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얼굴

이진숙 2014. 11. 8. 08:57

 

 

드미트리 레비츠키, 정의의 여신의 사원의 입법자,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화, 1783,

 

역대 러시아의 왕들 중에 대제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은 딱 두 명이다. 러시아 근대화와 서구화를 추진했던 표트르 대제(1672-1725 재위 : 1682~1725 )와 예카테리나 2(1729-1796. 재위: 1762-1796)이다. 두 대제는 경제 문화의 발전에 큰 힘을 쏟았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의 외손주 며느리였다. 여제의 집권기는 러시아 귀족들의 황금 시대였다. 네바 강가에는 화려한 바로코 풍의 겨울 궁전(지금의 에르미타쥐)이 들어섰다. 프랑스의 베르사이유를 능가하고 싶은 욕망의 발로였다. .

 

위대한 두 왕,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의 공통점은 공적인 부분에서 훌륭한 업적과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괴한 사생활이 쌍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표트르 대제는 아들의 죽음에,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의 죽음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인 표트로 3세가 왕위에 오른지 180일만에 쿠테타를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무능력하고 소심한 표트로 3세는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살려만 달라고 애걸했으나 쿠테타가 일어난 지 8일만에 결국 시체로 발견되었다.

 

프로이센의 몰락한 귀족 집안의 출신인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사람도 아닌데다가, ‘남편을 죽인 음탕한 여자라는 소문으로 집권초기 뒷말이 많았다. 러시아의 어떤 왕보다 문화예술의 효용성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던 그녀는 후의 나폴레옹만큼이나 이미지 정치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초상화와 초상조각을 남겨서 유능한 통치자로서의 정치적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축해 나갔다.

 

1783년 집권 20년차에 접어든 여왕은 자신의 업적과 정치철학을 하나의 초상화로 요약했다.

 

여제의 왼편에 보이는 거대한 선박은 그녀의 군사적 야망을 보여준다. 여제는 서구로 진출할 부동항 확보라는 표트르 대제의 뜻을 이어 흑해를 장악하기 위해 크림 전쟁을 발발했다. 시베리아쪽으로 동진해서 알래스카를 차지했고 중부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폴란드 분할에 참여했다. 이런 군사적 팽창이 가능했던 것은 여왕의 최측근에 오를로프 장군이나 포템킨 장군같은 유능한 군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여왕의 연인들이자 정치적 파트너들이기도 했다 

오를로프의 다이아몬드

 

여제는 자신을 지원한 군인들을 정부고위직에 임명하고 대단한 재물과 특권을 주었다. 특권을 얻은 만큼 여제를 향한 충성도도 높았다. 오를로프 장군은 후에 오를로프의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이 붙은 189캐럿의 거대한 다이아몬드를 여제에게 선물해주었고, 이 다이아몬드는 여제의 왕홀을 장식했다. 포템킨 장군은 정복지에 평화로워 보이는 가짜 마을을 설치해서 여제를 기쁘게 해주었다. 여기서 무언가를 은폐하기 위해 꾸며내는 겉치레를 의미하는 포템킨 마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여제는 확실히 대외적인 부분에서는 강한 러시아를 만들었고, 차르의 절대적인 권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반면 그 만큼 큰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다. 그녀의 밑에 쌓여있는 계몽주의 철학서적이다. 스스로 계몽군주로 차처하던 여제는 러시아로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디드로를 초청해서 토론회를 갖기도 하였다. 볼테르와는 지속적인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우정을 자랑했다.

 

그러나 만인의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계몽주의 철학서는 여제의 지적인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1767년 황제칙령을 통해 여제는 귀족의 특권은 더욱 옹호하고 농노제를 강화화했다. 결국 1772년에는 푸카초프의 난이 일어나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었다. 볼테르는 농노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지만, 여제는 더 이상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림 속에서 여제는 정의의 여신에게 장미향을 피워 경배를 바치는 여성 입법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 2년 뒤인 1785년, 그녀가 발표한 것은 정의와 거리가 먼  러시아 귀족의 권리와 자유, 특권에 관한 조서였다. 로마노프 왕조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이 서적들을 밟고 있는 것처럼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계몽주의 서적은 금지가 되었고, 자유와 평등은 책 속에서 현실로 나오지 못했다. 귀족 권한의 편파적인 강화는 결국 사회를 극단적인 불평등 상태로 몰고 갔으며, 결국 러시아는 19세기 중반까지 농노제가 완고하게 존재하는 후진국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