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통신

동숭동지킴이 2013. 9. 22. 23:23

 

                                             베를린 통신 (3) : NPD와 통합진보당

 

 

얼마 있지 않으면 독일의 총선결과가 판명됩니다. CDU/CSU-FDP의 집권이 계속될 것인지, 아니면 SPD의 Peer Steinbrück가 새 총리가 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아마도 FDP가 5% 지지율을 넘어설지 여부와 SPD 및 Die Linke의 세력신장 정도가 결정적 변수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 때 군소정당이 난립해서 발생한 폐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지율이 5% 이하인 정당에겐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지 않습니다.)

 

 

CDU의 Angela Merkel 총리는 집권기간 동안 비교적 무난하게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집권하는 게 아닌가 하는 관측이 우세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근 SPD 총리후보의 인기가 상승 중이어서 어찌될지는 두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며칠 전에는 인기상승 중이라는 Peer Steinbrück가 베를린에서 연설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게 되어 연설회장에 가보았습니다. 한국에서도 20년 이상이나 가보지 않던 유세현장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아래에 그 현장 사진을 몇 장 첨부했습니다. 3천명 정도로 추산되는 군중 앞에서 노래공연 등이 진행되고 난 다음에 Peer가 등장했습니다. 이런 것은 한국이나 비슷합니다. 모이는 군중 숫자는 한국보다는 적지요.

 

 

 

              (일요일 투표를 앞두고 72시간 캠페인을 진행하는 SPD의 베를린 유세장)

 

 

그런데 특이한 것은 Peer의 연설방식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청중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에 연설무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Peer는 그 무대를 계속해서 빙빙 돌면서 30분 이상이나 연설을 이어갔습니다. 물론 원고 따위를 본다든가 하는 일은 일체 없었습니다.

 

 

 

            (중앙에 설치된 연단을 빙빙 돌면서 연설하는 Peer Steinbrück SPD 총리 후보)

 

 

Merkel의 연설은 TV에서 보았는데 Peer와는 달리 앞 무대에서 청중을 내려다보면서 말을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독일인을 비롯한 서구인들은 한국-일본과 달리 어릴 적부터 자기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쌓아왔기 때문에 말을 잘 하지만, 특히 Peer의 연설은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Peer에 대해선 “Klartext Peer”라는 지지구호도 연설회장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Klartext Reden”이라고 하면 말을 쉽고 분명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리 되려면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정치인 자신이 나름대로 명료한 입장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이런 게 일종의 내공(Force)인 셈입니다. 한국도 독재정권시대나 TV토론을 기피하던 김영삼 시대와는 달리 정치가의 표현력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지만, 독일이나 미국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요.

 

 

그런데 사민당의 Peer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는 듯했습니다. 우선 Merkel에 대해선 “Konzeptlosigkeit (개념없음)”라는 말로 비판했습니다. (무난하게 나라를 운영하는 듯하지만)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한국의 GH는 어떤가요. 무난하게 나라를 이끌지도 않고 비전도 찾아보기 어려운 게 아닐까요.

 

 

그리고 Peer는 자신들의 기본가치로는 “Freiheit(자유), Gerechtigkeit(공정), Solidarität(연대)”를 내걸었습니다. 이는 제 식으로 표현하면 개혁(자유, 공정)과 진보(연대)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그 셋 중 무게가 가장 크게 실린 것은 Gerechtigkeit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언론의 보도 등을 참고하면, 그의 주장 중 “Gleicher Lohn für Gleiche Arbeit (동일 노동, 동일임금)”, “내년 4월부터의 최저임금 법제화”가 크게 부각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ein gerechteres Deutschland (더 공정한 독일)”이라는 집약적인 구호에서도 SPD의 무게중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SPD의 Schröder 전 총리 때 단행된 HARTZ IV 개혁 등으로 인해, 한편으로 경제는 활성화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사이의 차별이 심화된 현실을 바로잡자는 희망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처럼 노동귀족-노동평민-노동천민 사이의 부당한 차별이 존재하지는 않는 독일이지만 그래도 격차의 심화는 문제이지요.

 

 

한편, 유세현장에서 볼펜 한 자루가 첨부된 SPD 소개유인물이나 풍선 따위를 나눠주고 있는 모습도 흥미로웠습니다. 꼬마 애기가 들고 있는 어떤 풍선에는 “Ein besseres Land kann nicht von allein kommen (더 좋은 나라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더 좋은”이라는 표현에선 독일이 이미 어느 정도 괜찮은 나라라는 자부심이 느껴지지요.

