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 & History/역사의 뒷담화

祈遇 기우 2008. 6. 23. 21:30

 

요즘 동국대학교 출판부에서 펴 낸 '성역사와 문화'라는 책이 읽고 있는데 그 책의 한 단락인 - 한국 중세사회의 여성과 성 - 중 일부분을 발췌했습니다. 저는 별 관심이 없지만 관심있는 분들이 많을것 같아서요.^^;;

 

 

그럼 갑니다!~

 

조선 말기까지도 기녀나 갈보에 의한 겸업 매춘또는 밀매음이 있었을뿐 국가에서 공인한 공창제도가 실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76년 개항이후 일본 문물의 유입과 함께 일본의 공창제도가 들어오고 일본인 작부들이 몰려들어 매춘 업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일본인 작부들은 처음에 주로 거류 일본인을 상대로 무허가 영업을 하였는데 차츰 한국인도 상대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부산, 인천, 원산등의 일본인 거류지에 차례로 유곽이 개설됨으로써 일본식의 공창제도가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유곽(遊廓)은 창녀들을 일정한 구역안에 집결시켜 매춘 영업을 공인한 공창(公娼)으로서 일본에서는 이미 1585년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최초로 이를 공인한 바 있었다. 여기에서 공창이란 당국의 공인을 받고 그 감시, 감독 아래 영업세를 내면서 매춘업을 하는 자이며, 사창은 당국의 공인을 받지 못하고 비밀리에 매춘업을 하는 자를 말한다.

 

 

서울에 유곽이 처음 생긴 것은 1904년으로, 일본인 거류민단의 주도로 지금의 묵정동 앰버서더호텔 자리에 70평의 신정(新町)유곽이 개설되었다. 신정유곽은 동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동쪽은 한국인 창녀, 서쪽은 일본인 창녀들이 영업하였다. 1906년 통감부 설치 후에는 전국의 일본인 거류지에 유곽이 개설됨으로써 공창제도가 정착되었다. 그리하여 서울 용산구 도화동과 용문동에도 유곽이 생겨났으며, 대구, 목포, 대전 등의 지방 도시에도 유곽이 퍼져 나갔다. 이에 따라 1908년에 유곽 등에서 일하는 일본인 매춘부의 수는 거의 천명에 이르렀다.

 

 

 

일본의 전통 유곽을 배경으로 한 영화 사쿠란 -  볼만합니다

 

 

1910년 한일 합병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 체제 아래서 공창화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일제는 우선 매춘 영업 지역을 확대하여 조선인의 매춘 영업은 유곽 이외의 지역에서도 가능토록 하였다. 이것은 일본 국내 및 조선내 일본인 거류지의 공창제도가 유곽이라는 일정한 지역에 한정해서 실시된 것과는 상반된 조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 사회에 매춘이 더욱 만연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공창제도와 관련된 법규의 정비를 추진하였다. 1916년에는 각 도마다 상이했던 공창제도 규칙을 통일하여 대좌부창기취체 규칙 등을 제정,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이 규칙에 의하여 한국의 공창제도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규칙은 공창업의 허가 요건과 영업상 수칙, 창기의 허가요건과 수칙, 건강진단 등을 명시하였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점은 예기(藝妓), 작부, 창기(娼妓) 의 구별을 명확히 한 것을 들 수 있다. 즉 주석(酒席)에서 술을 따르며 노래나 춤의 기예(妓藝)를 하는 일본인 여성을 예기라 부르고, 같은 일은 하는 한국인 기생도 예기속에 포함시켰다. 또한 예기는 예기 치옥(置屋)에 거주하며 요리점에서 부를 때 나가서 영업을 하되 예기 치옥이나 자택에 유인하여 매음을 하면 안되도록 규정하였다.

