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고유의 글

동숭동지킴이 2013. 6. 22. 12:28

(갑-을 관계 문제가 남양유업 사건 등을 계기로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는 경제민주화를 비롯해 인간관계 전반의 불평등에 관한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기존의 논의와는 좀 다른 각도에서 포괄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제 자신도 아직 이 문제에 대해 깔끔하게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글을 써보면서 생각을 다듬어 가볼까 합니다.

그러니 여기서의 글은 일단 잠정적인 글로 받아들여주면 좋겠습니다.)

 

 

 

<갑-을 관계의 변증법 (1)>


요즘 갑-을 관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우리 사회구조때문에 이런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란과 관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갑-을 관계의 변증법'으로 명명했습니다. '변증법'이라고 하면 뭔가 심오한 느낌을 주니까 '촌놈 겁주는' 개념으로 일단 사용해 본 셈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례에 대해 시간 나는 대로 몇 차례에 걸쳐 조금씩 소개를 해서, '갑-을 관계'에 대한 보다 넓고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 꾸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당연히 전자가 '갑', 후자가 '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갑의 횡...포에 대해 마크 트웨인은 '은행이란 맑을 때 우산을 빌려주고 비올 때 그 우산을 빼앗아간다'고 비판하기까지 했지요.

그런데 박지원의 허생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 허생은 성중의 제일 부자라고 알려진 변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씨를 대하여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고 하니, 만 냥(兩)을 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변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만 냥을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변씨 집의 자제와 손들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아니,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만 냥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변씨가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만 냥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 하겠느냐?" >

이쯤 되면 허생은 '갑'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을'은 아닌 것이지요. 이건 소설에 불과하고 실제 현실은 이와 다르다고요? 물론 소설과 현실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말에 '돈을 빌려줄 때는 앉아서 빌려주고, 돌려받을 때는 서서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건 돈을 빌려 줄 때의 '갑-을' 관계가 일단 빌려주고 나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 돈 빌린 사람(또는 기업)이 '배째라'하고 나서면 빌려준 쪽에서 똥줄이 탑니다. 이건 갑-을 관계가 고정적이지 않고 변하는 것을 믜미합니다. 이런 걸 '변증법'이란 말로 거창하게 부르지 않나요.

북한 김일성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억압하는 커다란 역사적 과오를 저질렀지만, 다른 면에선 통큰 인물이었습니다. 항일 빨치산 시대의 이야기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북한을 '배신(?)'하고 남으로 온 황장엽도 남한에서 발간한 책에서 김일성의 뛰어난 측면을 인정할 정도이니까요. 김일성이 왕조시대에 태어났다면 정말로 대단한 지도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김일성이 한국전쟁이 끝난 후 동유럽을 순방했습니다. 그때 동유럽 지도자들과 회의를 벌이면서 술판을 크게 벌였습니다. 그리해 동유럽 지도자들이 술에 취해 헤롱해롱할 때, 그들에게 "우리 나라를 부흥시키려면 동무들이 하나씩 도시를 맡아서 복구를 책임져 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술도 취한 상태이고 해서 동유럽 지도자들은 쉽게 응낙했고, 아침에 깨어나서 아차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함흥은 동독이 , 평양은 체코(?)가 떠맡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원조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돈 빌리는 처지이면서도 주눅들지 않았던 것이지요.

김일성의 주체사상이란 것에 대해 저는 사상으로서는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북한이 주체적 자세로 두개의 대국을 적당히 주무르면서 원조를 받아내는 방식이란 점에서는 평가할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통상적인 갑-을 관계에 억매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갑-을 관계에 대해 오늘은 이쯤 하겠습니다.

 

<갑-을 관계의 변증법 (2) : 대학사회>

지난 글에 이어 학교에서의 갑-을 관계를 살펴볼까 합니다.

10년 전 제가 미국대학의 방문연구원으로 갔을 때였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학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대학이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학부과정과 대학원 과정의 수업을 몇 개 청강했습니다.

