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말하다

이진숙 2013. 8. 25. 10:36

[이진숙의 `그림, 시대를 말하다`](15) 밀레와 고흐|‘농민’ 새로운 사회적 존재로 등장하다
기사입력 2013.08.19 09:09:03 | 최종수정 2013.08.19 14:59:34

그림 ➊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줍기’, 1857년.
“요즘은 사람이야말로 모든 것의 뿌리라는 생각이 든다.” 1888년 4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년)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그해 2월 고흐는 파리를 떠나 조금 더 남쪽인 아를에 도착했다. 따뜻한 아를의 봄은 파리에서 피폐해졌던 고흐의 몸과 마음을 위로해줬다. 2년 후 삶을 마감하기까지 고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도시의 때가 묻지 않은 순박한 아를에서 고흐는 다시 인간적인 가치를 떠올렸다. 특히 그는 농민들의 정직한 삶을 사랑했고 평생 ‘농부의 화가’ 프랑수아 밀레(1814~1875년)를 숭배했다.

밀레는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에서 가난한 농부처럼 살며 ‘만종’ ‘이삭줍기(그림 ➊)’ 같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그렸다. 초상화로 생계를 이어가던 밀레는 1848년 살롱전에서 ‘키질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으로 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졌다. 노동을 하고 있는 농민을 그린 밀레의 작품은 1848년 혁명의 결과물이었다. 1848년의 혁명은 역사상 최초로 농민과 노동자를 그 시대의 인간상으로 부각시켰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난 뒤 등장한 왕정은 무능력했다. 정치적인 혼란을 거듭했다. 부정부패 척결과 보통선거권 요구 등 도처에서 빗발치는 개혁 요구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유권자가 되고 싶으면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부자가 돼라”는 답변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1848년 2월 노동자와 학생들 시위에의 잔혹한 대처로 민심은 다시 들끓었다. 마침내 6월 23~26일간 폭동이 발생해서 3000여명의 사상자들이 발생하고, 1만2000명의 사람들이 체포되는 사태에 이르게 됐다.

결국 1848년 새로운 공화제 헌법이 제정돼 보통선거가 보장됨으로써 농민들도 처음으로 선거권을 갖게 됐다. 농민들이 참여한 선거 결과는 뜻밖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후보 루이 보나파르트가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됐다. 나폴레옹 시절의 영광을 기억하는 농민들이 그의 조카를 선택한 것이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삼촌과 똑같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1852년 황제가 됐다.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기 시작이다. 1848년 혁명으로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농민’이 등장한 것이다.

밀레는 노동에 집중하고 있는 농민의 모습을 기념비적으로 그렸다. 이전까지 회화에서 농민들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밀레의 그림 속에서 농민들은 진지함과 성실함 그리고 인간적인 존엄함을 구현한 인물들로 등장했다. 밀레는 정치에 관심 없는 보수적인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농민을 그렸기 때문에 사회주의적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오히려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밀레는 평생 농민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아름다운 전원 풍경 속에서 노동을 하는 농민들을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 꿈은 성공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했다.

밀레의 대표작인 ‘이삭줍기’에서도 이런 현실과 꿈의 괴리를 볼 수 있다. 밀레가 그린 이 여성들은 농민들 중에서도 최극빈층 소작농이다. 그림 멀리에는 추수한 곡식들을 모두 마차에 싣고 옮겨가는 지주 측 사람들이 보인다. 땅에 떨어진 낟알들을 주워가는 것은 허용되지만, 감시관의 통제 아래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림 속 저편에는 말을 탄 감시자가 보인다.

사실 밀레의 그림은 편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이 ‘이발소 그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이 그림에 담긴 농민에 대한 밀레의 애정 때문이다.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산업사회의 노동자 계급으로 몰락할 것임을 밀레는 예감하고 있었기에 그림에는 남모르는 애절함이 담겨 있다. 밀레의 그림 속에는 노동의 숭고한 가치에 대한 긍정이 있었다. 밀레의 청교도적인 자세는 화려한 파리에서보다 한창 국가 건설기에 있던 미국에서 더 사랑받았고 밀레의 많은 그림이 미국으로 팔려나갔다.

(위)그림 ➋ 고흐, ‘해 질 녘의 씨 뿌리는 사람’, 1888년, (아래)그림 ➌ 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50년.
농민 몰락 예감…남모르는 애절함

고흐에게 밀레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고흐는 소박한 농민들의 삶에서 인간적인 가치를 찾아나갔다. 밀레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서 그린 고흐의 ‘해 질 녘의 씨 뿌리는 사람(그림 ➋)’에서는 해 질 녘이라지만 남프랑스의 강렬한 태양이 작열하고 있다. 노란 태양은 농부의 머리 바로 위에서 빛을 내뿜고 있어서 마치 중세 성인의 후광처럼 보인다. 고흐는 이 무렵 강렬한 노란색과 파란색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다. 찬란한 노랑은 황금의 색이며, 파랑은 영원의 색이다. 중세 화가들이 신의 세계를 위해서 사용했던 성스러운 색들을 고흐는 소박한 사람들과 자연 묘사에 고스란히 바쳤다. 그는 이런 선명한 색채를 통해 ‘영원’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때 혁명의 씨를 뿌리는 것으로 오해받았던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그림 ➌)’은 고흐에게 와서는 삶의 영원성에 대한 꿈을 뿌리는 사람이 됐다.

아를에 도착하기 전 1년 6개월간의 파리 생활은 고흐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19세기 말 더욱 가속화된 근대화, 도시화, 기계화 속에서 고흐는 어떤 긍정적인 가치도 발견하지 못했다. 파리는 이제 에밀 졸라가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1883년)’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교회보다 백화점에 가서 위안을 구하는 곳이 됐다. 고흐가 생각했던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사람은 헛된 욕망에 들끓는 도시의 인간군상이 아니라 보다 소박한 기층민중이었다. 그들은 손의 정직함을 아는 사람들이며, 인간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고흐의 경우뿐 아니라 기층민중에 대한 주목은 19세기 말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 중요한 흐름이 돼 가고 있었다. 산업화가 더 빨리 진행됐던 영국에서는 존 러스킨, 윌리엄 모리스 등이 일찍이 ‘민중 예술’을 주창하고 나섰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1863년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문화·예술계에도 커다란 영감을 줬던 것이다. 더 이상 그들은 경멸받는 하층민들이 아니라 ‘민중’ ‘노동자’ ‘농민’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사회, 문화의 중요한 주체로 등장했다. 19세기 말부터 형성된 이런 흐름들은 계속 이어져 20세기에는 마침내 대중문화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다.
한 때 밀레는 "위험천만한 혁명가"로 분류되었다죠.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소재 자체가 혁명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게 분류되었다니 .... 참 아이러니합니다.

예전에 미술카페를 들락날락거릴 때 밀레 <이삭 줍기>와 들라크루아 등의 몇몇 그림을 올려놓고 이 중에서 가장 혁명적이라고 규탄받았던 그림은?, 식으로 퀴즈를 낸 적이 있는데 ...... 정답을 맞추고 말고를 떠나서..

어떤 분이 찢어지게 가난하던 어린 시절 직접 '이삭 줍기' 했던 경험을 적었더라구요. 말이 좋아 이삭이지 .... 하루 종일 뒤져도 한바구니가 안나오는데, 그 한 바구니의 이삭을 줍기 위한 노동이 그렇게 힘들더랍니다. 그분이 맞추더라고요. "정답은 아니겠지만, <이삭 줍기>의 고통을 아는 사람에겐 어쩌면 혁명이란 것이...." 라는 식으로요.

한마디로... 띵~~ 했더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