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 & History/World WarⅡ

祈遇 기우 2009. 4. 8. 20:37

 

 

* 사실 작년 초 부터 어떻게든 겨울전쟁을 포스팅 해볼려고 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어쩜 이번 겨울에는(?) 가능할지도ㅋ 순서가 바뀐 것 같긴 한데 일단 간이나 좀 보시라고 올립니다. -_-;; 주된 소스는 이 곳 입니다. 그리고 주의! 여기에 나오는 핀란드어 지명 표기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 제가 핀란드어를 모르는 관계로 - 고로 옆에 써놓은 원어 표기를 보시는게 훨 나을겁니다.

 

 

 

 

북구 극지 한 귀퉁이에 핀란드란 국가가 있고 또 그 나란엔 강력하고 용감한 군대가 있다는 걸 전 세계가 알게된건 1939년에 벌어진 겨울전쟁 때문이었다. 이 전쟁에서 인구 4백만에 불과한 약소국 핀란드는 국운을 걸고 그 자신보다 수십 수백배는 더 거대하고 강력한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내야만 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스팀롤러앞에선 한 마리 사마귀와 다름없는-螳螂拒轍- 핀란드에게 내기를 건 도박꾼들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만약 있었다면 그는 대박을 쥐었을 것이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파견된 외신 기자들은 짧으면 1주, 길어야 한 달내에 이 도시에 나부낄 붉은 깃발을 상상하며 기사를 송고하곤 했다.

 

 

 

사실, 겨울전쟁은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된 - 그 당시 기준으로선 - 최초의 전쟁이었는데, 핀란드 군은  전선 곳곳을 누비는 이들을 상당히 귀찮아했지만, 그렇다고 쫗아낼 형편역시 되지 못했다. 그저 간간히 공보 담당관이 주의를 주는 수 밖엔.....

 

 

 

 

 

 

어쨌든, 이 작은 사마귀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멈추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초기 공세는 돈좌되고 고립되었으며 각개격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넋달 약 100일 가까이 이어질 겨울전쟁 혹은 Talvisota는 소련으로선 악몽 그 자체였다. 이에 당황한 스탈린은 핀란드의 일부 영토와 전략적 요충지, 광산 지대의 할양을 조건으로 휴전을 제의하지만 이런 굴욕적인 조건을 핀란드가 받아들일 거였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었다.

 

 

 

이 기간동안 몰아친 백년만의 두번째 혹한은 핀란드에 우호적이었다. 영하 30~40도의 강추위 속에서 소련군은 진로를 잃고 헤매던가 조각 조각 분리 되고 말았으며 이런 그들 앞에 놓인 운명은 너무나도 뻔하였다. 수없이 산재한 호수와 울창한 산림 또한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온 핀란드 군이 누릴수 있는 최고의 잇점중 하나였다. 하지만 소련은 역시 대국이었다. 그들은 상실한 이상의 병력과 장비 그리고 물자들을 끊임없이 전선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반면 핀란드에 지원을 약속한 영국과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서방 연합국은 말 뿐인 지원만 공언하고 있었으며 실제 지원 물자가 도착했을 땐 핀란드의 기력 또한 다한 상태였다. 

 

 

 

핀란드 군의 눈부신 분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부족한게 너무도 많았다. 병력도 물자도 심지어 몰로토프 칵테일에 필요한 병조차도 부족했으며, 특히 탄약의 고갈은 핀란드가 휴전 협상에 나서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소련 역시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엔 여력이 모자랐지만 양측은 쌍방의 이런 약점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소련의 한 장군은 판란드 대표단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전사한 동지들의 시체를 묻을만큼 충분한 땅을 원하오."라고 말이다.

 

 

 

비록 25만 이상의 소련군 사상자가 발생했다지만, 이 휴전 조약의 가혹함은 수 많은 핀란드인들의 가슴속에 참기 힘든 분노와 모욕감을 심어주었다. 비푸리Viipuri와 카렐리아Karelia지협의 할양으로만 40만 이상의 핀란드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터전에서 쫒껴나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잔혹한(핀란드에게) 휴전이 성립됐지만, 모스크바는 끝없는 내정 간섭을 시도하고 있었고, 스탈린 역시 언젠가는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상황은 핀란드에게 암울했지만, 그들을 둘러싼 주변정세는 그저 막막 할 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를 지원하기 보다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크렘린의 분위기를 맞추기에 바빴다. 핀란드로선 앉아서 당할 수 만은 없는 노릇. 결국, 1940~41년간 총동원령이 떨어져 소련의 재침공에 대비하게 된다. 또한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거래에 응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나찌 독일과의 협력이었다. 히틀러는 군비와 물자를 제공하는 대신 독일군의 핀란드 영내 통과권을 요청했으며, 천애의 고아같던 핀란드로선 이 요구를 수용하는 것만이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거래로 소련이 경솔한 판단을 억제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제 2차 겨울전쟁    Continuation War

 

 

 

1941년 6월 22일 드디어 독일군의 대 소련 침공 계획인 바바로사Barbarossa 작전이 발동되었다. 이 계획에는 핀란드 영토를 통과한 독일군이 소련의 전략 요충지인 무르만스크의 중요 항두들을 점령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핀란드 정부는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는 유보한 상태로 남겨 두었다. 하지만 소련이 즉각 보복으로 핀란드의 북부 도시들에 폭격기를 보내면서 이렇게 유보된 평화는 너무도 간단하게 산산히 조각나고 말았다.

