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말하다

이진숙 2013. 8. 5. 06:09

[이진숙의 `그림, 시대를 말하다`](13) 제국주의 시대의 그림들…고갱 작품의 근간은 ‘식민주의’
기사입력 2013.07.22 09:16:31

그림 ➊ 에두아르드 마네, ‘1867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9년.
“어떻게 이미 100만명의 사람이 사는 대륙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가?”

1970년대 반전운동에 앞장섰던 미국 희극배우 딕 그레고리의 말이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관한 ‘매우 정당한’ 코멘트다. 백인에겐 ‘발견’이고 영토의 확장이었겠지만, 원주민에겐 침략이고 강탈이었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이들이 탐욕에 눈이 먼 ‘잔인한 강도떼’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는 이들의 탐욕이 정점에 오른 시기였다. 이 무렵 산업혁명의 결과로 생산성이 크게 증대된 유럽 열강 대부분은 새로운 시장이 절실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축으로 했던 유럽의 힘의 균형에 균열을 가져왔다. 유럽 내 패권을 둘러싼 경쟁은 유럽 밖의 영토 확장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저개발 국가에 선진 문명의 축복을 준다’는 식민지 시혜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배경에 깔려 있던 것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찰스 다윈의 ‘사회진화론’식 사고였다. 이 시기의 그림들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둘러싼 복잡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프랑스 화가 마네의 ‘1867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그림 ➊)’은 프랑스의 팽창주의가 낳은 비극적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1867년 6월 19일 아침 멕시코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막시밀리안 황제와 충복 두 명이 총살당했다.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옹립한 일종의 괴뢰 정권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보다 산업혁명은 늦었으나 성공적인 금융정책으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해 투자국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멕시코의 채권국이었다. 멕시코 정부가 채무 이행을 못 하자 나폴레옹 3세는 그것을 빌미로 침입해 자기 입맛에 맞는 정권을 세웠다. 1861년 당선된 후아레스 대통령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3세 팽창정책에 ‘제국주의’ 용어 등장

그림 ➋ 폴 고갱 ‘타 메테테(Ta Metete)’, 1892년.
당연히 멕시코 국민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을 원치 않았다. 주변국인 미국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우려해 후아레스 멕시코 대통령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 막시밀리안 몰락의 결정적인 이유는 나폴레옹 3세의 철군 명령이었다. 유럽의 정세 변화와 상관없이 변치 않고 지원하겠다던 나폴레옹 3세는 프러시아(후에 독일을 통일)와의 전쟁 대비를 위해 국내외 프랑스군을 동원해야 했다. 1867년 프랑스군이 멕시코를 떠나자 막시밀리안은 말 그대로 끈 떨어진 뒤웅박이 됐다. 그는 곧 멕시코군에 체포됐고 바로 사형에 처해졌다.

처형 소식을 들은 마네는 처음에는 멕시코인들의 잔인함을 비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 문제의 진짜 책임은 나폴레옹 3세의 무모한 확장 정책에 있다는 여론에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그림의 초본에 등장했던 멕시코 군대를 두 번째 버전에서는 모두 프랑스 군대로 바꿨다. 냉정한 표정으로 장전하고 있는 프랑스 중사의 콧수염과 날렵한 코는 나폴레옹 3세의 모습 그대로다.

마네는 이 작품의 전체 구도를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서 빌려왔다. ‘1808년 5월 3일’은 1808년 스페인을 침공한 나폴레옹 군대의 만행을 고발하는 그림이다. 나폴레옹 1세는 스페인 왕정의 분열을 틈타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위에 앉혔고 스페인 왕위 정식 계승자는 투옥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스페인 민중들을 잔혹하게 사살했다.

나폴레옹 3세는 삼촌뻘에 해당하는 나폴레옹을 평생 롤모델로 삼았고 나폴레옹을 따라 유럽 내 프랑스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팽창 정책을 추구했다.

나폴레옹 3세의 팽창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것이 ‘제국주의’라는 용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이내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했다. 19세기 말에는 신흥국인 이탈리아, 독일, 일본이 가세했다. 이들의 아시아, 아프리카 침탈과 지배는 경제나 정치적인 것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국가의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을 부정하는 심리적, 문화적 지배를 통해서도 이뤄졌다. 미술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미술사가 그리젤다 폴록은 폴 고갱의 작품에 대해 ‘식민주의와 관광주의의 영향 아래’ 그려졌다고 말한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식민지 마을을 그대로 재현하고 원주민을 데려다 전통 수공예품 만들기 시연과 민속공연 등을 벌였다. 고갱은 이에 크게 영감을 얻어 타히티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1891년 유럽 문명을 넘어서는 보다 순수하고 원시적인 어떤 것을 찾아 떠났다. 두 달여간의 항해 끝에 도착한 타히티는 그러나 그가 꿈꾸던 곳이 아니었다. 타히티는 번잡스러운 조그만 식민지 항구였을 뿐이다.

1892년에 그린 ‘타 메테테(그림 ➋)’는 고갱이 본 식민지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림 속에는 유럽식 드레스를 입은 다섯 명의 아가씨들이 마치 ‘진열대의 물건들처럼 나란히’ 앉아 있다. 옆에선 원주민 복장을 한 아가씨가 경계의 눈으로 이들을 쳐다본다. 뒤에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아 운반하는 타히티 남자들이 보인다. 타 메테테는 ‘시장’이라는 뜻의 타히티 말인데 ‘시장에 상품으로 나온 여성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섯 명의 아가씨들이 왜 유럽식 복식을 하고 있는지 명확해졌다. 그들의 성을 매수하는 사람은 원주민 남자가 아니라 유럽 선원들이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식민지 건설은 유럽인이 주장했던 것처럼 타히티에 문명의 축복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매춘과 매독 같은 불행도 함께 줬다.

고갱은 타히티 오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고 마침내 원하던 순수한 낙원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타히티 사람들은 온통 말이 없고 무표정하다. 소통되지 않는 사람들의 우울한 수동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고갱 역시 ‘원시적인’ 타히티에 문명의 시혜를 베푼다는 당시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타히티 그림으로 서양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을 연 대가로 평가를 받았으니 혜택을 받은 것은 오히려 고갱이라고 해야 옳다.

20세기 들어 여러 양심적인 학자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를 낸다. 문화사가 피터 N. 스턴스는 어떤 한 문화가 ‘우월해’ 보일 수는 있지만 그 경우는 “그 문화의 관념과 양식들이 특히 군사적, 경제적 성공과 관련돼 있다는 것일 뿐, 그 문화가 원칙적으로 더 올바르다거나 아름답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도 36년간의 혹독한 일제 강점기를 거쳤다. 안타깝게도 그때 잃어버린 문화적 자부심을 아직도 되찾고 있지는 못한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