 

 

작부는 매음을 할 수 없으며 요리점에 거처할 수는 있지만 숙박소나 음식집에는 거처하지 못하고, 객석에서 춤이나 노래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예기(기생)는 술자리에서 가무를 할 수 있으나, 작부는 그것을 못하고 단지 술만 따른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매음이 금지되고 거주의 자유가 제한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본이 대만에 세운 일본식 유곽

 

 

이에 반하여 불특정 다수인에게 성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여성을 창기라 하여 이들에게 매춘업을 공인하였다. 창기는 경무부장이 영업 가능지역으로 지정한 유곽내의 대좌부(貸座敷)에서만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유곽 내에 거주하되 유곽 밖에 거처하거나 숙박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 창기의 연령은 17세 이상으로 통일시키고 유부녀는 창기가 될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그들의 건강 진단이 의무화되고 영업중에는 허가증과 건강 관리증을 휴대하여야 했다. 창기의 자유로운 폐업을 금지되었고, 성병 관리라는 명목 아래 대좌부업자인 포주와 경찰당국의 감시, 감독을 받아야만 했다.

 

 

창기의 성병 검사에 주안접을 둔 건장 진단은 공의(公醫)나 경찰의(警察醫)가 맡도록 하되, 그 시행을 경찰관 내기 헌병으로 하여금 감독케 하고, 결과를 경찰서에 보고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와같은 새로운 규칙에는 그밖에도 통행인에게 유흥을 권유하지 말 것, 중, 고등학생을 유흥케 하지 말 것, 전염성 질환이 있는 자에게는 손님을 받지 못하도록 할 것등이 규정되었다. 또한 질병 중 또는 임신 6개월 후부터 분만 2개월 후의 기간 내에 취업을 시키거나 창기를 학대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 창기로 하여금 함부로 돈을 쓰게 하지 말 것 등의 사항을 명시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위주로 한 매춘 관련 법규는 식민통치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다가 해방 후인 1947년 공창제도 폐지령이 공포됨으로써 효력을 상실케 되었고, 아울러 공창제도도 사라지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 동경 요시와라 유곽

 

 

한일합병 이후 공창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한일합병 당시인 1910년 말 공창인 대좌부 수는 379(한국인 경영 238, 일본인 경영 141)개소였고, 여기에서 일하는 창기의 수는 한국인 569명, 일본인 851명, 외국인 6명 등 1,426명이었다. 1915년 말에는 대좌부 수가 480, 창기수가 2,208명으로 증가하였다. 따라서 5년 동안에 대좌부는 4분의 1가량, 창기는 역 절반이 늘어났다고 하겠다. 1930년말 전국의 25개 공창 면허지, 즉 유곽에서 일하는 창기 수는 한국인 1,132명, 일본인 1,841명 등 2,973명으로 늘어났다. 도별로는 서울을 포함한 경기에 31.4%, 경만 22.9%, 평남 14.4%의 순으로 이 3개 도에 전체 창기의 약 3분의 2가 집중되었다. 같은 시기 예기의 수를 보면 한국인 2,489명, 일본인 2,099명 등 모두 4,588명으로서 창기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

 

 

일제시대에는 엄격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공창의 증가와 함께 사창도 늘어만 갔다. 일제는 합병 이후 지속적으로 사창에 의한 밀매음을 단속하고자 하였다. 1912년에는 총독부령으로 경찰법 처벌 규칙을 마련하여 밀매음을 하거나 그것을 매개하는 자는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도록 규정하였다. 1916년에는 공창제도를 강화하면서 역시 사창을 절대적으로 엄금한다는 방침이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당국의 허가를 받은 창기만이 매춘업을 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그러나 이같은 단속 규정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1920년대부터 사창이 만연되어예기, 작부들이 공창의 창기들처럼 매춘에 나서게 된 것이다. 1920년대에 사창이 일반화된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무엇보다 일제의 토지 수탈에 따른 생활고, 매춘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의 쇠퇴, 공창내 포주의 착취와 압박, 그리고 당국의 묵인과 단속완화등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사창은 1930년 중반 이후 공창의 쇠퇴에 따라 더욱 번영하게 된다 갔다. 이것은 매춘이 금지된 예기(기생)나 작부들이 손님의 요구에 따라 요리점, 여관 등에서 돈을 받고 동침하며 성을 제공하는 일이 일반화되었음을 뜻한다.