 

 

최근 한국에선 (특정 정당에 투표하라는 게 아니라) 기권하지 말고 투표하라고 피자를 학생들에게 나눠줬다고 해서 교수가 선거법 위반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 법 밑에서라면 볼펜이나 풍선을 나눠주는 독일의 이런 선거풍경도 유죄가 아닐까 싶습니다.

 

 

선거라는 게 선진화될수록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격투기가 아니라 일종의 축제적 성격도 띄게 됩니다. 이리 볼 때 한국의 선거는 너무 살풍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돈 선거’를 엄단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이겠지만, 그런 푼돈에 좌우되지 않을 만큼 우리 유권자 의식이 향상되면 선거문화도 좀 바꿀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이런 정당들 말고도 여러 정당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NPD(Nation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독일 민족민주당)라는 게 있습니다. 이 정당이 독일 내에서 처한 위치를 보면 한국의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사태를 떠올리게 됩니다.

 

 

NPD는 유대인을 박해한 나치스와 마찬가지로 인종주의를 내걸고 외국인 이민을 반대하는 신나치 정당입니다. 그냥 외국인 이민에 반대하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닌데, 터키계 이민들을 살해한 조직과의 연관성이 거론되기까지 하는 위험한 정당이지요.

 

 

이 NPD는 극우파정당으로서 추구하는 가치 면에서 통합진보당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위험시되는 점에서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Nazism과 Stalinis 둘 다가 전체주의로서의 공통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할까요. 심지어 정당해산이 시도되는 점도 같습니다. 다만 NPD에 대해선 2003년에 정당해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NPD나 통합진보당에 대해선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요. 독일에선 일단 정당해산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엔 범죄행위에 대해선 처벌하지만 일반정치활동은 용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NPD는 연방의회에선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지만, 동독 지역의 일부 주에선 소수이지만 의회에 진출해 있습니다.

 

 

한국에선 이석기와 통합진보당 간부들이 구속 또는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있고, 정당해산 또한 검토되고 있습니다.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 중 김재연 의원에 대한 제명처분도 의제로 올라와 있지요.

 

 

지난 글에서 이석기를 비롯한 일부 통합진보당원의 사고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점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스통 할베’는 물론이고 새누리당 당원 중에도 시대착오적인 인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시대착오적인 수구보수파와 수구진보파인 통합진보당의 인물이나 정당에 대해선 어찌 대응해야 할까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게다가 이석기 등은 집회에서 폭력행위를 준비하자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는 이때까지의 NPD와는 차원이 다른 행위였습니다. 이정희 대표가 ‘농담’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이석기 등의 ‘비장한’ 발언을 농담으로 치부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을 모욕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선비의 목을 칠지언정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한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이 규탄되고 있는 국면에서 이석기 사태가 터진 것은 국정원 규탄을 덮어버리려는 술책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국정원과도 싸워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석기 등의 수구성도 따져야하는 일종의 이중전선이 펼쳐지고 말았습니다. 상황이 그래서 꼬이게 된 것입니다.

 

 

이제 문제를 좀더 본격적으로 검토해 볼까 합니다. 누가 惡(싸워야 할 敵)이고, 또 누가 巨惡이고 小惡이며, 또 그런 악들과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것들과 관련해 사람들 주로 통합진보당 쪽 사람들이 인용한 유명한 문구들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Voltaire가 말한 것으로 알려진 내용입니다.(볼테르가 정확히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의 핵심이니 그가 말했다고 해도 지장은 없지요.)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는 금언입니다.

 

 

다음은 독일의 신학자 Martin Niemöller가 히틀러 정권 당시 나치의 횡포에 침묵하던 사람들을 향해 읊은 시입니다.

 

 

“나치는 우선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를 가두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아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 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Kommunist.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Als sie mich holten,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en konnte."

 

 

둘 다 좋은 글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들을 이석기 사태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는가입니다. 통합진보당에 반대하는 여러 사람들이 이 글들을 그대로 이석기 사태에 대입할 수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주로 첫 번째 사상과 양심의 자유 문제에 언급했습니다.

 

 

제 생각도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사안에 절대적인 것이 없는 것처럼, 사상과 양심의 자유 역시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사상과 양심을 혼자서 간직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 사상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폭력을 선동하는 자유까지 허용될 수는 없지요.

 

 

NPD가 외국인 공격을 선동한다면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이석기 등이 폭력을 준비-선동하는 것까지 용납할 수는 없지요. 그건 이미 볼테르가 말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 영역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잘못(惡, 敵)과 싸우는 방식은 악(적)의 성격에 따라 달라집니다.