듣던 대로 미국 대학에서는 동양계 학생들은 거의 질문을 하지 않았고, 질문하는 학생들은 주로 미국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의 내용은 별로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놀란 것은 교수가 그 신통찮은 질문을 좋은 질문으로 스스로 바꾸어서 친절하게 응답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모든 미국 교수가 꼭 그 교수처럼 성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귀동냥 지식으로 판단하건대, 대체로... 미국 교수들은 한국 교수들보다는 강의와 학생지도에 성실한 것 같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지도의 경우엔 교수가 문장까지 일일이 손을 봐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저 자신 과연 그렇게 성실하게 학생들을 대했는지 반성이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다만 우리 학교는 시스템이 다른 대학과 달라 학생들과 직접 접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만.)

그러면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미국 대학에서는 교수들에 대한 강의 평가가 그런 대로 제대로 이루어지는 게 하나의 중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학기가 끝날 때 학생들이 강의 평가서를 학교에 제출하고 그걸 교수들의 인사에 반영하지요.

한국에서도 요즘은 강의 평가를 합니다. 옛날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수십년 전에는 교수가 학기가 시작하고 두서너 주가 지난 후에 한번 모습을 보인 다음에, 다시 계속 휴강하고 학기말에 다시 한번 등장하는 교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사정은 많이 나아졌지요.

그런데 한국 교수들에 대한 업적 평가에서, "강의와 연구" 중 강의평가는 차이가 그리 크게 나지 않기 때문에 교수들이 논문 숫자를 늘리는 데 주력한다고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신과 심사위원밖에 읽지 않는 논문들을 대량생산하는 게 학생들에게 신경쓰는 것보다 평가에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강의 평가'가 절대적으로 교수의 성실성을 규정한다고 단정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에선 미국같은 강의 평가를 하지 않는데도, 교수들이 한국보다는 성실하게 학생과 상대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대학을 포함한 조직사회에서는 동료의 평가 (peer review)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평가 대신에 동료의 평가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이런 점에서 적어도 한국보다는 교수들이 성실하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미국과 일본에선 학생이든 동료교수든 관련자들의 평가가 일정하게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저의 인상비평이 틀릴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일본에 대해 저보다 사정을 더 잘 알고 있는 분이 많을테니, 제 이야기에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을 지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경우가 어떠한지도 잘 모릅니다. 앞으로 유럽에 지내면서 사정을 살펴볼까 합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은 어떠한 '교수(교사 포함)-학생 관계'가 바람직한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교수-학생 관계는 한편으로 교육서비스를 주고 받는 시장관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자식 관계 같은 인격적 관계입니다.

전자가 가장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학원입니다. 후자의 관계는 예수와 12제자 또는 공자와 그의 제자 사이의 관계 같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한국사회의 교수-학생 관계에서 후자의 측면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의 경우엔 아직 그런 관계가 어느 정도 남아있겠지요.)

그렇다면 교육서비스를 주고 받는 데에선 어떤 관계가 바람직할까요.

대체로 한국사회에선 교수가 학생에 비해 우위에 있습니다. 일종의 '갑'인 셈입니다. 성적을 부여하는 권한을 갖고 있고, 성적을 잘 받아야 졸업을 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유교적인 상하관계가 작동해 그런 갑을 관계를 강화합니다.

그리해 학점 따위를 미끼로 성추행이 심심찮게 발생하는 것이지요. 이런 갑-을 관계는 학생들의 적극적 대처와 교수 징계로 인해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어 가고는 있는 것 같습니다. 남양유업 사태와 마찬가지로 교수-학생 사이의 갑을관계도 '사회적 압력과 법적 대처'가 바로잡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대학원생의 경우엔 이런 갑을 관계가 더 심각합니다. 학부생에 대해선 교수가 한 과목 학점을 부여하는 힘밖에 갖고 있지 않지만, 대학원생에 대해선 장래를 좌우할 수도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석박사 논문의 통과권한과 취업추천권 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에 따라 사정은 다릅니다만, 대학원생이 지도교수의 잡심부름을 도맡으며, 교수의 이삿짐도 날라주고, 심지어 교수가 교회에 나가면 같이 교회에도 나가주는 경우를 들었습니다. 성추행도 학부생에 대해서보다 대학원생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아마도 더 많을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추행의 경우엔 과거보다 사정이 많이 나아졌습니다만, 다른 억압관계는 그리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건 사회 전반의 인간관계가 보다 근대적인 관계로 발전해가야 나아질 것 같습니다.