 

 

이제 공, 사창에서 매춘에 종사한 창기들의 실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창기들이 매춘을 하게 된 동기는 본인의 의사보다 부모, 형제, 남편 등에 의하여 팔려 온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창기가 되기 전에 종사했던 일은 가사 보조 19%, 가정주부 15%, 농업 10% 등이어서 50%가량이 가정에서 집안일을 돕다 팔려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글의 교육 수준은 무학이 84%, 소학 중퇴자가 12%로 대다수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연령은 대체로 20~24세가 절반 가량으로 가장 많았고, 25~29세가 17%, 30세 이상이 5%였으며, 20세 미만도 25%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법규상으로는 17세 미만은 창기가 될 수 없었으나, 실제로는 17세 미만의 여성도 있었으며 심지어 14, 5세의 소녀들을 유인하여 매음을 시킨 사례가 있다.

 

 

 

선천성 매독에 걸린 아이 ㅠㅠ

 

 

창기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그들은 화대의 40%를 포주에게 뜯기고, 그 나머지로 세금, 식비, 목욕료, 의상비, 미용료, 약값 등을 지불해야만 했다. 따라서 항상 지출이 소득보다 컸으므로 적자 생활이 계속되고 부채가 누적될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외출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수입을 제대로 올리지 못하면 포주의 가혹한 구타, 결박, 식사중단 등의 학대가 뒤따랐다. 이같은 포주의 학대에 견디가 못해 도주하거나 자살하는 이들도 있었고, 때로는 파업 또는 단식, 삭발 등의 태업으로 대항하기도 하였다.

 

창기들을 더욱 괴롭힌 것은 임질, 매독과 같은 화류병(花柳病), 즉 성병이었다. 1916년에 제정된 창기취체규칙에 의하여 창기의 성병 검사와 치료를 의무화했지만 1900년대에 급속하게 퍼지기 시작한 성병은 더욱 번져 갔다. 시대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략 10~30% 가량의 창기들이 각종 성병에 감염되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의 매춘 관련 정책은 한국 사회에 매춘을 더욱 만연시키고 한국 여성의 인권과 성을 유린, 착취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또한 일제는 그들의 타락한 매춘 문화를 이식, 전파함으로써 한국인의 성풍속을 타락시키고 독립정신을 말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정구선, 동국대학교 강사)

 

 

위 파랗게 칠한 부분이 이 책에 나온 결론 부분입니다. 이제 그 부분을 최근에 맹활약하고 있는 뉴라이또들의 사고 방식으로 결말을 내보겠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뉴라이또 식으로 생각하거니 그들의 공식 견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 그럼 뉴라이또들의 사고방식으로 결말을 내보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의 매춘 관련 정책은 내선일체 정신에 입각해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없이 대우하였다. 또한 일본은 그들의 앞선 성문화를 이식, 전파함으로써 한국인의 낙후된 성풍속을 근대화, 체계화시켰으며 올바른 성가치관의 정립에 최선을 다하였던 것이다.

 

 

아마 위와 같지는 않을지....Orz 아니 더 심할수도 있겠군요. 그 인간들 지금 하는 짓거리를 보면 말입니다. 뉴라이또 단체의 회장이라는 인간이 70세 노인 얼굴에 물병이나 던지고 도망치는 자인걸 생각하면....그치들은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나 봅니다.

 

 

 

국가를 걱정하기에 앞서 기본적인 소양부터 공부하시길 라이트 코리아의 봉태홍 대표님

 

 

껍데기만 있고 영혼은 없는 자들이여! 무덤으로 돌아가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의 매춘 관련 정책은 한국 사회에 매춘을 더욱 만연시키고 한국 여성의 인권과 성을 유린, 착취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또한 일제는 그들의 타락한 매춘 문화를 이식, 전파함으로써 한국인의 성풍속을 타락시키고 독립정신을 말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폭소!!!!!!!!
●내용:
인성환*김성호*허정욱*최승권*정다운*단경수*유금순일당은
일제시대일본국을 국가라 주장하고 인정하라고,
일제시대[순사]를 주장하고 인정하라며,
일제시대 일본천황의 왕권정치를 해야된다고
"헌법청산"을 주장하며 국민들을 추행하는
강력범죄조직입니다. -이상-

※궁금한 사항이 있으신분은 가까운군부대나 국방부 군법원
국가보훈처 감사원 금융감독원 가까운지방보건소에 문의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