 

 

악(적)의 종류 문제를 따져봅시다. 적들 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적은 무엇(누구)일까요. 자기 내부의 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내부의 사탄, 다른 말로는 탐(貪,욕심)·진(瞋, 화냄)·치(痴, 어리석음)의 3독(毒)은 상대하기 너무나 어려운 적입니다.

 

 

보통은 이들과의 싸움을 포기하고 그냥 3독의 지배 하에서 살아갑니다. 반면에 싸워보려고 가시방석 위에 앉는 것과 같은 고행(苦行)도 하나의 수련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싸우는 고통이 너무나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부의 적과 싸우기 위해 그 적과 동반 자살하는 것은 최악의 방식입니다. 그 대신에 스스로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내부의 적과 싸우는 올바른 방식이겠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가벼운 악(적)은 교육적으로 설득하기도 하고 야단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지나친 악(적)은 형벌을 가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악과 벌의 비례성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석기 등의 악에 대해 어느 정도의 처벌을 해야 하는가도 같은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비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죽이려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는 “죄 없는 자 먼저 돌을 던져라”고 외쳤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저는 간음이란 죄에 대해 돌로 쳐죽이는 형벌은 지나치게 가혹하므로 예수가 그렇게 말씀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간음을 무죄로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물러간 후, 예수는 간음한 여자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이지요.

 

 

간음 정도가 아니라 나치스처럼 유대인 등 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살해하려는 적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맞서서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경우는 이미 도덕적 훈계가 가능한 영역을 넘어선 것이지요. 만약에 이석기 등의 악이 실제로 내란을 일으킬 능력을 갖춘 상태의 악이라면 간음한 여자에 대해서와 같이 상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석기 등의 악은 몽상가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억울하게 몰살하듯이 다루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이석기 등은 가혹하게 처벌할수록 더 순교자적 자세가 되어 지하로 깊숙이 들어가고 그들의 악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석기 등을 정신병자에 비유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하지요.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신병적 요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정도가 심할 때 병원에 갈 뿐이지요.

 

 

그리고 정신병자와 범죄자는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에선 정신병자로 판정되면 살인자도 감옥 대신에 정신병원에 보내지만, 그 정신병원과 감옥 모두 사람을 가둬둔다는 점에선 다를 바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썼지만, 범죄자를 치료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좌파적 사고이고, 범죄자를 박멸대상의 세균으로 파악하는 것이 우파적 사고입니다. 그래서 우파적 경향이 강한 미국에서는 죄인이 감옥에서 형편없이 대우받고, 좌파적 경향이 강한 북유럽에서는 감옥이 호텔 같지요.

 

 

제 생각으로는, 이석기 등에 대해 실상은 제대로 밝히되, 만약 그들이 유죄로 판명된다면 그들을 감옥에 그냥 가둬두는 것보다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사상이란 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니, 그런 교육이 헛수고로 돌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자폐증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는 셈 치고, 교육적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그들을 지하로 숨어들게 만드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게 바로 북유럽과 같은 바람직한 선진국의 해법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진보적 개혁적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는 게 중요합니다. 원래 주체사상파의 등장은 뉴라이트의 주장처럼 역사교육이 잘못된 탓이 아니라, 김일성의 항일투쟁경력에 매료된 데다 남한사회의 독재정권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강을 건너면 자신을 건네준 뗏목(방편)에서 벗어나야 하는 법인데, 이석기 등은 독재정권과 투쟁할 때의 방편이었던 주체사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PD파 극소수가 사회주의 혁명론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남한사회가 바람직한 선진사회로 진입하면, 일본의 적군파나 독일의 바더마인호프(Baadermeinhof) 갱처럼 주체사상파도 자연히 사라집니다. 한국사회가 발전하면서 주체사상파는 과거에 비해 이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만, 남은 세력에 대한 대응도 한국사회의 선진화가 그 근본해법입니다.

 

 

두 번째로 Niemöller의 시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는 볼테르의 경우에 비해 조금 어려운 사안입니다. 통합진보당이 국정원 불법에 반대하는 운동에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한편에서는 개혁진보세력에 동조한 측면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국정원의 거악과 싸우기 위해선 이석기의 소악은 덮자는 사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정원의 범죄와 이석기의 범죄는 어느 쪽이 더 큰 악일까요. 보수세력쪽에서 볼 때는 당연히, 이석기의 범죄를 밝혀낸 국정원이 저지른 선거부정은 눈감아 줄 수 있는 소악일 것입니다.