 

 

 

1941년 6월 25일 핀란드 대통령 리스토 리티Risto Ryti는 의회에서 행한 대 국민 연설을 통해 독일과의 동맹 관계는 부인하는 선을 그으면서도 소련과는 실질적 전쟁 상태에 놓였있음을 밝히게 되었다. 후에 이 전쟁은 제 2차 겨울 전쟁Continuation War 혹은 야트코소타Jatkosota로 알려지게 되는데, 이는 그들의 입장에서 이 전쟁이 국가의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일부라는 것을 반영한다.

 

 

 

 

 

 

이 연설이후 영국은 대 핀란드 선전포고를 발효했지만, 미국은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영국 이외에 그 어떤 나라도 핀란드에 대한 선전포고나 적대행위에 동참하지 않았다.

 

 

 

 

은여우 작전    Operation Silver Fox (Silberfuchs)

 

 

 

은여우 작전의 서막은 핀란드 북부에서 침공해 들어간 독일군 산악군단 (제 2, 3 산악사단)이 열여 제꼈다. 이들의 진격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페차모Petsamo 니켈 광산을 재탈환하고 무르만스크로 공세를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지나치게 신장된 보급선과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리차Litsa 강에서 숨을 고르게 되었다.

 

 

 

 

 

 

남부 살라Salla에선 독일군 SS-노르트Nord 사단, 제 69사단, 제 40, 211 전차대대와 핀란드 군 6사단으로 구성된 독일군 제 36군단이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철로를 절단하기 위한 공세를 펼쳤으나 곧 저지 당하고 말았다. 이어서 핀란드 제 3사단이 공격을 개시 케스텐가 kestenga에 이르렀지만 공세는 여기서 멈추게 된다. 독일군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핀란드 정부는 이 즈음 서방 연합군의 개입을 의식해 공세를 중단하라는 비밀 명령서를 발송한 상태였다.-1941년 9월 폐기됨.- 또한 양군의 지휘명령 체계는 각각 독자적이었으며 두 세력간 협조관계 또한 미약하기 그지 없었다.

 

 

 

 

카렐리아 지협 공세    Karelian Isthmus Offensive

 

 

 

1941년 6월 30일 핀란드의 노련한 정예 병력들은 남부로 공세를 개시 카렐리아 지협Karelian Isthmus에서 소련군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핀란드와 레닌그라드Leningrad 사이에 위치한 이 지협은 쌍방간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 지역을 획득한다면 핀란드로선 겨울 전쟁이전으로 영토를 수복하게 되는 것이었다.

 

 

 

 

 

 

지난 겨울전쟁에서 가장 참혹하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 곳의 공략을 위해 제 2, 4, 8, 10, 12, 15, 18사단을 포함한 핀란드군 3개 군단이 동원되었다.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8월말에는 비푸리vipuri를 탈환하였으며, 포를람미 Porlammi에선 소련군 3개 사단을 포위하는 성과를 냈다. 1941년 12월에 핀란드는 드디어 카렐리아 지협 전역을 수복하였으며, 이로써 핀란드의 지도 제작자들은 만세를 부를수 있었다. 독일군은 핀란드군이 여세를 몰아 레닌그라드로 진격해 주길 바랬지만, 핀란드로선 그럴 이유도, 명분도, 이득도 없었다. 지도 제작자들만 좋아할 뿐이었지.....

 

 

 

 

동부 카렐리아 공세    East Karelia Offensive

 

 

 

다시 1941년 7월로 돌아가 핀란드군 총사령관 만네르하임Mannerheim은 핀란드 군의 가장 성공적인 공세로 알려질 공격 명령을 하달한다. 그것은 바로 라도가 호수 동안에 위치한 카렐리아 곡창 지대를 탈환하라는 명령으로서, 이 공세에는 제 1, 5, 6, 11, 14사단과 독일군 163사단이 참가했다. 대부분 노획한 소련제 전차로 무장한 라구스lagus 전투단-후에 판사리 Panssari (=기갑) 사단으로 재편- 이 제 1야카리Jääkäri(=Jäger) 여단과 합류해 공세를 이끌었다.

 

 

 

제 5사단은 7월 10일 코르피셀캐Korpiselkä를 쾌속으로 돌파하였으며 곧 소르타발라Sortavala를 재탈환하고 공세를 이어가, 소련군 2개 사단을 라도가 호수에서 포위해 버리는 성과를 이룩했으며, 9월에는 실지를 완벽히 탈환할 수 있었다.하지만 만네르하임은 이를 초월해 소련측 카렐리아 지협의 동안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추가시켰다.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핀란드로선 더 축소된 국경에 더 강력한 방어선을 얻게 될 것이었다.

 

 

 

 

 

 

10월에는 제 4,8 사단이 공세에 추가되었으며 얼마-3일- 안되어 소련군은 말 그대로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 공세 와중에 소련군 자신들의 무기들로 무장된 라구스 전투단은 라도가 호수와 오네가onega 호수 사이를 흐르는  시배리Syväri (Svir) 강을 따라 방어 거점을 확보할 수 있는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1941년 10월 1일 오네가 호숫가에 자리잡은 도시 페트로스코이Petroskoi가 함락되었으며, 1941년 12월 6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핀란드 정부는 겨울전쟁에서 빼앗긴 실지를 완전 회복했음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삶의 터전을 빼았겼던 이들은 다시 자신들의 고향을 돌아갈수 있었다. 실지 회복을 위해 핀란드가 흘린 피는 26,000명에 달했다. 400만 정도의 인구를 가진 핀란드로선 막대한 손실이었다.

 

 

 

한편 이렇게 그토록 염원하던 실지를 회복하게 되자, 만네르하임과 리티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는데......

 

 

2편에서 이어집니다!!!

 

 

 

* 감기에 걸려서 제 정신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모두 몸조심 하시길요....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