는 이미 학교가 무너지고 교육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그만 선생이 되고 말았다. 대학에서 비정규교수로 학생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강의를 하면서도 나는 자꾸 방향을 잃고 만다. 나는 여기 왜 이렇게 서 있는 것일까? 이 모순덩어리의 현장에 나는 왜, 무슨 열망으로 존재하는가? 나는 답을 찾고 싶다.

시간강사 처우개선 외면한 대학자율화
(경향신문 입력: 2008년 09월 18일 00:11:57)

 

대학에 개설된 모든 강의의 셋 가운데 하나는 ‘시간강사’가 맡는다. 학생들은 “교수님”이라고 부르지만 대학은 교수로 보지 않는 경계인이 시간강사다. 학자로서 이 대학 저 강의실을 전전하며 대학생을 가르치는 게 본업인 이들에 대해 교육법은 대학교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박사학위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비정규직 보호법에서도 제외됐다. 전임교수 임금의 20%를 받으며 전체 대학 교양강좌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박사 시간강사가 5만명이 넘는다. 세계적인 대학육성이 요란한 요즘에도 이들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엊그제 확정 발표한 대학자율화 2단계 1차 추진과제에서도 시간강사의 처우 문제는 어디에도 없다. 교과부는 교원 직급을 조교수·부교수·정교수의 3단계로 줄여 ‘전임강사’를 없앴다. 전임교수인데도 ‘강사’라는 명칭이 ‘시간강사’란 오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을 배려한 것이다. 교과부가 교수 사기 진작 차원에서 정책적 배려를 한 것은 가상하다. 문제는 그들이 없으면 대학이 굴러가지 못하는 시간강사의 사기 진작에 대해선 왜 이처럼 무심한가 하는 점이다.

시간강사 처우개선을 위해선 그들에게 교원 지위를 부여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대가 마련돼 있다. 단지 ‘돈 타령’에 진전을 보지 못할 뿐이다. 대학은 인건비 줄이기에 혈안이고, 정치권은 사학 눈치보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시간강사는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안전망의 문제이자 우리나라의 지적 수준에 관한 문제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시간강사를 지금처럼 방치하고 외면한다면 젊은 지성은 학문의 길을 멀리하게 되고, 지식의 곳간은 바닥을 드러낼 터이며, ‘세계수준 연구중심 대학 육성’(WCU) 사업은 쭉정이 구상이 될지 모른다. 시간강사의 처우개선과 사기 진작을 우리 사회가 시급하고도 절실한 교육투자로 봐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