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미술

이진숙 2014. 12. 21. 08:11

롤리타는 없다 그저 나쁜 남자의 음험함만 있을 뿐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5> 소설 『롤리타』와 발투스의 그림

이진숙 | 제406호 | 20141221 입력
 

 

발투스의 ‘꿈꾸는 테레즈 Thérèse Dreaming’(193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소설은 이런 시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문장은 전율이 일만큼 감각적이다. 그는 롤리타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고, 눈으로 보고, 육체와 영혼으로 동시에 느끼고, 혀끝으로 맛본다. 이 정도로 감각이 극대화되면, 정신은 길을 잃게 마련이다. 나보코프의 『롤리타』(1955)는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가장 사악한 텍스트다. 재판을 앞둔 한 ‘소아성애자’의 고백이라는 형식을 빌린 이 소설 1부에서 어린 소녀를 탐하는 음란마귀는 황홀한 언어의 몸을 얻고 독자를 도착적인 기쁨으로 가득 찬 위험한 세계로 이끈다.

소설의 주인공 험버트험버트는 “키 147cm의 12살짜리 소녀”를 사랑했다. 10대 나이에 죽은 첫사랑을 잊지 못한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님펫(님프를 귀엽게 일컫는 말)을 갈구하게 된다. 님펫은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조금은 고양이를 닮은 광대뼈의 윤곽선, 가냘프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팔다리”를 가진 어린 소녀들을 일컫는다.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야릇한 기품, 종잡을 수 없고 변화무쌍하며 영혼을 파괴할 만큼 사악한 매력”을 겸비하고 있어야 한다.

버르장머리 없는 자세마저 매혹적
소설보다 먼저 그려진 발투스의 그림 ‘꿈꾸는 테레즈’(1938)는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의 한 대목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걸핏하면 따분하다는 듯이 축 늘어지는 버릇이 생긴 로(롤리타)는 빨간 스프링 의자…야외용 의자 따위에 맥없이 널브러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 버르장머리 없는 무심한 자세마저 너무 매혹적이라는 게 문제다.

그림 속 소녀도 의자 위에 무릎을 세우고 방심한 듯한 쿠션에 기대 잠깐 잠이 들었다. 의자 아래는 배고픈 고양이가 접시의 우유를 핥고 있다. 그림의 위험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고양이가 핥고 있는 접시는 털로 뒤덮여 있다. 이것은 M. 오펜하임의 ‘털로 덮인 접시와 찻잔’(1936)이라는 작품을 연상시키는데, 이 작품은 구강 성교를 연상시키는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털에 덮힌 접시-고양이의 할짝거림-다리 사이로 보이는 흰 속옷-잠든 소녀의 묘한 표정-탁자 위의 화병들의 치솟은 형태. 그림 속 소녀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장면을 보고 있는 남자들이 무슨 꿈을 꾸는지는 명확하다.

1930년대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날개 아래 모든 문화가 놓이던 시절. 리비도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으로 간주됐다.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거꾸로 도덕과 관습 같은 슈퍼에고(Super Ego)의 통제가 미약할 수 있다. 화가 발투스는 오래된 남성적인 무의식적 욕망을 아이들의 리비도와 결합시켜 독특한 그림을 그렸다. “어리지만, 발칙한 것”들의 적나라한 이미지가 탄생했다.