일본은 우리와 비슷한 사회인 것 같은데 다른 점도 많습니다. 제가 일본 가서 놀란 것 중의 하나는 동경대 교수가 직접 저널의 논문들을 복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국에선 이런 건 대학원생이나 조교들에게 시킵니다만, 일본에서 이런 일들을 시키려면 거의 반드시 돈을 지불합니다.

한국의 큰 학회는 재벌 등의 지원을 받아 호텔에서 하면서 거기서 일하는 대학원생에겐 땡전 한푼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일본에서는 그런 호화스런 학회행사도 별로 없고 돕는 학생들에겐 대가를 지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들이 바뀌어 나가야 하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를 좀더 진전시켜 보겠습니다. 교수-학생 관계가 반드시 갑-을 관계인 것만은 아닙니다. 학생(부모)이 돈과 권력을 쥐고 있으면 그 관계가 미묘하게 바뀝니다.

중고교에서 옛날 육성회장의 자식에 대한 교사들의 태도는 일반학생에 대한 태도와 많이 다르지요. 대학에서는 부잣집 자식이라고 해서 교수들이 특별대우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만, 그래서 굴지 재벌의 자식쯤 되면 사정은 다를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에도 굴지 재벌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가 국회의원입니다만, 그는 대학 때 시험부정 행위를 해서 1년 유급을 당했고, 그래서 남보다 일년 늦게 졸업했습니다.

당시 그의 시험부정행위를 적발해 처벌한 교수는 영어를 가르치던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연구에 집중할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래서 스스로 밤낮인 줄 모르도록 집의 창에 짙은 커튼을 쳐놓았다는 전설(?)을 가졌던 분입니다.

그만큼 교수로서의 본분 (교육서비스 제공의 원칙)에 철저했기 때문에 재력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이런 자세를 가진 교수라면 재벌 등에서 프로젝트를 받거나 사외이사 한 자리 얻으려고 애쓰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지요.

어쨌든 교수들에 대한 돈의 위력은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어느 페친의 지적처럼, 아직도 선물로 학점을 사는 행위가 통하는 경우가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더 큰 문제는 학생이 권력을 가질 경우입니다. 제가 조교 시절에 약간 놀란 것은, 민주화 이후 대학원생들은 교수와 맞담배를 피지 못하는데, 학부생들은 맞담배를 피기도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학생이 교수와 맞담배를 피우는 게 옳으냐 그르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주화 이후 학부생들은 "어용 교수 퇴진" 등의 운동을 벌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인 김수행 교수를 뽑게 된 데에는 그걸 애당초 요구한 대학원생이 아니라 나중에 학부생들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서울대 학부생들이 그런 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 경제학 교수는 김수행 교수의 퇴임과 함께 대가 끊겼습니다.)

이처럼 학생들이 권력을 갖게 되면서 부작용도 생겨났습닏다. 제 후배 중에 지방대 교수가 있습니다. 그는 수업에 전혀 들어오지 않던 학생회장에게 F 학점을 부여했습니다.

그랬더니 학교 행정당국에서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소신을 갖고 밀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부작용은 작지 않았습니다. 학생회에서 보복공격이 들어온 것이지요.

학생회에서는 직접 학점 문제를 들고 나올 수는 없으니, 교수가 당시 어머님이 편찮아서 금요일이면 서울로 올라오던 것을 문제삼았습니다. 그리해 그 교수가 학생들을 내팽개치고 있다고 퇴진 운동을 벌인 것입니다.

다행히 그 교수는 퇴진사태에 몰리지는 않았지만 그 문제로 여러 해 동안 크게 고생했습니다. 학생 권력이 남용된 사례이지요. 학생회가 학생회비를 부당하게 쓰거나 조폭이 학생회를 장악하거나 하는 일도 이런 예입니다.

노조가 등장할 때는 자본-노동의 갑-을 관계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해서 자본-노동 관계가 일부 바로잡아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거대기업(공공부문 포함) 노조가 갖고 있는 문제점도 이런 부작용에 속합니다.

마찬가지로 교수-학생 사이의 관계 중에는 교수가 갑질 하면서 저지르는 문제도 있습니다만, 학생조직이 권력을 갖게 되면서 저지르는 문제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것도 "갑을 관계의 변증법"이라고 할 만 하지요.

오늘은 이쯤 하고, 계속해서 갑-을 관계의 변증법을 살펴보면서 해법을 모색해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