 

 

반대로 통합진보당 측에서는 이석기의 발언 따위는 덮어두고 국정원 범죄대책에 총력을 기울이자고 주장해왔습니다. 일본 전국(戰國)시대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어린 시절 집단돌팔매 싸움을 할 때, 상대편과는 달리 자기편 부상자들을 열심히 치료하는 자세를 보여서 승리했습니다. 이처럼 이석기 등을 비난하지 말고 감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통합진보당 측의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 적(악) 사이의 선택 문제는 많이 등장했습니다. 중국의 공산당이 장개석 군대 및 일본군과 싸울 때 모택동은 나름대로의 전략을 개발했습니다. 그게 계급모순과 민족모순 중 항일투쟁과 관련된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임을 천명한 “모순론”입니다. 국공합작도 여기서 나온 것이지요.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원한 경우의 정당화도 공산게릴라 또는 소련이라는 거악에 비해 독재는 소악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른바 'lesser evil'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더 거슬러 올라가 춘추전국 시대의 원교근공(遠交近攻)도 여러 적들과 상대할 때의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 따져 봅시다. 우선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에 만약에 자기편의 어떤 아이가 싸우다 부상을 당한 게 아니라 싸움을 돕는 여자애의 치마를 들추었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 자기편이니까 그냥 넘어가야 할까요.

 

 

이석기 등은 국정원 개혁에 동참하긴 했지만 여자애 치마 들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우리편(진보개혁세력)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감쌀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자기 진영 사람들의 오류를 무조건 감싸는 것을 진영논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석기 등의 행위는 진영의 정당성을 해치는 해(害)진영 행위를 했습니다. 따라서 진영논리에 입각해서도 그들을 덮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꼭같은 진영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독재와 싸우고 진보를 강화한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편이지만, 북한정권의 시대착오성을 외면한다는 점에선 반대편인 수구입니다.

 

 

모택동은 장개석군대와 일본군대에 대해 정세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일본군이 사라지자 장개석 군대와 싸운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한국의 정세는 수구적인 주체사상파의 오류를 그냥 묵인할 수 없는 정세가 되었습니다. 그걸 바로잡아야 북한과의 대화-협력도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적화통일파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야 대화-협력파가 국민의 지지를 받지요.

 

 

이처럼 모택동의 모순론에는 불가피한 정세적 전략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식의 lesser evil론은 사정이 다릅니다. 미국은 이란보다 이라크가 lesser evil이라고 해서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라크를 지원했고, 이라크가 말을 잘 듣지 않자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인민들이 희생당했고, 미국의 군수산업만 이득을 챙겼지요.

 

 

독재정권을 lesser evil(소악)이라고 해서 지원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민주화되도록 돕는 것이 안정적인 반공정권이 들어설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가 타파되자 오히려 한국사회는 더 안정적인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수 있고, 북한의 위협이 별로 의미 없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모택동의 경우처럼 둘 사이에 선택해야 하는 경우와 독재정권처럼 lesser evil론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경우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석기 등의 주체사상적 오류는 진영논리나 lesser evil론으로 감쌀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참고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면, 모택동의 사상이 꼭 옳았다는 뜻은 아니고, 모택동 세력이 승리하려면 그런 정세적 선택이 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국정원의 불법행위나 이석기의 불법행위는 모두 바로잡아져야 할 대상입니다. 어느 게 더 큰 악이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 다 바로잡을 수 있고, 사실은 중장기적으로 이석기류의 주체사상이 바로잡아져야 국정원 개혁도 더 쉬어집니다.

 

 

이석기 부류는 지금 벌레, 또라이, 또는 한센병 환자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촛불 집회 등에서도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립니다. 이들은 어찌 보면 ‘사회적 약자’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지적 지체를 조롱하는 걸로 만족한다면 진정한 진보파라 할 수 없습니다. 진보파는 항상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생각하지요.

 

 

물론 제가 한진중공업 사태나 쌍용차 사태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사회적 약자의 주장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배려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석기 등의 사상은 시대착오적이고 행동은 위험성을 다소 띄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조롱하거나 규탄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그건 그들을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내몰고 더욱 지하로 잠복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어두운 역사의 산물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사상과 행위를 감싸서는 안되지만, 그들이 진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민주화보상이라 해서 과거 제적당했거나 고생한 인사들에게 보상금이 주어졌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식의 보상금보다 더 많은 자원을 이석기 같은 부류가 진실을 깨닫게 하는 데 투입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과거청산입니다. 이석기 등도 일종의 희생자가 아닙니까.

 

 

이런 사고를 가질 때 비로소 현재 한국에서 불고 있는 한국판 매카시즘(종북몰이)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좋은 글 공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