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얼굴

이진숙 2014. 12. 20. 13:24

Why] [권력과 얼굴] 舊敎의 나라 프랑스에서… 최초로 新敎徒 왕이 된 '앙리 4세'

  • 이진숙·'러시아 미술사' 저자

     

  • 입력 : 2014.12.20 03:00

    "파리는 미사를 거행할 만한 가치가 있다." 프랑스의 왕이 된 앙리 4세(1553~ 1610, 나바라의 왕 재위 1572~1610, 프랑스의 왕 재위 1589~1610)가 1594년 파리로 입성하면서 한 유명한 말이다. 이 한 마디에 그의 야망과 애국심이 압축돼 있다. 왕이 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종교를 버렸다. 그리고 더 큰 것을 얻었다. 바로 국민의 사랑과 신망이었다.
     

     

    루벤스의 1627년 작 ‘파리에 입성하고 있는 앙리 4세' (부분). / 이진숙 제공
    앙리 4세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를 연 첫 번째 왕으로, 원래는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끼어 있던 조그만 왕국 나바라의 왕이었다. 외할머니가 프랑스 공주인 덕에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으며, 그 역시 프랑스 공주를 첫째 왕비로 맞이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신교도와 구교도 간 대립으로 격렬한 내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1570년 마침내 내전을 종결짓기 위해 양자 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양자 간 화해의 제스처는 신교도인 나바라의 왕자 앙리와 구교도인 프랑스 공주의 결혼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화해는 쉽지 않았다. 종교가 다른 두 가문의 결혼은 위험천만한 실험이었다.

    그의 첫 번째 결혼식은 '피의 결혼식'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결혼식이 있은 지 채 1주일도 되지 않아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에 왔던 신교도 지도자가 암살된다. 여기서 시작된 학살이 전국으로 퍼져 두 달도 안 돼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새신랑 앙리 역시 3년 넘게 프랑스 궁정의 볼모가 되어 잡혀 있다가 겨우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미소 지었다. 마땅한 후사를 찾지 못한 프랑스의 왕 앙리 3세는 처남인 앙리 4세에게 프랑스 왕위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구교도 국가에 신교도 왕이 탄생했다. 온 나라가 들끓기 시작했다. 프랑스 왕이 되었지만 그는 파리로 입성하지 못했다. 10대 때부터 종교로 인한 전쟁에 수차례 참여하면서, 내전의 고통을 겪었던 앙리4세는 결단을 내린다. 그는 자신의 종교를 버리고 국민 대다수가 믿는 구교로 개종한다. 개종 다음 해인 1594년, 루벤스가 그린 그림에서처럼 앙리 4세는 프랑스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개선마차를 타고 파리에 입성했다.

    앙리 4세는 상처받은 국민을 끌어안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1598년 낭트칙령(edit de Nante)을 발표해 신교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낭트칙령은 인권과 자유 발전의 중요한 한걸음이었다. 위그노라고 불리는 프랑스 신교도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했다. 이들이 불안에 떨지 않고 생업에 매진할 수 있게 되면서 직물 산업을 포함, 상공업 분야가 꾸준하게 발전하게 된다.

    농민에게는 세금을 낮춰주고 대신 귀족의 세(稅) 부담을 늘렸다. 이는 봉건적인 계급 관계를 해체하고 새 시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앙리 4세는 국민의 존경을 받았지만, 화해 정책에 불만을 품은 구교도의 손에 암살당한다. 중립적인 태도로 국정을 이끌었던 앙리 4세가 죽자 프랑스는 다시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훗날 국민은 그를 앙리대왕(Henri the Great), 혹은 선량왕이라고 부르며 사랑과 존경을 표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