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얼굴

이진숙 2014. 10. 11. 09:26

[Why] [권력과 얼굴] 스페인 무적함대 물리친 女王 '해가 지지 않는 英國'을 세우다

 

입력 : 2014.10.11 03:01

해양 강국 만든 엘리자베스 1세
신대륙 건설하며 해외교역 꽃피워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재위 1558~1603)의 통치 시절 잉글랜드는 세계 최고의 해상 강국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여왕 즉위 30년이 되는 해인 1588년, 오랫동안 반목 상태에 있던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려진 '함대 초상화'에는 여왕의 성공과 야망이 담겨 있다.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이어받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섯 번의 결혼으로 유명한 헨리 8세. 첫 번째 아내 캐서린에게서는 메리 1세를,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에게서는 엘리자베스를 얻었다.남동생 에드워드 6세가 요절하자, 두 자매가 연이어 왕위에 올랐다.

 

 

작가 미상, ‘함대 초상화(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1588. / 이진숙 제공  

 

메리 1세(1516~1558, 재위 1553~1558)는 종교개혁을 일으켜 영국 국교회를 세웠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의 혈통답게 구교(舊敎)를 신봉했고, 신교도들을 잔인하게 처형해서 '피에 젖은 메리(Bloody Mary)'라는 끔찍한 별명을 얻었다. 그녀는 가톨릭 수호국인 스페인 황제 펠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재정 파탄과 극렬한 종교적 대립으로 분열된 나라였다.

통치 초기 엘리자베스 1세는 현명한 군주답게 대립으로 치닫는 신·구교 양편을 통합의 지혜로 이끌었다. 종교를 초월해서 지혜로운 사람을 등용했고, 소모적인 종교 갈등을 마무리 짓고 '긍정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메리 1세가 덧없이 죽자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처제였던 엘리자베스 1세에게 구혼을 해온다. 그러나 그 뻔한 속내를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 1세는 그 청혼을 단호히 거절했다. 잉글랜드를 호시탐탐 노리던 펠리페 2세는 결국 1588년 종교적·정치적 이유를 빌미로 공격을 감행했다. 3000명의 병사와 2500문의 대포를 실은 130척의 스페인 무적함대가 위용을 자랑하며 진군해왔다. 턱없는 열세에도 잉글랜드의 함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여왕의 왼편 창에는 승리한 잉글랜드의 함선들이, 오른편 창에는 침몰하고 있는 스페인 함선들이 보인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동원한 것은 해적 출신 드레이크와 호킨슨이 이끄는 함대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들은 해적에서 국민 영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함대 초상화'는 세 개의 버전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드레이크가 특별히 주문해서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여왕의 의자에 조각된 황금 인어는 뱃사람들을 죽음으로 유인하는 여성을 상징한다. 이 전투로 100여 척의 전함을 잃은 스페인은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 반면 세계 최강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쳐 자신감을 얻은 잉글랜드는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지구본 위 여왕의 손이 놓인 곳은 신대륙에 건설된 식민지 거점 지역인 버지니아다.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본격화된 해외 교역과 식민지 건설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절정을 이루어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리게 된다.

여왕은 치세를 이루었지만 그 말년은 긍정적인 평가만을 받을 수는 없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던 여왕의 말년은 오만한 청년 에섹스 백작과의 스캔들로 얼룩졌다. 또 신흥 사업의 독점권을 측근들에게 무분별하게 나눠주어 국민의 원성을 샀다.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통치권은 결국 먼 친척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로 넘어갔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공식적으로 하나가 되어 마침내 대영제국이 탄생한다. 미혼의 여왕이 후손을 남기지 않아 역설적으로 대영제국 탄생의 근거를 만든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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