롤리타 같은 ‘님펫’은 “꿈 많은 천진함과 섬뜩한 천박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천진하지 않으면 매력이 없고, 천박하지 않으면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해서 성적욕구를 채우는데 죄책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남자 주인공도 자기를 먼저 유혹한 것은 발칙한 어린 롤리타였다고 너스레를 떨며 자랑삼아 늘어놓는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자고 이제 만 열세 살도 안된 롤리타는 의붓아버지인 아저씨와 이상한 관계에 빠지게 되었는가? 들어보면 사정이 딱하다. 롤리타의 엄마는 험버트험버트와 결혼했으나, 두 달 만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사실 롤리타 엄마보다 롤리타에게 관심을 더 가지고 있었던 험버트험버트는 처음에는 엄마의 죽음을 숨기고, 엄마의 병원으로 데려다 주겠다며 롤리타를 차에 태워 어디론가 떠난다. 그렇게 차에 오른 롤리타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아저씨와 미국 전역의 모텔을 전전하는 2년간의 긴 여행을 하게 된다. 돌봐줄 사람도 갈 곳도 없는 “천애고아”, “혈혈단신 외톨이” 롤리타는 얼마 전에 의붓아버지가 된 아저씨를 따라나서는 것 말고는 아무 방법이 없었다.

사랑보다 사탕을 더 좋아하는 어린 아이
책의 1부에는 오로지 롤리타라는 님펫에 매혹된 험버트험버트의 기나긴 횡설수설이 이어진다. 그러나 책의 2부로 넘어오면서 그 화려한 미사여구 속에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롤리타는 “아저씨가 나를 강간했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는 사랑이라고 주장했지만 어린 롤리타는 “짐승 같은 아저씨”에게 “강간”을 당한 것뿐이었다. 그는 밤마다 롤리타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고 실토한다. 그 울음 소리를 분명히 들었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의 욕망은 진실을 무시했다. 사실 롤리타는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험버트험버트는 “아무리 사랑을 해줘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이 바보는…열정적인 사랑보다 달디단 사탕을 더 좋아하는 어린 아이일 뿐이었다”라고 표현한다. 왜 아니겠는가?

롤리타는 모텔을 전전하는 “더러운 생활”을 끝내고 보통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갈구했다. 폭력과 협박, 거짓말이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거기엔 사랑이란 없었다.

롤리타는 결국 ‘탈출’에 성공해 떠난다. 하지만 3년 뒤 다시 만난 롤리타는 님펫의 사랑스런 외모를 잃어버렸다. 안경을 쓰고 만삭이 된,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가 되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던 17살의 롤리타. 엄마가 남긴 유산, 학창시절의 추억, 소녀다운 꿈과 일상적인 행복, 이 모든 것을 롤리타에게서 빼앗아 간 사람은 바로 그녀와 서로 “사랑했다”라고 내내 주장한 험버트험버트 자신이었다. 이제 화려한 언어의 유희는 끝나고, 초라하고 칙칙한 현실이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롤리타는 17살의 크리스마스날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그는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나의 롤리타는 내가 그녀에게 입힌 더러운 정욕의 상처를 절대로 잊지 못할 터였다.” 그는 소녀를 롤리타라고 불렀지만 그녀의 풀네임은 돌로레스 헤이즈(Dolores Haze)다. 이 이름은 “서글프고 아련한(dolorous and hazy)”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서글프고 아련한” 롤리타는 이중으로 박탈된 존재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를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어리다는 이유로 함부로 다루어지고, 어리다는 이유로 발언의 신뢰도도 의심받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남자의 욕망과 모함 숨김 없이 드러내
소설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나 소녀들은 모두 성인 남성들의 관음증적인 시선에 포획되어 원치 않는 ‘예술’이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어린 여자아이들에게는 ‘예술’조차 감옥이 되어버렸다. 그림도 소설도 모두 ‘아저씨’들의 작품일 뿐이다.

서양 문화사에는 이렇게 어른 남성들의 관점에 의해 모함당한 불쌍한 소녀들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 소녀들이 진짜로 “어리지만, 발칙한 것”들이었을까? 나보코프와 발투스의 위대한 점을 굳이 찾으라면, 바로 그들은 그 욕망과 모함의 과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나보코프와 발투스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롤리타’는 없다. 험버트험버트가 꿈꾸는 “온통 장밋빛과 꿀빛”의 롤리타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 다만 어른 남성의 비비 틀린 삐뚤어진 욕망과 그로 인해 청춘과 삶을 잃어버린 가련한 소녀가 있을 뿐이다.